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티 형성과 미디어: 시간과 공간의 변화
강 명구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1. 문제의 제기
이 글의 핵심어휘는 모더니티, 정보테크놀로지, 일상생활 등 세 가지이다. 모더니티의 형성과 정보테크놀로지의 연관을 생각하는 커다란 문제의식의 한 부분으로서 일상생활에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고, 일상생활을 구성하는 중심축으로서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21세기를 몇 년 앞 둔 지금의 시대를 정보사회로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정보테크놀로지가 현대 한국사회와 지구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에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다. 어떠한 영향을 미치느냐라고 할 때 이 논문은 우리 자신의 일상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바탕으로서 시간과 공간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가를 묻는 것이다. 모더니티의 한 특성으로서 시간과 공간의 변화는 미디어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만은 아니지만, 대단히 중요한 요인을 이루고, 단순한 요인 정도가 아니라 현대적 삶의 존재조건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말하면 우리의 삶의 존재조건으로서 시간과 공간이 조직되는 방식이 달라졌고, 정보테크놀로지는 이러한 조직방식의 변화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글은 현실로부터 얻어진 자료를 분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모더니티와 정보테크놀로지의 관련에 대한 이론적 논의를 정리하는데 일차적 목적이 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부유하는 기호와 이미지, 하이퍼리얼, 사이버공간, 가상현실 등의 용어들에서 보듯, 이들에 대한 합리적 인식이 불가능한 것처럼 파악되고 있는 상황에서 합리적 인식이 가능함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합리적 인식이 불가능하다기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육체도 정신도 없고, 고통도 없고, 필요한 것도 없는 세계 내적 존재 (이를 영상사이보그, 전자사이보그라고 부른다)를 찬양하는 상황에서 대안적 인식의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기계적으로 매개되는 세계의 인식이 실제 현실에서 직접경험 보다 더 우위에 있다거나, 더 현실적이라는 식의 주장에 떨어지지 않고, 그렇다고 매개되는 경험이 보편적으로 삶의 존재조건이 되고 있는 현실적 변화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이들 정보테크놀로지들이 가져다주는 가능성은 확장하고, 모순은 해소하는 이론적 실천적 실마리를 찾기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크게 보면 모더니티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성찰성의 힘은 키우고, 모든 사회적 일상적 삶의 영역을 상품화의 메커니즘으로 편입시키는 모순은 극복하기 위한 성찰적 노력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더니티의 형성이라는 맥락에서 정보테크놀로지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우선 컴퓨터, 인터넷, 하이퍼텍스트 등 첨단기술에 국한하는 새것 콤플렉스를 버릴 필요가 있다. 서구의 민족국가 형성에서 신문과 방송이 지역을 넘어서서 민족사회를 통합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듯이 (Anderson, 1983), 정보테크놀로지는 문자매체와 영상매체 그리고 양자의 통합으로서 통신 등을 포괄하는 매개하는 행위주체 (mediating agenct)로 정의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게 정의할 때 비로소 테크놀로지가 인간과 사회에 어떠어떠한 영향을 미쳤다는 식의 결정론을 피하고, 사회의 역사적 구성의 한 축으로서 테크놀로지를 위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핵심어휘인 일상생활은 보통사람의 삶이 유지되고 반복되는 영역이지만, 그것의 현대적 변화로서 일상생활의 현대적 조직화에 관심을 갖는다. 일상생활은 모더니티의 한 특성으로서 유적 개인의 경험과 자기실현이 이루어지는 영역이지만, 동시에 자본주의적 현대 (산업사회, 기술관료제 사회, 소비사회, 국가독점주의 사회 등으로 표현되는)에 의해 개인의 삶이 억압되고, 조작되고 프로그램되는 영역이기도 한 것이다. 일상생활을 정보테크놀로지와 관련시킬 때 이 글의 관심은 일상생활의 과정으로서 인간의 경험 가운데 '매개된 경험' (mediated experience)에 초점을 맞춘다. 매개된 경험이란 소설책을 통해 과거의 세계와 만나고, 신문을 통해 유럽정치의 변화를 알게 되고, 텔레비전을 통해 월드컵축구의 열광에 참여하고, 인터넷을 통해 가상세계로 들어가는 경험을 가리킨다. 이들 예에서 보듯 이러한 경험 모두는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에 대한 체험이면서 소설의 주인공, 유럽이라는 지역과 축구를 통해 경쟁하는 국가, 가상세계라는 공간을 체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 글은 정보테크놀로지가 현실의 매개된 경험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이러한 경험이 시간과 공간의 축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2. 모더니티와 생활세계: 시공간의 변화
모더니티를 어떻게 규정하는가는 대단히 복잡한 문제이다. 이글의 목적이 정보테크놀로지와 일상생활의 관련을 밝히는데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자본주의적 근대화(modernization)에 따라 나타나는 시간, 공간, 존재의 변화 (예를 들어 Berman이 정리하듯 생산의 산업화, 대규모 인구이동, 도시화, 대중매체의 발전, 민족국가의 성립, 대중적 민족적 사회운동 그리고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확대 등)로 보고자 한다. 국내에서도 포스트모던의 문제를 둘러싸고, 모더니티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두고, 상당수의 논의가 전개되었다 (백낙청, 1994; 김성기, 1995). 한국사회의 모더니티의 특성이 어떤 것인지, 한국사회가 포스트모던으로 이행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는 단순한 이론적 수준의 논의를 통해서는 해결될 수 없다. 모던을 구성하는 사회 전 영역에 걸쳐 실증적인 논의를 거쳐야 비로소 가능해 질 수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분야별 성과가 축적되어 서로의 연구가 의존할 수 있을 때 사회전체 수준에서 논의도 가능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글 역시 정보테크놀로지와 모더니티의 특성이 넓게는 일상생활의 변화, 좁게는 정보테크놀로지를 통해 이루어지는 '매개된 경험'이라는 현상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현대사회에 와서 우리의 세계인식과 존재조건을 구성하는 경험의 방식이 직접 경험 보다 매개된 경험을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는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정보테크놀로지는 이러한 조건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매개된 경험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사고하고 성찰하는 능력을 포기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매개된 경험을 통해 우리 머리 속에 현실은 세계로 확장되고, 다양한 상징적 자원으로 풍부해지는 것은 아닌가. 이들 문제가 이글에서 생활세계와 경험에 대해 제기하는 질문이 된다. 더 구체적인 예를 하나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죽음과 텔레비전을 통해 간접 경험하는 죽음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들 두 가지 죽음의 경험은 우리 자신의 삶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영상을 통해 보는 비극적 죽음의 장면이 아무리 비극적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 현장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 현장을 만질 수도 냄새 맡을 수도 없다. 바라다 볼 수만 있을 뿐이다. 가족의 죽음은 우리의 영혼에 커다란 흔적을 남기지만, 영상을 통해 보는 죽음은 그것이 대규모이고 참혹하다 하더라도 그냥 우리를 스쳐지나가기 쉽다. 현장으로부터 떨어진 거리가 그러한 일종의 발뺌과 넋 놓고 보는 행위를 허용한다. 이렇게 일상적인 행위가 사회를 재생산하기 때문에 매개된 경험이 이러한 일상생활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이 중요성을 갖는 것이다.
직접 경험의 세계는 일상생활의 세계이다. 가족들과의 삶, 친구와의 만남 등 친밀한 사람들끼리 만남을 통해 일어난다. 딜타이의 용어를 빌어 말하면 생체험 (erlebnis)의 세계이다. 매일매일 계속되는 우리의 일상은 너무나 평범해서 왜 사는지, 무엇으로 사는지 조차 생각하지 않는 당연한 삶의 모습이다. 아침에 일어나 바쁘게 출근하고, 직장에서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삶이기도 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식구들 출근시키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시장 보고 저녁준비하고 잠자리에 드는 삶이기도 하다.
