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預流者(sotāpanna)
만약 지금 인도 사람이 당신에게 宗敎가 무엇인가 묻는다면
아마 그 질문에서 '宗敎'란 '다르마(dharma / dhārma)'에 대한 번역(/통역)이지
서양 종교철학에서의 神 등에 대한 질문 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큰 가르침'에 대한 '믿음' 혹은 세계관/인생관에 대한 질문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본인이 불교도이면 當然하게 받아들이며, 행위의 규범이 되며, 마땅히 진리라고 수지하고 있는
불교도의 dharma는
어떤 '信'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見'을 지니고(dharati)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즉 森羅萬象에 대해 어떤 見-解을 지니는 지에 대한 '인사말'이다.
마치 우리 한국인이 처음 만난 사람에게, 고향이 어딘지? 식사는 했는지? 묻듯이.
預流者란 得道하신(正見 - 8正道라는 길에 드신) 분.
1. <佛法僧-(施)戒(天)>을 받아들이는 사람. 이른바 믿음(信).
2. 이렇게 되기 위해 성인을 믿고, 법을 듣고,
바르게 주의를 기울임(아는 만큼 이해하여 받아들임), 이해한 만큼 따라 (수)행함.
3. 그래서 알게 되고 보게 됨(知見) = 의심(의문)이 없음 =
(욕계에 대해서는) 敎學적으로 대부분 이해함.
특히 유신견(사견), 계금취(사견)을 버리고 바르게 봄(正見) - 무상/고/무아(특히 5온)
욕계에서 생겨나는 66법 등을 知見(특히 5온)
4. 그 결과 (유학의) 8正道라는 흐름(流)에 듦. 악처에 태어나는 결박을 解脫(3界 解脫은 아님)
sotāpanno, sotāpatt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o
예류자, 예류과를 실현하기 위해 도닦는 자
[ cattāri sotāpattiyaṅgāni --
sappurisasaṃsevo, saddhammassavanaṃ, yonisomanasikāro, dhammānudhammappaṭipatti.
(13) 네 가지 예류도를 얻기 위한 구성요소(sotāpattiyaṅga) -
바른 사람을 섬김, 바른 법을 경청함,
지혜로운 주의, [출세간] 법에 이르게 하는 법(dhamma-anudhamma)을 닦음
“cattāri sotāpannassa aṅgāni.
idhāvuso, ariyasāvako buddhe aveccappasādena samannāgato hoti —
‘itipi so bhagavā arahaṃ sammāsambuddho vijjācaraṇasampanno sugato lokavidū
anuttaro purisadammasārathi satthā devamanussānaṃ buddho, bhagavā’ti.
dhamme aveccappasādena samannāgato hoti —
‘svākkhāto bhagavatā dhammo sandiṭṭhiko akāliko ehipassiko
opaneyyiko 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ī’ti.
saṅghe aveccappasādena samannāgato hoti —
‘sup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ujup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ñāyap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sāmīcip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yadidaṃ cattāri purisayugāni aṭṭha purisapuggalā,
esa bhagavato sāvakasaṅgho āhuneyyo pāhuneyyo dakkhiṇeyyo
añjalikaraṇīyo anuttaraṃ puññakkhettaṃ lokassā’ti.
ariyakantehi sīlehi samannāgato hoti akhaṇḍehi acchiddehi asabalehi
akammāsehi bhujissehi viññuppasatthehi aparāmaṭṭhehi samādhisaṃvattanikehi.
(14) 네 가지 예류과를 얻은 자의 구성요소(sotāpannassa aṅga) - 도반들이여,
①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그분 세존께서는 아라한[應供]이시며, 완전히 깨달은 분(正等覺]이시며,
영지와 실천이 구족한 분[明行足]이시며, 피안으로 잘 가신 분[善逝]이시며,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世間解]이시며, 가장 높은 분[無上士]이시며,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調御史大] 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天人師] 이시며, 부처님[佛]이시며,
세존(世尊)이시다.'라고 부처님께 움직이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닙니다.
②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고,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법에 움직이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닙니다.
③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잘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바르게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참되게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합당하게 도를 닦으니,
곧 네 쌍의 인간들이요[四雙] 여덟 단계에 있는 사람들[八輩] 이시다.
이러한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공양받아 마땅하고, 선사받아 마땅하고, 보시받아 마땅하고,
합장받아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福田]이시다.'라고
승가에 움직이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닙니다.
④ 성자들이 좋아하며 훼손되지 않았고 뚫어지지 않았고 오점이 없고 얼룩이 없고
벗어나게 하는 것이고 지자들이 찬탄하는 것이고 들러붙지 않는 것이고
삼매에 도움이 되는 계를 구족합니다.]
[ atha kho āyasmā sāriputto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
ekamantaṃ nisinnaṃ kho āyasmantaṃ sāriputtaṃ bhagavā etadavoca —
“‘sotāpattiyaṅgaṃ, sotāpattiyaṅgan’ti hidaṃ, sāriputta, vuccati.
katamaṃ nu kho sāriputta, sotāpattiyaṅgan”ti?
사리뿟따여, 예류도를 얻기 위한 구성요소165)가 설해졌다.
사리뿟따여, 어떤 것이 예류도를 얻기 위한 구성요소인가?
165) 여기서 '예류도를 얻기 위한 구성요소'는 sotāpattiy-aṅga(예류자의 구성요소)를 옮긴 것이다. 그런데 위「디가유 경」(S55:3) §7과 본 상윳따(S55)의 여러 곳에서는 꼭 같은 술어인 sotāpattiy-aṅga를 '예류과를 얻은 자의 구성요소'로 옮겼다. 전자는 예류도를 얻기 위한 준비단계의 요소들로 본 것이며, 후자, 즉 불 · 법 · 승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계를 지님의 넷은 예류과를 얻은 자들이 갖추고 있는 구성요소로 본 것이다. 역자가 같은 술어를 문맥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옮긴 것은 다른 곳의 경문과 주석서를 참고했기 때문이다.(본서 제2권 「다섯 가지 증오와 두려움 경」 1(S12:41) §5의 주해를 참조할 것.)
『디가 니까야』「합송경」(D33) §1.11 (13)에도 본경에 나타나는 '참된 사람을 섬김, 정법을 배움,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 [출세간]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음'의 넷이 sotāpattiy-aṅga라는 이름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이곳의 주석서는 “원문 sotāpattiyaṅga란 예류도를 얻기 위한 구성요소라는 뜻이다(sotāpatti-maggassa paṭilābha-kāraṇānīti attho).”(DA.iii.1020)라고 설명을 달고 있다. 그리고 후자 즉 불 · 법 · 승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계를 지님의 넷은 그곳 (14)에서 네 가지 '예류[과]를 얻은 자의 구성요소(sotāpannassa aṅga)'로 나타나고 있다. 즉 전자는 예류도를 얻기 위한 준비단계의 요소들이라는 뜻이며, 후자는 이미 예류과를 얻은 자들의 구성요소라는 뜻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제2권 「다섯 가지 증오와 두려움 경」 1 (S12:41) §5의 주해도 참조할 것. 한편 아래 「예류과 경」 등(S-55:55~74)에서는 참된 사람을 섬김, 정법을 배움,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 [출세간] 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음'의 네 가지를 닦으면 일래과와 불한과와 아라한과와 큰 통찰지 등도 얻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sappurisasaṃsevo hi, bhante, sotāpattiyaṅgaṃ, saddhammassavanaṃ sotāpattiyaṅgaṃ,
yonisomanasikāro sotāpattiyaṅgaṃ, dhammānudhammappaṭipatti sotāpattiyaṅgan”ti.
세존이시여, 참된 사람을 섬기는 것은 예류도를 얻기 위한 구성 요소입니다.
정법을 배우는 것은 예류도를 얻기 위한 구성요소입니다.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은 예류도를 얻기 위한 구성요소입니다.
[출세간] 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는 것은 예류도를 얻기 위한 구성요소입니다.
“‘soto, soto’ti hidaṃ, sāriputta, vuccati. katamo nu kho, sāriputta, soto”ti?
