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투의 기원 ◈
한국의 성인들이 여가 시간에 가장 많이 즐기는 놀이가 무엇인가? 하는 설문조사에서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한 것이 화투(고스톱)이라는 조사통계가 있다. 그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 3분의 2에 해당하는 약 3,800여만 명이 화투를 친다고 하는데, 실제로 화투를 만들었다는 일본인들은 화투를 즐겨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이 주로 즐기는 놀이는 마작과 빠찡코이며, 약 5%미만의 일본인들이 그것도 정월 같은 때 어쩌다가 한번 정도 즐기는 놀이로 전락해 버렸다.
화투의 유래는 대체로 포르투갈의 '카르타(carta)' 에서 비롯된 것으로 포르투갈 상인들이 일본에 왔을 때 일본인들이 이들의 카르타 놀이딱지에 착안하여 하나후다(花札)를 고안했다고 말해진다. 예전부터 도박에 사용되어 에도 시대(1603~1868)에는 자주 금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 하나후다가 한국에서 화투로서 들어오게 된 것에는 또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서 부역을 마치고 돌아가는 역부들에게 일제가 한 궤짝씩 나누어 주면서 당시 조선민들에게 의도적으로 전파했다는(황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설과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선원들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져다는 양설이 존재하고 있다. 16세기 경 포르투갈 선원에 의해 일본에 전해진 것이 3-4백 년 동안의 변화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과 같은 모양의 화투가 된 것이다.
월별로 각각 4매씩 총 48장으로 구성된 화투는 일본 문화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화투의 낱장 하나하나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거기에는 일본 고유의 세시풍속, 월별 축제와 갖가지 행사, 풍습, 선호, 기원의식 심지어는 교육적인 교훈까지 담겨져 있다.
◈ 일본 화투에 담긴 월별 정서 ◈
1월 - 송학(松鶴)
세칭(世稱) ‘삥’이라고 불리는 송학의 화투 문양을 보면 1/4쪽 짜리 태양, 1마리의 학, 소나무, 홍단 띠가 나온다. 태양은 신년 새해의 일출을, 학은 장수와 가족의 건강에 대한 염원을 나타낸다. 또 소나무가 등장하는 이유는 가도마쯔(門松; かどまつ)행사에 소나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가도마쯔는 1월을 맞이하는 일본의 대표적 세시풍속. 일본인들이 1월 1일부터 1주일 동안 소나무를 대문 양쪽에 장식해 두고 조상신과 복을 맞아들이기 위한 행사다. 학을 의미하는 츠루(鶴; つる)가 소나무를 뜻하는 마쯔(松; まつ)의 말운(末韻)을 이은 점은 일본식 풍류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1년 열두 달 중 8월과 11월을 의미하는 공산과 오동을 제외한 나머지에 등장하는 청·홍색 띠는 일명 ‘단책(丹冊)’이라고 불린다. 일본에선 ‘하이쿠(俳句; はいく)’라는 일본의 전통 시구를 적을 때 이 종이를 사용한다. 한국에선 빨간색이 사망, 공산당, 화재 등과 같이 부정적인 의미를 갖지만, 일본에서의 빨간색은 쾌청한 날씨, 경사, 상서로움 등을 나타낸다. 홍단의 구성요소는 송학(1월), 매조(2월), 벚꽃(3월). 일본인들에게 1, 2, 3월은 매우 상서로운 달임을 시사해 준다. 2월 - 매조(梅鳥) 2월에 해당한 매조에는 꾀꼬리와 매화가 나온다. 2월이 되면 동경도 오매시(靑梅市)의 매화공원을 비롯한 일본 전역의 공원에서 축제가 벌어질 만큼 매화는 일본인들에게 친숙한 꽃이며 꾀꼬리는 봄을 나타내는 시어(詩語)로 자주 사용되는 대표적인 텃새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의아한 것은, 꾀꼬리가 봄철이 아닌 2월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조류학자들에 따르면, 철새인 꾀꼬리가 일본으로 되돌아오는 시점은 대체로 4월 이후라고 한다. 그런데도 2월의 화투에 꾀꼬리가 그려져 있는 이유는 아직까지 그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꾀꼬리와 매화가 봄의 전령사임을 노래하는 대표적 시어인 동시에 꾀꼬리의 일본어 표기인 우구이스(うぐいす)와 매화를 뜻하는 우메(うめ)간에 두운(頭韻)을 일치시키려는 일본인들의 풍류의식을 반영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3월 - 벚꽃 벚꽃은 일본의 국화(國花)이며 3월에 최고 절정에 이르는 일본의 벚꽃축제는 헤이안(平安)시대부터 출발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3월의 화투 문양은 온통 벚꽃으로 가득 차 있다. 삼광의 벚꽃 밑에 그려진 것은 ‘만막(慢幕; まんまく)’이라는 일종의 천막이다.