이러한 일상생활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현대사회의 중요한 특징들이 숨겨져 있다. 우선 가족들이 생활을 영위하는 장소와 일하는 장소가 분리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일하기 위해 도시에 살고 있으며, 직장으로 출근을 해야 한다. 공장이나 회사는 그것 자체로 대단히 근대적 제도이므로, 조직의 운영과 구조가 특정한 방식으로 제도화되어 있다. 노동집약적 형태에서 자본집약으로, 자본집약에서 기술집약으로, 포드주의에서 포스트 포드주의로의 변화는 그러한 조직과 노동과정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제적 행동양식과 규범을 요구한다. 퇴근 후 다시 보통사람들은 가정으로 돌아온다. 안락한 삶이 있는 장소로. 집에 돌아온 뒤 텔레비전을 보기도 하고, 시장에 가기도 하고, 영화나 연극을 구경하기도 한다. 이를 우리는 모더니티의 한 특징으로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분리라 부른다.
둘째, 일상생활은 매일매일 반복되는 듯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매일매일 변화한다. 21세기를 앞둔 시점에서 한국사회에서 서울과 부산과 광주에서 사는 우리가 30년 전 일상생활의 모습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도무지 30년 전과 같은 게 뭐가 있는가를 찾아보아도 별달리 생각나는 게 없을 정도이다. 60%에 가까운 아파트 주민, 저녁에 거실에 둘러앉아 있는 가족구성원, 거실의 소파와 장식들, 모두가 변했다. 출퇴근할 때 교통의 이동거리와 복잡함, 재래시장과 슈퍼마켓과 24시간 편의점 등 거리의 풍경과 이동의 방식들 모두가 변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느끼지 못하는 사이 한세대 만에 변하지 않은 게 없는 것이다. 한 사람마다 너무도 반복적인 삶이 끊임없이 변화를 겪어온 것이다. 이러한 생활세계의 변화를 모더니티의 틀에서 따져보면 그 변화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기든스 (1991)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세계를 '고도화된 모더니티'라고 정의하고 이 안에서 우리의 삶이 당면한 딜레마를 네 가지로 정리한 바 있다. 첫째는 통합과 파편화의 문제이다. 민족국가의 성립에서 보듯 지역사회 범주에 묶여있던 삶이 민족 혹은 국민 단위로 확장되었고 이것이 서구 민족국가의 통합적 성격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수천 킬로 떨어져 사는 다른 나라의 정치지도자가 이웃사람보다 내게 더 익숙하고 친밀하다. 수천 킬로 떨어진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이 내게 더 익숙하고 경험의 틀 안에 더 쉽게 통합된다. 여기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제도가 매체와 교통통신의 발전이다. 민족차원의 문제가 아닐 때도 이러한 현상은 쉽게 나타난다. 온산지방의 공해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은 반드시 환경보호론자가 아니더라도 공해에 관한 토론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일상생활 안에서 쓰레기분리수거, 공해방지를 위한 행동을 해나간다. 이 점 역시 한 사람의 삶의 영역이 한국사회라는 전국적 수준으로 환경문제를 매개로 해서 확장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러한 통합적 경향과 전혀 반대되는 경향으로서 삶과 자아의 분절화 경향 역시 두드러진다. 기든스에 따르면 분절화란 자기정체성의 내용이 다양해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다양한 맥락에서 행동해야 하는 현대인들의 자아는 여러 개의 자아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통합과 분열의 경향이 동시에 나타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두 가지 유형의 품성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전통주의자이고 또 하나는 순응주의자이다. 전통주의자란 상황에 대처하는데 이미 정해놓은 원칙에 따라 행동함으로서 안정감을 찾는 경우이고, 순응주의자는 외부의 권위에 순응함으로써 안정감을 찾는 경우이다.
두 번째 딜레마는 무기력과 자기 전유의 경향이다. 무기력은 현대사회가 다양하고 거대해지면서 한 개인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어떤 통제력도 행사할 수 없는데서 오는 소외의 현상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러한 무기력은 동시에 현대사회가 허용하는 신뢰 (trust)의 메커니즘에 의해 부분적으로 의미를 찾고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자기 전유의 과정과 맞물려 있다. 금융체계, 국제외환시장, 증권시장과 투자 등의 현대 자본주의의 핵심제도는 개인들로 하여금 그러한 제도에 대해 어떤 의미있는 작용도 할 수 없고 그것의 운영 메커니즘에 대해 무지하다는 생각을 주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전문적 지식에 의존하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금융제도는 개인들에게 나름대로 그것을 통해 (제도화된 금융제도에 대한 신뢰에 근거해서) 자신의 삶을 기획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무기력과 자기 전유라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경향이 잘 나타나는 사례로 기든스는 '생존전략의 심성' (survival mentality)을 들고 있다.
셋째 딜레마는 권위와 불확실성이다. 세대를 통해 이전되어 온 전통 이나 종교제도가 삶을 영위하는데 권위적 영향을 행사해왔던 사회와 달리 현대사회는 단일한 권위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때 기든스는 현대사회가 전통과 단절되었다고 보지 않고, 전통적 권위는 여러 권위 중에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함으로써, 근대이전과 현대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모더니티를 구성하는 특성으로서 추상체계 혹은 전문적 지식은 그것이 전문화되었기 때문에 모든 영역에서 권위를 행사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보건의료나 '부모노릇' (parenting)과 같은 일상생활의 중요한 활동이 점점 전문가들의 조언에 의존하게 되는데, 하나의 활동영역 안에서도 전문적 권위는 서로 충돌한다. 건강을 생각하면 의사의 말에 교육을 생각하면 심리학자의 말에 의존해야 할 때,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하고, 이것은 사람들을 난처한 지경에 빠뜨린다. 전문가가 있어서 좋기는 한데,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게 된 셈이다. 이러한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하나의 지배적 권위로 귀속하거나, 이와 정반대로 모든 것에 대해 의심을 품고 권위에 의존하는 것을 포기하는 경우도 생겨난다.
마지막 모더니티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딜레마는 개체화된 경험과 상품화된 경험의 문제이다. 이것은 쉽게 말해 모든 것을 상품화시키는 자본주의적 질서 위에서 개인의 자아실현의 가능성을 여는 문제라 할 수 있다. 모더니티를 형성한 중요한 제도로서 자본주의는 다양한 형태의 상품화의 메커니즘을 발전시켜 왔다. 생산, 유통, 소비과정에서 교환가치가 사용가치 보다 우위에 서는 생산양식을 가리키기도 하고, 노동력이 상품화됨으로써 노동 자체가 소외되는 양식을 가리키기도 한다. 또 소비의 과정이 상품화의 메커니즘에 편입되어 경제성장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위치가 커지고, 일상행활 안에서 어떻게 사는가라는 삶의 스타일이 상품소비에 의해 규정되는 형태도 일반화되었다. 기든스는 이러한 상품화의 메커니즘은 개별화 (personalize)의 과정을 동시에 발전시켰다고 본다. 고용과 교환에 있어서 계약관계와 개인의 권리와 의무는 바로 독립된 개인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해졌고, 소비에 있어서도 개인소비자의 선택을 강조함으로써, 이것이 소비대중사회 정체성의 중요한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광고가 제시하는 라이프스타일을 많은 소비자들이 받아들이는 소비문화는 바로 개인의 정체성이 소비의 메커니즘에 편입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넘어서서 기든스는 자아실현 (self-actualization) 조차 시장이 제시하는 기준에 의해 규정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자기교정, 스스로 꾸미기나 가꾸기 등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생활주변을 스스로 가꾸는 프로그램과 정보들은 표준화된 상품에 비해서는 자율성의 폭을 넓히기는 하지만, 어떻게 삶을 꾸려가느냐라는 의미에서 시장에 의해 패키지된 삶의 기획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아의 형성과 실현이라는 (이를 성찰적 프로젝트로서 자아라 부른다) 과제는 상품화 메커니즘에 대한 투쟁이 되는 셈이다.
