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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인생극장>
가난한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을 향한 돈보스코 성인의 열정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그가 남긴 어록 중에 어떤 표현들을 가슴이 섬뜩해질 정도입니다.
“한 청소년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악마에게도 절할 용의가 있습니다.”
실제로 돈보스코 성인은 자신이 시작한 청소년 구원 사업의 존폐 위기에 처하자
그야말로 ‘악마 같은’ 존재에게도 머리를 공손히 조아렸습니다.
때로 아이들을 위한 생계비 잔고가 아슬아슬해지자
자존심이 남달리 강했기에 죽기보다 힘들었던 일, 거드름 피우는 부자들을 찾아가 손을 벌렸습니다.
사랑하는 청소년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돈보스코의 극진한 부성애를 잘 엿볼 수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자신의 딸의 치유를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이교도 여인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거듭 청이 거절당하고, 심지어 ‘강아지’ 소리까지 들었지만
단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딸만 살린다면 그 어떤 수모도 상관없다는 이교도 어머니의 극진한 모성애가
돈보스코 성인의 뜨거운 부성애와 겹쳐집니다.
만민형제애를 지니셨던 예수님, 열린 사고의 소유자셨던 예수님, 대자대비하신 예수님이셨지만 오늘 발언은 조금 ‘거시기’합니다.
듣는 사람에 따라서 큰 오해를 살수도 있는 발언이었습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한 차원 더 끌어올리기 위해서 때로 질책도 하시고 때로 모욕도 겪게 하십니다.
더 나아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큰 시련과 고통을 보내십니다.
이교도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조금은 ‘특별한’ 말씀은 이렇게 큰 틀에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때로 우리가 조금도 원치 않았던 십자가를 보내십니다.
때로 칠흑처럼 어두운 밤길을 걷게도 하시고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도 건너게 하십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기가 막힌 일을 겪게 하시는가?’할 정도의 괴로움도 겪습니다.
심연의 바닥까지 내려가는 비참함도 마주하게 하시며 너무 큰 고통으로 인해 비명을 지르게까지 하십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당장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세월이 흐르면 깨달음의 순간이 올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었음을,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더 키워주기 위한 예방주사였음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비로 충만하신 분, 우리가 잘되기만을 바라시는 분,
그래서 결국 시련의 과정을 잘 극복한 우리에게 큰 상급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인생극장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실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
<우리는 진정한 협력자일까?>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오늘의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아담의 협력자로 온갖 들짐승과 날짐승을 만들어주셨음을 얘기하는데
사람과 마찬가지로 손수 흙으로 빚어 만들어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하게 다른 짐승들을 만들어주셨지만
사람은 그들을 알맞은 협력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마치 당신의 실수를 인정하시듯 여자를 협력자로 보내주시니
그제야 아담은 여자를 반기며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하고 외칩니다.
그러므로 이 얘기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대한 창세기의 답일 뿐 아니라
사람과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에 대한 창세기의 답이기도 합니다.
먼저 사람과 다른 짐승과의 관계를 보겠습니다.
창세기에서 식물은 인간과 동물의 먹이이지만
동물은 인간의 먹이가 아니라 협력자이고, 귀한 협력자이기에 사람이 이름을 붙여줍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의 이름을 붙여주면 한 가문의 사람이 됩니다.
아줌마라고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불러주면 연인이 됩니다.
개나 고양이도 이름을 불러주면 인격적 대상이 됩니다.
이렇게 귀한 협력자로 하느님께서 주셨지만
그러나 사람이 보기에 짐승은 알맞은 협력자가 아닙니다.
혼자 있는 인간이 보기 좋지 않아 협력자로 주어진 존재이지만
외로움을 달래주는 존재이기는 해도 진정한 협력자는 아닌 것입니다.
요즘 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키우는 개를 반려견이라 한다지요.
애완견(愛玩犬)은 완구(玩具)처럼, 다시 말해서 어린 아이의 장난감처럼 사랑을 하지만 가지고 놀다 싫증나면 버릴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반려견(伴侶犬)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 중에는 사람과는 잘 지내지 못하고 개를 자기의 반려자(伴侶者) 또는 동반자(同伴者)로 삼는 사람도 있고,
독거노인들처럼 외로워서 개를 사람보다 더 반려자로 삼는 분도 있지요.
