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지식인 지도] 프리고진과 브뤼셀학파
벨기에의 화학자인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은 비평형 통계역학 분야의 전문가 가운데 일반인들에게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프리고진의 과학사상은 `혼돈으로부터의 질서(Order out of Chaos)` 라는 말이 잘 요약하고 있다. 그는 모든 수준에서 비평형은 질서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즉 비평형과 비가역성(非可逆性)은 모든 수준에서 질서의 근원이며,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가져다주는 기구라는 것이다.
1917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프리고진은 러시아 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혼란기에 휘말려 벨기에 브뤼셀에 정착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고전과 고고학.문학.철학 서적을 섭렵했으며, 법률가가 될 꿈을 가지기도 했다.
브뤼셀 자유대학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그는 41년 `비가역 현상에 관한 열역학적 연구` 라는 제목으로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때부터 비평형 통계역학을 지속적으로 연구한 그는 77년 이에 대한 공헌으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됐다.
프리고진 과학의 핵심적인 내용은 `소산(消散)구조 `(dissipative structure)` 와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에 대한 이론이다. 평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불안정한 비평형 상태에서 미시적인 요동의 효과로 거시적인 안정적 구조가 나타날 수 있는데, 프리고진은 이때 나타나는 안정적 구조를 소산구조라고 하고 이런 과정을 자기조직화라고 불렀다. 소산구조와 자기조직화가 바로 카오스로부터 질서를 가져다 주는 메커니즘인 것이다.
프리고진은 브뤼셀 자유대학 교수 및 국제 물리.화학연구소 소장, 미국 텍사스대(오스틴 소재) 물리.화학공학 교수 및 통계역학.열역학.복잡계 연구센터 소장으로 오랫동안 재직하며 활발한 연구활동을 통해 이른바 `브뤼셀 학파` 를 형성했다.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해 국내 물리학자.화학자.과학사상가들과도 폭넓게 교우하며 많은 영향력을 끼치기도 했다.
프리고진의 과학사상은 전체적으로 볼 때 비결정론적.유기체적.생태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동양의 시간 개념과 유사한 측면이 엿보이기도 한다. 프리고진은 존재 그 자체를 시간과 독립된 정해진 현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혼돈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존재의 본질이 발현된다고 생각한다. 프리고진은 동양사상뿐 아니라 칸트.헤겔.베르그송.화이트헤드.하이데거 등의 서구 철학에서도 자신의 사상의 원류를 찾고 있다.
카오스 이론을 포함한 프리고진의 과학사상은 포스트모더니즘.페미니즘.생태주의 사상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문예비평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1924~98)는 폴란드 출신의 수학자 베노이트 만델브로트(77)와 프리고진의 과학적 업적이 포스트모던한 과학지식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생태페미니즘 과학사가인 캐롤린 머챈트는 비결정론적인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는 카오스 이론의 부상이 기계적인 세계관을 거부하는 새로운 생태주의적 사고 방식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