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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이야기 798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5 : 충청도 놀뫼의 땅 논산
이첨이 의창(義倉) 기문에서 “땅이 적고 편평하며 넓은 지대가 적다”라고 하였던 연산의 경계는 동쪽으로 진잠까지 22리이고, 진산군 경계까지 35리, 은진현 경계까지 26리, 고산현 경계까지 19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98리였다. 지금의 연산면, 부적면, 벌곡면, 양촌면, 두마면 일대가 이곳이다.
연산현에서 계룡산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산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뒤 무학대사를 거느리고 친히 와서 계룡산 남쪽에 길지를 택한 뒤 공사를 시작했던 곳이 바로 신도안의 대궐 터(대궐평, 신도안, 신도내라고도 함)다. 신도안은 부남 북쪽에 있는 큰 마을로, 대궐을 지으려고 공사를 시작하였다가 하륜을 비롯한 조정 신하들이 조운(漕運)의 길이 멀다고 한사코 반대하므로 이를 포기한 후 한양에 도읍을 정하였다. 지금도 사람들은 그곳을 신도(新都)라 부르고 당시 궁궐을 짓기 위해 다듬었던 주춧돌과 석재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이곳으로 전쟁을 피해 나라 안 곳곳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이유는 신도안 뒤로 계룡산의 여러 봉우리가 한데 솟아 있어 넉넉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정감록』과 풍수도참설에서 ‘난을 피하기에 가장 좋은 열 곳’ 중의 하나로 꼽은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중심으로 이름마저 특이한 여러 형태의 신흥 종교가 들어섰다. ‘통일제단’, ‘신령도덕회’, ‘간디연구소’, ‘세계일가공회’, ‘떡보살’, ‘무량천도’, ‘세계종교연합청’ 등의 종교단체들은 계룡산 산봉우리와 골짜기 깊숙한 곳에 예배소와 암자 등을 차려놓고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이들에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1976년이었고, 그때까지 계룡산 신도안 일대에 자리한 유사 종교는 2백여 개가 넘었다. 이문열의 빼어난 소설 『황제를 위하여』는 그중에 한 교파를 배경으로 쓰인 것이다.
갑오년 동학의 무리가 창궐하여 삼남을 휩쓸 적에 황고께서는 아직 천시(天時)가 이르지 못함을 아시고 초연히 산수 간을 소요하고 계시었다. 금강산에 발길이 미쳤다가 내맥을 따라 가장이 있는 계룡산 백석리로 돌아오시던 중, 옛 거울 하나를 얻으셨다. 그 거울을 살피니 놀랍게도 12개의 참문(讖文)이 보였다.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흥하리라. 정씨 아닌 자가 이 거울을 얻으면 크게 흉하리라.
‘황제’는 이문열의 소설 속에서 이 나라에 황국의 기업을 열었고, 계룡산 신도안에서 속세의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 제왕의 위엄으로 뒤죽박죽의 이 세계와 맞서 싸웠다. 세르반테스의 창조물이었던 돈키호테는 돌시네아 공주를 위해 싸웠지만, ‘황제’는 동학농민운동이 끝나고 일제 치하에서 허덕이는 이 땅의 백성들을 위하여 눈물을 머금고 풍찬노숙(風餐露宿)의 싸움을 전개하였다. 돈키호테가 목숨을 걸고 거대한 풍차와 사투를 벌였던 것처럼, 걷잡을 수 없이 헝클어진 이 세계를 긍정하고 포용하기 위한 절체절명의 싸움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갑오년의 동학농민군처럼 끝내 패배하고 말았다.
그 뒤 황제께서는 그야말로 형체는 마른 나무 등걸 같으셨고, 마음은 불 꺼진 재와 같으셨다. 참된 이치를 깨닫고도 그것을 잘하지 않으시며, 어리석은 듯 어두운 듯 무심으로 지내시니, 더불어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최후의 날이 왔다.
이처럼 소설 속에서도 한 시절을 마감한 신도안에서 1976년 3월 자연보호와 새마을운동 등이 전개되면서 이곳의 자칭 ‘교주’들은 산림법 위반과 식품위생법 위반 그리고 사기 혐의로 입건되었다. 그 뒤 계룡산 자락에 계룡시가 들어서고 육해공군의 본부가 들어서면서 들어갈 수도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연산현 관내에는 반야원(般若院)과 초포원(草浦院) 그리고 평천역(平川驛)이 있었는데, 평천역을 두고 정추는 치설시(値雪詩)를 남겼다.
가고 또 가고 질펀한 들을 지나니
등육(滕六, 눈을 맡은 신의 이름)이 하늘 꽃을 뿌려준다.
말 앞뒤에서 성기다가는 다시 빽빽하고,
사람을 맞이하면 바로 내리다가도 다시 비껴서 내리네.
