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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동경무도대회 가라데 부문 우승
극진 가라데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화(바람의 파이터)의 주인공인 최배달이 창시한 것입니다.
최배달(최영의)는 14세때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 항공대에
입대하면서 부터 가라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패전과 동시에 그는 와세다 대학 체육과에 입학하게 되며,
그당시 미야모토 무사시를 읽고 작가 요시까와 에이지를 만나 입산수도를 결심하게 되어,
약 2년 간의 입산수도를 마치고 전후 최초로 개최된 전 일본 가라데 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하면서 부터 일본의 기라성 같은 고수를 찾아다니면서
승부를 해 단 한차례도 패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시 두 번째의 입산수도를 결심하게 되며 기요즈미 산으로 들어가
약 2년 간의 수도를 마치고 치바지방의 타야마 도살장에서 소와의 승부를 겨뤄
47마리의 소중 4마리를 그자리에서 즉사하게 만들고, 나머지는 소의 뿔을 꺽게됩니다.
그리고 그 당시 미군의 요청으로 가라데를 지도하게 되며,
미국 레슬링의 초청으로 시연 (데몬스 트레이션)과 많은 목숨을 건 승부를 갖지만
단 한번도 패하지 않고, 미국을 시작으로 세계 격투여행을 떠나
100여차례가 넘는 승부에서 무패를 기록하게 됩니다.
그때 보여준 그의 승부와 시연을 본사람들은 그를 '신의 손'(God Hand)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세계 격투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동경에 대산 도장이라는
(지금은 일본내의 격투계의 전설적인 도장. 당시 입문자중 70%가 일주일을 견디지 못했고,
그때의 제자들이 지금 세계 격투계를 움직이는 인물들이 대부분) 이름으로 처음으로
제자를 양성합니다.
1964년 그 이름을 극진회관 (극진가라데)으로 바꾸며
세계 16개국 72개의 지부를 발촉하게 되며,
1969년 극진 최초 전 일본 가라데 선수권 대회를시작으로 세계최강의 선수들을 배출합니다.
그리고 1994년 4월 60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유언에 따라 극진가라데의 2대 관장으로 문장규 (일본명:마쓰이 쇼케이)가 임명되었고,
현재 세계 120개국 1400만명의 제자들이 수련을 하고 있습니다.
최배달이란 이름으로 더욱 친숙한 최영의(극진 가라데의 창시자)가
싸움소와 겨루는 장면을 담은 동영상이 화제다.
영화 ‘바람의 파이터’로 네티즌들의 화두에 올랐던 최배달.
그가 맨손으로 소의 뿔을 자르는 장면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사이트 문학게릴라의 <"불굴의무혼(武魂)" 최배달 - 6. 싸움소 라이텐구(雷天狗)">편에는
최배달과 싸움소 라이텐구의 대결에 관한 일화가 비교적 자세히 올라와 있다.
이 글은 문학게릴라의 칠색접영님이 작성한 것으로 본인의 허락을 얻어 원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다음은 칠색접영님의 글 전문이다.
최배달이 맨손으로 소를 잡는데 성공하고, 청소년들 사이에서 우상으로 떠오르자
가뜩이나 그를 경계하고 있던 일본 무도계에서는 즉각, 성명을 발표하고 그를 사도(邪道)로 몰아 세운다.
검도협회와 유도협회에서는 그의 자연석 격파와 소와의 고투를 평가절하하며,
무도계에 사악한 자라고 혹평했고, 가라데계에서는 그가 조선인임을 은근히 퍼뜨리고,
그의 실전가라데를 깡패의 싸움질로 악평했다.
이에 최배달도 "무술의 유파에 상관없이 누구라도 내 앞에서 맨손으로 소를 때려눕힐 수 있다면
나와보라"고 반박하면서, 전일본 무도계와 최배달 사이에는 폭풍전야의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이즈음, 최배달은 그의 실전가라데를 일반 대중에게 확실히 각인시키는 대사건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소를 맨손으로 잡았다는 소식이 신문에 알려지면서,
그와 소가 대결하는 모습을 영화로 찍어보고 싶다고 찾아 온 TV 프로듀서 "이노우에"와의 만남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막 TV와 영화가 보급되고 있던 시절이었고,
TV나 영화같은 방송매체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에도 엄청난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매체를 통해 소와 싸우는 최배달의 실전가라데가 상영된다면,
목숨을 걸고 추구하고 있는 실전 가라데를 일반 대중에게 확실히 각인 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일본 무도계의 비아냥도
잠재울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최배달은
"이노우에"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곧바로 훈련에 돌입한다.
이번의 훈련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야 했다.
일단 상대가 묶여있는 소가 아닌 자유롭게 움직이는 소라는 것이 가장 큰 난관이었다.
