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황
2005년 06월 24일
밤새 고비사막을 넘어온 열차는 힘겨운 듯한 소리들을 내며 여명의 타오르는 사막의 지평선을 달린다.
검푸른 하늘은 지평선과 맞닿은 곳에서부터 붉은 기운을 스며내면서 밝아 오기 시작한다.
유원역 지역이 가까움을 말하려는 듯 서북쪽으로 산군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해가 솟아 오른 동쪽 지평선엔 붉은 여울 속에 자금 색 빛 광선들이 부챗살로 뻗쳐올라 하늘 위의 구름들을 뚫고 오른다.
서역의 아침이 밝기 시작한다. 모래 지평선만 남아 있는 이 곳에 태양은 그 어는 곳보다도 찬찬히 솟아오른다.
개인적으로 관계적 어려움을 겪고 서는 한 고비 넘긴 지금. ‘주는기쁨’이 마침 귀국 했다. 중국으로 나간다기에 서로 무작정 같이한 여행.
바다노을이 편의를 봐 줘 상해로 들어와 이틀 동안 좋은 대접받고, 란주로 비행기를 타고 와서 시내구경하고 이 곳 서역 일 번지 중국의 마지막 땅에 해당하는 돈황에 6월 24일 .. 오늘..
떠오르는 해를 사막 한 가운데서 독차지하며 들어섰다.
기차는 우리 두 사람을 류위안 역(돈황역)에 토해내고, 우린 배낭을 짊어지고 역 광장에서 호객중인 중바(25인승버스)에 올라탔다.
열차표는 돈황역 이지만 실제 역은 류위안 역이고 돈황까진 약 130Km를 더 가야한다. 한번 왔던 경험이 있는 나는 주는 기쁨님 보고 손님이 많은 차를 타자고 해서 버스에 올랐다.
점점 사람들은 빈자리를 채워가고 거의 다 찼을 무렵, ‘주는기쁨’ 님을 보자 아주 반가워하는 친구가 탔다. 일행은 4명. 광주 사는 한 의대생 친구들이다.
중국여행 주는 기쁨의 카페회원이고, 모두가 어찌나 반가운지 zz. 돈황까지 가는 길이 심심지 않다.
고비사막으로 들어서는 첫 오아시스. 란주를 지나 만리장성의 끝관문 가욕관을 지나 정주세력의 중국 땅을 지나 열사의 서역으로 나와 첫 길 떠남이 두려움 속에 만나는 오아시스 돈황..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하는 여정의 첫걸음. 많은 카라반과 구도자들이 떠나온 뒷그림자와 닥칠 곤경의 생각 속에 안식을 얻어야 했던 곳이리라.
이 곳의 역사는 오래 되었겠지만, 역사의 기록엔 당나라에서부터 유명해진다.
장건이 지나고, 법현 비구가 길 떠남을 시작하고, 현장이 지난 자리,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는 혜초 스님이 구법의 길을 가기 위해 사막으로 내디딘 발걸음의 땅.
또한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진정 당나라가 실크로드의 주인이 되게 한 정벌의 장군 .. 고구려 출신의 고선지 장군의 말발굽이 굉음을 일으킨 땅.
한 세력에겐 기쁨과 한 집단에겐 영욕의 슬픔이 엇갈리기 시작한 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누구의 과거의 흔적도 모래 속에 사라지고 떠오른 태양은 이글거리기 시작하여 40도의 열사의 땅으로 변해 가는 고비사막 한 가운데 신작로 길을 달려 돈황에 들어섰다.
생각보다 조금 빠르게 돈황 버스터미널에 우릴 옮겨 줘서 ‘주는기쁨’ 님과 난 비천(飛天)빈관에 짐을 풀고 광주 일행은 돈황을 구경하고 란주로 돌아가야 한다기에 시장으로 몰려가서 간단히 양고기에 면과 두부를 넣어 삶아 만든 육개장 같은 탕미엔으로 아점을 해결했다.
다들 맛있다 하니 소개한 나로선 고마운 일이다.
내 체면 때문에 맛있다 했을까? ㅎㅎ
바우처(차대절)하는 곳에서 같이 흥정해서 60위엔에 차를 대절해 광주일행들을 돈황 막고굴로 보냈다.
예전 당나라때 한 스님이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길 떠나는 카라반(낙타대상)에게 실크로드 여행길에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부처님 동굴과 불상을 조성해 一路平安(일로평안) 즉 가는 걸음걸음이 안녕 되고 복됨을 기원하라고 화주 하여 생기기 시작한 돈황 막고굴..... 당, 송, 원나라를 거치며 그 동굴의 수나, 불상들 .. 그 규모와 예술성에 대해선 세계최고의 만 불, 천불동이 되었던 것이다.
