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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학>, 2012년 봄호.
<서정시학 집중 조명>
고래에 관한 풍문 외 4편
이건청
사람들이 고래를 묻었다고 한다. 흙을 파고 고래를 묻었다고 한다. 통째로 묻었다고 한다. 이 도시 어딘가에 고래를 묻었다고 한다. 몸통에 따개비가 붙은 채 묻었다고 한다. 이따금, 분기를 뿜어 올리면서 고래가 뭍으로 올라왔다고 한다. 바다를 버리고, 그래야 한다는 듯이 사람 세상으로 올라왔다고 한다. 수평선도 버리고 해 뜨는 바다도, 해 지는 바다도 그냥 두고 왔다고 한다. 도시 한 복판, 국회의사당 앞마당이나 광화문 네거리, 시청 앞 광장까지 와서 사람들이 파놓은 어둡고 음습한 흙을 찾아 누웠다고 한다. 소신공양하듯, 누웠다고 한다. 이 도시 어딘가에 촉루가 되어가는 고래가 있다고 한다. 몇 알갱이 사리가 되어가고 있는 고래가 있다고 한다.
새들은 낭가파르밧에서 죽는다
꿈을 찾아가는
새들은
날개를 파득여
하늘 높이 떠오른 다음
흐린 대륙을 넘어간다고 한다.
낭가파르밧 설산을 넘는
지친 새들이
목숨을 놓는 거기
‘새들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날아가던 모습 그대로
날개를 펼친 채
두 다리도 펼친 채
눈 벼랑에 박혀 죽는
기진한 새들이 있다고
한다.
눈 벼랑에 박혀서
사리로 굳어가는
새들의 꿈이 있다고 한다.
* 낭가파르밧 : 히말라야 산맥의 서쪽 끝부분에 위치한 험한 봉우리. 세계 9번째 높이.
선묘
길 하나가
휘어진 곳
사과 밭이 눈발을 부르는
저 비탈 어딘가에
절간이 있고,
사내 하나를 위해
천년동안 암반을 들쳐 메고 있는
여자가 있다고
한다.
저무는 산
하나나 둘
아니, 아니
사내 하나를 위해
저 산맥의 연봉 모두를
펼쳐 들고
풍설 속에
화엄의 날을 부르고 있는
여자가 있다고 한다.
* 선묘 : 부석사 창건 설화. 의상대사를 흠모해 용이 되어 따랐다는 중국 산동반도의 처자.
입춘
아지랑이는
논둑길 너머에서
아련한데,
겨울을 견뎌낸 냉이도
잠에서 깨어나
푸릇푸릇 제 몸을
추스르고 있는데,
아지랑이는
세상이 만든 얼음 벼랑들을
벼랑이란 벼랑 모두를
조금씩 녹이면서
피어오른다.
사람의 길 막아섰던
벼랑들이 녹고
녹은 벼랑들이
물이 되어 흐르는
봄 개천가엔
여린 돌미나리가
수줍게 고개를 치켜들고
사람 세상으로
푸른 향기를 실어내고 있다.
댕기머리물떼새
돌잡이 손자
한울아,
저 새가
댕기머리물떼새란다.
짠 바다 곁에
힘겹게 서 있구나,
작은 날개
파득여서
바다를 끌고 밀고 온
저 새가
댕기머리물떼새란다.
수평선 너머까지
날아가서
제일 먼저 뜨는
아침 해를
건져온 게
저 새란다.
새벽 바다에서
튀어 오르는 저
눈 시린
멸치 떼까지를
모두 불러온 게
저 새란다.
일출의 바다에
파득이는
눈 시린 저 멸치 떼를
불러온 게
저 조그만 새란다.
이건청(李健淸)
1942년 경기 이천 출생.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반구대 암각화 앞에서』『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석탄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외.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목월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 수상. 현재 한양대 명예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
<대담>
맹문재 : 선생님, 안녕하세요. 지난번 김규동 선생님의 장례식 때 뵙고 오랜만에 인사를 드리네요. 한국시인협회 일로 바쁘실 것 같은데, 요즘 근황은 어떠신지요?