“ayameva hi, bhante,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soto,
seyyathidaṃ — sammādiṭṭhi, sammāsaṅ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sammāsamādhī”ti.
사리뿟따여, '흐름, 흐름'이라고들 한다. 사리뿟따여, 어떤 것이 흐름인가?
세존이시여,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팔정도]가 바로 흐름이니,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입니다.
“‘sotāpanno, sotāpanno’ti hidaṃ, sāriputta, vuccati. katamo nu kho, sāriputta, sotāpanno”ti ?
“yo hi, bhante, iminā ariyena aṭṭhaṅgikena maggena samannāgato ayaṃ vuccati sotāpanno,
svāyaṃ āyasmā evaṃnāmo evaṃgotto”ti.
사리뿟따여, '흐름에 든 자[預流者], 흐름에 든 자'라고들 한다.
사리뿟따여, 어떤 것이 흐름에 든 자인가?
세존이시여, 이러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를 구족한 자를 일러
흐름에 든 자라고 하나니 이러한 이름을 가지고 이러한 족성을 가진 그런 존자를 뜻합니다.]
[ idha, thapatayo, ariyasāvako buddhe aveccappasādena samannāgato hoti —
itipi so bhagavā ... pe ... satthā devamanussānaṃ buddho bhagavāti.
dhamme ... pe ... saṅghe ... pe ...
vigatamalamaccherena cetasā ajjhāgāraṃ vasati muttacāgo payatapāṇi
vossaggarato yācayogo dānasaṃvibhāgarato.
시종들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이런 [이유로] 그분 세존께서는 아라한[應供]이시며, … 세존이시다.'라고
부처님께 흔들림 없는 청정한 믿음을 지닌다.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고, …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법에 흔들림 없는 청정한 믿음을 지닌다.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잘 도를 닦고, … 세상의 위없는 복밭[福田]이시다.'라고
승가에 흔들림 없는 청정한 믿음을 지닌다.
인색함의 때가 없는 마음으로 재가에 사나니, 아낌없이 보시하고, 손은 깨끗하고,
주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요구에 반드시 부응하고,
보시하고 나누어 가지는 것을 좋아한다.]
[ “so ‘idaṃ dukkhan’ti yoniso manasi karoti,
‘ayaṃ dukkhasamudayo’ti yoniso manasi karoti,
‘ayaṃ dukkhanirodho’ti yoniso manasi karoti,
‘ay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yoniso manasi karoti.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한다.115)
115) “사성제를 명상주제로 가진(catu-sacca-kammaṭṭhānika) 성스러운 제자는 갈애(taṇhā)를 제외한 삼계의 무더기들을 '괴로움(dukkha)'이라고, 갈애를 '괴로움의 일어남(dukkha-samudaya)'이라고, 둘 모두 일어나지 않음을 '소멸(nirodha)'이라고, 소멸을 성취하게 하는 것(nirodha-sampāpaka)을 '도(magga)'라고 이렇게 이전에 스승의 곁에서 습득하여 마음에 잡도리하였다. 그는 그 다음에 위빳사나의 도에 올라서서 [조건[緣, paccaya]과 더불어 정신 · 물질을 무상 등으로 명상하면서 – MAȚ] 삼계의 무더기들을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한다. [이렇게 하여 위빳사나의 지혜(vipassanā-ñāṇa)가 일어난다. – MAȚ] 예류도까지는 마음에 잡도리함이라는 주제로 위빳사나를 말한 것이다.
이 괴로움을 일어나게 하고 생기게 하는 갈애를 '이것이 일어남이다.'라고 지헤롭게 마음에 잡도리한다. 괴로움과 일어남이 이곳에 이르러서는 소멸하고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열반이라 부르는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한다. 소멸을 성취하는 성스러운 팔정도[八支聖道, ariya aṭṭhaṅgika maggā]를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한다.” (MA.i.72)
tassa evaṃ yoniso manasikaroto tīṇi saṃyojanāni pahīyanti —
sakkāyadiṭṭhi, vicikicchā, sīlabbataparāmāso.
ime vuccanti, bhikkhave, āsavā dassanā pahātabbā.
그가 이와 같이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면 세 가지 족쇄들이 제거되나니
[불변하는] 존재 더미가 있다는 견해[有身見]와, 의심[疑]과,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이다.116)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봄[見]으로써 없애야 할17) 번뇌들이라 한다.”
116) '세 가지 족쇄들이 제거되나니 [불변하는] 존재 더미가 있다는 견해[有身見]와, 의심[疑]과,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이다.'는 tīṇi saṃyojanāni pahiyyanti sakkāyadiṭṭhi vicikicchā sīlabbataparāmāso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세 가지 족쇄(tīṇi saṃyojanāni)'는 스무 가지 유신견과, 여덟 가지 의심 (불, 법, 승, 학습[계], 과거, 미래, 과거와 미래, 연기법의 8가지를 의심하는 것 – Dhs.183)과, 계를 통해 청정해지고 의례의식을 통해 청정해진다고 집착하는 계금취견이다. 네 가지 번뇌 중에서 유신견과 계금취견은 사견의 번뇌(diṭṭhāsava)에 속하기 때문에 번뇌이면서 족쇄다. 그러나 의심은 오직 족쇄이지 번뇌는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을 '봄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āsavā dassanā pahātabbā)'라 했는가? 봄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MA.i.73~74)
여기에 대해서 복주서는 다음과 같이 부연해서 설명한다.
“마치 바른 사유[正思惟, sammā-saṅkappa]가 그 역할이 통찰지와 비슷하기 때문에 통찰지의 무더기[慧, paññā-kkhandha]에 포함되듯이, 의심도 그 역할이 비슷하기 때문에 번뇌에 포함(āsava-saṅgaha)되었다고 알아야 한다. 그리고 '네 가지 번뇌'란 아비담마의 방식에 따른 것이지, 경의 방식에 따른 것이 아니다. 경에서는 결코 네 가지 번뇌를 설한 적이 없다.”(MAȚ.i.63)
복주서의 설명처럼 4부 니까야에서는 감각적 욕망(kāma), 존재(bhava), 무명(avijjā)의 세 가지 번뇌만 나타나지만(D2 §98 등 참조) 『무애해도』 등의 『쿳다까 니까야』와 아비담마에서는 사견(diṭṭhi)의 번뇌가 첨가되어 네 가지로 나타난다.(『아비담마 길라잡이』 제7장 §3을 참조할 것.)
그리고 '족쇄(saṃyojana)' 혹은 열 가지 족쇄에 대해서는 본서 「뿌리에 대한 법문 경」 (M1) §99의 주해를 참조할 것.
117) “'봄[見]으로써 없애야 할(dassanā pahātabbā)'에서 봄[見, dassana]이라는 것은 예류도(sotāpatti-magga)를 말한다. 그 예류도로써 없앤다는 말이다. 어떻게 예류도를 봄[見]이라 하는가? 처음으로 열반을 보기(nibbāna-dassana) 때문이다. 고뜨라부[種性, gotrabhū]가 그보다 먼저 열반을 보지 않는가? 물론 본다. 보지만 해야 할 일(kattabba-kicca)을 하지 않는다. 족쇄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봄[見]이라고 할 수 없다.”(MA.i.74)
고뜨라부(종성)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제9장 §34의 [해설]과 『청정도론』 XXII.5 이하를 참조할 것. 고뜨라부(종성, gotrabhū)는 『앙굿따라 니까야』제5권 「공양받아 마땅함 경」 (A9:10)과 제6권 「공양받아 마땅함 경」(A10:16)에 나타나는데 이 둘은 아비담마에서 설하는 고뜨라부에 대한 경전적인 근거가 되는 경이다.]
[ tiṇṇ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sotāpanno hoti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ṇo. evaṃ kho, bhikkhave, puggalo samaṇamacalo hoti.
세 가지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흐름에 든 자[預流者]가 되어,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얻었고 [해탈이] 확실하며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자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사람은 동요하지 않는 사문.]