이상의 모더니티의 특성 위에서 매개된 공간의 확장이 일상생활에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라는 문제가 떠오르게 된다.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다음 절에서는 정보테크놀로지를 통해 만나는 세계, 매체를 통한 세계의 인식과 매개된 경험이 삶 안에서 가지는 의미 등을 검토하고자 한다.
모더니티와 자아의 성찰적 조직화
누구나 알고 있듯 현대사회에서 자아형성의 과정은 전통사회에 비해 성찰적이 되었고, 형성되는 자아의 모습이 다양한 가능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전의 전통사회서 사람들은 장소를 공유하면서 같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 자아의 형성, 정체성의 형성을 이루었다. 반면 현대인들은 집단에 소속된 구성원으로서 보다는, 독립된 개인으로서 다양한 자원들을 활용해서 스스로의 주체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현대사회의 자아형성은 미디어를 통해 주어지는 상징적 자원들에 의해 더욱 풍부한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다. 인쇄매체와 전자매체 그리고 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자신이 사는 지역을 넘어서서 전혀 가보지 못한 지역에 대해서도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톰슨 (Thompson, 1996, 2장)은 매개된 경험과 정체성 형성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상징적 프로젝트(symbolic project)로서 자아의 개념을 제안한다. 그는 알튀세르를 비롯한 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에서 보는 이데올로기와 담론에 의한 주체구성 이론을 부분적으로만 받아들인다. 오히려 해석학적 전통과 상징적 상호작용 이론이 제시한 상징적 프로젝트로서 자아의 개념을 받아들인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이미 주어진 언어, 상징, 이데올로기, 문화 안으로 들어가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능동적으로 그리고 창조적으로 주어진 물질적 상징적 자원을 활용하여 새로운 의미와 인간관계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물론 부르디외가 말하듯 인간에게 주어진 물질적 상징적 자원들은 불평등하게 분배된다. 상징적 프로젝트로서 자아의 개념은 기존에 존재하는 상징적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지만, 상징적 자원이 현대사회에서 제도화된 기구 (교육, 미디어, 문화산업 등등)를 통해 생산되기 때문에 각각의 개인이 처한 물질적 조건에 깊이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자신이 살아가는 일상의 공간 바깥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지식에 접하게 됨으로써 자아의 성찰적 조직화 (reflexive organization)가 이루어진다고 본다. 자아의 성찰적 조직화 과정에 매체가 기여하는 것은 사람들이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광범위한 상징자원을 활용해서 자신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매체를 통해 새로운 세계와 만나면서 사람들의 인식지평은 끊임없이 확대되고 변화한다는 것이다.
물론 톰슨이 이데올로기의 호명을 통한 주제구성이나 푸코의 원형감시를 통한 생활 전반의 훈육적 권력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들 이론이 매개된 경험을 통해 일어나는 정체성이 성찰적으로 조직화 되는 영역이 있음을 보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고, 또 이들 훈육적 권력에 의한 자아의 구성과 성찰적 자아형성을 이론적으로 통합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톰슨은 구조화된 매체환경과 정체성 형성과정이 부정적으로 결합되는 양상을 네 가지로 제시한다.
우선 매체를 통해 생산되는 이데올로기의 작용을 불평등한 지배관계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중요한 기제로 설정하지만, 모든 상징적 담론들이 이데올로기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경우에만 이데올로기적인 작용이 일어난다고 보기를 제안한다. 둘째는 매개된 상징이 성찰적 조직화에만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매체의존이 심화되는 상황은 성찰력을 떨어뜨리는 조건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현대사회에서 일상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교육, 의료, 복지, 노동 등 제도화된 기구들에 대해 한 개인이 통제력을 행사하기 불가능해졌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위험 사회적 상황에서 사람들은 매체를 통해 생산되는 상징적 자원을 일상적 삶의 시공간으로부터 떨어져서 '상상적' 삶의 형태로 (팬클럽의 멤버들처럼) 자아형성을 할 수도 있고, 자신의 삶을 풍부하게 하는 자원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셋째, 매체를 통해 생산되는 상징적 자원이 풍부해 지는 상황은 성찰적 정체성 형성에 좋은 자원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지나치게 많아서 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는 점이다. 흔히 정보과잉으로 지칭되는 현상으로, 사람들은 무수하게 나타나는 정보의 홍수 안에서 필요한 정보를 선택하기 위해 전문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텔레비전 뉴스란 기자라는 전문직에 의해 정리된 사건과 정보들이라 할 수 있다. 인터넷 위에 존재하는 많은 정보의 저수지들 역시 필요한 정보, 신뢰할 만한 정보를 정리할 수 있는 전문적 식견을 필요로 한다. 넷째, 매개된 경험이 직접경험의 세계를 압도하는 상황이다. 이것은 텔레비전 중시청자나 인터넷 중독자들에서 보이듯 정체성 형성 과정이 매개된 경험 안으로 편입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이상 네 가지의 구조화된 매체환경에 대한 톰슨의 설명은 정체성 형성과정에 개입하는 권력의 작용을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상징적 프로젝트로서 정체성 형성을 이데올로기로 편입되는 것만으로 설명하지 않고, 그것이 자아실현을 위한 자원임과 동시에 짐일 수 있음을 이론적으로 설정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매개된 공간에서 경험의 문제, 혹은 매개된 경험의 문제를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더니티의 한 특성으로서 매개된 경험
매체를 통해 매개되는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톰슨은 기든스가 제시한 현대성의 한 특성으로서 '경험의 단절'(sequestration of experience) 개념을 원용한다. 기든스 (Giddens, 1991, 144-180쪽)에 따르면 현대사회 경험영역의 재구성의 중요한 특성으로서 많은 경험의 형태들이 일상생활의 영역 (이것은 장소적 영역이다)으로부터 분리되었고, 정신병동, 감옥, 병원 등이 인간의 중요한 육체적 정신적 정체성의 경험을 일상 세계과 분리시키는 제도라는 것이다. 친족의 죽음을 제외하고 죽음을 직접 경험할 기회가 크게 줄어들었으며, 범죄에 대해 공개적으로 처벌하던 제도도 감옥 안에서 이루어지는 형태로 분리되었고, 정신병 역시 전문가들의 손으로 넘겨졌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톰슨 (1995, 207-234쪽)은 이렇게 경험의 단절이 매체를 통해 일상생활과 '다시 접합되는' (이를 그는 desequestration이라 부른다) 현상에 주목하게 된다. 앞서도 이야기 되었듯 텔레비전을 뉴스를 통해 우리는 매일매일 죽음을 간접경험하게 된 것이다. 톰슨의 뛰어난 점은 우리가 흔히 책이나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간접 경험하는 기회가 확대되는 현상을 단순히 그러한 현상이 늘어났다는 지적에 그치지 않고 매개된 경험의 특성을 세밀하게 밝히고, 그것은 현대성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새로운 선택의 가능성임과 동시에 무거운 짐임을 주장하는데 있다.
