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5장 17절 엘리바스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 여기지 말지니라.” 전능자, 전능자 엘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도 하나님은 자체가 온순하고 완전하다는 것. 이 하나님에 대해서 흠이 있다고, 하나님이 문제가 있다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하지 말고, 온전한 분이 자신의 온전함에 미흡하니까 징계했을 것이 아닌가 말이죠. 네가 지금 온전한 하나님 원하는 수준에 안되니까 징계했다는 이 말은 뭐예요? 그렇게 이야기 하는 자기 자신은 너무나도 더 온전한 위치에 올라가 있고, 그래서 덜 징계 받은 내가 징계 많이 받고 있는 욥에게 내가 한 소리해야겠다는 이 말 아닙니까?
자기 정당성을 일부 확보한 상태에서 자기 정당성. 그래서 자기 정당성이 내포되어 있는 그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선택하기를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해요. 좋아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복음은 복음 전하는 사람조차도 죄인 중에 괴수로 만들어버립니다.
‘내가 전했더니만 은혜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경건과 나의 온전함으로 그 사람이 앉은뱅이가 나은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했지.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이야기했죠. ‘왜 자꾸 너희들은 나를 주목하느냐 우리들을 주목하느냐 우리의 경건과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은 것이 아니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 그 사람을 주님께서 그 사람을 낫게 하셨는데, 우리는 단지 목격자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재(저 사람이)가 했어요.’하는 것처럼 ‘주님이 했어요.’라고 가리키는 사람에 불과한데 왜 자꾸 여러분은 우리가 마치 어떤 주문을 외워서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여러분 그거 한 번 해보세요. 그거 시몬 악령 들린 시몬도 그거 할 줄 압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이 사탄을 물러가라.’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래서 6가지 환난이 너희를 구원하면 7가지 환난은... 그래서 반드시 목사님이 설교할 때 계시 전달의 일환으로 칼 바르트에 의하면 그것도 하나의 계시에 부합되니까. 저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만은, 성경만이 계시입니다만은, 어쨌든 계시 전달이니까 그 속에는 교인들이 무엇을 느끼는가 하면 설교를 전하는 목사님조차도 이것이 우리와 동일하게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한다는 뉘앙스를 줘야 됩니다.
‘너희들이 내게 한 수 배워.’ 이런 건방떠는 설교자가 되면 안되지요. 그것은 그 사람이 목사에게 종속되어있지 주님께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주님의 종이 아니고 목사의 종이 되잖아요. 그것이 그러면 자기 팬 클럽이지. 동방신기 팬 클럽이나 그런 짓을 하지. 그것이 어떻게, 팬 클럽 관리나 하지 그런 짓을 합니까.
그래서 말하기를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욥 5:19) 이렇게 다시 회복된다는 것이에요. 그 욥을 아예 자기보다 수준 낮은 죄인으로 간주하고 이런 소리를 하지요. 그 때에 6장에 보면 욥이 말하기를, ‘지금 내가 받는 고난이 지금 내 선에서 해결될 고난이 아니다. 니가 그 고난을 한 번 당해볼래. 너는 이미 주저앉았어. 너희들은 나보다 더 욕했어. 얼마나 무거운지 바다 모래보다 무겁다. 바다보다 무겁다하는 그것도 나에게 겸손한 거고 그 정도로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자 보세요. 참 이 대목이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연관되는지 예수님은 누구와 이야기하는지, 하나님 아버지와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아버지 대목이 안 보이잖아요. 안보이니까 예수님을 자기 수준으로 레벨로 낮추어서 자기 자신과 예수님과의 차이점을 가지고 자기는 의롭고 예수님에게는 문제가 있다는 이런 식으로 구박을 당하잖아요. 이 구박을 욥이 현재 미리 앞당겨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은 아버지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1번 타자, 2번 타자, 3번 타자는 욥을 물어뜯는데 급급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욥의 입장에서는 답답하지요. 그래서 여기 6장 14절에 보면 아직도, 아직도 자기에게는 기도할 수 있는 여력이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14절에 보면 “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패한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도 불쌍히 여기시는데 나를 이렇게 고난 받는 나를 좀 불쌍히 여겨 달라. 지금 하나님을 원망하는 투는 아니고 계속 지금 어떤 가능성을 던집니다. 계속 나의 아픔을 빨리 회복해달라고 그렇게 요청하는 이야기가 그 뒤에 쭉 나옵니다.