[ '네 가지 예류자의 구성요소(cattari sotāpattiyaṅgāni)'
1~3. natthi kaṅkhā vā vimati vā buddhe vā dhamme vā saṅghe vā magge vā paṭipadāya vā
부처님이나 법이나 승가나 도나 도닦음에 대해서 의심이나 혼란이 없다.
4. samādhisaṃvattanikehi sīlesu paripūrakārī 삼매에 도움이 되는 계를 구족
[catūsu sotāpattiyaṅgesu. ettha saddhābalaṃ daṭṭhabbaṃ.
네 가지 예류도를 얻기 위한 구성요소에서 보아야 한다. 여기서 믿음의 힘을 보아야 한다.
‘itipi so bhagavā arahaṃ sammāsambuddho vijjācaraṇasampanno sugato lokavidū
anuttaro purisadammasārathi, satthā devamanussānaṃ buddho bhagavā’ti.
ayamassa paṭhamo ābhicetasiko diṭṭhadhammasukhavihāro adhigato hoti
avisuddhassa cittassa visuddhiyā apariyodātassa cittassa pariyodapanāya.
'이런 [이유로] 그분 세존께서는 아라한[應供]이시며, … 세존(世尊)이시다.'라고
부처님께 흔들림 없는 청정한 믿음을 지닌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청정하지 못한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깨끗하지 못한 마음을 깨끗하게 함으로써
바로 지금여기에서 행복하게 머물게 하는, 그가 얻는 첫 번째의 높은 마음이다.
…
삼매에 도움이 되는 계를 구족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청정하지 못한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깨끗하지 못한 마음을 깨끗하게 함으로써
바로 지금여기에서 행복하게 머물게 하는, 그가 얻는 네 번째의 높은 마음이다.]
[ “ākaṅkheyya ce, bhikkhave, bhikkhu —
‘tiṇṇ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sotāpanno assaṃ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ṇo’ti,
sīlesvevassa paripūrakārī ajjhattaṃ cetosamathamanuyutto anirākatajjhāno
vipassanāya samannāgato brūhetā suññāgārānaṃ.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내가 세 가지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흐름에 든 자[預流者]가 되어,
더 이상 [네 가지 악취에] 떨어지는 법이 없고 [해탈이] 확실하며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기를.'하고 원한다면,
그는 계를 원만히 하고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에 전념하며 선을 경시하지 않고
위빳사나를 구족하여 빈집에 머물기에 전념해야 한다.]
[ saddhammaniyato hoti, aparihānadhammo hoti, pariyantakatassa dukkhaṃ hoti ,
asādhāraṇena ñāṇena samannāgato hoti, hetu cassa sudiṭṭho, hetusamuppannā ca dhammā.
ime kho, bhikkhave, cha ānisaṃsā sotāpattiphalasacchikiriyāyā”ti.
정법에 확고하고, 쇠퇴하지 않는 법을 얻고, [갈애에] 에워싸인 괴로움이 없고,
[범부들과] 공통되지 않는 지혜를 구족하고,
원인이 바르게 드러나고, 원인에서 생긴 법들도 바르게 드러난다.
비구들이여, 예류과를 실현하면 이러한 여섯 가지 이익이 있다.]
[ idha, bhikkhave, ekacco puggalo ummujjati sādhu saddhā kusalesu dhammesu,
sādhu hirī ... pe ... sādhu ottappaṃ... sādhu vīriyaṃ... sādhu paññā kusalesu dhammesūti.
so tiṇṇ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sotāpanno hoti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ṇo. evaṃ kho, bhikkhave, puggalo ummujjitvā vipassati viloketi.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위로 솟아올라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유익한 법들에 대한 믿음은 빛나고, 유익한 법들에 대한
양심은 … 수치심은 … 정진은 … 통찰지는 빛난다.'라고,
그는 세 가지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흐름에 든 자[預流者]가 되어,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얻었고 [해탈이] 확실하며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자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사람은 위로 솟아올라서 관찰하고 굽어본다.]
[ sotāpattiphalasacchikiriyā (DN 5) 예류도의 증득
atha kho bhagavā kūṭadantassa brāhmaṇassa anupubbiṃ kathaṃ kathesi,
seyyathidaṃ, dānakathaṃ sīlakathaṃ saggakathaṃ;
kāmānaṃ ādīnavaṃ okāraṃ saṃkilesaṃ nekkhamme ānisaṃsaṃ pakāsesi.
그러자 세존께서는 꾸따단따 바라문에게 순차적인 가르침을 설하셨다.
보시의 가르침, 계의 가르침, 천상의 가르침,
감각적 욕망들의 위험과 타락과 오염됨, 출리의 공덕을 밝혀주셨다.
yadā bhagavā aññāsi kūṭadantaṃ brāhmaṇaṃ kallacittaṃ
muducittaṃ vinīvaraṇacittaṃ udaggacittaṃ pasannacittaṃ,
세존께서는 꾸따단따 바라문이 마음이 준비가 되고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마음의 장애가 없어지고
마음이 고무되고 마음에 깨끗한 믿음이 생겼음을 아시게 되었을 때
atha yā buddhānaṃ sāmukkaṃsikā dhammadesanā,
taṃ pakāsesi — dukkhaṃ samudayaṃ nirodhaṃ maggaṃ.
모든 부처님들께서 찾아내신 괴로움[苦]과 일어남[集]과 소멸[滅]과 도[道]라는
법의 가르침을 드러내셨다.
seyyathāpi nāma suddhaṃ vatthaṃ apagatakāḷakaṃ sammadeva rajanaṃ paṭiggaṇheyya,
evameva kūṭadantassa brāhmaṇassa tasmiññeva āsane virajaṃ vītamalaṃ
dhammacakkhuṃ udapādi —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ṃ taṃ nirodhadhamman”ti.
마치 얼룩이 없는 깨끗한 천이 바르게 잘 염색되는 것처럼 바라문
꾸따단따에게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법은
그 무엇이든 모두 멸하기 마련인 법이다[集法卽滅法]'라는
티 없고 때가 없는 법의 눈이 생겼다.
atha kho kūṭadanto brāhmaṇo diṭṭhadhammo pattadhammo
viditadhammo pariyogāḷhadhammo tiṇṇavicikiccho vigatakathaṃkatho vesārajjappatto
aparappaccayo satthusāsane bhagavantaṃ etadavoca —
“adhivāsetu me bhavaṃ gotamo svātanāya bhattaṃ saddhiṃ bhikkhusaṅghenā”ti.
adhivāsesi bhagavā tuṇhībhāvena.
그래서 꾸따단따 바라문은 법을 보았고 법을 얻었고 법을 체득했고 법을 간파했고
의심을 건넜고 혼란을 제거했고 무외를 얻었고 스승의 교법에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게 되었다.]
[ “katamo cassa ariyo ñāyo paññāya sudiṭṭho hoti suppaṭividdho?
그러면 어떤 것이 성스러운 방법을 통찰지로 잘 보고 잘 꿰뚫는 것인가?
idha, gahapati, ariyasāvako iti paṭisañcikkhati —
‘iti imasmiṃ sati idaṃ hoti; imassuppādā idaṃ uppajjati;
imasmiṃ asati idaṃ na hoti; imassa nirodhā idaṃ nirujjhati, yadidaṃ —
avijjāpaccayā saṅkhārā, saṅkhārapaccayā viññāṇaṃ,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ṃ,
nāmarūpapaccayā saḷāyatanaṃ, saḷāyatanapaccayā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vedanāpaccayā taṇhā, taṇhāpaccayā upādānaṃ, upādānapaccayā bhavo, bhavapaccayā jāti,
jātipaccayā 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avijjāya tveva asesavirāganirodhā saṅkhāranirodho ... pe ...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nirodho hotī’ti.
ayañcassa ariyo ñāyo paññāya sudiṭṭho hoti suppaṭividdho.
그러면 어떤 것이 성스러운 방법을 통찰지로 잘 보고 잘 꿰뚫는 것인가?