이건청 : 시인협회 회장의 임기가 3월이면 끝나게 됩니다. 그동안 퍽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사람에게 친근한 시’, ‘사람에게 유용한 가치를 전해주는 시’를 널리 펴는 운동을 해왔습니다. 시인협회는 살아 움직이는 단체가 되어야 하고, 협회의 존재 의의를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었습니다. 여기 저기 얼굴을 보여야 할 곳도 많았습니다. 이제 임기를 끝내고 나면 좀 여유로운 시간 속에서 시를 기다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맹문재 : 곧 서정시학사에서 시집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최동호 선생님께 들었는데 준비는 잘하고 계시는지요? 이번 시집에서 특별히 추구하시는 면이 있는지요?
이건청 : 최 교수의 배려로 저의 열한 번째 시집을 펴내게 되었습니다. 이번 시집을 내면서 감회가 없지 않습니다. 저는 금년에 육신의 나이 만 70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좀 유별난 감회를 느끼고 있습니다. 50이나 60을 맞을 때의 감회와는 전혀 다른 것 말입니다. ‘내게 있어서 시는 무엇이었고, 그동안 나는 시를 쓰면서 얼마쯤의 내 몫을 남기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런 물음은 물론 내 생애의 유한성을 앞에 두고 자신에게 던지는 아주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성찰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제 저는 모든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상식과 타성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유년 이건청’을 만나고 거기서 시적 감각과 상상력을 다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시집에서 저는 비교적 ‘간명하고’, ‘단순한 것’을 지향하는 시편들을 시도해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물’들과의 친교를 넓히면서 ‘감각’을 회복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나이는 도리 없이 늘어가지만 감각이 ‘늙은 시’는 쓰지 말자는 자각도 했습니다.
맹문재 : 선생님께서는 『이건청 문학선집』을 4권으로 엮으셨으므로 작품 정리를 나름대로 하셨다고 보이네요. 그래서 이번 대담에서는 그동안 쓰신 작품세계를 차례대로 들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후학들이 선생님의 시세계를 연구할 때 나침반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첫 시집은 『이건청 시집』이라는 제목으로 1970년 월간문학사에서 간행했습니다. 박목월 선생님께서 서문을 쓰셨는데 “현대정신의 위기와 심연을 의식의 심층에서 형상화”한 작품들이 “잘 익은 과일”과 같다고 칭찬해주셨습니다. 후기를 읽어보니 전봉건 선생님께서 시집 발간을 도와주신 것 같은데, 첫 시집의 발간 상황을 좀 들을 수 있을까요?
이건청 : 시집 제목이 『이건청 시집』이어서 좀 쑥스럽기도 합니다. 시집 제목이 그렇게 된 것은 몇 개의 제목을 두고 고심하면서 박목월 선생님께 상의를 드렸더니, “그리 선택이 어려우면 그냥 ‘이건청 시집’이라고 하면 어떻겠노”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건청 시집』이 된 것입니다. 좀 더 고심해서 적당한 제목을 선택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월간문학사에서 간행한 것은 친구인 소설가 이문구가 『월간문학』에 근무하고 있어서 그리 된 것입니다. 그때 막 창간된 『현대시학』의 전봉건 선생께서 풋내기 신인인 제게 시단월평의 지면도 주시면서 애정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일종의 멘토를 자임하셨던 것이지요. 그 시집의 표지 장정, 구성 등을 전봉건 선생님께서 도와주셨지요.
저는 박목월 선생님 문하에 한 10년쯤 드나들면서 시 공부를 했습니다. 물론 제 시적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겠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항상 좌절만 느끼면서도 가슴 두근거리며 선생님 댁을 드나들던 그 10년이 제게는 퍽 유용한 시기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시에 대한 어느 정도의 ‘눈’을 가지게 되고 ‘가치관’을 지니게 된 것이 그런 수련과 내공 속에서 축적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새삼 선생님께 감사함을 느낍니다. 시를 쓰려는 사람들은 좀 더 진지하고 깊이 있는 공부를 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어떤 면에서 소위 ‘문청시절’이 길면 길수록 좋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10여 년 문청시절을 끝내고 제가 시단에 첫 발을 들여 놓게 되었을 때, 선생님께서는 제게 두 가지 말씀을 주셨습니다. “앞으로 네가 타작은 쓰지 않을 것이다” 하시는 격려의 말씀과 “네가 앞으로 시를 쓰다보면, 이쯤 되면 되었지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 네 시가 매너리즘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라”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지금도 늘 자신을 경계하는 경구의 말씀으로 새기고 있습니다.
