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형이라 그랬습니다. 그의 귀가 사라지는 것은. 그의 손가락이 하나씩 없어지는 것은 하늘의 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들 그랬습니다. 고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운명으로 받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살이 조금씩 변하는 만큼 사람들도 변했습니다. 친구들이 떠나고 가족이 사라지고 이웃들은 그를 피해 다녔습니다. 사라지는 육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들의 시선이었습니다. 육체의 고통보다 마음의 상처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두고 문에 빗장을 지르고 낙인을 붙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자신들에게서 멀리 떠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황톳길을 밟으며, ‘가도가도 멀기만 한 천리길’을 밟아, ‘자고 일어나면 하나씩 사라지는 손가락과 발가락’을 세며, 길을 떠납니다. 숲을 헤치고 들판을 걸어 이윽고 땅 끝에 도착합니다. 땅 끝에 서서, 짙은 해무 속에서 그는 생의 끝을 마주하게 됩니다. 더 이상 돌아갈 곳도 없다고, 그는 지는 해를 바라보며 조금쯤 울었는지도 모릅니다. 해무를 해치고 무언가 그에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바다만큼 푸른빛을 지닌 커다란 사슴 한 마리가 그 앞에 섰습니다. 커다랗고 말간 눈을 끔벅이며 그에게 말합니다. 나에게 와. 그는 사슴의 등허리에 올라탑니다. 사슴이 그를 데리고 바다를 건넙니다. 그는 어느새 사슴과 한 몸이 됩니다. 사슴은 위안과 치유의 땅으로 그를 끌고 갑니다. 위안과 치유의 땅에서 그는 작은 사슴으로 다시 살아갑니다. 스스로 사슴이 되어서 말입니다. 푸른 풀을 뜯고 푸른 공기를 마시면서 푸른 사슴으로 삽니다.
아낙의 품에 들다 사슴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그를 찾아 떠나는 길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먼 길입니다. 벌교 뻘을 왼쪽으로 두고 반도의 남쪽 끄트머리에서 또 다른 반도 고흥 땅으로 들어섰습니다. 들판을 걷고 있습니다. 들을 가득 메운 보리가 푸른 파도를 만들어냅니다. 저 보리가 익을 때쯤 이 푸른 바다는 황혼 빛이 되어 넘실거리겠지요. 일렁이는 보리 물결에 따라 몸을 흔들어 봅니다. 바람에 쓸려가는 보리처럼 내 몸에 가느다란 솜털이 솟아나 하늘거리는 것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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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 밭둑에 앉아 길을 가늠하고 있었을 그를 생각해봅니다. 보리를 꺾어 피리를 만들어 불기 시작했을 겁니다. 보리피리 불며 떠나온 고향 언덕을 그리워했겠지요. 필 닐니리, 필 닐니리, 피리소리가 보리밭 사이사이로 울려 퍼지면, 봄 언덕 고향도 그립고 ‘청산 어릴 때도 그립고 인환(人 )의 거리 인간사도 그리워’졌겠지요. 나도 보릿대를 하나 꺾었습니다. 나는 보리피리를 만들 줄 모릅니다. 어찌해서 모양은 만들었지만 도통 소리는 나지 않습니다. 내가 보리피리를 불 수 없는 것은 눈물의 언덕을 지나보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푸른 보리 파도를 뒤로하고 다시 길을 재촉합니다. 발걸음을 재촉해보지만 자꾸 걸음이 멈춰집니다. 붉은 밭에 너울져 핀 유채꽃과 자운영 꽃 가득한 논이 내 발목을 잡아끕니다. 자운영꽃을 뜯고 있는 소들도 영 한가롭기만 합니다. 자운영꽃은 내 발목 뿐 아니라 무논에서 쟁기를 끄는 소를 유혹하기도 합니다. 자운영꽃에 이미 마음을 빼앗겨버린 소 때문에 농부는 여간 애를 먹지 않습니다. 그 뒤로 아낙들이 꼴을 베고 있는 것도 보입니다. 자운영 꽃밭에 앉았습니다. 자꾸만 주저앉게 되는 것은 내가 그를 만나기 두려워하는 때문일까요, 아니면 자운영꽃 때문일까요. 자운영 꽃밭에 앉아 꽃반지를 만들었습니다. 언젠가 그도 꽃반지를 만들어 어느 여인의 어여쁜 손가락에 끼워주기도 했겠지요. 어쩔 도리 없이 두고 온 여인을 생각하며 되돌아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어깨 널찍한 사나이와 함께 나란히 아기를 거느리고 정말로 행복해 버렸을 여인. 엷은 입술 혀끝에만 맴도는 여인의 이름을 불러보기도 했겠지요. 이제는 이름으로나 불러볼 수 있는, 자운영 꽃을 닮은 여인의 이름을 나도 따라 시리게 불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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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앉아 있는 것이 쓸쓸해 보였는지 꼴을 베던 아낙이 내게 다가옵니다. 