장자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한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도 없다. 이것이 멸할 때 저것도 멸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 · 물질이,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있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蘊]가 발생한다.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고,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하고,
알음알이가 소멸하기 때문에 정신 · 물질이 소멸하고,
정신 · 물질이 소멸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고,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하고,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하고,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라고.
이것이 성스러운 방법을 통찰지로 잘 보고 잘 꿰뚫는 것이다.
“yato kho, gahapati, ariyasāvakassa imāni pañca bhayāni verāni vūpasantāni honti,
imehi ca catūhi sotāpattiyaṅgehi samannāgato hoti,
ayañcassa ariyo ñāyo paññāya sudiṭṭho hoti suppaṭividdho,
so ākaṅkhamāno attanāva attānaṃ byākareyya —
‘khīṇanirayomhi khīṇatiracchānayoni khīṇapettivisayo khīṇāpāyaduggativinipāto;
sotāpannohamasmi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ṇo”ti.
장자여, 성스러운 제자에게 이러한 다섯 가지 두려움과 증오가 가라앉고,
또 그가 이러한 네 가지 예류도를 얻기 위한 구성요소를 구족하고,
이러한 성스러운 방법을 통찰지로 잘 보고 잘 꿰뚫을 때,
그가 원하면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나는 지옥을 다했고, 축생의 모태를 다했고, 아귀계를 다했고,
처참한 곳 . 불행한 곳 · 파멸처를 다했다. 나는 흐름에 든 자[預流者]이니,
[악취에] 떨어지지 않고 [해탈이] 확실하며 정등각으로 나아가는 자다.'라고.”]
[ “kathañca, bhikkhave, yāyaṃ diṭṭhi ariyā niyyānikā niyyāti
takkarassa sammā dukkhakkhayāya?
비구들이여, 그러면 성스럽고, 출리(出離)로 인도하는 [바른] 견해는
그것을 실천하는 자를 어떻게 바르게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가?368)
368) “이 예류도의 견해(sotāpattimagga-diṭṭhi)는 성스럽고(ariyā), 출리로 인도하고(niyyānika), 그것을 실천하는 자를 바르게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한다(niyyāti)고 했는데, 그 예류도의 견해가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인도하는 가라는 뜻이다.” (MA.ii.401)
idha, bhikkhave, bhikkhu araññagato vā rukkhamūlagato vā suññāgāragato vā iti paṭisañcikkhati —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 가거나 빈집에 가서 이와 같이 숙고한다.
‘atthi nu kho me taṃ pariyuṭṭhānaṃ ajjhattaṃ appahīnaṃ,
yenāhaṃ pariyuṭṭhānena pariyuṭṭhitacitto yathābhūtaṃ nappajāneyyaṃ na passeyyan’ti?
sace, bhikkhave, bhikkhu kāmarāgapariyuṭṭhito hoti, pariyuṭṭhitacittova hoti.
sace, bhikkhave, bhikkhu byāpādapariyuṭṭhito hoti, pariyuṭṭhitacittova hoti.
sace, bhikkhave, bhikkhu thīnamiddhapariyuṭṭhito hoti, pariyuṭṭhitacittova hoti.
sace, bhikkhave, bhikkhu uddhaccakukkuccapariyuṭṭhito hoti, pariyuṭṭhitacittova hoti.
sace, bhikkhave, bhikkhu vicikicchāpariyuṭṭhito hoti, pariyuṭṭhitacittova hoti.
sace, bhikkhave, bhikkhu idhalokacintāya pasuto hoti, pariyuṭṭhitacittova hoti.
sace, bhikkhave, bhikkhu paralokacintāya pasuto hoti, pariyuṭṭhitacittova hoti.
sace, bhikkhave, bhikkhu bhaṇḍanajāto kalahajāto vivādāpanno
aññamaññaṃ mukhasattīhi vitudanto viharati, pariyuṭṭhitacittova hoti.
'내 마음을 사로잡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게 하고 보지 못하게 하는,
그런 강박관념이 아직 제거되지 않은 채 내 안에 있는가?'라고,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감각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의 마음은 이미 사로잡힌 것이다.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악의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의 마음은 이미 사로잡힌 것이다.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의 마음은 이미 사로잡힌 것이다.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들뜸과 후회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의 마음은 이미 사로잡힌 것이다.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의심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의 마음은 이미 사로잡힌 것이다. 369)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이 세상에 대한 사색에 몰두해 있으면 그의 마음은 이미 사로잡힌 것이다.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저 세상에 대한 사색에 몰두해 있으면 그의 마음은 이미 사로잡힌 것이다.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논쟁을 하고 말다툼을 하고 분쟁하면서 혀를 무기 삼아 서로를 찌르면
그의 마음은 이미 사로잡힌 것이다.
369) 이상과 같은 감각적 욕망, 악의, 해태 · 혼침, 들뜸 · 후회, 의심의 다섯은 다섯 가지 장애[五蓋, pañca nīvaraṇāni]로 불린다. 다섯 가지 장애에 대해서는 본서 「앗사뿌라 긴 경」 (M39) §14의 본문과 주해들을 참조할 것.
so evaṃ pajānāti —
‘natthi kho me taṃ pariyuṭṭhānaṃ ajjhattaṃ appahīnaṃ,
yenāhaṃ pariyuṭṭhānena pariyuṭṭhitacitto yathābhūtaṃ nappajāneyyaṃ na passeyyaṃ.
suppaṇihitaṃ me mānasaṃ saccānaṃ bodhāyā’ti.
idamassa paṭhamaṃ ñāṇaṃ adhigataṃ hoti ariyaṃ lokuttaraṃ asādhāraṇaṃ puthujjanehi.
이제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안다.
'내 마음을 사로잡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게 하고 보지 못하게 하는,
그런 제거되지 않은 강박관념이 내 안에 없다.
나의 마음은 진리를 깨닫기 위해 잘 안정되어 있다.'라고,
이것이 성스럽고 출세간적이고 범부들과 함께하지 않는 그의 첫 번째 지혜이다.”370)
370) “이 지혜는 성인들에게만 있고 범부들에게는 없기 때문에 '성스럽다(ariya)'고 했고, 출세간법을 얻은 사람에게만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기 때문에 '출세간적(lokuttara)'이라고 했고, 범부들에게는 없기 때문에 '범부들과 함께하지 않는다(asādhāraṇa puthujjanehi).'고 했다.”(MA.ii.401)
♦ 494. “puna caparaṃ, bhikkhave, ariyasāvako iti paṭisañcikkhati —
‘imaṃ nu kho ahaṃ diṭṭhiṃ āsevanto bhāvento bahulīkaronto labhāmi paccattaṃ samathaṃ,
labhāmi paccattaṃ nibbutin’ti?
so evaṃ pajānāti —
‘imaṃ kho ahaṃ diṭṭhiṃ āsevanto bhāvento bahulīkaronto labhāmi paccattaṃ samathaṃ,
labhāmi paccattaṃ nibbutin’ti.
idamassa dutiyaṃ ñāṇaṃ adhigataṃ hoti ariyaṃ lokuttaraṃ asādhāraṇaṃ puthujjanehi.
다시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와 같이 숙고한다.
'내가 이런 견해를 받들어 행하고 닦고 거듭하면
스스로 사마타[止]를 얻고371) 스스로 적멸을 얻게 되는가?'라고,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안다.
'내가 이런 견해를 받들어 행하고 닦고 거듭하면
스스로 사마타[止]를 얻고 스스로 적멸을 얻게 된다.'라고,
이것이 성스럽고 출세 간적이고 범부들과 함께하지 않는 그의 두 번째 지혜이다.