그러나 개는 여기까지이고 진정한 협력자는 아닙니다.
왜냐면 협력자란 둘이 힘을 합쳐 뭔가를 이루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반려자가 그저 옆에 있어 주는 사람이라면 협력자는 옆에 있을 뿐 아니라 함께 무엇을 이루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함께 무엇을 이루는 것입니까?
바로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함께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인간관계, 그중에서도 부부관계는 바로 이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함께 이루어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사랑을 처음 시작한 풋사랑 때는 서로만 원하고 서로만 바라봤다면
사랑의 결실로 자녀를 낳았을 때는 그 자녀를 같이 바라보고 힘을 합쳐 그 자녀를 키우는 것으로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이어가고,
자기 자녀를 다 키우고 나면 더 넓은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께 같이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자신을 반성해야 합니다.
혹시 나는 반려동물은 이름을 부르며 끼고 살면서도
정작 사람들과는 등 돌리고 담 쌓고 살지는 않는지.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당신 창조사업을 함께 이뤄가는 존재이길 바라시는데
우리 인간은 사랑의 협력자가 아니라 이익의 경쟁자로만 살아가지는 않는지.
- 작은형제회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저는 6남매 중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식구가 많아서 화목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조금 배고파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먹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문제는 가장 어린 저이기에 아무리 노력을 해도 많이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불공평한 것만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가장 어리다는 이유로 가장 적은 몫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늘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많이 가졌지요.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작은 누나에게만 무엇을 주는 것입니다.
가장 적은 몫을 받는 것도 억울한데, 이제는 저를 빼놓고 누나에게만 주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에 어머니께서 누나에게 주신 것을 몰래 빼내어 한 움큼 훔쳐 먹었지요.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는 잠시 뒤에 심한 경기(驚氣)를 일으켜서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가족 중에는 제가 왜 경기가 났는지를 아무도 모르지만, 저는 그 이유를 알고 있지요.
바로 당시 누님께서 먹고 있었던 감기약을 몰래 그것도 많이 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어린 제가 가장 적은 몫을 먹는 것이 당연한데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습니다.
또한 감기약인데도 누님에게만 무엇인가를 준다고 억울해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이런 처사가 과연 받아들이기 힘들고, 억울한 것일까요?
지금 생각하면 당연히 아닙니다.
분명히 불공평한 것이 아닌 너무나도 공평한 행동이셨습니다.
하지만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나중에 약까지 몰래 훔쳐 먹는 일까지 벌이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의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우리가 주님께는 계속해서 이런 불평불만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 그런 불공평한 처사를 통해서 우리를 힘들게 하시냐고 말씀드린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역시 나를 위한 것이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굳게 믿고 따르는 진실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이방인 여인을 보십시오.
그녀는 예수님으로부터 강아지 취급까지 당합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이 불공평한 처사에 대해 불평불만을 던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아지들도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는다고 하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믿음을 드러내는 그 말을 통해 이방인 여인은 자신이 원하는 가장 큰 것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불공평한 처사에 불평불만을 던지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께 믿음의 표현을 던지는 것.
그때 가장 확실한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 안식년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 갈비뼈로 친구를 사귀어라 >
우리는 ‘군중속의 고독’이란 말을 많이 듣습니다.
우리 또한 혼자 남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친구를 사귀려고 하지만 내가 외로울 때 막상 전화기를 잡으면 편하게 전화 할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더 외로워지는 것은 전화번호는 수백 개에 달한다는 것입니다.
그 수많은 사람 중에 편하게 불러낼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외로운지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서도 핸드폰으로 끊임없이 또 다른 타인과 문자를 주고받습니다.
단 한 사람과도 온전한 소통을 할 줄 모르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친구를 사귀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그의 집은 몹시 가난했습니다.
그의 어릴 적 친구들은 그를 진정으로 도와주고, 먹을 것이 있으면 항상 반을 나눠주곤 했습니다.
30년이 흘러 그는 성공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떠나온 고향이 그리웠던 그는 고향으로 가서 어린 시절 친구들을 불렀습니다.
초대받아 온 친구들은 선물로 기쁜 마음을 표시했습니다.