체력을 위한 양팔과 다리에 납덩이를 달고 모래밭 달리기, 악력을 위한 두 손가락 턱걸이,
엄지만을 이용한 물구나무 서기, 균형감각을 살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배에서 콩가마 날으기,
수도와 정권 단련을 위한 베니어합판 격파, 저항력을 기르기 위한 커다란 베니아합판을 들고
파도에 버티기, 순발력을 위한 빠른 줄넘기(한번 뛸때 다섯번을 넘는다고 한다.)등을 착실히 해나갔다.
자신과 상대할 소를 고르던 최배달은 근방에서 최고라는 싸움소 라이텐구(雷天狗)를 상대로 지명한다.
이 라이텐구(雷天狗)는 악명이 자자한 싸움소로 체중이 약 750kg에 창날처럼
앞으로 뻗어있는 뿔 길이가 무려 25cm에 이르는 무시무시한 녀석이었다.
시합일은 10월 13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비가 많이 오는 관계로 운명의 날은 14일이 되었다.
결전의 날 14일 도살장 앞 해변에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과 기자들로 북적댔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총을 든 포수가 배치되었다.
마침내, 라이텐구(雷天狗)를 붙들어 놓고 있던 우리가 열리고, 라이텐구(雷天狗)가 뿔을 곧추세우고
지축을 울리며 최배달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소는 직선형 공격을 한다. 육중한 몸으로 마치 기관차처럼 달려와 뿔로 들이 받는 공격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급선회을 하는데는 무리가 있다.
그러한 이유로 소와 싸울때는 근접거리에서 원을 그리며 돌아야 한다.
(투우사들이 소와 싸울때의 모습을 연상하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최배달은 라이텐구(雷天狗)에게 거리를 주지 않기위해 뿔을 잡고 관자놀이를 수도로 가격하려 했지만,
엄청난 소의 힘 때문에 뿔을 잡고 있기에도 벅차 수도로 내리칠 기회를 쉽게 얻지 못하다가
등에 올라타 수도를 내리치는데 성공했지만, 자세가 불안했기 때문에 제대로 힘을 싣지 못하여,
뿌리치는 라이텐구(雷天狗)의 힘에 밀려 떨어지면서 다리를 다치게 되고,
곧바로 들이미는 뿔을 가까스로 잡지만, 이미 가슴에 깊은 상처를 받아 피가 넘치고 있었다.
부상당한 몸, 피를 보고 미쳐버린 싸움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위기의 순간 뒷걸음질 치던 최배달의 눈에 푸른물결이 일렁이는 바다가 보였다.
"그렇다, 물이다 물을 이용해야 한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바다를 향해 굴렀다.
라이텐구(雷天狗)는 그의 피를 목표로 달려오고 있는 상황, 최배달이 먼저 바다로 들어가는데 성공했고,
자세를 잡으며 일어섰다.
그의 예상대로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던 라이텐구(雷天狗)는 물에 발이 닿으면서 속도가 줄어들었다.
그 찰라의 순간 최배달의 눈에 라이텐구(雷天狗)의 미간이 한가득 들어왔다.
그의 발경(發勁)이 실린 정권이 총알처럼 날아가 라이텐구(雷天狗)의 미간에 정확히 꽂혔다.
"퍽" 둔중한 소리와 함께, 라이텐구(雷天狗)의 육중한 몸이 멈춰서는 듯한 느낌이 들고,
시간이 정지해 버린 듯 정적만이 최배달과 라이텐구(雷天狗) 사이에 흘렀다.
이윽고, "우어∼"
단말마의 비명이 라이텐구(雷天狗)의 입에서 터져나오며, 그 거대한 몸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라이텐구(雷天狗)의 입과 코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최배달은 죽음의 마지막 경련을 하고 있는 라이텐구(雷天狗)를 향해 기어갔다.
그리고, 라이텐구(雷天狗)의 뿔을 향해 있는 힘껏 수도를 내리쳤다.
잘려진 라이텐구(雷天狗)의 뿔을 들고 일어선 최배달은 곧바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간다.
이미 탈진한 온 몸은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
이 라이텐구(雷天狗)와의 대결에서 최배달은 많은 것을 느끼게 되는데,
특히 가까이 붙어서 맞잡고 싸우는 그라운드형 무도에 대해 일정 거리를 확보해야
공격이 가능한 가라데의 약점을 보완하고자 지피지기(知彼知己)로 유도를 배우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때 배운 유도는 훗날 세계 격투사들과의 대결에서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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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J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계기는 아시다시피 마르고 허약해 보이는 호이스가 UFC라는 유혈이 낭자한 무규칙 격투대회에서 거구의 상대를 연속으로 격파했기 때문이다. 그레이시 일족은 이와 같은 효과를 미리 예상하고 호이스를 가문의 자객으로 대회에 출전시킨 것인데, 이런 방식이 대중에게 통한다는 것을 이미 수십년간의 경험으로 체득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초가 카를로스 그레이시였다.