톰슨은 정보테크놀로지의 접촉을 통해 일어나는 매개된 경험의 특성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 매체를 통해 만나는 사건이나 사람들은 만질 수 없고 냄새도 맡을 수 없는 부재하는 장소, 부재하는 사람들이다. 매체를 통해 만나는 사건들은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수용자들의 통제 바깥에 놓여있고, 그렇기 때문에 수용자들의 일상생활의 삶과 사건사이에 많은 요인들이 개입할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둘째, 매개된 경험은 재맥락화된 경험이다. 여기서 재맥락화란 매체의 내용을 수용자들이 자신의 생활 안에서 받아들이고 전유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앞서 예로든 북한의 기아에 대한 사진을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면서 남쪽의 한국인들은 충격을 받고, 분노하고, 동정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이 사건을 받아들일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남쪽이 굶지 않고 물질적으로 풍요롭다는데 안도할 수도 있을 것이고, 북쪽에 가족을 두고 온 이들에게는 북한정권에 대한 분노와 가족들에 대한 연민이 앞설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매개된 경험은 곧 남북한 분단체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분단과 통일에 대한 인식과 행위에 커다란 영향 (기존의 생각을 강화하든 변화시키든)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매개된 경험의 세 번째 특징은 그것이 '관여의 구조' (structure of relevance)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모든 경험을 똑같이 받아들이기 보다는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매개된 경험의 세계에 깊이 관여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매체를 통해 세상을 만나는 일에 거의 무관심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텔레비전 중시청자나 팬클럽 같은 매체관련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은 매개된 경험의 세계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이 매개된 경험을 얼마만큼 자신의 삶 안으로 끌어들이느냐에 따라 정체성의 모습, 인생의 경로 역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매개된 경험의 특징으로 톰슨은 탈공간화된 공통성 (despatialized commonality)을 든다. 직접경험의 경우 경험의 공통성은 현장에서 특정시간을 공유하면서 일어나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인접해 있다. 회사에 출근해서 겪게 되는 인간관계란 하나의 공간에서 특정한 시간에 일어나게 되고, 같은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 그러나 매개된 경험의 경우 장소는 공유되지 않는다. 월드컵 축구를 같은 시간에 시청하지만 각자가 위치한 공간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다. 톰슨은 이를 탈공간화된 상황이라고 지칭하고,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탈공간화된 공통의 경험이 일상화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5. 매개된 시공간의 경험과 사회적 행위
이 절의 목적은 정보테크놀로지를 접촉하는 행위를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시공간 상의 활동이라는 측면에서 규명할 수 있는 이론적 준거를 마련하는데 있다. 서두에서 전제되었듯이 매체가 엄청난 양의 정보와 이미지를 쏘다내고 그것 안으로 사람들의 삶이 포섭되었다는 식 (포섭 정도가 아니라 폭파되었다는 식)의 주장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일상생활 안에서 시공간의 경험과 매개된 시공간의 경험을 다시 따져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현대에 와서 한 개인이 직접 경험하는 일보다 간접 경험하는 사건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점은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1990년대 후반 한국인이 공통으로 경험하는 것과 한 개인인 경험하는 것의 차이를 상상해 보면 이 점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소련의 붕괴와 중국의 변화, 북한의 기아, 월드컵축구 등등. 이들 사건들을 직접 경험하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20세기 후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들 사건들은 중요한 관심사들이다. 이를 우리는 간접 경험하는 역사라는 의미에서 '매개된 역사성'이라 부를 수 있다.
매체의 발전에 힘입어 우리의 세상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확대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인식지평의 확대는 앞서 논의한 시간과 공간의 범주의 변화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북한의 기아는 1997년 남한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공유하는 역사의 기억으로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으며, 같은 역사적 기억을 공유함으로써 20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이라는 지역적 공간을 살아가는 한국인이라는 소속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물론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북한의 기아를 보면서 화를 내고, 짜증을 내고, 또 통일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지라도, 북한의 기아는 같은 민족의 기아로서 체험되고 기억되는 것이다.
월드컵 축구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본을 이겼을 때 신문과 방송의 보도는 마치 축구를 이긴 것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나라가 일본이라는 나라를 이긴 것처럼 보도했다. 시청자들도 이 점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축구중계라는 매개된 현실은 한국인들의 민족정서와 결합됨으로써 스포츠를 넘어서서 국가 간 대결, 민족 간 대결, 대결에서의 승리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유하는 역사의 기억이 되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강화하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텔레비전과 컴퓨터통신 모두 세상을 우리의 안방으로 날라다 준다. 방 안에 앉아서 소파에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세계의 복잡한 사건과 문제들에 접하게 된다. 뉴스뿐만 아니라 드라마, 다큐멘터리, 쇼 등을 통해서도 한 사람으로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세계에 다가간다. 시공간 상의 변화라는 틀에서 보면 이러한 경험은 단순히 메시지의 수용과정이 아니다. 매개된 경험과 그것을 통한 세계의 인식, 인간관계의 형성, 일상생활의 실천에 대한 관심이 된다.
우리가 책이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혹은 인터넷 공간을 항해할 때 일상생활의 시공간의 틀은 보류되고 이들 매개된 세계가 제시하는 새로운 시공간의 틀로 들어가게 된다. 현실의 시공간 경험과 매개된 현실 안에서 시공간 경험은 이런 점에서 불연속적이다. 이러한 불연속을 넘나들기 위해서 시청자들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시공간의 틀을 그때그때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물리적으로 이동하지 않고 안방에 앉아서 뉴욕 주식시장에도 가고, 인도네시아 열대림으로 이동할 때 시청자들은 현실과 상상 사이를 넘나들게 된다. 마치 전기스위치를 켰다 껐다 하듯이 현실과 상상 사이를 넘나드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렇게 시공간의 불연속을 넘나든다고 해서 시청하는 현실,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는 '특정 시간과 특정 장소'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청자들은 나름대로 텔레비전에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시간과 공간을 자신의 일상과 연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뉴스를 보면서 뉴스에 나타나는 시간과 공간을 알려주는 다양한 상징들에 주목해서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자신의 일상과 연결지울 수 있다. 허구적 프로그램인 드라마에 나타나는 현실도 그것이 설사 허구적이라 하더라도 어떠한 형태로든 현실적 장소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장소)와 현실적 시간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시대)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연결시킨다. 여기에서 우리는 매개된 경험이 메시지의 수용단계를 넘어서 사회적 행위로 연결되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
5.1 매개된 공간에서의 행위 (action at a distance)
톰슨은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형태의 상호작용 양식이 생겨나는 현상에 주목하면서 이를 네가지 범주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 수용자를 향한 발화 (recipient address), 둘째, 매개된 일상적 활동, 셋째, 미디어 이벤트, 넷째, 허구적 행위 (fictionalized action) 등 네 가지이다 (100-109 쪽).
우선 수용자를 향한 발화는 텔레비전의 등장인물 (뉴스에 나오는 대통령, 시사토론프로그램이 나오는 장관 등)이 다수의 시청자들을 향해 직접적으로 말하는 경우이다. 직접적인 연설은 대부분 계획된 담화발표의 형태를 띠게 되고, 간접적인 연설은 인터뷰, 기자회견, 토론 등의 형태를 띠게 된다. 직접연설의 경우 등장인물은 나름대로의 목적을 가지고 친근하게 대화하듯이 혹은 위엄과 품위를 지키면서 시청자들에게 다가간다. 연설자의 위엄과 친근감을 위해 '국민 여러분,' '우리 모두' '저는' 등 발화의 일방성을 피하기 위해 시청자를 자신의 말 안으로 포함시키려는 어휘들을 자주 사용하게 된다. 간접연설의 경우는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이나 대통령 후보자 텔레비전 토론과 같은 상황을 생각하면 된다. 이 경우 발화자는 권위나 위엄은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 있지만, 대화적 상황에서 말하기 때문에 시청자들에게 강한 친근감을 줄 수 있다. 대화가 스튜디오 안에서 방청객과 함께 이루어질 경우에는 방청객들이 멀리 떨어진 부재하는 대화자로서 시청자를 대신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간접연설의 대화적 성격을 강화시켜준다.
