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2. 우리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3. 삶의 원동력
4.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어졌다.
5.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6. 삶은 일시적인 것이다.
7. 모든 것이 존재하는 이유
성경/ 골로새서 1장 16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삶의 목적이란 우리 개인의 성취감, 마음의 평안과 행복감 이상의 것이며, 가족과 직업 그리고 우리의 가장 큰 꿈과 야망보다도 휠씬 더 큰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이유를 알고 싶다면, 모든 생각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의 목적에 의해서 그분의 목적을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혼란 하는 이유는 자기 중심적인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 가? 나의 목표, 나의 야망, 꿈은 무엇인가?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춘다면 결코 삶의 목적을 찾을 수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창조하지 않았기에 우리가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지 알길이 없다. 삶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고, 그것을 이해하기 전에는 결코 삶을 이해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리는 일이고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되어 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우리를 위해 하나님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삶이란 하나님이 당신의 목적에 따라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이지, 우리의 목적을 위해 그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자신에 대한 집착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께 집중함은 탁 트인 광대하고 자유로운 삶으로 우리를 이끈다 ( 롬8:6 )
자신을 위한 지침서들이 많이 있다. 당신의 꿈을 생각하라, 가치관, 목표를 설정하라, 높은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믿어라 등등
그러나 성공한다는 것과 삶의 목적을 충족시키는 것은 절대 같지 않다. 개인적인 목표를 모두 달성하고 세상의 기준에 따라 엄청난 성공을 이룬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놓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에 맞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계시를 통하여 그것을 알 수 있다.
기도 /
1. 내 자신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된 존재임을 알게 하소 서
2. 부모님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제2과
본문/ 이사야 44:2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우리의 출생은 실수도 불운도 아니며, 우리의 삶 또한 우연히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혹 부모님은 계획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계획하셨다.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예정되어 있던 일이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부모님이 우리라는 생명체를 만들기 휠씬 이전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마음 속에 품으셨고, 또한 우리의 존재를 제일 먼저 생각하기 시작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신체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선택하여 만드셨다. 우리가 속한 인종, 피부색, 머리 그리고 우리가 작고 있는 모든 특징들을 숙고하여 선택하셨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맞춤 제작하셨다. 그러니까 우리의 재능과 독특한 성격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결정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시편139:13, 16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분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되었나이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서 태어날 것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거주할 곳까지 계획해 놓으셨다. 우리가 이 나라에서 태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아주 작은 부분조차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계획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으로부터 세계 모든 인류를 만들어 땅 위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살 시대와 지역의 경계를 정해 주셨습니다. (행17:26 쉬운성경) 즉 우리 삶의 어떤 부분도 합당한 이유와 목적이 있다는 말씀이다.
부적절한 부모는 있어도 부적절한 자식은 없다. 많은 아이들이 부모의 계획과 상관없이 태어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목적 업이 태어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와 죄까지도 모두 고려하여 계획을 세우신다. 이렇게 계획하고 만드신 동기는 바로 그분의 사랑이다.
그가 땅의 기반을 마련하기 휠씬 이전에 그는 우리를 계획하셨고 우리를 그의 사랑의 대상으로 정해놓으셨다 (엡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무작정 움직이지 않으신다. 하나니은 모든 것을 정확하게 계획하셨다. 물리학자, 생물학자 그리고 그 외 다른 과학자들이 우주를 연구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들이 우리의 존재에 꼭 맞도록 얼마나 독특하게 만들어졌는지 감탄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왜 이 모든 일을 하셨을까? 왜 우리를 위하여 우주를 만드는 수고를 하셨을까? 그분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일4:8) 그러기에 근본적으로 그분을 신뢰할 만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특별한 대상으로 만들어졌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 위해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는 그 진리 위에 우리의 삶을 만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 모두는 우연의 산물이 될 것이며, 우주의 천문학적 경우의 수 가운데 하나로 남을 것이다. 그럴 경우 삶에는 어떠한 목적도, 의미도, 소중함도 없으며, 옳고 그름도 없고, 지구상에서의 짧은 삶 이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우리를 만든 이유가 있으며, 우리의 삶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시작할 때만이 우리 삶 속에서 그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
결론
나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도전 : 하나님이 나를 독특하게 만드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성격, 배경 그리고 외모 가 운데 내가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제 3과
본문/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 사 26:3 )
또 살펴보니, 모든 수고와 성취는 이웃에 대한 시기심에서 발생하였다 (전4:4 쉬운성경)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에 이끌려 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 빗나간 방향에 의해 이끌림 받는 삶
1. 많은 사람들이 죄의식에 의해 끌려 다닌다.
기억에 의해 조작된다. 과거가 미래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둔다.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성공을 파괴함으로써 스스로를 처벌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과거로 인해 제한 받지 않는다. 과거 살인자인 모세를 지도자로 바꾸었다. 겁쟁이 기드온을 용감한 영웅으로 바꾸셨다. 또한 우리의 남은 삶을 통해서도 엄청난 일들을 하실 수가 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 )
2. 원한과 분노의 쓴뿌리를 씹으며 살아간다.
상처 입은 곳에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원한을 품고 사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분노를 나타낸다. 침묵하며 분노를 내면화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감정을 폭발시켜 다른 사람들에게 그 분노를 쏟아 붓기도 한다. 분노할 때 우리는 우리가 분개하고 있는 그 사람보다 우리 자신을 더 아프게 한다.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은 이미 자기가 한 일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는 과거를 붙잡고 계속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기억하라 우리가 원한을 품고 상처를 계속 싸매고 있는 한 우리의 상처는 계속 상처로 남고, 그 상처는 결코 아물 수 없다. 우리 자신을 위하는 가장 좋은 길은 과거에서 교훈만 얻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욥5:2)
3. 두려움에 이끌려 살아간다.
