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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종말론의 재고: 라깡 정신분석학적 종말론은 가능한가?
정혁현
I. 들어가는 글
“끝”은 항상 서사의 끝이며 따라서 하나의 서사를 지탱하는 환상의 종막이고 상징계의 붕괴이다. 상징계 밖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하지만 “종말”이라는 의미의 “끝”은 언제나 다양한 생물 종의 터전인 지구의 우주적 대 파국이라는 신화적 이미지와 함께 제시된다. 이는 아마도 거대한 규모의 자연재해가 인간에는 불가능한 체험인 “끝”에 대한 상상적인 이미지를 제공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재해는 “끝”이라는 관념을 표현하는 일종의 기호였다. 우리는 자연재해에 대한 경험을 참조한 ‘지구의 종말’이라는 표현이 이 불가능한 “끝”의 은유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인간은 이 은유를 통해 상징계의 붕괴를 무의식에 은폐한 채 서사를 지속할 수 있었다. 생명의 장인 물질계의 종말이 항상 물질계 외부의 삶의 장, 예를 들어 천국이나 지옥과 같은 존재 너머의 초재적 세계에 관한 종교적인 상상과 결부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피안에 의해 오염된 종말은 필연적으로 신화로 전락한다. “끝”이 봉합되어 사라진 세계는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 폐쇄된다. 오로지 인과관계의 동력만이 작동하는 세계에는 자유가 숨 쉴 공간도 없다. 반면 내재적 사유는 종말이 피안으로 이어지는 서사적 연결을 중지시킨다. 세계의 끝을 각인하고 피안을 삭제하는 라깡의 연산식은 대타자의 결여를 표시하는 S(A/)이다.
지젝의 작업은 근본적으로 이 연산식에 내기를 걸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일 라깡의 프로이트로의 복귀가 소쉬르를 매개로 프로이트조차 충분히 인식할 수 없었던 프로이트를 정제하는 작업이었다면, 지젝은 헤겔을 매개로 라깡으로의 복귀를 수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젝에게 라깡으로의 복귀가 그렇게 절실한 이유는 무엇보다 S(A/)라는 연산식 때문이다. 이 연산식은 그에게 이미 죽었으나 자신이 죽은 지 모른 채 날뛰는 강시들에게 그들 자신의 죽음을 각인시키는 부적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지젝의 모든 작업들을 “너는 죽었다!”는 선언으로 읽을 수 있다. 그가 총체성의 철학자 헤겔을 비전체적 총체성의 철학자로 재규정하는 이유는 그에게 실질적으로 냉소주의에 불과한 반헤겔주의적 포스트 담론들에게 이 선언을 던지기 위함이다. 기독교 유산을 옹호하는 투쟁은 이미 근대와 함께 죽은 뉴에이지 영성주의에 던지는 죽음 선언이다. 정치신학은 자유민주주의에게, 공산주의의 복원은 자본주의에게 던지는 이 선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종말론적 영도(apocalyptic zero point, Žižek 2010; xi)라는 개념은 그의 작업 전체를 표시하는 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신학성서 요한계시록의 표상을 가져온 이 개념이 기독교 신학적으로도 유효한가를 바울의 종말론을 통해서 검토한 후, 이를 다시 라깡의 S(A/)라는 연산식과 비교하는 작업을 할 것이다. 이 비교 작업이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면 우리는 라깡 정신분석학을 신학적 방식으로 이해하는 접근로를 여는 동시에, 오늘날 그 진정한 유산과 통하는 길을 상실한 기독교가 기독교로 남기 위해서 어떤 방향을 잡아야 하는지도 어렴풋이나마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II. 바울의 종말론
1. 종말론과 묵시사상
신학은 종말론(eschatology)과 묵시사상(apocalypticism)을 일정하게 구별한다. 종말론이 세계의 목적과 끝에 혹은 결정적인 전환에 관한 담론 일반을 지칭한다면, 묵시사상은 헬레니즘-로마 시대의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에서 나타난 일종의 종교적 성향을 가리킨다(E. Stegemann & W. Stegemann 1995/2008; 238). 묵시 사상은 종말론의 가장 극단적인 경향으로서 종말론 일반이 역사 안에서의 희망에 대한 기대를 간직하고 있는 반면, 묵시사상은 주어진 세계에 대한 완전한 환멸과 무기력을 보여준다. 묵시 종말론이 급박하게 닥치는 파국, 세계의 완전한 타락과 악의 승리, 우주적인 전쟁, 죽은 자들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 등의 표상들을 활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대 파국과 그리스도의 재림과 같은 신적 존재의 개입이 요청되는 것은 묵시사상가들이 더 이상 역사, 즉 권력의 승리와 함께 폐쇄되는 주어진 세계의 담론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약성서의 다니엘서, 신약성서의 요한계시록은 대표적인 묵시문학이다.