일반적으로 그레이시 주짓수는 어렸을적 너무나 허약했던 엘리오가 자신의 몸에 맞게 고안해 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엘리오뿐 아니라 엘리오의 스승인 카를로스도 그리고 그 스승인 마에다 미츠요도 건장한 체격이 아니었다. 특히 카를로스는 사진에서 보면 알다시피 가문에서 제일 허약한 체구였고 몸무게도 엘리오보다 적게 나갔었다.(左.UFC 2에서 제이슨 델루샤에게 암바를 거는 호이스 그레이시)
그렇지만 마에다의 실전 주짓수를 전수받은 카를로스로서는 이 기술로 자신보다 강한 거구의 상대를 이길 수 있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카를로스 jr에게 주짓수를 배운 장 자크 마차도는 이런 말을 했다.‘그라운드는 나의 대양. 나는 상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영조차 할 줄 모른다.’
이처럼 주짓수가 중력의 법칙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그라운드 기술이라는 점이 그레이시 일족에게 이득으로 작용했다. 만약 마에다 미츠요가 주짓수가 아니라 가라테를 전수했다면 카를로스가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습득했다 해도 그 신체적인 한계로 인해‘챌린지’가 성공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타격기술은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도 신체적인 환경에 매우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50킬로그램대의 카를로스가 백킬로그램의 단련된 거구들을 타격전만으로 무패의 행진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우스개 소리로 정말 장풍이라도 필요할지 모른다. 그래서 교쿠신 가라테를 창시한 최배달 관장은 실전 대결과 더불어 벽돌을 부수고 소뿔을 자르는 등의 격파를 개발했던 것이다.‘내 주먹이 돌보다 강하니 덤빌 엄두도 내지 마라!’라는 의미로 말이다. 전성기때 75킬로그램의 최영의 관장도 미국에서 거구의 프로레슬러를 이기기 위해 눈찌르기와 고환차기까지해서 관중들에게 린치를 당할 뻔할 정도였는데 카를로스나 엘리오 같은 약골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브라질의 싸움꾼들과 무술인들은 UFC초기의 무술인들처럼 전혀 그라운드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경험이 있는 그래플러라 하더라도 조르기와 관절기는 생소한 탓에 일방적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카를로스는 1920년대 초창기부터 작고 허약한 체구로 거구들을 연속적으로 격파하면서 신문에 광고까지 냈고 이 때문에 브라질 전역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레이시 주짓수의 개조(開祖)인 카를로스는 실력뿐 아니라 두뇌도 뛰어난 모양으로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가르치는데 소질이 있었고 그 스스로도 기술과 더불어 식이요법까지 개발했다. 이른바‘그레이시 다이어트’라는 식이요법이 그것이다.
이것은 호이스와 힉슨을 통해 더욱 유명해졌는데 요가와 더불어 그레이시는 뭔가 다르다는 신비주의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그러나 요가와 식이요법은 단지 신비주의를 위한 것이거나 겉멋을 부리기 의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수십년간‘챌린지’를 계속한 경험의 산물로써, 긴장과 피로를 이완시키고 안정적인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호리온의 말처럼 시도 때도 없이 도장에 무뢰한이 찾아와 도전을 신청하는데 위통이나 치통, 두통이 있다면 정상적인 컨디션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레이시 다이어트란 기본적으로 같은 종류의 음식을 혼합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들어 탄수화물의 감자와 파스타를 같이 먹지 않고 설탕, 소금, 조미료와 붉은 고기를 되도록 피한다. 우유는 어린이만 먹이고 청량음료는 절대 마시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그레이시 사람들에 주장에 의하면 이런 방식이 그레이시 파이터 특유의 체력과 유연성, 지구력을 길러주는데 특효약이라는 것이다. 호이스가 UFC 토너먼트 시합을 끝마쳤을 때 전혀 피곤해 하지 않은점, 엘리오 그레이시가 43살 때 논스톱으로 3시간 45분이나 시합을 한 것이 모두 그레이시 다이어트의 효과를 증명하는 예라고 말한다. 이것이 격투에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과학적인 검증이 되지는 않았지만 카를로스가 94세, 엘리오도 90세가 넘도록 무병장수하고 있으니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게다가 다이어트 효과까지 있으니 이 식이요법은 그레이시 주짓수라는 상품의 가치를 더 높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어떤 무술이 강하다는 평판을 얻고 유파가 번성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강함의 증명’이 요구된다. 