두려움에 의해 이끌려서 사는 사람들은 좋은 기회를 놓친다. 이는 그들이 모험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안전한 방향으로, 위험을 피하고 현재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다.
두려움은 스스로를 가둬놓는 감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감옥은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막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과 사랑이라는 무기로 반드시 맞서 싸워야 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 4:18)
4. 물질에 이끌려 살아간다.
무언가를 획득하고자 하는 욕구가 삶의 목표가 된다. 항상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이 욕구는 더 많이 가지면 더 행복해지고, 더 중요한 사람이 되며 더 안전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온다. 하지만 이 세가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소유물은 일시적인 행복만을 준다. 사물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그것에 싫증을 느끼고 보다 새롭고 더 크고 나은 것을 원하게 된다.
자아가치 ( self-worth )와 소유가치 (net- worth )는 동일하지 않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돈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는 돈이 많을수록 더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부는 통제할 수 없는 요인들로 한순간에 잃을 수 있다. 진정한 안전은 그 어느 누구와도 앗아갈 수 없는 것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바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이다.
5. 다른 사람들의 인정받기 위해 살아간다.
사람들은 부모나 배우자, 혹은 자식이나 스승 또는 친구들 그리고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기대가 그들의 삶을 주관하도록 내버려 둔다. 성인이 된 후에도 도저히 만족하지 않는 부모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주변의 압력에 끌려 간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항상 걱정한다. 불행하게도 군중을 따라가는 사람은 군중 속을 헤매며 길을 잃게 된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실패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통제받는 것은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놓치게 만드는 길이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 마6:24)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대해 가지고 계시는 목적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목적을 모르는 삶을 보상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성공, 부나 명서 그리고 쾌락도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목적 없이 사는 삶은 의미 없는 행동, 방향없는 활동, 그리고 이유없는 행사들의 끊임없는 연속밖에는 될 수 없다. 목적 없이 사는 삶은 하찮은 삶이요, 무의미한 삶이다.
. 목적이 이끄는 삶에 따르는 유익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 때 5가지 유익이 있다.
1. 목적을 아는 것은 삶에 의미를 부여해준다.
인간은 삶의 의미를 갖고 살도록 만들어졌다. 삶의 의미가 있다면 인간은 거의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지만, 반대로 삶의 의미가 없으면 그 어떤 것도 참을 수 없다. 하나님이 없다면 삶에는 어떤 목적도 있을 수 없고, 목적이 없는 삶은 의미가 없다. 의미가 없다면 삶의 중요함이나 소망도 없다.
이사야는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사49:4 )라고 말했고, 욥은 나의 삶은 절망적인 나날들의 연속이다 (욥7:6)라고 고백하고 있다. 욥은 이 외에도 나는 포기한다. 사는 것이 지겹다. 그냥 나를 혼자 두라. 내 삶은 말도 안된다 (욥7:16)라고 절규하기도 했다. 가장 큰 비극은 죽음이 아니라 목적 없는 삶이다.
소망은 우리의 삶에 공기와 물만큼 중요하다. 삶의 역경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 소망이 필요하다. 버니 시걸 박사는 암환자들에게 100세까지 살고 싶습니까?라는 하면 삶의 목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는 사람들은 네라고 대답을 했고, 이들이 생존할 확률이 가장 높다는 것이다. 소망은 목적을 갖는 것에서부터 온다.
지금 절망을 느끼고 있다면 조금만 기다리라. 목적을 가지고 삼에 임하기 시작하는 순간 당신의 삶에 멋진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렘29:11)
2. 목적을 알면 우리의 삶은 단순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명확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적은 꼭 필요한 활동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일을 하기 전에 간단히 이 일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될까?라고 자문하면 된다.
명확한 목적이 없으면 우리는 왜 그런 결정을 내렸으며, 어떻게 시간을 투자하고 자원을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근거를 잃게 된다. 그저 상황, 압력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기분에 따라 결정을 내릴 뿐이다. 자신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하고 또 이 때문에 스트레스, 피로 그리고 관계에 있어서 갈등을 겪게 된다.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해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만을 행할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에 만약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면 우리는 분명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보다 휠씬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 혹은 텔레비젼을 너무 많이 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은 더 단순한 삶의 방식과 분별있는 계획을 갖게 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은 공허한 삶이다. 평범하고 단순한 삶이 풍성한 삶이다 ( 잠13:7) 또 이러한 삶이 마음에 평화를 준다. 주님, 당신은 목적을 굳게 지키고 당신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완전한 평화를 주십니다 ( 사 26:3 )
3. 목적을 알면 초점을 맞춘 삶을 살게 된다.
우리의 노력과 에너지를 중요한 것에 집중하게 해준다. 우리가 선택적으로 살게 되기 때문에 모든 것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사소한 것들을 추구한다. 많은 사람들은 목적없는 산만함의 삶이 많다. 명확한 목적 업이 우리는 계속 방향을 전환하고 직업, 관계, 교회 그리고 그 외의 외부적인 것들을 끊임없이 바꾼다. 그것이 우리 마음의 혼란스러움을 안정시켜주고 공허감을 채워주기 바란다. 우리는 이번엔 다를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그 기대가 초점과 목적의 결여라는 진정한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엡5:17)초점을 맞추는 것의 힘은 빛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넓게 흩어진 빛은 힘이나 영향력이 거의 없다. 하지만 빛의 초점을 맞추면 에너지를 모을 수 있다. 돋보기를 통해서 태양빛을 모아 잔디나 종이를 태울 수 있다. 레이저 광선처럼 빛이 더 강하게 한 초점으로 모아지면 강철도 뚫을 수 있다.