오늘날 영어의 apocalypse는 일반적으로 종말을 의미하지만, 그 어원인 헬라어 άποκαλυψις는 “드러남”, 즉 “계시”를 의미한다. 이 때 드러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계시는 항상 계시 사건이다. 유대교에서는 하느님이 전적 타자로서 낯설게 드러난다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느님의 자기계시라고 주장한다. 하느님의 말씀이 예수라는 한 특정한 인간을 통해서 주어졌다는 주장 역시 상식적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계시는 기존의 상징체계 안에서는 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계시는 비밀이며, 따라서 바울에 따르면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이”다(고전 1:23). 하느님의 말씀이 기존의 상징계에서 의미를 획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시 사건은 그 자체로 종말사건이다. 즉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행위 자체가 자신의 말씀이 의미를 획득하지 못하는 상징계의 폐지를 의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시는 언제나 종말의 계시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τἁ ὄντα, 존재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τἁ μή ὄντα,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택하셨습니다(고전1:28 강조는 글쓴 이).”
άποκαλυψις를 “묵시”(黙示)로 번역할 때는 바로 이러한 비밀성을 강조한다. 이 계시의 의미는 주어진 세계의 사회 상징적 체계 속에서는 철저하게 폐쇄된다. 묵시사상은 말 그대로 반체제적 사상이다. 묵시사상은 역사 안에서 구원이 가시화될 것이라는 믿음의 붕괴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묵시는 그 의미나 방향성이 직접적인 성서 전승에서 나오지 않고 신적인 비밀계시를 거쳐서 나온다(E. Stegemann & W. Stegemann; 239)는 점에서 전통과도 확연히 갈라선다. 묵시는 세계의 외부에서 온다. 이 외부는 내세에 관한 신화적인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급진적인 저항으로 표출된다.
2. 바울의 정치적 종말론
알랭 바디우는 바울에게서 “20세기 초 레닌과 볼셰비키들에 의해 확립된 (당적) 투사의 모습을 뒤이을 새로운 투사의 모습을 찾으려”(1997/2008; 13) 하였다. 이 새로운 투사는 “추상적 보편성”에 저항하는 “구체적 보편성”에 입각하여 자신의 싸움을 전개한다. 이 싸움에서 종말론은 어떤 것이었을까?
여기에서 바울의 시대에 최전성기에 이른 로마제국의 범역적 이데올로기였던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는 구호를 하나의 종말론으로 이해하는 것이 결정적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구원자로서 세계 평화를 가져온 신으로서 숭배되었다. 그가 제정한 로마법은 전 세계에 공정한 질서를 가져온 복음으로 여겨졌다. 프리네(Priene)라는 도시의 한 비문은 아우구스투스의 생일인 9월 23일을 새해의 시작이자 도시 관리들의 임명일로 제정한다고 기록하고 있다(D. Georgi 1997/2000; 92). 그의 탄생과 함께 영원한 우주적 질서가 시작된다는 신앙고백이었다. 프리네는 결코 특수한 경우가 아니다. 중요한 헬레니즘-로마 도시들에는 어김없이 로마황제를 위한 신전과 흉상이 세워졌다. 당시의 시인 호라스는 아우구스투스가 가져온 시대가 로마 제국의 황금시대라고 노래하였다. 그의 시는 로마제국 전체에서 제국의 이데올로기로서 활용되었다. 이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적 종말론에서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라는 종말론적 관념을 연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로마의 이데올로기적 종말론은 신화에 의존할 필요가 거의 없었다. 그것은 세련된 종말론이었다. 무력을 바탕으로 평화를 세우고 제국의 전 지역에 보편적인 법적질서를 구성함으로써 가시적인 평화와 번영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추상적 보편성 속에서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재화는 중심에서 주변으로 빠르게 이동하였다. 주변의 삶은 절망적으로 피폐해졌다. 로마는 끊임없는 반란으로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었다.
