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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여름평화여행 스크랩 고구려 천리장성[千里長城]
뜻을 맑게...^^ 추천 0 조회 43 07.06.29 11:4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고구려 천리장성[千里長城] 


흔히 우리는 천리장성을 이야기 하면 고려시대 거란족과 여진족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고려의 천리장성(1033년 <덕종2년>~1044년 <정종10년> 11년간 축성한 고려의 성)을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근 10년간 꾸준히 진행되어온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고자 우리나라에서도 한국 고대사 특히 고구려사와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또한 국영방송 민영방송 가릴 것 없이 고구려를 주제-소재로 하는 드라마,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이 방영되고 있고 광개토대왕을 소재로 하는 다수의 고구려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들이 선보일 예정이다. 중국 당국은 한국의 이러한 움직임이 정부 주도하에 주도면밀하게 진행되고 있지 않나 의심하고 있다.


특히 ‘주몽’을 제외한 ‘연개소문’ ‘대조영’의 본 무대가 1300여년 전의 고구려 멸망시기인 수-당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수-당 전쟁의 배경이자 전투신의 핵심인 고구려의 천리장성이 시청자들 뇌리에 각인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1300년 전의 고구려의 숨결을 찾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이, 고구려의 성들과 영류왕때 만들어진 고구려의 천리장성이다.  나는 1300년 전의 시간여행, 고구려의 천리장성을 찾아 나선다.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신성을 중심으로서쪽의 경계를 방어하기 위하여 장성을 쌓았다. 북쪽으로는 만주 중부지역인 부여성 농안(지금의 눙안農安)에서 시작하여 남쪽 끝은 발해만에 있는 대련의 비사성(지금의 다롄 大連)에 이르는 천리가 되는 장성이다. 고구려의 성들은 지역적 특색에 따라 토성과 석성을 지었다. 고구려 천리장성을 쌓기 전에는 농안에 있는 부여성과 무순의 신성까지 천리장성의 주 토대가 되었다 중국 고서에서도 신성을 고구려장성의 서쪽 끝자락에 있는 산성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수-당 전쟁이후 고구려의 주 침입 길목이 신성 서쪽인 요평지대를 중심으로 고구려에 도전해 왔기 때문에 영류왕은 기존에 건설되어 있던 요동성, 안시성, 백암성. 개모성. 비사성을 주축성으로 신성과 연결되는 천리장성을 만들었다.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만리장성처럼 성벽(장벽)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요동 벌판 주요거점지역에 핵심적인 거점 성을 쌓고 배후에 지원성들을 배치하였다. 곳곳에 세워진 성들은 독자적으로 운영되었으며 상호보완적이며 유기적으로 네트워크망을 형성하였다.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고건무는 이복형 영양왕이 죽자 영류왕으로 즉위한다. 당시 중국의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4차례에 걸친 고-수 전쟁의 여파로 국민들에 대한 압정과 불만이 중국 각지에서 많은 봉기를 일으키게 되었고 수양제는 자신의 측근에 의해서 제거되고 만다. 이후 수양제의 친척이었던  당고조 이연과 그의 아들 당태종 이세민에 의해 당나라가 새롭게 출연한다. 영류왕은 당나라와 화친을 바탕으로 저자세 외교를 택했다. 고-수전쟁이 고구려에 끼친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대량으로 발생한 전사자나 포로 등의 인적 피해는 둘째로 치더라도 전후 고구려는 적의 군량을 차단하기 위해 봉토한 농지를 개활 하는 등 복구에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류양은 후대에 나약하고 비겁한 왕이라고 낙인 찍혔지만 수나라가 두려워했던 장수 고건무였고.  전쟁의 와중에 피폐해 지는 국토와 궁핍한 민중들의 모습을 보면서 왕으로써 전쟁에 대한 회의론을 가졌을 지도 모른다.


고-당 양국 간에 태평성대를 유지했지만 당태종 이세민의 쿠데타에 의해 당고조 이연이 물러나고 당태종이 즉위한 626년 이후로 고-당은 피할 수 없는 전쟁의 길로 들어선다. 고-당 관계는 이세민의 계략대로 양국의 관계는 대치국면으로 치닫는다. 631년(영류왕14년) 당나라 사신 장손사가 와서 고구려가 지난 날 수나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경관을 헐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는 곧 고구려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그러나 앞서 양국의 국내문제 치유와 주변정세를 다듬질 할 필요성이 컸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양국은 전쟁준비에 들어간다. 영류왕은 당나라의 침략을 예상하고 이 해부터 장성을 쌓기 시작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연개소문의 주청으로 천리장성이 축조되었다고 했으나, 〈삼국사기〉에는 영류왕의 명으로 연개소문이 642년 1월 공사를 감독했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16년간 천리장성의 노역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남자는 모두 성 쌓기에 동원되고 여자가 밭을 갈 수 밖에 없엇다.”


영류왕 화친파와 연개소문 주전파는 고-당 관계를 중심으로 내부적으로 대립하였다. 군부의 막강한 세력을 지닌 연개소문에 대한 두려움으로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했지만. 먼저 연개소문이 영류왕이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642년 10월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으로 들어가 영류왕 이하 자신의 반대파를 대량 학살하고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정권을 잡는다. 고구려 침략의 대의명분을 쌓던 당태종 이세민은 영류왕 시해사건을 계기로 고구려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다. 이로써 고-당 양국은 피할 수 없는 전쟁국면으로 치닫는다. 연개소문의 카리스마와 독정은 앞으로 예고된 고-당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지만 연개소문의 사후 잠재되었던  연개소문에 대한 반정과 자식들의 분란으로 고구려는 멸망한다. 연개소문의 독선적인 국가운영은 국제정세를 읽는데도 나타나는데  한강 이남의 백제-신라와의 등거리 삼각외교를 파기함으로써 삼국의 균형은 깨진다. 백제의 신라에 대한 압력을 저지해 달라는 김춘추 말을 일거에 거절한 연개소문, 풍전등화에 몰린 신라는 당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게 된다. 자만에 빠졌던 백제는 순식간에 무의미하게 망했고 고구려 배후에는 당나라 보다 더한 독기를 품은 신라를 적으로 두게 된다.

영류왕이 살아 있었다면, 고구려가 당의 속국이 되었을까, 아니면 1차 고-당 전쟁에서 망했을까? 조공을 받힐지언정 전쟁을 회피하고자 했던 영류왕, 전쟁이후 황폐한 신민들의 삶을 목도하며 군주로서 괴로워했던 영류왕이다, 고구려말기 영류왕과 연개소문이 함께 공존했다면 고구려는 명분과 실리를 바탕으로 강력한 무장세력을 이룰 수 있었고 당의 압력을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천년왕조를 이끌어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흔적이 고구려의 천리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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