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懋)의 아들인 경양(敬養)의 부인은 전주이씨 밀성군파로 술지(述之)의 딸이다. 전주이씨 밀성군파(密城君派 세종왕자)는 전주이씨 가문에서도 가장 화려했던 가문이다. 이술지의 아버지는 노론4대신의 한 사람이었던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고 조부는 대제학 이민서(李敏叙)이며 증조부는 영의정 경여(敬輿)이다. 술지의 백부는 좌의정 이관명(李觀命)이다. 이경여의 졸기의 졸기를 본다.
“경여는 인품이 단아하고 몸가짐이 맑고 간결하였으며 문학에도 뛰어난데다 정사의 재능도 있어서 사림들에게 존중받았다. 젊은 시절부터 벼슬에 나오고 물러가는 것을 구차하게 하지 않았고 혼조(昏朝)에 있으면서도 정도를 지켜 굽히지 않았다. 계해반정(癸亥反正)에 맨 먼저 옥당에 뽑혀 들어가 화평하고 조용하게 간하니 사랑과 대우가 특별히 높았다. 고 정승 장유(張維)가 일찍이 한 시대의 인물을 평론하면서 말하기를 “이경여는 경악(經幄)에 있을 때에는 마음을 쏟아 임금을 인도하는 책임을 다했고 지방에 있을 때에는 임금의 뜻을 받들어 펴는 임무를 다했으니 지금에 있어서 재능을 두루 갖춘 자이다”고 하였다. 병자년 이후로 벼슬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인조가 그를 소중하게 여기고 신임하였으므로 발탁해 우상에 제수하였다. 그런데 이계(李烓)가, 경여가 명나라에 뜻을 두고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는다고 청나라 사람에게 고하여 두 번이나 심양에 잡혀갔었으나 몸과 마음가짐이 더욱 굳건하였다. 을유년 세자를 세울 때 자기의 소견을 변동하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서 남북으로 귀양살이를 다녔으나 상이 즉위하자 방면하고 수상에 제수하였다. 이 때 선비들의 의논이 매우 격렬하였으나 경여가 화평한 의논으로 견지하면서 이들을 조화시키는 데 온 힘을 기울였는데 혹 이를 그의 단점으로 여기기도 했다. 얼마 안 되어 청나라에서 경여가 정승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힐책하자 이때부터 정승의 자리에서 물러나 묻혀 살았다. 그러나 나라에 일이 있을 때마다 말씀을 올려 건의한 바가 많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73세이다.“
민서는 경여의 아들로서 큰집 종숙인 도정 후여(厚輿)의 아들로 출계하였다. 후여(厚輿)의 아버지는 참의 성록(成祿)이고 할아버지는 좌참찬 극강(克綱)이며 종조부가 극유(克維)로 극유는 유곤(柳坤)의 사위인데 유곤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 조상 인의공(諱 潤善)의 큰집 조카이다. 이극유의 사위가 이이첨인 것이다. 이민서의 졸기이다.
“이민서는 고(故)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의 아들인데, 〈성품이〉 강명(剛明) 방정(方正)하고, 간묵(簡默) 정직(正直)하였으며, 조정(朝廷)에 있은 지 30 년에 여러 번 사변(事變)을 겪었으나 지조(志操)가 한결같았고, 직위(職位)가 총재(冢宰)에 이르렀으나 문정(門庭)은 쓸쓸하기가 한사(寒士)와 같았으며, 한결같이 청백(淸白)한 절개는 처음에서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문장(文章) 또한 고상하고 건아(健雅)하여 온 세상의 추앙(推仰)을 받는 바가 되어, 국가(國家)의 전책(典冊)도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매양 매복(枚卜)할 때를 당하면 그 당시에 의논하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아무를 두고 그 누가 되랴?’ 하였다. 임금이 그의 강직(剛直)하고 방정(方正)한 것을 꺼려하여 그다지 우악(優渥)하게 총애(寵愛)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들어와 정승이 되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시대의 일에 근심이 많은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는 근심과 번민이 병이 되어 졸하였다. 조야(朝野)에서 슬퍼하고 애석해 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비록 평일에 서로 좋아하지 않았던 자라도 정직(正直)한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였다.”
후여의 어머니는 시문으로 유명하여 이이(李珥) 송익필(宋翼弼) 등과 함께 8문장으로 불리던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의 딸이다. 술지의 어머니는 광산김씨로 승지 만균(萬均)의 딸이니 만균은 대제학 익희(益熙)의 아들이며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증손이 된다. 김익희의 졸기이다.