6장 26-27절에 “너희가 말을 책망하려느냐 소망이 끊어진 자의 말은 바람 같으니라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벗을 매매할 자로구나” 뭐 꿈에 뭔가 영이 쑥 지나가고 이렇게 까불어 되면서 계시를 이야기해도 그것은 너희들이 하나님과 관련된 사람을 하나님과 끊어버리고 너희 수준의 네 마음대로 학대하는 그런 식으로 지금 나를 대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 하지 아니한다.’ 이런 이야기하거든요. 이런 말은 뭐냐하면 욥이, 욥이 뭔가 자기 욥의 친구는 자기 정당성을 따로 챙기는 의도가 있지만 욥은 그런 챙기는 의도 없이 있는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있는 그래로 이야기는 하는데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각각 다른 쪽을 쳐다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7장 1절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그 날이 품군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고”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친구들아, 친구야 나는 지금 마치 하나님한테, 하나님하고 한바탕 싸움이 붙은 그런 느낌이다.’ 하나님이 나를 적으로 간주해서 막 칠려고 하고 나는 도망치면서 막 당하기만 하고 그런 식으로 자기 아픔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욥과 하나님만이 아는 상황이지 이쪽의 욥의 친구들에게는 상당히 엉뚱하게 들릴 것입니다.
욥기 7장 4절에 보면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이건 수면 부족입니다.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특히 이라도 아파보세요. 왜 그리 밤이 길게 느껴지는지. 빨리 아침이 되어 치과에 가고 싶습니다. 그 기간이 너무 길게 느껴져요. 다른 일에 종사하면 상대적으로 빨리 잊어버리는데 밤에는 자는 일 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이는 계속 아픈 거에요.
그 다음에 5-6절에 보면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되었다가 터지는구나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없이 보내는구나” 이 말은 뭐냐? 북틀의 틀이라는 것은 남자들은 성질나서 못합니다. 왜? 같은 반복, 같은 반복. 그래서 여자들이 하는 중소기업에 보면 보통 노래를 많이 틀어줍니다. 최유나와 조영남이 나오는 그런 프로그램. 정신없이 들으면서 정신없이 똑같은 것을 반복합니다. 라디오 많이 틀어줍니다. 정말 지루한 반복. 고난 속에는 시간이 중지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또 아프고, 밤 되면 또 아프고 시간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사람이 건강할 때 계획을 잡죠. 아픈 입장에서는 계획이라는 것이 없죠. 그래서 병원에 있는 사람에게 가장 힘든 것은 자기 계획이 완전히 몸 때문에 무산된다는 절망감. 병원에서 쳐다보며 길거리에 건강하게 다니는 사람을 보면, ‘저 놈의 인간은 나보다 더 악하게 보이는데 나는 왜, 착한 인간은 병원에 누워있고 저 나쁜 놈은 뻔뻔하게 걸어 다니는지.’ 그것이 질투심이 나고 약이 올라요 나보다 더 못난 놈이 더 건강하고 잘난 나는 이렇게 아프고.
뿐만 아닙니다. 사람은 모든 사람은 늙어 죽을 때는 항상 불공평함을 느껴서 자기 분함을 토해내게 됩니다. 내 평생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닌데, 이게 내 전부가 아닐 건데, 나는 이렇게 내 인생 마치는가, 원통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7장 7절 “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 복된 것을 보지 못하리이다” 절망입니다. 왜 절망이냐하면 어느 정도 뭔가 대충 아프다하면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욥은 자기가 당한 고난은 질적으로 달라요. 자기가 진짜 경험한 고난과 몇 주 전에 당한 고난은 완전이 질적으로 달라요. 의도적으로 하나 잡으려고 하나님께 그렇게 하신 고난이기 때문에 피할 수도 없고, 기피할 수도 없고, 그냥 당하면 당할 수밖에 없는 심정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절망이죠. 그러면 ‘이런 절망을 목사님 우리가 느낍니까?’ 느끼지요. ‘언제 말입니까?’ 내가 한 일대로 안 될 때 우리는 잠깐 절망을 느낍니다. 그 뒤에 가면 ‘저보고 어쩌란 말입니까?’동으로, 서로, 남으로, 북으로, 어디 빠질 구멍이 없습니다. 어떻게 운신할 수 없는 거,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도를 항상 운신의 폭을, 움직일 수 있는 운신의 폭을 없애버립니다. 아예 없애버립니다.
맡기라는 이 말이죠. 극한 절망. 극한 절망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맡기게 합니다.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낙타가 바늘귀에 힘들다 이 한마디에 어떻게 됩니까? 절망이죠. 내가 무슨 수로 낙타의 DNA를 조작해서 쑤셔 넣을 수도 없고, 5m짜리 대형 바늘귀를 만들 수도 없고, 어떤 식으로 통과합니까? 이것이 안 되잖아요. 절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를 항상 절망하게 하는데 아주 특유한 효과가 있습니다. 절망하게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형제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다’ 우리를 또 다시 절망하게 합니다. ‘전기톱 가지고 있다고 오른 손이 있거든 떼어버리라.’ ‘니가 온 몸체를 가지고 지옥 가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아니하냐?’ 절망이에요. ‘참새가 하나님의 뜻에 떨어지니까 죽고 사는 것은 니 문제가 아닌데 니가 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걱정하느냐?’ 그 자체가 절망이에요. 집이 못산다고 용서가 될까요. 절망입니다. ‘염려하지 말라.’ 염려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남 비판하지 마라. 니 눈에 들보를 보고 빼고 남의 티클을 봐라.’ 들보를 무슨 수로 뺍니까? 집게를 가지고? 무슨 수로 빼요? ‘좁은 문으로 가라.’ ‘찾는 사람이 적은대로 가라.’ 혼자서 고독을 즐깁니까? 뭡니까? 못 지킵니다. 절망하게 합니다. 절망하게 하는 것이 주님의 주특기입니다.
