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암 조광조는 1519년(중종 14년) 발생한 기묘사화로 사형 위기에 처했다.
훈구세력에 의한 사림세력 숙청 사건이었다. 조광조는 광화문 앞에 모인 성균관 유생
1000여 명의 호소로 사형 위기를 면했다. 그해 음력 11월 중순 능성현(전남 화순 능주)으로
귀양 보내졌다. 11월 25일 능주에 도착, 25일 동안 귀양생활을 했다.
눈보라 치는 날 금부도사가 가져온 사약을 받고 37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금부도사 유엄(柳淹)이 사약을 조광조에게 전하는 순간을
작가 최인호는 그의 책 <유림>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조광조는 대왕마마의 안부를 물었다는 기록은 전하고 있다.
유엄이 대왕마마의 안부를 전하자 조광조는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하오면 도사 내 한가지만 묻겠으니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난데없는 조광조의 질문에 머뭇거리며 유엄이 대답하였다.'
"대답하겠소."
"하오면 도사, 지금의 정승은 누구며
금부당상이 누군지 가르쳐 주시겠소."
약속대로 유엄은 대답하였다.
"정승은 남곤(南袞) 나으리고, 당상께오서는......"
유엄이 잠시 말을 끊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금부당상은 바로 유엄의
직속상관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상께오서는 심정 대감이시오."
도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남곤과 심정,
두 사람의 이름을 듣는 순간조광조는 비로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하였다.
"그렇다면 신이 죽는 게 틀림이 없소이다.
신에게 사사의 명이 내린 것이
조금도 의심스러울 게 없소이다."

조광조는 1519년 12월 20일 중종으로부터 사약을 받는다.
사약을 받아든 절체절명의 순간, 그는 “관을 두껍게 만들지 말라.
먼 길을 가기 어렵다”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전해온다.
죽음 앞에서조차도 초연한 선비의 고결함에 전율이 느껴진다.
바로 그 사약을 받은 자리라고 전해오는 곳에는
소박한 풍취의 ‘애우당(愛憂堂)’이 들어서있다.
정암에 대한 추모 작업이 이뤄진 것은 그의 사후 149년째 되던 해인
1667년(현종 8년), 능주 목사 민여로가 주도하여 비를 세웠다.
1986년에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된 강당을 지었고, 영정각도 지어 영정을 봉안했다.
유배 생활을 하던 초가도 옛모습 그대로 복원해 놓았다.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는 비문 한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모두 말하기를 우리나라로 하여금 삼강오륜의
윤리를 알게하여 이적(되놈)과 금수(짐승)가 되는 것을
면하게 하는 것은 오직 정암 선생의 덕택이라 하여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엄숙하게 머리숙여
공경치 아니한 이 없으니라…”
이곳은 여느 유적지와는 다르다.비운이 서린 곳이다.
지상천국 건설의 혼이 뜨겁게 불타오르다 갑자기
꺼져버린 통한의 땅이다. 정암 열정에 염증 느끼던 중종
결국 의심정암의 이런 꿈이 한창 불타오를 때 다른 한쪽에선
검은 음모가 싹트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위험에 처할 운명임을 직감한 남곤·심정·홍경주 등은
정암을 제거하기 위한 모략의 덫을 놓기 시작했다. 식을줄 모르는
열정으로 중종의 학문 수련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정암을 중종
자신도 버거워하던 차였다.
궁중의 동산에 있는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네 글자를 써놓고 기다렸다가 벌레가 갉아먹어 글자 모양이
나타나자, 그 잎을 따서 왕에게 보였다.
중종은 흔들렸다. ‘走’와 ‘肖’ 두 글자를 합치면 조(趙)가 된다.
말하자면 ‘주초위왕’은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정암의 열정과 과격한 언행에 염증과 두려움을 느낀 중종은
결국 정암을 능주로 귀양 보내고 그 한 달 뒤에 사약을 내린다.
이상사회 건설을 위한 개혁작업을 추진하다 되레 임금의 의심을 사
사약을 받은 정암은 당시의 심경을 절명시에 담았다.

옛 공암나루터에 복원한 소요정(逍遙亭)이다.
소요정(逍遙亭)은 서울 강서구 가양동 탑산 남쪽 기슭에 있던 정자이다.