목적이 있고 초점이 맞춰진 삶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손에서 받은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선한 뜻을 능력있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예: 사도바울- 빈손으로 로마제국 기독교를 전파시킴. 그의 비밀은 초점이 맞춰진 삶이었다. 나는 나의 모든 에너지를 이 한가지에 집중시키고 있다. 과거를 잊고 미래를 기대한다 (빌3:13)
삶이 영향력을 갖길 원한다면 삶의 초점을 맞추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을 원하는 사람들은 그 목표를 계속 바라보자 (빌3:15)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4. 목적을 알 때 삶의 동기가 유발된다.
목적은 열정을 낳는다. 뚜렷한 목적만큼 힘이 되는 것은 없다. 반대로 목적이 없으면 열정은 소실된다. 의미없는 별 것 아닌 일들이 우리를 지치게 하고, 우리의 기운을 빼앗으며, 기쁨을 앗아간다.
5. 목적을 앎으로써 영생을 준비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영원한 유산을 만드는데 인생을 보낸다. 그들은 죽은 후에 기억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삶에 대해 어떻게 애기 하느냐가 아니고 하나님 우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평생 이룩한 것 이상으로 이룩한 것이고, 기록은 깨어지며, 명성은 사라지고 공로는 잊혀진 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다.
지구상에 유산을 남기기 위해 사는 것은 근시안적인 목표일뿐이다. 영원한 유산을 남기는 삶을 사는 것이 시간을 더 유용하게 쓰는 방법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기억되기 위해 이땅에 보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영생을 준비하기 위해서 이 땅에 보내졌다.
기억하라,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이다. ..... 그렇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 자기 삶에 대한 셈을 해야 할 것이다. (롬 14:10, 12 )
그러나 다행히도 하나님은 우리가 이 시험을 통과하기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물으실 질문을 미리 가르쳐 주셨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 두가지 중요한 질문을 하실 것임을 알 수 있다.
첫째, 너는 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무엇을 하였느냐? 그분은 우리의 종교적 배경이나 교리에 대한 생각을 묻지 않으실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을 받아들였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을 배웠느냐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내가 너에게 준 것들로 너는 무엇을 했느냐?이다. 너는 삶을 통해 무엇을 했느냐? 내가 준 은사와 재능, 기회, 에너지, 인간관계 그리고 자원들로 무엇을 했느냐? 스스로를 위해 썼느냐 ? 아니면 내가 너를 창조한 목적을 위해 사용했느냐?
첫 번째 질문은 우리가 여행을 어디에서 보낼지를 결정해 줄것이고, 두 번째 질문은 우리가 영생에서 무엇을 할지를 결정해 줄 것이다.
결론. 내 삶의 목적에 대하여
생각할 점: 목적을 따라 사는 것은 평화로 가는 길이다.
외울말씀 :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 함이니이다 ( 26:3)
삶으로 떠나는 질문: 가족과 친구들은 내 삶의 원동력을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나는 진정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제4과
본문/ 전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현재의 삶이 존재의 전부는 아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실제의 공연을 위한 최종 연습에 불과 하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보내고 있는 시간보다 휠씬 긴 시간, 즉 영원한 시간을 이땅을 떠난 뒤에 살게 될 것이다. 지구 위에서 산다는 것은 영원한 삶을 위한 중간지점, 예비학교이며, 준비과정이다.
그래서 사람들도 죽음을 항상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우리가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심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고후5장에서는 인간의 육체를 장막이라고 부른다. 미래의 몸은 집이라고 부른다.
이 땅에서의 삶에는 많은 선택사항들이 있지만 영생이 제시하는 것은 두가지 뿐이다. 천국과 지옥. 우리가 지구상에서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우리가 어디에서 영생을 보낼 것인지가 결정된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사는 것이 존재의 끝이 아니고 그 후의 영원이라는 것이 있으며, 지금의 삶이 영생을 위한 준비과정이란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다르게 살기 시작할 것이다. 영원의 빛 가운데서 살아야 한다. 이러한 깨달음을 갖게 되면 지금하고 있는 많은 활동과 멋지고 대단했던 목표 그리고 중요하게 여기던 많은 문제들이 한 순간에 의미없고 사소하며 가치없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 외의 다른 모든 것은 더 작아 보일 것이다.
영원의 빛 가운데 살면 우리의 가치관이 변한다. 시간과 돈을 더 현명하게 쓰게 되고, 명예와 부 또는 일의 성취감이나 쾌락보다 인간 관계와 인격에 더 많은 비중을 두게 된다.
나는 한때 이 모든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해 주신 것 때문에 그것들을 아무 쓸모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빌3:7)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현재 이 땅에서의 삶이 삶의 전부라면 나는 이제부터 인생을 즐기라고 제안할 것이다. 하지만 죽음이 존재의 끝이 아니라 영생으로의 전환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모든 행위에는 영원한 결과가 따른 다. 우리 삶에서 이루어진 모든 행동이 영생에서도 계속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현재의 삶에서 가장 파괴적인 면은 근시안적인 사고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생에 이르도록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머리 속에 계속적으로 영생에 대한 그림을 그려야 하고, 그 소중함과 가치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우리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보낸 9개월의 시간이 그 자체로 끝이 아닌 또 다른 삶을 위한 준비였듯이, 현재의 삶은 다름 삶을 위한 준비 과정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바고 그것이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니다. 우리는 하늘에 있는 우리의 영원한 집을 기대하고 있다 (히13:14)
이 땅에서의 삶은 다음 삶의 운명을 결정한다. 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여기고 사는 것은 지혜로운 삶의 모습이다. 우리의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 것이 매일의 일이 되어야 한다라고 매튜헨리는 말했다.