그리고 2대 3대 훌륭한 계승자와 우수한 후배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주위를 둘러보면 언제적 이야기인지도 모를 창시자와 스승의‘챌린지’로 현재 유파의 강함을 증명하는 증거로 내세우는 무술이 꽤 많다. 이런 점에 있어서 그레이시 주짓수는 무술역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할 정도의 무술이다. 카를로스만 해도 3명 이상의 부인을 통해 21명의 자식과 106명의 손자, 증손자는 128명에 이른다. 이들이 거의 대부분이 주짓수를 연습하고 높은 수준에 오른 마스터급도 상당히 많다. 엘리오도 부인이 다섯명에 이른다고 한다. 역시 자식들 중 상당수가 주짓수 선수이자 마스터이다. 한마디로 그레이시 일족 대부분이 브라질리안 주짓수 관련 일에 종사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카를로스가 은퇴하고 엘리오가‘챌린지’의 바톤을 이어받아 주짓수를 세상에 알렸는데, 이런 엘리오의 적은 아이러니하게도 내부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레이시 주짓수란 기술은 상대가 그라운드와 서브미션을 모른다는 전제하에 약함이 강함을 이긴다는 등식이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도 주짓수를 오래 수련한데다 기술수준도 높고 힘이 세다면? 기술수준이 아무리 높은 엘리오도 상대를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일이 1957년에 일어났는데, 브라질 YMCA본부에서 그레이시 주짓수를 12년이상 수련한 발데마르 산타나와 43세의 엘리오가 발레투도로 싸우게 된 것이다. 3시간이 넘는 혈투끝에 발데마르가 엘리오의 머리를 걷어찼고 경기는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엘리오는 공식적인‘챌린지’에서 은퇴하였다.(右.엘리오 그레이시와 반데마르 산타나와의 승부)
다행스럽게도 그레이시 가문에는 엘리오의 뒤를 이을 자객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카를로스와 엘리오가 각기 수십명의 자녀들을 합숙시키며 어렸을 때부터 연습을 시켜왔기 때문이었다. 카우손은 카를로스의 첫번째 부인의 장남이었다. 이런 카우손에게 그레이시 주짓수의 정통성은 자신에게 있다고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오랜 친구였던 발데마르 산타나와 무규칙으로 싸우기로 결심한다. 그는 18살 때부터 발레투도를 시작했는데 지금도 그가 지향하는 것은 오로지 발레투도를 위한 주짓수이다. 데뷔전에서 그는 유클리데스 페레이라에게 패배했는데 심판의 판정이 잘 못된 것이라고 말하며 아직까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왠만하면 시합에 져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그레이시의 특징이지만, 카우손은‘다른 그레이시에 비해(엘리오를 지칭) 나는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누구와도 싸우고 누구에게도 비밀없이 기술을 가르친다’고 주장하며 이것이 좋은 선수를 배출하는 비결이라 말한다.
어쨌든 카우손은 산타나와 6번 싸워 4번은 이기고 2번은 비기며 엘리오의 복수에 성공한다. 이후 그는 60년대 브라질에서 가장 강한 파이터로 활약하게 되는데, 지난 칼럼에 실은 BJJ계보도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재 MMA에서 활약하는 브라질 주짓수 선수는 거의 대부분 카우손과 카를로스 주니어의 제자라고 보면 된다. 카우손의 제자를 보면 마리오 스페히,무릴로 부스테만테,비토 베우포드 에서부터 호드리고 노게이라와 히카르도 아로나, BJ 펜이라는 그야말로 거물급들로 즐비하다. 카를로스 주니어는 카를로스의 세번째 부인의 장남인데 유명한 ‘그레이시 바하(바라)’라는 아카데미의 설립자로도 유명하다. 여기에서 헨조, 하우프, 하이언, 호드리고, 알메이다, 쉠브리등 탑 파이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엘리오 이후에는 카우손을 포함해 신체적으로 강하고 재능있는 인물들이 뒤를 잇게 되는데,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에는 카를로스의 두번째 부인의 아들인 칼레이 그레이시가 67년에 출범한 브라질 주짓수 협회의 주최하에 열린 대회에서 무패의 행진을 이어간다. 그 후 홀스 그레이시 부터는‘챌린지’뿐 아니라 다른 스포츠에도 영역을 확대하게 된다. 홀스는 카를로스의 4번째 부인의 아들인데 어렸을적 엘리오에 의해 양육되었다. 카우손은 힉슨과 비교해 누가 가문의 역대 최강자 였느냐는 질문에 홀스가 단연 최고였으며, 기술적으로도 매우 수준이 높았고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힉슨도 홀스야 말로 자신보다 더 강했다고 말했을 정도다
홀스는 70년대 BJJ뿐 아니라 삼보, 그레코로망 레슬링등 브라질에서 열렸던 대부분의 그래플링 대회에 나가 연승하며 브라질 전역에 이름을 날렸다. 마우리시오 고메즈는 생전의 홀스가 유명인 홀스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홀스는 1982년 행글라이딩 사고로 사망하였는데, 이때까지 어떤‘챌린지’에서도 무패였다고 전해진다. 홀스이후 80년대부터는 엘리오의 아들 힉슨 그레이시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힉슨은 스무살 때인 81년에는 길거리 싸움 140전 무패의 거구(190cm에 117kg)의 유명 파이터 줄루와 발레투도로 싸워서 이기면서 명성을 쌓아 나가기 시작한다.