7장 11절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이 말은 뭐냐하면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이, 이것은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내 속에 터져있는 것이 그냥 터져버려서 말이 나온단 말이죠. 내가 너희를 의식해서 너희들에게 잘 보이려고 나를 치장하려고 나의 의로움을 전부다 과시하기 위해서 조작하는 것이, 거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 영혼이 들어있는 것이 터져 나온단 말이죠. 그것이 바로 자원하는 심정 아닙니까?
성도는 솔직해야 됩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솔직합니까?’ 간단하죠. 나는 죄인입니다. 끝나는 겁니다. 나는 뭘 하든 죄인입니다. ‘저렇게 느껴지지 않는 것을 어떡합니까?’ 그것은 덜 솔직해서 그럽니다. 덜 얻어 맞아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는 순간부터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의미의 짐은 다 날아가 버립니다.
죄수가 죄수로 가면서 거울을 보고 이런 죄수 없어요. 신사복 입을 때 넥타이 멜 때는 메지만 남자들 예비군복 입은 것을 보세요. 단추도 이렇게 풀고 지나가는 아가씨들 보고 휙휙 불고, 그냥 대충 살아요. 시간만 때우자고 모자도 삐딱하게 쓰고, 의도적으로 반발한다고, ‘바쁜 나를 왜 이렇게 동원 훈련시키느냐?’는 이 말 아닙니까.
자기가 죄인 되어 버리면 자기 꾸미기를 할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습니다. 그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와라 너를 죄수 만들어 줄게. 내가 너희를 죽여주마. 죽은 시체로 만들어 줄게. 확실히 보장할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벗겨줄게 내게 배워라. 예수님이 세상 걱정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죽으러 가시는데. 내게 배워라. 나를 따라오면서 배워라 이 말이죠. 차라리 잘 될라고 하고, 자기 정당성을 잊어버리지 않으려 하니까 누적이 되고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7장 13-14절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래시고 이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욥이 꿈을 꿔도 욥에게 위로가 되는 말이 아니라 깜짝깜짝 놀라는 말, 더욱 더 놀라게 하는, 그래서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보다도 죽은 것이 낫습니다. 죽는 것도 지 마음대로 됩니까? 하나님을 생각해서 차라리 죽여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살려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죽여달라고 합니다.
16절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이니이다.” 보세요. 현재 누가 목 조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죽이려고 목 조른다는 것이죠. 내가 알아서 죽을테니까 17-18절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이 말은 나중에 엘리후가 이야기합니다.
뭐냐 하면 ‘사람이 착한 일을 해봐야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으며 사람이 나쁜 일을 해봐야 하나님 나라에 무슨 손실이 오겠습니까? 그냥 대충 철없다 이렇게 생각 하시고 그냥 내버려두시기 바랍니다.’ 이야기합니다. 욥이. 온전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온전함을 흠집을 안 낼 테니까 좀 놓아 달라는 거죠.
거제도에 몽돌이 많습니다. 몽돌 주워가는 사람이 덤프 트럭이나 포크레인 동원하는 것도 아니고, 알아서 주머니에 넣어 가는데, 몽돌 주워갈 때 ‘이것 하나 주워간다고 해가지고 갑자기 모래 해변이 되는 것도 아니고’하고 주워갑니다. 그 심정 압니까?
하나님 나를 왜 밟습니까? 밟을 것도 안 되는데 왜 밟습니까? 하나님은 사랑하니까 자기 백성이니까 밟는 거에요. 그게 좁은 문의 구원 방식입니다. 20절에 나오네요.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 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나를 건드려서 하나님 좋을 것이 뭐가 있습니까? 차라리 나를 남겨두면 하나님도 편하고 나도 편하고 둘 다 좋은데 괜히 건드려가지고 나 때문에 신경쓰시면 주께 너무 심려끼쳐서 죄송합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나 좀 밟지 말지. 자꾸 욥이 하나님하고만 상대합니다. 대부분의 대화가, 그렇니까 여기서 누가 따돌림 당했습니까? 점잖은 척 하는 친구, 2번타자, 2번 타자가 김재현인가? 2번타자가 나옵니다. 2번 타자가 누굽니까? 빌닷이에요. 욥의 귀를 잡아 당기는 식이죠. 어이 욥, 내 이야기 좀 들어봐라. 그 하나님의 계시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한테 있다고 내 얘기 들어봐라고 하는 겁니다.
