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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북정맥 제 13 구간 산행기
(한티고개 ~ 무르티 고개)
1. 산행일자 : 2007년 12월 8 일(토 요일)
2. 산 행 지 : 가야산(677.6m) - 충남 예산
3. 날 씨 : 흐림, 눈, 개임
4. 참 석 자 : 강동규, 강영재, 박봉하, 박상호, 안상경, 윤희원, 이용준, 장현옥(8명)
5. 산행계획
[1] 제1일차(12월 8일)
1) 총 산행 거리 및 소요시간 : 총 산행 약 17.9km, 9시간 정도
2) 구간별 거리
한티고개--3.3km--가야산--1.4km--석문봉--0.8km--일락사갈림길--1.0km--일락산--1.0km--개심사갈림길--1.8km--358m--2.3km--상왕산--3.4km--가루고개(647지방도)--1.9km--동암산--1km--무르티고개(32번국도, 서산휴게소)
3) 소요시간
■ 수원(05:00) ∼ 서해안고속 ∼ 서산휴게소(06:20/아침/06:50) ∼ 해미IC ∼ 한티고개(07:40)
■ 한티고개(07:50) → 농장(08:15) → 가야산(09:40) → 석문봉(10:50) → 일락산(11:40) → 개심사삼거리(12:10/점심/12:45) → 상왕산(14:15) → 철탑119(14:30) → 가루고개(15:10) → 모래고개/서해안고속도로(15:40) → 동암산(16:20) → 무르티고개(16:40)
■ 무르티고개(17:00) ∼ 서산(17:30), 저녁 식사 및 숙박
6. 산행의 실제(산악대장 제공)
[1] 일정 및 소요시간 : 총 산행 약 17.9km, 8시간 20분 정도
[2] 구간별 소요시간
① 한티고개(07:36)→411.2봉(07:49)→가야산(08:59)→석문봉(10:20/10:35)→일락산(11:10)→개심사삼거리(11:36/점심/12:35)→상왕산(13:34/13:48)→세멘트사거리(14:26/14:36)→가루고개(14:52)→모래고개/서해안고속도로(15:17)→동암산(15:35)→무르티고개(15:49)
② 무르티고개(15:55/차량회수/17:10)∼저녁식사(17:50/20:30)∼서산 숙박(21:00)
7. 산 행 기
[1] 산 행 전
이번 산행은 당초 12월 2일로 계획이 되 있었는데 당일 몇 회원이 산행에 참여할 수 없어(경기도 교사 임용 고사 감독) 한 주 뒤로 미루게 되었는데 산악대장이 빨리 금북정맥 산행을 마무리 짖고 싶었던지 1박 2일로 산행 계획을 올려놓았다.
하루 산행도 힘겨운데 1박 2일 산행이 무리다 싶으면서도 동네 공원을 걷는 것으로 대비를 했다.
산행 전날 윤사장님 전화, 산행 당일 차를 가지고 집 앞으로 오겠다고 한다. 이번 산행에는 윤사장님이 차량 운행을 해 줄모양이다.
알람 소리에 급히 눈을 떠 보니 03 : 00시다. 어제 저녁에 준비한 물품을 다시 점검하고 모처럼 점시 도시락도 챙겨 윤사장님 도착을 기다렸다.
04 : 45분, 박사장과 함께 윤사장님 도착
05 : 00시 경기도 여권 민원실 앞에 도착해 보니 강동규사장, 강영재부장, 산악대장, 장현옥부장이 나와 있는데 안교장선생님이 보이지 않는다. 집에서 막 출발했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05 : 20분, 안교장선생님 도착, 바로 출발을 했다.
06 : 30분경, 서산 휴게소에 들려 아침 식사를 하고 오늘 산행의 출발지 『한티고개』로 향했다.
[2] 산행 들머리 한티고개
한티고개 채석장에 도착한 것이 07 : 30경, 돌을 캐는 機械 소리가 요란하다. 차를 주차 시키고 13구간의 출발지로 걸음을 옮겼다.
넓은 길을 따라 오르다 해미성지를 볼 요량으로 가던 길을 벗어나 우측 넓은 길을 따라 성지를 가다보니 너무 거리가 먼 것 같다. 성지를 돌아보는 것이 무리라 싶어 넓은 공터로 되돌아 나와 순교자 압송로 안내판을 확인해 보니 안내판이 넘어져 썩어 있다.
[3] 가야산 오르는 길
07 : 40분경, 넓은 공터를 뒤로 하고 정맥 표시기가 있는 잡목 좁은 길로 들어섰다.
07 : 48분, 돌 채취로 산이 뚝 잘린 산봉에 올라 보니 절개 된 산 모습이 흉물스럽다. 허옇게 맨살을 드러낸 산 경사를 어떻게 보강을 할지 걱정이 된다.
07 : 52분, 삼각점(314번),이 있는 411.2봉 도착에 도착했다. 시야가 툭 터지며 서해안 바다가 어렴풋이 보이고 해미읍(참고자료 1)과 저수지 그리고 텅 빈 넓은 들이 한 눈에 들어오고 가야산 통신 탑도 지척에 올려다 보인다.
