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조성환 장로
묵도
찬송 465장, 478장
기도 오형국 목사 (성서유니온선교회 총무) 8’20”
故 윤종하 장로를 회고하며
손봉호 장로 12’50”
성서유니온선교회 21’20”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 35’40”
광야교회 한만동 장로 47’40”
찬송 460장
조사 백정란 이사 60’10”
곽종명 70’40”
故 윤종하 장로 말씀 : 테이프 듣기 74’30”
찬송 543장
설교 민경동 장로(사도행전 20:17-38) 88’30”
찬송 403장
축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우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후 13:13)
나는 원래 성격이 약간 급하여 어느 곳을 방문하거나 약속장소에도 미리 미리 가서 기다리는 성격이라
오늘도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토요일인 점, 추모 예배장소가 참석인원 규모에 비하여 자리가 비좁을 것 예상 등)
곽영국 북서울지부 이사장님의 차를 타고 오후 1시 55분에 집 앞을 출발하여 목적지에 3시 10분에 도착하였다.
이미 탁주호 목사님과 김민주, 김미진 부부, 박경자 님과 사위 등 몇 몇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조금 있으니 양고훈 목사님이 용산역에서 택시를 타고 이곳으로 오는 중이라고 어떻게 가야하느냐고 전화가 온다.
길을 잘 안내하였다.
그리고 나서 본당에 올라가 보니 이미 도착오신 분들이 기도하고 계시고, 이미 눈시울을 적신 분들이 적지 않았다.
보아하니 아직 예배시간 훨씬 전인데도, 이미 본당의 자리는 반 이상이 찼다.
그리고 충주에서 올라온 권은혜와 그녀의 부친과 오랫만에 반갑게 인사를 나누다.
3시 45분부터 조성환 장로의 인도로 찬송 몇 곡이 인도되었다. 그러면서 안내방송이 나온다.
참석하신 분들 중에서 비교적 젊은 사람과 광야교회 교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시고 뒤에 서 계신 외부 손님들은 앞에
여분의 자리가 있으니 나오시라는 말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 예배가 시작되었고, 뒤를 돌아보니 이미 자리가 꽉찼다. 그리고 장소가 좁아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아래 층까지 차서 많은 분들이 2시간이 넘게 서서 예배를 드렸다.
조성환 장로님의 사회로 지난 1월 25일 별세하신 고 윤종하 장로님 추모예배가 시작되었다.
찬송가 몇 곡을 부르고, 성서유니온선교회의 총무 오형국 목사의 대표기도가 있었다.
미리 준비한 기도로 명쾌한 내용이었고 이 예배의 성격과 잘 맞는 길지 않은 기도였다.
그리고 나서 고인을 회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먼저는 손봉호 장로님이 선배이신(경주 중-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영문과, 경주중 2학년부터 경주읍 교회(지금은 경주교회)에서
만남이 시작됨) 윤종하 선생의 빚을 많이 지고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분이라고 자기를 소개하셨다.
본인은 다른 사람의 의도에 따라 자리를 옮겨다녔지만, 윤종하 선생은 평생 동안 자기소신 껏 인생을 사신 분이고,
교회 역사와 교리(물론 중요하지만)보다도 성경의 권위를 최고로 높이며 언제나 성경에 순종하는 삶을 사시고 강조한 분이라고 하였다. 본인도 남은 생을 그렇게 살겠다고 하셨다.
경주에 있을 때나 서울의 동부교회 시절에도 같이 신앙생활 했으며, 심지어는 자기가 경주고등학교 시절
이미 서울대 영문과에 입학하여 대학생이 된 윤종하 선생이 영어로 편지를 써서 보내며 반드시 영어로 답장을 써서 보내라고 주문하였다
고 한다.
고등학생이 영어로 편지를 쓰는 것이 서툴지만 보내면 일일이 체크하여(문법, 스펠링 등) 다시 보내 주곤 하였다고 한다.
한 번은 윤봉기 목사님이 그 당시 신학교가 재정적으로 어려운 시절이라 본인에게 나중에 신학교 교수가 되면 사례를 받지 말고
무료로 가르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한 때 윤종하 선생이 건강(폐결핵)이 좋지 않아 공기 좋은 산 밑에 집을 얻어 요양하고 있었는데
그때는 손봉호 장로님이 가정교사로 기거하고 있는 집하고 가까워 자주 대화하고 교제했지만 나이가 먹은 후에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서로 교제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부족하지만 본인의 신앙이나 인격을 세우는데 영향을 미친 중요한 두 분은 바로 선친인 고 윤봉기 목사님과 윤종하 선생이라고 회고 했다.