1970년 5월에 간행된 『이건청 시집』은 박목월 선생님께서도 지적하셨듯이 ‘현대정신의 위기와 심연을 의식의 심층에서 형상화’하고자 한 작품들을 싣고 있습니다. 내면 추구의 이미지 중심 시편들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그 모습들은 <현대시 동인>들의 작업과 동궤에 놓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맹문재 : 첫 시집의 작품들에서는 귀뚜라미, 가을 연가, 우수, 봉선화 같은 서정적인 시어들보다 제분공장, 네온, 메스, 배선공사장, 기계, 칼 등의 물질적이고 도시적인 시어들이 인상적인데, 의도한 면이 있는지요?
이건청 : 그런 이미저리들이 바로 앞에서 지적한 ‘현대정신의 위기와 심연을 의식의 심층에서 형상화’하려는 노력들을 구체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맹문재 : 첫 시집을 간행한 해에는 서대선 선생님과 결혼도 하셔서 행운이 겹쳤네요. 전집에 실려 있는 화보를 보니까 서 선생님께서 한양대의 전교 수석으로 졸업하셨다니 놀랍네요. 또 몇 해 전에 『천년 후에 읽고 싶은 편지』(새미, 2009)라는 시집을 간행하셔서 시인도 되셨습니다. 인생의 이러저러한 면들을 차분하게 담은 시편들이었는데, 서 선생님의 소개를 부탁드릴까요?
이건청 : 한 40여 년 함께 살아오면서 상호 교감 속에 시적인 재능이 싹트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집에 배달되어 오는 시집의 독자가 되어 많은 시들을 공들여 읽고, 또 좋은 시를 만나면 함께 평을 주고받기도 하는 사이에 혼자 시를 써서 자신의 블로그에 남겼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 무심히 그걸 보게 되었는데, 습작이 한 300여 편 쌓였더라고요. 나름대로 진정성이 깃든 시편들이었어요. 그래서 집 사람 갑년 되는 해에 시집으로 묶어내게 되었습니다. 요즘엔 집에 배달되어 오는 시집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서평 쓰는 일에도 몰두하고 있답니다. 하루 접속 건수가 30만 정도 된다는 인터넷 신문「문화저널 21」의 고정 필진입니다. 대학원에서는 특수교육학을 전공했고 지금 신구대학교에 재직하고 있습니다.
맹문재 : 첫 시집을 낸 지 5년 만에 두 번째 시집 『목마른 자는 잠들고』를 조광출판사에서 간행했습니다. 이 시집에서는 「심봉사전」과「황인종의 개」 연작시가 단연 눈에 띄네요. 자서에서 “비정한 현실에 던져진 존재를 확인하고 초극하려”는 의도로 쓰셨다고 했는데, 좀 더 설명해주실 수 있는지요?
이건청 : 그 시집이 간행된 것이 1975년이었습니다. 눈먼 사람 ‘심봉사’와 ‘황인종의 개 한 마리’는 아마 그 시기의 제 심리를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객관적 상관물들일 겁니다. 30대 초반의 한 남자가 겪어야 했던 ‘한국의 1970년대’는 좌절과 절망이 중첩된 상황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나’를 찾아야 하는 것이 시인으로서의 책무이기도 했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맹문재 : 세 번째 시집을 얘기하기 전에 박목월 선생님에 대해서 듣고 싶네요. 스승으로 모시던 박목월 선생님께서 1978년 작고하셨습니다. 그 후 선생님께서는 『심상』에서 손을 떼었고, 경기도 이천으로 이사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한양대의 전임강사로 부임하셨습니다. 박목월 선생님과의 인연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을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점을 특히 존경했는지요?