08 : 00시 봉 하나를 오르니 주변 경관이 훤히 보이고 잠시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진다. 편안한 능선 길도 잠시, 다시 가파른 오름 길로 이어지며 숨소리도 거치러 진다.
08 : 20분, 봉에 올라 좀 더 진행을 하니 오래 전에 산불이 났던지 불에 탄 나무 등걸 여기저기 보인다. 불이 난 지역이라 몇 그루 나무가 듬성듬성 서있고 싸리나무, 키가 작은 떡갈나무, 산초나무와 억새가 산을 덮고 있다. 큰 나무가 불에 타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어 산 아래로 큰 건물(한서대)과 마을이 뚜렷이 보인다.
08 : 52분, 다시 숨을 몰아쉬며 산봉에 올라보니 응달진 곳으로 지난번 온 눈이 군데군데 남아 있고 낙엽도 수북이 쌓여 초겨울 산행 정취가 물씬 풍긴다.
09 : 05, 가야산 통신 시설물이 바로 지척에 있는 岩峰에 올랐다. 눈이 더 많이 쌓여 있어 눈을 밟고 가는 재미가 여간 아니다.
[4] 가야산
09 : 18분, 바위 지대를 통과하여 가야산 중계소 철망 울타리 출입구가 있는 바위에 도착했다. 철망을 따라 좌측으로 진행을 해 보니 너덜지대와 같이 큰 돌덩이가 흩어져 있고 눈이 그 위를 덮고 있어 길을 찾아 가는 것이 위험하고 힘이 든다. 조심을 하며 10여분, 바위 지대를 통과하니 119신고 01 - 01 표지목이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한국의 산천」에 “『가야산(677.6m)』은 칠갑산에서 북진하는 금북정맥 상에 솟아 있다. 금북정맥은 홍성을 지나 삼준산을 빚어 놓은 다음, 노적봉 - 가야산(일명 가사봉) - 석문봉 - 옥양봉을 들어 올리고는 두 가닥으로 나뉘어져 북서쪽으로 가지를 친 능선은 일락산을 들어 올린 후 서산 앞바다로 가라앉고, 옥양봉에서 북동으로 달아나는 산릉은 상왕산을 빚어 놓고, 그 여맥을 당진평야에다 묻는다.
가야산은 예산군과 당진군, 서산군 등 3개 군에 걸쳐 들판에 우뚝 솟아 산세가 당당하고 곳곳에 사찰이 자리하고 있어 은은한 풍경을 자아낸다.”라고 소개를 해 놓았다.
산 정상에 올라 금북정맥이 뻗어 나간 형상과 넓은 평야를 비롯하여 여기 저기 불끈불끈 솟은 봉들을 조망을 해 보아야 하는데 군부대 통신 시설물이 山頂을 차지하고 있어 아쉽다.
119신고 표지목이 세워진 바위에서 일부 주변 경관을 살피고 걸음을 내 디디니 로프가 설치된 바위 지대가 나온다.
바람도 다소 심하게 불고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아마도 오늘은 쌀쌀한 날씨와 눈이 어우러진 겨울 산행의 진수를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5] 대원군과 남연군 묘
09 : 50분, 석문봉1.23km, 주차장3.12km, 가야봉0.42km라 표시된 이정표와 119신고 표지목, 그리고 소나무 두 그루 아래 의자가 설치되 있는 안부에 도착했다.
前 山行者의 山行記에는 이정표에 이곳에서 우측으로 1.7km 지점에 『남연군묘』가 있다고 했는데 이정표를 새로 세웠는지 주차장으로 표시가 되어 있다.
『남연군묘』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산 5-28에 있는 충청남도지정 기념물 제 80 호(1989. 12. 29)로 흥선대원군의 부친의 묘다.
「남연군묘가 위치한 자리는 본래 가야산 일대에서 제일 큰 절인 가야사(伽倻寺 : 99개의 암자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큰절이었음)의 절터였는데 풍수지리설의 좌청룡, 우백호가 웅장하게 뻗어있어 “二代天子之地” 즉 2대에 걸쳐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곳이라 하여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부친인 남연군 이구(李球)의 묘를 경기도 연천 남송정에 있던 것을 1846년 伽倻寺를 불사르고 금탑을 허물어 移葬하였다고 한다. 안동 김씨들로부터 갖은 수모를 겪고 있었고 王權에 야심을 품고 있던 터라 더없이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이 묘 자리는 뒷날의 도굴을 염려하여 철 수 만근을 붓고 강회로 비벼 언덕에 반구형 봉분이 크게 자리 잡고 있으며 앞으로 석조물 2조의 석양과 2기의 석주를 묘의 좌우에 세우고 있으며 묘 앞에 석등이 위치하고 있다. 그 후 1866년 통상을 요구하다 실패한 독일 상인 오페르트(Oppert)는 이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후 그대로 방치하고 돌아가기도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라고 「예산문화관광」과에서 소개를 해 놓고 있다. 지척에 유적지를 두고도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쉽다.