바울의 종말론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구상되었다. 우리는 그 가장 구체적인 예를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볼 수 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말로 서로 위로하십시오(살전 4:16~18).
바울은 재림, 곧 파루시아(parousia)의 상황을 설명한다. 이 파루시아라는 용어는 기독교 이전의 종말론적 문헌에서는 사용된 흔적이 없다(Helmut Koester 1997/2007; 241). 이 용어를 예수의 재림을 가리키기 위해 기독교에 도입한 이를 바울이라고 추정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다. 이 용어는 원래 로마의 정치 행정 용어로서 로마황제나 왕들이 제국에 의해 점령된 지역이나 식민지에 도착한다는 의미였다. 황제가 도착할 도시는 공식적인 만찬이나 행사를 열어 예우를 갖춰야 했다. 로마의 행정문서에서 이 황제를 맞는 공식행사는 영접(apantesis)으로 지칭되었다. 이 역시 바울이 기독교적인 의미로 전유하였다. 이로써 바울에게 기독교인들이란 로마에 의해 살해당한 자를 황제로 섬기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예수의 재림은 황제가 도시에 도착하는 것처럼 일어날 것이다. 황제가 도시에 도착하기에 앞서 전령과 취악대가 도시에 입장하며 이를 도시 전체에 알리는 것처럼 예수의 재림 때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날 것이다. 이 시대 공동묘지들은 대부분 도시로 진입하는 주요 도로 옆에 한 줄로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Koester 245).
여기서 바울의 관심사는 종말의 시간표가 아니다. 바울의 관심사는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을 것”인가이다. 역설적으로 바울의 이러한 관심사는 그의 종말론을 신화에서 정치적 담화로 뒤집어 놓는다.
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말할 그 때에, 아기를 밴 여인에게 해산의 진통이 오는 것과 같이, 갑자기 멸망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니,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5:2~3).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평안하다 안전하다”는 인용구이다.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말할 때는 오히려 위기가 무르익었음을 보여주는 징조이다. 이것은 로마제국의 공식 이데올로기인 평화와 안전(Pax et securitus)과 그 선전 문구로서 일종의 태평가라 할 수 있는 “평안하다 안전하다”(eirēnē kai asphalesia)는 구호였다. 예수의 재림은 현재 구가되는 로마의 평화를 끝장내며 도래할 것이다. 로마의 이데올로기에 희희낙락하는 하는 자들, 로마의 폭력에 기대어 평화와 안전을 노래하는 자들은 망할 것이다. 그들은 어둠 속에 거하는 자들이다(5:4). 이 간략한 고찰을 통해서도 바울의 복음이 얼마나 당대의 이데올로기와 철저하게 맞서고 있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종말은 과연 급작스럽기는 하지만 그 시기를 확정할 수 없는 미래의 일로서 지연되고 있는가? 그리하여 거짓 평화의 붕괴는 단지 그 평화에 참여하지 못하는 원한을 품은 이들의 현실 도피적 위안에 불과한 것인가? 바울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전복인가 아니면 새로운 차원의 세계인가?
그러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 날이 여러분에게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요,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4~5).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므로,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을 가슴막이로 하고, 구원의 소망을 투구로 씁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노하심에 이르도록 정하여 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도록 정하여 놓으셨습니다(9~10).
