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년〈시인수첩〉신인상 당선작 _ 우현순, 윤보성
심사위원: 감태준, 황치복, 김병호
나무가 돌을 깨뜨리네 (외 2편)
우현순
나무들이 돌을 지나가네
돌과 돌 사이
침묵인지 침식인지 알 수 없는 무게가
커다랗게 자라네
그때마다 말을 삼켜버린 돌덩어리
세상이 쿵쿵 밟고 지나간 자리
돌이 가슴에서 자라는
어느 여자의 역사를
누군가 가만가만 들여다보네
아직 읽지 못한
낯선 돌 하나
이 무거움을 들고 들어가는
깊은 동굴보다 더 어두운 생生들은
어디서 단단해지나
오랫동안 들끓다
딱딱해져 짓이겨도 분해되지 않는 돌
끊임없이 커져가는 돌의 심장
뿌리를 내놓고
나무가 돌을 깨뜨리네
웃고 있네
공중밥상
중화요리 배달통이 15층까지 올라옵니다
아파트 신축건물 옥상 위에
멀미나는 밥상 하나 차립니다
오월의 햇살
꽃잎으로 뿌려지고
파랑 빨강 노랑 하양 안전모들이
옹기종기 모여 식사를 합니다
고층 아파트로 이사했습니다 창밖을 바라봅니다 비행기 타고 고공 향해 오를 때 아찔한 것처럼 당신을 보니 별빛으로 노랬습니다 어린 아들 블록으로 쌓은 탑처럼 무너질 듯 조마조마하기도 했습니다 부엌 창밖 탑 같은 당신이 푸른빛 감도는 고공에 철골로 서 있습니다 나도 서 있습니다 타워크레인은 건물 중심에 서서 철골을 높이 들어 올립니다 안전망으로 바람이 술렁술렁 들어갑니다 당신이 철골을 묶고 오를 때, 그늘의 깊이가 점점 깊어져갔습니다 한 층 한 층 올라갈 때마다 나는 애꿎은 수돗물 틀었다 잠갔다 했습니다 눈을 감았습니다 액자 속에서 기도하던 소녀가 지나갔습니다
—오늘도 무사히—
나는 공중에서 밥상을 차리고
당신은 허공에서 밥상을 묶다가 새털구름 한 조각 바라봅니다
니
달처럼 둥근 빵
달빛이 노르스름하게 스며드네요
가루의 가루
살짝 후 하고 불어도 날아가버려요
‘니’가 설탕을 만들어요
어머니 ․ 엄니 ‧ 할머니……
‘니’를 쉽게 불러요
어떤 곳이든 옆에 있어
나에게 달콤함을 줄 것처럼
입속에서 미끄러지는
억만 개의 ‘니’
녹아요
설탕이 ‘니’를 만들어요
가장 낮은 밑바닥에서 녹는 ‘니’가 있어요
잴 수 없는 무게를 가지고 녹아요
자꾸 쏟아져 녹아요
그렇게 퍼주다 생기는 깊은 그늘과
뻥 뚫린 가슴과
그곳을 가만히 쓸어내리는 눈동자와 손바닥
대책 없이 흘려주던 하얀 감정
마냥 흐르다 갈증을 부르는
붉은 혀 위에서
‘니’와 설탕이 서로 찾아요
부푸네요! 부푸네요
긴 잠을 깨워주네요
‘니’ 한 스푼
달빛 한 스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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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순 / 여주 출생.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과정 수료. 2017년 《시인수첩》신인상 당선.