둘째 매개된 일상 활동의 범주는 거리의 시위와 같이 매체에 의해 중계가 될 것을 예상하거나 혹은 예상치 못하더라도 그럴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경우를 가리킨다. 매체에 의해 자신들의 활동이 보도될 가능성이 있는 것을 알 경우 행위자들은 보이지 않는 시청자들을 향해 발화하는 셈이 된다. 파업을 할 때 상당수의 노조지도자들은 매체가 보도할 것을 염두에 두고 파업현장의 현수막이나 자신들의 복장 (머리띠를 두르는 등)을 연출하기도 한다.
셋째, 미디어 이벤트는 사전에 기획된 행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준비 단계부터 행사주최자가 매체의 관여를 예상하고 이루어지는 활동을 가리킨다. 올림픽 개막식, 대통령 취임식, 왕궁의 결혼 등의 행사에서 매체가 차지하는 부분은 대단히 크고, Dayan과 Katz는 교황의 성지순례 중계방송을 시청하는 상황을 "안락의자에 앉아서 성지순례"하기라는 분석을 통해 매개된 공간에 시청자가 어떻게 참여하는가를 분석한 바 있다.
매개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행위의 네 번째 형태를 톰슨은 '허구화된 행위'라 부른다. 이것은 마치 연극에서 연기자들이 관객들을 상대로 연기하듯이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등장인물들이 연기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허구화된 행위가 연기와 다른 점은 현장에 부재하는 멀리 떨어진 시청자를 상대로 하기 때문에 웃음소리나 박수갈채 등 관객의 반응이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톰슨은 뉴스나 다큐멘터리와 같은 사실적 프로그램도 편집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 허구적 프로그램과의 경계를 분명하게 긋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경계 허물어짐’의 대표적인 예로 다큐드라마를 들고 있다.
이상 네 가지 행동의 형태가 멀리 떨어진 수용자를 대상으로 일어나는 행위라면, 수용과정에서 시청 상황에서 시청자들이 이들 등장인물이나 제작자에 반응하는 행위를 톰슨은 '매개된 맥락에서 반응적 행위' (responsive action in distant contexts)라 부른다. 우선 그는 수용과정이 시공간적 맥락이 생산과정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과 다양한 수용의 맥락이 존재함을 지적한다. 그림에서 보듯 생산과 수용을 연결하는 과정이 매개된 준상호작용이라면, 수용과정에서 일어나는 반응적 행위를 하나는 피드백 (이를 톰슨은 확장된 매체화, extended mediazation이라고 개념화했다). 담론정교화 (discursive elaboration)라 부를 수 있다.
매개된 준상호작용 담론정교화
생산 ---------------> 수용 <------------------> 이차적 수용
확장된 매체화
도해: 확장된 수용과정 (톰슨, 1995, 111쪽)
여기에서 톰슨은 시청 상황에서 일어나는 반응적 행위를 메시지의 생산자와 수용자 사이에 일어나는 준상호작용 안에 포함시키지 않고 오히려 수용의 맥락에서 일어나는 별개의 활동으로 본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 뉴스를 함께 보면서 가족구성원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반응이나 발화를 별개의 상호작용이라 보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피드백이라 불리는 행위가 주어지는 메시지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라면, 담론정교화는 수용상황에서 나타나는 수용자들 간의 상호작용인 셈이다. 저녁 텔레비전뉴스를 보고 그 다음날 직장동료들과 뉴스거리를 두고 나누는 대화 역시 이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적 행위는 메시지에 대한 자기전유 (appropriation)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자기 전유는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라디오를 청취하고, 신문을 읽고, 또 이렇게 수용된 메시지들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톰슨의 논의가 재미있는 것은 그가 자기전유 과정을 단순히 능동적 행위 (모든 메시지를 나름대로 걸러낼 수 있다는 식의)로 파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수동적으로 메시지에 포섭되는 과정 (이데올로기의 주체구성이론에서 보여주듯)으로 보지도 않는다. 다시말해 자기전유 과정을 담론에 대한 반응으로서 심리적이고 의미구성적 과정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다양한 행동유형으로 구성됨을 밝힌다는 데 있다. 이렇게 해서 톰슨은 반응행동을 '일치된 반응행위' (concerted forms of responsive action)과 '협력적 반응행위' (coordinated recipient response), 그리고 '집합적 반응행위' (collective recipient response) 등 세 가지로 구분한다.
'일치된 반응행위'는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수용자들이 유사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로, 예를 들어 태풍뉴스가 있을 때 물건을 사재기 한다든지, 휘발유가격이 오른다는 뉴스가 있을 때, 기름을 넣는 행위가 그것이다. 많은 경우 일치된 반응행위는 뉴스메시지의 의도와는 관련이 없이 이루어지고, 수용자들 간에도 상호 합의가 있지 않았음에도 유사한 행동을 하게 된다. 두 번째 '협력적 반응행위'는 수용자들의 반응을 얻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메시지를 가공하는 경우에 나타난다.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사전에 녹음된 웃음소리를 특정한 시퀀스에서 내보내는 경우, 시청자들도 같이 웃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생중계되는 스튜디오 대담프로그램에 참석한 방청객들의 행위를 내보낼 때 (고개를 끄덕거린다든지, 눈물을 흘린다든지), 제작자들은 유사한 행위가 시청자들에게도 일어나기를 기대하거나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집합적 반응행위'는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이미지나 행동이나 언술에 의해 집합행동이 나타나는 경우를 가리키는데, 톰슨은 사례로서 베트남 전쟁보도와 반전운동의 촉발, CNN의 걸프전 현지보도와 반전 분위기 그리고 동구권 붕괴와 언론매체의 보도 등을 제시한다. 언론매체가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이미지와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동구권 여러 나라의 시청자들은 이웃에서 어떠한 사태가 벌어지는가를 알 수 있었으며, 더 멀리 떨어진 지역들 (서구유럽)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알게 됨으로써 정권에 대한 집합적 행동이 터져 나왔다는 것이다. 시간적으로도 동구권 지역에서 한나라에서 일어난 사태가 민족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바로 이웃으로 전달됨으로써 붕괴의 연쇄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6월 시민항쟁에서 넥타이 부대와 시민의 참여는 '매개된 맥락'에서 시청자의 반응행위가 집합적으로 진행된 또 다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세 가지 반응적 행동양식들이 가지는 의미는, 톰슨에 따르면,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117-118 쪽). 우선 다양한 반응행위가 시사하듯 매체는 단순히 사건들을 사실중심으로 보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현실을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톰슨이 사회적 현실을 만들어 낸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체가 언어를 통해 사건을 구성한다는 구성주의적 이론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집합적 반응행위에서 보듯 메시지의 의도와 관계없이 수용자들이 주어지는 이미지와 정보를 활용해서 사회적 사건을 만들어 간다는 의미이다. 또 하나는 매개된 준상호작용에서 (생산과 수용에서 일어나는) 커뮤니케이션은 일방적이지만, 수용자들이 현실세계의 맥락에서 매개된 사건을 자신의 삶과 연결시키는 자기전유 과정이 복합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메시지가 수용된 이후 담론정교화의 과정은 단순히 메시지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대화하는 면대면 상호작용, 준상호작용, 매개된 상호작용이 복합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매개된 공간에서의 행위에 대한 톰슨의 논의는
