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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울산바위(높이:876m)
/2007년05월13일 일요일 오전07시 | ||
1.일 시 | - | 2007년05월 13일 일요일 오전7시00분 |
2.출발장소 | - | 곤지암농협앞 유신상회 |
3.소 개 | ||
달마봉 | - | 달마봉은 신흥사(神興寺) 앞의 세심천(洗心川) 건너 동편에 솟아있는 봉우리로 해발 635m의 암봉(岩峰)이다. 산봉우리의 둥글기가 흡사 달마와 같다하여 달마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달마 』라는 뜻은 달마대사의 준말로서 달마대사는 선종(禪宗)의 시조이며, 남인도 향지국(香至國) 왕의 세째 아들이다. |
울산바위 | - | 울산바위의 이름은 3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울타리같이 생겼다 하여 ‘울산’이라는 설과 경남 울산(蔚山)의 지명을 딴 전설적인 이름이고, 또 하나는 울산(鬱山) 즉 ‘우는 산’이라는 뜻의 우리말을 한자화한 것이다. 비가 내리고 천둥이 칠때 산전체가 뇌성에 울리어 마치 산이 울고 하늘이 으르렁거리는 것같으므로 일명 ‘천후산(天吼山)’이라고까지 한다는 기록이 신흥사지에 실려 있었다고 전한다. |
신흥사 | - | 1984년 6월 2일 강원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653년(신라 진덕여왕 7) 자장(慈藏)이 창건하고 석가의 사리(舍利)를 봉안한 9층사리탑을 세워 향성사(香城寺)라고 불렀다. 고기(古記)에 자장이 637년(선덕여왕 6) 왕명으로 당(唐)나라에서 불도를 닦고 귀국하여 건립한 사찰이라고도 전한다. 이 향성사는 701년(효소왕 10) 수천칸(間)의 대사찰이 하루 아침에 소실되고 앞뜰의 9층석탑도 화재로 파손되어 3층탑만 남았다. 그후 의상(義湘)이 이곳 부속암자인 능인암(能仁庵) 터에 다시 절을 짓고 선정사(禪定寺)라고 하였다. 선정사는 1000년간 번창했는데, 조선 중기 1644년(인조 22)에 다시 소실되고 말았다. 선정사가 불타자 많은 승려가 떠났으나 운서(雲瑞)·연옥(連玉)·혜원(惠元) 세 승려만은 유서 깊은 절이 폐허가 된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겨 재건을 논하던 중, 하루는 세 승려가 똑같은 꿈을 꾸었는데, 꿈에 향성사 옛터 뒤의 소림암(小林庵)으로부터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곳에 절을 지으면 수만 년이 가도 삼재(三災)가 범하지 못할 것이라 말하고 사라졌다. 그래서 다시 절이 세워졌으며, 신의 계시로 창건하였다고 하여 신흥사라 부르게 되었다. 불상은 선정사 때 봉안된 것으로 의상이 직접 조성한 3불상의 하나이다. 당시 지은 법당·대웅전·명부전·보제루·칠성각 등의 건물이 현존한다. 중요문화재로 보물 제443호인 향성사지 삼층석탑과 그 밖에 순조의 하사품인 청동(靑銅)시루와 범종(梵鐘), 경판(經板) 227장, 사천왕상(四天王像) 등이 있다. |
계조암 | - |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산내 암자이다. 신라 때인 652년(진덕여왕 6)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다. 자장은 이곳의 석굴에 머물면서 652년 향성사(香城寺:신흥사)와 능인암(能仁庵:내원암)을 창건하였다. 신흥사로부터 2.3㎞ 북쪽에 있는 천후산 밑에 있는 암자로 향성사를 창립할 때 세운 암자이다. 동산(東山), 각지(覺知), 봉정(鳳頂)에 이어 의상(義湘), 원효(元曉) 등 조사(祖師)의 칭호를 얻을 만한 수많은 승려가 계속해서 수도하던 도장이라 하여 계조암(繼祖庵)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4.등산지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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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석합니다. (4명)
수고했어요, 그저... "경천"할 따름이요, 나도 3명 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