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를 만나러 이 추운 겨울에 핀란드의 북극권으로 발길을 옮겼다. '아이구 추워라!'하고 소리 지를 사람도 있겠지만 춥기에 더욱 신비로운 땅 라플란드에서 주워 담아온 소소한 여행 얘깃거리들을 한번 풀어보겠다. 자!! 그럼 몸을 녹이는 따끈한 국물 한 사발을 준비하시라.
핀란드는 겨울이 아름다운 나라이기보다는 겨울이 어울리는 나라이다. 이 나라에는 산과 강, 그리고 호수가 지천에 깔려있다. 그래서 눈 덮인 겨울철 자연경관은 유럽에서 단연 일품이다. 핀란드의 겨울을 생각하면 첫 번째로 생각나는 게 바로 산타클로스와 크리스마스. 그래서 난 추운 겨울 날씨에 손바닥을 호호 불어대며, 서슴없이 산타 마을로 향했다. 허연 수염 날리며 빨간 털모자 쓰고 선물 포장에 한가할 틈 없을 산타클로스와의 인터뷰를 위해서.
산타가 사는 곳, 산타 마을
라플란드 지방의 주도 로바니에미(Rovaniemi) 시내에서 8km 떨어진 한적한 숲 속에 산타마을(Santa Village)은 숨어있었다. 산타 마을 안에는 산타클로스의 사무실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벽난로가 구석 한군데에 놓여 있고, 그 옆에 정성스레 포장된 선물보따리가 쌓여 있었다. 필자는 산타 할아버지를 만나기 전 그의 인상을 맘속에 그려보았다. 분명 전세계 어린이들을 상대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일일이 나누어주느라 얼굴에는 업무 과다로 인한 피곤함이 베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점점 복잡해지는 도시구조 속에서 주소 찾느라 고생하며 받은 스트레스로 머리에 원형탈모증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짱짱한 나이로 인해 볼에 심술살이 붙어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추측은 모두 빗나갔다. 내가 만난 산타할아버지는 동화 속에서 보아온, 인자하고 자상한 모습 그대로였다. 넉넉한 기품으로 그를 찾아온 어린 아이들에게 다정다감하게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주며 아이들이 가져온 편지에 기념 도장을 찍어주느라 바쁘신 모습이었다.
자, 그럼 이제 산타 할아버지와의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간다. "산타 할아버지 크리스마스 아닌 날에는 뭐하고 지내시지요?" 예전부터 산타를 만나면 이 질문을 꼭 해보고 싶었다. 아마 비슷한 질문을 품고 계신 분들이 많으시리라. "산타 할아버지는 애주가란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주량은 얼마인가요?" 나는 그의 사생활에도 날카로운 질문들을 집요하게 던졌다. 산타 할아버지 왈 그는 현재 크리스마스를 위해 1년 동안 이곳 산타 마을에서 체력을 다지느라 여념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동안 불어난 체중 때문에 술 끊은 지 오래되었다네...그래서인지 목살을 감추려고 의식적으로 턱을 올리는 모습에 필자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믿거나 말거나!
연중 산타클로스가 제일 바쁜 시기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 전 세계 어린이들이 보내온 편지에 밀린 답장을 몰아 써야 할 테니, 분명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 하루에 쏟아지는 편지만도 3만여 통에 달한다고 하니 내가 볼 땐 산타라는 직업은 사람 잡을 만한 고문(?)이다. 하지만 산타 할아버지 주변에는 그 어디에도 도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정녕 산타는 신이란 말인가? 아니면 신통술을 지닌 도인인가?
산타 마을을 나오기 전 산타와의 인터뷰 기념으로 사진 한 장 찰칵 찍었다. 산타랑 사진 찍으러 그 먼 데까지 간 거 아니냐구? 그래도 멋지잖아? 핀란드 와서 산타에게 기념스탬프도 받고 사진도 한방 같이 찍고..현대백화점 '짝퉁' 산타와 사진 찍는 거랑은 품위가 다르잖아?
산타 크로스의 원조는 소아시아의 니콜라스 사제
산타 마을에서 만난 산타 할아버지는 진정한 사랑을 나눠줄 줄 아는 넉넉한 기품의 진짜 겨울 남자였다. 난 앞으로 산타 할아버지의 열렬한 팬이 되기로 다짐하면서 산타마을에서 버스를 타고 근처의 산타파크로 향했다. 산타 파크는 산타 마을과 함께 아무리해도 절대 넘볼 수 없는 라플란드 부동의 슈퍼 울트라 어트렉션이다. 1998년 완공된 산타파크는 마법의 동굴 안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라플란드 관광산업을 진일보시키고자 한 노력이 보이는 핀란드 관광업계의 최대의 금맥이다. 연중 수많은 방문객들이 이곳을 찾는데, 특히 일본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와 어지간히 법석을 떨고 다녀간다.
