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은 너무나 자주 사태를 오판한 결과로 발생한다. 유고 사태는 그런 의미에서 세르비아 및 연방군 지도부로 하여금 사태를 오판하게 만든 서방, 특히 미국과 유럽 공동체(EC)에게도 그 일단의 책임이 있다. 발칸 반도에서 전면전의 징후가 계속 보여지는 가운데 미국이 베오그라드측을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1991년 3월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미국은 일방적으로 유고 연방으로부터 이탈하려는 측에 지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를 겨냥한 발언을 했다. 게다가 같은 해 6월 베오그라드를 방문한 제임스 베이커 미 국무장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은 어떤 조건 아래서도 두 공화국의 독립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지 부시 제임스 베이커
미국의 외교 정책을 움직이고 있는 두 사람의 발언은 실상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독립 의지를 약화시키면서 대화를 통해 연방의 장래를 결정토록 하기 위한 지원 사격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연방군 사령부의 주요 지휘관들은 이를 다르게 해석했다. 즉 연방군이 무력 개입을 하더라도 서방측이 군사적 개입을 통해 적극 반대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서방의 이런 반응은 오히려 연방군의 전쟁 의지를 더욱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6월에 들어서면서 연방 체제를 느슨한 국가 연합 형태로 만들자고 세르비아측에 제의했지만 세르비아측은 결단코 이를 수용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했다. 1991년 6월 25일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마침내 독립 선언을 결행했다. 예상대로 베오그라드측은 독립 선언이 불법이라고 단언했으며 어떤 협상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연방군 수뇌부는 하루 종일 고민하며 작전 계획을 면밀히 재검토했다. 마침내 첫 공격지로 슬로베니아를 선택했다. 당시 연방군의 작전은 슬로베니아를 공격함으로써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양 공화국의 분리 독립 의지를 꺾는 데 그 일차 목표를 두고 있었다. 특히 크로아티아의 경우 세르비아 인과 크로아티아 인이 섞여 있어 일단 전쟁이 발발할 경우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나리라는 판단도 했다.
베오그라드 주변에 포진하고 있던 연방군은 6월 27일 슬로베니아로 진격해 들어갔다. 또 슬로베니아에 주둔하고 있던 연방군도 캠프를 떠나 작전 지역으로 이동해갔다. 그러나 연방군 지휘부의 판단과는 달리 슬로베니아 공격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닥치기 시작했다. 우선 슬로베니아 지역은 산악 지대라 탱크 등 중장비의 위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곳곳에서 중화기 부대가 고립된 데다 연방군의 사기 역시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노획한 전차에 슬로베니아 국기를 그리는 슬로베니아군
게다가 연방군 지휘부는 슬로베니아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슬로베니아 지역 방위군은 대국민 협조 체제를 완벽히 구축해 놓은 상태였다. 또한 지역 방위군은 나름대로의 철저한 훈련을 통해 군기를 유지하고 상당한 무기로 무장도 하고 있었다. 사실상 연방군이 슬로베니아 지역 방위군 무장 해제 작업에 실패한 이후로 슬로베니아는 많은 무기를 동유럽 국가 및 싱가포르 등지로부터 수입해 놓은 상태였다.
슬로베니아 군
슬로베니아의 강력한 저항은 연방군 수뇌부를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뜨렸다. 연방군 중기갑 부대는 슬로베니아의 산악 지대에 고립되었으며 사로잡힌 연방군 포로들의 모습이 압수된 무기와 함께 슬로베니아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되었다. 베오그라드에서는 전선에 배치된 자식들을 돌려보내라는 어머니들의 눈물 어린 항의 데모가 연일 벌어졌다. 연방군의 사기는 초장부터 저하되어 더 이상 떨어질 수 없을 정도였다.
연방군의 슬로베니아 공격이 위헌이라는 비판도 국내외에서 제기되어 연방군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이미 연방군은 슬로베니아를 공격하면서 ‘연방 정부의 권위’를 내세웠지만 연방 정부는 사실상 와해된 상태였다.
이미 앞에서 설명했듯이 1991년 5월 크로아티아 출신 대통령 위원회 위원 스티프 메시치를 세르비아측이 거부해 사실상 연방 정부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연방군의 공격은 연방 정부와는 관계없는 연방군 지도부와 세르비아측의 묵계 하에 시작되었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 셈이다.