그런데 한 옛 친구가 손에 술병 하나를 들고는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미안하네. 내가 늦었군.”
모두 그 친구가 어렵게 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몸을 일으켜 친구가 든 술병을 받아 들고는 모두의 잔에 따라 주었습니다.
부자는 “맛이 어떤가?”라고 모두에게 물었습니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서로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친구는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부자는 잠시 말이 없다가 천천히 입을 떼었습니다.
“근래 내가 여러 곳을 돌아다니고 각양각색의 술을 먹어보았네만 오늘 술처럼 이렇게 맛있고 나를 감동시키는 건 없었네.”
부자의 눈이 어느새 촉촉이 젖어있었습니다.
그 친구도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술병에 담긴 것은 술이 아니라 물이었습니다.
그 물병은 너무도 귀한 우정을 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약삭빠른 청지기’ 비유를 통해 그 청지기가 주인의 재물로 친구를 사귄 것처럼,
우리 또한 “부정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정한 재물’이란 무엇일까요?
생명까지 포함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나의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모두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의 것을 준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주님의 것을 주고 있는 것이니 ‘부정한 재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안에 한 가지 중요한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즉,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것을 내어주지 않고서는 친구를 사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아담을 위해 짝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냥 만들면 되겠지만 하느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의 갈비뼈를 이용하셨습니다.
갈비뼈를 빼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 희생의 재료로 하와를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하와는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답을 해 주어야 하는 마음을 언제나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친구를 만드는 방법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외롭게 된 이유는 자신 것부터 챙기는 이기주의가 팽배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갈비뼈를 남에게 주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 친구를 사귈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신장 하나라도 아낌없이 떼어 줄 줄 압니다.
그런 사람은 외로울 수 없습니다.
세상에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불평하지 말고,
진정으로 나는 나의 갈비뼈를 상대에게 내어주려 했는지부터 돌아보아야 합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믿음만이 살길이다>
어떤 생선장수가 마을에 가게를 내고 간판을 달았습니다.
“이곳에서 신선한 생선을 팝니다.”
한 사람이 들어와서 말했습니다.
“‘신선한’은 빼시오. 다 신선한 생선 아니오?”
“그렇군요.”
그래서 “신선한”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이곳에서”는 빼도 되지 않을까요? 다 알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그래서 그 글자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팝니다.’라는 말도 빼야지요.
거저 주는 것이 아니니까요.”
듣고 보니 그래서 그 글자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생선’이라는 글자도 필요 없습니다.
근처에 오기만 해도 생선 냄새가 나니까요.”
그래서 간판 없는 생선가게가 되었습니다.
결국 고객들은 그 사람이 생선 장사를 하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것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 그 사람의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지는 않되 흔들리지 않는 주관과 소신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이교도 부인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하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결국 마귀는 떠나갔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선적인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은총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헛배가 불러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억지로 음식을 권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결국 믿음을 가진 이교도에게도 구원의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구원의 혜택은 유다인 또는 이교도라는 외적인 관계보다 철저한 믿음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이교도 여인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강아지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여인이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청하며 기대하는 자세는 예수님께 대한 그녀의 신뢰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딸에게서 더러운 영이 떠나갔습니다.
믿음은 바로 하느님께서 나를 외면하고 감추어 계신 분처럼 보일 때 더 큰 신뢰로 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주님의 능력은 드러납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갈라 5,6).
바리사이들의 경건과 신앙이 ‘표면적’ 믿음이었다면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이교도의 믿음은 ‘속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헛배가 부른 신앙인이 아니라 떨어뜨린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겸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믿음>
어떤 여자가 예수님께 와서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그 여자는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여자는 집에 가서 마귀가 나가고 없는 것을 확인합니다(마르 7,24-30).
이 이야기와 요한복음에 있는 '어떤 왕실 관리의 이야기'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관리가 예수님께 와서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그는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라고 다시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집으로 가는 도중에 종들이 마중 나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전해줍니다(요한 4,46-51).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여자 입장에서는 냉정하게 거절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이 말씀은 그 여자가 진정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자녀들의 빵을 먹기를 원한다면, 먼저 강아지 상태에서 벗어나서 자녀가 되어라."입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도
그 관리 입장에서는 냉정하게 거절하시는 말씀인데,
이 말씀도 그가 진정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말씀이고,
그래서 이 말씀은, "표징과 이적만 보지 말고 먼저 나를 믿어라."입니다.