시대가 발전하고 캠코더처럼 쉽게 활동을 기록할 수 있는 영상기기가 등장하자, 그레이시 가문은 이것을‘챌린지’를 홍보할만한 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힉슨과 줄루와의 유명한 시합도 이렇게 기록되어 알려지는데, 이 영상물은‘그레이시 액션비디오’라 불렸다.‘그레이시 액션비디오’는 90년대의 UFC를 비롯한 이종격투대회 이전 그레이시 가문의‘챌린지’를 말이 아닌 눈으로 전세계에 확인시킬 수 있었던 놀라운 도구였다. 게다가 이 영상물은 겉으로 보기에 비쩍 말라서 별 힘이 없어 보이는 호리온이나 호이스 같은 사람이 미국에서 자신의 강함을 아주 쉽게 증명해 보일 수 있었던 물건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호리온이 UFC를 만들기 위한 스폰서를 구하는 데에 이 비디오도 큰 역할을 했다.
450전 무패의 신화적인 파이터라는 힉슨 그레이시의 전설도 이 비디오로 인해 신뢰를 받은 면이 크다. 액션 비디오에 보면 힉슨이 13살 때 1분만에 이십대의 가라테 선수를 이기거나 30초만에 러시안 유도 챔피언을 이겨버리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에, 과연 힉슨이라면 450전 무패도 거짓이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장삿속에 밝은 호리온은 교습 비디오와 함께 액션비디오도 함께 팔아서 큰 돈을 만지기도 했다. 그만큼 이 비디오는 그레이시 가문에 여러모로 든든한 아군 역할을 했다.
그레이시 액션 비디오에서는 힉슨이 루타 리브레(LUTA LIVRE) 의 최강자 우고 듀와르치를 상대로 해변에서 난투극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브라질에는 대표적으로 세개의 무술이 존재하는데, 첫번째가 브라질리안 주짓수고 두번째가 카포에이라, 그리고 루타 리브레가 있다. 루타 리브레는 주짓수처럼 서브미션 그래플링이며 60년전 마스터 타투라는 사람이 그레코로망 레슬링과 관절기를 섞어 루타 리브레를 창시했다고 전해진다. 루타 리브레는 포루투갈어로‘자유롭게 싸우는 기술’을 의미하고 BJJ와 다르게 맨몸으로 수련하고 전문적으로 타격도 연습한다. 이름만큼 발레투도를 지향하는 무술이라 예전에는 벽앞에 선수를 세워 놓고 다른 사람이 주먹으로 쳐서 내성을 기르는 무서운 훈련법도 행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비슷한 성격의 루타 리브레와 BJJ는 발레투도등의‘챌린지’에서 서로 부딪히는 경우가 많아서 예로부터 앙숙지간으로 유명하다.
힉슨과 해변에서 싸운 우고 듀와르치는 루타 리브레의 제왕이라고 불렸던 파이터다. 체격이나 체중도 헤비급인데다 번개 같은 태클로 마운트 포지션을 빼앗고 안면에 펀치를 퍼붇는 것을 장기로 삼는 선수다. 이 때문에 우고를 가리켜‘세계에서 가장 빠른 격투가’라고도 한다. 루타 리브레 연합의 회장까지 맡았던 사람인데 아쉽게도 그는 장렬한 패배로 더 기억되는 선수다. 우선 그레이시 액션 비디오에서 힉슨에게 얻어 터지는 장면으로 유명하고 UFC에서는 탱크 애봇에게 처절하게 얻어 터지는 수모를 당했기 때문이다. 우고는 해변에서의 싸움이후 친구들을 데리고 힉슨의 도장으로 가서 또다시 도전했는데, 도장 바닥이 아니라 주차장에서 10분동안이나 힉슨에게 얻어 터지고 말았다. 루타 리브레의 얼굴인 우고가 힉슨에게 지고 UFC에서 탱크 애봇에게 패했다고 루타 리브레가 약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BJJ도 스포츠 주짓수 시합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인 선수가 이종격투 경기에서 변변찮은 파이팅을 보여주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루타 리브레 출신의 파이터로는‘거리의 제왕’이라는 별명과 함께 힉슨도 슬슬 피해다녔다고 하는 마르코 후아스가 있다. 그런데 후아스는 우고와 달리 루타 리브레만 익힌게 아니라 유도, 카포에이라, 태권도, 복싱, 무에타이등 여러 무술을 골고루 익혔다. 그는 그레이시 주짓수도 약간 익혔는데 BJJ와 연속으로 싸워서 이겨나가는 탓에 쫓겨나고 말았다고 한다. 본인의 말로는‘너무 강해서 아무도 도전하지 않는 터라 이러저리 옮겨다니며 시합을 했다.’라고 한다. 힉슨에게도 몇번 도전했지만 응하지 않은 탓에 ‘힉슨이 후아스를 피해다닌다.’는 소문이 들려올 정도였다. 마르코 후아스는 무에타이 브라질 헤비급 챔피언 출신으로 매우 강력한 타격 테크닉을 소유했고 그라운드에서는 루타 리브레의 기술로 싸우는 올라운드 파이터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후아스 발레투도라는 무술을 창시했는데, UFC7에서는 부상으로 1%의 실력도 내지 못했다고 스스로 말했지만 토너먼트 챔피어언이 되기도 했다. 제자로는 UFC에서 챔피언이자 최고수준의 타격으로 유명한 페드로 히조가 있다.