여인의 손에는 오이가 들려 있습니다. 울퉁불퉁하고 짤막한 것이 아주 못생긴 오이입니다. 받아드는 손보다 내미는 손이 오히려 부끄러움을 탑니다. 꼴은 이래도 아주 맛있소, 한 입 베어 묵소. 아낙이 말합니다. 나는 오이를 받아듭니다. 나무등걸처럼 투박한 손이 내 손등에 스쳐갑니다. 오이를 한 입 베어 뭅니다. 향기로운 내음이 입안에 가득 고입니다. 달리 고마움을 표현할 길이 없어 주위를 둘러보다가 논두렁에 연둣빛으로 올라온 풀의 이름을 물어봅니다. 도시 것의 눈에는 그저 풀로만 보이던 것을, 아낙은 돌미나리라고 친절하게 가르쳐줍니다. 그리고는 생각난 듯 논두렁으로 내려가 돌미나리를 쓱쓱 베어줍니다. 너물도 해 묵고, 찌개에도 너 묵고, 가서 해 먹소. 나가 쩌그 가서 좀 더 뜯어 올팅 게. 미처 말릴 겨를도 없이 돌미나리를 한아름 안고 옵니다. 나는 아낙과 두런두런 얘기를 합니다. 어느새 잠시 쉬고 있던 아낙들이 하나둘 자운영 꽃밭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어떤 아낙은 밭에서 거둬들이고 있던 취나물을 가득 담아 오기도 했습니다. 까르르 소녀처럼 웃는 아낙들의 얼굴에 자운영꽃이 핍니다.
고흥 땅에 들어서면서부터, 나는 땅을 밟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골 아낙의 품속에 든 기분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안부를 묻고 지천으로 핀 꽃을 꺾어주는 사람들.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자꾸만 미소가 지어지는 땅이 이곳 고흥 땅입니다.
그리하여 혼자 걸어도 그네들의 거칠고 투박한 손에 대한 기억으로 따뜻하고 외롭지 않겠습니다.
어쩌면 이 길을 먼저 걸어갔던 그 역시 어느 아낙이 떠 주는 한 바가지의 물을 먹고 힘을 냈을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파릇한 오이 내음을 맡았을지도 모르고요. 그도 그리 쓸쓸한 건 아니었을 거라고 위안도 해 봅니다. 나병을 짊어지고 인간들에게서 추방돼 살아 있긴 하되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니었던, 자고 일어나면 손가락 하나 없어지고, 또 자고 일어나면 발가락 하나 없어지는 서러운 남도 행 천리 길을 그는 걸었겠지요. 그러다가 이곳 고흥 땅에 도착해서는 작은 위안도 얻었을 거라고 짐작해 봅니다. 이제 발걸음을 재촉해 빨리 사슴을 만나야겠습니다. 섬인 듯 육지인 듯,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숨었다가는 홀연 나타나는 바다와 섬들과 놀면서 계속 남쪽으로 향합니다. 삼나무 숲을 지나 느티나무 그늘에 쉬었다가 비자나무 숲을 지나 녹동항에 도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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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만나다 녹동항에서 배를 탔습니다. 바로 이 앞에 보이는 짙푸른 섬이 소록도입니다. 작은 사슴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나병은 낫는다.’ 소록도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표어입니다. 치유에 대한 자기 확신인지, 나병을 보는 주위 사람들의 오해에 대한 절규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병을 천형이라 믿었던 시절, 나병환자들에 대한 소문이 횡행하던 시절, 강력한 의지와 나병에 대해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 쓴 표어가 외려 내 마음을 긴장하게 만듭니다. 나병은 한센균에 의해 발생되는 질환입니다. 한센병은 호흡기로 감염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센병에 걸리지 않으며 한센균에 대한 면역력이 적은 극히 일부의 사람에서만 발병하는 질환입니다. 그러니까 일반인들은 한센병 환자와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환자, 문둥이라고 하며 그들을 멸시하고 천시했습니다. 천형의 병이 아니라 치료가 되는 병에 불과한데 말이지요. 어쩌면 그들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썩어가는 살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이었을 것입니다. 한센병 환자들이 사슴 섬에 들어오게 된 것은 일제시대 때입니다. 대부분 다리 밑이나 움막에서 살거나 유랑 걸식하던 환자들을 격리 수용하기 위해 이 섬에 소록도 자혜의원을 설립한 것이 그 시작입니다. 