이어서 성서유니온 시절을 회고하기 위하여 충남 청양 화성에서 목회하는 김원모 목사(화성장로교회 목사이며 성서유니온 전 간사)가
맡았다. 소천 소식을 들었을 때 실감이 나지 않았으며 전혀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고 하였다.
윤종하 장로님을 안 것은 윤 장로님이 영국 유학 후에 잠실의 장미 아파트 모임에서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복음에 대하여
새롭게 깨닫게 되었으며 1984년부터 성서유니온에서 직원으로 같이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때때로 지방에 같이 출장 가면서
대화중에 많은 것을 얻어 들으면서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바쁘게 사역하면서 소파나 차안에서 그리고 강의 휴식 시간에 아주 짧은 시간 잠(잠간 잠간 자는 잠)을 주무시면서
체력을 잘 비축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강의 나갈 때면 매일성경을 판매할 때 항상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팔았고. 강의가 있으면 항상 책을 가판에
벌려놓고 팔게하셨다. 어떤 때는 매일성경이 너무 무거워서 손에 피가 통하지 않는 일이 있어 며칠씩 고생했으며,
또한 어깨에 책을 짊어져서 한쪽 어깨가 쳐지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언제나 직원들을 가족처럼 사랑으로 대하셨고.
강의는 강하게 날카롭게 명쾌하게 하셨지만 직원이나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항상 부드러운 미소로 대하신 분이라고 하셨다.
한번은 청양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친히 청양까지 내려오셔서 김목사님 이 교회와 교인들을 건너편에 있는
감리교에게 넘겨주고 서울로 다시 올라오라고 권유까지 하셨으며, 때로는 청양까지 오셔서 3박 4일간 성경묵상 훈련을 해 주셨다고 한다.
언제나 전화로 안부를 물으시고 상담해 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십일조와 안식일 문제로 고신 교단에서 문제를 삼자 성서유니온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하여 기꺼이 1986년에 총무직에서
물러나신 분이라고 했다.
한국성서유니온은 1972년 6월 28일 종로 2가 YMCA 호텔 구석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되었으며 광화문 우체국 사서함 347호를
개설하고, 전화는 옆 사무실 것을 빌려서 썼다. 그리고 1972년에 가을에 '영생의 길'과 '삶에의 초대(요한복음)'를 내고 그 이듬해 매일성경 어린이용 1,000부, 성인용 4000부를 발행했다. 이것의 보급은 거의 윤종하 총무님의 몫이었다.
매일성경이란 이름은 돌아가신 김행권 장로님의 아내인 이경선 권사님이 작명하셨다.
아뭏튼 한국성서유니온의 초석을 놓으신 분이고 한국교회에 말씀 운동으로 일으키고 이 시대를 깨운 선구자이며
선지자며 하나님의 사람 큰 별이었다.
이어서 에스라성경대학원 대학교(에스라성경연구원) 시절을 이진섭 목사가 했다. 처음에는 말을 잘 이어가지 못했다,
고인을 회고하니 눈물이 앞서서 눈물을 훔치며 자주 중단하였다. 그리고 눈시울을 붉혔다.
윤종하 총무님을 만난 것은 등대교회 시절부터 20년이 되지만 실제로 같이 일을 시작한 것은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의
초석을 놓으면서였다고 한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1992년 영국으로 신학을 공부하러 갔을 때 마침 영국에 계시던
(영국 킹스턴 한인교회 설교자로 1년간 섬김- 김북경 목사님 안식년으로) 때로 자기가 있던 숙소로 찾아오셔서
영국생활에 대하여 일일이 가르쳐 주셨다.(지하철 표라든가 버스 타는법등 돈을 절약하는 법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리고 있던 차에 다시 찾아오셔서 한국에서 몇몇 지인들이 한국에 순수한 성경학교를 세우기 원하니
같이 일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그때의 인도를 받아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윤종하 총무님과 이진섭, 백정란 이사장이 같이 에스라를 위하여 3-4년 준비하여 거의 매일 만나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했고
지혜를 모았다고 한다.