이는 지금도 일본인들의 경조사 때 천막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속에는 벚꽃을 감상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상춘객들이 있지만, 삼광의 화투에선 그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 상춘객들이 화투 하단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상춘객이 만막 안에서 낮술에 취한 채 봄날의 정취를 만끽하고 있는 셈이다. 4월 - 흑싸리 대개, 4월의 화투패를 흑싸리라고 알고 있는데, 실은 흑싸리가 아니라 등나무 꽃이다. 흑싸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빗자루를 만드는 재료로 활용되는 싸리나무의 색깔은 녹색이며, 가을철에 그것을 베어 햇볕에다 말리면 갈색으로 변하는 데 이것의 착각이 아닐까 싶다.
4월은 일본에서 등나무 꽃 축제가 열리는 계절이다. 등나무는 일본 전통시의 시어로 쓰이는 여름의 상징으로, 일본에서는 각종 행사시 가마에 장식하거나 귀족 가문의 문양으로 쓰이는 등 친숙한 식물이다. 여기에 그려져 있는 두견새 역시 일본문학에서 시제로 자주 등장할 만큼 일본인들에게 사랑 받고 있는 새다. 5월 - 난초(蘭草) 5월 화투 문양도 난이 아니라 붓꽃(杜苕)이다. 붓꽃은 보라색 꽃이 피는 습지의 관상식물. T자 모양의 막대와 3개의 작은 막대기는 각각 ‘제도용 자’와 ‘딱성냥’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T자 모양의 막대는 붓꽃을 구경하기 위해 정원 내 습지에 만든 산책용 목재 다리며, 3개의 작은 막대기는 목재 다리를 지지하는 버팀목이다.
이 일본식 목재다리인 ‘야쯔하시(八橋; やつはし)’위를 걸으며 붓꽃을 감상하는 전형적인 일본의 풍취가 이 화투패의 내용인 것이다. 다리 끝에는 붓꽃을 감상하는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이 있는데, 이 또한 삼광과 마찬가지로 화투 하단의 보이지 않는 1인치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6월 - 모란(牡丹) 6월 화투 문양은 모란꽃이다. 모란은 6월의 시어(詩語)로서 고귀한 이미지를 가진 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서양 꽃의 으뜸으로 장미를 가리킨다면 동양에서는 모란을 가리킬 만큼 ‘꽃중의 왕’으로 불린다. 일본에서는 귀족 가문을 나타내는 문양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꽃과 나비하면 모란꽃을 떠올릴 정도로 동양 사회에선 모란꽃을 ‘꽃의 제왕’으로 쳐준다.
이에 따라 일본화에는 모란과 나비가 함께 등장한다. 그러나 한국화에선 모란과 나비를 함께 그리지 않는 것이 오래된 관례다. 당 태종이 신라의 선덕여왕에게 보낸 모란꽃의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는 것에서 연유된 것으로, 이것은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차이인 셈이다.
또한, 6, 9, 10월의 화투 5끗짜리에는 청단이 있는데, 일본에서 청색은 우울하거나 좋지 않은 일을 암시하는 색상이라고 한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6, 9, 10월 달에 태풍이나 집중호우로 인한 수재민들이 발생할 뿐만 아니라 평균적으로도 1년 중 이 기간에 각종 사건, 사고가 비교적 많이 발생한다고 한다. 7월 - 홍싸리 7월 화투 문양은 싸리나무다. 우리나라에서의 싸리는 빗자루나 만드는 천한 수종이었으나, 일본에서의 싸리는 '가을 7초(草)'중의 하나이다. 싸리나무는 녹색이다. 그러나 이 문양엔 빨간색과 검은색으로 처리돼 있다. 이는 화투 제작자의 임의 채색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멧돼지가 나오는 이유는 근대 일본에서 성행했던 멧돼지 사냥철이 7월이었기 때문이다.
멧돼지 사냥은 종족보존을 위해 주로 수컷에만 국한돼 있었다. 한편으로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제국주의자등이 우리민족을 멧돼지에 비유하여 괴롭힌다(사냥)는 나쁜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는 설도 함께 존재한다. 8월 - 공산(空山) 8월 화투 문양엔 산, 보름달, 기러기 3마리가 등장한다. 이는 8월이 일본에서 ‘오츠키미(月見子; おつきみ: 달구경)’의 계절인 동시에 철새인 기러기가 대이동을 시작하는 시기임을 알려주는 일종의 자연적 암호다. 오츠키미는 둥근 달을 보며 과일 같은 것을 창가에 담아두고 달에게 바치는 소박한 명절이라고 한다. 검은색으로 처리된 것은 산이고, 흰색으로 처리된 부분은 하늘을 의미한다.