이건청 : 제가 박목월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1959년, 양정고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학교 문학 행사에 선생님을 초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댁으로 찾아가서 뵙게 되었지요. 그때, ‘시인’이라는 감동적 영감을 지니게 된 것 같습니다. 작품을 써서 선생님 댁을 드나들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문청시절 10년’이 시작된 것이지요. 그때부터 선생님의 지근거리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1973년에 창간된 월간 시지 『심상』은 박목월 선생님의 필생 사업이었습니다. 이 잡지가 창간되어 나오면서 한국의 문학잡지는 새로운 개안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잡지의 품격이 비약적으로 높아진 것이지요. 이 잡지를 창간하시면서 선생님께서 저를 편집자로 불러주셨습니다. 1973년 10월호가 창간호였습니다. 그때 나는 31살짜리 풋내기 시인이었습니다. 잡지 편집에 대한 식견도 없었습니다. 잡지 필진을 대폭 발굴하고 품격 있는 특집, 엄선된 작품 게재, 그리고 잡지 편집 체제에 이르기까지 이전의 고정관념을 혁신적으로 깨뜨린 잡지였습니다. 이 잡지를 만들어가면서 시와 한국 시단에 대한 안목을 지니게도 되었고, 또 좋은 선후배 시인들과 친교를 지니게도 되었습니다. 학교 선생을 하면서 밤 시간에 잡지를 만들었습니다. 늘 통행금지 시간에 쫒기면서 겨우겨우 집에 닿곤 했습니다.
요즘도 『심상』이라는 이름의 잡지가 나오고는 있습니다만 비감한 마음이 듭니다. 박목월 선생님께서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던 품격 높은 잡지, 엄격한 편집 정신이 빛나던 잡지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1978년 3월 선생님께서 타계하신 후 저는 그 잡지의 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선생님께서 서시던 한양대학 강단에 30여 년, 그리고 지금 선생께서 기틀을 다지신 한국시인협회 37대 회장으로 선생님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선생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었던 건 제게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맹문재 : 세 번째 시집은 『망초꽃 하나』(1983, 문학세계사)입니다. 이 시집에서 내세우신 점은 무엇이었는지요? 석탄을 적재한 기차를 관찰한 「정형외과병동에서」가 특히 저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건청 : 제 시집을 일관하는 시적 상징물들은 거의가 ‘동물’들입니다. ‘개’ ‘말’ ‘코뿔소’ ‘하이에나’ ‘고래’같은 것들 말이지요. 그런데 시집 『망초꽃 하나』의 시편들 속에는 식물 이미저리들과 광물 이미저리들이 보입니다. ‘40대에 접어들면서 느끼게 된 풀꽃(망초꽃) 하나로서의 자아’에 관한 관심이 『망초꽃 하나』의 지향이었습니다. ‘망초꽃’은 우리나라 들판 어디서나 무리 지어 자라는 잡초입니다. ‘꽃’이라고도 할 수 없는 ‘꽃’이지요. 40대의 제 모습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맹문재 : 네 번째 시집은 『청동시대를 위하여』(문학과비평, 1989)입니다. 이 시집은 로댕의 조각들을 작품의 제재로 삼고 있는 점이 특이합니다. 어떤 계기로 이 시집을 간행하셨는지요? 선생님께서는 시집의 서문에서 예술의 근원과 존재 양식을 숙고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쓰셨네요.
이건청 : 『청동시대를 위하여』는 로댕의 조각 작품을 모티프로 한 시편들을 묶은 기획 시집입니다. 대학의 같은 학과에 재직하던 김시태 교수가 『문학과 비평』이라는 문학지를 내고 있었어요. 그쪽의 청탁으로 쓴 시집이니까 제 개인의 창작 시집들과는 성격이 다르지요. 로댕은 제 성장 과정에 커다란 영향을 준 예술가입니다. 특히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쓴 로댕의 작품론인 『로댕』은 제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이지요. 출판사의 청탁에 응해서 한 권의 시집을 내는 데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맹문재 : 선생님께서는 같은 해에 또 한 권의 시집인 『하이에나』(문학세계사)를 간행했습니다. 이 시집에서는 “시는 신념이 아니라 신념의 작품화”라는 시론을 서문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만, 현실 인식이 눈에 띕니다. 특히 1984년 인도 보팔시의 살충제 공장에서 2,500명 이상이 죽고 20만 명 이상이 눈이 먼 환경 재해를 다룬 작품 「눈먼 자를 위하여」가 주목됩니다. 시집의 전반을 좀 더 설명해주실 수 있는지요?