8장 2절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광풍과 같겠는가” 이 빌닷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대변자로 봤습니다. 하나님의 대변자. 역시 하나님에 대해서는 내가 빠삭하게 잘 알아. 욥을 충고할 사람은 나 밖에 없어. 하는 식으로 나선다는 말이죠.18:07
8장 3절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이거 또 뿌려야되요. 지금 하나님의 공의하심과 전능하심을 욥이 모르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욥이 더욱 더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에요. 늘 학교에 다녀오면 어머니가 애야, 밥 먹었냐, 배고프지, 그래 밥 해줄테니까, 오늘도 공부한다고 되제. 땀 딱아줄게, 목욕물 데워 놨다. 하시던 어머니가 한 10년 간 그렇게 하시던 어머니가 하루는 토라져 있는거에요. 그 때 아들이 엄마 무슨 일이었어요? 해도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형이 있다가 하는 말이 엄마가 무슨 일은? 니가 그렇게 생각하는 니가 잘못이지. 엄마는 아무 일없어. 그냥 똑같아. 그러니까 아닌데 분명히 삐졌는데, 니 삐졌다는 니가 나쁜 놈이야 라고 빌닷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욥만 알아요. 이상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욥만 알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요. 다른 사람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버릇처럼 알고 있던 것을 되풀이 한 것 뿐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들도 교인들 심방할 때 좀 대충하다가 안 되겠다하면 나와 버려야 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루시기 때문에 안다고 덤벼들다가 목사님 그거 저 알거든요 됬거든요 하면 된 줄 알아야해요. 그런데 목사님들이 권위를 못 버려가지고 괜히 또 잔소리하는 것이 엘리바스 1번 타자, 2번 타자, 3번 타자 해가지고 괜히 하나님 앞에 어이 김 집사야 니는 목사를 위해 기도 해줘. 어리석은 목사가 니 뜻을 모르고, 이렇게 나온다.
8:4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 뭡니까? 너희 자식 죽은 것이 네 자식들이 죄 지어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욥이 환장하죠. 그렇다면 욥이 부자 될 때 왜 부자되었습니까? 그것은 지금 해명이 안되잖아요. 양적 개념을 보면 안 된다는 것에요. 욥이 부자될 때 그러면 무슨 큰 착한 일해서 부자 된 것입니까? 욥은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거둔 자도 하나님이에요. 이것은 하나님께 철저함을... 나는 그것에 대해서 행악됨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빌닷이라는 사람은 더 철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식이 죽은 것은 자식이 죄를 지어서 죽었다는 것을 말해줘야 공의로운 하나님이 계속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라는 허수아비를 만들 때 우리가 알고 있는 공의와 정의를 다 갔다 붙쳐서 닥닥 갔다 붙쳐서 꼴라주를 하듯이 작품을 만들어 놓으면 그것이 이젠 하나님이 되는 것이에요. 저건 갔다 붙이고 나의 양심에 갔다 붙이고 붙여 나야 합니다. 우상을 만들자는 이 말이거든요. 근데 이 우상을 깨버리고 낮선 고난이 왔을 때 이런 고난은 다 허수아비에요. 이 말도 빌닷의 말도 뭡니까? 자기 정당성이 보장된 하나님의 계시를 토해내고 있습니다.
5절-7절을 보면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래 되있거든요. 이게 다단계 회사에서 얼마나 많이 써 먹습니까? 이렇게 무식한 조작된 계시를 말한 것 가지고, 갔다 붙쳐 놓고,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영웅설화아닙니까? 하면 된다. 나무에다가 조잡하게 그려가지고 이발소 그림 그려서 대나무 몇 개 그려서 하잖아요. 니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고난이 약할 때는 먹힙니다. 그런데 욥이 당한 고난은 갈수록 고난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 선에서 어떻게 나가시오 할 수 있는 고난이 아니고 점점 더 더 쳐들어와요. 지금 이것은 개시도 안했어요. 개시도 안했어요. 고난이 있는대로 다 쳐들어와요. 여러분 좁은 길로 걸어 가면 좀 지나서 넓은 길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상상력이 좁은 길로 가다보면 불록한 곳이 있는 줄 아는데, 이런 불록한 곳이 없어요. 좁은 길로 가면 계속 좁은 길이지. 좁은 길에서 불록 넓은 길이 있으면 ... 모든 사람이 넓은 길을 가죠. 넓은 길로 가다가 좁아지면 누가 오겠습니까? 전체로 볼 때 넓은 길이니까 가느거죠. 뭔가 좁을 길로 갔다는 성과급을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사람들이 좁은 길이 있으니까 한 마디 해야 하는데, 목사님 이런 욥의 고난을 우리가 안 받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받고 있다면 기어서 못 오잖아요. 이렇게 관절염을 앓고 있는데. 이런 욥의 고난은 같은 성도이지만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욥의 고난보다 더 큰 고난을 우리가 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욥은 아직도 자기가 의인이라고, 의인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의인을 죄인 만들기 위해서 고난이 더 가미되어야 되죠. 26:27
그런데 깜짝 놀라서 항복했잖아요. 십자가 앞에서. 나와 버렸다는거죠. 나오니까 우리가 가진 모든 재산과 자식이 있지만, 다 주님의 것이니까. 연극을 한 번 더 해 볼까요? 내 품의 자식이 아니라 이미 애 이름은 등기로 하나님의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뭘 해도 하나님의 은총이자 자비이지 내 것이 아니잖아요. 가끔 착각해서 내 것이라고 할 때마다 조금씩 위협용으로 가끔 해가지고 사고 일으켜서 저 놈의 자식 죽으라고 하나. 다시 주의 것으로 반납하지만, 대부분 내 자식이지만, 가끔은 반납해요. 주여 알아서 해 주이소. 내 뜻대로 안 되네요. 자식 내 마음대로 안 되네요. ‘무자식이 상팔자다’라고 그 이야기 하다가 혹시 자식이 들어가지고, 엄마 무자식이 상팔자가? 하니까, 그런 소리한 적 없다. 내가 왜 그런 소리 했을까. 어머니 섭섭합니다. 마음에 상처됩니다. 청소년 상태로 그 때까지 갑니다.