스티프 메시치
베오그라드측의 입장을 지지한 듯이 보이던 유럽의 입장도 전쟁 발발과 함께 급변했다. 문명 대륙 유럽에서, 그것도 과거 냉전의 벽을 허물고 동,서 유럽이 하나가 되는 화합의 시기에 이처럼 비문명적인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와 비난이 일었다. 당연히 그 비난의 화살은 전쟁의 주역인 세르비아를 겨냥하고 있었다. 영국의 권위지인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바야흐로 유럽의 한쪽은 민족주의라고 이름할 수도 없는 부족주의(Tribalism)가 난무하고 있다.”며 강도 높게 비난하는 등 모든 여론이 세르비아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한편 유럽은 탈냉전 시대에 터진 첫 내전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이미 유럽은 1989년 동유럽 공산주의가 와해되면서 새 질서를 만들기 위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미국과 소련을 정점으로 한 냉전 시대를 결단코 청산하겠다는 희망이 유럽 대륙을 휩쓸고 있었던 것이다.
그 첫 번째 작업이 1990년 11월 파리에서 열린 유럽 안보 협력 회의(CSCE)였다. 알바니아를 제외한 전 유럽 국가와 미국, 캐나다 등 회원국들은 회의가 끝난 뒤 “유럽에서 대립과 분단의 시대가 끝났다”는 파리 헌장을 채택했다. 그야말로 냉전의 한 시대가 종말했음을 선언했던 것이다. 1,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동서 냉전으로 평화의 대륙을 그리워했던 유럽 인들은 이제야말로 진정한 평화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각 회원국들은 아예 CSCE를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로 상설 기구화했다. 이사회격인 외무장관 회의는 1년에 한 번 이상 열기로 했으며 산하에 사무국(프라하), 분쟁 방지 센터(비엔나) 그리고 자유 선거 감시 기구(바르샤바)를 각각 두기로 했다. 특히 유럽 각국은 기존의 유럽 공동체(EC)를 유럽 연합(EU)으로 탈바꿈하면서 유고 위기 해결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유고 위기는 바로 이 같은 새 안보 체제의 능력을 처음으로 시험해 볼 수 있는 지렛대라는 점에서 유럽 전체의 위기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유럽 공동체는 전쟁이 발발한 다음날 당시 EC 의장국이던 네덜란드를 포함해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등 3국의 외상을 급파해 중재에 나섰다. 우선 연방으로부터 이미 독립을 선언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의 두 공화국에 대해 독립을 일정 기간 유예할 것을 요청하는 동시에 세르비아 공화국의 반대로 무산된 연방 대통령 선출 재개를 각각 요구했다. 그러나 문제는 정작 EC 내부에 만연한 유고 문제에 대한 이견이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소수 민족의 독립 요구를 일면 인정하면서도 그 결과가 전 유럽으로 확산돼 정치 질서가 급변할 가능성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EC 지도자들은 이 같은 국가 간의 이견을 덮어 둔 채 유고 문제가 유럽의 문제인 만큼 유럽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다. 유고 문제를 미국인의 손에 맡길 수 없다고 단언한 헬무트 콜 독일 총리의 말이 이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초반부터 EC 내 불협화음이 나오면서 유고 사태를 악화시켰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유고 연방이 하나여야 한다는 논리에 집착하고 있었던 반면, 유고 연방 분리가 바람직하다는 독일도 자국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헬무트 콜
미국 정부는 일단 유럽의 문제는 유럽 인이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6월 30일의 국무부 성명을 통해 유고 연방군이 더 이상의 무력을 사용할 경우 미국과 유고 관계에 문제가 발생할 것임을 강력히 경고함으로써 연방군과 세르비아측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했다.
7월 1일 유고 문제를 다루기 위한 국제 회의가 CSCE의 비엔나 분쟁 방지 센터 주관으로 열린 데 이어 프라하에서 CSCE 위기 관리 회의가 계속 열렸지만 뚜렷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EC 지도자들은 이와는 별도로 유고에 대한 경제 제재 조치 등을 검토했으나 이 역시 각국의 이견이 많았다. 독일은 EC가 향후 5년간 유고에 제공할 예정인 9억 2천만 달러 상당의 차관 공여 중단을 제의했지만 역시 일부 회원국의 반대로 결정이 유예되고 말았다.
한편 전쟁 상태에 돌입한 연방군과 슬로베니아는 간헐적인 총격전 속에서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노력이 단편적으로나마 계속되고 있었다. 전쟁이 터진 후 안테 마르코비치 연방 총리는 류블랴나에서 밀란 쿠찬 대통령을 비롯한 슬로베니아 지도자들과 내전을 막기 위한 막바지 협상을 벌였지만, 슬로베니아 국회는 30일 오전에 열린 비상 회의에서 독립 선언을 유보할 수는 있으나 취소할 수는 없다고 재확인함으로써 연방군의 최후 통첩과 팽팽히 맞섰다.