이건청 : 시집 『하이에나』에는 1983년 『망초꽃 하나』이후 1989년까지 사이에 쓴 작품들이 실려 있습니다. 이 시기는 소위 민주화의 열기가 가장 뜨겁게 분출되던 때였고, 그 현장이 대학 캠퍼스였습니다. 강의실이 최루탄 연기에 싸이고, 운동권 학생들이 대학 캠퍼스를 접수하고 교수 연구실을 숙소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시단은 소위 민중시라고 불리는 이념 중심 시들이 기세를 올렸습니다. 이들은 시를 이데올로기의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했습니다. “시는 신념이 아니라 신념의 작품화”라는 생각은 그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시를 지켜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소신을 담고 있습니다. 장시「눈 먼 자를 위하여」는 우리나라 ‘환경 생태시 운동’의 효시가 된 작품이라고 지적들을 합니다만, 그때 저는 강대국이 후진국 도처에서 벌이는 환경재해 문제에 심각한 면들을 발견했고, 시를 통해 이 문제를 드러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시기에 저는 제가 근무했던 대학의 신문사인 『한대신문』의 편집인 겸 주간 교수 보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사회 매스컴의 언로가 막혀 있을 때였고, 민주화 운동이 대학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학신문은 운동권의 논리가 거의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한양대에서 전대협 의장이 나오는 등 한양대는 운동권 학생들의 본산이기도 했습니다. 학생 기자들의 무한한 욕구와 실정법의 테두리 속에서 학생들을 지켜주어야 하는 주간 교수의 책무가 항상 날카롭게 충돌했습니다. 저는 그 곤혹스러운 자리에서 번민하면서 『하이에나』의 시편들을 썼습니다.
맹문재 : 여섯 번째 시집은 『코뿔소를 찾아서』(고려원, 1994)입니다. 이 시집에서는 「코뿔소를 찾아서」와 「인텔리겐치아」에서 보듯이 역사의식이 돋보입니다. 좀 더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이건청 : 시집 『코뿔소를 찾아서』에는 시인의 책무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의 시편들을 담고자 했습니다. 특히 인텔리켄치아로서 시인은 어떤 소명을 지녀야 하는 것인가를 노래하고자 했습니다. 그런 시대 속에서 바른 신념을 구현하고자 했던 역사상의 인물들을 ‘코뿔소’라는 시적 상징으로 형상화했습니다. 봉건 사회의 굴레에 항거했던 고려조의 노비 ‘만적’, 조선조의 다산 정약용, 귀양지에서『자산어보』를 쓴 정약전, 농민해방전쟁의 전봉준, 한일합방 후 절명시를 쓰고 자결한 매천 황현 같은 인물들을 통해서 지성의 책무를 성찰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맹문재 : 일곱 번째 시집은 『석탄 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시와시학사, 2000)입니다. 이 시집에는 강원도 사북 지역의 광산촌을 작품의 제재로 삼고 있는 점이 특이합니다. 저는 이 시집에 들어 있는 「사북에서」에 대한 작품론을 『현대시학』(1998년 12월호)에 쓴 적도 있습니다. 이 시집을 쓰게 된 동기며 상황을 들을 수 있을까요?