생각할점: 지금 이 순간의 삼 그 이상의 것이 있다.
외울점 :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 2:17)
삶으로 떠나는 질문 : 나는 영원을 위해 지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그만 두어야 할 일은 무엇 이고 오늘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제5과
말씀/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약4:14)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우리의 생각대로 바라본다 ( 아나이스 닌 )
삶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우리의 삶을 만든다. 삶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결정된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신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십니까?라고 묻는 것이다.
예: 삶은 회전 목마다.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고 계속 돌기만 한다
밖으로 드러내어 말하지 않아도 당신이 내면에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모습은 당신의 삶에 생각보다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여 당신이 기대하고 있는 것, 가치관, 인간관계, 목표, 그리고 우선순위를 결정하게 된다.
예: 당신이 삶이 파티라고 당신의 최우선 가치관은 분명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될 것이고, 삶을 경주로 본다면 속도를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시간에 쫓겨서 살게 될 것이다. 삶을 마라톤이라고 본다면 인내에 높은 가치를 둘 것이고, 삶을 게임이라 생각하면 승리를 가장 중요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삶에 대한 사고가 하나님이 당신을 만든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서 당신은 틀에 박힌 사고를 버리고, 성경에 근거한 삶의 모습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성경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삶에 대한 모습을 세가지 비유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삶은 시험이고, 위탁받은 것이며, 임시로 맡겨진 임무다. 이 3가지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 삶의 기초다.
1. 이 땅에서의 삶은 시험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인격, 믿음, 복종, 사랑, 투명성 그리고 충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시험하신다. 시험, 유혹, 연단, 테스트와 같은 단어들이 200번 이상 등장한다. 예: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 아담과 하와는 유혹을 이기는 시험 통과 못함, 다윗도 여러 시험에 실패. 하지만 요셉, 룻, 에스더, 다니엘과 같이 시험을 통과한 이들도 많이 있다.
인격은 시험에 의해서 개발되도 다듬어 진다. 삶의 모든 영역은 시험이고 우리는 함상 시험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 문제, 성공, 갈등, 불의, 병, 그리고 심지어 날씨에까지 반응하는 우리를 항상 지켜 보고 계신다.
아주 중요한 시험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임재를 느끼지 못할 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것이다. "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 (대하32:31)
히스기야는 평소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해왔지만 하나님은 그의 인생중 가장 중요한 시기에 홀로 두셨고, 그 기간 동안 그의 인격을 시험하시고 약점이 무엇인지 나타내심으로 더 많은 책임들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를 단련시켰다.
삶이 시험이란 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삶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가장 작은 사건도 우리 인격에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복된 소식은 하나님이 삶의 모든 시험을 우리가 통과하길 원하시고, 우리가 직면하는 시험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 이상이 되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름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10:13)
야고보는 "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 ( 약1:12)
2. 이 땅에서의 삶은 위탁받은 것이다.
이 땅에서의 시간, 에너지, 지적인 능력, 기회, 관계, 자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돌보고 관리하도록 잠시 맡기신 선물이다. 이 땅의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고, 우리는 하나님이 것들의 청지기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24:1)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이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는 하나님의 재산이었고, 우리가 죽고 나면 하나님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실 것이다. 즉 우리는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가 소유한 것을 잠시 동안 즐기고 사용할 뿐이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피조물들의 관리를 맡기셨고, 하나님의 재산을 맡은 청지기로 임명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8)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위탁물답게 다루어야 한다. 성경은 당신이 가진 것중 하나님이 주시기 않은 것이 있는가? 그런데 당신이 가진 것이 모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면, 스스로 이루지 않은 것들에 대해 왜 자랑을 하는가? (고전4:7 NLT)
예: 다른 별장 쓰도록 빌려줌- 마음대로, 기쁘게 사용 그러나 폐가 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했다.
우리는 소유하지 않으면 돌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에 나는 최선을 다해 그것들을 돌보아야 한다라는 더 높은 기준을 두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청지기는 신뢰할 만해야 하고, 스스로 그렇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고전 4:2, AMP)
마25:14-29에서 주인이 하인들에게 재산관리를 맡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각 하인들의 책임을 평가하고 그에 따라 상을 주며 말한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 마 25:21 )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들을 얼마나 잘 다루었는지 평가 받을 것이고, 그에 따라 상급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 아주 작은 집안 일까지도 영원히 영향을 미칠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충성스러운 수탁자로서 잘 돌보면 하나님은 영원한 세계에서 세가지 상을 내리실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칭찬이다. 둘째는, 영원한 세계에서 보다 많은 책임을 맡게 될 것이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기쁨의 자리에 함께하게 될 것이다. 와서 네 주인의 즐거움을 같이 나누자
돈은 한편으로 시험인 동시에 하나님이 맡기신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신뢰할 만한지를 시험하시기 위해 우리가 돈을 쓰는 방법을 지켜 보신다. 성경은 만일 네가 세상의 부를 관리하는 일에서조차 믿음을 얻지 못한다면, 하늘의 진정한 부를 누가 너에게 맡기겠느냐 ( 눅16: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하나님은 내가 돈을 어떻게 쓰는 지와 나의 영적인 삶의 질과는 직접적인 상관 관계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내다 돈( 세상의 부)을 어떻게 관리하는 지에 따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복( 진정한 부)의 관리를 맡기실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당신이 돈을 관리하는 방법이 하나님이 당신의 삶을 통해 더 많은 일들을 하시려는 것을 막고 있는가? 하나님이 당신에게 영적인 부을 맡기실 만한가?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눅 12:48 )
삶은 시험이고 위탁받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실 수록 그분은 우리에게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신다.