371) “'스스로 사마타[止]를 얻고(labhāmi paccattaṃ samathaṃ)' 등으로 말씀하셨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attano citta)에 사마타를 얻는다는 뜻이다. '사마타(samatha)'는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一境性, ekaggatā]을 말하고, '적멸(nibbuti)'은 오염원들이 가라앉은 것(kilesa-vūpasama)을 말한다.”(MA.ii.401)
“puna caparaṃ, bhikkhave, ariyasāvako iti paṭisañcikkhati —
‘yathā rūpāyāhaṃ diṭṭhiyā samannāgato,
atthi nu kho ito bahiddhā añño samaṇo vā brāhmaṇo vā tathārūpāya diṭṭhiyā samannāgato’ti?
so evaṃ pajānāti — ‘yathārūpāyāhaṃ diṭṭhiyā samannāgato,
natthi ito bahiddhā añño samaṇo vā brāhmaṇo vā tathārūpāya diṭṭhiyā samannāgato’ti.
idamassa tatiyaṃ ñāṇaṃ adhigataṃ hoti ariyaṃ lokuttaraṃ asādhāraṇaṃ puthujjanehi.
다시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와 같이 숙고한다.
'우리 교단 외부에372) 내 견해373)와 동일한 견해를 가진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이 있는가?'라고,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안다.
'우리 교단 외부에 내 견해와 동일한 견해를 가진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이 [324] 없다.'라고,
이것이 성스럽고 출세간적이고 범부들과 함께하지 않는 그의 세 번째 지혜이다.
372) '우리 교단 외부에'는 ito bahiddhā(여기로부터 밖에)를 의역한 것이다. 이 표현은 『디가 니까야』제1권 「수바 경」(D10/ii.151~152) §2.19와 『상윳따 니까야』 제5권 「유학 경」(S48:53) §6 등에도 나타난다.
373) “예류도의 바른 견해를 말한다.”(MA.ii.401)
“puna caparaṃ, bhikkhave, ariyasāvako iti paṭisañcikkhati —
‘yathārūpāya dhammatāya diṭṭhisampanno puggalo samannāgato,
ahampi tathārūpāya dhammatāya samannāgato’ti.
kathaṃrūpāya ca, bhikkhave, dhammatāya diṭṭhisampanno puggalo samannāgato?
dhammatā esā, bhikkhave, diṭṭhisampannassa puggalassa —
‘kiñcāpi tathārūpiṃ āpattiṃ āpajjati, yathārūpāya āpattiyā vuṭṭhānaṃ paññāyati,
atha kho naṃ khippameva satthari vā viññūsu vā sabrahmacārīsu deseti vivarati uttānīkaroti;
desetvā vivaritvā uttānīkatvā āyatiṃ saṃvaraṃ āpajjati’.
다시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와 같이 숙고한다.
'나도 바른 견해를 구족한 사람의 성품374)과 동일한 성품을 구족했는가?'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견해를 구족한 사람은 어떤 성품을 구족했는가?
비구들이여, 이것이 견해를 구족한 사람의 성품이다.
'그는 복권(復權)이 제정된375) 그런 계를 범하더라도
즉시에 스승이나 지자들이나 동료 수행자들에게 고하고 드러내고 공개한다.
고하고 드러내고 공개하여 미래를 단속한다.
374) 여기서 '성품'으로 옮긴 원어는 dhammatā(法性)인데 주석서에서 sabhāva(고유성질, 성품)라고 설명하고 있어서(MA.ii.401) 이렇게 옮겼다.
375) “'복권이 제정된 것(vuṭṭhānaṃ paññāyati)'이란 대중 공사(saṅgha-kamma)를 하거나 참회(desanā)를 하여 그 범계에서 회복되는 것을 말한다. 성스러운 제자가 계를 범하는 것은 무거운 범계(garuk-āpatti) 등에서는 토굴을 짓는 것(kuṭi-kāra) 등이고, 가벼운 계(lahuk-āpatti) 등에서는 함께 자는 것(saha-seyya) 등으로 무심결에 계를 범하는 것(acittak-āpatti)이다. 고의로 범한 것이 아닌 것(asañcicca)도 숨기지 않는다.”(MA.ii.402)
seyyathāpi, bhikkhave, daharo kumāro mando uttānaseyyako hatthena vā pādena vā
aṅgāraṃ akkamitvā khippameva paṭisaṃharati;
evameva kho, bhikkhave, dhammatā esā diṭṭhisampannassa puggalassa —
‘kiñcāpi tathārūpiṃ āpattiṃ āpajjati yathārūpāya āpattiyā vuṭṭhānaṃ paññāyati,
atha kho naṃ khippameva satthari vā viññūsu vā sabrahmacārīsu deseti vivarati uttānīkaroti;
desetvā vivaritvā uttānīkatvā āyatiṃ saṃvaraṃ āpajjati’.
so evaṃ pajānāti —
‘yathārūpāya dhammatāya diṭṭhisampanno puggalo samannāgato,
ahampi tathārūpāya dhammatāya samannāgato’ti.
idamassa catutthaṃ ñāṇaṃ adhigataṃ hoti ariyaṃ lokuttaraṃ asādhāraṇaṃ puthujjanehi.
비구들이여, 마치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아직 뒤척이지도 못하고 반듯하게 누워만 있는
갓난아이의 손이나 발이 숯불에 닿으면 즉시에 끌어당기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견해를 구족한 사람의 성품이다.
그는 복권이 제정된 그런 계를 범하더라도
즉시에 스승이나 지자들이나 동료 수행자들에게 고하고 드러내고 공개한다.
고하고 드러내고 공개하여 미래를 단속한다.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나도 바른 견해를 구족한 사람의 성품과 동일한 성품을 구족했다.'라고,
이것이 성스럽고 출세간적이고 범부들과 함께하지 않는 그의 네 번째 지혜이다.
“puna caparaṃ, bhikkhave, ariyasāvako iti paṭisañcikkhati —
‘yathārūpāya dhammatāya diṭṭhisampanno puggalo samannāgato,
ahampi tathārūpāya dhammatāya samannāgato’ti.
kathaṃrūpāya ca, bhikkhave, dhammatāya diṭṭhisampanno puggalo samannāgato?
dhammatā esā, bhikkhave, diṭṭhisampannassa puggalassa —
‘kiñcāpi yāni tāni sabrahmacārīnaṃ uccāvacāni kiṃkaraṇīyāni tattha ussukkaṃ āpanno hoti,
atha khvāssa tibbāpekkhā hoti adhisīlasikkhāya adhicittasikkhāya adhipaññāsikkhāya’.
다시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와 같이 숙고한다.
'나도 바른 견해를 구족한 사람의 성품과 동일한 성품을 구족했는가?'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견해를 구족한 사람은 어떤 성품을 구족했는가?
비구들이여, 이것이 견해를 구족한 사람의 성품이다.
그는 동료 수행자들을 위해 해야 할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일들을 열심히 하면서도
높은 계와 높은 마음과 높은 통찰지를 공부짓기 위해 큰 뜻을 품는다.
seyyathāpi, bhikkhave, gāvī taruṇavacchā thambañca ālumpati vacchakañca apacinati;
evameva kho, bhikkhave, dhammatā esā diṭṭhisampannassa puggalassa —
‘kiñcāpi yāni tāni sabrahmacārīnaṃ uccāvacāni kiṃkaraṇīyāni tattha ussukkaṃ āpanno hoti,
atha khvāssa tibbāpekkhā hoti adhisīlasikkhāya adhicittasikkhāya adhipaññāsikkhāya’.
so evaṃ pajānāti —
‘yathārūpāya dhammatāya diṭṭhisampanno puggalo samannāgato,
ahampi tathārūpāya dhammatāya samannāgato’ti.
idamassa pañcamaṃ ñāṇaṃ adhigataṃ hoti ariyaṃ lokuttaraṃ asādhāraṇaṃ puthujjanehi.
비구들이여, 마치 어린 송아지를 거느린 어미 소가
풀을 뜯어 먹으면서도 송아지를 돌보는 것과 같다.376)
376) “어린 송아지(taruṇayacchā)를 거느린 어미 소(gāvī)는 숲 속에서 어린 송아지를 한 곳에 앉혀두고 혼자 멀리 가지 않는다. 어미 소는 송아지 근처에서 돌아다니면서 풀을 뜯고는 목을 빼서 한쪽에 있는 송아지를 쳐다본다. 그 와 같이 예류자는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일(karaṇīyāni)을 하면서 거기에 마음을 기울이고, 또 한편으로는 근면함을 앞세워 예리한 열정(tibba-cchanda)과 큰 뜻(bahala-patthana)을 품는다.”(MA.ii.403)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이것이 견해를 구족한 사람의 성품이다.