내일의 먼 이별을 애석해하는 기러기는
추위를 무릅쓰고 날 저문 모래 위에 자는구나.
대둔산 © 금산군청대둔산의 옛 이름은 한듬산이라고 하며, 일명 대돈산이라고도 한다. 날씨가 청명할 때 정상에 오르면 겹겹이 포개진 조선의 산들이 한폭의 산수화처럼 발 아래 펼쳐진다.
함지봉(咸芝峯)은 연산면 관동리(官洞里)와 덕암리(德岩里)에 걸쳐 있는 산으로 해발 387미터이며 봉우리가 매우 뛰어나다. 황산벌(황산평)은 연산면 연산리, 표정리, 관동리, 송정리, 천호리에 걸쳐 있으며, 백제 의자왕 때 계백 장군이 신라군과 격전을 벌였던 싸움터이자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신검에게 항복을 받았던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황산은 일명 천호산이라고도 하는데, 현 동쪽 5리에 있다.
신라의 김유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의 소정방과 더불어 백제를 공격하니, 백제의 장군 계백이 황산벌판에서 신라의 군사를 방어할 적에 세 개의 병영을 설치하고 네 번 싸워 모두 이겼으나 끝내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죽었다. 견훤이 고려 태조를 따라 그의 아들 신검을 토벌하니 신검이 싸움에 패하여 항복하였다. 견훤이 번민하고 우만(憂滿)하다가 등창이 발생하여 수일 만에 황산에서 세상을 마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이곳 연산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싸움이 벌여졌던 비운의 전쟁터이고 그 천호산에 고운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 대둔산에 있던 절이 충청도에서도 이름이 높던 신고운사(新孤雲寺)였다. 『여지도서』에 실린 글을 보자.
신고운사는 대둔산에 있다. 이 절은 처음에는 천호산에 있었다. 그 웅장하고 화려하며 넉넉하고 성대한 모습은 충청도에서 으뜸이었다. 병신년(1656, 효종 7)에 이르러 사정이 있어서 헐어버리고 대둔산으로 옮겨 세웠다. 수십여 년이 지나 옛 모습을 거의 회복하니, 이름을 신고운사라고 하였다. 오직 방 하나만이 지금도 옛 절에 남아 있다.
그렇게 번성하고 웅장했다던 신고운사가 현재 천호산에도 대둔산에도 자취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세월이 무상하기는 하다.
쌍계사 대웅전논산시 불명산에 있는 조계종 사찰이다. 고려 초기에 혜명이 창건하였다고 하며, 대웅전은 보물 제408호로 지정돼 있다.
부인리에서 가장 큰 마을인 지밭(계전, 제밭, 제전이라고도 함)마을은 고려 태조 왕건에 관한 일화가 서린 곳이다.
왕건이 견훤과 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 꿈을 꾸었는데,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깊은 못으로 들어가자 뭇 닭이 요란하게 우는 것을 보았다. 잠에서 깬 왕건이 이상히 여겨 마을에 사는 무당에게 물어보려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무당이 급히 볼 일이 있어서 밖에 나가며 딸에게 “오늘 귀한 손님이 오실 것이니, 여러 말 하지 말고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시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딸이 어머니의 말을 잊고서 왕건의 꿈을 흉하게 풀어 태조가 매우 불쾌하게 여기며 돌아가던 길에, 그 무당을 만나서 다시 물었다.
그러자 그 무당은 “서까래 셋을 진 것은 임금이 될 것이요, 깊은 못에 들어가는 것은 용상에 오를 것이요, 뭇 닭이 우는 것은 높은 지위를 찬양하는 징조입니다”라고 꿈 풀이를 해주었다. 이 말을 들은 태조가 크게 기뻐하면서 “만일 그대의 말이 맞으면 뒷날 크게 은혜를 갚겠노라”라고 하였는데, 과연 삼한을 통일하였으므로 그 무당에게 후히 상을 내렸다. 무당이 죽은 뒤에는 부인당을 짓고 제전을 내려주었으므로 그가 살았던 곳을 부인처면이라고 하며, 마을을 제밭 또는 제전이라 하였는데, 변하여 지밭 또는 계전이 되었다.
견훤릉연무읍 금곡리에 있는 후백제의 왕 견훤의 무덤이다. 10세기경에 축조한 것으로, 후백제왕견훤릉(後百濟王甄萱陵)이라고 새겨진 묘비가 있다.