결론
생각할점/ 삶은 시험이고 위탁받은 것이다.
암송구절/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눅 16:10)
적용하기/ 최근에 나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라고 생각되는 일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제6과
삶은 일시적인 것이다.
본문/
주님, 내가 이 땅에서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짧은 지 상기시켜 주십시오. 내가 지낼 날들이 정해져 있고, 그 날들도 내 곁에서 빨리 사라지고 있음을 계속 생각하게 해 주십시오
( 시 39:4, NLT)
나는 이 땅에 잠시 동안만 있습니다 ( 시 119:19 NEV )
지구상에서의 삶은 일시적인 것이다. 성경에서는 안개, 한번 내 쉬는 숨, 그리고 한 줄기 연기 등 이 땅에서의 삶이 짧고, 일시적이며, 순간적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한 많은 비유가 있다.
분명코 어제 태어난 것 같은 느낌,....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은 그림자만큼이나 순간적이다 (욥8:9, NLT)
삶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두가지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첫째는 영생에 비해 이 땅에서의 삶은 지극히 짧다는 것이며, 둘째는 지구라는 곳은 우리가 임시로 거주하는 장소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그리 오래 머무를 것이 아니기에 지나친 애착을 갖지 말고, 우리도 하나님처럼 이 세상에서의 삶을 바라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다윗은 주여 내가 이 땅에서 보낼 시간이 얼마나 짧은 지 기억하게 해 주십시오. 나는 아주 잠시동안 이곳에 있는 것임을 알게 해주십시오 ( 시39:4 LB)라고 기도했다.
성경은 반복해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외국에서 잠시 사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곳은 우리의 영원한 집 또는 최종 목적지가 아니고 잠시 지구를 지나가며 방문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순례자, 외국인, 방문객, 손냄, 여행자등의 어휘를 사용해서 세상에서의 짧은 시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 시 119:19)라고 말했고, 베드로는 ....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 벧전 1:17)고 말했다.
우리의 정체성은 영생에 있고 우리의 모국은 천국이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소유와 집착을 버릴 수 있다. 하나님은 지금 이곳을 위해 사는 것, 즉 세상이 기준이 되고, 세상의 일이 우선순위인 삶의 방식에 대하여 즉 세상의 가치관과 유혹에 빠지는 것을 영적 간음이라고 부르신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약 4:4)
만약에 죄에 빠져있는 나라에 대사로 임명을 받았는다고 가정하자.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관습과 문화에 적응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과 접촉하고 관계를 맺어야 한다. 하지만 그 나라라 편하게 느껴지고, 그 나라와 사랑에 빠지며, 모국 보다 우선시하게 되고, 충성심과 헌신의 대상이 변한다면 이것은 배신자이다.
성경은 울기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고후 5:20)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슬픈 사실은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들의 왕과 왕국을 배신했다는 것이다.
이 땅이 우리의 궁극적인 집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왜 어려움과 슬픔 그리고 거절을 경험하게 되는 지,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요16:33, 16:20, 15:18-19) 또한 왜 때로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지, 왜 기도에 응답받지 못하는지, 왜 어떤 상황들은 불공평해 보이는지에 대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 세상이 삶의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하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살에서 상당한 정도의 불만 요소를 갖게 하신다. 이 세상에서 채워질 수 없는 갈망을 느끼게 하신다. 이곳이 우리의 영원한 가정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일시적인 것이라는 깨달음은 우리의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삶에서 무언가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일시적인 것이 아닌 영원한 가치가 근본적인 기분이 될 것이다. cs루이스는 영원하지 않은 것은 영원히 무용지물이다라고 했다. 성경은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후4:18)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위해 갖고 계신 목표가 세상이 정의하고 있는 물질적인 풍요나 통속적인 성공과는 관계가 없다. 이 세상의 일시적인 성공에 초점을 맞춰서는 안된다. (벧전2:21)
바울은 신실했지만 결국 감옥에 갇혔다. 세례요한은 신실했지만 처형당했다. 수백만 명의 신실한 사람들이 순교를 했고, 모든 것을 잃었으며,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이 삶을 마감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의 삶의 끝은 끝이 아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가장 위대한 믿음의 영웅은 번영, 성고, 그리고 이 세상의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아니다. 이 땅에서의 삶을 일시적인 것으로 여기고, 영생에서의 약속된 상급을 기다리며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긴 사람들이다. ( 히11:13, 16)
이 세상에서 우리가 숨쉬는 시간이 우리인생 스토리의 완결편이 아니며, 스토리의 나머지 부분들은 천국에 가서야 채울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려는 믿음이 필요하다.
예화:
미국 대통령과 같을 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온 은퇴한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환호하는 환영인파들, 군악대, 빨간 양탄자 그리고 언론이 대통령을 뜨겁게 맞이했다. 하지만 그 선교사가 배에서 내릴 때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이 때문에 그는 자기 연민과 분노를 느끼며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때 하나님은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아직 집에 온 것이 아니지 않니 ?
삶이 힘들어지고, 의심의 구름이 몰려오면,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과연가치가 있을까 고민하게 될 때 우리는 아직 집에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죽음이란 우리가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집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정리/
생각할 점/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다.