주의 재림이 어둠, 즉 급작스러운 대 파국으로 다가올 멸망할 자들과 달리 “우리”는 구원이 확정된 사람들로서 낮에 속한 사람들이다. “빛의 자녀” 혹은 “빛의 아들들”은 쿰란문서에서 발견되는 용어로서 “사탄의 왕국으로 상징되는 벨리알(Belial)의 왕국에 대항하여 하느님의 편에서 싸우는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들을 의미한다(Koester; 248).” 바울에게 빛의 자녀들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 속에 있는 자들이다. 바울은 앞서 1장 3절에서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의 인내”라고 썼다. 그들은 믿음에 근거하여 빛이 완연한 세계의 삶을 산다. 이 빛의 세계는 하느님의 완전한 승리로 전개될 세계이다. 그들은 권력으로 사람들을 부리지 않고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웃을 위하여 기꺼이 수고한다. 어둠이 스스로를 빛이요 평화와 안전이라고 호도하는 세계에서 이러한 공동 수련을 견지하게 해주는 힘은 그리스도께 둔 소망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구원으로 정해진 삶을 산다. 삶의 구원을 결정하는 신적인 행위가 그들 자신의 삶의 실천을 통해 수행된다. 여기에 기독교 신학의 자유의 의미가 있다. 또한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종말의 미래는 이미 도래해 있다. 신학자들은 이를 “실현된 종말론”이라고 부른다. 구원의 미래는 신자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삶 속에서 역동적으로 현존한다. 하느님의 결정은 이러한 삶을 선택한 자들의 실천 속에서 확고하게 드러난다. 세계는 이들의 현존 속에서 이미 중지되어 있다. 이들은 다른 세계를 열어 놓고 거기에 거주한다.
바울의 공동체는 상징적으로 죽은 삶을 산다. 지젝은 “사랑의 수고”(사랑의 노동)가 “우리가 태어난 특수한 질서체계와 우리를 강제적으로 동일시하게 만드는 타성에서 되풀이해서 벗어나도록 하는 힘겹고 고된 반복노동”이라고 주장한다(Žižek 2000; 128~9). 이러한 분리(uncoupling)는 필연적으로 일종의 대안 공동체를 창조한다. 이 공동체는 과거와 대립하여 존재하지 않고 미래를 모색하며 존재한다. 이 모색하는 실천 속에서 지금이 그 때가 된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세계의 삶을 수련하는 과정에서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지금 여기에 실현하는 공동체이다.
이제 우리는 두 개의 종말론을 갖게 되었다. 그 하나가 팍스 로마나라는 구호 속에서 승자를 정점으로 위계화 된 세계가 영원히 지속되는 신화적 종말론이라면, 다른 하나는 이 폐쇄된 세계의 시계탑을 파괴하여 선형적으로 흐르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중지시키는 종말론이다. 이 정치적 종말론은 시간의 선형적 흐름을 파괴하고 세계의 잠재성을 작동시킨다. 그리하여 도처에서 새로운 시간이 발생한다. 우리는 바울의 파루시아에서 그것을 보았다.
III. 사랑의 문자 S(A/)
1. 옛날 옛적에
오이디푸스 과정 이전의 유아가 오랜 혼돈 상태를 중지시키고 말하는 존재가 되기 위하여 욕망의 변증법에 진입하는 신화적 순간은 언제인가? 그것은 원초적 좌절의 순간, 즉 어머니의 부재가 현존과 대비되는 하나의 쌍이라는 사실을 지각하는 순간이다. 그것은 외상적 사건이다. 놀랍게도 그 이전의 무한한 현존은 지각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현존은 오직 부재를 통해서만 지각되며 이 순간부터 어머니는 전능한 어머니로서 요구의 대상이 된다. 아이의 필요의 실재적 대상은 오로지 아이가 대상의 결여와 직면한 이후에야, 대상이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에야 그 자체로서 지각될 수 있다. 주체-대상 관계는 분명 결여의 생산성에 기반하고 있다(Lorenzo Chiesa 2007/2012; 141). 우리는 이 “결여의 생산성”을 단순한 산출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로부터의 창조이다. 이 생산성은 창조성이며 존재를 발생시키는 창시성이다. 라깡은 세미나XX에서 ‘만일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이라는 가정의 질문에 답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영혼은 하나의 존재, 즉 말하는 존재가 그것을 그것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허용하는 것, 이 세계에서 견딜 수 없는 것, 즉 영혼이 세계에 대해 낯선 것, 다시 말해서 환영적인 것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을 제외하고는 말해질 수 없다. 영혼이 여기, 이 세계나 저 세계에 있다고 간주하는 것은 오로지 그것에 직면하는 인내와 용기 덕분이다. 그것은 우리 시대까지는 영혼이 결코 다른 어떤 의미도 갖지 않았다는 사실로 확증된다(세미나XX 1975/1999; 84).
그렇다면 영혼은 최초의 외상적 사건, 말하는 존재가 되는 과정으로 뛰어드는 순간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결여와 대면하여 무로부터의 창조로 진입하는 신화적 결정의 사건이다.
