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전쟁에 가담한 농민군 중에서는 사실 일용 노동자, 장인, 마을 사람들, 어떤 경우에는 불만을 품은 지주와 강도 기사(주군을 섬기지 않고 일정한 영지가 없이 떠돌아다니며 약탈을 일삼았던 기사들), 독일 용병과 스위스 용병도 포함되었기 때문에 농민 전쟁이라는 이름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따라서 농민군의 전체 규모를 평가하기는 어렵다.
농민 집단은 마을, 전체 계곡 또는 라인가우(rheingay 독일 도시인 비스바덴과 프랑크푸르트 근처의 로르히 사이에 있는 라인 강 북쪽의 지역)와 같은 지역에서 형성되었다.
현대에 와서 농민군의 숫자를 추정한 수치는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페르디난트 대공(카를 5세의 동생이자 훗날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페르디난트 1세)은 카를(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에게 (반란에 가담한) 농민들의 수가 200,000명이라고 썼고, 마리오 사누토스의 다이아디는 그 숫자를 300,000명으로 기록했다.
또 다른 소식통은 콘스탄츠와 아우크스부르크 사이에 100,000명의 농민군이 있었다고 말했다.
타우버 계곡의 전쟁 물품은 추정을 위한 좀 더 그럴듯한 근거를 제공하며, 각 중대가 약 500명에 달하는 여러 중대로 구성된 rach 부대를 보여주며, 따라서 부대당 수천 명의 병력을 거느렸다고 추정할 수 있다.
라이프하임 전투 후 슈바벤 연맹(다른 말로는 스와비아 연맹. 농민군 토벌을 위해 활동했던 독일 귀족들의 연합군)은 농민군의 명부를 작성했다. 이로 인해 총 4,005명이 나왔고, 약 114개의 서로 다른 세포에서 5명에서 100명 사이의 수치가 나왔다. 이것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전쟁 중에 독일 남서부 전역에 동원된 농민이 120,000명에서 150,000명 사이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수치에는 산발적으로 참여하는 마을 사람들이 포함되지 않았다.
소작농 군대는 하우펜(haufen)으로 알려진 영토 단위로 조직되었다.
하우펜은 독일 용병인 란츠크네히트 군대의 친숙한 조직 단위였으며, 농민들은 이를 어느 정도 모델로 삼아 각 무리를 판라인(fahnlein)과 로튼(rotten)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여기서 란츠크네히트 군사 조직과의 유사성은 끝난다.
밴드는 어떤 지역에서든, 조직된 세력으로 결합한 반란군의 수에 따라 크기가 엄청나게 다양했다.
예를 들어 Hersfeld에서는 농민 집단이 4,000명이었다. 프랑켄하우젠에서는 8,000이었다. 반란군의 대열은 자베른 전투에서 전장을 차지한 18,000명의 알자스 농민까지 불어날 수 있었다.
농민군 병사들의 수는 각 대열마다 달랐다. 바인가르텐(Weingarten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도시)에서 슈바벤 연맹은 32개의 농민군 부대를 계산했다. 각 중대는 500명으로 구성되었고 각 소대나 분대는 10~15명의 소작농으로 구성되었다.
농민군 부대는 일반적으로 란츠크네히트 부대와 같은 계급 칭호를 사용했다.
농민들은 부대를 모집하면 자기들 중에서 최고 사령관(Oberster feldhauptmann)과 중위(leutinger)를 임명하거나 선출했다.
각 중대(fahnlein)는 대위가 지휘했으며 자체 기수(fahnrich), 병장(feldweibel) 및 분대장(rott-meister)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