암송구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후 4:18)
삶으로 떠나는 질문/ 이 땅에서의 삶이 일시적인 과제라는 사실을 알 때 내 삶의 방식은 어떻게 달라져야만 하는 가?
제7과
본문/ 롬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잠 16:4 주는 모든 것을 그의 목적을 위해 만드셨다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 우주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의 영광을 위해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어떠한 모양으로든 그분의 영광을 나타낸다.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생물체에서부터 거대한 은하수에 이르기까지, 태양과 별 바람과 계절 등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자의 영광을 나타낸다.
그래서 성경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시19:1)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에덴 동산에서, 모세에게, 성막과 성전, 그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현재는 교회들을 통해서 나타내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은 때로는 불꽃과 구름으로, 때로는 천둥 또는 연기 때로는 밝은 빛으로 나타난다.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곳에 필요한 모든 빛을 충분히 공급한다. (계21:23)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장 잘 나타난다.( 히1: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안의 영광은 그분이 본래부터 소유하고 계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깨닫고, 존귀하게 여기며, 선포하고 찬양하여, 나타내고,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명령받았다. (고후3:18)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듯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계4:11)
우주 전체에서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단 두 가지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했는데, 그것은 타락한 천사와 우리들 인간이다. 모든 죄의 뿌리는 우리의 근본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것에 있고, 이는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교만한 반역이고, 사탄이 타락하고 우리가 타락하게 된 원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우리의 영광을 위해 열거자기 다른 모습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법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3:23)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삶을 통해 하나님께 합당한 분량의 영광을 돌리지 못했는데 이것이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인 동시에 가장 큰 실수인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 사 43:7)고 말씀하신 것을 따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 삶의 최고 목표가 되어야 한다.
.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 요17:4 )라고 고백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당신의 목적을 이루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우리도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데 피조물이 그 목적을 달성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새들은 날고, 노래 부르고 집을 짓고, 하나님이 뜻하신 새다운 활동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1. 우리는 예배를 통해 영광을 돌린다.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첫 번째 책임이다. 하나님 그분을 즐기는 것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하는 동기가 의무감이 아닌 사랑, 감사 그리고 즐거움이길 바라신다. 존 파이퍼는 우리가 그 안에서 만족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크게 나타난다 라고 말한다. 예배는 하나님을 즐기고 사랑하며, 우리가 그분의 목적에 맞게 사용되도록 그분에게 드려지는 삶의 모습이다. 너희 온 몸을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것을 하는 데 사용하라 (롬6:13)
2. 우리는 다른 믿는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영광을 돌린다.
거듭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믿는 것뿐 아니라 그분에게 속하고 하나님의 가족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롬15:7)고 서로의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두 번째 중요한 책임은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이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 13:34-35)고 말씀하셨다.
3.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감으로 영광을 돌린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온전한 성숙함에 이를 때가지 자라나길 바라신다.
영적으로 성숙해진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모든 방법이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비슷해질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더 많은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주의 영이 우리 안에서 역사할 수록 우리는 점점 그와 같아지고 그의 영광을 더욱 드러내게 된다 ( 고후 3:18)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빌 1:11, 참 요15:8)
4. 우리의 은사로 다른 사람을 섬김으로 영광을 돌린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만 가지고 있는 독특한 재능, 은사, 기술 그리고 능력을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목적 때문에 그 능력들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을 도우라고 이 모든 것을 위에게 주셨다. 성경은 하나님은 아주 다양한 은사들을너희들 각자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것을 잘 관리하여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이 너희를 통해 흐르게 하라. 다른 사람을 돕도록 부름받았는가? 하나님이 주시는 온 힘과 에너지를 쏟아 행하라 그러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 벧전 4:10-11)
5.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함으로 영광을 돌린다.
하나님의 은혜로 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데려오면 올수록.... 하나님은 더 많은 영광을 받으신다 ( 고후 4:15)
.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남은 삶을 살려면 우리 삶의 우선 순위, 많은 계획들, 인간관계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한다. 그것이 가끔은 쉬운 길 대신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주님도 십자가 앞에서 갈등하며 기도하셨다. 과연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 아니면 뒤로 물러나서 편안하게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 것인가? 마찬가지로 우리도 같은 선택의 길에 놓여 있다.
스스로의 목표, 안위, 그리고 기쁨을 위해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남은 삶을 살 것인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 12:25)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 것을 선택하면 하나님은 당신을 위한 삶을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이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신 분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가깝게 알아감에 따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기적같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벧후1:3)
바로 이 순간 하나님은 우리의 남은 삶 동안 그분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을 이루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엄밀한 면에서 그것이야말로 삶을 사는 유일한 방법이다.
결론
생각할 점/ 모든 것은 그분을 위한 것이다.
외울말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 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 11:36)
삶으로 떠나는 질문: 하루 일과 중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더 의식해야 하는 부분은 어디인 가?
제 2부 첫 번째 목적: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의 영광을 위해 강하고 영광스러운 의의 나무로 심으셨으니
( 사61:3 )
1.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다.
2. 하나님을 미소짓게 하는 것
3. 예배의 중심
4. 하나님의 좋은 친구되기
5. 하나님과의 우정을 키워가기
6.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
7. 하나님이 멀게 느껴질 때
제 8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다.
본문/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 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 계4:1 )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 시 149:4 )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실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당신의 기쁨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기로 선택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유익,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목적 그리고 하나님의 즐거움을 위해 우리는 존재한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 그분의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은 우리 삶의 첫 번째 목적이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그토록 중요하고 그분이 영원히 함께 하실 만큼 우리를 가치있게 여기신다면 우리가 이보다 더 소중한 것을 가질 수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우리는 어떠한 피조물보다도 하나님께 많은 기쁨을 드린다. 성경은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1:5)
1.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을 예배라 부른다.