딸을 고쳐 달라고 청한 여자는 '이교도'입니다(마르 7,26).
우상을 숭배하는 여자였다는 것입니다.
그 여자는 하느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도 믿지 않지만,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왔습니다(마르 7,25).
당시 유대인들은 우상숭배를 하는 이방인들을 '개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마태 7,6)
아들을 고쳐 달라고 청한 관리는 아마도 유대인이었을 텐데,
예수님을 믿은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셔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왔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식 때문에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고,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고, 그 소문 때문에 희망을 가졌고,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왔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냉정하게 거절하시는 것 같은 말씀을 하셨지만,
그 여자는 물러서지 않고 더욱 간절하게 청합니다.
강아지들도 부스러기는 먹는다는 여자의 말은,
자신이 강아지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고, 부스러기라도 좋으니 은총을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강아지라는 것을 인정한 것은 자녀가 되겠다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또 부스러기라도 달라는 것은, "하느님(예수님)은 불쌍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왕실 관리도 여자처럼 더욱 간절하게 청합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라는 그의 말에는
"믿겠습니다." 라는 뜻이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두 사람의 모습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은 '간절함'입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모습도 우리가 본받을 점입니다.
사실 '간절함'은 신앙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간절함에서 정성이 나오고, 끈기와 인내가 나옵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에 간절함이 없다면, 취미생활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두 사람에게 하신 말씀은 그들에게는 '믿음의 시련'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마귀가 딸에게서 나갔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가라고 하십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어떤 예식도 없고, 어떤 특별한 말씀도 없습니다.
또 관리에게도 아들이 살아날 것이니 가라는 말씀만 하십니다.
그가 예수님께 같이 내려가자고 청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가시려고 하지도 않았고, 병자를 고치기 위한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아무것도 못 본 상태에서(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예수님의 말씀만 믿고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결과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 청한 것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청하지 않은 더 큰 은총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갖게 된 '진정한 믿음'입니다.
왕실 관리의 경우에는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요한 4,53).
여자의 경우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 그 경우에도 그 여자와 온 집안이 믿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마태 7,11)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울타리 없는 믿음의 나라>
폐쇄적인 본토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들어
이교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뿐더러 이교도인 전도를 비판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개방적인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이교도인 전도를 활발히 전개했는데,
그것을 정당화할 근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드물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교도인을 고쳐 주신 기적들을 들어 이교도인 전도를 옹호했다.
시리아 페니키아는 티로와 시돈을 포함한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 유대인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이교도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로 이스라엘 땅에서 당신 백성을 상대로 활약하셨다.
외국으로 가신 때나 외국인을 상대하신 때가 있기는 하지만 매우 드물었다.
마르코 복음사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티로 지방에서 결코 낯선 인물이 아니었다(3,8).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한 부인이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7,25-26) 그것을 증명해 준다.
이 대목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예수님과 시리아 페니키아 부인의 대화 내용에 있다(7,27-29).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예수님께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청하였다(7,25-26).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어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하고 말씀하셨다.
이 비유의 핵심은 여인의 간청을 거절하는데 있지 않고,
예수님을 통해 주어지는 구원의 혜택이 우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부인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7,28).
그 부인은 마치 예수님의 말씀에 토를 달지 않고 재치 있게 응답함으로써 그분께 대한 자신의 신뢰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네 딸에게서 나갔다.”하고 말씀하신다.
결국 그녀가 예수님그 부인의 확고한 믿음을 보고서 의 인격과 능력을 전적으로 믿음으로써 그 부인의 딸이 더러운 영으로부터 해방되었다(7,30).
이처럼 예수님을 통해 얻게 되는 구원은 유대인 또는 이교도인이라는 외적인 관계보다는 철저한 믿음의 관계가 우선임을 알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적인 잣대와 울타리를 허무시고, 오직 믿음만으로 이교도까지도 치유해주셨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내가 만든 기준, 나의 경험과 감정에 따라 형성된 틀을 들이대며 내가 원하는 관계만 맺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겠다.
