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윤회의 근본을 밝혀 생사를 벗어나는 길
오온의 허상을 바로 보고, 본래 생사 없는 불성을 깨닫는 길
이하는 입에 고름을 물고 손가락에는 피를 내며 쓰는 더렵고 추한 글이다.
1. 생사를 묻는 자리에서 밖을 향해 구하지 말고 먼저 ‘나’를 살펴보라.
깨달음을 구하는 자들이여,
사람은 태어나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자기 것이라 여긴다.
이 몸을 나라고 하고,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내 생각이라 하며,
살아온 기억을 내 인생이라 한다.
얻은 재물과 명예를 내 것이라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맺은 인연도 내 인연이라 한다.
그러다가 이 모든 것이 변하고 흩어지는 모습을 보면 그제서야 두려워하니,
몸이 늙으면 내가 쇠한다고 여기고,
생각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내가 흔들린다고 여기며,
죽음이 다가오면 나라는 존재 전체가 무너지는 것처럼 여긴다.
이때 윤회를 묻게 되니,
죽은 뒤에 나는 어떻게 되는가.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으로 태어나는가.
지금의 나는 어디로 가며, 다음 생의 나는 지금의 나와 어떤 관계인가.
이 물음은 가볍지 않은 물음이니, 그 물음을 깊이 참구하려면,
지금 ‘나’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살펴야 한다.
지금 붙잡고 있는 나를 밝히지 못한 채 다음 생의 나만 생각하면,
현재의 아집을 미래까지 길게 늘여 놓게 되는 것이다.
중생이 오온을 자기로 잘못 알고,
그 자아와 일체의 상에 집착하여
애착과 증오를 일으키므로 생사에 끄달리게 된다.
그리고 그 해탈의 길을 청정자성에 계합하여
"응무소주 이생기심", 곧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데서 바퀴를 멈추게 된다.
그러므로 윤회를 참구하는 첫걸음은
먼 세계를 상상하는 것에 있지 않다.
지금! 여기!에서 오온을 움켜쥐고 있는 이 집착을 돌이켜 보는 데 있다.
내 몸이라고 하는 몸은 잠시도 그대로 있지 않다.
내 마음이라고 하는 생각도 인연을 따라 일어났다 사라진다.
그럼에도 '아상'은
기쁨이 있을 때는 기쁜 나를 세우고,
분노가 있을 때는 성난 나를 세우며,
두려움이 있을 때는 두려운 나를 세운다.
이처럼 변하는 것들을 거듭 붙잡아 하나의 견고한 주인으로 삼는다.
그 가짜 주인을 주인으로 아는 착각을 깨어내는 것이 생사 공부이다.
윤회의 뜻을 안다는 것은,
생사가 이어진다는 말을 사량분별로 이해하고 기억하는 데 있지 않다.
'어찌하여 생사에 묶이며, 무엇을 밝혀야 그 묶임을 벗어나는지 직접! 확인하는 것'이다.
2. 인과의 차별문과 불생불멸의 평등문을 함께 보아야 한다
윤회를 논할 때 반드시 함께 살펴야 할 두 문이 있다.
하나는 인연과 업과 과보를 밝히는 차별문이고,
다른 하나는 일체의 본성이 공하여 본래 생멸 없음을 밝히는 평등문이다.
차별문에서 보면, 몸과 마음은 인연을 따라 움직이고, 지은 행위에는 그에 따르는 결과가 있다.
탐욕을 좇으면 탐욕의 행이 이어지고,
성냄을 좇으면 성냄의 행이 이어지며,
자비를 행하면 자비의 인연이 펼쳐진다.
무명과 집착으로 업을 지어 과보를 받는 생사의 전개를 이 문에서 설명한다.
평등문에서 보면, 그 모든 현상에는 붙잡을 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다.
나라고 세운 것도, 내가 소유한다고 여긴 것도, 생사라고 이름한 것도
자성의 공적한 자리에서 살피면 독립된 실상으로 붙잡을 것이 없다.
이 자리에는 생이라는 이름과 멸이라는 이름에 갇힐 성품이 없다.
이 두 문을 함께 밝혀야지 하나로 치우쳐선 안된다.
업식이 경계에 집착하여 업인을 짓고 과보를 받는 이치는 부정할 것도 아니거니와,
평등한 진여의 자리에서는 인과와 생멸이라는 이름까지 공함을 등져서도 안 된다.