북유럽 최대의 판타지 랜드 산타파크는 12월초라서 그런지 의외로 방문객들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울려라 종소리, 날아라 산타보드'를 외치는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정겨운 징글벨 캐롤송이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풍경은 이곳이 매일매일 해피한 곳임을 알려주었다. 신나는 각종 놀이기구들이 거대한 동굴 안에 설치되어 있었고 크리스마스에 관한 다양한 판타지 랜드가 펼쳐져 있어 방문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랩랜드 공방에서는 전통방식으로 공예품을 만드는 장인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산타파크에서는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이곳을 방문한 어린이들을 위한 다양한 버라이어티 쇼가 펼쳐진다. '누가누가 잘하나'식 카드 만들기, 산타 그리기와 같은 행사가 펼쳐진다. 말하자면 '연말 왕중왕 뽑기 어린이 대열전'이라고나 할까?
산타 크로스의 원조가 4세기경 터키의 소아시아 지방에 살던 니콜라스 사제라는 것은 이미 밝혀진지 오래된 사실이다. 니콜라스 사제는 매일 밤 커다란 자루에 먹을 것과 옷을 넣고 남 몰래 돌아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중세에는 플랑드르 지방에서 니콜라스 사제는 어린이들을 지켜주는 성인으로 받들어 졌으며, 마침내 1821년 노르웨이 지방의 랩족의 썰매에서 힌트를 얻어 하얀 수염에 붉은 옷, 그리고 썰매를 타고 공중을 달려가는 이미지가 클레멘트 무어의 시와 토마스 나스트의 만화 속에서 창조되었다. 빨간 코의 루돌프는 이보다 늦은 1939년 뉴욕의 광고회사 중역 R.L.메이에 의해 창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알쏭달쏭 퀴즈 하나를 풀어보자. 산타 클로스가 불로장생하는 실존 인물이라면 그의 나이는 현재 얼마일까? 답은 185세. 틀렸다! 2004년에서 1821년을 빼면 185라는 답이 나오지만, 산타 클로즈는 태어날 때(1821년)부터 일하기 시작했으니 최소한 50살 이상은 먹고 태어났을 게 분명하다. 따라서 답은 알 수 없음이 정답이다.
핀란드와 산타 클로스와는 엄밀히 따져보면 아무 관계가 없다. 하지만 산타클로즈의 나라로 대대적으로 선전되는 곳은 전세계에서 로바니에미 한 곳뿐. 노르웨이나 스웨덴 북부의 어느 산골짜기에다 산타 마을을 하나 세워볼 법도 하다. 로바니에미가 산타 마을로 유명해 진 것은 1927년 핀란드 라디오 방송의 한 아나운서가 '산타클로스는 로바니에미 마을에 있는 코르바툰 투리 산에 살아요'라고 말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산타 캐피탈, 로바니에미는 라플란드 여행의 베이스
라플란드 여행의 베이스 역할을 하는 곳은 위에서 언급한 로바니에미(Rovaniemi)라는 도시.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Helsinki)나 투르쿠(Turku)에서 야간열차를 타면 새벽에 이곳에 도착한다. 로바니에미는 청결한 분위기에 각종 편의시설이 마련된 곳이지만 도시 자체는 그다지 큰 매력이 없다. 여행자들이 이곳으로 몰려드는 이유는 로바니에미가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자타가 공인하는 '산타 캐피탈'이기 때문.
아무튼 겨울철 유럽여행을 계획중이라면 시간을 내서 이곳 로바니에미를 방문해보자. 일정이 짧은 사람은 이틀 정도의 시간을 두고 산타 빌리지와 산타 파크를 당일치기로 다녀오고 다음날 라누아 와일드라이프 파크(Ranua Wildlife Park)나 인근의 순록농장을 방문하는 것이 좋다. 라누아 파크에는 히르비(Hirbi)라고 불리는 덩치가 말보다 큰 핀란드 무스(사슴과)가 볼만하다. 로바니에미 시내의 여러 여행사에서는 스노모빌이나 개썰매, 순록썰매를 타고 인근의 대자연을 감상하는 투어프로그램으로 방문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라플란드를 찾는 여행자들 중에는 길고 어두운 핀란드의 겨울철에 볼 수 있는 오로라를 보기 위한 방문자들이 꽤 있다. 생생하고 환상적인 빛의 파노라마 현상인 오로라는 정확히 말하자면 태양 표면의 폭발로 우주공간으로부터 날아온 입자가 지구자기변화에 의해 고도 100∼500km 상공에서 대기 중 산소분자와 충돌해서 생기는 현상이다. 오로라는 북위66도인 북극권 위 지방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데, 오로라 중에는 수천 킬로미터의 하늘에 커튼처럼 펼쳐지는 장관도 있다고 한다.