그는 동료 수행자들을 위해 해야 할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일들을 열심히 하면서도
높은 계와 높은 마음과 높은 통찰지를 공부짓기 위해 큰 뜻을 품는다.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나도 바른 견해를 구족한 사람의 성품과 동일한 성품을 구족했다.'라고,
이것이 성스럽고 출세간적이고 범부들과 함께하지 않는 그의 다섯 번째 지혜이다.”
“puna caparaṃ, bhikkhave, ariyasāvako iti paṭisañcikkhati —
‘yathārūpāya balatāya diṭṭhisampanno puggalo samannāgato,
ahampi tathārūpāya balatāya samannāgato’ti.
kathaṃrūpāya ca, bhikkhave, balatāya diṭṭhisampanno puggalo samannāgato?
balatā esā, bhikkhave, diṭṭhisampannassa puggalassa yaṃ tathāgatappavedite dhammavinaye
desiyamāne aṭṭhiṃkatvā manasikatvā sabbacetasā samannāharitvā ohitasoto dhammaṃ suṇāti.
so evaṃ pajānāti — ‘yathārūpāya balatāya diṭṭhisampanno puggalo samannāgato,
ahampi tathārūpāya balatāya samannāgato’ti.
idamassa chaṭṭhaṃ ñāṇaṃ adhigataṃ hoti ariyaṃ lokuttaraṃ asādhāraṇaṃ puthujjanehi.
다시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와 같이 숙고한다.
'나도 바른 견해를 구족한 사람의 힘과 동일한 힘을 구족했는가?'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견해를 구족한 사람은 어떤 힘을 구족했는가?
비구들이여, 이것이 견해를 구족한 사람의 힘이다.
그는 여래가 선언한 법과 율이 설해지면 그는 정신을 기울이고 마음에 잡도리하고
온 마음을 쏟고 귀 기울여 법을 배운다.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나도 바른 견해를 구족한 사람의 힘과 동일한 힘을 구족했다.'라고,
이것이 성스럽고 출세간적이고 범부들과 함께하지 않는 그의 여섯 번째 지혜이다.”
“puna caparaṃ, bhikkhave, ariyasāvako iti paṭisañcikkhati —
‘yathārūpāya balatāya diṭṭhisampanno puggalo samannāgato,
ahampi tathārūpāya balatāya samannāgato’ti.
kathaṃrūpāya ca, bhikkhave, balatāya diṭṭhisampanno puggalo samannāgato?
balatā esā, bhikkhave, diṭṭhisampannassa puggalassa
yaṃ tathāgatappavedite dhammavinaye desiyamāne labhati atthavedaṃ,
labhati dhammavedaṃ, labhati dhammūpasaṃhitaṃ pāmojjaṃ.
so evaṃ pajānāti — ‘yathārūpāya balatāya diṭṭhisampanno puggalo samannāgato,
ahampi tathārūpāya balatāya samannāgato’ti.
idamassa sattamaṃ ñāṇaṃ adhigataṃ hoti ariyaṃ lokuttaraṃ asādhāraṇaṃ puthujjanehi.
다시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와 같이 숙고한다.
'나도 바른 견해를 구족한 사람의 힘과 동일한 힘을 구족했는가?'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견해를 구족한 사람은 어떤 힘을 구족했는가?
비구들이여, 이것이 견해를 구족한 사람의 힘이다.
'그는 여래가 선언한 법과 율이 설해지면 뜻에서 영감을 얻고 법에서 영감을 얻고
법과 관계된 환희를 얻는다.'377)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나도 바른 견해를 구족한 사람의 힘과 동일한 힘을 구족했다.'라고,
이것이 성스럽고 출세간적이고 범부들과 함께하지 않는 그의 일곱 번째 지혜이다.
377) '그는 여래가 선언한 법과 율이 설해지면 뜻에서 영감을 얻고 법에서 영감을 얻고 법과 관계된 환희를 얻는다.'로 옮긴 원문은 labhati atthavedaṃ, labhati dhammavedaṃ, labhati dhammūpasaṃhitaṃ pāmojjaṃ이다.
『앙굿따라 니까야 주석서』는 '주석서(aṭṭhakatha)를 의지하여 생긴 희열과 환희(pīti-pāmojja)를 얻고, 성전(경전, pāḷi)을 의지하여 생긴 환희를 얻고, 법과 관계된 환희를 얻는다.'라고 설명한다.(AA.iii.337) 즉 여기서 '뜻(attha)'을 주석서로 '법(dhamma)'을 성전(경전)으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 「옷감의 비유 경」 (M7) §8의 주해도 참조할 것.
“evaṃ sattaṅgasamannāgatassa kho, bhikkhave, ariyasāvakassa dhammatā
susamanniṭṭhā hoti sotāpattiphalasacchikiriyāya.
evaṃ sattaṅgasamannāgato kho, bhikkhave, ariyasāvako sotāpattiphalasamannāgato hotī”ti.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일곱 가지 요소를 갖춘 성스러운 제자의 성품은
예류과를 실현함으로써378) 잘 검증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일곱 가지 요소를 갖춘 성스러운 제자는 예류과를 갖춘 것이다.”379)
378) “'예류과를 실현함으로써'라고 옮긴 원문은 sotāpatti-phala-sacchikiriyāya인데, 이것은 문법상 여격(Dative)이 아닌 도구격(Instrummental)으로 '예류과를 실현한 지혜에 의해(sotāpatti-phala-sacchikata-ñāṇena) 라는 뜻이다.”(MA.ii.404)
그러므로 이 예류과를 실현한 지혜에 의해 성자의 성품이 잘 검증되었다는 말이지, 예류과를 실현하기 위해 성자의 성품이 잘 검증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예류자는 자아가 있다는 견해인 유신견과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하 지차고 의심의 세 가지 족쇄를 없앤 자이다. 이러한 일곱 가지 지혜(ñāṇa)를 갖춘 자는 예류과를 얻은 것과 같다는 말씀이라 하겠다.
379) 주석서는 이 일곱 가지 지혜를 큰 반조의 지혜(mahā-paccavekkhaṇa-ñāṇa)라 부르고 있다.(MA.ii.404)
반조의 지혜에는 19가지가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청정도론』 XII.19~21나『아비담마 길라잡이』 9장 §34의 [해설]을 참조할 것.]
[ yato kho, bhikkhave, ariyasāvako imesaṃ pañcannaṃ upādānakkhandhānaṃ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vuccati, bhikkhave, ariyasāvako sotāpanno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no”ti.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이러한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 때,
이를 일러 성스러운 제자는 흐름에 든 자[預流者]여서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졌고
[해탈이] 확실하며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아간다고 한다.]
[ “yato kho, bhikkhave, ariyasāvakassa imesu ca ṭhānesu kaṅkhā pahīnā hoti,
dukkhepissa kaṅkhā pahīnā hoti, dukkhasamudayepissa kaṅkhā pahīnā hoti,
dukkhanirodhepissa kaṅkhā pahīnā hoti, dukkhanirodhagāminiyā paṭipadāyapissa kaṅkhā pahīnā hoti
— ayaṃ vuccati, bhikkhave, ariyasāvako sotāpanno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no”ti.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이 여섯 가지 경우들424)에 대한 의심이 제거되고
괴로움에 대한 의심도 제거되고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의심도 제거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의심도 제거되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에 대한 의심도 제거되면,
이를 일러 성스러운 제자는 흐름에 든 자[預流者]여서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졌고
[해탈이] 확실하며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아간다고 한다.
424) '이 여섯 가지 경우들(imesu chasu ṭhānesu)'은 Ee와 Se를 따라서 옮긴 것이다. Be에는 단지 imesu ca ṭhānesu(이 경우들)로 나타난다. 주석서는 이 여섯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지 않고 있다. 문맥으로 볼 때 바로 위에서 설명한 오온의 다섯 가지에다 '본 것, 들은 것, 감지한 것, 안 것, 얻은 것, 탐구한 것, 마음으로 고찰한 것'을 여섯 번째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대해서는 『맛지마 니까야』「뱀의 비유 경」(M22) §15에 나타나는 여섯 가지 확정적인 견해[見處, diṭṭhi-ṭṭhāna]도 참조할 것.]