고종 28년(1891)에 편찬된 ‘양천현읍지’에 이미 터만 남아 있는 것으로 돼 있다.
소요정(逍遙亭)이란 중종반정(中宗反正) 공신 심정(沈貞, 1471-1531)의 아호다.
그는 1518년 형조판서 물망에 올랐을 때 신진사류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반대로
임명받지 못하자 물러나 이곳 탑산 위에 정자를 짓고 울분을 달래던 시절의 것이다.
다음 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사류를 일망타진하고 권력을 전횡하다가 동궁(東宮) 저주사건에
연루되었음이 드러나 유배지인 평안도 강서에서 기묘삼간(己卯三奸)으로 지목당해 사약을 받아 죽고 말았다.
뒷날 다른 이들이 명예를 회복하였음에도 심정만은 소인배로 간주당해 비아냥의 대상이었지만 살았을 때는
꾀주머니라고 하여 지낭(智囊)이란 별명으로 불리웠다.

겸재 정선의 양천팔경 중에 그림 <소요정>이 있다.
정작 이 그림 <소요정>에 소요정은 없다.
이 정자 <소요정>의 주인공은 중종 때 훈구대신 심정(沈貞)이다.
그는 조광조에 밀려 공암나루로 낙향해 정자를 짓고 소일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신진개혁파 조광조에게 일격을
가하기 위한 준비를 한 심정이다.
중종 14년(1519) 조광조 등은 마침내 자기들의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들고 일어났다. 그리하여 왕에게 간청하여 이른바 위훈삭제사건 즉
중종반정의 공신 중 외람되게 공신의 작호를 받은 자 76명에 대하여
그 공훈을 삭제해버리라고 한 것이니 이것은 자기들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데 거추장스런 존재인 구세력을 내몰자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권력의 핵심에 있던 공신세력들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었다. 공신세력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목을 겨누는
대단히 위험천만한 사안이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공신세력들의 반격을
받아 화를 당하게 되었다.남곤은 본래 문인으로서 촉망받던 사람이었다.
조광조 등이 자기를 소인으로 지목하자, 그들 사림파를 항시 미워하여
타도하려 하였다. 그러던 차에 위훈삭제사건이 일어나 그에게 좋은 구실을
만들게 하였다. 그 무렵 지동(地動)이 크게 일어나서 왕이 근심하는 것을
본 그는, 자기와 같이 남소인이란 지목을 받고 있는 심정과 모의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즉 권세 있는 신하가 나라 일을 제 마음대로 하고
장차 모반을 일으키려 하기 때문에, 그 징조로서의 지동이라 하여 왕의 마음을
흐리게 하였다. 그 뒤 연거푸 말을 지어 퍼뜨리기를 민심이 점차 조광조에게로
돌아간다 하고, 또 대궐 후원에 있는 나뭇가지 잎에다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꿀로 글을 써서 그것을 벌레가 파먹게 한 다음, 천연적으로 생긴 양 꾸미어 궁인으로
하여금 왕에게 고해 바치게 하였다.
‘走肖’는 즉 ‘趙’ 자의 파획(破劃)이니 이는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을 암시한 것이다.
이리하여 중종의 마음을 격동시킨 남곤·심정·홍경주 등은 밤중에 갑자기 대궐로
들어가 신무문에 이르러 왕에게 조광조의 무리가 모반하려 한다고 거짓으로 아뢰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인 홍경주는 전일 반정공신으로서의 그의 좌찬성 벼슬이
너무 과하다고 왕에게 아뢴 조광조를 밉게 보고 있던 터로, 그는 그런 사사로운
감정으로, 왕의 빈(嬪)이 된 그의 딸을 충동하여 수시로 조광조를 참소케 하였다.
그러던 차에 조광조 일파의 ‘위훈삭제사건’이 일어나자 전일의 반정공신들이
모두 자기 벼슬을 빼앗길까 우려하여 대소동을 일으켰다. 남곤·심정·홍경주 일당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거짓으로 아뢰었다. 이때 중종은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 조짐으로
꺼림칙하던 차에, 조광조 일파가 모반하려 한다는 말에 대경대노하여 즉시 무사들로 하여금
조광조·김식(金湜)·기준·한충·김구·김정·김안국·김정국·이자 등을 잡아들이라 하였다.
