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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교향악축제 |
제161회 정기연주회 “멘델스존 탄생 200주년 기념음악회” |
♦ 2009년 4월 5일(일) 오후 5시 ♦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 지휘 / 강석희 첼로 / 고봉인 작곡 / 박준영 ♦ 공연문의 : 281-2748 |
♦ 2009년 5월 22일(금) 오후 7시 30분 ♦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 ♦ 지휘 / 강석희 바이올린 / 양고운 ♦ 공연문의 : 281-2748 |
박준영 / “음향환상곡”
이 작품은 소리의 여러가지 단편과 그 소리에의 과정을 2관편성의 관현악을 위해 쓰여졌다. 작품명 Klangphantasie 는 이전 내 작품인 An die Klaenge fuer 3 violoncello und Klavier(2007) 의 관현악 버젼으로 마치 슈베르트의 가곡 An die Musik을 연상케 하는 제목이기도 하지만 이 곡에선 낭만시대의 유미주의적 의미 만은 아니다. 작곡가는 매 순간을 결정해 나가지만 그 결정이 때론 자연적 결정이기도 하고 때론 문화적 결정이기도 하다. 자연적 결정에선 유미주의적 의미가 포괄되기도 하지만 문화적 결정은 상대적으로 차갑고 냉혹한 결정일 수 있다. 작곡가가 만드는 소리의 중첩된 결정들의 결과물들이 때론 매력적으로 때론 혐오스럽게 제 각각 느껴지겠지만 자연적 결정은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도 있지만 문화적 결정은 아는 것 만큼 느낄 수 밖에 없는 예술이 가지는 근원적인 한계성을 안고있다. 이 두가지 결정은 서로 배척하지만 또한 서로 의존적이다. 내가 문화적으로 만든 소리를 나라는 자연인을 통해 표출되는 소리들로 음악화 하려 했다면 내가 너무 내 능력 밖의 이상적 탁상공론을 하는건 아닐까?
엘가 / 첼로협주곡
엘가의 '첼로 협주곡'은 늦가을의 황혼같은 적막함과 쓸쓸함을 보여주는 음악이다. 아련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는 명상적인 이러한 작품은 대중적인 인기를 폭넓게 얻기가 어렵긴 하지만 우리들에게 있어서, 비운의 여류 첼리스트 자클린 뒤프레로 인하여 유명해진 음악이기도 하다. 그녀의 이야기는 천재 소녀 장한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들은 바있다. 6살무렵 자클린 뒤 프레의 첼로 연주를 듣고 감동하여 음악을 시작했다는 이야기이다. 영국 출신의 유명한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의 곡이지만 유명한 첼리스트 펠릭스 셀몬스에 의한 1919년 초연에서는 실패한 곡이었다고 한다. 이 곡을 인상적인 재연에 성공, 많은 연주가의 래퍼토리로 정착시킨 사람이 빙아트리스 해리슨이라는 사람이고, 레코드로 세상에 널리 알리기는 바로 자클린 뒤 프레의 곡이 으뜸으로 꼽히는데 두 사람 모두 여류 첼리스트이다. 이 협주곡은 4악장으로 이루어진 대작이긴 하지만 간결하여 매우 실내악적이라 하겠다. 엘가는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연상인 그의 아내는 그에게 자신의 정신과 음악을 붙들어 주는 에너지였다고 하는데, 이 작품이 발표된 후 다음 해에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내야 했다. (연주시간 : 약 29분)
베토벤 / 교향곡 제3번 “영웅”
인간의 해방을 부르짖던 베토벤의 일면을 찾아볼 수 있는 곡이다. 1789년 일어난 프랑스의 혁명 에서는코르시카 섬 출신의 일개 포병 사관이었던 나폴레옹이 반란을 평정하고 국내 최고 사령관 이 되었다. 민중의 권리를 옹호하고 자유의 정신에 불타 있던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을 흥미 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당시 빈에 주재하고 있던 프랑스 대사와 대사관의 비서이자 바이 올리니스트였던 루돌프 크로이쩌로부터 프랑스에 자유와 질서를 가져온 나폴레옹의 업적에 대해 자세히 들을 기회가 있었다. 플라톤의 '공화국'을 숙독한 바 있었던 베토벤은 이 시대의 영웅의 자태를 보여준 나폴레옹을 자신의 작품으로 찬미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33세 때인 1803년 여름 이 교향곡의 작곡에 착수하여 1804년 봄에 완성시켰다. 스코어의 표지에는 '보나파르트'라고 썼으며 밑에 자신의 이름 '루비트비히 반 베토벤'이라 적어 이를 프랑스 대사관을 통해 파리로 보내려고 할 무렵,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이 빈에 퍼졌다. 이 소식에 분개한 베토벤은 그 사본의 표지를 찢어 버렸다고 한다. "저 사나이도 역시 속된 사람이었어. 그 역시 자기의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민중의 권리를 짓밟고 누구보다도 심한 폭군이 될 것이야."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이후 다시는 나폴레옹에 대해 언급도 안했다는 그는 2년 뒤 이 곡을 출판하면서 '한 사람의 영웅을 회상하기 위해 작곡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17년 후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었다는 보도를 듣고 비로소 '나는 그의 결말에 어울리는 적절한 곡을 써 두었다' 라고 했다는 베토벤. 이는 이 작품의 제2악장에 있는 '장송 행진곡'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연주시간 :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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