[6] 내포의 정기가 발원 된 석문봉
(1) 석문봉 가는 길
09 : 55분, 岩峰에 도착했다. 岩峰 아래 나무 의자가 있고 아름드리 소나무가 운치를 더해 준다. 아마도 석문봉을 찾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런 배려를 한 모양이다. 돌계단을 올라 10여분을 진행하다 보니 세 단계로 포개진 바위 위에 두꺼비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 같은 운치 있는 바위가 있다. 기념 촬영으로 흔적을 남기고 발걸음을 빨리하여 먼저 간 대원들을 따른다.
10 : 09분, 두 개의 바위 벽 사이로 한 사람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있고 돌계단도 설치해 놓은 石門같이 생긴 바위에 도착했다. 삼거리로 119신고 가야 01-08과 이정표를 세워 놓았는데 「가야산 1.65km, 석문봉 0.4km, 주차장 3.21km」라 표시되 있다. 이제 400m만 더 가면 오늘 산행의 가장 힘든 고비이자 산행 景觀이 일품인『石門峰』에 도착하게 된다.
석문 같은 기둥바위를 배경으로 박사장, 장부장과 함께 사진을 찍어 흔적을 남기고 석문봉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2) 석문봉
10 : 25분, 석문봉 정상에 도착했다. 사방이 툭 터져 원근 경관이 한 눈에 뚜렷이 들어온다. 돌아보니 좀 전에 지나온 가야산 송신탑이 손 벌리면 잡힐 듯하고 전면과 좌우를 살펴보니 더없이 넓은 평야 가운데 해미읍과 서산시가지가 자리 잡고 있고 높고 낮은 산이 울타리를 쳐 놓은 듯 빙 둘러 있다. 막힘없는 원근의 경관을 바라보는 눈이 시원하고 막힌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
정상 바위에는 예산 산악회에서 세운 표지석이 있는데 全面에는 『가야산 석문봉, 해발 653m』라 陰刻을 했고 後面에는 『내포의 정기가 이곳에서 발원하다.』라는 글을 새겨 놓았다. 정상석 옆에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고 아래쪽에는 해미산악회에서 『백두대간 종주 기념탑(2001년 9월 9일)』이 있다.
『석문봉(653.0)』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시 해미면에 위치한 산으로 가야산 연봉 중의 중앙부에 쌍방에서 岩峰이 솟아오르면서 그 중간이 폭 30여m, 깊이도 30여m가 깎인 듯이 있어서, 흡사 거대한 대문의 양쪽 벽과 같은 절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석문봉』이라 命名했다고 한다. 높이는 가사봉(가야산의 다른 이름)보다 약간 낮지만 예부터 가야산 연봉의 주봉으로 알려져 왔다.
「엔싸이버 한국의 산」에서는 “석문봉의 높이는 653m이다. 가야산(678m)을 중심으로 한 덕산도립공원에 속한 바위산으로, 가야산의 주봉인 伽倻峰으로 부터 북쪽으로 1.7km 떨어져 있고 일락산(日落山:521m)과 이웃하여 있다. 석문봉을 정점으로 옥양봉과 일락산 사이로 길게 형성된 용현계곡에는 삼림욕장이 조성되어 있다. 역내(驛川)는 석문봉에서 발원하여 서산시를 지나 당진읍·고대면·정미면에 퇴적평야를 이룬다.
전망이 매우 좋아, 정상에서는 남쪽으로 가야봉과 옥양봉, 북서쪽으로 일락산이 내려다보이고, 서쪽 해미쪽으로는 서해바다가 펼쳐진다. 산행은 보통 가야산 일대와 일락산을 연결하여 오르는데, 덕산온천에서 출발하여 해미읍성·일락사·개심사를 거쳐 서산목장, 서산마애삼존불상, 보원사를 둘러본 뒤 덕산온천으로 돌아오는 코스가 있으며, 산행 시간은 2시간 30분~3시간 정도 걸린다.
석문봉 단독 산행은 상가리 주차장에서 시작하여 남연군묘 왼쪽 길로 들어서서 쉼터를 거쳐 안부(鞍部:산마루가 말안장처럼 움푹 들어간 부분)를 따라가다가 북쪽 암릉을 거쳐 정상에 오른 다음, 옥녀폭포로 내려서서 남연군묘를 지나 시작 지점으로 돌아오며, 산행 시간은 총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동쪽 아래 넓게 형성된 골짜기에는 절터인 예산 가야사지(禮山伽倻寺址:충남기념물 150)가 있고 수덕사계곡·덕산온천·온양온천·도고온천·삽교호·해미성(海美城)·대천 등 태안해안국립공원에 연결되는 관광권을 형성하고 있다.”고 소개를 하고 있다.
(3) 내포(內浦)란?