정여립이 활약했던 때뿐 아니라 조선 개국 이래 전해오는 참설인 『정감록』의 연산현 기록에 따르면, 그 무렵 정여립은 승려였던 의연ㆍ도잠ㆍ설청 등과 함께 황해도 지역을 포함한 나라 곳곳을 돌아다녔다. 구월산은 일명 아사달산이라고 해서 국조 단군이 말년을 보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고, 그에 따른 사당이 있으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지닌 곳으로서 큰일을 도모하기에 알맞은 고장이었다. 특히 산이 깊어서 30여 년 전에는 임꺽정이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던 곳이기도 하다. 구월산을 거쳐온 정여립은 계룡산 자락을 지나다가 허물어져 가는 옛 절을 발견한다. 그 절이 바로 개태사였다. 후백제의 진훤이 죽은 후 왕건이 그 추종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창건했다는 설도 있고, 후백제로부터 항복을 받은 지점에 세웠다는 설도 있는 개태사는 그 후 『정감록』에 장차 정씨가 도읍할 길지라는 말이 떠돌았던 절이다. 그 절의 벽에는 이러한 글이 적혀 있었다.
남쪽 나라에 오래 놀던 길손이
계룡산에 이르러 눈이 더욱 밝아졌다.
채찍 소리에 놀란 말이 뛰어오르는 형상이고
산 주룡이 둘러 내려오다 조산을 돌아다보는 형국이다.
아름다운 기운은 총총하게 모였고
상서로운 구름은 애애하게 뜨더라.
무자 기축년에 형통한 운수가 열릴 터이니
태평한 세상이 되기 무엇이 어려우리.
이를 보고 돌아온 정여립이 그 내용을 여러 사람들에게 들려주자, 사람들은 이상한 글이라고 갸웃거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나돈다. 예컨대 정여립 자신이 지은 글을 일부러 절의 벽에 써놓은 것이라거나, 서인 측이 사건 발생 이후 조작해낸 것이라는 설 등이다. 이 글은 일종의 참언을 이용한 예언으로서 풍수지리에 따른 계룡산의 위치에 무자년과 기축년이라는 시간 예언을 결합한 것인데, 기축년에 태평성대가 열릴 운수가 있다는 말이다. 계룡산에 있는 개태사 터가 장차 정씨가 도읍할 길지라고 하였다.
개태사 석불입상 © 유철상태조 왕건이 후백제 신검을 무찌르고 삼국을 통일한 것을 기려 황산을 천호산으로 고치고 그 밑에 개태사를 창건하여 고려 원당으로 삼았다.
그런 이야기가 남아 있는 천호산(天護山) 자락에 개태사(도광사)가 있다. 개태사는 태조 왕건이 후백제 신검을 쫓아 황산의 숯고개를 넘어 마성에 진을 치고, 신검의 항복을 받아 삼한을 통일한 것은 하늘이 도와주었기 때문이라고 하여 황산을 천호산으로 고쳤다. 그리고 그 밑에 개태사를 크게 지어 고려의 원당으로 삼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폐사되어 오백 년을 내려오다가 1930년에 김광영이라는 여승이 오층탑과 매몰된 석불을 찾아 세우는 동시에 절을 건축하여 도광사라 하였다가 다시 개태사로 바꾸었다. 이곳을 지나던 정추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오사모 숲을 뚫고 나가니
보일락 말락 해진 늙은 안장
길 뻐그덕 소리만 높고 낮네.
거친 언덕, 쌓인 눈 속에 인적은 남았으되
얕은 물, 밝은 눈, 놀 속에 말발굽 소리 요란하구나.
관동리(관창골, 관청골, 관동이라고도 함)는 본래 연산군 식한면(食汗面)에 속하며 신라의 화랑 관창이 죽은 곳이라고 한다. 관창에 대한 이야기가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열전」 ‘관창’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관창은 신라 장군 품일의 아들이다. 그는 풍채가 잘나서 소년 시기에 화랑이 되었는데 남과 교제를 잘하고 16세에 말 타고 활쏘기에 능숙하였다. 어느 대감이 그를 태종 대왕에게 천거하였다. 당나라 현경 5년에 왕이 군사를 동원하여 당나라 장군과 함께 백제를 침공하는 데 관창으로 부장을 삼았다.
황산벌에 이르러 양쪽 군사가 맞서게 되었는데 그의 아버지 품일이 관창에게 이르기를 “네가 비록 나이는 어리나 굳은 의지와 기개가 있구나. 오늘이야말로 공훈을 세워 부귀를 얻을 때이니 어찌 용기를 내지 않겠느냐?” 하니 관창이 “그렇게 하오리다” 하고 곧 말에 올라 창을 비껴들고 바로 적진으로 쳐들어가 말을 달리면서 적 두어 명을 죽였다. 그러나 적은 많고 아군은 적었기 때문에 적에게 사로잡혀서 백제 원수 계백 앞으로 끌려갔다. 계백이 투구를 벗겨보고 그의 어리고 용감한 것을 아깝게 여겨 차마 죽이지 못하였다. 이에 탄식하며 말하기를 “신라에는 특출한 사람이 많다. 소년이 이렇거든 하물며 장사들이야 어떻겠는가?” 하고 그냥 살려 보내줄 것을 허락하였다.