이건청 : 맹문재 시인이 쓴 평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북은 소위 ‘사북사태’의 직접적인 현장이 되기도 했던 곳입니다. 그때 나는 그 시에서 ‘사북 역전 마당에서 넝쿨 콩을 팔고 있는 노인’을 제재로 시를 썼습니다. 서로 의지하고 기대면서 자라 오르는 넝쿨 콩을 통해 ‘사북사태’ 이후 상처받은 사람들의 희망적인 비전을 제시했었던 것이지요. 그때 펴낸 시집이 『석탄 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입니다. 그야말로 주관적 감정을 극도로 배제하면서 ‘관찰 기록’이 되고자 한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석탄광산 사북’이 지니는 의미는 남다른 바가 있습니다. ‘사북’은 산업화에 필요한 에너지원이 ‘석탄’에서 ‘유류’로 바뀌는 과정에서 국민적 이슈로 떠오른 탄광촌이었습니다. 그리고 열악한 노동 조건과 노사문제, 거기 개재되어 있는 부정과 비리 문제가 폭발하면서 소위 ‘사북 사태’로 문제화되었습니다. ‘사북 사태’ 이후 ‘사북’은 소위 직업적 노동운동가들이 머물며 이념과 실천을 구체화하고자 한 ‘노동운동의 성지’가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국가의 에너지 정책이 ‘주유종탄(主油從炭)’으로 전환되면서 탄광촌은 폐허화되고 말았습니다. 대부분의 탄광이 폐광되고 사람들도 그곳을 떠났습니다. 시집 『석탄 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은 그 이후 버려진 탄광촌을 세세히 답사하면서 찾아낸 ‘슬프고’, ‘스산하며’, ‘소름 끼치는’ 관찰 기록입니다. 나는 한 3, 4년 그곳을 오르내리며 탄광촌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의 기록들을 찾아 헤맸습니다. 탄광사고의 기록문, 합의문들을 찾아 옮겼으며, 지하 2700m 막장에 들어가 보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엄혹한 환경 속에서 견디며 살아야 했던 삶의 조건과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아픔을 증언하는 일도 시인에게 주어진 책무라고 생각했습니다.
맹문재 : 여덟 번째 시집은 『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세계사, 2005)입니다. 앞의 시집들까지는 현실을 인식한 면들이 강했는데, 이 시집에서는 언어를 통한 기억들을 복원하려는 의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푸른 말들이란 어떤 것인지요?
이건청 : 시집『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은 대학 정년을 앞 둔 시기에 쓴 작품들을 싣고 있습니다. 정년을 앞둔 교수에게는 주당 1강좌(3시간)만 할 수도 있어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습니다. 또 2000년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양촌리 ‘모가헌(慕嘉軒)’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1978년, 노후를 생각하고 고향 이천 인근에 땅을 마련해두고 있었습니다. 밭과 임야와 택지를 안고 있는 2,800여 평쯤 되는 땅입니다. 서울 집을 처분하고 집을 신축했습니다. 뒷산 일부를 정지하고 집을 지었습니다. 집 옆에 서재도 하나 곁들였습니다. 정원에 묘목들을 옮겨 심고, 채마도 가꾸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어느 정도의 정신적 여유를 누리게 된 것이지요. 사물을 정관할 수 있게 되고, 보다 차분히 시의 언어들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쓴 시들은 제 삶의 호흡과의 밀착감을 느낍니다. 아, 드디어 내 시의 본령에 왔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낀다고 할까요.
아홉 번째 시집인 『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서정시학, 2007)도 그런 정황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소금’에 묻힌 노고지리가 모든 짐스런 치장들을 훌훌 털어내고 푸른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모습을 시집의 제목으로 불러냈습니다. 이 시기에 접어들면서 나는 그동안 나를 감싸고 있건 모든 규범이나 책무 같은 것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담은 시편들을 많이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시에 ‘소금’, ‘석탄’, ‘암각화’ 같은 광물 이미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점을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광물 이미지들도 깊이 살펴보면 모두 동물 이미지들과 연관을 지닌 것들이지요.
맹문재 : 2010년에 열 번째 시집으로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동학사)를 펴내셨고, 이 시집으로 ‘목월문학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생전에 모시던 선생님을 기리는 문학상을 받으셔서 남다른 감회가 있을 것 같네요. 여담이지만 ‘목월문학상’은 국내의 시문학상 중에서 최고의 상금을 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건청 : 2010년에 간행된 시집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는 ‘반구대 암각화’라는 특이한 대상을 만나게 되면서 받은 감동을 형상화했습니다. 경북 울주군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은 바위에 새겨진 암각화들입니다. 특히 ‘반구대 암각화’는 지금으로부터 6천여 년 전부터 새겨진 것들이라고 합니다. 6천 년 전이면 단군신화 이전입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돌 벽에 석기인들이 만든 암각화의 상당 부분이 고래 그림과 고래를 사냥하는 포경선 그림이라는 점입니다. 6천 년 전 울산의 태화강을 따라 올라오는 고래를 사람들이 잡아먹은 것입니다. 반구대에 새겨진 고래 암각화는 세계 최초, 최대의 것으로 공인되어 있습니다. 서양에서의 본격적인 포경업이 불과 200년 전에 시작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도 울산은 그때 그 고래들의 후손 고래들이 종종 출몰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나는 이 암각화를 보면서 6천 년을 건너오는 이 땅의 석기인들 및 청동기인들과 호흡을 함께 나눌 수 있었고 체온까지도 공유하는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살아 있는 감각으로 고래들과 선사인들을 포옹하면서 나는 ‘감각’을 회복할 수 있었고, 시적인 ‘시력’과 ‘청력’까지도 회복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맹문재 : 이번에 간행될 시집은 열한 번째인데 의미가 클 것으로 보입니다. 제목은 정하셨는지요? 이번 시집에 실리는 「고래에 관한 풍문」「새들은 낭가파르밧에서 죽는다」「선묘」 등을 읽어보니 불교적인 세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동기가 있는지요?