頂上石 후면의 『內浦의 정기가 이곳에서 발원하다.』의 『內浦』란 「금북정맥의 산세가 U자 형으로 휘어감은 그 안쪽 지역을 내포지역이라 한다. 이 지역을 내포지역이라 함은 통일신라시대 때, 이곳 내포지역의 산수가 너무나도 좋았기에 가야산의 원효봉에서 수도를 하셨던 원효대사께서 그의 저서 '원효결'에 “烏聖之間(오성지간)은 산세가 수려하고 산의 기운이 뛰어나니 우리나라 국토의 내장부와 같은지라 內浦(내포)라 한다.”라고 기술한데서 비롯된 말이다. 여기서 '烏聖之間'이라 함은 오서산과 성주산의 사이를 말하는 것이니, 즉 아산. 당진. 예산. 서산. 홍성. 보령 6개 지역으로서 아산만과 천수만의 사이, 그 안쪽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또한 조선중기 실학자 이중환(1690∼1756)은 『팔역지(일명 택리지)』에서 가야산의 앞.뒤 주변 10고을(당진. 면천. 서산. 태안. 해미. 덕산. 홍주. 결성. 대흥. 보령)을 내포지방이라고 하면서 <이곳은 가야산의 서쪽에는 큰 바다가 인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경기도와 바다를 사이로 하여 한 고을이 마주하며 바닷물이 내륙 안쪽 깊숙이 까지 들어온 지형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라고 기술하였으니 홍주는 현재 홍성의 옛 지명이고 대흥은 예산군 대흥면을 면천은 당진군 면천면을 해미는 서산시의 해미면을 이르는 말이다.」라고 「구. 내포문화 기행 ‘서쪽나라’」에 설명을 해 놓고 있다.
[7] 일락산
석문봉에 올라 휴식(약 10분)을 취하며 주변 경관을 조망하고 다시 출발(10 : 35분경)이다. 이정표에 「←가야봉/ 일락사↑/ 옥양봉 →」라 표시되 있는데 『일락사』로 방향을 잡아 내림 길로 들어섰다. 약 3분여를 내려오니(10 : 37분경) 삼거리에 앞서와 같은 이정표를 세워 놓았다.
10 : 40분,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 곳에 마루를 설치한 쉼터 도착. ---> 나무계단을 통과하고
10 : 45분경, 소나무 숲, 넓은 길
10 : 55분, 고개마루 삼거리에 도착했다. 넓은 자갈길로 지도를 확인해 보니『사잇고개』쯤 되는 것 같다. 「용현계곡/주차장/일락산」이정표가 있고 나무판 이정표에는 「석문봉(653m) / 일락사 3.5km / 용현 휴양림 3.1km / 보원사지 3.8km」라 표시되 있다.
11 : 00시, 소나무 숲 오름길 ---> 능선 ---> 다소 가파른 오름길로 이어지는데 반대편에서 많은 山行人들이 내려온다. 석문봉에 오르는 모양이다.
11 : 10분, 일락사가 보이는 바위에서 잠시 휴식.
11 : 19분, 산봉에 정자와 「↑용현계곡 개심사, ←일락사주차장, ↓석문봉」방향을 지시하는 이정표가 세워진 『일락산』정상에 도착했다.
『일락산』은 충청남도 예산군과 당진군, 서산시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 521m이다. 가야산(678m)을 중심으로 한 덕산도립공원에 속하며 석문봉(653m) 북쪽 옆에 자리 잡고 있다. 주변의 다른 산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산행도 석문봉을 오르는 중간 지점으로 알려져 있다.
산행은 보통 가야산 일대와 석문봉을 함께 오르는데, 덕산온천에서 출발하여 해미읍성과 일락사·개심사를 거쳐 서산목장, 서산마애삼존불상(국보 84), 보원사를 둘러본 뒤 다시 덕산온천으로 돌아오는 코스에 포함된다. 산행 시간은 2시간 30분~3시간 정도 걸린다.
산 북쪽에 648년(백제 의자왕 8년) 혜감대사가 창건한 고찰 개심사가 있고, 서쪽 계곡에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일락사』라는 비구니 사찰이 있다.
문화재로 개심사대웅전(보물 143)을 비롯하여 주변에 서산마애삼존불상, 보원사지, 보원사지 5층석탑, 용봉산마애석불 등의 문화재가 넓게 분포되어 있다.
<출처> 엔싸이버 한국의 산
[8] 보원사지 갈림 길
11 : 35분, 길을 확장하는지 공사 중인 임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5분여를 더 진행하니 비포장 도로 삼거리에 「일락산 1.2km, 보원사지 2.8km. 황락리」이정표를 세워 놓았다. 울창한 송림 숲길을 따라 10여분을 진행하니 비포장 도로 삼거리(358.8봉 / 보원사지 갈림길)에 「일락산1.6km / 보원사지터2.6km」라 표시 된 이정표가 있고 보원사지 방향의 넓은 길은 차량 통행을 막기 위한 노란색 차단기가 설치해 놓았다.
노란색 차단기가 설치된 넓은 길로 잠시 내려가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고 점심 도시락을 꺼낸다. 오늘 점심에는 장부장이 해물탕을, 박사장이 돼지고기 고추장 불고기를 준비했다. 찬밥에 뜨거운 국물과 고추장 불고기 볶음을 곁들이니 이 또한 별미다. 출출한 배를 채우고 있는데 10여명의 등산객이 몰려와 점식 식사를 하기 위해 우리 옆에 자리를 잡는다.