“전 이조 판서 김익희(金益熙)가 졸하였다. 익희는 장생의 손자인 김반(金槃)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총명하여 일찍이 재능과 명망을 지녔으며 문사(文詞)를 잘하였는데 소장(疏章)에 더욱 능하여 붓을 잡으면 그 자리에서 완성하였고 주대(奏對)할 때마다 경전(經傳)과 사기(史記)를 인용하였으므로 상이 총애하고 신임하였다. 그래서 1년 내에 차례를 뛰어넘어 총재(冢宰)에 임명되고 겸해서 문형(文衡)을 맡았었다. 그러나 지론(持論)이 지나치게 준엄하고 성질 또한 급하고 편협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단점으로 여겼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 47세였다.”
술지의 조모는 좌의정 원두표(元斗杓)의 딸이다. 원두표는 원주원씨로 후손이 번창하였다. 원두표의 졸기이다.
“좌의정 원평 부원군(原平府院君) 원두표(元斗杓)가 죽었다. 원두표는 포의(布衣)로 정사 훈록(靖社勳錄)에 참여하였다. 어릴 때부터 뜻이 크고 강직한 기풍이 있어서 스스로 웅걸임을 자부하였는데, 성질이 자못 거칠고 오만하여 사론의 추앙을 받지 못하였다. 인조 말년에 김자점과 틈이 벌어져 각각 붕당을 세워 배척을 하였는데, 얼마 뒤에 김자점이 모역으로 죽음을 당하자, 의논하는 자들은 또한 원두표를 군자의 당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두표는 정사 공신 가운데에서 가장 늦게 정승에 올랐고, 지위에 오른 지가 오래지 않아 정승으로서 한 일이 드러낼 만한 것은 없었으나, 집에서는 효성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고 기백과 재주가 남보다 뛰어났다. 임종을 앞두고 올린 상소에서, 간절하게 사류를 키워야 한다는 것을 말하였는데, 사류들도 이것을 훌륭하게 여겼다. 아들 원만석(元萬石)과 원만리(元萬里)는 지위가 감사(監司)에까지 이르렀다.“
술지의 생가 증조모는 영의정 윤승훈(尹承勳)의 딸이다. 윤승훈은 해평윤씨로 조부는 문과에 장원을 하고 참판을 지낸 은필(殷弼)이고, 종조부인 은보(殷輔)는 단종의 장인인 여량부원군 송현수(礪良府院君 宋玹壽)의 손서이고 영의정을 지냈다. 술지의 부인은 영의정 김흥경(金興慶)의 딸이다. 김흥경은 경주김씨 태사공파인데 소현세자의 부인인 민회빈강씨(愍懷嬪姜氏)의 억울한 죽음을 직간하다 죽은 감사 김홍욱(金弘郁)의 증손으로 흥경의 후손은 한말에 이르기까지 크게 번창하였으며 좌의정 김도희(金道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등은 흥경의 후손이다. 김흥경의 졸기이다.
“치사(致仕)한 봉조하(奉朝賀) 김흥경(金興慶)이 졸(卒)하였다. 김흥경은 본성이 근실 검약하여 벼슬이 삼공에 이르렀으나 혁혁한 명성은 없었다. 아들 김한신(金漢藎)이 화순 옹주(和順翁主)에게 장가든 뒤로는 더욱 조심하여 도민(都民)들이 그 집안에 부마가 있는 줄도 모를 지경이었으니, 사람들이 이로써 자못 칭찬하였다.”
술지의 아들 후상(後祥)은 군수 신석화(申錫華)의 사위가 되었는데 신석화는 판서 정(晸)의 아들이며 영의정 신흠(申欽)의 증손자이다. 석화(錫華)는 여양부원군 민유중(驪陽府院君 閔維重)의 사위가 되어 숙종과는 동서이며 석화의 현손인 도정 신상현(申常顯)은 흥선대원군과 동서가 되었고 신상현의 아들인 신응조(申應祖)는 우의정에 올랐다.
무(懋)의 사위 황승원(黃昇源)은 장수황씨로 판서를 지냈다. 황승원은 황희(黃喜)의 후손이며 중조는 대제학 황정욱(黃廷彧)이다. 대제학을 지낸 황경원(黃景源)은 승원의 종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