그리고 이치와 현상의 작용을 모두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사와 리, 사리에 맞아야 한다.
이 두 문은 서로 다른 두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오온과 만물의 근원인 마음, 지금 이 인연을 두루 밝히는 것이다.
현상에만 붙들리면 모든 것을 견고한 실체로 여겨 취하고 버리느라 쉬지 못하며
공이라는 말에만 붙들리면 행위의 결과까지 가볍게 여기기 된다.
그러면 공을 말하면서도 공에 대한 자기 견해를 붙잡고 있는 셈이다.
저기 우켜 잡지 못할 허공도 공이 아닌데, 어찌 진공에 견해를 세울 것이겠는가.
상에 집착하는 소견과 공에 집착하는 소견을 함께 경계해야 한다.
특히 공을 아주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인과를 무시하는 견해가
다시 무명과 윤회의 인을 기르게 되는 법이다.
참으로 깨달으면 '텅 비었으나 또한 가득함'을 알지니
만약 텅 비어 없음만을 안다면 그것은 공에 대한 상견일 뿐이니라.
그러므로 생사를 벗어나려는 사람은 인과를 이치를 바르게 아는 동시에
인과 가운데 움직이는 모든 것을 영원한 나와 내 것으로 붙잡지 않아야 한다.
공을 밝힐수록 행은 정밀해지고, 인과를 밝힐수록 집착은 엷어져야 한다.
이것이 두 문을 함께 살피는 중도의 길이다.
3. 오온을 ‘나’라고 붙잡는 데서 생사의 두려움이 깊어진다
반야심경에는 조견오온개공을 말한다. 오온이 모두 공함을 지혜(불성의 작용)로 비추어 보는 것이다.
몸과 물질의 현상, 받아들이는 느낌, 떠오르는 표상과 생각, 움직이는 마음의 작용, 알고 분별하는 식을 살펴보면,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삶의 모습이 그 가운데 펼쳐져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홀로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몸은 조건에 따라 달라지고, 느낌은 경계에 따라 변하며, 생각과 분별도 일어나고 사라진다.
그 오온의 실체가 공함을 체인하여, 허상을 참된 나로 붙잡아 생사에 끄달려 왔음을 깨닫는 데서 괴로움을 여의는 것이다.
고통을 떠나 고통을 입는 것이요, 즐거움을 떠나 즐거움을 타는 것이다.
여기에서 공하다는 말을 성급히 허무로 알지 말라!
몸이 공하다고 하여 몸을 함부로 다루라는 뜻이 아니니,
느낌이 공하다고 하여 고통을 모르는 체하라는 뜻도 아니다.
마음을 내어 몸을 부리되, 그것을 영원히 붙잡을 수 있는 것으로 삼는 착각을 깨어내라는 것이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면서 거울 속 형상을 실제의 자기라고 붙들면,
거울이 흔들릴 때마다 자기가 흔들린다고 여긴다.
형상이 흐려지면 자기가 사라지는 것처럼 두려워한다.
께닫기 전의 중생이 오온을 대하는 태도도 마치 이와 같지 않은가.
몸의 변화가 곧 나의 파괴라고 여기고,
생각의 흔들림이 곧 나의 훼손이라고 여기니,
변하는 것마다 지켜야 할 대상이 되고,
그리하여 살아 있는 동안에도 늘 잃을까 두려워하고,
죽음 앞에서는 그 두려움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것이다.
오온개공을 관한다는 것은 이 붙잡음의 실상을 바로 보는 것이다.
공이라는 관념을 덧씌우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무엇이 일어나며, 무엇을 나라고 주장하고, 무엇에 끄달리는지를
선정에 들어 체득 체달해야 하는 일이다.
뜨거운 것에 데이기 전의 아이가 머리로는 뜨거운 줄을 안다고 해서
만졌을 때에 뜨거움을 아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깨달음과 육신의 감각을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깨달은 이에게도 육신의 고통이 따를 수 있으나,
그 고통의 실체가 공함을 알아 거기에 침잠하지 않는 것이다.
고통을 떠나 고통을 입는 것이요, 즐거움을 떠나 즐거움을 타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사를 벗어난다는 말을
몸의 모든 변화와 감각이 사라지는 일로 잘못 알지 말라.
몸의 인연은 몸의 인연대로 드러난다.