소록도에 수용된 환자들은 굶주림과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벽돌을 구워내고 송진을 채취하고 군수물자 생산에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한센병은 병에 걸렸더라도 2주에서 2개월 정도 약을 먹으면 다른 사람에게 병을 옮기지 않으며, 5년에서 20년 정도 꾸준히 약을 먹으면 완전히 낫습니다. 성적인 접촉과 임신을 통해서도 감염되지 않으므로 격리가 필요한 질환이 아닙니다. 유전이 되지도 않습니다. 한센병에 대한 잘못된 상식과 금기는 또 다른 천형을 만들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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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되지 않은 아이들은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한 달에 한번쯤 도로 양옆으로 갈라선 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만나야 했습니다. 손 한번 잡아볼 수 없는 것도 서러운데, 아이들은 바람을 등지고 부모들은 바람을 맞으며 만났습니다. 바람을 등지고 서야만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람결에 묻어오는 숨결조차도 감염의 두려움이었던 게지요. 이런 면회 장소를 원생들은 탄식의 장소라는 의미로 ‘수탄장(愁嘆場)’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어머니들은 제 얼굴을 보여주는 것도 어쩌면 고통이었을 겁니다. 거울조차 마주할 수 없었던 지독한 얼굴. 그것은 문둥이라는 죄명으로 받은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변호할 길 없는 벌이었던 것입니다.
한번도 웃어본 일이 없다. 한번도 울어본 일이 없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슬픔, 그러한 슬픔에 굳어버린 나의 얼굴. 도대체 웃음이란 얼마나 가볍게 스쳐가는 시장끼냐. 도대체 울음이란 얼마나 짓궂게 왔다가는 포만증(暴慢症)이냐. 한때 나의 푸른 이마 밑 검은 눈썹 언저리에 메워 본 덧없음을 이어 오늘 꼭 가야 할 아무데도 없는 낯선 이 길머리에 쩔룸쩔룸 다섯 자보다 좀더 큰 키로 나는 섰다. 어쩌면 나의 키가 끄는 나의 그림자는 이렇게도 우득히 온 땅을 덮는 것이냐. 지나는 거리마다 쇼윈도 유리창마다 얼른 얼른 내가 나를 알아볼 수 없는 나의 얼굴
- 한하운, 「자화상」 전문
사슴이 되다 소록도에 도착하고 나니 자꾸만 사람들 얼굴을 눈여겨보게 됩니다. 어떤 궁금기가 발동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멀리 검은 뻘밭에 눈길을 던졌습니다. 빗방울이 드는데도 검은 뻘에는 꼬막을 캐는 사람들이 정물처럼 앉아 있습니다. 나는 내 얼굴을 쓰다듬었습니다. 매끈한 얼굴이 자꾸만 부끄러워지는 것입니다. 붉은 벽돌과 육중한 담으로 둘러 쌓인 건물에 닿았습니다. 이곳은 일제하의 병원이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병원 규정을 위반한 환자를 구금·감식처분·체형 등을 가했던 형집행장이나 다름없는 감금실입니다. 그나마 크지도 않은 창문에 바싹 쳐져 있는 철조망이 당시의 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속에서 감금되어 있던 어떤 이는 너무 고통스러워 이불껍질을 뜯어 목매달아 죽으려고까지 했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감금실에서 나올 때에는 검시실에서 정관수술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정관수술은 한센병 환자의 근절을 위해 1927년 일본의 한센병 연구 의학자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정관수술을 해야만 부부 동거를 허용했다고 합니다. 검시실로 들어가는 내 마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가운데 육중하게 자리잡은 수술대에서 그날의 비명과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 같습니다. 사춘기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청춘을 통곡하던 젊은 영혼의 울음소리도 들립니다. 나는 차가운 메스가 내 몸에 닿기라도 한 듯 진저리를 치며 검시실을 빠져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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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의 공기를 쐬니 오히려 머리가 한바퀴 휙 회전하는 듯한 현기증이 입니다. 