드디어 1997년 3월에 에스라성경연구원이 개강하고 초대원장으로 윤종하 장로님이 취임하면서 학생들에게 실력과 경건에 많은
영향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성경 66권중 많은 부분을 직접 가르치셨으며 아침마다 학생들과 함께 말씀을 묵상하고 나누셨다.
에스라가 단순한 지적 욕구를 채우는 학교가 아니라 실천과 경건이 있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지식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치셨다. 2000년말까지 에스라 4기에 걸친 학생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신 분이시다.
이어서 이진섭 교수는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마감하였다(수1:6-9).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하며 주야로 묵상하여 그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광야교회 한만동 장로님이 목회자로서의 윤종하 장로에 대하여 회고하였다. 중복된 내용은 빼고 간략하게 보고하였다.
가정을 돌보지 않고 헌신, 교인들을 사랑으로 대하심. 심방과 상담의 대가 그리하여 교인들의 직장을 자주
방문하시어(각자의 시간과 사정에 알맞게 때로는 밤이라도 찾아가 심방하심) 심방하시고 그날 매일성경을 나누시고 기도해 주시고
상담해주시는 분이셨다.
그리고 강해설교를 하시는 분이시다. 성경을 명쾌하게 논리적으로 그리고 막힘이 없이 빠른 말투로 가르치셨다.
그리고 언제나 성경을 사랑하는 분이셨다. 그리고 성경대로 살려고 하는 분이셨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쉬운데
왜들 안된다고 하는 지 잘 모르겠다.
욕심을 버리면 된다고 하셨고 언제나 귀결은 자기부정이셨다.
성경에서는 성화를 강조하고 있는데 왜 성화를 그냥 지나치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하셨다.
성서유니온과 접촉하기 전부터 어려서부터(일제 말기) 성경을 여러 번 탐독하신 분이시다.
그당시에 읽을 책이 거의 없었기에 더욱 그러셨던 것 같다. 우리는 신앙의 거목을 잃었다. 우리 시대의 선지자를 잃었다.
우리의 사표를 잃었다. 우리에게 신앙의 길잡이를 잃은 것이다. 우리는 이제 말씀을 열심히 바르게 배울 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어서 조사가 있었다.
백정란 에스라 이사장의 조사가 있었다.
평소에 가르치시기를 내가 죽으면 절대로 울지도 말 것이며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오라고 하여
본인이 가진 옷 중에서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왔노라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윤종하 장로님이야 말로 자기를 수렁에서 건져준 스승이며 친구라고 했다.
적어온 조사에 애닲은 마음이 역역히 배어 있었다.
처음에 장미 모임에서 말씀을 들었을 때 그것은 융단 폭격과도 같았다. 아주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윤 장로님이 순종하라고 하지만 순종이 안되는 것을 억지로 강요한다고 때때로 속으로 투덜댄 적도 있다고 한다.
이제는 어느 정도 순종이 되는데 이것을 자랑하려고 했는데 당신은 우리 곁을 떠나셨다고 했다.
당신은 언제나 결론은 자기부정이셨다. 그리고 욕심을 버리고 단순하게 삶을 살라고 강조하셨다.
당신은 100년에 한번 나올 만한 사람이다.
에스라에 당신과 같은 사람 한 사람이라도 배출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당신이 고통을 멈추고 눈물 없고 고통 없는 아버지의 품 천국에서 쉬게 된 것을 축하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믿음의 교회 곽종명 집사의 조시가 짧게 있었다.
자기는 장로님라는 호칭보다는 윤종하 총무라는 말이 더 자연스럽다고 하였다.
이어서 고인의 육성 테이프를 듣는 시간이었다(12분 정도), 설교하실 때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여전하시다.
본문은 마태복음 16:21-28 베드로의 신앙고백 후에 비로서 처음으로 자기가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할 것에 대한 이야기부터의 설교이다.
베드로는 지식적으로 고백(마16:16)은 했지만 이것을 믿지는 못했다. 자기의 진정한 고백이 아니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책망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이다.
베드로는 메시아의 왕권에 대한 개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이 아직 정립되지 아니했다.
무력으로 이루어지는 나라로 오해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40일간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셨을 때
하나님나라 개념이 정립된 것이다(행1:4). 이어서 예수님은 24절에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을 말씀하셨다.
자기 목숨을 잃으면 얻을 것이며, 얻으려 하면 잃을 것이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 놓는 자를 의미 한다. 이런 자는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다.