[9] 서산목장
12 : 30분, 식사를 끝내자 바로 출발이다.
오늘 산행 중 가야산, 석문봉, 일락산 등 높은 산을 오전 중에 끝낸 때문인가. 오후 산행의 시작은 산책을 하듯 임도 평지 길로 이어진다.
13 : 00시경, 철사 줄을 제치고 시멘트 포장도로에 내려서니 광활한 초원이 가마득히 펼쳐진다. 국내 최대의 목장 『서산목장』이란다. 백두대간 종주 때 눈 덮인 대관령 목장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는데 이곳은 대관령 목장의 몇 곱은 되는 것 같다. 대관령의 눈으로 덮인 목장 전경도 좋았지만 갈색과 파란 색이 조화를 이룬 초원이 완만한 능선 굴곡을 따라 시원스레 펼쳐진 전경이 너무 아름답다. 산 전체를 융단으로 덮어 놓은 듯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서산시 운산면 『축협목장(서산목장)』은 1969년 김종필 총리의『삼화목장』으로 출발했으나 80년 신군부가 환수해 축협에 넘겼다고 한다. 그 후 농협중앙회 한우개량사업소에서 약 21.06㎢의 거대한 산지를 개발하여 무려 6백38만평이나 되는 국내 최대의 목장을 조성했다.
푸른 초원을 두르고 있는 30년생 벚나무가 2,000여 그루나 되며 벚꽃길이 끝나는 지점에는 전망대가 있는데 목장 언덕길을 따라 전망대에 이르는 1km 가량의 벚꽃길이 가장 아름다우며 이곳을 찾는 관광객의 탄성을 자아내는 코스가 된다고 하며 전망대에 오르면 탁 트인 목장 전경이 한눈에 펼쳐지고 푸른 초원 위에 길게 띠를 두른 벚꽃 터널을 보면 둥둥 떠 있는 꽃섬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10] 상왕산(象王山)
13 : 10분, 목장을 벗어나 안부 삼거리 도착, 좌측 임도를 따르고
13 : 20분, 임도를 버리고 좌측 산으로 올라붙는다.
13 : 39분, 오랜만에 급하게 숨을 몰아쉬며 삼각점(당진 28번 1985년 복구)이 있는 해발 307.2m, 『상왕산(象王山)』정상에 올랐다. 이 산은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용현리, 태봉리, 고풍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삼한때 상왕(象王)이 이곳에서 왕 노릇을 하다가 백제에게 망하였다는 산이다.
[11] 가루고개
13 : 55분 119번 송전탑 통과
14 : 08분, 송전탑 線路를 벗어나 산길을 5분여 진행하다 山峰에 오른다. 봉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어 내려가니 많은 정맥 표시기가 매달린 삼거리가 나온다.
14 : 13분, 삼거리 ---> 좌측 내림 길 ---> 소나무 숲 --->좌 --->목장
14 : 16분, 송전탑 통과
14 : 30분, 잠겨 있는 목장 철문을 통과하니 목장 길 4거리가 나오고 출입 통제 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이곳은 한우 종축 보호 지역으로 관계자 외 출입을 금지 함. / 서산시장 / 농협 가축 개량사업 소장」
14 : 37분, 114번 송전탑 봉우리 도착, 잠시 잡목 구간이 이어진다.
14 : 45분 목장 시멘트 도로, 광활한 목장 풍경이 계속 이어지고 큰 저수탱크도 길옆에 있다.
14 : 50분, 목장 철문을 통과하니 파란 지붕의 민가 한 채가 있고 민가를 지나면 바로 2차선 포장도로(647번 지방도로)에 소중1리 표지석을 세워 놓은『가루고개』에 도착했다. 이 고개는 운산면 갈산리에서 태봉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 주변에 칡이 무성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12] 모래고개
포장도로를 횡단하여 다시 목장 초지로 들어섰다. 완만한 오름길이다.
15 : 00시, 瑞寧柳公基喆墓 도착. 바로 뒤 따라 오는 줄로 알았던 張部長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묘지에서 휴식을 취하며 張部長을 기다렸다. 5분여 후에 민가를 나온 장부장, 뛰는 걸음으로 단숨에 묘까지 오른다. 민가 화장실을 들렸는데 할머니가 차 한 잔 마시고 가라고 붙들어 지체되었단다.
15 : 15분, 서해안 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난다. 『모래고개』다. 이 고개는 운산면 갈산리에서 가재울로 넘어가는 고개로 모래가 많아 여름 雨期에는 사태가 자주 난다는 고개다.
[13] 동암산
15 : 30분, 작은 봉에 올랐다. 좌우에서 차 지나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밤나무 단지와 소나무 숲을 지나고 다시 山峰에 올랐다. 삼각점이 있고 나무에 『동암산 176.3m, 괜차뉴』라고 쓴 아크릴 표지판이 매달려 있다.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 『동암산』에 도착(15 : 36분)했다. 고단한 오늘 산행도 이 산을 뒤로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생각하니 발걸음도 한결 가볍다.