자꾸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하늘이 알았는지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나는 비를 맞으며 중앙공원 쪽으로 향합니다. 중앙공원에는 금물이 든 듯한 황금편백과 실편백, 히말라야 시다 등 쉽사리 볼 수 없는 나무들이 별천지를 이루고 있습니다. 70년 전 쇠약한 병자들을 강제로 내몰아 3년 6개월여 동안 만든 공원입니다. 숨어도 좋을 만큼 나무는 너른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중앙공원에서 한하운의 「보리피리」가 새겨져 있는 바위를 봅니다. 구라탑 뒤쪽 언덕에 놓인 이 바위는 ‘메도 죽고 놔도 죽는 바위’로 불려졌습니다. 딱 이불 한 장 크기의 이 바위는 완도에서 옮겨왔다고 하는데, 소록도의 환자들이 이 바위를 떼매올 때 허리가 부러져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고 목도(여러 사람이 무거운 물건이나 돌덩이를 밧줄로 얽어 어깨에 메고 옮길 때 쓰는 굵고 긴 막대기-편집자 주)를 놓았다가 매 맞아 죽은 사람들도 숱하여서 이름 붙여진 한 서린 바위입니다.
키 큰 나무들 사이를 산책하다보니 어지러웠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 듯합니다. 「보리피리」가 새겨진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는 이는 누굴까, 생각해봅니다. 어디선가 숲을 헤치고 곧고 아름다운 뿔을 가진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사슴의 등에는 그가 올라타 있습니다.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오이를 건네주던 아낙을 닮아 있습니다. 어찌보니 자운영꽃으로 화환을 만든 소녀 같기도 합니다. 눈썹이 다 빠진 눈을 끔벅이며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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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에서 사슴을 만나기 위해서는 두려움과 선입관을 없애야 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두려움에서 떨고 있는 한 사슴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곳 소록도에는 사슴과 사람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밉니다. 나는 오이를 받아먹듯 그의 손을 잡습니다. 그가 나를 사슴의 등에 태워주었습니다. 사슴은 성탄절 선물을 나르는 순록처럼 하늘을 날아 검은 뻘을 지나 보리파도를 타고 날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을 들여다보며 울고 있을 누군가를 향해 날아갑니다. 눈빛만 보아도 치유가 되는 푸른 사슴의 마을,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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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새 깃을 치는 사슴의 마을 여윈 목줄기 외로워 모래톱을 달리는 소녀야 눈부시게 싱그러운 네 혈맥의 피뜯기는 소망을 해풍이 밀려가는 강 건너로 발돋움하라.
- 김지연, 「사슴의 마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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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이곳 사람들의 인심이다. 지나다 길이라도 물을라치면 말은 물론 손, 발 그것도 모자라 ‘나를 따라오라’는 식이다. 일하던 사람들은 소녀적 웃음을 연신 터트리며 사진 촬영에 티없이 응했고, 캐고 있던 미나리, 밭취나물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넣어 갈 것이 마땅찮아 어물대자 어떤 사람은 어디선가 잽싸게 비닐 봉다리를 찾아왔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수건을 내어 꼭꼭 싸주며 어여 가, 등을 밀었다. 중심과 발전, 문명으로부터의 소외를 고흥은 사람들의 자연에 가까운 순진무구한 성정(性情)을 통해 충분히 보상받은 것 같다. |
‘바람에 펄럭이는 낡은(老) 비단(羅) 같은 섬(島).’ 옛날 남해안 연안을 항해하던 중국 상인들이 나로도를 이렇게 빗대 이름 붙였다고 한다. 점 점 점 떠 있는 섬들, 낮은 산과 해변의 솔숲 사이에 평화롭게 자리한 마을의 집들, 닻을 내린 채 정박해 있는 작은 통통배들, 완만한 구릉과 꾸불꾸불 해안을 오가며 넘는 도로들…, 나로도의 이런 풍광을 어떤 사람은 적막하다 했고 어떤 사람은 나른하다했고 또 어떤 사람은 무섭다고 했다. 어떤 경우든, 문명과 도시의 번잡함과 편리에 젖은 사람들이 낼 수 있는 표현들임에 분명했다. 그만큼 나로도는 사람들에게 멀어서, ‘자연의 혜택’을 고스란히 누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그래서 다행이라고 했다. |
