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음악과 함께 해온 사반세기-크로노스 사중주단
크로노스(Kronos)는 제우스의 아버지이자 제우스 이전에 이 세계를 지배하였던 거인 신의 이름이다. 이 크로노스는 시간을 상징하는 신이었으며, 연대학(Chronology)이라는 단어도 바로 이 이름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이제 크로노스라는 이름은 바로 현대음악을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우리에게 인식된다. 96년 내한 공연 포스터에 등장하였던 '현대 음악의 구도자'라는 수식어는 가감 없이 이들을 대변하고 있다. 비록 이들이 음악적 역량보다 펑크 풍의 헤어스타일과 비정통적인 옷차림 등등으로 음악계에 화제가 되었다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지만, 그 동안 단순히 이들의 외형을 흉내낸 몇몇 단체들이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 버린 것만 보아도 이들의 명성이 튀는 겉모습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현대음악의 구도자로 전도사로 온 세계를 누비고 다닌 지도 벌써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 긴 세월을 이들과 함께 해온 논서치 레코드에서 이들의 창단 25주년을 축하하는 10장들이 박스세트를 이번에 선보였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73년 캐나다의 한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주자로서 평범한 연주가의 길을 가고 있던 23세의 데이비드 해링턴은 우연한 기회에 라디오를 통해서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음악적으로 표현한 작품인 죠지 크룸의 'Black angel'을 듣게 된다. 기존에 자신이 가졌던 현악 사중주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뒤엎은 이 작품을 통해서 해링턴은 앞으로 자신이 나아갈 음악적 방향을 결정하였고, 이전까지 정형화된 실내악을 탈피한 새로운 음악을 연주하기 위하여 크로노스 사중주단을 결성하게 된다. 때맞추어 73년 당시는 각종 새로운 사조의 음악들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음악계를 혼란의 도가니로 만들어놓고 있을 때였다. 뒤에 마이클 니만에 의해 미니멀(minimalism)이라는 이름을 얻게된 일군의 개척자들인 테리 라일리, 스티브 라이히, 필립 글래스와 젊은 신예로 떠오르던 존 아담스가 음악계에 충격을 주기 시작하던 것도, 철에 장막 속에 감추어져 있던 폴란드의 펜데레츠키와 루토슬라브스키, 소련의 쉬니트케와 구바이둘리나와 같은 이들이 서구 음악계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점이었기에 이들이 개척해나갈 레퍼토리들은 풍족하기 그지없었다. 73년 10월 시애틀의 노스 시애틀 코뮤너티 칼리지에서 열린 데뷔 콘서트에서 이들은 바르톡의 '현악 사중주 3번', 베베른의 '6개의 바가텔'과 같은 정통(?) 레퍼토리와 해링턴의 스승이였던 켄 벤슈트의 작품을 연주하면서 25년간의 기나긴 항해를 시작하였다. 결성 당시의 멤버들은 리더인 해링턴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체되었는데, 77년 비올라의 행크 더트가 78년에는 제2바이올린의 존 셔바와 첼로의 조안 장르노가 가입하면서 20년이 넘도록 일관된 팀워크를 유지해 왔다. 이들 네 사람은 연주에서뿐만 아니라, 해링턴은 작품의 위촉이나 작곡가들과의 연락을, 더트는 재정 업무를, 셔바는 방대한 음악자료를 정리하는 일을, 장르노는 이들의 독특한 의상을 디자인하는 등 사중주단의 운영에서도 훌륭한 팀워크를 자랑하고 있다. 그
동안 이들이 연주해온 작품은 600곡이 넘는데 그중 400여 곡이 이들에 의해 위촉되었거나 기존의 작품을 이들을 위해 편곡한 것들이다. 이 중에는 진은숙과 김진희와 같은 우리 나라의 작곡가들을 비롯한 다양한 국적의 현대 작곡가들의 작품이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기욤 드 마쇼, 존 다울랜드, 토마스 탈리스와 같은 고딕, 르네상스 시대의 작곡가들의 작품에서부터 척 베리의 락앤롤, 듀크 엘링턴, 빌 에반스, 마일즈 데이비스, 셀로니어스 몽크의 재즈, 존 레논의 팝, 지미 핸드릭스와 프랭크 자파의 하드락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물론 리스트,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에프, 야나체크 등의 고전(?)작품들까지도 섭렵하고있기에 이들의 음악적 취향이 얼마나 다양한가를 한번에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이번 세트를 구성하고 있는 10장의 음반은 크로노스의 명성을 세상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던 이들의 대표작들 이외에도 이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지만 그 동안 음반화 되지 않았던 주요작품들을 새롭게 녹음하여 수록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이들의 베스트 콜렉션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수록곡들의 거의 대부분은 크로노스의 위촉에 의한 작품이거나 이들에 의해 초연된 작품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현대 음악의 다양성을 대변하듯이 저마다 뚜렷한 개성이 두드러진다. 