[14] 산행 마무리
15 : 53분, 오늘 산행의 종착지 『서해 컨벤션 웨딩 뷔페』와 『현대주유소』가 있는 구 서산휴게소인 『무르티고개』에 도착을 했다. 산악대장과 윤사장은 차량을 회수하기 위해 떠났는지 보이지 않는다.
『무르티고개』는 운산면 갈산리와 회선동 서북쪽의 고개로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고개의 모습이 ‘노인이 춤추는 형국’이라고 한다.
서산 휴게소 자리가 웨딩 뷔페로 바뀌었기 때문에 5분여를 걸어 새로 마련된 휴게소로 이동하여 산행의 고단한 다리품을 풀기 위해 점심 때 먹다 남은 고추장 불고기를 익혀 이스리를 한 순배 돌리니 맛이 그저 그만이다. 이스리 한 병이 모자라고 두 병이 부족하다. 흥이 도도해 질 때가 돼서야 산악대장과 윤사장 차를 회수해 휴게소에 도착했다. 차량 운행으로 이스리를 권하지 못하고 저녁와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서산 시내로 이동을 했다.
서산시 버스 터미널 근처 횟집에 들려 저녁 식사.
강사장과 강부장은 내일 개인적인 일이 있어 내일 산행에는 참여할 수 없다며 수원으로 올라가고 숙소로 이동하 것으로 오늘 일정을 끝냈다.
2007. 12. 26
[참고자료]
[1] 해미읍성
성곽은 모양과 축성목적에 따라 이름이 달라집니다. 한나라의 수도를 방어할 목적으로 지어진 것을 ‘도성’이라 하고, 산이나 계곡의 지형을 이용해 지은 우리나라 대표적 성곽형태를 ‘산성’, 국경지역에 주로 쌓아 외적을 방어할 목적으로 사용하던 것을 ‘장성’이라고 합니다. 해미읍성처럼 주요 군사지역에 세워지며 군사적 기능과 행정적 기능을 동시에 가지는 성곽을 ‘읍성’이라고 하는데요, 해미읍성은 그 만큼 해미지역이 중요한 군사적 요지였음을 말해줍니다.
태종 18년(1418)에 쌓기 시작하여 성종22년(1491)에 완성한 해미읍성은 둘래 1,800m, 높이 5m, 총면적 59,000 평의 석성으로 보존상태가 거의 원형에 가까워 국내에 보존되고 있는 성곽들 중 그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 입니다. 고려 말 유난히 침입이 잦았던 왜구를 방어할 목적으로 쌓았던 해미읍성은 평지라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性 밖으로 2m 깊이의 연못을 파놓아 외적의 침입을 막았으며, 性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심어 ‘탱자성’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선조 12년(1579)에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훈련교관으로 부임해 10개월간 근무하기도 했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데요,1963년 사적 제316호로 지정되면서 성내에 위치하고 있던 민가와 학교 관공서를 이주시키고, 동헌, 어사, 교현청 같은 건물들을 복원하는 등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해 개발이 한창입니다.
처참했던 천주교박해의 현장이기도...
해미읍성은 천주교사에서는 일명 ‘통곡의 땅’으로 불립니다. 천주교를 박해하던 당시 천주교인들을 以곳 해미읍성으로 잡아들여 고문하고 무참히 처형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1866년 병인박해 때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신부를 비롯해 1,000여명의 천주교도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자리개돌이라는 돌위에 교인들을 태질해 처참히 살해하고, ‘호야나무’라 불리는 고목나무에 교인들을 매달아 활을 쏘고 돌을 던져 죽이는 등 온갖 잔인한 방법을 일삼았던 ‘피의 역사’현장 입니다.
아직도 호야나무에는 교인들의 머리채를 매달았던 철사줄의 흔적이 당시의 잔인하고 처참했던 상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현재 이곳에는 순교탑이 세워지고, ‘자리개돌’과 ‘호야나무’는 보호되어 천주교인들의 순례지가 되어 많은 신도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2] 남연군묘 도굴사건
독일인 E.J.오페르트는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교섭에 실패한 뒤 기회를 노리다가, 병인사옥 때 탈출하여 프랑스제독 로즈의 조선원정 때 향도 및 수로 안내인이었던 프랑스 신부 페롱과 조선인 천주교도의 의견에 따라,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구(球)의 묘를 발굴해서 시체와 부장품을 이용하여 대원군과 통상문제를 흥정하고자 하였다.
이에 오페르트는 배후인물로 자금을 전담하였던 미국인 F.젠킨스와 페롱, 선장 묄러(Moeller), 조선인 모리배 2명, 유럽·필리핀·중국선원 등 총 140명으로 도굴단을 구성하였다. 그들은 1868년 5월 차이나호·그레타호 등 1000t급 기선 두 척을 이끌고 충청남도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 러시아인이라 사칭하면서 남연군묘로 행군하였다.