이 난데없는 밤중의 고변 통에 불려 들어온 조신들은 모두 벌벌 떨고 섰는데,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이 소리 높여 왕에게 간하였다.
“연소한 유생들이 때를 알지 못하고 예민한 수단을 부렸을지언정,
절대로 다른 뜻을 품지는 않았사오니 통촉하시와 용서하시옵소서.”
그의 늙은 눈에서는 눈물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않고 조광조 이하 여러 사람들을 일단 하옥시켰다가,
모두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그리고 얼마 뒤에 남곤·심정 등의 주청으로
이들 조광조 이하 70여 명을 모두 사약으로 죽였다.
이것이 이른바 기묘사화(己卯士禍)이다.
이때에 죽은 사람들을 가리켜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한다.

정선의 그림 공암층탑이다. 탑산(塔山)이 우람하게 자리하고 있다.
탑산 정상 남쪽 기슭에 정자가 보인다.그 정자가 바로 심정의 소요정(逍遙亭)이다.
세 덩어리의 광주바위가 더욱 우람하게 앞을 가로막고 허가바위 절벽은 까마득하게 솟아나서
그 위 탑산 뒤 봉우리를 압도한다.허가바위 근처 강물에는 거룻배 한 척이 떠 있다.
삿갓 쓴 어부 두 명이 낚싯줄을 드리우고 태평하게 앉아 있다.
1518년 형조판서 물망에 올랐을 때 신진사류 조광조(1482-1519)의 반대로 임명받지 못하자 물러나
이곳 탑산 위에 정자 소요정을 짓고 울분을 달랬다고 한다.
심정의 손자는 소요정이 한강 이남의 강가 누정 중에서 가장 뛰어난 승경이라고 자랑했다.
심정은 소요정을 짓고 무척 흡족했던 모양이다. 문장이 뛰어난 선비들에게 글을 청해 현판으로 걸었다.
눌재(訥齋) 박상(朴祥)이, “반허리진 산들은 술상을 밀치고 있고, 가을 골짜기는 술잔을 물리치고 있네
(半山排案俎 秋壑閣樽盂)”라고 써주었더니 심정은 자신을 놀리는 문장임을 알아채고 현판에서 뽑아버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527년 이른바 ‘작서(灼鼠)의 변’으로 심정은 경빈과 함께 몰락한다.
누군가 세자의 생일에 맞춰 불에 지진 쥐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놓은 사건 '작서의 변'이다.
'작서의 변'은 불태운 쥐를 동궁에 매달아 세자를 죽이기 위한 동궁(東宮) 저주사건이다.
경빈 박씨에게 혐의가 돌아가 경빈 박씨와 그의 아들 복성군은 서인으로 폐하여진 뒤 사사었다.
심정 또한 경빈박 씨와 내통한 죄로 평안도로 유배갔다.
그는 유배지인 평안도 강서에서 기묘삼간(己卯三奸)으로 지목당해 사약을 받아 죽고 말았다.
뒷날 다른 이들이 명예를 회복하였음에도 심정만은 소인배로 간주당해 비아냥의 대상이었다.
살았을 때는 꾀주머니라고 하여 지낭(智囊)이란 별명으로 불리웠다.
심정의 인물 됨을 비야낭하는 말로 '곤쟁이 젓'이 전해온다.
남곤(南袞)의 '곤'과 심정(沈貞)의 '정'을 합친 '곤정'에서 비롯된 말이라는 설이다
남곤과 심정이 일으킨 기묘사화로 온통 집안이 쑥밭이 된 자손들은 물론 조광조에게 기대를 걸었던
백성들의 불만과 실망감 적개심을 담아내는 '곤쟁이 젓'을 낳게 되지 않았나 한다.
원래 곤쟁이는 새우의 일종이다.서해안 쪽에서 잡히는 이 새우로 담근 젖을 그쪽 사람들은 '곤쟁이젓'이라고 한다.
'곤쟁이 젓'은 해안에서 나는 자그만 새우젓에 빗대어 남곤과 심정을 '젓 담아 버릴 사람'으로 여긴 후세인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