진정한 공부는 그 가운데서 허망한 자아를 세워 끊임없이 붙잡는 미혹(착각)을 타파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4. 업식의 상속과 자성의 청정함을 바르게 살펴라.
윤회를 이해하려 할 때 사람들은 흔히,
몸 안에 어떤 완성된 주인이 들어 있다가 몸이 죽으면 다른 몸으로 옮겨 간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이름과 성격과 기억을 가진 내가 옷만 바꾸어 입듯 계속 살아간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생각하면, 지금 붙들고 있는 자아를 그대로 실체화하는 어리석음이다.
윤회의 근본 문제는
'무명으로 인하여 오온을 나로 붙잡고, 경계를 취하여 업인을 지으며, 그 업에 따라 생사를 받는 데' 있다.
거짓 나에 대한 집착이며, 업의 씨를 지어 육도의 과보를 받는 것이다.
여기서 업식은 자성과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다른 물건으로 잘못 알지 말라.
행업의 인을 갈무리하는 함장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또한,
그것이 자성을 떠나 별도로 존재하는 무엇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자성이 본래 청정하다고 하여 중생의 미혹과 업이 대수롭지 않은 것이 아니다.
또 중생이 미혹하여 업을 짓는다고 하여 본래의 성품이 어떤 더러운 물건으로 굳어지는 것도 아니다.
청정한 본성을 밝히지 못한 채, 일어나는 상과 생각을 붙잡아 스스로 중생 노릇을 하는 것이다.
중생이란 스스로 부처인 줄을 깨치지 못한 부처요
각인이란 스스로 부처인 줄을 깨친 중생인 것이다.
한 번의 탐욕을 좇아 행동하면, 그 행동은 다시 탐욕을 좇기 쉬운 인연을 만든다.
행은 반복되면 관성인 습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거듭 성내면서 살아가면, 마주치는 경계마다 성낼 이유를 찾는다.
마치 성냄을 자아를 확인하는 에너지원으로 삼듯이 살아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나는 본래 이런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세우고,
스스로 지어 온 것을 자기의 변하지 않는 본질인 양 붙잡는다.
그러나 지금의 익숙함이 곧 자성은 아니니,
오래 반복했다고 하여 그것이 본래면목인 것이 아니다.
업에 익숙해진 모습과 본래의 성품을 혼동하면, 스스로 만든 속박을 운명론처럼 여기게 된다.
윤회의 뿌리를 밝힌다는 것은, 업에 끄달리는 이 미혹을 밝혀 깨어내는 일이다.
몸의 인연이 끝나는 것과 무명의 뿌리를 깨닫는 것은 같은 공부가 아니다.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살아 있는 지금!
업을 짓는 집착과 그 집착을 나라고 붙드는 소견을 돌이켜 단박에 깨어내야 한다.
5. 십이연기는 미혹이 생사를 이어 가는 이치를 풀어 놓은 것이다.
반야심경에서는 무명에서 노사에 이르는 십이연기를 들어 윤회의 인연을 가설하여 설명한다.
무명·행·식·명색·육처·촉·수·애·취·유·생·노사.
자성을 밝히지 못한 무명으로 업을 짓고,
그 업과 식의 인연으로 몸과 마음을 받아,
감각의 문을 통해 경계에 접촉하고 느낌을 받는다.
그 느낌을 좇아 구하고, 붙잡고, 업을 이루며,
다시 생을 받아 늙고 죽는 인연을 가설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 과거의 업과 금생의 생명, 다시 업보에 따라 태어나는 생의 관계가 십이연기 설인 것이다.
무명은 이 공부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살펴야 할 아상의 뿌리이다.
나 아닌 것을 나로 알고, 항상하지 않는 것을 항상한 것처럼 붙잡으며, 본래의 성품을 밝히지 못하는 미혹이니
모든 번뇌와 고통의 뿌리인 것이며 곧 '악'인 것이다.
행은 그 미혹 가운데 지어 가는 업이다.
식과 명색, 육처에 이르면 생명이 몸과 마음의 구체적인 인연으로 펼쳐지니,
촉과 수에서는 경계와 만나고, 그 만남에 따라 고락을 느낀다.
애와 취에 이르면 그 느낌을 좇아 구하고 움켜쥐고,
유와 생과 노사에서는 그와 같이 지은 업과 존재의 인연이 다시 생사로 이어진다.