첫째, 매개된 현실 경험이 모더니티의 특성으로서 시공간의 개념변화와 어떻게 관련되는가를 밝히는 데 하나의 이론적 성과를 이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개인적, 집단적 수준에서 자기정체성 형성과 매개된 경험이 관련되는 양상을 분석할 범주들을 제안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성취를 이룬 것이라 할 것이다. 둘째, 수용이 메시지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행위의 복합적 과정임을 이론화하는데 기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글의 목적과는 다른 논점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메시지의 수용과정에 대한 논의를 일상생활 안에서 일어나는 활동으로 확대함으로써 텍스트 중심의 (사실상 텍스트에 호명과 해독의 순환에 포섭된) 수용이론을 사회이론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담론이나 텍스트에 의한 이데올로기적 주체구성의 과정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비담론적 행위를 일상생활과 연결시키려는 이론적 노력의 한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톰슨의 이론틀이 기여하는 세 번째 측면으로서 자기 전유의 과정이다. 일상생활 안에서 매개된 경험을 자기전유 과정으로 설명하는데 있어서 이전의 논의 보다 한단계 더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몰리 (Morley, 19 )가 텍스트의 해석과정을 비담론적 수용과정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가정이라는 일상생활의 맥락 안으로 위치시켰을 때 자기전유 과정은 개인적 수준, 혹은 가족관계의 수준에 머물렀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의 논의에서 보았듯 톰슨은 자기 전유의 과정을 사회적 행위의 수준으로 그것도 모더니티가 마련한 일상생활의 시공간적 변화에 위치시키려했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톰슨의 이론적 기여는 현실의 구체적 분석으로 적용되기에는 보다 정치한 개념들의 발전을 필요로 한다. 이 글이 문제로 삼고 있는 매개된 경험의 성격, 다시 말해 매개된 공간이 어떠한 장소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위해서는 보다 정교한 범주들의 개발이 요구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음 절에서는 시간, 장소 그리고 공간이 매개된 경험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6. 시간, 장소, 공간과 그것에 대한 매개된 경험
이 절의 목적은 시간, 장소, 공간의 개념을 살펴보고, 이들 개념에 대한 논의에 기초해서 매체를 통해 경험되는 시간과 공간의 의미가 살펴보는데 있다. 대통령중계나 월드컵 축구중계를 볼 때 우리는 각자가 살고 있는 서울이나 제주도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올림픽 개막식, 유고슬라비아 내전, 다이애나 장례식 중계를 볼 때 우리는 한국이라는 장소를 넘어서 지구 안에 살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직접 가보지 못한 장소에 대해 우리가 직접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매체에 의존하게 된다. 이들 예는 전혀 새로울 게 없는 상식적인 서술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정보테크놀로지가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해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가를 밝히기 위해서는 이들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을 시간, 장소, 공간의 개념과 관련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시간, 장소, 공간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여기서는 인문지리학자 투안 (Tuan, 1977; 구동회, 심승희 역, 1995)에 주로 의존하고자 한다.
투안은 시간, 장소, 공간 등 인간의 삶과 사회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들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를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첫째, 움직임이나 흐름으로서의 시간과 시간적 흐름 속에서 정지로서의 장소의 개념이다. 둘째,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지게 되는 장소에 대한 애착의 문제이다. 셋째, 가시화된 시간으로서의 장소, 즉 지나간 시간의 기념물로서의 장소의 개념이다.
우선 흐름으로서 시간과 정지로서의 장소의 개념은 우리의 일상에서 늘 경험하는 일이다. 사무실에서 지루한 작업과 집에서의 텔레비전 시청, 매년 기다려지는 1주일간의 휴가, 한 사람의 생애에서 이동, 지역적 이동 (농촌에서 도시로), 어디에 사는가(이사) 직업적 이동, 사회적 관계의 범위(결혼이나 사회적 이동) 등등. 이 경험들은 한 사람의 생애에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러 장소를 옮겨 다니게 되고 그곳에서 일정한 시간동안 머무르게 되는 궤적을 보여준다. 이들 궤적은 젊은 시절부터 장년의 나이까지 넓어지다가 나이가 들면서 점차 좁아진다.
투안은 현대사회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도시라는 공간이 시간과 장소에 대해 새로운 정서를 가져다준다고 본다. 도시의 삶은 이동이 심하기 때문에 시간의 정지로서 장소에 대한 느낌을 약화시킨다. 이사, 농촌에서 도시로, 한 직장에서 다른 직장으로, 공동체적 인간관계 보다는 직장을 통해 일을 통해 생겨나는 인간관계 위주로 사람을 만나게 된다. 텔레비전은 이러한 시간의 정지로서 장소가 아니라, 새로운 공간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현장 (locale)이 장소적 성격을 가질 수 있느냐하는 문제이다.
집안의 방과 가구, 부엌과 마당 등은 집안에서 이동하는 운동의 경로에서 정거장들이고, 이들 "지점은 장소와 세계를 조직하는 중심" (투안, 290쪽)들이다. 사람들은 이들 공간을 습관적으로 사용함에 따라 그 자체는 탄탄한 의미와 안정감을 획득하며, 이것이 장소의 특성이다. 집은 더 큰 장소가 되고, 우리가 다니는 거리는 더욱 커다란 범위의 장소를 구성한다.
이렇게 볼 때 텔레비전을 통해 우리의 가정 안으로 들어오는 세계는 현실에서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의미의 장소라고 할 수는 없다. 200마일이나 된다고 하는 유목민의 장소감이 광활한 것처럼 텔레비전을 통해 우리가 이동하는 공간은 한국이라는 영토 전체에서 아시아에서 전 세계로 확대된다. 이렇게 확대된 지역에서 이동을 하는 시청자로서 우리는 집과 거리에 대해서 가지게 되는 장소감과는 다른 공간감각을 발달시키게 된다. 텔레비전 뉴스가 그려내는 세계의 모습은 나라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미국 텔레비전에서 유럽이 가장 크게 나타나고, 한국 텔레비전에서는 미국이 가장 크게 나타난다.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지역이다 (강명구, 1993). 한국인들에게. 최근 잉카유적 탐방과 같은 프로그램에 의해 상당히 확대되어 있기는 하지만. 지역적으로는 확장되지만 장소감이 가지고 있는 깊이는 어떻게 되는가. 이것이 투안이 거론하는 한 장소를 아는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는가라는 문제와 관련된다. 장소와 시간이 어떻게 삶 안에서 접합되는가라는 질문이다.
장소에 대한 느낌을 갖는 데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현대인의 장소감은 피상적이다. 또 강렬함의 정도에 따라 장소에 대한 친밀감을 갖는 시간이 달라진다. 장소에 담긴 시간의 깊이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나타난다. 우선 개인적 수준에서 장소감을 보자. 우리가 이사했을 때 처음에는 낯설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편안해진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익숙해지고, 이웃에 누가 살고 어떤 사람이 사는가를 알게 되면서 편안해진다. 또 한사람의 생애주기의 측면에서 장소감에 대한 경험은 달라진다. 투안은 이것을 노인들에게는 기억할 과거가 많고, 젊은이들에게는 다가올 미래가 길다라고 표현한다. 생애 안에서 장소의 경험은 나이에 따라 달라지는 셈이다. 노인들은 과거의 장소를 회상하지만 젊은이들은 미래의 장소를 상상하는 것이다. 둘째, 장소감은 사회적 시간과 관련된다. 현대도시의 삶은 장소에 대한 깊은 느낌을 갖기 어렵게 한다. 생활의 리듬이 빠르기 때문이다. 시테크로 생산성을 측정하는 네오포디즘이 우리의 생활을 조직화하는 시대가 효율적인 시간의 사용을 강제한다. 한국 그리고 서울의 생활은 더욱 빠른 생활리듬을 요구한다. 물론 선진자본주의 사회가 강제하는 시간의 효율만큼 한국의 생산과정이 그렇게 효율적으로 조직화되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어떻든지 서울에 살면서 서울이 고향이라는 장소감을 갖기에는 도시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서울사람들의 삶조차 피상적인 장소감 밖에 가지기 어렵다.