그렇다면 이 숨 막히는 오이디푸스 과정은 어느 순간에 끝나는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를 표시하는 지점은 아이가 아버지의 법, 즉 근친상간 금지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동일성을 상징적 존재로서 인정하는 거세의 순간이다. 거세는 상징계의 안정화 하는 기능 속에서 주체가 자신을 욕망의 존재로 규정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정신분석학이 모든 인간은 거세되어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 결코 욕망 대상의 획득을 원하지 않고 대상의 결여 속에서 자신의 정체를 유지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로서 로마의 평화 속에 있다. 따라서 거세는 결코 자신의 정체를 상징적으로 인식하는 주체에게 결여가 아니라 오히려 평화의 조건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소외된 존재로서 빗금 그어진 주체로서 주체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는 역설적으로 원초적 좌절의 결단하는 힘이 상징적 팔루스(Φ)에 포섭되어 교착상태에 빠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대개 이러한 교착상태에서 결정된다. 그것은 팔루스 기표를 중심으로 세계가 결정된 닫힌 공간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언어가 도입하는 소외는 이중적으로 읽혀야 한다. 소외라는 부정성은 창조라는 가능성의 조건이 된다. 좀 더 모험적으로 사물이 살해되고 존재가 창시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욕망의 진리가 아니라 증상의 진리에 관심하는 실천이다. 증상은 상징계의 평화에 균열이 일어나는 징조이다. 상징계의 평화는 그 탁월한 구조적 완전성, 합당한 법질서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방어하고 욕망을 떠받치는 환상의 효과이다. 따라서 이 징조는 정신분석학에서 예외적인 이상신호가 아니다. 오히려 증상은 상징적인 삶 그 자체가 구조적으로 탈구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정신분석이 윤리와 관계되는 이유는 이 무질서를 용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의 윤리로서 Wo es war, soll ich werden이라는 정언명령을 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부여된 윤리적 의무이며 수고를 요청하는 것이다. “그것이 있었던 곳”은 실재의 장소로서 낯선 곳이 도래하는 통로이다. 정신분석의 윤리는 실재의 윤리이다.
2. Φ와 S(A/)
1973년 3월 13일의 세미나에서 라깡은 성구분 표를 칠판에 그리고 난 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분석적 담화에 근거해서 말하고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을 추구하는 한에서 내 가르침의 목표는 a는 상상계와 관계있는 것으로, 그리고 A는 상징계와 관계있는 것으로 환원하여 a와 A를 분리하는 것이다. 상징계는 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의 근거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상상계는 확실히 동료 인간을 다른 사람 안에 반영하는 것에 근거한다. 그러면서도 a는 도표에서 그 밑에 적힌 S(A/)와 혼동되도록 그 자신을 빌려주었다. a는 존재의 기능을 수단으로 그렇게 하였다. 여기에서 분리 혹은 이탈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신분석은 심리학과 다른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심리학은 이러한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83).
라깡은 단순히 상상계와 상징계의 분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도 그것을 한다. 정신분석을 심리학과 분리시키는 지점은 S(A/)이다. 여기는 “그것이 있었던 곳”이자 실재의 통로이다. 대상 소문자 a는 이중적 기능을 한다. 그것은 소급적으로 신화적인 Φ를 출현시켜 주체를 팔루스적으로 구성하여 상징적 세계 이편에 묶어둔다. a가 하는 일은 주체의 환상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거세의 기표로서 Φ는 “욕망의 법이라는 뒤집힌 저울 위에서 향유를 얻기 위해서는 그것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Lacan 1966/2006; 700)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에 개입하는 것은 환상이다. 반면 a는 S(A/)에게 자신의 힘을 빌려준다. 욕망의 대상 원인 a는 실재의 찌꺼기, 잔여, 조각으로서 “존재의 기능”을 수단으로 자신을 S(A/)와 혼동되도록 자신을 여성 편에 빌려준다. a가 S(A/)에게 빌려주는 힘이란 어떤 것일까? a가 주체의 환상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기능을 한다고 볼 때, 그것은 아마도 S(A/)의 심연에서 사랑이 솟아나게 하는 힘일 것이다. 