{S25} 六六法 [
“cakkhuṃ, bhikkhave, aniccaṃ vipariṇāmi aññathābhāvi; sotaṃ aniccaṃ vipariṇāmi aññathābhāvi;
ghānaṃ aniccaṃ vipariṇāmi aññathābhāvi; jivhā aniccā vipariṇāmī aññathābhāvī ;
kāyo anicco vipariṇāmī aññathābhāvī; mano anicco vipariṇāmī aññathābhāvī.
비구들이여, 눈은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귀는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코는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혀는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몸은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마노는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yo, bhikkhave, ime dhamme evaṃ saddahati adhimuccati — ayaṃ vuccati saddhānusārī,
okkanto sammattaniyāmaṃ, sappurisabhūmiṃ okkanto, vītivatto puthujjanabhūmiṃ;
abhabbo taṃ kammaṃ kātuṃ, yaṃ kammaṃ katvā
nirayaṃ vā tiracchānayoniṃ vā pettivisayaṃ vā upapajjeyya;
abhabbo ca tāva kālaṃ kātuṃ yāva na sotāpattiphalaṃ sacchikaroti”.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에 대해서 이와 같이 믿고 이와 같이 확신을 가지는 자를 일러
믿음을 따르는 자444)라고 한다.
그는 올바른 정해진 행로에 들어가고, 445)
참된 사람의 경지에 들어가고, 범부의 경지를 넘어섰다.
그가 지옥이나 축생계나 아귀의 영역446)에 태어나게 되는
그러한 업을 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예류과를 실현하지 못한 채로 임종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yassa kho, bhikkhave, ime dhammā evaṃ paññāya mattaso nijjhānaṃ khamanti,
ayaṃ vuccati — ‘dhammānusārī,
okkanto sammattaniyāmaṃ, sappurisabhūmiṃ okkanto, vītivatto puthujjanabhūmiṃ;
abhabbo taṃ kammaṃ kātuṃ,
yaṃ kammaṃ katvā nirayaṃ vā tiracchānayoniṃ vā pettivisayaṃ vā upapajjeyya;
abhabbo ca tāva kālaṃ kātuṃ yāva na sotāpattiphalaṃ sacchikaroti’.
비구들이여, 통찰지로 충분히 사색하여 이러한 법들을 인정하는 자를 일러
법을 따르는 자라 한다.
그는 올바른 정해진 행로에 들어가고, 참된 사람의 경지에 들어가고, 범부의 경지를 넘어섰다.
그가 지옥이나 축생계나 아귀의 영역에 태어나게 되는 그러한 업을 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예류과를 실현하지 못한 채로 임종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yo, bhikkhave, ime dhamme evaṃ pajānāti evaṃ passati, ayaṃ vuccati —
‘sotāpanno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no’”ti.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을 이와 같이 알고 보는 자를 흐름에 든 자[預流者]라 하나니,
그는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졌고 [해탈이] 확실하며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아간다.450)
450) 본경을 통해서 살펴보면 예류자는 분명히 예류자가 되는 길(도)에 있는 자들, 즉 믿음을 따르는 자와 법을 따르는 자와 구분된다. 믿음을 따르는 자는 [제한된 이해를 가지고] 법을 믿고 확신하여(saddahati, adhimuccati) 법을 받아들이는 자요, 법을 따르는 자는 통찰지로 법을 정려하는(nijjhānaṃ khamati) 자이다. 그러나 예류자는 법을 직접 알고 보는(jānāti, passati)자이다.
… …
비구들이여, 땅의 요소는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물의 요소는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불의요소는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바람의 요소는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허공의 요소는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알음알이의 요소는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rūpaṃ, bhikkhave, aniccaṃ vipariṇāmi aññathābhāvi;
vedanā aniccā vipariṇāmī aññathābhāvī; saññā... saṅkhārā aniccā vipariṇāmino aññathābhāvino;
viññāṇaṃ aniccaṃ vipariṇāmi aññathābhāvi .
비구들이여, 물질은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느낌은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인식은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심리현상들은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알음알이는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yo, bhikkhave, ime dhamme evaṃ saddahati adhimuccati, ayaṃ vuccati saddhānusārī,
okkanto sammattaniyāmaṃ, sappurisabhūmiṃ okkanto, vītivatto puthujjanabhūmiṃ;
abhabbo taṃ kammaṃ kātuṃ,
yaṃ kammaṃ katvā nirayaṃ vā tiracchānayoniṃ vā pettivisayaṃ vā upapajjeyya;
abhabbo ca tāva kālaṃ kātuṃ yāva na sotāpattiphalaṃ sacchikaroti”.
… … ]
[ yato kho, bhikkhave, ariyasāvako imesaṃ pañcannaṃ indriyānaṃ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ṃ pajānāti —
ayaṃ vuccati, bhikkhave, ariyasāvako sotāpanno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ṇo”ti.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이러한 다섯 가지 기능의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 때, 이를 일러 성스러운 제자는 흐름에 든 자[預流者]여서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졌고 [해탈이] 확실하며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아간다고 한다.]
[ yato kho, bhikkhave, ariyasāvako imesaṃ channaṃ indriyānaṃ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ṃ pajānāti —
ayaṃ vuccati, bhikkhave, ariyasāvako sotāpanno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ṇo”ti.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이러한 여섯 가지 감각기능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 때,
이를 일러 성스러운 제자는 흐름에 든 자[預流者]여서,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졌고
[해탈이] 확실하며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아간다고 한다.]
[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기능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육체적 즐거움의 기능, 육체적 괴로움의 기능,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 정신적 괴로움의 기능, 평온의 기능이다.”
yato kho, bhikkhave, ariyasāvako imesaṃ pañcannaṃ indriyānaṃ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ṃ pajānāti —
ayaṃ vuccati, bhikkhave, ariyasāvako sotāpanno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ṇo”ti.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이러한 다섯 가지 기능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 때,
이를 일러 성스러운 제자는 흐름에 든 자[預流者]여서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졌고
[해탈이] 확실하며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아간다고 한다.]
[ “yathārūpāya kho, gahapati, micchāvimuttiyā samannāgato assutavā puthujjano
kāyassa bhedā paraṃ maraṇā apāyaṃ duggatiṃ vinipātaṃ nirayaṃ upapajjati,
tathārūpā te micchāvimutti natthi. atthi ca kho te, gahapati, sammāvimutti.
tañca pana te sammāvimuttiṃ attani samanupassato ṭhānaso vedanā paṭippassambheyyā”ti.
장자여, 그대에게는 삿된 해탈을 가진 배우지 못한 범부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나는 그러한 형태의 삿된 해탈이 없습니다.
대신에 그대에게는 바른 해탈이 있습니다.
그대가 이러한 바른 해탈이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관찰하면
그 자리에서 그대의 [괴로운] 느낌은 가라앉을 것입니다. 207)
207)『맛지마 니까야』「큰 40가지 경」(M117/iii.76) §34에 의하면 유학들은 바른 견해부터 바른 삼매까지의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갖추고 있고 무학인 아라한들은 바른 지혜(sammā-ñāṇa)와 바른 해탈(sammā-vimutti)까지 갖추어서 모두 10가지 구성요소를 구족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예류자인 급고독 장자도 이 두 가지를 갖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본서 제권 「쭌다 경」 (S47:13) §6과 주해에 의하면 아직 예류자인 아난다 존자도 계 · 정 · 혜뿐만 아니라, 아라한만이 갖춘다는 해탈(vimutti)과 해탈지견(vimutti-ñāṇa-dassana)까지 다 갖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본경에서 급고독 장자가 10가지 구성요소를 다 갖추었다고 나타나는 것은 단순한 편집상의 실수는 아닌 듯하다.