여기 11절을 보면, “왕골이 진펄이 아니고 나겠으며 갈대가 물 없이 자라겠느냐” 이것이 뭐냐하면 여러분 장마철에 보면 갑자기 쓸모 짝에도 없는 식물들이 수풀을 이루는 경우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쓸모 짝 없는 그것, 강가에 장마되기 전에 찾아야지 수풀을 이루면 찾지도 못합니다. 쓸데없는, 아무 쓸모 짝없는 것이 무슨 대나무처럼 자라난다는 것이죠. 그 말은 뭐냐하면 욥 니 마음 속에 주님 앞에 쓸모 짝 없는 니 교만만 부쩍 늘어가지고, 너가 스스로 그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모습을 니가 잊어버렸다. 니가 건방진 말이 넘쳐 났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이야기하는가 하면 지금 욥이 당하는 고난의 수위에 맞는 그런 형질을 짜내다 보니까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 뒤에 나오지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사곡한 자의 소망은 없어지리니 그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잡아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뽑히고 모른 척 하고, 19절처럼 흙에서 나고, 이리 된다는 말이죠. 쫄딱 망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 후에는 8장 19절-22절 “이와 같고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신즉 웃음으로 네 입에, 즐거운 소리로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입을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 왜 이런 멘트를 붙이냐고 하면, 위로 멘트거든요. 내가 좀 심했나? 그렇다면 내가 친군데, 명분상 친군데, 좋은 소리해야. 소망이나 줘야지. 29:17
이게 뭐냐? 적극적 사고 방식이에요. 내가 너무 눌러 버리면 기죽어서 안 되지. 이렇게 하죠. 그 때에 욥이 뭐라고 합니까? 물을 가져다 쫙 뿌려버리죠.
욥 9:1-3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다 안다 이 말이죠. 너희들이 하는 말을 다 안다는 말이에요. 너희보다 더 잘 안다는 말이지요.
욥 9:4-5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스스로 강퍅히 하여 그를 거역하고 형통한 자가 누구이랴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자기가 알고 있던, 지금까지 알고 있던 하나님을 다시 재점검합니다. 그래 니가 아는 식으로 해볼께. 그런식으로 점검하면서, 그런데 내가 받고 있는 고난은 그런 원칙에도
포착이 안 된다니까, 검증이 안된다니까, 그 심정을 네가 아느냐? 이 말입니다. 그게.
내가 다 동원했는데, 그게 그렇게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데 어떡해. 설명이 안 되는데 어떡해. 아이고 답답해 미치겠다. 이 말이죠.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어느 정도 전능하신 하니님인 것을 9장에 계속 쭉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 13절에 보면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아래 굴복하겠거든” 라합이라는 말이 뭐냐하면 바다의 괴물이에요. 바다의 괴물이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바다 속에 악한 놈들을 바다 속에 다 쳐 넣거든요. 그래서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너 나오지마’ 넌 인간 사는 깨끗한 곳에 들어와. 너는 더러운 곳에 살아. 하고 바다 깊숙한 곳에 집어 넣었어요. 어둡다는 것은 뭔가 신비스러운 것이 들어 있는데, 그것은 항상 지상에 해를 줄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다에 사는 것은 어떤 이유로 바다에 사는가 하면 괜찮은 우리를 해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바다에 가두어 두었다는 식으로 한 겁니다. 그런 이미지에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바다 괴물이 슬금슬금 올라오지요. 바다에서 노는 놈들이 육지에까지 올라왔으니까 육지가 개판 되버리죠. 온통 짐승이 되어버리죠. 짐승 판이 되어버립니다. 악마의 세상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공평하신 하나님이 그것을 다 조절하고 있다는 말이죠.