17호굴 에서는 이루 셀 수 없는 고문서(불교, 도교, 유교 및 각 인문학적 고서 및 자료)가 청나라 말에 우연찮게 도교학자 왕선생과 그 제자에 의해서 발견되어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일본, 미국 등에 의해서 수없이 약탈되어진 곳,
또한 실크로드 전역에 대승불교세력이 축출되고 이슬람 영향권으로 바뀌면서 수많은 벽화와 불상이 도륙되어진 곳, 그러나 아직도 대단한 위용과 문화재를 간직한 곳.
어째우리는 남을 내 속에 받아 들이 지 못하고 사는 지 모르겠다.
과연 인간 이전에 신이 있었고 사상이 잇었을까?
우리가 우릴 사랑하고 배려하지 않는다면 과연 행복이 있는 것 인가?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영생이니 뭐니 하면서 서로의 이해와 화합을 버리고 신에 대한 맹종으로 다른 세계를 다 깨버리는 그런 삶들이 결국 천국이나, 신에 세계에 들수 있슬까?
그건 그렇지 않다.
지금 천상락을 맛보고 스스로 도와 이땅에 이상세계를 실현코자 서로 손잡고 아름다움을 만들어 보는 자만이 천국은 자기 것이된다.
84년도 인가 연세대학교에서 세계신학대회가 열렸을 때 일화가 하나 생각난다.
유럽에서 명성있는 과학자가 평소에 다니는 교회 목사님께 일요예배가 끝나고 나서 조용히 찿아가 말하길,
"존경하는 목사님, 항상 좋은 설교를 해 주셔서 저의 삶이 윤택해지고 행복을 느끼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가 전공이 과학 쪼이라 그러는데, 평생 궁금증을 풀지 못하는 숙제가 있서 목사님께 여쭙니다.
갈릴레이 뉴우톤등 수많은 중세 이후의 과학자들이 종교재판등을 통해 이단으로 규명되어 처형되거나 스스로의 학문을 틀렸다고 발표를 해야 하는 일들이 있섰는데 지금의 학문에서는 그들이 다 옳았슴이 밝혀졌습니다.
그 분들은 지금 지옥에 잇습니까? 천국에 있습니까?
그것이 정말 궁금 합니다.
대답해 주십시요?""
이에 목사님은 당장 답을 못하고, 다음주 설교시간에 답을 해드린다고 했답니다.
3일 4일을 성경을 뒤지고 논서를 뒤져봐도 답을 찿을 수 없고, 답을 찿는 고민에 빠져 사는게 사는게 아닌 지경에 들게 되었습니다.
절집 식으로 보면 삼매에 들게 된겁니다.
일요일을 하루앞둔 밤에 잠깐 잠이 든사이 꿈을 꾸게됬는데 천국에 가게 되었답니다.
급한 마음에 천국에 중세이후의 저명 과학자들이 와서 사냐고 물으니 그곳에는 없다는 대답만 듣게 되었다.
다시 어렵게 지옥을 찿아가니, 이게 웬일 지옥이 천국보다 아름다이 변해 있더랍니다.
우선 다시 그들의 존재 여부를 급히 물으니 지옥에 살고 있스며, 지금 지옥을 행복의 세상으로 만들고자 지옥주민들과 일 나갔다고 대답 하더랍니다.
진정한 천국은 여러분 지금 현재의 마음에 있는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화합을 통해서 실천 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남아 있는 불상에서 느껴지는 웅장함과 섬세함, 그리고 색채의 화려함, 대단한 문화적 가치를 담고 지금도 버티고 있다.
특히 열반동의 부처님 열반상과 비통해 하는 제자들, 천룡팔부, 국왕대신, 짐승들의 모습이 어찌도 그렇게 리얼하게 표현 되어 있는지.
돈황 막고굴을 방문 하시면 절대 놓쳐서는 안되는 참관지역이라 할 수 있슬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 곳에서 발견된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프랑스에서 약탈해 간 덕에 전하고 있고, 참선 공부하는 스님들께 소중한 육조단경은 돈황본이 있음으로 해서 그 원형이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
돈황석굴 뒤로 너울너울 이어지는 모래산 들은 두려움 속에 신비를 드러내고 있는 곳이다.
광주일행을 보낸 우리는 숙소에서 씻고 빨래해 널고 간단히 시장구경하고 점심때라 또 먹고 나니 일행이 들어와 명사산을 가고자 한다. 같이 가고자 했던 일정이었지만 ‘주는기쁨’ 컨디션이 별로 인 것 같다고 해서 다시 광주 친구들만 점심먹인후 3路 버스에 태워 보내고 우린 돈황 박물관으로 향했다.
10위엔의 입장료가 아까울 만큼 유물이 없는, 또한 정리도 잘 안된 참 거시기 한 박물관이었다. 일본 중장년들은 3대의 관광버스에 패키지로 이 곳에 와서 관람한다.