영적인 성숙도는 나의 물리적, 심리적, 정서적, 영성적 울타리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가에 달려 있다.
살아가면서 건전한 ‘경계선 형성’이 분명 필요하지만,
창조의 낙원,모두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축제의 자리여야 할 것이다.
오늘 나에게 시리아 페니키아 부인이 예수님에 대해 지녔던 한결같은 믿음이 있는가?
또 진실하고 겸손하게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개방성과 의탁의 자세가 있는가?
그녀처럼 인간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서 예수님 말씀만 듣고 딸의 치유를 믿는 흔들림 없는 신앙과 수용의 자세가 있는가?
참된 믿음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모습을 감추신다 해도 결코 흔들림이 없이 내맡기고 의탁하는 것이리라!
- 작은형제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믿음의 승리>
믿음의 승리, 사랑의 승리, 인간의 승리입니다.
간절한 믿음의 승리, 자기와의 싸움에서의 승리, 결국은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위대한 삶, 위대한 만남, 위대한 작품이 나옵니다.
그러니 저절로 눈길은 삶이나 만남, 작품의 배경으로 향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꽃들 이면의 사계절의 변화, 뿌리와 잎들을 보게 되는 이치와 흡사합니다.
내외적 시련(試鍊)과 고난(苦難), 아픔을 겪어내며 성숙의 결과가 위대한 삶, 만남, 작품임을 깨닫습니다.
언젠가 읽다가 메모해둔 구절이 생각납니다.
<내 청춘의 감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이 구속 당시 구치소에서 읽고 웃은 책이라고, 감옥 이야기가 이렇게 유쾌할 수 있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고 하던데요.
그 다음 문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실 그 유쾌한 글자들을 둘러싼 모든 여백은 아픔과 고통이라고 봐야 한다".
주제문이 아닐까요?
대부분 성공에는 보이지 않는 실패가 많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바로 다음 대목을 주목해야 합니다.
'유쾌한 글자들을 둘러싼 모든 여백은 아픔과 고통이라고 봐야 한다.'
꽃만 보지 말고 뿌리의 배경도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어둠이 깊으면 별은 더욱 영롱하게 빛나듯 숱한 아픔과 고통을 이겨냈기에 삶이나 만남, 작품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베토벤의 불후의 명작이 귀머리가 된 후에 나왔다는 사실도 이를 입증합니다.
-
신부님의 강론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전혀 눈치챌 수 없는, 기쁘게 사는 모습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아픔이 있어요.
-
"그럴겁니다.
때로 이런저런 내외적 시련과 아픔을 견뎌내며 하루하루 무너지지 않고 살아내기 위한 나와의 싸움인 삶이었고
그런 면이 강론에 은연중 스며들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느 지인과의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참 역설적인 것이 삶이 간절할수록, 삶이 어렵고 아픔이 클수록, 강론은 아름답고 영롱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또한 감사해야할 주님의 은총입니다.
어제 소개한 민경숙 루치아 교장님의 그림에서도 바로 직감한 이런 면입니다.
그대로 믿음의 승리, 사랑의 승리, 자기와의 싸움에서의 승리를 표현하는 아름다운 그림이었습니다.
아름다운 그림을 출산(出産)한 이면의 그 엄청난 내적 시련과 아픔을 감지합니다.
하여 그림이 아름답고 많은 이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위로와 힘을 줍니다,
개인전 도록을 청하여 카톡으로 받아 본 후 보낸 나의 소감을 두서 없이 소개합니다.
"아, 좋습니다. 그림이 밝고 힘이 있습니다.
생명과 희망이 샘솟고 약동하는 분위기입니다.
또 맑고 깊습니다.
언뜻 스친 소감입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위로와 힘이 될 것입니다. 그림을 통한 복음 선포입니다.
자매님의 고통과 아픔, 열망을 그림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림을 통한 구원입니다.
그대로 하느님 찬미기도 같은 그림입니다.
시편을 노래한 그림입니다.
그림이 그대로 기도입니다.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어 감동을 줍니다.
하느님 향한 열렬한 사랑의 고백같은 그림입니다.
모든 그림이 그렇습니다.