이 가설을 들을 때 이름 따위에 매이지 말라.
자기 삶에서 붙잡음이 어떻게 자라는지
선정에 들어 저런 것들이 어치 일어나고 사라지는지를 체득 체달해야 하는 것이다.
좋은 느낌이 일어나면 더 오래 머물기를 바라고,
그 바람이 굳어지면 반드시 가져야 한다고 여기며,
그것을 얻기 위하여 거짓말을 정당화하고,
남을 해치는 일도 가볍게 보며,
얻은 뒤에는 잃지 않으려고 더욱 움켜쥔다.
처음의 느낌 위에 갈애와 취착이 겹겹이 더해지는 것이다.
싫은 경계를 만날 때도 같다.
불쾌한 느낌 위에 ‘나를 이렇게 대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붙고,
그 생각 위에 원망과 보복의 의지가 붙으며,
다시 말과 행동으로 드러난다.
한 경계가 지나갔어도 마음은 계속 그 경계를 되살려 새로운 업을 짓는다.
그렇다고 일상 생활에서 감각을 없애고 생각을 마비시켜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보고 듣느냐만큼, 그것을 어떻게 붙잡고 어떻게 행하느냐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잘못된 일은 분명하게 가려 바로잡아야 하되,
다만 바로잡는 마음 가운데 탐욕과 보복의 집착을 더하여,
자신과 남을 다시 얽어매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가설로 한 연기의 가르침은 이처럼 수행할 길을 드러낸다.
조건 따라 이어지는 것이므로,
그 조건을 밝히고 미혹을 께어내는 수행길이 밝혀지는 것이다.
6. 전생·현생·내생과 생각생각의 윤회를 함께 살펴라.
『壇經解題』에는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는
전생·현생·내생이며,
또한 앞 생각·지금 생각·뒷 생각이라는 말이 있다.
여러 생에 걸친 윤회의 가르침을 지금의 수행에 함께 살펴야 한다.
현생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만으로 윤회의 뜻 전체를 다 설명했다고 여겨서도 안 되며,
다음 생만 생각하면서 현재의 업행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된다.
한 생각이 다음 생각을 붙잡는 것을 보라.
아침에 들은 말 한마디를 저녁까지 끌고 다닌다.
상대는 이미 그 자리에 없으나, 내 생각 속에서는 계속 나를 모욕하고 있다.
그 말을 거듭 떠올리면서 거듭 성내고, 이미 지나간 일에 현재를 낭비하지 않는가?
이렇게 앞 생각이 지금 생각을 붙들고, 지금 생각이 뒷 생각을 준비하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한 번 일어난 원한을 놓지 못하여 날마다 다시 만들고, 마침내 그것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으니 얼마나 안타까운가.
앞 생각과 지금 생각과 뒷 생각이 이어지는 얽매임에,
경계에 대한 좋고 싫음이 일어났을 때 놓지 못하고 계속
이전 생각에 끄달리는 것이 또한 짧은 윤회의 단면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
지나간 경계를 계속 새로 만들어 자신을 묶는지,
일어나는 생각을 나의 영원한 정체성으로 삼는지,
익숙한 감정 때문에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지 살펴야 한다.
좋은 경계도 살펴야 한다.
칭찬받은 나를 붙들고,
성공한 나를 붙들고,
남보다 낫다고 여기는 나를 붙들면,
그 나를 지키기 위하여 다시 두려워하고 다투게 된다.
윤회의 속박은 괴로운 감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즐거운 경계라도 그것을 영구한 나의 자리로 삼으면 잃을까 두려워하게 된다.
따라서 지금 한 생각에서 집착의 성질을 살피는 공부여야 연기 윤회를 바르게 수행에 적용하는 것이다.
다만 잠시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이유만으로 생사의 근본을 다 밝힌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 편안함도 취할 경계로 삼지 않고, 더욱 근본으로 돌이켜 참구해야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7. 견문각지와 본래의 마음을 혼동하지 말라
수행자들이여,
사람은 흔히 ‘나는 지금 보고 듣고 알고 있으니,
이 아는 것이 곧 참마음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고 듣고 분별하여 아는 것을 마음으로 삼으므로
도리어 견문각지에 가려 맑고 밝은 본체를 보지 못한다.
보는 것이 있고 보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어찌 절대평등성지일까보냐!