관창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아까 내가 들어가서 장수를 베고 깃발을 빼앗지 못한 것을 매우 한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다시 적진에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하리라” 하고 손으로 물을 움켜 마시고는 다시 적진에 돌입하여 격렬하게 싸웠는데, 계백이 그를 사로잡아 머리를 베어서 그의 말안장에 매어서 돌려보냈다. 품일이 관창의 머리를 잡고 소매로 피를 씻으며 말하기를 “내 아들의 얼굴이 산 것과 같구나. 나라 일에 잘 죽었으니 후회할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3군이 이것을 보고 모두 격분하여 뜻을 가다듬고 북을 울리며 고함을 치면서 쳐들어가니 백제가 크게 패하였다. 왕이 관창에게 급찬 위품을 주고 예를 갖추어 장사하였으며 그 가족들에게 당 명주 30필과 20새 배 30필과 곡식 100섬을 부의로 주었다.
관창의 죽음으로 분개한 신라군이 백제군을 무찔러 백제가 패했다는 이야기가 생겨난 것도 모두 화랑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 뒤 이곳을 관창골이라고 불렀는데, 그 말이 변하여 관청골 또는 관동이라 하였다. 신라가 어린 관창을 죽음으로 내몰아 죽게 한 뒤 그 죽음을 기화로 백제군을 무찌른 역사적인 현장이다.
볼마루 북쪽 산기슭에는 백제 의자왕 때의 명장 계백 장군의 묘소가 있다. 계백 장군이 5천명의 결사대를 거느리고 신라 군사를 맞아 황산벌에서 싸우다 전사하자 이곳에 묻었다고 전해지는데,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계백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계백은 백제 사람인데, 벼슬이 달솔에 이르렀다. 당나라 현경 5년에 고종이 소정방으로 하여금 신구도로 대총관을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신라와 함께 백제를 쳤다. 이때 계백이 장군으로 되어 결사대 5천 명을 뽑아서 이를 방어하게 되었다.
그가 말하기를 “일국의 군사로서 당나라와 신라의 대병과 부딪치게 되었으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나의 처자가 사로잡혀 노비 신세가 될까 염려되니, 살아서 치욕을 받는 것보다 차라리 통쾌하게 죽는 것이 낫다” 하고 자신의 처자를 다 죽이고 황산벌에 이르러 세 개의 진을 치고 있다가 신라 군사를 만나 그들과 싸우려 할 때에 군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맹세하였다. “옛날에 월나라 왕 구천이 5천 명의 군사로 오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으니 오늘날 우리들은 각자 용기를 내어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나라의 은혜를 보답해야 한다.”
드디어 악전고투하여 한 사람이 1천 사람을 당하지 못하는 자가 없으므로 신라 군사가 그만 퇴각하였다. 이렇게 네 번이나 싸워서 나아갔다가 물러갔다 하였는데 결국 힘이 모자라서 죽었다.
계백 장군의 묘소볼마루 북쪽 산기슭에는 백제 의자왕 때의 명장 계백 장군의 묘소가 있다. 계백 장군이 5천명의 결사대를 거느리고 신라 군사를 맞아 황산벌에서 싸우다 전사하자 이곳에 묻었다고 전해진다.
계백의 묘라고 전해오는 무덤을 1966년 여름에 파보았으나 별 증거물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계백의 묘라 해서 성역화 작업을 하였다. 부여를 찾았던 다산 정약용이 『부여회고(扶餘懷古)』라는 글에서 계백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강안을 가로막은 철옹성만 보았기에
구름 같은 배들 바다 건널 것 안 믿었네.
술잔 잡아 계백 장군에게 제사 올리려네.
안개에 가린 황폐한 사당 등나무만 얽혀 있네.
그나마 사비성 중턱에 삼충사(三忠祠)가 세워져, 계백과 함께 백제의 충신인 성충과 흥수를 모시고 있다. 그러나 번성했던 백제의 자취는 백제의 옛 땅에서조차 찾을 길이 별로 없다.
17세기 후반부터 사찰을 짓는 데 상인들이 돈을 대면서 문살의 무늬가 화려해져갔다. 이런 경향 속에서 지어진 18~19세기 사찰의 문살은 대부분 화려하고 아름답다. 이곳 쌍계사는 일주문도 없고 대웅전 외에 눈에 띄는 건물이 없어 다소 휑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그러나 대웅전 문살에 핀 정교하고 화려한 꽃무늬는 강화도의 정수사 대웅보전, 부안의 내소사 대웅보전 꽃문살과 함께 한국에서 아름다운 3대 문살로 손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