실내악 분야로 대상을 좁힌다면 이 박스 세트 하나만으로도 현대 음악 전반에 걸쳐 두루 섭렵할 수 있을 정도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선곡이 돋보인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이들이 큰 관심을 가졌던 대중음악가들의 작품과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의 편곡들이 빠져있다는 것인데, 정통 현대 음악의 다양한 면모를 골고루 수록하기에도 10장의 CD가 결코 넉넉하지가 않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첫 음반은 대중음악의 영향과 정통 클래식 기법을 교묘히 결합시키고 있는 포스트 미니멀리스트(post-minimalist)의 선두주자 존 아담스(b.1947)의 '이른바 댄스곡집'과 신 중세주의자(neo-medievalist) 아르보 패르트(b.1935)의 고답스럽고 정적인 작품이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다음은 켄 벤슈트(b. 1933)와 아스트로 피아졸라(b.1921 d.1992)의 대중 음악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 작품들로 구성된 음반이다. 벤슈트는 크로노스가 처음으로 작품을 위촉한 작곡가였으며, 그 결과 만들어진 '여행 음악'이 이번에 처음으로 음반화 되었다. 당시 이 작품에 대한 작곡료가 도너츠 한 봉지였다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아르헨티나 뉴탱고의 기수 피아졸라의 두 작품 중 작곡가 자신이 반도네온을 협연한 '5개의 탱고 센세이션'은 91년 발표된 음반의 수록곡이지만, '탱고를 위한 넷'은 최초로 녹음되는 곡이다. 세 번째 음반은 93년에 발표되었던 모턴 펠드먼(b.1926 d.1987)의 80분에 걸친 방대한 실내악 '피아노와 현악 사중주'를 수록하고 있다. 펠드먼은 초기에는 스승이였던 존 케이지의 '우연성 음악'(Chance music)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나, 말년에 이르러서는 정통적인 조성음악으로 되돌아왔으며, 이 작품은 그의 말년을 대표하는 작품 중에 하나이다. 네 번째 음반은 필립 글래스(b.1937)의 현악 사중주 2-5번이다. 초기의 리듬 패턴의 반복과 후기의 아르페지오네와 스케일의 반복이라는 글래스의 미니멀리즘의 변화를 이 작품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으며, 현악 사중주 3번의 바탕이 되는 영화 음악 '미쉬마'는 크로노스의 데뷔 음반이라는 인연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다섯 번째는 유태 민속 음악을 창작의 기반으로 하고 있는 젊은 작곡가 오스발도 골리조브(b.1960)의 '장님 아이작의 꿈과 기도'와 최근 각광 받고 있는 러시아의 여류 작곡가 소피아 구바이둘리나(b.1931) 종교적인 작품 현악 4중주 4번, 역시 여류
작곡가인 아제르바이잔의 프랑기즈 알리-자데(b.1947)의 중앙 아시아 이슬람 전통에 기반을 둔 작품 Mugam Sayagi를 함께 싣고 있는 음반이다. 다음은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로 유명해진 폴란드의 헨리크 고레츠키(b,1933)가 크로노스를 위해 작곡한 현악 사중주 1번과 2번이다. 그의 음악은 흔히 영적 미니멀리즘(soul-minimalism)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 두 작품에서는 그의 명상적인 특징과 더불어 폴란드 민속음악의 영향이 짙게 느껴지며, 특히 2번에서는 귀에 익은 캐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연상시키는 선율이 인상적이다. 일곱 번째 음반은 크로노스의 명성을 가장 널리 알렸을 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던 두 음악을 싣고 있다. 1989년 그래미상을 수상한 스티브 라이히(b.1936)의 'Different trains'와 이들의 결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작품이자 이들의 최고의 베스트 셀러인 죠지 크룸(b,1929)의 'Black angel'이다. 'Black angel'은 미국, 네덜란드, 벨기에, 호주 등의 주요 음반상들을 석권하면서 91년 한해를 크로노스의 해로 만들어 주었다. 미니멀리즘의 선구자이자 크로노스의 초기 시절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던 테리 라일리(b.1935)의 작품들이 빼곡이 여덟 번째 음반을 채우고 있으며, 아홉 번째 음반은 작년 세상을 떠난 러시아의 대가 알프레드 쉬니트케(b.1934 d.1998)의 현악 사중주 2번과 4번에 혼성 합창을 위한 협주곡 중 한 곡을 크로노스가 현악 사중주로 편곡하여 싣고 있다. 그 동안 크로노스가 지속적으로 소개해 왔던 제3세계 작곡가들의 작품에 대한 애정을 이번 기념 세트에서 빠뜨릴 수 없었을 것이다. 베트남 출신의 P.Q.판(b.1962)과 백인이지만 그 나라 원주민들의 음악을 서구음악과 접목시키는 작업을 해오고 있는 남아프리카의 케빈 볼란(b.1949)과 호주의 피터 스컬토르프(b.1929)의 작품들이 마지막 음반을 장식하고 있다.
99년을 맞이하여 크로노스 사중주단에서도 큰 변화가 생겨났다. 20년 넘게 함께 해온 멤버들 중 첼로의 장르노가 일년간의 안식년을 가지게 되면서, 새로운 여류 첼리스트 제니퍼 컬프를 새 멤버로 맞이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25년간 추구해온 현대 음악에 대한 열정은 다음세기에도 변함없이 지속될 것이다.
크로노스 사중주단 공식 웹 사이트 : www.kronosquartet.org
출처 : 레코드 포럼(몇월호인지 모르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