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회춘
김학성
* 매화 옛 등걸에 봄철이 돌아오니
옛 피던 가지에 피엄 즉도 하다마는
춘설이 하 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
지리산 높은 봉우들이 포근한 운무를 덥고 나른한 봄 졸음에 잠기는데 늦고 잦
은 꽃샘추위 때문인지 정당매(政堂梅)는 이제 하나 둘 꽃망울을 열고 있었다.
소녀의 입술 같은 여린 꽃잎은 실비의 살폿한 입맞춤에 가냘프게 떨고 마른 등
걸에 덕지긴 이끼는 중얼중얼 먼 옛이야기를 하며 파랗게 소생을 하였다.
처음 산청 삼매(山淸三梅)를 보러가자 할 때는 봄이라 집 나서는 것이 좋고 꽃
소식 전해오는 남쪽이라 더욱 좋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길이기에 마음은 진
작 앞섰으나 매화를 몰랐기에 매화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
조식(曺) 선생이 61세(명종 16년 서기 1561년)에 심었다는 산천재(山天)의 남
명매(南冥梅)앞에서도 한 두 송이 피어난 꽃에 코를 대어보고 의례적으로 사진을
찍고 돌아섰다.
단속사지 삼층 석탑 뒤에 사슬로 보호를 받고 있는 매화나무 앞에서, 한 시간
반의 여유를 줄 터이니 천천히 감상하라고 할 때까지도 영문을 몰랐다.
달리 할일이 없으니 후손들이 매화나무를 보전하기 위하여 지었다는 매각의 비
문을 읽어보았다 “정당매는 고려 말 강회백(姜維伯 호亭)이 심어 그 나이가 640
살이며"...
밑동은 죽어 이미 다 삭았는데 움 돋은 곁가지에서 꽃이 피고 있었다. 640년 된
나무가 아직도 꽃을 피워 다시 봄을 맞는다 난 아직 육십도 되지 않아 몸과 마음
을 벌써 늙히고 있었는데…
나무가 꽃들이, 표현 할 수 없는 기운이, 날 가까이 불렀다. 풍상에 사윈 둥치에
서 새움이 돋아 가지를 치고 쌀쌀한 날씨에 꽃을 피우는 모습이 보면 볼수록 애틋
하고 사랑스러웠다. 추위가 가시지 않는 이른 봄에 꽃을 피워 선인들이 불의에 굴
하지 않는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삼았고 고목에서 꽃을 피우니 회춘(回春)의 상징
으로 삼아 심매(尋梅)니 관매(觀梅)니 상매(賞梅)니 하는 탐매 행(探梅行)을 하였었
다는 것을 오늘서 알았다. 선인들이 남긴 매화에 대한 많은 글 중에 변변히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무리 매화가 없는 곳에서 태어나 살았다지만 봄에 일찍 꽃
이 피고, 사군자이며, 화투에 그려져 있다는 것이 지금껏 매화에 대한 내 상식의
전부였던 것이 부끄러웠다.
500여 년 전에 형성되었다는 산청군 단성면 남사마을엔 회나무 고목들과 매화
고목이 많았다 높은 담장 안에 ㅁ자 형태로 배열된 오래된 기와집의 사랑방 앞에
원정공(130~1380)이 심었다는 분양매(汾陽梅)앞에는 그가 지었다는 다음과 같은 시
비가 있었다.
집 양지 일찍 심은 한 그루 매화
찬 겨울 꽃망울 나를 위해 열었네.
밝은 창에 글 읽으며 향 피우고 앉았으니
한 점 티끌로 오는 것이 없어라.
그렇게 매화를 보며 선비들이 정신을 기리고 회춘을 염원 할 때, 높은 담 안에
갇혀 살던 마님과 아가씨 들은 담 안에 갇힌 꽃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가
지하나 다칠세라 감히 가까이 다가 갈 수 없었던 노비들은 자기들 보다 더 애지중
지 보살핌을 받는 매화가 아름다워 보이고 향기로웠을까.
정담매나 남명매.원정매.분양매 등 오래된 매화나무들은 모두가 하나 같이 가
지가 고불고불 안으로 휘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육칠백년 꽃을 피우는 매화나
무의 비결이 거기에 있는 것 같았다. 누가 간섭하거 이아치지 않아도 욕심 부리지
않고 세상을 덮을 듯 뻗어 가려는 젊은 가지를 안으로 불러드리는 철저한 자기 관
리 마당을 차지하였다고 사랑을 빙자하여 욕심을 채우려 하지 않았기에 육칠백년
을 살고도 눈 속에 꽃을 피울 수 있는가보다. 그러기에 꽃향기가 좋고 매실이 약
으로 차로 유용하게 쓰이나보다.
지리산 골골이 도롱뇽 옹알이가 고물고물 안개로 피어오르고, 안개를 끌어 덮은
산봉우리 들은 반달곰을 품에 안고 춘곤에 빠져드는데, 이슬비를 맞으며 고목에서
이끼와 함께 피어나는 매화.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렇듯 가슴 벅찬 만남이 몇 번이
었을까. 꽃과의 만남 중 이와 같이 가슴 뜨거운 적이 없었다. 이제야 만난 것이 안
타깝기도 하지만 젊은 날 만났다면 이토록 절실하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이제
는 들국화나, 물매화보다, 매화를 더 사랑 할 것만 같다. 늘 가까이서 자주 만날
수 없기에 더욱 안타깝고 그리워지겠지.
사랑하면 닮아 간다고 하였던가?
조금이라도 비슷하게라도 매화를 닮아 갈수 있었으면……
* 조선시대 가사 집 청구영언 에 실려 있는 매화타령
2006/ 24집
첫댓글 풍상에 사윈 둥치에
서 새움이 돋아 가지를 치고 쌀쌀한 날씨에 꽃을 피우는 모습이 보면 볼수록 애틋
하고 사랑스러웠다. 추위가 가시지 않는 이른 봄에 꽃을 피워 선인들이 불의에 굴
하지 않는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삼았고 고목에서 꽃을 피우니 회춘(回春)의 상징
으로 삼아 심매(尋梅)니 관매(觀梅)니 상매(賞梅)니 하는 탐매 행(探梅行)을 하였었
다는 것을 오늘서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