욥 9장 20-21절을 보세요.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 나는 순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이 모든 것이 너희들이 다 아는 것이고, 다 그렇게 아는 것이라 이 말이죠. 다 아는데, 하지만, 하지만, 내가 지금 당하는 것은 원통해서 못 살겠다 이 말이죠.
27절에 나오죠.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원통함을 잊고 얼굴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이 오셔서 재판을 해줘야지 32절에 재판 “하나님이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이것은 뭐냐? 주석가들은 뭐라고 하냐면 지금 욥이 억울해서 하나님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이만큼 잘 압니다. 아니까, 제발 하나님께서 오셔서 고난 받는 이유를 알게 해달라.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뭔가 잘못 알고 있는지, 내가 모자라는게 있는지, 지금 제가 이렇게 정답이라고 저는 보는데 혹시 하나님 정답이 아니십니까? 아니시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성도라는 것이 평소에 기도가 이렇게 솔직 담백해야 합니다.
10장 1절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원통함을 발설하고 내 마음의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원통하다는, 왜 원통하냐?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몰랐다든지 이러면 ‘아이고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몰랐네.’ 그러지만 지금 9장에서 쭈욱 이야기한 것이 친구들이나 욥에게 자기가 자신에게 되물어도 이건 도대체 문제될 것이 없다, 문제 될 것이. 전부 100점이거든요. 100점인데, 100점 맞은 사람에게 세상에 벌 내리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이건 도대체 앞뒤가 맞으니까 상당히 당황스럽고 괴롭다 이 말입니다.
욥 10장 6-7절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사실 하시나이까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 욥이 지금 어느 정도로 머리를 쓰고 있는가 하면 내가 죄가 있다면 내 죄를 찾으시옵소서. 라고 나를 완전히 비우듯이 내뱉는 이것도 죄란 말입니까? 이 말입니다. 주여 저에게 죄가 있다면 알아서 찾아주시옵소서. 하지만 이것조차 나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보는데, 하나님도 그렇게 보십니까?라고 묻는 거에요. 34:42
그러니 이것은 기도할 때 인간적으로 숨기지 않을 수 있는 것, 모든 숨기지 않는 방법을 다 털어 놓고 지금 주님 앞에 하소연하고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공식을 알아야 되요. 이상한 글은 지우고. 기도는 뭐냐? 기도는 응답받을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하소연이에요. 하소연. 하소연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뜻은 성령이 기도한대로 움직이지 우리의 기도한 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것을 알지 못해요. 로마서 8장 26절에 있어요. 우리는 기도할 것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뜻을 아셔서 성령께서 뜻대로 기도하사 그 열매를 우리 것으로 전환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미리 아신 자를 부리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도를 안 합니까? 기도 하게끔 합니다. 날마다 합니다. 하소연 하게끔 합니다. 하소연 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더 밀착되어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냥 사람들과 수다떤다면 자기 옳음만 자꾸 쌓이고 자기 관리에 나서게 됩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는 기도할 때 기분 좋은 이유가 자기 책임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우리 교회 김집사님이 계시는데 김집사님이 신앙생활 잘 하게 하옵소서 라고 하소연 하듯 해 버리면 이미 그것은 기도해 놓고 내가 김집사의 운명을 책임질 부담을 가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잖아요. 여러분 자녀가 있습니까? 하나님 이 자녀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말도 안 듣고, 이래도 말 안 듣고, 농띠 부리고 아침에 늦게 일어나고 밥 안 먹고, 티브이나 보고. 어떻게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그 순간부터는 내가 챙기는 부담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그렇게 해야될텐데, 꼭 쥐고 내 뜻대로 해주이소. 한 두 번 이야기한 것이 아닌데, 윽박지르듯 그렇게 해버리면, 내가 금식할까요? 금식해야 합니까? 내가 금식 못해서 안 하는 줄 압니까? 한 번 해 볼까요? 나도 오기 있습니다. 40일 해 치워 버려요. 40일 해 치워버리고 한 번 보자. 이런 식으로 나오면 이것은 자기 신앙을 시험할 것이 되니까. 기도라는 것은 그냥 맡기세요. 다 하이카가 알아서 해 줍니다. 그러니까 맡기는 거에요.