이 경계는 매우 세밀하다.
생각을 따라가는 자신을 보다가,
어느 순간 생각을 바라보는 자리에 서는 듯할 수 있다.
그러면 ‘생각은 변하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나는 변하지 않는다’고 결론짓기 쉽다.
그러나 그때 붙잡은 ‘지켜보는 나’가 어떠한 것인지 다시 살펴야 한다.
미세한 주인을 새로 세웠다면, 거친 생각에서 벗어난 듯하면서도
여전히 아상의 울타리 안에 머무를 수 있다.
‘나는 모든 것을 지켜보는 존재’라는 생각 또한 붙잡으면 소견이 된다.
물론 여기까지 이르른 것도 여러 생의 쌓은 공덕이요 마지막 관문의 앞에 이르른 수승한 것이나
물은 100도에서 끓지 99.9도에서 끓는 것이 아니듯
불이문을 깨고 둘 아니게 깨쳐야 비로소 깨침이지 그것을 깨침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공적하고 밝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여,
특별히 선명한 의식 상태를 찾아
그 상태에 오래 머무르는 것을 구경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
경계가 고요할 때의 편안함과 경계가 복잡할 때의 산란함을 비교하면서,
고요한 상태만 자기의 참모습이라고 고집하기 쉽기 때문이다.
근본 마음과 일으킨 마음을 구분하여 살펴야 하니,
비유하자면 물과 파도로 비유할 수 있다.
물은 마음에, 파도는 생각에 비유되며,
그 뜻은 청정한 본성에서 집착 없는 마음을 내어 부처의 작용을 일으키는 것에 있다.
여기에서도 물과 파도를 두 개의 독립된 물건처럼 갈라 세우지 말라.
비유는 단지 비유일 뿐, 모든 면에서 정확한 설명은 아니다.
물과 파도가 서로 여의 수 없으니, 체와 용을 분명히 살피되 체와 용이 둘 아닌 것이다.
깨달은 후에도 보고 듣는 작용을 없애야 본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각인은 보고 들으면서도 그 경계에 물들지 않고,
작용하면서도 작용하는 나를 세우지 않는 것이다.
이때의 밝음은 알음알이를 덕지 덕지 모은 지식과 사량분별로 대신할 수 없다.
본래의 성품을 둘 아니게 직접 체득 체달하여,
(오해하지 말라. 체득할 것과 체득하는 자가 있는 갈라진 경계가 아니니)
경계와 자아에 대한 집착이 끊어진 지혜로 작용하는 것이다.
8. 참나와 무아의 뜻을 함께 밝혀라.
옛 조사들께서 자성·진여·불성·본래면목과 함께 ‘참나’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거짓 나에 대한 집착에서 깨어나 불생불멸의 참나를 밝히는 것을 깨달음이라 하였다.
이 불조들의 말씀을 받아 들일 때, 평소에 붙잡던 자아를 그대로 관념화하여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지금의 성격과 취향, 명예와 소유욕, 남보다 높아지고 싶은 마음을 가진 내가
죽지 않고 지속된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 속에는 여전히 지키고 싶은 개아가 남아 있는 것이라.
무아의 가르침은 이 개아에 대한 집착을 깨어내기 위한 방편이니,
참나라는 말은 그 집착을 여의어 본래의 성품에 계합하도록 이끌기 위한 사탕일 뿐.
그러므로 무아를 말하면서 단멸에 빠져서도 안 되고,
참나를 말하면서 거대한 아상을 세워서도 안 된다.
본래의 성품은 형상과 처소로 한정할 수 없고,
안과 밖으로 가를 수 없으며,
어디에 머물러 있다고 붙잡을 수 없는 공적한 자리이다.
그러면서도 지혜의 작용이 갖추어져 있으므로 진공묘유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법신과 육신을 두 실체로 나누는 견해도 여기서 경계해야 한다.
『壇經解題』에는 육신은 생멸하고 법신은 항상하니,
어느 몸이 적멸하고 어느 몸이 즐거움을 받느냐고 묻는 대목이 있다.
이에 육조대사는 육신 밖에 따로 법신을 세우고,
생멸을 떠난 곳에서 적멸을 찾으며,
열반의 즐거움을 받을 몸을 다시 상정하는 견해를 꾸짖었다.