주는 그를 예배하고 그의 사랑을 신뢰하는 자들을 기뻐하신다 (시147:11)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모든 행동이 예배다. 누구에게나 다 신적인 존재와 연결되고 싶어한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면 우리는 항상 하나님 외의 대체물을 찾게 되고 대체물이 심지어 자신이 되기도 한다. 하나님이 이러한 욕구를 주신 것은 그분이 예배하는 자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4:23)라고 하셨다.
2. 예배는 음악 이상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음악과 동의어로 생각한다. 이것은 오해다. 예배시간에 행해지는 모든 부분이 예배의 모습이다.
사실 예배는 음악보다 먼저 생겼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창4:21절에 유발의 출생 전까지 음악은 언급되지 않는다. 만약 예배가 음악뿐이었다면 음악성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예배가 특정 음악 스타일을 뜻하는 것도 오해다.
예배는 스타일, 음량 혹은 곡의 속도와는 전혀 무관하다. 하나님은 모든 종류의 음악을 사랑하신다. 우리는 그 모두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 모두를 좋아하신다. 만약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려진다면 그것이 예배의 모습인 것이다. 솔직히 말해,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스타일은 하나님에 대해서보다는 우리의 배경과 인격에 대해 잘 알려주는 것이다. 한 민족의 음악이 다른 민족에게는 소음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양성을 좋아하시고 그 모든 것을 즐기신다.
크리스천 음악이라는 것은 없다. 단지 기독교적인 가사가 있을 분이다. 노래를 성스럽게 만드는 것은 음이 아니라 가사다. 영적인 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3. 예배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늘 예배 아주 좋았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도 예배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다. 예배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예배한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목적은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다.
물론 예배에는 친교, 교육, 복음전도의 요소가 포함되고, 예배를 드리는 유익도 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다. 예배에 대한 우리의 동기는 우리의 창조주에게 영광과 기쁨을 드리는 것이다.
이사야 29장에서 하나님은 예배에 온 마음을 쏟지 않고 위선적인 예배드리는 것에 대해 불쾌함을 표현하셨다. 왜냐하면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께 메마른 기도,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찬양, 아무 의미 없는 설교 그리고 의미조차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만든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배의 전통이 아닌 열정과 헌신으로 감동을 받으신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백성이 그 입으로는 나를 존경한다고 말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이 나를 경배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사람들이 해오던 대로 형식적으로 하는 것일 뿐이다 ( 사29:13 )
4. 예배는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 그 자체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만이 예배가 아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그를 예배하라 (시105:4)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찬양하라 ( 시113:3 )고 말하고 있다. 또한 성경에는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집에서, 전쟁터에서, 감옥에서 그리고 심지어 침대에서 하나님을 찬양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찬양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처음하는 행동이어야 하고, 밤에 눈감을 때 하는 마지막 행동이어야 한다. ( 시5:3 63:6 119:62, 147 ) 이에 대해 다윗은 말한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 시34:1 )
우리가 어떤 활동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을 드리기 위한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이 예배가 될 수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마틴 루터는 우유 짜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소젖을 짤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할수 있는가?
모든 것을 예수님을 위한 것처럼 함으로써, 또 그것을 하는 동안 그분과 끊임없이 대화함으로써 할 수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골3:23)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것이 예배 드리는 삶의 비밀이다. 모든 것을 주님께 하듯 하라. 하나님께 드리면 일도 예배가 된다. 그리고 그분의 임재를 느끼면서 행하라. 영어성경은 매일의 일상 생활, 잠자는 것, 먹는 것, 일하러 가는 것 그리고 걸어 다니는 것 모두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라 (롬12:1)
예: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 끊임없이 그녀에 대해 생각을 한다. 식사, 수업, 슈퍼마켓에서 줄서 있을 때 등 그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와같은 것들이 몇백 키로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가깝게 느낄 수 있는 방법이었다. 끊임없이 그녀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는 그녀의 사랑 안에 머물르고 있었다.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예배다.
결론
생각할점: 나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다.
암송구절: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시149:4)
삶으로 떠나는 질문: 마치 내가 예수님을 위해 하듯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는가?
제9과
본문/ 하나님이 너희를 향해 미소짓기를 원하노라 (민6:25)
당신의 종인 나에게 미소를 지어주십시오. 바르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 시119:135)
하나님을 미소짓게 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첫 번째 목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 또한 그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성경은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엡5:10)
노아 때 온 세상은 도덕적으로 파탄 상태였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기쁨이 아닌 자신의 기쁨을 추구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시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인류를 창조한 것을 후회하시게 까지 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너무 실망하셔서 모두 멸망시키겠다고 생각하셨다. 그때 하나님은 자신을 미소짓게 만드는 한 사람을 발견하셨다. 노아는 주님께 기쁨이었다 (창6:8 )
노아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미소짓게 할 수 있는 5가지 예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가장 사랑할 때 미소지으신다.