'절망은 없다' 메시지가 전달되며 강인한 생명력을 느낍니다.
모든 그림이 그렇고 신선한 충격입니다.
지나쳐 버리기 쉬운 작은 것들에 대한 사랑, 이들이 중심 소재가 되어 빛을 발합니다.
그림을 통한 영적독서, 감사합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위로와 평화를 빕니다."
이렇게 그림에 감동하여 아낌없이 찬사를 드리긴 처음입니다.
주님은 그림을 통해 자매님을, 주님은 강론 말씀을 통해 저를 구원하였습니다.
비교하면 자매님은 '색으로 그린 강론 같은 그림'이라면, 내 경우는 '글자로 그린 그림 같은 강론'입니다.
공통점은 '아름다운 하느님의 열렬한 추구'라는 점입니다.
간절한 믿음, 간절한 사랑 있을 때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입니다.
주님을 만나 위로와 치유도 받습니다.
산티아고 순례 후 저는 자신있게 말합니다.
"산티아고 간다 하면 말리지는 않겠다.
그러나 권할 마음은 없다.
권해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체력이 좋고 정신력이 좋아도 간절한 원의가 없으면 힘들다.
간절함이 우선적 조건이다."
말하며 간절함을 강조합니다.
산티아고 순례뿐 아니라 평생 인생 순례 여정이 그렇습니다.
'하루하루' 간절한 마음으로 살아야 주님을 만나 위로와 치유의 구원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도 파트너간의 만남이 감동적입니다.
창세기 독서에서 사람과 그 아내의 만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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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낸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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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심오하고 아름답고 간절한 부부일치의 예화인지요.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시리아 페니키아 이교도 출신 부인과의 만남도 극적입니다.
이교도 부인은 간절하고 겸손한 믿음이 있어 주님을 만났고
마침내 주님의 항복(降服)을 받아 내니 말그대로 믿음의 승리입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부인의 간절한 믿음에 감동하신 주님의 즉각적인 치유의 응답입니다.
주님을 간절히 갈망함은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반쪽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하나될 때 온전한 인간, 거룩한 인간으로서의 참 나의 실현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 시간,
아담이 하와가 만나, 이교도 부인이 주님과 만나 하나되듯이,
우리 역시 주님과 만나 하나되는 구원의 시간입니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시편 130,7)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
(시편 128,1ㄱ)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자녀들에게 줄 빵을 강아지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아!’
마귀 들린 딸을 구해 주십사는 여인의 호소에 만민의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개로 비유하시다니!
복음 나누기에서 “이건 예수님답지 않네요.” 하던 누군가의 말에 충분히 공감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초점은 예수님이 아니라 ‘여인의 믿음’이다.
‘제발 딸만 구해 주세요. 개가 아니라 쥐라고 부른들 상관없어요!’
모성애는 위대하다.
어머니의 눈물겨운 사랑이 있는 가정은 삼위일체의 하느님과 나자렛의 성가정만큼이나 완전한 공동체이다.
가정이 공동체 세계의 기초다.
그래서 교회는 가정을 완전에 가까운 공동체 모델로 삼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또 교우들을 형제자매라 부른다.
하느님께서 모든 생명의 창조주이시기에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하느님과 한 몸이라는 것이 그리스도교 사상이자 공동체의 영성이다.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정은 대가족과 친지로 마을을 이루고,
인정과 도덕과 자치와 원로의 권위가 있는 소사회를 이룬다.
건강한 ‘본디의 삶’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여인의 자녀 사랑이 가정과 혈연을 넘어 이웃과 인류에게 미친다면
전쟁도 빈부의 양극화도 없는, 지상의 하느님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농경 사회와 마을은 사라지고 대가족은 해체되었으며
가족마저 함께 밥도 먹지 못하는, 가정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지난해 4월에 성인의 반열에 오른 요한 23세 교황은 “사람은 함께 사는 데 의미가 있다.”고 가르치셨다.
병든 시대를 치유하여 사랑의 사회로 가는 길은 서로 함께 사는 데 있다.
대가족이 함께 사는 마을이 복구되어야 한다.
작은 삶과 마을의 회복 없이 가족애를 뛰어넘을 방법이 없다.
미래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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