이 말씀을 따라 살피면, 참나를 몸속에 감추어진 별도의 주인이나,
죽은 뒤 밖으로 빠져나오는 하나의 물건처럼 붙잡을 수 없느니,
또한 몸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단절되어 아무것도 없어진다는 소견으로 몰아갈 수도 없는 것이다.
몸과 마음을 둘로 갈라 한쪽을 영원한 소유자로 세우려는 망상을 깨어야 한다.
‘내가 영원히 즐거움을 받겠다’는 미세한 취착까지 깨어져야 한다.
(밝은 것이 드러나면 어두운 것은 스스로 물러나니라.)
여기에서 선지가 깊어지는 것이다.
생사를 벗어나는 공부는 자아가 영원한 자리를 차지하는 성취가 아니라,
자아를 세워 취하고 버리던 미혹의 근본을 밝히는 공부인 것이다.
그러니 참나라는 말도 그 뜻을 드러내는 사탕일 뿐,
그 이름을 붙잡아 새로운 형상을 만들면 다시 언어놀음에 빠져 뒹굴 뿐이다.
9. 무명도 없고 무명의 다함도 없다는 뜻
無無明 亦無無明盡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의 다함도 없다.
앞에서는 무명이 윤회의 근본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무명도 없고, 그 무명이 다하는 것조차 없다고 하니,
이 말씀은 평등한 본성의 자리에서 살펴야 한다.
무명을 어떤 단단한 실체로 세우면, 그것을 없애는 나도 함께 세우게 되니,
‘내 안에 거대한 무명이 있고, 내가 그것을 제거하여 깨달음을 얻는다’는 그림을 만든 뒤,
그 그림을 참된 실상처럼 붙잡게 된다.
그러나 자아의 실상이 공하면,
그 자아를 바탕으로 세운 무명도 독립된 실체로 붙잡을 수 없지 않겠나.
무명이 실체로 있지 않으니,
실체인 무명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도 세울 수 없다.
이와 같이 무명과 노사, 그 다함까지 본래 공한 도리로 볼 줄 알아야 한다.
꿈속에서 누군가에게 붙들렸다고 하자.
꿈속에서는 속박이 절박하고,
벗어나려는 몸부림도 절박하지만
꿈을 깨어 보면, 꿈속의 밧줄이 실제의 자기 몸을 묶고 있었던 것은 아닌 것이지 않나.
그렇다고 꿈꾸는 동안의 두려움이 스스로 해결되어 있었던 것 또한 아니다.
꿈속에서는 분명히 두려워하고 헤맸으니, 바로 이 점을 잘 보아야 한다.
본래 속박할 실체가 없다는 이치와,
미혹한 동안 속박을 겪는다는
사실을 함께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 공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공부를 할 것이 없다. 깨달을 필요 없다. 공부 다 마쳤다 그런 것이 아니다.
그 도리를 자기에게서 분명히 체득 체달해야 하는 것이다.
보는 주체와 보이는 객체 모두 공적하니
나고 죽음이나, 나고 죽음을 여의는 것이나 모두 허공꽃이네.
본래 묶인 것이 없는데 풀려날 것이 어디 있을 것이며
다만 귀로 보고 눈으로 듣노라.
생사라는 이름에 묶여서는 안 되며,
열반이라는 이름에도 빠져서도 안 된다.
속박을 벗어났다는 자기 모습까지 붙잡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참으로 깨닫는다면 어찌 이런 미혹함이 남을 것이 있겠는가.
그때 생사 없는 자성은 미래의 어느 때에 새로 성취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미혹하여 밝히지 못했던 본래의 성품을 체달하는 것일 뿐이다.
10. 무주와 무념을 현재의 수행에 적용하라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은 이 공부가 수행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일러준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남의 말을 들을 때는 분명히 듣고,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바르게 하며,
누군가를 도울 때는 필요한 도움을 주어야 하지만
들은 말에 자아를 묶고,
한 일에 공을 세우고,
베푼 일을 자기의 우월함으로 축적하는 집착을 떠나야 한다.
『壇經解題』는 무념을 종으로, 무상을 체로, 무주를 근본으로 삼는다고 했다.
