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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 그랜트. 그는 어떤 행적을 남겼으며, 어떤 전과를 올렸기에 대통령으로부터 이토록 큰 신임을 얻었을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북전쟁 개전 이후 서부전선의 상황을 알아봐야 한다.
그랜트는 1843년에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사관학교 시절, 그랜트는 엄격한 규율에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었으며 군대가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특별히 두드러진 점이 없었으며, 다만 승마가 매우 우수했다고 한다.
졸업 후 4년 뒤인 1847년, 미국은 텍사스주의 영유권 문제로 멕시코에 전쟁을 벌인다. 이 전쟁은 젊은 그랜트가 실전 경험을 쌓을 기회를 주었다. 그랜트는 ‘부도덕한 전쟁’이라고 미국을 비난하였지만 자신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다. 부하들과 동고동락하며 같이 이끄는 타입이었으며, 이로 인해 2차례나 명예승진을 하여 대위가 된다.
전쟁 중에 리 대령과 한번 만났는 데, 당시 그랜트 대위의 옷차림을 리 대령이 지적했다고 전한다. 당시 리 대령은 총사령관 스콧 장군의 총애를 받는 참모로서, 젊은 그랜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멕시코 전쟁 중의 그랜트 대위
멕시코 전쟁 후 남북전쟁 전까지, 그의 인생은 우울한 것이었다. 태평양이 보이는 벽지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는 데, 가족들과 떨어진 고통으로 인해 입에 술을 대기 시작하였다. 곧 과음이 문제가 되어 군에서 불명예스럽게 사임하였다.
군에서 나온 뒤, 그랜트는 여러 가지 사업에 손을 대보지만 하나같이 잘 되지 않았다. 마침내는 고향에 있는 가족의 공장에서 사무를 봐주는 일을 하였다. 이 때의 그랜트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소시민이었다.
하지만 운명은 그랜트를 평범한 소시민으로 두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그랜트는 한 대중연설을 듣고 자신의 피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연방과 헌법이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오래전에 잊고 있었던 멕시코전쟁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며 그는 북군에 재입대한다. 자신에게 대령의 지위와 연대장의 직책을 줄 수 있는 곳을 수소문하여, 일리노이 21연대의 연대장이 된다. 이것이 전설의 시작이다.
그랜트는 첫 임무에서부터 여타 북군 지휘관과 달랐다. 켄터키주가 남부에 동조하는 기색이 뚜렷하자, 그랜트는 자신의 연대를 이끌고 켄터키 주의 파두차를 점령한다. 이곳은 테네시강의 입구에 해당하는 요새였으며, 남부가 켄터키주로 진격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한 것이다. 이어서 미주리주의 벨몬트 요새를 공격한다. 비록 이 공격은 실패하나, 아직 뭘 해야 될지 모르는 북군 지휘관들 사이에서 그를 두드러지게 하였다. 이 전공과 몇가지 행운이 겹쳐, 링컨은 그랜트를 준장으로 승진시킨다.
당시 서부전선의 북군 사령관은 프레몬트였다. 잭슨의 계곡전투에서 농락당한 그 장군이다. 프레몬트는 곧 북군을 영원히 떠나게 되는 데, 해임되기 직전에 연방에 마지막 공헌을 하고 간다. 그것은 그랜트를 미주리주 남동쪽 지역의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그랜트는 자신이 소신껏 지휘할 수 있는 1만 5천의 북군을 수중에 넣는다.
1862년 2월 6일, 그랜트는 푸트 선장의 미시시피 함대와 함께, 테네시주의 북쪽 경계에 있는 포트 헨리를 점령한다. 당시 서쪽에는 남군 포크 장군이 수십문의 대포로 컴버랜드 강의 입구인 콜럼버스를 요새화 했으며, 동쪽에는 테네시 주의 주도 내슈빌에 남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랜트는 이 사이를 절묘하게 공격하여 테네시주 전체의 남군 방어선을 뒤흔들었다.
서부지역 남군 사령관인 앨버트 존스턴은 이 난감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뷰리가드와 의논하였다. 논의 결과 부대 전체를 내슈빌 지역에 집결시켜 방어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를 위해서는 포트 헨리 옆에 있는 강력한 요새인 포트 도넬슨을 포기해야 했다. 존스턴 사령관은 이를 감수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막상 다음날이 되자, 존스턴은 포트 도넬슨을 포기할 수 없다며 그 지역에 1만 2천의 남군을 보낸다. 동시에 내슈빌에도 상당한 병력을 주둔시킨다. 이것은 큰 패착이었다.
1862년 2월 12일, 그랜트는 포트 도넬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요새의 포격으로 인해 푸트 선장의 함대는 큰 피해를 입는다. 그리고 도넬슨 요새의 남군 사령관의 공격으로 포위하던 북군을 기습한다. 당시 요새 안에는 나탄 포레스트의 기병대가 있었다. 서부전선 북군 전체를 떨게 할 용맹한 기병대장이었다. 포레스트와 요새 주둔군의 공격으로 그랜트의 우익은 큰 타격을 입는다.
이 공격은 그랜트의 부재 중에 있었는 데, 그랜트는 돌아와서 침착하게 반격을 명령한다. 돌파될 뻔했던 포위망은 다시 견고해졌다. 2월 16일, 강을 건너 탈출한 포레스트의 기병을 제외한 남군 1만 2천이 모두 항복한다. 이 전투로 인해 남군 존스턴 사령관은 휘하 병력의 3분의 1을 상실한다. 그리고 내슈빌과 콜럼버스를 모두 상실했으며, 켄터키 주 전체와 테네시 주의 3분의 2가 북군의 손에 들어간다. 남부에 있어 엄청난 타격이었다.