사랑은 비관계로서의 성관계가 아니라 존재의 만남을 요구하며 주체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S(A/)는 하나의 심연을 표시하는데, 그것은 이 대타자의 결여의 기표가 환상 없이 작동하는 부분충동의 운동을 통해 만나는 세계의 무질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분석의 끝이라는 임상의 관점에서는 환상을 가로지른 지점에서 만나는 대타자의 결여이며, 따라서 그것은 일관된 대타자를 통해서 구성되는 주체의 파국, 주체의 궁핍이 드러나는 장소이다. 향유는 이분화 된다. 먼저 팔루스적 향유가 있다. “팔루스적 향유는 팔루스 기표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언어에 의해 결정되는 성적 향유이다.... 그것은 성기관 혹은 육체적 형태에 대한 팔루스화한 이미지라는 가느다란 실을 통해서만 육체에 다시 부착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육체 전체와 관련되지 않고 단지 생식기의 등가물로서 기능하는 육체의 몇몇 부분들과 관련된다(Serge André 1995/2009; 348~9)”. 라깡의 설명은 냉소적이다. “나는 Φ를, 내가 그것이 기의 없는 기표, 남성의 경우에 팔루스적 주이상스에 근거하는 것을 지시하는 한에서, 팔루스로 지시한다. Φ는 다음의 사실, 즉 우리의 실천에서 자위의 불능성이 충분히 밝혀주는 것, 바로 백치의 향유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세미나 XX; 81)
다음에 대타자의 향유, 혹은 존재의 향유, 다른 향유가 있다.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성관계 안에, 무의식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것과의 관계 속에 대타자가 있다면, 여성은 그런 대타자와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성은 그러한 대타자의 기표와 관계 맺고 있다. 그것이 대타자의 자격으로 영원한 대타자로 남을 수 있을 따름인 한에서 말이다. 나는 여기서 오로지 여러분들이 타자의 타자는 없다는 나의 언급을 기억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대타자, 즉 기표에 근거하여 절합될 수 있는 모든 것이 기입되는 장소인 대타자는 그 토대 안에서, 가장 근본적인 의미 속에서 대타자이다. 그것이 기표가 이러한 열린 괄호와 함께 대타자를 빗금 친 것으로서 표시하는 이유이다: S(A/).
우리는 대타자가 어떤 의미에서 모든 말하는 존재의 절반이 관계된다는 사실일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빗금 친 대문자 여성에서 시작하는 화살표와 함께 칠판에 적힌 것이다. 빗금 친 대문자 여성은 말해질 수 없다. 여성에 관해서 아무 것도 말해질 수 없다. 대문자 여성은 S(A/)와 관계가 있다. 따라서 그것은 이미 여성은 이중화된다는 사실, 여성은 비전체라는 사실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또한 Φ와도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세미나 XX; 81).
대타자의 향유는 말할 수 없지만 가정되는 향유이다. 하지만 분명 라깡은 이를 팔루스적 향유와 대립시킨다. 팔루스적 향유는 자위의 불능성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팔루스적 향유 속에 성관계는 없다. 그러나 정신분석의 견지에서 이 불가능한 성관계는 거세된 존재, 즉 팔루스적 주체에게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들에게 그들이 경험하는 흩어진 향유, 향유의 찌꺼기는 완전한 향유, 균열 없는 성관계가 존재한다는 단서가 된다. 이 팔루스적 향유의 백치성이 드러나는 것은 다른 향유, 즉 대타자의 향유 때문이다. 이 존재의 향유와의 대립 속에서 팔루스적 향유의 허무가 드러난다. 그것은 상징계에 포섭된 팔루스적 주체에게 종말을 알린다. 그러므로 존재의 향유는 팔루스적 향유의 결여, 그것의 허무로부터 창시된다. 왜냐하면 실재의 철학자 라깡에게 존재는 시원적인 질료가 아니기 때문이다. 라깡에 따르면 존재는 언어에 의해 사후적으로 도입된다. 따라서 존재는 물 자체가 아니라 유사존재(par-être), 옆의 존재(l'être para)이다(세미나XX; 44). 아킬레스의 대상인 거북이를 연상시키는 이 ‘옆의 존재’는 라깡의 존재론 그 자체를 보여주는 개념이다. 마치 물질이 있어서 공간이 휘는 것이 아니라 물질 자체가 공간이 휜 효과라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처럼, 세계가 존재한 후에 결여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결여를 통해 세계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존재의 틈새, 비-자기 일치, 존재 질서의 존재론적 비폐쇄성이다(Žižek 2006/2009; 337). 그러므로 성관계의 비존재는 존재론적 진리이며, 비전체로서의 주체인 여성은 라깡의 존재론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한다.
