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성령은 연구 대상이 아니라 궁극적 체험의 대상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구속 역사를 체험적으로 알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성령님을 너무 신학적으로 알아왔고, 단순히 성경공부 시간에 연구하는 쪽으로 그분을 알아왔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그분에 대해서 논쟁하는 데 시간을 많이 허비해 버렸습니다. 만일 우리가 단지 그분의 대해 논쟁만 일삼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과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를 도모해야 합니다. 이것 없이는 성령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목적이 간과됩니다. 찰스 스윈돌은 "우리의 방어적인 태도나 완악한 심령 및 거만스러운 지식으로 인해서 성령께서는 근심하십니다. 그러한 일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이 심각한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스펄존 목사도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에 의해 이루어진 모든 사실을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나타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혈육상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관한 개념을 이해하기란 그다지 어렵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 역시 그다지 이해하기 어렵지가 않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몸을 입고 탄생하셔서 우리처럼 어머니 품에서 자라나셨습니다. 그분도 혈육을 가진 인간이시므로 그분의 존재에 대해 우리가 신비한 수수께끼 같은 인상을 거의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분의 역할도 우리에게 뚜렷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고난과 죽으심을 잘 알기 때문에 그분께 친근감을 가지며 감사를 표합니다. 하지만 성령에 대해서는 그분의 사역과 활동 역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성령이라는 심오한 주제를 비인격적인 거리감을 두고서 냉랭하게 이론적으로만 분석해 들어간다면, 별다른 결실을 얻기가 힘들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학적인 진리를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성령의 심오한 사역들을 보다 인격적으로 탐구하되 체험적으로 알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의 사역들 중에는 체험적으로보다는 이론적으로 고찰되어야 할 부분들도 없잖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고찰할 수 없는, 우리가 거의 체험으로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부분은 더 많이 있습니다. 이론적 지식만으로는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저는 보수적인 교단에서 신학하면서 자라왔습니다. 대구에서 그래도 어느 정도 큰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10년 이상을 섬겨왔습니다. 부교역자로 있을 당시 나름대로 열심도 내어보았습니다. 지식적으로 얻은 것을 가지고, 신학적인 내용으로 가르쳐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되돌아보면 참으로 미련한 순간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조금씩 체험적으로 성령님을 알아가면서 이전에 알고 있었던 것이 너무나 작은 것이었다는 것이 제 마음에 점점 더 느껴져 옵니다.
요즈음 가끔씩 인터넷 여러 곳에 들어가 봅니다. 들어가 볼 때 여러가지 내용으로 자료들이 올라와 있지만 저는 특히 영적인 것에 관심이 갑니다. 그 중에 아직도 지식으로 알고, 신학적으로만 알되 성령을 체험적으로 알지 못하여 은사를 부정한다든지, 교회에 문제만 일으킨다는 쪽으로 보는 자들을 볼 때마다 꼭 저의 과거를 보는듯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그 능력을 체험하지 않고서 책상에 앉아서 성령을 근심케 해 드리는 것과 성령을 소멸하는 것 간의 차이를 설명한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성령께서 보혜사 혹은 위로자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무슨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오순절 마가 다락방의 성령의 역사를 고찰한다고 해서 교회부흥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성령님을 체험적으로, 인격적으로 깊이 알아야 합니다.
1. 성령님을 알라.
1) 성령님은 단순한 능력, 영향력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이라고 하면 방언을 생각합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방언하는 사람, 병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 예언하는 사람을 연상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령을 능력적인 어떤 것, 세력이나 영향력으로 생각하거나, 감정적인 어떤 것, 뜨거운 무엇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비 인격체로 생각하여 물건 다루듯이 취급할 때가 있습니다. 나도 이전에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는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라는 말씀에 입각하여 성령의 권능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때에는 권능받아 뭔가 한번 해 보겠다는 심보였습니다. 교회를 부흥시키고 내 이름을 내고, 내가 이러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 기도할 때 이렇게 교만한 기도를 드린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성령을 체험적으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내 중심이었고, 내 뜻을 앞세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체험적으로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고 힘과 능력으로만 알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단순히 하나님을 나타내는 힘, 능력이 아닙니다.
2)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들로 인해 풍성한 축복을 얻으려면 그것을 알고 또한 알게 되므로 그것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소유해야 합니다.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는 그리스도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주님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이 비밀을 아는 자는 다른 모든 것을 기꺼이 배설물로 여길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30년동안이나 함께 하면서도 예수님을 나사렛 목수 정도로만 알았습니다. 그후 제자들은 3년동안이나 예수님과 동거 동행하면서도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세례를 받은 후 그들은 온전히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열매에 대해 알려면 그것을 맛보아야만 합니다. 빛을 이해하려면 그 안에 있으면서 사용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알려면 그와 사귀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얼마전 집회 참석차 홍콩을 다녀왔습니다. 홍콩에 가보니 생각하던 것과 많이 달랐습니다. 어려서 부터 홍콩에 대해서 많이 들어왔습니다. 대단한 도시로 알고 있었읍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내가 알고 있었던 것과 많이 달랐습니다.
우리 말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백번 듣는 것 보다 한번 보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말입니다. 홍콩이 그러했습니다. 백번 듣다가 한번 가서 보니 어느 정도 확실히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보다 '백문이 불여 일 체험'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알아도 한번 체험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지식이 나쁜 것이 아니라 체험에 비하면 못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알려면 내 안에 계신 그분에게 완전히 사로잡히는 것 외에는 달리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성령께 사로잡혀 성령 안에 사는 것이 성령을 아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3) 이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에베소서 1장 17절에서 19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아는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계시'라고 하는 말만 나오면 신학에 치우쳐 있는 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계시는 끝났다'고- 인터넷에 가끔 이러한 글이 올라옵니다. 예언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는 자들입니다. 계시가 있으면 다시 성경을 쓰게 되는 것과 같은데 무슨 계시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사기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을 기록할 계시는 끝났습니다. 그러나 계시의 정신이 되시는 분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경을 기록할 수 있도록 계시하셨던 그분이 지금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계시의 정신으로 우리를 돕는다면 예언도 할 수 있고, 주님의 음성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깊은 것도 알 수 있고, 장래 일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4) 성경을 통하여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하기 위해서 성경에서 성령을 어떻게 말씀하시는가를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