BJJ와 루타 리브레간의 불화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데, 그레이시 가문의 악동으로 유명한 하이언 그레이시는 루타 리브레의 정상급 선수인 에우지뇨 타데우와 몇번이나 충돌했고 언젠가는 디스코테크에서 말싸움을 벌여 타데우가 총으로 하이언을 쏘려고 한적도 있다. 그 후에는 하이언이 타데우의 제자를 폭행하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타데우가 하이언의 동료를 칼로 찔러버리는 사건도 있었을 정도였다. 타데우는 유달리 그레이시측과 사이가 안좋은데 하이언의 형인 하우프나 사촌 호일러도 타데우라면 이를 간다. 이런 갈등이 계속되다 97년에는 브라질에서 열린 발레투도 시합인‘펜타곤 컴뱃’에서 하이언의 형인 헨조 그레이시가 타데우가 시합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시합중 구석으로 몰린 헨조의 머리를 타데우측 세컨이 걷어차면서 이것을 계기로 경기장에서 그레이시 측과 루타 리브레간의 집단 난투극으로 번졌다. 브라질에서는 과거에도 이처럼 유파끼리의 신경전이 난투극으로 이어진 경우가 있는데 이 때문에 리오 데 자네이로등에서 발레투도가 금지되기도 했다. 어쨌든 그레이시 주짓수와 다른 무술간의 반목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이다.
어떻게 BJJ가 MMA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무술이 되었는가에 대해, 어떤 무술이 강하다고 평가 받고 길은 매우 험난하고 오랜 경험을 통한 노하우를 필요로 하다고 서두를 뗀 적이 있다. 그레이시 주짓수는 기술적인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이토록 오랜시간 다른 무술과의‘챌린지’로 경험을 쌓고 우수한 격투가를 길러 오늘에 이르게된 것이다. 그야말로 험난한 여정이 아닐 수가 없다.
세계 이종격투경기의 시작인 UFC는 이처럼 그레이시 가문이 BJJ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미국에서 만들어진‘챌린지’의 무대였다. 결론적으로 BJJ가 MMA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무술이자 세계최강의 유파라는 명성을 얻게 된 원인을 꼽자면. 첫째, BJJ가 마에다 미츠요에 의해 개발된 우수한 서브미션 그래플링(Submission Grappling) 이었다는 점이다. 후세의 노력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레이시 주짓수는 출발부터‘강한무술’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었다. 전수자 마에다가 1000전 이상의 이종격투경험이 있었던 불세출의 무술가인데다, 전수한 기술이 실전에서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지 않고도 실력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서브미션 그래플링이란점이 장점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앞에서 설명했듯이 만약 마에다가 타격기를 전수했다면 왜소한 카를로스나 엘리오가 무패행진이 가능할리도 없었고 피를 보지 않고 많은 횟수의‘챌린지’를 완수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두번째는 카를로스, 엘리오, 카우손으로 이어지는 훌륭한 스승과 우수한 후배들이 정체성을 잃지 않고 기술개발을 지속한 것이다. 20세기초 스포츠를 지향해서 실전기술을 상당수 제외한 유도나 레슬링의 길을 따르지 않고, 6~70년대 동양무술의 신비주의를 쫓지 않은 점이 그 예이다.