도굴단은 덕산군청을 습격, 군기를 탈취하고, 민가로부터 발굴도구를 약탈하여 가동(伽洞)의 남연군묘로 직행, 밤에 도굴에 착수하였으나 묘광이 견고하여 실패, 날이 밝아오자 철수하였다.
이 사건으로 젠킨스는 미국인에 의하여 고발당하였고, 페롱은 프랑스정부로부터 소환당하였다. 조선은 조상숭배사상이 강하여 묘를 신성시하였는데, 더욱이 국왕의 할아버지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자 흥선대원군이 크게 노하였다.
결국 대외적으로는 서양인의 위신이 떨어졌고, 대내적으로는 대원군의 쇄국양이정책의 강화와 천주교탄압이 가중되었다.
[3] 금북정맥의 내포문화
내포는 가야산 안에 싸여 있는 지역을 일컫는데 보통 예산, 당진, 홍성, 보령, 태안, 서산을 포함한다. 내포는 평야가 많고, 바다와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으로 ‘내륙의 포구’의 줄임말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자연환경처럼 내포지역은 살기가 풍요롭다.
내포문화권의 정수인 예산에는 자원이 풍부하여 경제적으로 궁핍함이 없었던 곳이다. 하천에는 물고기가 많아 삽교천과 무한천등에 낚시터가 다수 있고 육지에는 평지가 많아 쌀을 중심으로 한 풍부한 농산물을 생산해 내고 있다.
바다로 돌출된 지형을 이루는 내포지방은 곳곳에 포구가 발달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내륙으로 인식되는 지점까지도 삽교천과 무한천 수로를 이용하여 바닷배가 왕래하였다. 보통 바닷배는 무한천에서는 신례원, 삽교천에서는 구만포까지 왕래하였고 그 지천에서도 남원포, 부리포 등의 포구가 곳곳에 산재하였다. 내포지방은 이러한 포구를 통하여 한양이라는 최대 거점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내포지방은 과거 연장된 근교로도 볼 수 있다.
또한 예산은 서해바다인 당진을 통해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문화를 가장 빨리 받아들인 곳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가야산을 중심으로 불교문화의 꽃을 피우기도 했던 곳이다.
이처럼 내포지역은 서해운송로의 역할로 불교문화가 정착했고 가야사나 수덕사, 보원사 등 역사가 깊은 큰 절들이 많이 생겨났다. 특히 태안반도는 선진문물의 유입통로로서 안전한 운송을 비는 마애불들이 많다. 태안 백화산 삼존마애불, 서산삼존마애불 등이 금북의 마루금 인근에 있다. 또한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은 실제로 후덕한 인품과 순수한 미소로 내포지역의 풍요로움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가야산 인근 지역은 한국의 불교유적 보고이다.
내포 지방은 조선 후기 상업발전의 한 축을 이루는 보부상 관련 유품의 보고이기도 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후기 상업의 발달에 따라 정부에서는 보부상을 상무사로 조직하였다. 당시 도자기, 소금, 어물 등을 취급하는 부상은 좌사로 직물, 철기 등을 취급했던 보상은 우사가 되었다. 현재 내포에는 상무사의 전통이 명맥을 유지하여 오고 있다.
이처럼 내포지방은 많은 문물이 오가던 교역지로서 물자가 풍부했던 곳이다. 바다와의 접근이 쉬운 자연적인 환경은 주민의 상업과 경제, 문화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공주와 아산, 예산의 삼남분기인 봉수산을 중심으로 가야산까지 U자형을 이루는 금북정맥도 내포문화권을 이룬 중요한 생태적 환경으로서 높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3] 서산 일락사
소재지 : 서산시 해미면 황락리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193호
지정년월일 : 1984. 5. 17
시대 :
문의처 : 041-688-0812
일락사는 서산시 해미면 황락리 일락산(521.4m)의 서남편에 위치한 고사찰로 창건연대는 기록된 문헌이 전하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사찰에 전하는 사기(寺記)와 1970년대 이후에 발간된 각종 서산군지와 해미읍지의 기록에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의현선사가 창건하였으며 인근에 있는 해미읍성의 성곽 축성이 완공되기 4년 전인 조선 선종 18년(1487)에 중수하였고 중종 25년 (1530)과 인조 27년(1649)에 해미읍성 객사 중수 때 일락사도 함께 보수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락사 문화재
3층석탑(문화재 자료 제 200호)
이 탑의 조성연대를 알 수는 없으나 탑의 조성기법과 전체 축조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기단부는 2중인데 아래층 기단은 땅속에 묻혀 있고 그 갑석만이 지대석처럼 땅위에 드러나 있다. 2중 기단의 면석에는 모서리 기둥을 조각했고 갑석의 처마를 길게 빼고 윗면의 물매를 완만하게 조성했다. 현재 갑석의 두모서리가 거의 파손된 상태이다.
일락사 철불(문화재 자료 제 208호)
일락사의 철조 석가여래 조상은 본래 일락사의 대웅전(현 명부전) 건물내에 안치됐을 것을 대적광전을 건립하고 옯겨 안치했다.
