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王室, 異次頓 殉敎 전부터 佛敎를 信奉했다?
天降族
檀君 神話, 朱蒙(鄒牟) 등 卵生 說話, 金首露의 誕生, 경주 6부 先祖들의 설화 등에는 그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百濟 始祖인 溫祚만 예외) 즉 新型 武器로 武裝한 莫强한 軍事力을 바탕으로 周邊을 征服한 勢力은 자신들이 天降族이라고 主張함으로써 被支配種族을 思想的(宗敎的)으로 制壓했다. 따라서 疆土가 크게 擴張되고 여러 피지배종족을 거느리게되는 王權 强化 이후의 임금들은 特定 宗敎를 國敎化함으로써(思想 統一을 이룩함으로써) 一絲不亂한 統治를 圖謀하게 된다.
▲宮女와 姦通을 하면서 왕을 暗殺하려던 僧侶가 發覺되어 處刑되었다는 說話가 전해지는 書出池(史蹟 138호)
國民 各者가 다른 宗敎를 믿으면서 자기 部族의 시조를 天降族(천강족)으로 섬기면 將次 王權과 身分社會에 挑戰하는 勢力이 생겨날 可能性이 높다. 그래서 王位 世襲, 官僚制度와 身分制度 整備, 律令 頒布 이후 三國의 왕들은 國民 思想 統一 作業에 着手한다.
高句麗는 372년(小獸林王 2), 新羅는 527년(法興王 14) 각각 佛敎를 公認(공인)하고, 百濟도 384년(枕流王 1) 불교를 공인한 것으로 推定된다. 現生(현생)에서 어떻게 살았는지가 後生(후생)의 삶을 決定한다는 불교의 업(業) 사상은 뒤집으면 前生의 삶이 現生을 결정했다는 論理였으므로 국민들에게 '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傳播하는 데 適格이었던 것이다.
▲阿道가 신라로 들어와 처음 불교를 전파하여 弟子로 삼은 이는 毛禮였다. 모례네 집의 우물로 전해지는 傳毛禮井이 龜尾市 도개면 도개리 360-4번지에 남아 있다. 文化財資料 296호.
신라에 불교가 전파되어 온 歷史의 現場을 살피려면 구미 도개면 도개리 360-4번지 毛禮井(문화재자료 296호)부터 찾을 일이다. 모례정은 '신라 最初의 불교 信者' 모례가 사용한 우물[井]이라는 뜻이다. 물론 訥祗王(417∼458) 때의 우물이 아직도 고스란히 保存되어 있다는 데 대한 疑問 때문에 모례정에는 '전(傳)모례정'이라는 공식 이름이 따로 정해져 있다. '모례의 우물로 전해진다'는 뜻이다(경남 산청 왕산의 傳仇衡王陵, 경주 보문동 428번지의 傳薛聰墓 등).
모례정 다음으로는 구미 해평면 송곡리 403번지의 桃李寺를 찾아야 한다. 도리사에서 가장 볼 만한 것은 阿道和尙 史蹟碑(경북 유형문화재 291호)와 極樂殿(有形文化財 466호), 그리고 高麗 石塔(寶物 476호)이므로 놓치지 말고 鑑賞해야 한다. 다행히 이 셋은 도리사 境內에서도 한 곳에 몰려 있다. 이 寺刹은 눌지왕 때 고구려 僧侶 아도가 一線郡 모례의 집에서 寄居하면서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파한 후 세운 절로 전한다.
▲桃李寺는 阿道和尙이 처음 세운 절로,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403번지에 있다. 寫眞은 아도화상 史蹟碑로 경상북도 有形文化財 291호이다.
金庾信 집터 隣近인 경주시 사정동 285-6번지도 꼭 찾아봐아야 할 불교 傳來 遺蹟지다. 이곳은 법흥왕이 오랫동안 神聖視되어 오던 숲(天鏡林)의 나무들을 베어내고 사상 最初의 公認寺刹인 興輪寺를 지은 歷史의 현장이다. 물론 법흥왕의 불교 공인 정책에 貴族들이 크게 反撥했다. 王權(왕권)을 神權(신권)으로 끌어올려 귀족들의 權力을 壓倒하려는 불교 공인 政策이 그들의 政治的 利害와 相反되었기 때문이다.
