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4일 오후 1시30분 잠실나루역에서 만난 '한강'답사는 옛 잠실도와 부리도 북단을 따라 서쪽으로 진행되었다.
옛 잠실도와 부리도 사이 한적한 섬마을 부렴마을에서 답사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971년 성내천 쪽 한강의 물줄기를 막는 공사를 벌였다.
한강의 본줄기 송파강을 메워 거대한 도시로 만들었고 잠실도와 부리도도 이 천지개벽의 거대한 토목공사로 날라갔다.
잠실도 북쪽의 샛강이 한강 본줄기로 뒤바뀐 순간이다. 그때 샛강은 폭 350미터 수심 4미터 정도였다고 한다.
이 토목공사로 두 섬에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였던 잠실 새내마을 부렴마을도 해체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대신 한적한 섬 마을에는 육중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숨 막힐듯 잔뜩 덮혀있다. 그 구조물은 역사문화도 밀어냈다.
이날 답사는 권해룡 민현숙 장명숙 정충원 조영희 홍경선 선생님 등 6명이 함께 하였다.
잠실종합개발계획으로 사라지기 직전 모습을 말해주는 잠실 두 섬의 빛바랜 사진이다.
아주 한적한 잠실도와 부리도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샛강이 한강으로 둔갑하였다.
그 자리에는 또 종합운동장과 세계최대의 베드타운인 잠실아파트단지가 들어선 것이다.
1973년 대한주택공사가 시작해서 1978년 완공한 이 공사로 아파트 2만호와 14만명의 인구를 수용하였다.
5층의 중저밀도 아파트가 밀짐되던 잠실 1.2.3.4단지는 재개발로 초고층 아파트단지로 탈바꾸하였다.
1960년대 한강의 섬 잠실도 부근을 항공촬영한 모습으로 왼쪽 섬 모양의 잠실도가 선명하다.
광나루 쪽에서 흘러내려온 한강은 성내천 부근을 지나 오늘의 장미아파트 부근에서 방향을 틀며
송파강을 형성하고 있다. 그 송파강이 잠실섬을 오른쪽에 끼고 힘차게 흐르고 있느 모습이다.
1920년 육지측량부에서 제작한 뚝섬지형도에 저자도와 잠실섬이 잘 나타나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전의 모습이어서 1960년대 항공사진에서의 한강유로와 또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1971년 4월 성내천 부근의 강물을 돌과 흙으로 틀어 막았다.
이 대형 물막이공사로 강의 유로를 샛강쪽으로 돌려 한강을 크게 확장하였다.
그 잠실도와 부리섬도 완전 도시로 흡수되어 육중한 아파트와 종합운동장 시설로 들어찼다.
조선 초기의 국립양잠소 잠실도회가 있었던 뽕나무 단지 상전(桑田)이 천지개벽의 수준으로 급변한 것이다.
현재 잠실 7동 지역으로 섬에 자리하였던 부렴마을이다.
그 섬은 '부리도(浮里島)' '부래도(浮來島)'라고 불렀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물에 떠 있는 마을의 섬', '물에 떠내려 온 섬' 등으로 불리던 섬이다.
잠실 섬과 백사장을 사이에 두고 연결돼 있어 사실상 같은 생활권이었던 섬이다.
백사장으로 이뤄졌던 이 섬과 잠실 섬은 한강종합개발 과정에서 육지와 연결돼 잠실종합운동장과 아파트 단지 등이 들어섰다.
인구는 50여 가구가 넘었다고 전한다. 이곳의 주된 소득원이었던 뽕나무는 매립공사 때
한 그루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상신제(桑神祭)를 올렸던 500년 넘은 뽕나무도 사라졌다.
이 마을 사람들은 뽕나무를 수호신으로 여겼다. 그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어느 날 뽕나무 고목 근처에서 쟁기로 밭을 갈고 있었다. 소가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그때 농부가 뽕나무 가지를 꺾어 소를 때렸다. 그 소가 병들어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
뽕나무의 신이 노하였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마을사람들은 뽕나무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아 잠실벌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제(洞祭)을 올렸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부리도에서 군에 입대하여 참전한 10여명이 모두 전사자 없이 무사하게 귀향하였다.
이 모두가 뽕나무 신의 가호라고 믿고 있다.
부렴마을에 있던 이 돈대는 마을사람들의 공동노동으로 쌓아 물난리 때 피난처 구실을 했다.
보통 때는 마을사람들이 모여 노는 쉼터였다고 한다. 또한 높이 3m에 넓이가 400평이나 됐다.
버드나무가 많아 여름 내내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고 전해진다.
잠실 사람들은 1972~73년에 토지 보상을 받고 이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등기를 가진 집이나 땅은 원래 평수의 40~45% 정도를 잠실7동 새마을에 대토을 받았다.
등기가 없는 경우는 주거가 가능한 최소한의 땅만 불하받았다고 한다.
새내마을 사람들은 보상받은 돈으로 지금의 잠실본동 새마을 시장 옆으로 와 집을 지어
마을의 이름을 이어받아 ‘신천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래서 생긴 새마을 시장도‘새로 지은 마을’이다.
1976년 새마을 시장 앞에는 잠실주공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잠실섬과 부리도가 사라졌던 70년대 초는 60년대 후반부터 추진되던 한강 공유수면 매립사업으로
흑석·동부이촌·압구정·구의동 등 강변 마을들이 하나둘 모습을 감추며 새로운 마을의 모습으로 형성되어 가던 시대였다.
이곳 주민들은 송파강 물막이 공사가 끝난 1971년까지 서울에서 마을 공동체가 온전히 살아 있던 채로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자양반도가 중종 15년(1520)에 큰 홍수가 나고 난 뒤 지금의 광나루 아래에서 뚝섬 방향으로 샛강이 생기면서 섬이 되어버렸다.
이 샛강을 사람들이 '새로 생긴 내'라 하여 '새내'라 부르고 한자로 신천이라 한 것이다. 현재의 신천동 동명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이후 장마가 지면 샛강 인근 마을에 피해가 컸으므로 8년 후인 중종 23년에 군인들을 동원하여 물길을 막으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이후 1960년대에 이르도록 잠실은 한강 본류와 샛강으로 둘러싸인 섬이었다.
잠실섬에는 일제강점기까지 양잠업을 많이 하여 섬에 뽕나무가 무성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일제가 뽕나무를 모두 뽑아버려 채소를 심었다. 오이, 참외 등이 많이 재배되어 왕십리와 동대문 등지에 공급되었다. 이곳은 1960년대까지 외지인도 없고 도둑도 없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한적한 마을이었다. 새내를 건너기 위해 잠실대교 부근에 신천나루가, 한강 본류를 건너기 위해 현재
석촌호수 동호 남쪽에 송파나루가 있어 행인들을 건네주었다.
첫댓글 회장님!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