안테 마르코비치 밀란 쿠찬
이때 연방군은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 3개국과 접한 슬로베니아 측 28개 국경 검문소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슬로베니아 내륙 지역으로 들어간 연방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국방부는 성명을 통해 슬로베니아에 주둔한 연방군의 향후 작전은 필요치 않다고 발표했으나 일부 지역에서의 총격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전쟁 자체가 지지부진해지자 EC 3국 외무장관들의 중재도 가속이 붙었다. 마침내 양측은 연방군의 병영 복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독립 선언 3개월 유예, 크로아티아 출신 스티프 메시치의 연방 대통령 취임 등 3개항을 골자로 하는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크로아티아 공화국도 모든 신경을 전쟁에만 쏟고 있었다. 연방군의 차기 목표가 바로 크로아티아인 만큼 민병대와 예비군에 동원령을 내리는 등 연방군의 침공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크로아티아 공화국에는 60만 명에 육박하는 세르비아 인이 거주하고 있는 데다 세르비아 인이 거주하는 상당수의 지역에서 세르비아 민병대가 무장되기 시작해 간헐적으로 크로아티아 병력과 충돌을 빚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위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크로아티아에 거주하는 세르비아인 인구 분포도(1981년 인구 조사 기준)
EC가 중재한 휴전 협정이 발효됨에 따라 스티프 메시치가 연방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슬로베니아에서 작전을 펴고 있던 연방군도 병영으로 복귀하였다. 한때 사태가 수습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방군 내부에서는 향후 군의 진로를 놓고 심각한 갈등이 야기되고 있었다. 휴전 협정에 동의했던 연방의 벨리코 카디예비치(Veljko Kadijevic) 국방장관이 온건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반면 침공 작전을 직접 지휘한 블라고예 아지치(Blagoje Adjic) 참모총장은 강경파를 대표했다. 특히 아지치 장군은 2차 세계대전 때 그의 가족들이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요원들에 의해 피살당했던 과거를 가진 인물이었다.
벨리코 카디예비치 블라고예 아지치
메시치가 연방 대통령으로 취임한 7월 2일 연방군은 완전히 강경파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이날 저녁 베오그라드 TV에서는 아지치 연방군 참모총장이 이례적으로 출연했다.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연방군은 전면전이 일어나야 된다면 그 도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공언하고 완전한 승리를 이룰 때까지 계속 싸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발언은 당시까지 나온 군부 발언 중에서 가장 강경한 것이었다.
예상대로 이날 오후부터 이틀 동안 연방 공군기까지 가세한 공방전이 슬로베니아 전역에서 계속되었다. 3일 오후 늦게 슬로베니아 지역 주둔 연방군 사령부는 성명을 발표해 휴전을 선언했지만 그것은 일종의 속임수였다. 다음날 아침 약 180대의 탱크와 수천 명의 병력을 실은 트럭이 베오그라드를 출발해 오후 늦게 크로아티아 국경 지대에 도착하는 것이 속속 확인했기 때문이다.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로 진격을 준비중인 유고슬라비아 연방군
연방군이 형식적으로나마 모양새를 다시 갖춘 연방 정부에 대해 사실상 명령 불복종을 하고 있다는 보도가 계속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슬로베니아의 디미트리 외무장관은 이웃의 실질적인 도움이 없다면 슬로베니아는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며 국제 사회에 도움을 호소하고 나섰다.
당시 제임스 베이커 미 국무장관은 유고 군이 민간 정부의 지휘를 받고 있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고 하면서 유고에 대한 경제 원조 중단과 함께 군사적 봉쇄론까지 언급하고 나섰다. 헬무트 콜 독일 총리도 연방군이 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 병력을 증강한다면 독일의 원조도 중단할 것이라고 세르비아측에 강력히 경고했다.
사태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EC의 중재 노력도 점점 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 외무장관 한스 디트리히 겐셔는 7월 2일 유럽 안보 협력 회의(CSCE) 분쟁 처리 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오스트리아의 클라겐푸르트에서 밀란 쿠찬 슬로베니아 대통령을 만났고, 이어 3일 프라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위원회를 소집했다.