興輪寺 터의 政治的 意味
▲興輪寺
절에는 보통 '八空山 同和寺', '琵瑟山 瑜伽寺' 식으로 앞에 산이름이 붙고, 그 뒤에 사찰명이 붙는다. 이때 산이름은 절의 所在地를 가리킨다. 그런데 흥륜사에는 산 이름이 아니라 숲 이름이 붙어 있다. '天鏡林 興輪寺‘ 이는 흥륜사가 산이 아니라 평지의 숲에 세워졌다는 뜻이다. 公主의 병을 治療해준 아도에게 味鄒王이 所願을 묻자 그는 "천경림에 절을 짓고 싶다"고 對答한다. 물론 이때 아도가 지은 절은 建物이 雄壯한 法堂은 아니고 그저 庴幕 程度였던 듯하다. 사적 15호인 興輪寺는 法興王 때인 527년에 着工되어 眞興王 때인 544년에 完工었다고 三國史記에 記錄되어 있다.
아도가 庴幕 형태의 절을 지을 곳으로 指目하고, 또 법흥왕이 불교 공인 이후 최초의 절터로 정한 곳이 천경림인 데에는 各別(恪別)한 政治的 含意가 있다. 천경림이 신라 대대로 신성시되어 온 곳이었기 때문이다. 즉, 아도와 법흥왕은 천경림에 절을 지음으로써 새로운 사상을 신라사회에 定着시키는 基礎로 삼으려 했다.
지금 흥륜사에 가면 숲은 볼 수 없고, 다만 異次頓 殉敎碑를 본뜬 造形物이 경내 한복판에 우뚝 세워져 있어 異彩롭다. 造形物을 세운 측에서는 틀림없이 이곳이 이차돈 殉敎地라는 사실을 强調하고 싶었을 것이다.
불교 공인을 주장하던 이차돈이 處刑될 때 목에서 흰 피가 솟는 異蹟(이적)이 일어난다. 그러자 貴族들은 反對를 멈춘다. 이차돈의 목은 小金剛山 栢栗寺터로 날아가 떨어졌다. 뒷날 백률사 터에서는 신라 때(817∼818, 憲德王 9∼10년) 作品인 이차돈 순교비가 發見되었다. 이차돈 순교비는 國立慶州博物館에 가야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소금강산의 백률사를 아니 訪問할 수는 없다. 歷史旅行에서는 언제나 現場이 重要하다.
▲栢栗寺 大雄殿 안의 異次頓 肖像, 慶州博物館에 保管되어 있는 이차돈 순교비
▲栢栗寺 入口에서 보게 되는 四面佛像으로 보물 121호이다.
왕을 暗殺하려던 僧侶와 宮女가 處刑되는 492년(炤知王 14)의 書出池(서출지) 事件은 신라 王室이 이차돈 순교(527년) 이전부터 불교를 信奉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렇지 않다면 승려가 宮闕 안에서 '왕의 여자'인 궁녀와 사랑을 속삭일 수는 없다. 지금쯤 서출지에 가면 승려와 궁녀의 悲慘한 말로와는 아무런 相關없이 滿發한 연꽃이 아름다울 것이다.
서출지 隣近의 文化遺産
서출지는 경주시 남산동 973번지에 있다. 서출지 바로옆에 있는 統一殿은 武烈王, 金庾信, 文武王의 碑石, 統一 記錄畵 등 많은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記念館(紀念館)이다. 서출지에서 곧장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남산동 1130번지의 念佛寺 터(史蹟 311호)가 나오고,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傾斜가 얕은 登山路를 오르면 國寶 312호 七佛巖 磨崖佛像群을 볼 수 있다. 이름 그대로 일곱 부처가 四方으로 바위에 새겨져 있다. (따라서 칠불암은 암자 이름이 아니다. 일곱 부처가 새겨진 바위를 뜻한다.) 그런가 하면, 칠불암 뒤편 絶壁 위로 올라가면 보물 199호인 神仙巖 磨崖菩薩像을 보게 된다. 남산에서 가장 멋진 吐含山쪽 展望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물론 신선암도 庵子 이름이 아니라 바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