로바니에미 시내의 렌트카 오피스에 가서 금전주머니를 툴툴 털어 독일제 오펠(Opel) 소형차를 빌렸다. 그리고 일본인 여행자 친구 셋이랑 함께 라플란드 자연 탐방에 나섰다. <올드보이>의 최민식을 연상시키는 사자머리를 한 구보타, 유치원 선생으로 일하는 타시, 모든 짐을 혼자 다 짊어진 표정으로 항상 말없이 수줍기만 한 후루타. 이렇게 세 친구와 로바니에미 유스호스텔 키친에서 밥짓다 만나 함께 여행하게 된 것이다. 나의 목적은 라플란드 자연경관을 보는 것이었고 일본인 셋은 북극권 너머 이나리(Inari)까지 가서 오로라를 보는 것.
우리 일행은 먼저 핀란드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레비(Levi)라는 큰 스키 리조트에 들렀다. 라플란드의 12월에는 오후 2시면 이미 하늘이 어둑해지기 때문에 오후 3시쯤 스키 장비를 빌려 스키를 타니 이미 조명등 아래 설판을 누벼야 하는 야간스키가 되어버렸다. 눈이 얼마 없어 빙판에서 스키를 타야했는데, 경사진 얼음판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핀란드에서의 스키 데뷔식을 혹독하게 치뤘다.
라플란드의 매력은 눈 덮인 원시 자연
라플란드는 랩족의 땅이라는 의미. 랩족은 사메(Saame) 또는 사미(Sami)라고 불린다. 랩족은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러시아에 걸쳐 널리 분포하고 있다. 랩족은 원래 핀란드의 원주민이었지만 1세기경부터 러시아의 우랄산맥 근처에서 이동한 민족들에게 쫓겨나 오늘날의 라플란드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래 전부터 랩족은 국경을 무시하며 라플란드 전역을 오가며 순록을 유목하며 살아왔다. 라플란드의 매력은 원시 자연의 모습에 있다. 솔직히 새하얀 눈이 천지를 뒤덮은 숲 속으로 순록이 이끄는 썰매가 지나가는 그림엽서스러운 풍광은 다 주체 측의 귀여운 농간이다. 그런 모습을 본다해도 인위적이다. 원주민이 아닌 관광객들을 위한 썰매이니 말이다.
인적 없는 외길 도로. 레비를 떠나 이나리까지 달리는 동안 국도에는 차량이 거의 없었다. 가다가 차를 멈춰 세우고 낭만이 흐르는 눈밭을 거닌다. 산소 섭취량을 늘리며 북구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함이다. 주변에는 자작나무 숲이 끊임없이 이어지다가 어느덧 눈 덮인 검푸른 삼나무 숲으로 바뀌었다. 이 나라에서 빌려주는 렌트카 안에는 자동온도장치가 있다. 그래서 운전 중이라도 바깥 기온을 바로 알 수 있다. 북극권을 넘어서자. 마이너스 6-7도를 오르내린다. 밤이 되면 10도 가까이 떨어진다. 아직 본격적인 겨울이라 할 수 없지만, 건조하여 체감기온은 더 떨어진다. 좀 덜 끓인 라면이라도 후루룩 마셔야 몸이 풀릴 것 같은 매서운 날씨이다. 이런 날에는 컵라면, 오뎅국물, 붕어빵 등이 간절히 생각난다.
우리 일행은 멀고 험한 라플란드 땅길을 겨우 헤엄쳐서 최종 목적지인 이나리에 도착했다. 이나리는 이나리호수에 면해 있는 인구 550명의 작은 타운이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이 별 네 개를 뿌려가며 극찬한 사미 뮤지엄 (Sami Museum)을 방문해 보았다. 랩족들의 다양한 문화와 이 지방의 자연 생태계를 소개한 이 뮤지엄에서 실제 랩족을 만나 인사를 나누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라플란드까지 왔다면 반드시 먹어봐야 할 게 있다하니 바로 순록고기. 랩족들의 주식이면서 훈제 순록육포는 이곳 사람들의 훌륭한 술안주가 된다. 칼질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이곳에서만큼은 돈지갑을 열고 순록고기를 한번 맛보시라. 육즙이 가득한 고기를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오호! 이런 맛 첨이야'라는 감탄사가 나올 것이다. 순록고기는 육질이 생각보다 연하고 약간 노릿한 맛이 나지만 안심 스테이크처럼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삼청동 수제비, 무교동 낙지볶음처럼 <핀란드 순록 철판 구이> 타이틀을 걸고 서울서 고기집을 개업해본다면 대박나지 않을까?
이나리의 산장에서 바라본 밤하늘에는 유난히 별빛들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 별빛들 사이로 산타 할아버지와 루돌프 사슴의 딸기코가 뭉실뭉실 떠오른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북극의 푸른 어둠 속 너머에서 이역만리 한국 땅까지 찾아올 산타할아버지의 빨간 자루가 몹시 기다려진다. 그 안에 담겨있을 나만의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선물은 과연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