불상의 특징은 결가부좌한 오른쪽 발로 즉 왼쪽 무릎위에 올려 놓은 오른쪽 발이 약간 두드러지게 위에 얹혀져야 정상인데 본 불상에서는 매우 밋밋해서 왼쪽 무릎위로 내려오는 대의 자락이 거의 발가락끝을 슬쩍 덮고 내려온 상태로 생동감이 적어 보인다. 불상 높이 80cm이며 좌폭은 60cm
[4] 보원사지
소 재 지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상왕산 보원마을에 있는 절터이다.
옛 보원사의 창건연대와 소멸시기는 기록된 문헌이 없어 정확히 알수는 없다. 예부터 전하는 이야기와 출토된 유물로 보아 백제시대 창건된 사찰로 추정되고 있다. 법인국사보승탑비에 승려 1,000여 명이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에는 매우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수 있다. 보원사지 석조(보물 제102호)․당간지주(보물 제103호)․오층석탑(보물 제104호)․법인국사보승탑(보물 제105호)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가까이에 서산 마애삼존불을 비롯해 불교유적이 집중 분포하고 있어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경내(境內)에는 몇몇의 건물 장수석(長壽石) 등이 있을 뿐 아무런 건물(建物)이 없다. 그러나 보물(寶物)로 지정(指定)된 석조(石槽)․당간지주(幢竿支柱)․오층석탑(五層石塔), 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동탑비(同塔碑) 등이 있으며 비문(碑文) 기록(記錄)에 의하면 승려 천여명(千餘名)이 기거했다 하므로 대찰(大刹)이었음이 분명(分明)하다.
이곳에서 서산(瑞山)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까지는 가까운 거리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볼 때 이 지역은 한국불상의 선구지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출처> 서산시청
[5] 개심사
운산면 신창리 상왕산록에 한적하게 자리하고 있는 개심사는 충남지역 4대 사찰 중 하나로 꼽히고 있는 명사찰입니다. 개심사는 본래 백제 의자왕14년(651) 혜감스님이 ‘개원사’란 이름으로 창건하였으나 고려 충청왕 2년(1350) 처능대사에 의해 중건되면서 ‘마음이 열린다’는 뜻의 개심사로 개명되었습니다.
개심사는 일반 사찰과는 달리 건물의 배치가 일직선이 아니고 대웅전, 신검당, 요사채 무량수전, 설선전등이 서로 둘러싸듯 옹기종기 배치되어 있으며, 절 중앙에는 5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때 대웅전의 기단만이 보존되고 나머지는 모두 소실되었던 것을 조선 성종(1457)때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전해지는데, 보물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는 개심사 대웅보전은 단정한 품위가 돋보이는 맞배지붕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포식 건축양식(기둥머리 위 뿐만이 아니라 기둥과 기둥사이에도 공포를 배치하여 올린 것)으로 그 작법이 아름다워 건축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보물 제 143호로 지정된 개심사는 문화재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기도 하지만 상왕산 산자락에 한적하게 자연과 어우러진 모습이 빼어나 그 풍경을 즐기기 위해 개심사를 찾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철쭉, 진달래, 벗꽃나무 등이 사찰 전체를 둘러싸고 있어, 지붕만 조금 보일 뿐 전경은 잘 볼 수가 없는데요, 꽃들이 만발하는 4월이 되면, 화려한 봄 꽃 들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하고, 붉게 물든 가을 단풍 속의 개심사도 정말 아름답습니다.
647번국도를 따라 개심사 쪽으로 오다 보면 마치 외국에서나 있을 법한 큰 목장초원이 나타나는데, 이곳은 김종필씨의 사유지였던 삼화목장으로 국내에서 가장 넓은 목장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개심사 절 이름 유래>>>
① 개심사
②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041-688-2256)
③ 절 이름의 유래 : 개심사의 주산은 상왕산이다. 지금은 개심사 뒤편 그러니까 북쪽으로 십리 남짓한 거리에 솟은 봉우리를 상왕산이라 하고 개심사 남쪽으로 석문봉과 이어져 가야사 옛 터를 안은 주봉을 가야산이라 하지만, 사실 가야산과 상왕산은 같은 뜻이다.
부처님의 자취가 서려 있는 중인도 지방에 지금 가야라고 부르는 도시가 있는데 이 도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붓다가야가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가야산이 있는데 이 가야산을 상두산이라 하였으니 산꼭대가 코끼리 머리와 비슷한 형상이어서 이런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런 가야산, 상왕산에 자리잡은 개심사는 불타의 정각을 따라 깨달음의 마음을 열라는 뜻에서 지은 절이름 인 것 같다.
<<<상왕산>>>
운산면신창리(307m)에 있다. 속설에 의하면 옛날 상왕이 이 곳에 도읍을 정였다던가 상왕의 무덤이 있었기에 이어 연유하여 상왕산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법인대사비문에 있다고 서산군지에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 법인대사비문에는 이런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이 산 위 줄기에는 석문봉 입모산 문수산 등이 있는데 특히 상왕산의 개심사는 주변 경관까지 신비로운 충남 4대 사찰로 일반에 널리 알려져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