세번째는 BJJ의 강함을 증명하는 것을 여러 세대에 걸쳐 게을리하지 않은 점이다. 선대의 활약과 영웅담에 안주하지 않고‘챌린지’를 계속한 것이 오늘날의 BJJ를 있게한 가장 큰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네번째는 환경적으로 행운이 따라서이다. 발레투도를 가능하게 만든 브라질의 특성과 캠코더등 현대문명의 발전, 그리고 호리온이 때마침 동양무술붐이 내리막길을 걸을 때 미국에서 이종격투대회를 열수 있었던 점도 BJJ가 세계적인 무술로 성장하게 된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브라질에서 최초의 그레이시 주짓수 도장이 열린지 내년으로 80년이 된다. 그레이시 일족이 줄줄이 서로 어깨에 손을 얹는 입장 퍼포먼스인‘그레이시 트레인(Gracie Train)’처럼 이들의‘챌린지’가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한 이종격투대회 역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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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렵다. 가슴이 뛰고 호흡이 가빠진다.
태권도 5단의 30대 고수. 줄넘기를 시작하면 1000회를 쉬 넘기는군살없이 탄탄한 체구가 날렵하다. 3m 앞에 맞선 상대의 눈이순간 날카롭게 번뜩였다. 어제 도장 입회 신청때와는 천양지차.사범으로써 받아주는 지도대련이 아닌 고수와의 대적임을 직감한다. 도장에 정좌한 20여명의 수련생들. 만약 내가 지면 도장 문을 닫아야 할 판이다. 지난 6개월간 나를 쓰러뜨리고자 찾아온 고수가 벌써 20여명. 그때그때마다 힘든 고비를 잘 넘겨왔다.
일격필살(一擊必殺). 깊은 심호흡을 했다. 빈틈을 찾자. 연이은앞차기와 옆차기 페인트. 주먹과 발질 주고 받기를 그렇게 수차례. 일순 상대의 체중이 앞으로 내뻗은 오른 다리로 옮겨가는 동시에 왼쪽 어깨가 살짝 열리는 틈이 보였다. 태권도 특유의 돌려차기다. 기회. 한 스텝 뒤로 물러나 공격을 피한 뒤 상대 왼발이땅에 닿는 순간을 노려 섬광처럼 찔러 들어갔다. 앞차기가 그의명치에 꽂힐 찰라, 상대가 허리을 틀어 공격을 흘린다. 이어진왼손 정권 훅이 그의 쇄골(鎖骨)을 뚫었다. 상대가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일어나질 못했다.
지난해 6월 부산지부에 이어 서울 동작구 사당동에 ‘극진 가라데’ 도장을 낸 김경훈(32) 사범. 전설적인 무도인 ‘바람의 파이터’ 최배달(본명 최영의) 선생의 후예다. 최 선생이 입산수도로 깨우침을 얻은 뒤 고수들과의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지난 60년대초 창시한 것이 극진(極眞) 가라데. 전세계적으로 널리 퍼져있는데 반해 한국에는 그 전통이 미천한 수준. 때문에 김 사범이 서울에 처음 도장을 냈을 당시 그 실력을 확인하려 일주일이 멀다하고 도장을 찾아온 숱한 고수들과 ‘맞짱’을 떠야했단다.
“최배달 선생님이 고수를 찾아 바람처럼 세계를 떠돌았다면 저는 도장에 앉아 고수들의 끈질긴 도전을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였죠. 어쩌면 그게 실전을 중시하는 극진 가라데의 운명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원체 수련 강도가 높은데다 실전대련 경험이풍부해 어느 상대 앞에서도 주눅든 적은 없어요.”
반면 가장 두려운 것은 수련생들 앞에서 대련이 펼쳐진다는 점이었다. 고수들이 중국 무협영화에서 처럼 도장 현판을 떼려 찾아오지는 않았다지만 대련에 패할 경우 도장 운영이 불가능해진다.다른 한편으론 강자와의 맞선다는 것이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긴장감에 떨리는 일인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김 사범이 무예수련을 시작한 근본적 이유는 하나. 어려서부터 강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 극진 가라데가 끌렸다.치명적 살수(殺手)만 금한 채 직접 부딪혀 단박에 상대와 자웅을겨루는 데 극진의 매력이 있다. 고수들끼리의 대결이란 한두 수손만 얽어봐도 서로의 강약이 명확해 지는 법. 그게 쾌감이 돼돌아온다.
“남자들은 누구나 강해지고 싶은 타고난 본성이 있어요. 그런데이상하게 고된 수련을 통해 공력이 깊어져도 더 강해지고 싶은욕구는 줄어들지 않죠. 오히려 부족하다는 생각만 커지게 마련입니다.”
최배달 선생이 50여마리의 소와 대결해 26개의 소뿔을 자르고, 3마리를 즉사시키는 기행을 벌인 것도 다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사를 건 일본 한 전통 가라데 도장에서 벌인 100명 고수와의 대련. 또 2년 마다 산속에 들어가 배고픔과추위에 떨며 흐트러진 자신을 다잡았다는 고행도….