이건청 : 시는 근원적인 것들을 지향하는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그런 점은 요즘 와서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타성과 상식, 관념을 깨뜨리고 본질에 닿을 수 있을 때 시를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점은 불교에서의 ‘해탈’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간행되는 시집 『굴참나무 숲에서』에 불교적인 성향이 보인다면 아마도 요즘의 이런 나의 생각들과도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간행되는 시집의 뒤에 내가 쓴 ‘시인의 산문’을 붙이고 있습니다. 시집을 간행하는 소회라든가, 이 시집의 지향점들을 직접 밝힌 글입니다. 이 ‘시인의 산문’ 중의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이제 나는 시인으로 첫 출발할 때의 다짐들 속으로 다시 가서 귀를 기울일 것이다. 순정한 정신과 열정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사물 속으로 가서 간명하고 단순한 것들과 친교를 넓힐 것이다. 그리고 40여 년 시업을 깊이 있게 성찰하면서 나의 시가 ‘늙은 시’, ‘나태한 시’에 기대서는 안 된다는 새삼스런 다짐도 해보는 것이다.”
시집 『굴참나무 숲에서』는 내가 육신의 나이 70에 이르러 펴내는 시집입니다. 앞으로 몇 권이나 더 시집을 내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시집을 기점으로 해서 내가 시에 입문할 때의 ‘초심’을 생각하게 되었고 ‘늙은 시’, ‘낡은 시’에 빠지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맹문재 : 선생님께서는 50년 가까이 시를 써오셨습니다. 후배 시인들에게 시인의 길을 오랫동안 걸어가려면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들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건청 : 시인이 ‘시적 긴장’을 유지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일상과 안일의 유혹은 집요하고, 쉼이 없습니다. 내가 시단에 나서던 1960년대 말에도 역량 있는 시인들이 참으로 많이 등단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주위를 둘러보면 적막감을 느낍니다. 많은 친구들이 타계했거나 절필했거나 시가 아닌 쪽으로 가버리기도 했습니다. 시를 쓰는 일은 견고한 정신과 보드라운 감수성과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면을 쉼 없이 추스르면서 ‘시적 긴장’을 지키기 위해서는 ‘타성’을 깨뜨리면서 ‘발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부단히 자신을 성찰하고 직시하면서 자신을 소외 속으로 채찍질해가는 용기가 필요하지요. 참 어려운 일입니다.
맹문재 : 여러 가지로 소중한 말씀을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언제 또 좋은 말씀들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맹문재
(시인, 안양대 교수)
첫댓글 타작(他作):[명사] 남이 작품 따위를 짓거나 만듦. 또는 그 작품.
동궤 (同軌)[명사] 1.같은 궤도.2.천하(天下)의 수레바퀴의 폭을 똑같게 한다는 뜻으로, 천하를 통일함을 이르는 말.3.수레바퀴의 폭이
같은 수레를 타는 자라는 뜻으로, 같은 왕조의 통치하에 있는 자를 이...
이미저리 (imagery)[명사] <문학> 육체적인 감각이나 마음속에서 발생하여 언어로 표출되는 이미지의 통합체. 정신적 이미저리, 비유적 이미저리, 상징적 이미저리로 나뉜다.
인텔리겐치아 ([러시아어]intelligentsia)[명사] <사회> [같은 말] 지식층(지적 노동에 종사하는 사회 계층).유의어 : 지식계급, 인텔리, 지식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