현지 중국가이드들이 유창한 일본어로 설명을 해 대고, 평소 닫아 놓은 목공예 관까지 열어서 관람시킨다. 그 덕에 우리도 같이 봤다.
하여튼 국력은 크고 봐야 한다.
숙소로 돌아와 쉬고 있으니 친구들이 명사산(鳴沙山)을 다녀와 방으로 왔다.
명사산.... 즉 모래가 우는 산..
어째서 울까?
옛날에 이 곳 둔황은 사막이 아닌 옥토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하늘이 어두워지고 바람이 거세게 불더니 하늘 가득 모래가 날아와 이 곳을 덮기 시작해 옥토는 어디 간데없고 온통 모래사막으로 변했다 한다.
그 때 그 모래 속에 갇혀서 숨진 이들이 해질 녘이 되면 아우성을 쳐서 모래산인 명사산이 운다고 한다.
헌데 이 곳 명사산에는 오색사가 있습니다. 다섯 색깔의 모래가 있다는 것인데 와보시면 확인할 수 있고요.... 정말로, 이와 같이 여러 질의 모래가 한 낮에 햇볕을 받아 뜨거워져 있다가 해질 녘이면 냉각되면서 입자에 따라 냉각속도의 차이가 나고 그에 의해서 모래가 흐르기 시작하고 이 때 서로 부딪히는 작은 소리에 의해서 모래가 우는 소리가 난다고 하네요. 그래도 전 첫 번째 전설의 얘기가 더 가슴을 찡하게 하네요.
이 명사산엔 월아천이라는 마르지 않으며, 움직이는 모래산 한 가운데에서도 한번의 덮임도 없이 수없는 세월을 의연히 지키고 있는 오아시스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미인의 살포시 감은 눈썹과 같은 모습의 아름다운 오아시스죠.
이 곳이 월아천이라고 지명을 얻게 된 계기는 옥토였던 이 땅이 하루아침에 사막으로 변해 버리고 수많은 사람이 모래 속에 파묻혀 죽고 산 사람은 마실 물조차 없어 사경을 헤매는 것을 본 월아 선녀가 너무나 가슴이 아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는데 이 눈물이 모이고 모여 생긴 오아시스랍니다.
중생을 사랑한 월아 선녀의 고귀한 아름다운 마음이 외부의 험한 위험 속에서도 지 금까지 온전히 전해 오고 있는 모습이지요.
그래서인지 이곳 돈황에는 월아 선녀의 형상과 말씀들이 많은 상호와 그림, 조소에 남아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광주 일행들은 차시간이 바빠 터미널에서 버스를 태워 ‘류위엔’ 역으로 보내고 우린 야시장으로 옮겨 양내장 볶음과 캐밥과 비슷한 빵으로 참으로 맛있는 저녁을 해결하고 야시장에 나와 있는 각종 공예품을 찬찬히 감상하며 숙소로 돌아와 포도주 한 잔씩에 피로를 풀고 잠자리를 청했습니다.
하 미
2005년 6월 25일
우리의 이번 여행은 생각을 비우기 위한 여행이다.
관광지를 죽기 살기로 가는 일은 없기로 했다. 그 대신 되도록 낮 시간에 이동해 눈으로라도 예전 실크로드 길을 떠났던 그들의 여정을 조금이라도 느껴보기로 했다. 오늘의 여정은 하미다.
하미과가 유명한 하미... 황제에게 진상되었다는 하미과.. 어제도 우린 하미과를 사서 먹었다. 지금 우리나라 멜론과 같은 종류라 할 수 있는 하미과.. 잘 익은 하미과의 맛은 그 어느 과일의 맛과 비교할 수 없는 맛이다.
볶음 면과 콩물 등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8시에 버스를 탔다.
되도록 앞자리를 잡아 끝없는 사막 길로 접어들었다.
류위엔역으로 가는 길을 한참 달려 사거리가 나오니 좌회전을 해서 본격적으로 신장 북로를 접어든다.
‘돌아오지 않는다’ 는 뜻의 타클라마칸 사막을 돌아가는 길 그렇다고 사막이 아니지도 않는 길.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운데 두고 실크로드 북로와 남로로 나눠진다.
남로는 바로 인접한 남쪽에 중국 최고의 산맥 6~7000대의 설산 군이 모여서 파미르 고원 입구까지 길게 늘어선 곤륜산맥이 있다.
죽음의 사막과 황막하고 고소가 있는 곤륜산맥길... 이 곳이 실크로드 남로, 신장 남로 이다.
암만해도 이 곳은 자연이 생을 앗아갈 위험이 더 했으리라. 그래서인지 많은 역사적인 인물들은 이 길보다 북로로 이동한 흔적이 많다. 길은 더 멀지만, 그 들은 우회해서 갔다. 장건도.. 현장법사도...