Φ와 관계하는 전체로서의 여성이 S(A/)와도 관계하기 때문에 분열된다면,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실로 인해서 비전체로서의 여성이 사랑과 특권적인 관계에 놓이게 된다면, 여성성은 바울의 종말론적 공동체의 성격을 표상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법 너머의 위치를 요구하는 사랑의 도착성 때문이다. 다음의 두 인용구는 이러한 사랑의 도착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오 로미오, 로미오, 당신은 왜 로미오인가요?
당신의 아버지를 부인하고 당신의 이름을 포기하세요.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복음 14:26)
사랑은 도착증과 유사하게 거세의 법에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바울의 종말론적 공동체가 필연적으로 사랑의 공동체인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랑이 아버지의 법의 폐지를 주장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주체는 잠재적이 아니라면 현실적으로 상징적 죽음을 맞는다.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은 라깡이 “두 개의 죽음 사이”라고 명명하는 경계선을 넘는다(André; 421). 기독교의 “거듭 남”1)이라는 개념 역시 마찬가지이다. 두 번째로 살아야 한다는 말은 첫 번째 삶에 대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이 그렇듯이 기독교 신앙에서도 사랑이 결정적인 매개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최종적인 목표는 아니다. 정신분석에서 사랑은 “그것이 있던 곳에서 주체가 생성되는” 과정, 특별히 분석가와 분석 주체의 전이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바울의 종말론적 공동체에서 사랑은 공통적인 삶을 향한 지난한 모색을 추동하는 동력이다. 따라서 결말은 비극적이지 않다.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진행되는 “다른” 삶은 그것이 폐지한 로마의 평화에 비해 훨씬 더 넉넉하다. 아감벤은 바울의 수사 “~이 아닌 것처럼”을 주석하면서 종말론적 공동체에 자유의 영역이 훨씬 더 확장된다고 주장한다.
바울에게는 ‘~이 아닌 것처럼’이야말로 메시아적 소명을 정의하는 것이다. 그는 모든 존재와 언어를 자기 자신과의 긴장 속에 위치시킨다. 메시아적 사건 ― 그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이미 부활과 더불어 산출되고 있다 ―은 비유 속에서 비유로서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때', 모든 현세적 상태의 기각으로서 현재하고 있다. 그리고 현세적 상태의 기각은 현세적 상태를 그 자체로부터 해방시켜 그것의 사용을 허용하는 것이다(G, Agamben 2000/2008; 78~79, 번역 일부 수정)
IV 글을 맺으며
현세적 상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궁극적으로는 그것의 파국을 주장하는 것이 반드시 “실재의 열정”은 아니다. 소박하게 말해서 그것은 더 나은 삶을 향한 모색의 최종적인 결론이다. 그것은 욕망의 역설 때문이다. 욕망은 욕망의 욕망이기 때문에 대상 앞에서 불안에 떤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퇴출되거나 운이 좋아 (어느 쪽이 운이 좋은 것일까?) 퇴직할 때까지도 내일 당장 직장을 때려치우겠다는 생각을 갖는다고 한다. 판을 갈지 않으면 다른 가능성은 전개되지 않는다. 종말의 희망은 전환에 대한 희망이다.