고등학교 1학년 이후 꾸준히 무예수련을 해온 그는 극진 가라데에 발을 들여놓기 이전 이미 유도 2단에 전통 가라데 5단의 고수였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타고난 파이터 기질때문이었을까. 그는 극진 가라데를 시작한 지 1년도 안된 지난 98년 중국(중부권)대회에서 3위에 올랐다. 전세계 1400만 수련인구가 있다는 극진가라데. 그중 200명 고수를 뽑아 무체급으로 진행된 대회에서 이같은 성적은 놀라운 것이다. 이후 그는 출전 대회마다 ‘톱10’안에 연이어 랭크되는 기염을 토했다.
놀랍게도 그의 극진 가라데 단수는 불과 3단. 그래도 어느 것보다 애착이 간다. 3단 이상은 도쿄(東京) 본부에 가서 치러야 하는데 승단심사가 까다롭기로 소문이 났기 때문일 것이다.
정권을 쥐고 구령에 맞춰 팔굽혀펴기를 흔들림 없이 100회를 하는 정권단련 및 파워 테스트. 또 물구나무를 선채로 앞뒤로 10m씩 움직이는 유연성 평가 등등. 무엇보다 평가비중의 80%를 차지하는 대련이 가장 어려운 관문. 승단시 도전 단(段)의 10배수의해당되는 유단자들과 맞대련을 해야 한다. “실전이 아니면 인정받을 수 없다”는 최배달 선생의 지도방침에 근거해 만들어진 룰.
김 사범은 1∼4단 고수 30명과 체급 구분없이 쉬지 않고 각각 1대1로 1분씩, 30분간 대련했다. 승률 3할이 안되면 낙방. 그는 20명을 꺾었다고 했다. 파워가 뛰어난 그였지만 16명째 대련자가나왔을때는 숨이 턱까지 찼고 주저앉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사진 촬영을 위해 그가 도복을 차려입고 나타났다. 1m76, 90kg의당당한 체구가 드러났는데 팔뚝이 초등학생 종아리만 했고 다리는 통나무 같아 도장 바닥을 울렸다.
쉐도우 복싱. 원―투 스트레이트와 앞차기. 이어 앞돌려 차기와양손 훅, 뒤 후려차기가 따른다. 보법은 태권도 같은 껑충거림이없고, 맨발이 바닥을 스치듯 낮고 가뿐하다. 끊어치는 타법에도복이 ‘휘릭’ 거센 바람소리를 낸다. 주위가 서늘해질 만큼가공할만한 힘이 느껴진다.
‘화권수퇴(花拳秀腿)’. 역시 꽃 같은 주먹 지르기와 빼어난 발차기는 없다. 극진이 멀리하는 수법이다. 실전에 쓸 수 없는 기예는 아예 수련을 안한다. 고수들은 실전에 들어가면 자신의 ‘필살기’ 하나로 승기를 잡는다고 한다. 아무리 단순하더라도 몸에 익고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방어와 공격술 한두 가지면 상대는 맥을 못추고 무너지게 돼 있다.
또 하나. 그가 15cm 두께 얼음 5장을 일격에 날리는 가라데 촙(당수)과 야구 배트 4개를 동시에 부러뜨린다는 발차기의 파괴력.극진 특유의 발경(發勁)에서 나온 듯하다. 흔히 무술에서 인체의 모든 힘을 끌어내 공격 하나에 실어낸다는 발경. 물리적인 힘만으로는 불가능해 보였다.
살펴보니 그의 권(拳)은 권투의 그것과 운용이 흡사했다. 동작을작게, 짧지만 끊어치는 정권 지르기와 돌려치기 속도가 빠르다.발차기는 몸쪽으로 대퇴부를 당겨 무릎을 접었다가 상대앞에서쭉 펼쳐 찬다. 마치 도리깨가 바닥을 내리치는 식인데 목표에 도달할 때 힘이 한 점으로 폭발한다.
이처럼 뛰어난 그의 기예는 수련에 밤낮을 가리지 않는 고투 덕분이다. 일주일을 3일씩 부산과 서울 도장을 오가면서도 오전에웨이트 트레이닝, 오후엔 러닝, 또 저녁엔 실전대련 연습에 매달린다. 그래서인지 “세상은 넓고 상수(上手)는 많다”는 최배달선생의 말이 가장 공감이 간다.
인터뷰 말미, 김 사범은 “수련이란 몸 움직이는 법만 연구하고배우는 게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강해져야 고수가 되는 거지요.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게 진짜 승리입니다”라며 부드럽게 웃었다.
전설의 승부사 최배달^^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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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 정말 대단한 사람이고 자랑스런 한국인입니다.
역쉬 우리는 배달의 민족~~!!
해서 자장면배달도 번개같이 신속하게...ㅎㅎ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최영의 만세 대한민국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