목숨까지 다 내어 놓고 따르는 것을 의미 한다. 나중에 행한대로 갚으신다.
이는 상급에 대한 이야기나 행위구원론이 아니다. 자기 목숨을 온전히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산 자와 자기 목숨을 얻으려 하는 자(자기가 주이이 되어 생을 영위 하려는 자)를 구분하신다는 이야기이다.
아직도 정리가 안된 베드로이다,
이들에게 장차 예수님이 왕권(kingdom보다는 kingship이 더 어울린다)을 가지고 올 것을 말씀하셨다.
이 말은 누가복은 23장의 말씀과 같다. 한편 강도가 당신의 나라(왕권)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세요.
이 강도(로마로부터 독립 운동을 벌인 운동권 사람이다)는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실 것과 내세를 믿은 신앙이다.
그런데 단순히 이 구절을 죽기 직전에 믿기만(신앙고백이나 세례 받은 것) 하라고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겸손과 눈물의 사람 그리고 많은 어려움 겪은 사람 - 이단 시비에 휘말리기도 함.
때때로 왜 그렇게 강하게 말씀하셔서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느냐?
질문하면 강하게 도전해도 사람들이 변화가 안되는데 부드럽게 귀에 듣기 좋은 말만 하면 더욱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강하게 도전하는 것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2.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가르치신 분
3.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신 분
4.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으신 분
5. 이제 교회를 돌보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6. 이단 사설이 나올 것이다, 이에 대처하여 복음을 잘 전하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7. 본을 보이고 물질에 부담을 주지 않은 분이셨다. 교회에서 사례비나 퇴직금도 받지 않으시고 선교지에서
혹시 사례를 받으시면 다른 선교사들을 도우셨다.
8. 우리는 끝가지 은혜의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
9. 천국에서 볼 때까지 다시 보지 못하는 그런 고별예배의 자리이다(37-39절).
결국은 믿음의 길은 예수님이 먼저 본을 보여주시고 - 사도 바울이 그 길을 따랐고 -
고 윤종하 장로님이 걸어간 길(이 다 달려갈 길을 마치시고 안식을 누리시고 계심) -
우리도 걸어가고 있으며, 남은 생을 그렇게 걸어가야만(must) 할 길이다.
다같이 축도(고후13:13)를 함으로써 예배는 오후 6시 5분에 끝났고 이어서 광야교회 장로님들의 인사와 큰 사위 양원창(스톱바이 대표) 교우의 인사가 있었다. 민경동 대표장로님이 그동안 일어난 일의 경과 보고와 장례 절차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매일밤 그랬지만 돌아가시기 전날에도 선실에서 밤늦게까지 성경공부를 인도하셨답니다. 특히 부활과 영생에 대해서 아주 명쾌하게 강조하시고 하늘가는 밝은 길이 찬송을 부르셨답니다. 예정시간인 10시보다 늦은 11시 넘어서 끝났답니다. 동행한 부부 중에서 새로 복음에 대해 관심을 가진 부부가 있어서 부활과 영생에 대해 아주 명쾌하게 강조하셨다고 합니다) 전화로 통화했을 때 특히 최진한 사모님이 너무 기뻐하셨다. 소천하신 것이 아니라 마치 어디 멀리 출장을 보낸 기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오랫만에 만난 분들이 많아 서로 인사를 나누는데 시간을 보냈다.
특히 평소에 만나기 어려웠던 옛날 지인들(심정택 장로님, 정순태 집사 부부, 윤주만 목사,
유재선 목사 부부, 이예원 목사 부부, 김영원 선생, 전명순 원장, 권은혜와 부친, 등대교회 식구들 등등,
이름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지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서울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지인들이 원근각처(해남, 안동, 광주, 목포, 원주...)에서 많은 분들이 추모예배에 참석하였다.
1월 27일 밤에 유미열 씀
추신: 이는 본인이 현장에서 메모를 전혀 하지 않았고, 오직 기억에 의존하여 정리 해 본 것입니다.
내용에 있어서 잘못과 오류가 있다면 전적으로 저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예배의 순서를 스케치한 메모입니다.
별 의미는 없고 구멍난 마음을 달래고, 기억하고 싶은 내용들이라 몇 자 글로 적은 것입니다
첫댓글 존경하시던 장로님의 소천 소식에 조의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