셋째는 가시화된 시간으로서 장소의 개념이다. 투안은 고대유물들이 보존되어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역사적 시간의 깊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박물관은 이런 의미에서 시간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국립박물관은 한반도의 역사적 시간의 깊이가 머무는 곳이듯이.
이렇게 보면 장소를 안다는 것은 거기에 시간의 깊이를 부여하는 일이고, 이것은 사람마다, 사회마다, 살아가는 위치마다 각기 다른 형태의 장소감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양상이 다르게 되고, 어떤 지역에 대한 다큐멘타리를 시청하면서 다른 느낌을 갖게 되는 것도. 이런 점에서 "어떤 사람들은 과거를 다시 붙잡으려고 애쓴다. 이와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과거를 물질적인 소유물처럼 짐으로 생각하면서 그것을 지우려고 한다" (300쪽).
이러한 시간, 장소, 공간의 관계에서 우리의 관심은 이것이 정보테크놀로지를 통해 매개되었을 때 우리의 삶과 어떻게 관련되는가라는 문제이다. 다른 목적을 위해서이기는 하지만 투안 역시 이 점을 거론하고 있다.
호수를 사진에 담을 수 있으며, 사진은 일어난 일에 대한 영구적 객관적 자료로서 우리에게 남는다. 그러나 장소의 특성과 우리의 특별한 만남의 특성은 포착되지 않는다. 그 특성은 곁눈으로 슬쩍 본 것, 우리 뒤를 비워주던 거의 얼어붙을 듯한 햇빛의 느낌을 포함해야 한다. (236-237쪽).
이러한 장소경험의 성격을 매체를 통한 공간경험에 대비시켜 보면 어떤가. 설악산 다큐멘터리는 객관적 자료이다. 그러나 내가 가 본 것과는 다르다. 곁눈으로 슬쩍 본 것이 거기에 담겨져 있지 않다. 우리 뒤를 비춰주던 얼어붙을 듯한 햇빛의 느낌도 나타날 리 없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의 경험을 반추할 수 있는 촉매제의 역할은 할 수 있다. 설악산에 가본 사람들이 동시에 설악산 다큐를 보면서 각자의 설악산 기억을 떠올린다는 말이 된다. 각자의 장소에 대한 경험은 특수하고 사적인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러한 각자의 경험이 다르다고 해서 모두 개별적인 것은 아니고, 공유할 수 있다. 다큐를 보면서, 토왕성 폭포를 보면서, 힘든 등산, 단풍, 차가운 계곡물, 짜증스러운 자동차행렬 등등을 공유할 수는 있다. 그림이나 음악이 설악산의 경험을 묘사하는 것처럼 텔레비전은 텔레비전의 방식으로 그 경험을 묘사한다. 나름대로의 방식에 따라 예술가와 프로듀서의 상상력에 따라 개별적 경험의 특성은 파괴되지만, 이들의 성찰을 통해 과거의 순간들이 우리에게 다시 다가옴으로써 그것은 영속성을 획득한다.
이상을 정리하면 장소는 해석적이고 미학적인 반면, 공간은 추상적이고 기능적이다. 장소는 경험, 의식, 상상을 통해 자아실현이 이루어지고 자아정체성이 형성되는 곳이다. 물리적 거리의 소멸은 곧 장소의 근접성을 의미한다.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장소의 의미가 곧 친밀함과 편안함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매개된 경험이 장소감을 가지게 하느냐 아니면 추상화된 공간으로 포섭시키느냐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우선 매개되지 않고 직접 우리가 만나는 도시의 건물을 생각해보자. 백화점과 같은 건물은 물리적으로 존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고향이나 집과 간은 장소라고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장소가 표준화될 때 전통적으로 장소가 지니고 있던 친밀감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기든스는 이것을 장소귀속 탈피 (place-disembedding)이란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쇼핑센터를 예로 들면서 백화점과 같이 손님들의 편리하도록 잘 설계되고 배치된 건물은 편안함과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이러한 백화점이 어디에 가나 비슷한 배치와 이동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또 소비자들이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러한 공간이 편안한 장소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 장소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사람들의 손때가 묻음으로써 생겨나는 독특한 성격 (벤야민적 의미에서 아우라)은 표준화된 공간으로서 백화점과 같은 곳에서는 생겨나기 어렵다. 이를 기든스는 장소의 분절화라 부른다. 백화점 공간이 가지는 차별성은 장소상품화라는 전략을 통해 다른 장소와 차이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적대적이고 배타적인 경향을 지닌다는 것이다. 또 하비는 '차이의 끊임없는 미끄러짐'을 통해 분절화되고 파편화된 장소는 폭력적 공간실천논리가 지배하는 곳이라 부른다.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매개된 장소는 어떻게 볼 수 있는가? 9시뉴스에 나오는 설악산 단풍, 해외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인도의 갠지스강, 다이애나 장례식 중계에서 들여다본 영국의 왕실 등등. 혹은 월드컵 축구 중계를 통해 만나게 되는 타자들로서 다른 민족들. 투안이 "민족국가는 최대의 (장소적 혹은 영토적; 인용자 첨부) 가시성을 획득해야만 했다" (284 쪽)라고 말할 때 국가는 독립기념관, 역사교과서, 전쟁기념관 등을 통해 국가를 숭배의 대상으로 만드는 전략을 발전시켜 왔다. 장소의 정체성이 개인적인 집단적인 삶의 열망, 필요, 기능적인 리듬을 극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성취되듯이 월드컵이라는 민족국가 수준의 의례 (미디어 이벤트로서)로서 다른 민족과의 경쟁과 갈등을 축구경기라는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함으로써 시청자들에게 생생한 실재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남는 문제는 정보테크놀로지를 통해 재현되는 매개된 현실이 어떻게 표준화되고 추상화된 공간으로 떨어지지 않고, 장소화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7. 마무리: 매개된 경험의 성격
이 글의 목적은 정보테크놀로지가 모더니티의 토대가 되는 시공간의 변화와 어떻게 관련되는가를 이론적으로 탐구하는데 있었다. 정보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나타나는 새로운 경험의 형태로서 매개된 경험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다. 매개된 경험은 책이나 신문을 읽으면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면서, 인터넷을 항해하면서 사용자들이 겪게 되는 경험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 글은 기든스와 톰슨 그리고 인문지리학의 이론에 기대어 매개된 경험을 일상생활 안에서 일어나는 시공간을 살아가는 행위로 보고자 했다. 매체를 접촉하는 행위를 메시지의 수용과정이라는 담론이나 텍스트의 순환에서 벗어나 사회적 행위로 연결시킬 수 있는 개념틀로서 자기전유과정을 검토했던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톰슨의 자기전유 과정모델은 모더니티의 중요한 특성으로서 정보테크놀로지에 의해 만들어지는 매개된 공간과 매개된 경험을 분석할 수 있는 분석틀로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여전히 추상의 수준이 높기 때문에 현실에서 일어나는 매개된 경험을 분석하기에는 여전히 많은 하위 개념들이 필요했다. 이 점에서 네 번째 절에서 인문지리학에서 발전한 시간, 장소, 공간의 개념을 살펴보고 그것을 매체를 통해 드러나는 현실의 성격에 비추어 보고자 했다. 매체를 통해 드러나는 현실 (설악산 단풍이나 북한의 기아)은 흔히 영상이미지 혹은 재현된 현실이라 부르지만, 이 글에서는 오히려 시간, 공간, 장소라는 범주들을 통해 재현된 현실을 바라다보고 그것을 일상생활 안으로 끌어들이는(전유하는) 활동이라는 측면에서 설명하고 했던 것이다.