사방팔방 보이는 것은 지평선에 모래, 바람뿐이다. 예전에 이 곳을 지난 이도 위대했지만, 이 사막에 길을 내어 포장한 현대인들도 보통은 아니다. 다들 이유야 있었겠지만...
모든 승객들이 끝없는 지평선에 시간을 잃은 듯 잠들어 간다. 에어컨을 작동했다고 하지만 차안은 사막의 열기로 더워지기 시작하고, 끝이 없는 공간을 달리는 사람들은 맑은 정신을 잃은 듯 졸음에 지쳐 하나, 둘 잠들어 가고... 모래섬 넘어 아련한 빈 공간은 검은 빛을 띠며 바다라는 느낌이 들게 한다. 이 것이 신기루 인 듯하다. 물 없는 사막.. 목이 타 들어가고, 오직 물이 흐르는 푸른 초원이 그리운 사막 속의 나그네가 그리워하는 곳.. 그 마음과 착시현상이 맞닿은 자리에 호수나 바다가 보일 수밖에!!!!!!
운전하는 기사도 깜박깜박 조는 듯....
“ 이 길을 법현 비구, 현장 법사, 혜초 스님은 구법을 위해 미지의 두려움 속으로 걸어갔고, 수많은 페르시안, 위구르 카라반들은 낙타를 거느리고 죽음을 무릅쓰고 신기루 속으로 스며들고, 고선지장군, 징기스칸, 쿠빌라이칸 등 많은 정복자는 말발굽을 모래 폭풍 속으로 달렸을 것이다.” 대단한 서사시다.... 현대화된 차량에 몸을 싣고도 이렇게 엄두가 안날 진데, 그 시대, 그 사람들...
“법을 구하는 사상이 얼마나 위대했기에. 유통의 이익이 얼마나 컸기에... 일 길을 정복함이 얼마나 소중했기에... 그들은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죽음의 땅이 분명했을 이 길을 갔을까? ” 삼가 그 들의 길과 삶을 찬탄 추모하며.....
오후 늦게 포풀러 숲 가득한 하미의 외곽에 들어선다.
포풀러 숲... 이 숲이 사막에서 얼마나 반가운 것인지 모른다. 예전의 이 길을 간 고인들은 정말 뛸 듯이 반가웠을 것이 분명하다.
포풀러 숲이 있다는 것은 물이 있음이요, 사람이 있음이다.
사람이 있으면 양을 키우고, 곡식을 거둬들이고 있음이다.
곧, 생명을 안전히 연장시킬 수 잇는 희망이다.
‘포풀러’ 라는 나무는 속성 수이다. 그래서 척박한 땅에서 적은 물로 얼른 키워 집을 짓는 목재, 가구의 소재, 땔감. 모든 생활의 중요재료로 쓰임이 되는 나무이다. 또한 집과 생활공간에 은혜로운 그늘을 만들어 준다.
사막지대는 건조해서 고온이라도 그늘만 지면 한결 시원하다. 이러한 포풀러 숲이 사막을 지나온 지친 나그네에게는 생명 일 것이다.
차로 달려온 나에게도 이렇게 반가운데 언젠가 내 개인 공간이 생긴다면 한 그루쯤 심어 두고 싶다.
고비 사막과 타클라마칸사막, 그리고 내몽골 지역에서 시작한 황사는 중국 동부 주요 도시와 시골을 앞이 안보이도록 덮고서는 황해를 건너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을 강습한다. 우리나라만 해도 거의 1조원대의 경제적 손실을 매년 입힌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이 곳에 조림을 위해 많은 자금과 임업인력을 지원하고 있다.. 하여튼 인공 조림지역과 예전부터 조성된 포풀러 숲을 지나 차는 하미 시내로 접어들어 터미널에 도착했다. 너무나 지쳐버린 우린 늦은 시간에 대충 점심을 사먹고 (맛은 좋았다) 귀찮은 발걸음에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으니 시장을 뒤로하고 있는 형편없는 시설의 숙소였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에어컨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수룩하게 오후시간을 보내고 땅거미 지는 저녁나절 시가지산보를 나와 인민공원 쪽으로 해서 기차역 주변을 돌아 야시장으로 갔다.
돈황과는 다르게 위구르인이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도 한족이 중심이며 많다. 중국정부의 한족이주정책의 성공적 모습일까?
숙소 근처 야시장에 와 보니 마침 화덕에 양꼬치를 굽는 노점이 있다.
얼씨구나 하고는 양꼬치와 하미과를 사다가 시원한 맥주 한 잔씩을 곁들여서 저녁을 해결했다.
숯불에 굽는 것과 다르게 화덕에 매달아 구운 양꼬치는 담백하니 그 맛이 그만이었다.
이렇게 우린 하미의 밤을 마무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