한스 디트리히 겐셔
바츨라브 하벨 체코 대통령은 분쟁 처리 위원회 개막 연설에서 유고 연방군의 강경 진압을 강력히 비난했다. 또 EC 12개 회원국은 이와는 별도로 7월 5일 외무장관 회의를 소집,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중재 노력을 강화하는 한편 베오그라드측에 대한 경제 제재 등의 실질적인 압력을 가하는 방안도 집중 논의했다.
바츨라프 하벨
유고 내전 초기 국제 사회의 중재는 이처럼 EC와 CSCE를 두 축으로 진행됐다. 베이커 미 국무장관도 이미 6월에 베를린에서 열린 CSCE 외무장관 회담에서 유고 등 불안이 증대되고 있는 지역에 대한 ‘평화 유지’의 역할을 CSCE가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밝혔었다. 또한 페레스 데 케야르 유엔 사무총장도 7월 3일 유엔이 개입해 오히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함으로써 크로아티아의 제안처럼 유엔 평화 유지군의 파견 등은 당분간 고려될 수가 없었다.
페레스 데 케야르
어떻든 ‘유럽의 문제는 유럽 인이 해결하겠다’던 EC의 중재 노력은 사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미국이나 유엔의 개입을 견제하면서 분쟁 해결을 시도했던 EC의 중재가 유고 사태를 악화시킨 것이다. 유고 사태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던 유럽에 동시에 기회와 시련을 주었지만 그 결과는 시련으로만 끝나고 말았다.
국제 여론은 세르비아와 연방군에 본격적으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콜 독일 총리는 “탱크와 무력으로 짜깁기해 놓은 나라는 한 나라라고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 부시 미국 대통령은 “유고슬라비아가 내,외부적인 국경선의 변화가 있다 하더라도 유고 문제는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대화로 해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제적인 분위기는 애당초 연방군이 생각했던 방향과는 완전히 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슬로베니아의 전황은 확실히 수습 국면이었다. 슬로베니아 주둔 연방군은 부대로 복귀했고 슬로베니아측은 연방군 포로를 석방했다. 연방군이 점령했던 슬로베니아측 국경 검문소 관할권은 다시 슬로베니아측에 넘겨졌다. EC측 감시단도 속속 들어와 휴전 협정 준수 여부를 감시하였다.
협약에 의해 슬로베니아에서 철수하는 유고 연방군
유고와 인접한 각 나라들도 유고 사태에 대단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그리스, 알바니아 등 유고 인접 7개국 외무장관들은 7월 7일 부다페스트에서 회합을 가졌다. 특히 상당수의 자국민이 유고 내에서 살고 있는 헝가리와 알바니아 등은 유고의 분리가 불가피함을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요지프 안탈 헝가리 총리는 아예 각 공화국 및 자치주에 독립 주권을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공식 표명하기도 했다.
슬로베니아에 대한 선제 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하여 연방 분리를 보려던 연방군 지도부는 이 냉각 기간 동안 많은 대안을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슬로베니아 전투는 오히려 국제 여론을 악화시켜 놓았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연방군의 허점을 내외에 공포한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연방군 지도부는 슬로베니아의 독립이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대세임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전쟁 직전 연방군 지도부가 내세운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의 독립을 막는 연방 보존의 군사 전략이 사실상 불가능함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제 그 대안은 바로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주장해 온 대세르비아주의밖에 없었다. 슬로베니아 전투가 휴전에 들어간 시점부터 연방군과 세르비아 정치 지도자들간의 결합이 더욱 공고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마침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결정적인 전기를 잡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7월 7일 세르비아 지역 방위군을 사열한 자리에서 “이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고 이례적으로 강조했다. 이 대목을 향후 전투 목표가 세르비아 인의 생활권을 사수하는 대세르비아주의임을 내외에 공포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결국 슬로베니아 전투는 연방군에게는 타격이었지만 밀로셰비치에게는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선 밀로셰비치의 충복들이 자리하고 있는 세르비아 과학 예술 아카데미의 전문가들이 언론을 완전히 장악해 대세르비아주의를 선동하는 한편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에 대한 악의적인 반감을 계속 불러일으켰다. 평화를 외치던 일부 재야 민주 인사들은 모두 언론에 의해 ‘배신자’로 낙인 찍혔다. 더욱이 정계에 진출한 야권도 밀로셰비치에 대해 드러내 놓고 반대하지 못하는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베오그라드에 위치한 세르비아 과학 예술 아카데미의 건물
당시 세르비아에서 유일하게 밀로셰비치에 도전하고 있던 단체는 ‘세르비아 갱신 운동’이라는 극우 왕당파 단체였다. 한때 공산주의자였으며, 그 후 반공주의자로 돌아선 작가 부크 드라스코비치(Vuk Draskovic)가 중심 인물이었다. 그는 왕정 부활과 세르비아 정교회의 절묘한 결합을 그 이상으로 내세운 복고주의자였는데 7월부터는 이 ‘세르비아 갱신 운동’ 산하에 ‘세르비아 경호대’라는 무장 민병대를 창설했다. 군사 자금은 베오그라드의 갑부인 브라니슬라프 마티치(Branislav Matic)라는 인물로부터 조달되었다.