“paṇḍito, ānanda, sāriputto; mahāpañño, ānanda, sāriputto,
yatra hi nāma cattāri sotāpattiyaṅgāni dasahākārehi vibhajissatī”ti.
아난다여, 사리뿟따는 현자다. 아난다여, 사리뿟따는 큰 통찰지를 가졌다.
그래서 사리뿟따는 거기서 네 가지 예류과를 얻은 자의 구성요소를
10가지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었다.]
* 佛法僧- (시)戒(천) : 다상가(十支) - 악처를 벗어나는 解脫
< tathāgatappaveditā cassa dhammā paññāya mattaso nijjhānaṃ khamanti.
그리고 그는 여래가 설한 법들을 통찰지로 충분히 사색하여 이러한 법들을 인정한다.>
* 여래께서 드러내신 법들을 반야지혜의 능력이 되는 만큼 이해하여 받아들인다.
<nijjhānaṃ khamati> - 聰氣
< ①~⑤ orambhāgiyāni saṃyojanāni
生 ⑥~⑦ upapatti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有 bhava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10가지 족쇄(saṃyojana)
①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 자아가 있다는 견해, 중생을 중생이게끔 기만하고 오도하는 가장 근본적인 삿된 견해로, 고정불변하는 자아 혹은 실체가 있다고 국집하는 견해이다. 경에서는 오온의 각각에 대해서 4가지로 자아 등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아비담마 길라잡이』 7장 §7의 해설 참조)
② 계율과 의식(혹은 誓戒)에 대한 집착[戒禁取, sīlabbata-parāmāsa]: 형식적 계율과 의식을 지킴으로써 해탈할 수 있다고 집착하는 것.(『아비담마 길라잡이』 7장 §6의 해설 참조)
③ 의심[疑, vicikicchā]: 불 · 법 · 승, 계율, 연기법 등을 회의하여 의심하는 것.(『아비담마 길라잡이』 2장 §4의 해설 참조)
④ 감각적 욕망(kāma-rāga):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⑤ 적의(paṭigha): 반감, 증오, 분개, 적대감 등을 뜻하며 성내는 마음[瞋心]과 동의어이다.(『아비담마 길라잡이』 1장 §5의 3번 해설 참조)
⑥ 색계에 대한 집착(rūpa-rāga): 색계 禪(초선부터 제4선까지)으로 실현되는 경지에 대한 집착.
⑦ 무색계에 대한 집착(arūpa-rāga): 무색계 禪(공무변처부터 비상비비상처까지)으로 실현되는 경지에 대한 집착.
⑧ 자만[慢, māna]: 내가 남보다 낫다, 못하다, 동등하다 하는 마음.(『아비담마 길라잡이』 2장 §4 해설 참조)
⑨ 들뜸(掉擧, uddhacca): 들뜨고 불안한 마음.(『아비담마 길라잡이』 2장 §4 해설 참조)
⑩ 무명(無明, avijjā): 사성제와 연기법 등을 모르는 것.
이 가운데서 유신견,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의심, 감각적 욕망, 적의, 이 다섯은 아래의 [욕계에서] 생긴 무더기 등을 결박하기 때문에 낮은 단계의 족쇄[下分結]라 부른다.(『청정도론』 XXII.48)
그리고 색계에 대한 탐욕, 무색계에 대한 탐욕, 자만, 들뜸, 무명, 이 다섯은 위의 [색계와 무색계]에서 생긴 무더기 등을 결박하기 때문에 높은 단계의 족쇄[上分結]라 부른다.(Ibid)
예류자(sotāpatti)는 유신견,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의심의 세 가지 족쇄가 완전히 풀린 사람이고, 일래자(sakadāgami)는 이 세 가지가 완전히 다 풀렸을 뿐만 아니라 감각적 욕망과 적의의 두 가지 족쇄가 아주 엷어진 사람이다. 불환자(anāgami)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가 완전히 다 풀려나간 사람이고 아라한(arahan)은 열 가지 모든 족쇄를 다 풀어버린 사람이다.>
첫댓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자신의 견해도 다르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다르마는 무엇인가요? -라는 질문에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고 생각합니다도 다르마가 될 수 있지 싶습니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도 다르마가 될 수 있지 싶습니다.
다만 정견인지 아닌지는 불문하고...
사두 사두 사두%~%
팔정도의 마지막 덕목인 바른 삼매(색계 선, 正定)까지는 아니더라도
三昧에 들려면 특정대상을 집중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삼매란 기본적으로 해탈/열반 쪽 방향으로 가는데 도움이 되는 상태이면
삼매에 드는 것 같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精進을 하면 삼매에 드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정정진과 정념과 정정은 모두 삼매의 무더기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싶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歡喜(혹은 歡喜奉行)할 사건이 생겨나면 삼매에 드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설법을 듣고 그 말씀을 이해하게 되어
방일하지 않고 이해한 대로 (수)행하면 되겠다는 판단이 서도 삼매에 들고
자신이 지금까지 지니고 있는 불선법들이 줄어들거나 없어지게 되거나
선법이 새로이 생겨나거나 증장하게 되면 또한 그만큼 삼매에 든다고 합니다.
조금씩이라도 마음이 맑아지고(사마타/그침) 밝아지면(위빳사나/지혜)
그 만큼이라도 삼매에 들고 삼매에 드는 만큼 앎과 봄이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일시적으로 맑아지고 밝아진 것이
더 이상 흐려지거나 흐릿해지지 않게 되도록 하는 것이
이른바 수행으로 이해됩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나타나는 삼매는
불법승에 대한 隨念(믿음)에 의해서도
아주 미약하나마 탐진치가 줄어들어서
삼매에 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삼매에서 부터 수승하신 분들의 바른 삼매까지 삼매도 그 범위가 넓은 것 같습니다.
바른 견해도 업과 보에 대한 믿음에 의한 것에서 부터
논리적인 추론 혹은 이해에 의한 㝷伺(정사유)도 혜온에 포함되고
연기(고집제)를 비록한 4성제를 알고 봄, 그리고
수승하신 분들의 위빳사나 까지 이 역시 범위가 넓은 것 같습니다.
anuddhato anunnaḷo acapalo amukharo avikiṇṇavāco
upaṭṭhitassati sampajāno samāhito ekaggacitto saṃvutindriyo
들뜨지 않고 오만하지 않고 촐랑대지 않고
수다스럽지 않고 산만하게 말하지 않고 마음챙김을 확립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잘 삼매에 들며 일념이 되고 감각기능이 제어되어 있는 상태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마음이 삼매에 들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유연하고, 활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
sammāmanasikāramanvāya tathārūpaṃ cetosamādhiṃ phusati
바르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닦아서 마음이 삼매에 들어
♦ (ka) “katame nava dhammā bahukārā? nava yonisomanasikāramūlakā dhammā,
yonisomanasikaroto pāmojjaṃ jāyati, pamuditassa pīti jāyati, pītimanassa kāyo passambhati,
passaddhakāyo sukhaṃ vedeti, sukhino cittaṃ samādhiyati,
samāhite citte yathābhūtaṃ jānāti passati, yathābhūtaṃ jānaṃ passaṃ nibbindati,
nibbindaṃ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ime nava dhammā bahukārā.
(1) 어떤 아홉 가지 법은 많은 것을 만듭니까?
아홉 가지 지혜로운 주의[如理作意]를 뿌리로 가진 법입니다.
① 지혜로운 주의를 기울이는 자에게 환희가 생깁니다.
② 환희하는 자에게 희열이 생깁니다.
③ 희열하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 몸은 경안 합니다.
④ 몸이 경안한 자는 행복을 느낍니다.
⑤ 행복한 자는 마음이 삼매에 듭니다.
⑥ 마음이 삼매에 들 때 있는 그대로 알고 봅니다.
⑦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면 역겨워합니다.[厭惡]
⑧ 역겨워하면 욕망이 빛바랩니다.[離慾]
⑨ 욕망이 빛바래면 해탈합니다.[解脫]
이 아홉 가지 법이 많은 것을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