하지만 종말론은 오늘날 기독교 신학에서 강력한 회의의 대상이다. 특히 자유주의 신학에서 그렇다. 예를 들어 “예수 세미나”는 1985년에 창립되어 전 세계적으로 200명이 넘는 신학자들이 주로 ‘역사적 예수’ 연구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방대한 신학프로젝트이다. 이들은 역사상 실제로 존재한 예수에 근거하여 기독교를 재창립하려는 목표를 가진다. 아니 기독교의 재창립이 아니겠다. 그들은 ‘예수'는 인정해도 ’그리스도‘는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집단 연구는 속속 그 결과를 내놓고 있다. 이 세미나의 설립자인 로버트 펑크는 이 연구성과를 소개하는 자신의 책에서 “새로운 시대를 위한 예수”(R. Funk 1996/1999; 450~479)를 제안한다. 마치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앞에 걸었다는 반박문을 연상시키는 이 제안은 모두 21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기독교로부터 묵시종말적 요소를 추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묵시사상이 현세를 부정하며 복수심에 근거한 사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 제안의 말머리에서 “‘새로운 시대’는.... 무엇보다도 먼저 기독교화된 시대의 종말을 가리킨다”고 진술하고 있다. ‘종말’이라는 개념이 아니고는 그가 그토록 열망하는 기독교의 대전환을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예상대로 이들의 역사적 연구가 생산하는 예수상은 학자들마다 개인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2000년 전 팔레스타인의 한 남자의 모습을 구체화하기 보다는 북미의 중산층 백인 남성 지식인의 이상적 자아를 세필화로 묘사한 것에 가깝다.
바울의 종말론은 물론 ‘너머’ 혹은 ‘저편’의 삶을 꿈꾼다. 그러나 이 ‘너머’는 ‘이편’과 단절된 신화적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편’을 비전체로 만드는 ‘이편’의 삶이다. 잠시 바울의 종말론을 가늠해 볼 수 있는 ‘허구’를 검토한다면 웃으며 글을 마칠 수 있겠다. KBS2에서 방송되는 코미디 프로 <개그콘서트>에는 “나쁜 남자”라는 제목의 고정 단막극이 있다. 한 피의자를 형사들이 심문한다. 형사들은 이 피의자를 범인으로 호명하는 내러티브 안에 위치시키려한다. 피의자의 전략은 그를 “옆의 존재”로 설정하여 형사들의 상징적 네트워크를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 방법은 형사들이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를 재규정하거나 형사들의 상징적 네트워크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를 진술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범인으로 호명하는 상징계를 비전체로 만든다. 그 효과는 피의자가 혐의를 벗는 데 그치지 않는다. 형사들은 ‘나쁜 사람’이 피의자가 아니라 자신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먼저 전복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 전복이 끝이 아니다. 이 단막극이 끝날 때는 형사들이 한 목소리로 “풀어주자!”라고 외친다. 그것은 대타자의 결여를 선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S(A/)는 절망적이며 비극적인 심연이라기보다는 허무의 자유에 가깝다.
이 글은 “라깡 정신분석학적 종말론은 가능한가?”를 물으면서 시작하였다. 그것은 종말론적으로 사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글을 마친다.
참고문헌
J. Lacan(1966/2006), Écrits, trans. by Bruce Fink, New York: Norton.
(1975/1998), Encore: On Femine Sexuality, The Limits of Love and Knowledge, 1972-1973, trans. by Bruce Fink, New York: Norton.
S. Žižek (2000), The Fragile Absolute: or, why is the christian lagacy worth fighting for?, New York: Verso.
(2006/2009), 『시차적 관점』, 김서영 옮김, 서울: 마티.
(2011), Living in the End Times, New York: Verso.
Serge André (1995/2009), 『여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히스테리, 여자동성애, 여성성』, 홍준기, 박선영, 조성란 옮김, 서울: 아난케.
Lorenzo Chiesa (2007/2012), 『주체성과 타자성: 철학적으로 읽은 자크 라캉』, 이성민 옮김, 서울: 난장.
G, Agamben (2000/2008), 『남겨진 시간: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관한 강의』, 강승훈 옮김, 서울: 코나투스
E. Stegemann & W. Stegemann (1995/2008),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 손성현 김 판임 옮김, 서울: 동연.
R. Funk (1996/1999), 『예수에게 솔직히』, 김준우 옮김,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Dieter Georgi(1997/2000), 「하나님은 높은 자들을 낮은 데로 끌어내리셨다」, 김재성 엮 음, 『바울 새로 보기』,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Helmut Koester(1997/2007), 「데살로니가전서에서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와 바울의 종말론」, 『바울과 로마 제국: 로마 제국주의 사회의 종교와 권력』, 홍성철 옮김, 서울, CLC.
첫댓글 이번 라캉 세미나 발표 논문이시죠? 잘 읽겠습니다~
읽고 또 읽어도 쉽게 이해되진 않지만, 생각할 꺼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칠부분요~ 희희낙락하는 자 ㅎㅎ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