부크 드라스코비치 브라니슬라프 마티치
세르비아 경호대
밀로셰비치 진영은 즉각 이 단체를 고사시킬 전략을 구사하여 이 세력의 주요 인사를 제거하는 작전에 돌입했다. 세르비아 경호대 사령관 죠르제 보조비치(Djordje Bozovic)가 첫 타겟이 됐다. 그는 8월 3일 베오그라드의 한 호텔에서 경찰의 추격을 받다 2층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다리가 부러진 채 간신히 현장을 벗어나 그나마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바로 그 다음날 이 단체의 자금원이었던 베오그라드 갑부 브라니슬라프 마티치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몸에 여러 개의 구멍이 뚫릴 정도로 많은 총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죠르제 보조비치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부크 드라스코비치는 즉각 세르비아 정부를 이렇게 비난했다. “이제 세르비아 지도자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세르비아 지도자들이 내밀 수 있는 카드는 오직 하나, 끝이 없는 전쟁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과의 전쟁이며 궁극적으로는 세르비아 민중과의 전쟁이 될 것이다.” 세르비아 정부는 드라스코비치의 비난을 못 들은 척 넘겨 버렸다. 세르비아 정부 입장에서는 드라스코비치까지 제거할 경우 그 책임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드라스코비치의 서방 언론에 대한 회견을 종합하여 이 테러 사건을 분석해 볼 때 세르비아 정부의 개입은 명확히 드러났다. 자금원 마티치 암살의 주범은 세르비아 사회당(공산당) 의원으로 있는 보이슬라프 세세이(Vojslav Sesej)였다. 세세이는 밀로셰비치의 충견으로 그의 사주를 받아 마티치를 암살했다.
보이슬라프 세세이
세세이는 공산당 시절 감옥까지 갔다 온 전투적인 민족주의자로 세세이 자신이 사병까지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드라스코비치를 극도로 싫어하는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이 테러 사건이 일어난 직후 국회 발언을 통해 “정부가 드라스코비치의 ‘세르비아 경호대’를 해체하는 단호한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베오그라드는 (마피아의 준동으로 도시가 마비되어 버린) 1920년대의 시카고와 똑같아질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어떻든 이 같은 상징적 사건은 결국 세르비아에서 밀로셰비치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살아 남을 수 없다는 강력한 경고였다.
1991년 부코바르에서 부하들을 지휘하는 세세이
1991년 8월은 유고 내전이 뉴스의 뒷전으로 밀리고 세계의 모든 눈과 귀가 소련으로 쏠렸다. 소련의 보수 세력이 휴양 중이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을 감금한 채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사건이 사건이니만큼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쿠데타에 반대하거나 아니면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해 헤매고 있었다. 그런데 이 쿠데타를 유일하게 환영한 곳이 바로 세르비아였다.
1991년 소련의 불발 쿠데타
세르비아 사회당 이데올로기 담당 비서는 8월 20일 이례적으로 기자 회견을 자청해 소련의 쿠데타 주도 세력을 적극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내 각 공화국이 실질적 주권을 가지는 느슨한 국가 형태인 독립 국가 연합을 만들려 하고 있으며, 이는 소련을 해체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쿠데타 세력에 대해서도 전세계의 평가와는 달리 ‘강인하지만 결코 독단론자가 아닌 사람들’이라고 칭송까지 했다.
결국 이를 뒤집어 보면 강력한 연방과 사회주의 유지라는 측면에서 유고 연방군은 소련의 쿠데타 주도 세력에 대해 ‘형제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소련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면 새로운 소련의 집권 세력은 유고 연방군을 국제적으로 강력히 지지했을 것이며, 이럴 경우 유고 연방군도 대대적인 공세로 국면 전환을 꾀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연방군 장성들이 1991년 1월 연방으로부터 독립하려던 발칸 3국에 대해 소련군이 무자비한 진압 작전을 펼치자 이를 높이 평가한 데서도 분명히 드러난 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