포트 도넬슨에서 탈출하는 포레스트
포트 헨리와 포트 도넬슨 전투의 승리는 북군 최초의 대승리였다. 불런전투 이후 남군에게 제대로 된 승리가 없었던 북부에 있어 그 최초의 대승리를 가져다 준 그랜트에 대한 열광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의 이름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는 곧 ‘무조건 항복 (Unconditional Surrender)' 그랜트로 알려진다. 그가 전쟁 전의 친구인 도넬슨 요새의 남군 지휘관 버크너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군 사령관 앨버트 존스턴과 뷰리가드는 그리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비록 그랜트의 도넬슨 점령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4만 2천의 병력을 집결하여 절치부심 복수를 기다렸다. 마침내 1862년 4월 6일, 피츠버그나루터에서 그 기회를 잡았다. 그랜트는 테네시강을 건넌 채, 다른 북군 사령관인 뷰엘의 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군이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완전히 방심하고 있을 때, 6개 사단의 남군 병력이 쏟아져 온 것이다.
샤일로 전투에서 작전 계획을 짜는 존스턴 장군
이 전투는 전장에 있던 교회의 이름을 따서 ‘샤일로 전투’라고 불린다. 히브리어로 평화를 뜻하는 샤일로 전투는 미국 역사상 그 때까지 존재했던 모든 전투보다 규모가 큰 전투였다. 미국이 건국이래 치른 3차례의 전쟁인 독립전쟁, 1812년 영미전쟁, 멕시코 전쟁 모든 사상자를 다 합친 것보다 많은 사상자가 이 한 전투에서 단 이틀동안에 발생했다.
샤일로에서의 남군의 기습
남군의 기습은 완벽했으며 북군은 여지없이 나루터까지 밀려나는 듯 하였다. 그러나 6천명 가량의 북군이 프렌티스라는 장군의 지휘하에서 북군 전선 중앙의 도로 주변에 집결하여 남군의 주공세를 막았다. 이 지역은 그 뒤 ‘벌집’이라고 불린다. 남군이 접근할 때마다 둥글게 형성된 북군 진지에서 벌떼같이 사격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벌집의 전투에서 남군은 12번이나 돌격을 가했는 데, 그 중 한번은 사령관인 존스턴이 직접 지휘하였다. 존스턴 사령관은 이 돌격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전사한다.
남군은 12번이나 돌격에 실패하자, 접근 방식을 바꿨다. 그 지역의 가능한 모든 포대를 모았고, 60문의 대포로 벌집에 사격을 가했다. 전쟁이래 가장 맹렬한 포격이었다. 이 사격과 좌우 북군의 후퇴로 인하여 프렌티스 장군은 항복을 한다. 이 때가 오후 5시 반이었다.
벌집에서 전투하는 남군과 북군
남군은 이 벌집의 북군으로 인해 공격의 기세를 소진하게 된다. 기습은 성공했지만 아직 나루터를 점령하지 못했으며 뷰엘의 북군이 오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서 남군은 정지하게 된다. 다음날 섬멸전이 될 것을 의심치 않았으며, 장군들은 숙면을 취했다.
하지만 단 한사람, 숙면을 취하지 않고 북군 진지를 정찰한 장군이 있었다. 포트 도넬슨에서 유일하게 탈출한 포레스트 장군은 계속 강가의 북군을 정찰하면서 이들이 증원되고 있음을 알았다. 즉시 사령관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려고 하였지만 보고 계통 중간에서 사라지고 만다. 결국 남군은 또한번 기회를 날린다.
다음날인 4월 7일, 그랜트는 뷰엘의 증원군과 함께 다시 남군을 공격한다. 이번에는 어제의 전투의 반대양상이었다. 북군의 기습과 함께 남군은 뒤로 밀려났다. 어느새 2배가 되어 있는 북군에게 지친 남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사령관이 된 뷰리가드는 부대를 퇴각시키기로 하였다. 퇴각 중에 추격하는 셔먼과 포레스트 사이에 조우가 있었다. 아직은 둘 다 사단장과 기병연대장 수준에 불과하지만 향후 서부전선 전체의 운명을 놓고 대결하게 된다.
샤일로 전투에서의 포레스트
(퇴각 시에 포레스트는 척추에 총상을 입는 데 북군을 한 명 등에 태우고 탈출에 성공한다.)
샤일로의 전투로 인해 그랜트는 크게 비난을 받는다. 전투 첫날에 남군이 기습을 하도록 부대를 방만하게 놔뒀다는 것이었다. 특히 북군 총 사령관인 할렉은 그랜트를 무척 싫어하였다. 그랜트를 부사령관으로 강등시키고 자신이 직접 사령관이 되어 미시시피의 코린스 시를 점령하였다. 당시 할렉의 지휘는 부대 전체가 1킬로를 움직이면 거대한 요새를 구축하고 거기서 숙영을 한 뒤, 다음날 또 1킬로를 가서 요새를 구축하는 방식이었다. 30킬로 남짓 가는 데 한달이 걸렸다. 그리고 뷰리가드가 모든 남군과 보급물자를 다 후송시킨 코린스를 점령하였다.
그랜트는 이런 장군 밑에 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군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떠나려고 했지만, 절친한 친구인 셔먼의 만류로 인해 생각을 고쳐먹었다. 다행히 할렉은 코린스의 ‘전공’으로 소장으로 승진을 하고, 그랜트는 다시 사령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첫댓글 흠.. 무조건 항복.. 멋지네요. 리와 그랜트가 만난적이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