욥의 심정은 욥만 알고 다른 사람은 몰라요. 8절에 보세요. “주의 손으로 나를 만드사 백체를 이루셨거늘” 아, 이 말이 얼마나 심한 말인데요. 원래 신체는 백체닙까? 한체닙까? 하나지요, 하나. 그런데 얼마나 아팠으면 아픈 구석이 몇 개에요? 열 개가 백개가 되어 따로 따로 다 아파. 여기를 해결하면 저기가 아프고, 이거하면 나머지 99개 다 아픈 거에요. 자기 몸이 마치 뭐가 되었다? 갈갈이 찢어져서 100군데로 나뉘어진 느낌을 가질 정도로 욥은 자기 아픔을 그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이가 아플 때 그런 느낌이 많이 들어요. 손가락 아플 때도, 아픈 부분 따로 있고, 안 아픈 부분은 아픈 것 때문에 구분됩니다. 신체가 두체가 됩니다. 사람은 이렇게 괴리되면 그 다음부터는 괴롭습니다. 일체가 되어야 편한데, 따로 떨어져 나가면 정신적인 균열이 생겨서 아파요. 그런데 욥은 몇 체입니까? 두체도 세체도 아니고 몇체입니까? 백체입니다. 이건 감당이 안 되요. 근데 이 아픔을 예수님께서 다 겪으셨다는 것입니다.
욥기 10장 9-10절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 보내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완전히 해부하고 와해시켜버립니다.
12-15절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권고하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뜻이 주께 있은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내가 범죄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내 죄악을 사유치 아니하시나이다.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올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목도함이니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인지 압니까? 내가 지금 반성한다고 했잖아요. 내 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 고난은 내가 지은 죄에 비해서 너무 무겁다는 겁니다. 낮선 고난이에요 낮선 고난. 당할 때 당하더라도 이유는 압시다. 사실은 내기하고 있는 겁니다.
17절에 보면 ‘갈마들여’라는 말은 번갈아 가면서 들이 닥친다는 겁니다. 머리 가랑이 튼다는 말이 아니라, 군대에서 말을 할 때 1군대 군마 달려, 2군대 또 공격, 3군대 또, 1군대 빠지고 2군대 공격 청군 백기, 백군 백기 야 하는 것처럼 이건 쉴 세가 없이 이건 계속 고난이 오는데, 고통이 오는데, 40:37 마치 적군이 나와 한 몸 한 부대로 밟고 지나 가니까 숨 쉴 틈도 없이, 다른 부대가 밟고 쳐들어오고 그거 끝나는가 싶으면 새 부대가 쳐들어오고 번갈아가면서 나를 치는데 사람 환장하겠네, 이 말이죠.
참 이게 호텔에서 욥의 강의를 듣는 게 사치스러운데, 이런 걸 하려고 하면, 노인들 누워서 하는 거 뭡니까? 누워서 안마하는 거. 의료기구. 세라젬에서 나온 것 이죠. 거기 누워서 강의 들어야 해요. 온 백체가 아파요. 내려온다. 내려온다. 등뼈 쪽. 아, 아파라. 누워서 들어야 해요. 욥의 고난이구나. 하면서 들어야 해요. 다음에는 회비를 많이 거둬서 누워서 ... 정 힘들면 스위치 끄면 되니까.
여러분이 지금 욥이 그런 침대 위에 앉아 있는 거예요. 우리를 스위치 끄고 일어서면 그만이죠. 고통 끝나잖아요. 이건 끝남이 없어요. 갈라디아서 3장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지옥이 이 꼴이라. 지옥이 이게 지옥이에요 욥이 이 고통을 받고 있는 거예요. 나중에 예수님도 이 고통을 받고 있는 거예요. 낮선 고난, 하나님의 뜻이지만 너무 가혹한 뜻이에요.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가혹한 그러니까 욥이 약이 오를 만하지요. 처음부터 나쁜 짓이나 실컨 하고 벌을 받으면 덜 억울하지 착한 일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쁜 놈보다 더 큰 벌을 받았으니까 하소연 할 때가 하나님밖에 없는 겁니다.
20절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저으기 평안하게 하옵시되” 평안히 죽게 하옵소서. 21-22절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 하옵소서. 이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죽음 세계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정지된 상태, 모든 것이 흑암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차라리 그것이 더 낫지 않습니까 라고 이야기합니다.
-끊어지는 관계로 2번으로 올립니다.
3번 타자 양준혁이 나옵니다. 안타 2000개 돌파한 사람, 타율 321입니다. 오늘 모르겠어요. 소발이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왜 말이 많냐 그거에요. 말이 많을 수밖에 없지요. 욥이 몇 장부터 이야기했어요. 빌닷은 1장인데 욥은 3장이예요. 9, 10장, 2장 차지했네요. 욥은 말이 많냐? 욥이 말하기를, ‘네가 한 번 당해봐라. 말이 안 많은가? 네가 한 번 당해봐라.’ 너는 평안하게 ?? 먹으면서 ?? 에어컨 밑에서 가만히 입 다물고 잠이나 자고 있지. 네가 여기 한 번 누워봐라. 얼마나 아픈지.
자기는 이런 하나님의 고난이 친 것이 안보고 있으니까 모르는거예요. 그저 하나님은 온전하시다 은혜롭다. 안 당해보니까 은혜롭죠. 불평이예요. 안 당해봤으니까. 지금 계시 계시해도요. 욥이 당한 고난 자체가 계시입니다. 다른 계시는 없어요. 십자가의 고난이 안 담겨있으면 그건 계시가 아닙니다. 조작된 거예요.