고흥군에서는 이 마을을 ‘나로도 우주센터가 건설되고 있는 곳으로,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을 배경으로 떠오르는 장엄한 일출이 매우 아름답다’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이 마을의 가장 큰 장점은 마을 안에 들어 갔을 때 갑자기 오는, 고적감이다. 산 언덕에서 마을을 위에서 내려다 본 후 꼬불꼬불 내려가 마을을 들어서면 어느새 출구가 콕, 막히는 느낌이다. 안으로 폭 파묻힌 마을의 모든 것이 다 작아서 더 그런 것 같다. 마을 앞 해송숲, 해수욕장, 민박집, 방파제, 닻을 맨 어선 등등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옛날 어느 남쪽 끝으로 유배돼온 선비, 그 심정이 잠깐 짚혀지는 듯 했다. |
우리가 흔히 문둥병이라고 하는 나병(소록도 병원에서는 이 병의 원인균을 발견한 노르웨이 의사 한센의 이름을 따 한센병이라불러달라고 했다) 환자를 격리, 치료하고 있는 섬이다. 이 병은 흔히 쉽게 옮겨지는 병으로 일반인들에게 잘못 알려져 왔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 하지만 특히 일제시대 때에 이곳에 격리되어 강제로 수용돼 있던 환자들에게 가해진 엄청난 박해와 폭력으로 인해 ‘작은 사슴 섬’이란 예쁜 이름답지 않게 소록도는 갖은 애환과 처절한 사연을 갖은 섬이 됐다. 당시 강제 노역을 견디다 못해 자살까지 하는 환자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조성한 6천여 평의 중앙공원에는 지금 황금편백, 실편백, 히말라야삼나무, 동백, 매화, 진달래, 영산홍 등등의 나무가 철마다 꽃을 피우며 환자들에게는 희망을, 관광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고 있다. 이청준은 소설 『당신들의 천국』으로 소설처럼 기막혔던 이 섬의 이야기를 밖으로 알렸고 이곳에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던 한하운 시인은 「전라도 길 -소록도 가는 길에」라는 시로 이 땅의 수많은 이들을 충격과 비애감으로 몸 떨게 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 가는 길 // 신을 벗으면 /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지금 소록도에는 약 750여 명의 한센병 환자들이 치료, 요양을 하고 있다. 병원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입·퇴원은 환자들의 자유의사에 따른다고 한다. 환자의 치료 및 의식주 비용은 나라에서 지원이 되며, 환자들 스스로 닭이나 돼지, 밭 농사, 조개나 굴 같은 것을 기르고 채취해 돈을 벌기도 한다. 녹동항에서 소록도 가는 배가 수시로 있다. 약 10분 소요. (배편 문의:녹동항 061-842-2266 / 병원 문의:국립소록도병원 061-844-0561~2, www.sorokdo.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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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에서 가장 큰 어항인 녹동앞 수협 공판장 전후 좌우에는 남해 청정 해역에서 갓잡아온 싱싱한 어류를 재료로 하는 음식점들이 많이 있다. 남도 손맛들이 하는 음식점들이라서 모두가 맛 있고 푸짐한 상차림으로 즐거운 곳들이다. 그중 특히 수협 뒤편에 자리잡고 있는 정의 복지리 맛을 잊을 수 없다. ‘진짜’ 갓잡아온 싱싱한 복어를 이용해서인지 여느 복집에서와는 다른 국물맛과 복 씹는 맛이 일품이다. 곁들여 나오는 10여 가지 반찬까지에도 골고루 손길을 보내다 보면 과식을 안 할 수가 없다. 1인분 1만원. ( 정 061-842-5050) <글·사진 편집실>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한반도의 모든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 강화도다. 그래서 강화도를 ‘작은 국토 박물관’이라고도 한다. 그 강화도의 역사를 정리해 전시물로 보여주는 곳이다. 시조 단군에 제사 지내는 참성단, 선사시대의 고인돌들, 삼국시대의 전략적 쟁탈지로서의 유적들, 고려시대 39년 동안 대몽 항쟁의 근거지, 숱한 호란 속에서 침탈 당하던 조선시대의 흔적들,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맞서 싸우던 근대의 전적지 등등 강화도(한반도)의 역사와 유물들이 1층과 2층에 나뉘어 전시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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