사건지평선* (외 2편)
윤보성
파도의 파장 사이에 서 있었다
목젖까지 차오른 사해
지평선을 물고 날아가는 방패연을 보니
뒤에서 다가올 대관람차가 침몰하지는 않을까
파도의 파장 사이에 가라앉았다
나체로 포즈를 취한 지 세 시간째
여학생들의 시선이 회전목마처럼 다가오다
멀어진다 도화지는 점점 목탄으로 번져가는데
왜 해변을 배경으로 그렸냐고 물으니 웃기만 한다
발기가 된다
파도의 파장 사이에 서 있었다
소금 기둥들이 배회하는 경찰서의 복도
형사는 회유하려 했고 나는 귀신의 집으로 갔다
거짓말탐지기의 더듬이가 오른팔을 휘감아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검은색 전깃줄의 절단 순서를
비치모텔에서 파트너를 손괴한 혐의를
컴퓨터 단자에 꽂은 탐폰의 제조년도를 물었다
파도의 파장 사이에 가라앉았다
주문이 무성한 헤어진 애인의 추상화
서로에게 모래를 뿌리고 껴안았을 때
멈춘 공중그네에서 서로 매달렸을 때
젖가슴에선 선크림 냄새가 났었다
캔버스를 뒹굴다 누군가 옆구리가 찢어져
태양으로 번져갔었는데 오늘은
뉴욕 메트로폴리탄에 내가 그려진
그림이 전시되어 있으리라
언젠가 나는 나의 파장 사이에 서 있었는데
얼굴이 그려진 적도 있었는데
* 우주의 끝에서 일어난 사건이 그 우주의 바깥에 있는 관측자에게는 영원히 전해질 수 없는 시공간의 경계, 혹은 빛이 탈출할 수 없는 블랙홀의 경계.
스발바르 국제 종자 저장고
체외수정을 하시겠습니까?
아니요 굿판에서 굵은소금으로 거기를 씻겠어요
여성호르몬 주사는 겨드랑이에 놔주세요
엉덩이는 더 이상 추파를 감당하지 못해요
일반병실에는 꼭 임상실험환자가 섞여 있죠
아무도 문병 오지 않는 날이면
침대 밑에서 성전환수술 소책자를 꺼내
잘 아는 중국인 브로커가 있다며 최면을 걸곤 했죠
24년 전 육교 밑에서 뺑소니 당한 아버지
응급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로 그네를 타고 계셨어요
나는 ‘어두운 밤에’로 시작하는 찬송가를 불러드렸고
옆자리 할아버지들은 동전을 입안 가득 넣어줬어요
일어나 방금 꾼 꿈을 처음 본 여자에게 말했더니
필름처럼 얼굴에서 구멍이 좌르륵 돋아났어요
섹스하기 전 풍선을 불어줬어요
풍선 뱀의 배를 갈라 선악과를 끄집어낸 나의 하와
아버지!
이 여자도 아버지처럼 도다리 회를 좋아해요
여전히 아버지를 닮았죠
사망 시 장기를 기증하시겠습니까?
아니요 옥상에서 갈라진 팥알로 배꼽을 씻겠어요
정자은행에 갚을 이자가 너무 많거든요
처녀생식
내가 나에게 상처받지 않을 자세를 연구합니다 의자에서 욕조에서 침대에서 사막에서 휴지를 쑤셔 넣을 때 피 흘리는 구멍은 항상 가로등
웃으라고 만든 동영상을 보다 울음이 나올 때 나는 물속에서 자위하는 소년의 욕망을 떠올립니다 욕조에 누워 제 손목을 핥는 흡혈귀가 주인공인 영화
흡혈귀의 몸에도 피가 흐릅니까? 선인장의 체내에 불똥이 흐르는 것처럼? 주인을 배신한 낙타의 웅덩이에 고개를 처박습니다 모래바람이 귓바퀴로 흘러내리고
머리카락에 깜부기불이 붙으면 경동맥을 그어 온몸을 피로 적시는 겁니다 그렇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겁니다 선인장을 껴안고 잠들면 두 다리가 잘린 꿈을 꾸고
선인장의 얼굴은 밀랍으로 살아간다는 걸 아십니까? 가시는 제가끔 심지가 됩니다 고슴도치 같은 흡혈귀의 혓바닥으로 불을 퉤! 뱉습니다
AIDS에 감염된 체위를 오아시스에 버리고 오는 길입니다 선인장들이 일렬로 불타오르는 사하라의 고속도로에서 오늘은 히치하이킹을 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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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성 / 1991년 부산 출생. 동의대학교 문예창작하과 재학 중. 2017년《시인수첩》신인상 당선.
—《시인수첩》2017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