우리의 이와 같은 전제는 재현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라는 인식론적 질문이 아니라, 매개된 시공간이 인간의 존재조건 (여기에서는 정체성으로 표현되었던)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매개된 현실은 '장소적'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앞서의 논의에서 여기에 대한 답은 제대로 제시되지 않았다. 이 질문에 만족할 만한 해답을 내놓는 일은 필자의 능력을 넘어선다. 다만 정체성 형성의 측면에서 이 문제를 따져 보고자 한다.
우선 하나의 지역이나 공간이 장소적이기 위해서는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손때가 ane고 시간이 투입되어야 하는 점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는 늘 앞으로 걷는다. 하나의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할 때 두 지점 사이의 거리는 시간으로 표시된다. "자동차로 1시간"이라는 식으로. 시간과 공간상에서 우리는 늘 앞으로 나아간다. 일생을 살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어딘가로 목표를 가지고 이동한다. 한 사회가 역사적으로 움직여 나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우리는 역사적 시간 (이때 역사란 생의 역사일 수도 있고 한 사회의 역사일 수도 있다)과 정향공간이라 부를 수 있다 (투안, 9장). 텔레비전에서 우리가 만나는 현실은 정향공간(oriented space)이 없어진 공간이다. 그런데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과 거기에서 주어지는 매개된 세계를 여행하는 일은 마치 음악이나 춤과도 같아서 앞으로 옆으로 뒤로 이동한다. 텔레비전을 볼 때 느끼는 자유로움은 텔레비전의 시청이 많은 경우 방향성이 없는 공간을 여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여행에서는 이러한 성격이 더욱 강화된다. 어딘가를 목적을 가지고 가야하고, 무엇인가를 목적을 가지고 수행해야 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난 여행인 셈이다.
이것은 자유로운 여행이기는 하지만, 성찰적이지는 않다. 매개된 현실이 우리의 삶 안에서 영속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성찰을 통해 간접경험된 현실들이 재구성되어야 한다. 소설을 읽을 때, 미술작품을 볼 때 우리는 예술가의 감수성이 읽어낸 세계의 경험을 재경험하고 즐길 수 있다. 이때 예술가에 의해 재구성된 현실은 그것 자체로 읽기 보다는 독자/관객으로서 우리의 경험과 결합될 때 비로소 우리의 삶 안에 들어올 수 있다. 소설에 나오는 친밀한 장소, 가족과 친구와 연인에 대한 애틋한 경험 역시 그것 자체로 즐거운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기억과 경험을 되살리기 때문에 재미가 있고 감동적인 것이다. 텔레비전을 통해 만나는 장소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점을 다시 월드컵축구 중계의 사례로 돌아가 설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월드컵 축구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민족주의적 정서이다. 만일 민족주의적 정서가 개입되지 않았다면, 월드컵의 재미와 열광은 반감할 것이다. 월드컵은 영호남의 갈등도 어느샌가 사라져 버리고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이 우위에 서는 계기를 제공한 셈이다. 월드컵은 민족정체성이 지니고 있는 배제와 포섭을 동시적으로 보여준다. 외적으로 일본에 대해, 카자흐스탄에 대해 한국이라는 배제적 경계가 설정되었고, 내적으로는 호남과 비호남 할 것 없이 포섭적 통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포섭의 측면에서 보면 스포츠 중계는 한반도라는 영토 안의 국민을 민족으로 통합한 셈이고, 월드컵은 민족정서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느끼게 되는 상징적 자원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Brundson 과 Morley (1993)는 텔레비전을 '민족국가의 사생활'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렇게 월드컵 축구를 중계하고 시청하는 과정에서 민족정체성이라는 범주가 개입될 때 그것이 배타적인 민족주의라는 집합적 행동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타자로서 다른 민족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러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관건이 되는 것이 사유 혹은 성찰의 개입여부인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이번 월드컵을 둘러싸고 나타난 민족주의의 모습은 부정적 정체성이 강화되는 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민족국가의 생활세계가 70% 이상의 시청률에서 보듯 내부적 응집력을 강화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이 과정에서 한국인이라는 소속감은 '우리'와 '그들'이라는 경계짓기를 통해 이루어지고, '그들'과 그들이 사는 세계를 만나기보다는 그들에 대한 고정관념이 강화되는 계기였다. 고정관념은 타자로서 그들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스쳐 바라다보는 면식(acquaintance)에 불과하다.
이 지점에서 기든스의 모더니티의 딜레마로서 존재론적 안정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신문과 방송의 보도들은 축구에 패하면, 파리 월드컵에 나가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 같은 불안감과 두려움을 보여주었고, 이것은 많은 국민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게 이기고, 월드컵 본선 3회 연속진출이 확정된 사건은 민족의 저력을 다시 한 번 세계에 드높인 성취로 찬양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내부의 응집력이 강화되고, 민족적 자부심은 성취되었을지 모르지만, 상대국가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나아진 게 없었다. 불안과 두려움은 승리를 통해 환희로 바뀌었지만,
타자에 대한 이해, 세계에 대한 이해는 오히려 사회 전체차원에서 보면 기존의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월드컵을 통해 한국인들이 경험한 확장된 공간은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성찰적 계기로 작용할 수 없었다. 여기서 성찰적이란 자아와 대상 사이에 사유의 과정이 개입하는 것이다. 부버 (Buber, 1957)가 "여기서 하나의 존재는 전체로부터 발생하여 하나의 세계로서 자신을 전체와 분리시키고 자신을 그 전체와 대립시킬 수 있는 자격을 지닌다는 점이 인간의 삶이 가지는 특성" (Soja, 1989, 이무용 외, 1977, 170쪽 재인용)이라고 할 때 사유는 '최초의 거리두기'이고 인간이 스스로를 세계로부터 분리함으로써 객관화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거리두기로서 사유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늘상 일어나는 일이다.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 이 점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보는 것은 자아와 대상 사이에 거리를 두는 효과를 가진다. 우리가 보는 것은 항상 '저기에' 있다.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은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볼 수는 없다. 친밀한 순간에 사람들은 눈이 흐려진다. 생각하는 것은 거리를 만들어 낸다. 특정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장소가 가지는 분위기에 파묻혀 있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들이 그 장소를 생각하자마자, 그 장소는 '저기에' 있는 사유 대상이 된다 (투안, 235쪽).
이렇게 보면 현존재는 장소라는 공간 위에서 인간의 의도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을 통해 결함되고 관계를 맺는다. 소자(Soja, 1989)가 말하듯 "실존적 공간성은 존재를 장소에 즉 생활세계 (후설의 Lebenswelt)에 위치지우는" 것이다 (172 쪽). 이러한 과정을 장소설정 (emplacement)라 부를 수도 있고, 기든스처럼 재귀속 (reembodiment)라 부를 수도 있다. 추상적 공간이 장소적이 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개념을 설정해 보면, 매체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현실의 그림 역시 '장소적'이 되기 위해서는 이들 장소설정이나 재귀속의 과정으로서 사유의 과정 혹은 비판적 성찰의 과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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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ddens, A. (1991). Modernity and self-identity. Self and society in the late modern age. Stanford: Stanford Univ. Press.
Soja, E. (1989). Postmodern geographies: The reassertion of space in critical theories. London: Verso. (이무용 외 옮김. 1997 <<공간과 비판사회이론>> 시각과 언어,
Thompson, J.B. (1995). The media and modernity. A social theory of the media. Stanford: Stanford Univ. Press.
Thompson, J.B. (1990). Ideology and modern culture: Critical social theory in the era of mass communcation. Cambridge: Polity Press.
Tuan, Yi-Fu (1977). Space and place: The perspective of experience. Minniapolis: Univ. of Minnesota Press. (구동회, 심승희 옮김. 1995 <<공간과 장소>> 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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