무상은 상 가운데서 상을 여의는 것이고,
무념은 생각하면서도 생각에 끄달려 집착하지 않는 것이며,
무주는 경계에 머물러 스스로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이 일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수행이 무너졌다고 여기지 말 것이며,
생각을 없애려는 또 하나의 생각으로 오히려 생각의 꼬리가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고요해야 한다는 집착 때문에 작은 소리에도 성내고,
망념을 없애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에 자신을 괴롭힌다면,
수행의 방향을 다시 바로 잡아야 한다.
모든 생각을 없애는 것을 수행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이는 바르게 수행하면 선정이 깊어지며 자연 이뤄질 것이지
억지로 생각을 일으켜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또 진여자성이 작용하여 모든 것을 명료하게 분별하되,
근본의 진여는 물들지 않는다.
지혜는 사물을 구별하지 못하는 멍한 상태가 아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똥과 된장을 구분하지 못하고 설탕과 소금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어찌 지혜라 할까.
경계마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행하면서 붙잡음을 비추는 것이 실참의 바탕이다.
한 번의 편안함을 붙잡기보다, 삶의 구체적인 자리에서 아집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밝히는 것이다.
11. 말로 이해한 것과 자성을 체달한 것을 분명히 하라
윤회와 무아, 공과 불생불멸을 지식을 쌓아 사랑분별로 설명할 수 있게 되면
그것이 공부가 깊어진 듯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말이 익숙해진 것과 자기의 생사 문제를 밝힌 것은 다른 문제이다.
경전의 문장을 잘 기억하여 어떤 질문에도 답할 수 있어도,
정작 자신이 손해를 보거나 비난을 들었을 때 아집에 온전히 끌려간다면,
그 경전의 도리가 자기에게서 참으로 체득 체달된 것인지 되돌아 보라.
그렇다고 조금 흔들릴 때마다 스스로를 다그치며 절망하라는 것은 아니다.
지금 드러난 미혹을 공부의 자리로 삼고
자기의 상태를 과장하지 않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며,
실제로 붙잡는 바를 돌이켜 참구해야 한다.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고 궁구하는 것으로 돌이켜야 한다.
12. 지금 이 자리에서 생사의 근본을 참구하라
몸의 인연은 변한다.
사랑하는 인연도 변하고,
익숙한 생각도 변한다.
도무지 시공간 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란 없다.
아니 시공간 그 자체조차 변한다.
이 변화를 붙잡아 영원히 그대로 두려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살아 있는 동안에도 쉼 없이 두려워하며 살게 된다.
그러므로 무상함을 바로 보고무상한 현상을 나의 전부로 삼는 집착을 깨어내라.
윤회를 말할 때에는 자신이 짓는 업을 살피고,
무아를 말할 때에는 아집을 살피며,
참나를 말할 때에는 그 말로 또 하나의 실체를 만들고 있지 않은지 살펴라.
공을 말할 때에는 인과에 어둡지 않아야 하고,
해탈을 말할 때에는 본래 묶인 적 없음에 밝아야 한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대는 지금 무엇을 붙잡고 있는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여기는 자기 모습은 무엇이며,
그 모습 때문에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가?
지난 일을 거듭 되살려 성내고 있지는 않은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현재의 마음을 묶어 두고 있지는 않은가?
그 붙잡음이 드러나는 자리가 곧 공부할 자리니,
붙잡음을 보았으면 바르게 돌이켜 참구하고 참구하라.
본래 청정하다는 말을 가지고 게을러지지 말고,
지금 미혹하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영원히 가두지도 말라.
본래의 성품을 밝히겠다는 발심으로 정진하되,
성취를 탐하는 마음 높은 단계에 이르려는 마음까지 함께 살펴 깨어내야 한다.
윤회의 근본을 밝히는 공부는 지금 이 생을 떠나 따로 놓여 있지 않다.
지금의 인연에서 아집을 돌이켜 보고
본래면목을 참구하며,
머무름 없이 지혜를 쓰는 데 그 길이 열린다.
오온을 나로 잡아 생사의 길을 헤매고
경계를 내 것 삼아 생각마다 얽매였네.
돌이켜 제 성품을 바로 밝히고 보니
물결은 일어나도 물을 떠난 적 없구나.
공한 줄 밝게 알되 인과에 어둡지 않고
얻었다는 마음 없이 천리 만리를 다니니
머무름 없는 반야가 인연마다 응하여
만개의 호수에 만개의 달이 뜨는구나.
-#-#-#-#- 반박이 있다면 그냥 그대가 옳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