노아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했다. 더 나아가서 노아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도 그분을 사랑했다. 성경은 노아가 살아있는 동안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6:9)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만드셨고, 우리가 그 사랑을 그분에게 되돌려주기를 원하신다. 교제하기를 원하신다. 나는 너의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너의 사랑을 원한다. 나는 너의 제물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나를 더 알기를 원한다 (호6:6)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원하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마 22: 37-38)
2.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온전히 신뢰할 때 미소지으신다.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순종해서 그의 가족을 구원할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세상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하나님과의 의의 관계를 맺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히11:7)
엄청난 홍수 경험해보지 못했고, 바다에서 수백키로 떨어진 곳에서 배만드는 것, 모든 동물을 모으고 돌봐야 하는 것, 하지만 노아는 불평하거나 핑계를 대지 않았다. 대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온전히 신뢰하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고, 문제에 부딪혔을 대 도와주시며, 불가능한 일을 해결해 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성경은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도다 (시147:11)
노아는 방주짓는 데 120년 걸렸다. 힘든 날들이었고, 비올 기미도 없었다. 미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우리의 삶의 영역 가운데 어떤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하는가? 신뢰는 예배의 모습이다.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과 지혜를 신뢰할 때 부모가 기뻐하듯, 하나님도 우리의 믿음에 기뻐하신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히 11:6 )
3.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다해 순종할 때 미소지으신다.
하나님은 방주에 실을 동물 각각의 수뿐 아니라 방주의 크기, 모양 그리고 재료까지 세세하게 지시하셨다. 성경에 나타난 노아의 반응은 이러하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6:22, 히11:7)
노아가 모든 것에 순종했고( 단 하나의 지시 사항도 간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확하게 순종한 것을 (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과 시간에 맞춰)보라. 이것이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기도해보겠습니다라고 토를 달지도 않고 망설임없이 바로 행한다. 이해는 나중에 하더라도 우선 순종을 해야 한다. 즉각적인 순종은 평생 성경에 대해 토론하고 공부하는 것보다 휠씬 많은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부분적인 순종을 하려고 한다. 취사선택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부분적 순종은 불순종이다. 진심으로 하는 순종은 기쁜 마음으로 열심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라 (시102:2) 다윗은 주님, 제게 무엇을 해야 할지 말씀해주십시오. 그대로 하겠습니다. 제가 사는 동안 진심으로 당신께 순종하겠습니다 (시119:33) 야고보는 이미 크리스쳔이 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믿는 것뿐만 아니라 행동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 약2:24)
왜 순종이 이토록 하나님을 기쁘시게 만들까? 왜냐하면 이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15 )
4. 하나님은 우리가 계속해서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 드릴 때 미소지으신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받고 감사의 인사를 받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은 없다. 하나님도 이를 좋아하신다. 우리가 경의와 감사를 표할 때 그분은 미소지으신다.
노아는 찬양과 감사의 마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세상의 그 누구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을 때 노아는 하나님께 예배드렸고, 감사드린 것이었다. 성경은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을 드렸더니 (창8:20)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는 더 이상 노아처럼 동물로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대신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 (히13:15)와 감사의 제사 (시116:17)를 드리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다. 이것이 예배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
다윗은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시 69:30-31)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릴 때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면 우리의 마음도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된다.
예: 어머니 요리해준 것 즐거이 먹고 즐거워하면 어미니 더 기뻐하심. 뿐만 아니라 그 음식을 먹으면서 극찬하고 어머니에게 찬사를 보내면 모두에게 기쁨
마찬가지로 예배도 역시 이와같은 상호작용을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해주신 것들을 기뻐하고 우리가 그 즐거움을 하나님께 표현할 때 하나님은 또한 기뻐하신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을 준다.
5. 하나님은 우리가 능력을 사용할 때 미소지으신다.
홍수 후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 창9:1-3)
우리가 성경을 읽고 교회에 가며 기도하고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같이 영적인 활동을 할 때에만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며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일을 하든, 놀든, 쉬든, 혹은 먹든 우리 삶의 모든 구체적인 부분을 바라보며 기뻐하신다.
성경은 그래서 주께서 사람의 갈 길을 정하시고 삶의 모든 부분에 대해 기뻐하신다 ( 시37:23)
죄를 제외하고 사람이 하는 모든 활동이 찬양의 자세를 가지고 행해질 때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접시를 딱고 기계를 수리하며 물건을 팔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작성하며 곡식을 키우고 또한 가정을 꾸릴 수 있다.
자식을 자랑스러워하는 부모처럼 하나님도 당신이 주신 재능과 능력을 발휘하는 우리의 모습에 특히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다르게 만드셨고 우리가 지금 하는 모든 일을 보고 계신다 (시 33:15)
우리의 능력을 숨기거나 다른 사람처럼 되기 위해 노력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나 기쁨을 드릴 수 없다. 우리의 모습으로 있을 때만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다. 우리 모습의 어떤 부분을 거부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는 것이다.
영화 [불의 전차]에서 올림픽 육상선수 에릭 리들은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분은 또한 나를 빠르게 달리는 사람으로 만드셨고, 나는 달릴 때 마다 하나님의 기쁨을 느낀다 후에 그는 뛰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잠자는 것을 보면서도 기뻐하신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자는 것을 보면 얼마나 기쁩니까? 부모를 위해 무엇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아이들이 너무 사랑스럽기에 숨쉬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우리가 자고 있을 때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바라보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라나가는 모든 단계를 사랑하고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하거나 죄없는 사람이 될 수 없음을 아신다.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 시103:14)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 마음의 태도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욕구인가? 바울의 목표는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고후5:9)
21세기에 노아와 같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 의지가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찾고 계신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을 것인가? 이 목표에 온전히 열중해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해주시지 않는 것은 없다.
결론
생각할 점: 내가 하나님을 신뢰할 때 하나님은 미소지으신다.
외울말씀: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도다 (시 147:11)
삶으로 떠나는 질문: 하나님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기 때문에, 나는 내 삶의 어떤 부분에서 하나님을 가장 신뢰해야 하는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