일본패에서는 '가을 7초(草)' 중 하나인 억새풀이 가득히 그려져 있으나 우리의 것에는 생략되었다. 8월에는 띠가 없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8월이 1년 중 가장 바쁜 추수철이라 한가로이 시나 쓰고 있을 여유가 없음을 나타내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한다. 9월 - 국준(菊俊) 9월은 일본에서 국화 축제가 열리는 대표적인 계절이다. 그 쌍피엔 ‘목숨 수(壽)’자가 새겨진 비단 꾸러미와 물이 함께 그려져 있다. 이는 고대 중국의 기수민속(奇數民俗)의 영향을 받아 9세기경인 헤이안 시대부터 유래된 ‘9월 9일에 국화주를 마시고, 국화꽃을 덮은 비단옷으로 몸을 씻으면 무병장수를 한다’는 일본의 중양절(中陽節-9월 9일)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특히 국화는 일본의 왕가를 상징하는 문양이다. 이를 감안하면 일왕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흐르는 물에다 술잔을 띄워 놓고 국화주를 마시면서 자신들의 권세와 부귀가 영원하기를 기원했던 데서 비롯된 것으로도 보인다. 쌍피가 피와 10끗짜리로 동시에 활용될 수 있는 특권을 갖는 것은 일왕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10월 - 단풍(丹楓) 10월의 단풍은 `낮에는 홍엽(紅葉), 밤에는 홍등(紅燈)` 이라고 하며 단풍이 물들기 시작할 때 그 색채의 변화를 즐기는 일본인들의 단풍놀이 풍취를 상징하며 함께 그려진 수사슴은 근세에 성행했던 사슴 사냥철을 의미하고 있다. 사슴을 의미하는 ‘시카(鹿; しか)’와 단풍을 뜻하는 ‘카에데(丹楓; かえで)’에도 말운과 두운이 일치하는데, 이것 역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11월 - 오동(梧桐) 미리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한국에서 ‘오동’은 11월의 화투이고 ‘비’는 12월의 화투지만, 일본은 그 반대이다. 즉 일본에서는 ‘비’가 11월의 화투이고 ‘오동’은 12월의 화투이다. 일본에서 ‘오동’이 12월의 화투가 된 것은, ‘오동’을 뜻하는 기리(きり)가 에도江戶시대의 카드였던 ‘카르타’에서 맨 끝인 12를 의미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오동의 광에는 닭 모가지 모양의 조류와 싹 같은 것이 등장한다. 닭 모가지 형상을 하고 있는 조류는 평범한 새가 아니다. 막부의 최고 권력자인 쇼군의 품격과 지위를 상징하는 봉황(鳳凰)의 머리다. 검은색의 싹은 오동잎이다. 오동잎 역시 일왕보다도 더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던 막부의 쇼군을 상징하는 문양이다. 지금까지 일본 정부나 국·공립학교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 일본 화폐 5백 엔 주화에도 오동잎이 도안으로 들어가 있을 정도다. 12월 - 비(雨) 비 광을 살펴보면 낯선 선비 한 명이 양산을 받쳐 들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그리고 축 늘어진 수양버들 사이로 실개천이 흐르고 있고, 그 옆에는 개구리 한 마리가 앞다리를 들며 일어서려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일본의 ‘오노의 전설’을 묘사한 것이다.
갓 쓴 선비는 ‘오노노도후(小野道風; AD.894-966)’라는 일본의 귀족으로서 약 10세기경에 활약했던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비광은 오노가 붓글씨에 몰두하다 싫증이 나자 머나먼 방랑길을 떠나는 모습이다. 이 과정에서 오노는 수양버들에 기어오르기 위해 노력하는 개구리의 광경을 보고 “미물인 저 개구리도 저렇게 피나는 노력을 하는데, 하물며 인간인 내가 여기서 포기해서 되겠는가!”라는 깨달음을 얻은 뒤, 곧장 왔던 길을 되돌아가 붓글씨 공부에 정진했다고 한다.
일본 교과서에도 소개된 적이 있을 정도로 매우 교훈적인 내용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개구리를 뜻하는 카에루(かえる)와 양산을 의미하는 카사(かさ)의 두운(頭韻)이 일치하는 것도 일본인들의 풍류의식에 따른 것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한국 화투는 일본 화투에 나오는 이 선비의 갓 모양만 일부 변형시켰다.
그리고 열끗에 그려진 까투리는 일본의 국조이다. 또 쌍피의 문양은 ‘죽은 사람을 내보내는 일종의 쪽문’으로서, ‘라쇼몬(羅生門)’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이 피가 쌍피로 대접받는 것은 이 문에 붙어 있는 귀신을 대접한다는 의미다. 거기에는 귀신이 붙어있을 것이고 따라서 귀신을 잘 대접해야만 해코지를 면할 수 있다는 일본인의 우환의식(憂患意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은 우리 민족의 일상 놀이가 되어버린 화투. 그 유래를 알고 하는 것도 뜻이 있을 것 같다.
(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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