욥 11장 2절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입이 부푼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이 말은 뭐냐 하면, 말이 많으면 그 중에 하나라도 실수가 있는데 어떻게 온전한 의라고 할 수가 있느냐? 지금 욥이 자기가 온전하다고 했습니까? 자기가 지금 하나님 앞에 죄 지은 것이 있다고 했잖아요. 지금 문제가 뭡니까? 내가 죄 지은 것이 있는데 지금 받는 형량에 비해서 그만큼은 죄 안 지었다는 것이죠. 그만큼은, 이 말은 뭐냐 하면, 욥은 눈치 챘어요. 지금 내가 받은 고난이 죄 지은 것을 누적해서 더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본인은 아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르니까 자꾸 뭐냐? 형량쪽으로 가는 거예요. 분명히 그런 벌은 죄 지은대로 간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합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의, 자기 자신의 현재 건강함을 자기의 공로가 착한 일 많이 해서 나쁜 짓 적게 했기 때문에 욥보다는 더 건강하고 그것보다는 더 어떤 특수한 상황의 분리가 안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었지요. 사람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 사람 분명히 나보다 죄 지은 것이 있기 때문에 합당한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합당한 힘을 냈다 하는 겁니다. 예수님 뭐라고 합니까?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너희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네가 더 나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고속도로에서 차 사고가 나서 죽었다. 아이고 나쁜 짓 많이 했구나. 천만의 말씀, 그걸 보고 나쁜 짓 많이 했다는 그 인간이 더 나쁜 놈이라는 이 말이죠. 결국은 예수님은 이 세상을 나쁜 세상으로 만드는 거예요. 불행 세상. 46:16
욥 11장 4-6절 “네 말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의 목전에 깨끗하다 하는구나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지혜의 오묘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너는 알라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 이게 아직 지금 매를 덜 맞았구나. 이 말이거든요.
욥 11장 7절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지금 전능자의 존재와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십자가 마을 사람들은 십자가 밖에 모른다는 비난을 많이 받아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왜 이야기 안 해? 지금 복음은 십자가가 중심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에 대해서 모르겠습니까? 알아요.
그런데 핵심은 그 십자가를 거치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이 조작된 계시에 불과한 것예요. 인간들이 자기 정당성이 남아 있으면 안 돼요. 인간에게 자기 의가 남아 있으면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자랑밖에 안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깨끗하게 십자가를 전해주도록 해야, 우리 앞에 공식이 내가 죄인 맞습니다. 피로 말미암아 구원 받지. 내가 열심히 산다고 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군요. 이래야 복음 답다 이말이죠.
그런데 십자가를 모르는 인간들은 십자가를 빼돌리고 이것을 작게 생각 하고, 더 큰 것 하나님은 삼위일체고, 살아계시고, 존재하시고, 음미하시고 그런 소리 하는 거예요. 시간 관계상 삼위일체에 대해서 말 하지 않겠습니다만 그것도 조작된 계시라고 보시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삼위일체 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10절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개정하시면 누가 능히 막을 소냐.” 개정이라는 말은 재판을 여는 것을 말해요. 대구에 개정식당이라고 비빔밥 잘하는 곳이 있는데, 그거 말하는 것이 아니고.
11절 “누가 능히 막을 소냐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겁니다. 13-14절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로 네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하라” 버리지 뭐. 주여 버리겠습니다. 그러면 되잖아요. 어떻게 버립니까? 욥의 친구들은 어떻게 이유 있는 것을 자꾸 이야기해요. 사람이 행동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이런 일이 왔기 때문에 행동만 고치면 합당한 결과가 주어진다는 거예요.
욥은 그것이 아니예요. 이유 없이 당하고 있어요. 이유 없이. 까닭 없이 당하고 있다고. 까닭 없이 당하고 있는 그것의 까닭을 찾는 이유를 찾는 교인들이 어떻게 알아요? 그게 어떻게 십자가를 알수 있어요? 까닭을 얻기 위해, 이유를 알기 위해서, 이유 있는 신앙을 하기 위해서 교회 왔는데, 그게 손님이고 고객인데, 이유 없이 복을 이야기하고, 이유 없이 구원을 이야기하면 그 사람들 듣기 싫어해요. 내가 어떻게 했더니만 어떻게 했다는 간증이야기예요. 간증. 어떤 장로 감사헌금 해서 복 받은 이야기 하라는 겁니다. 어떤 목사 뒤에서 욕해서 저주 받은 이야기 하고, 그래서 어떤 행동을 했더니만 어느 행동에 따라서 반대 급부가 왔다, 그 이야기만 하라는 겁니다. 왜, 우리가 그대로 해 줄테니까, 목사 시키는대로 다 해 줄테니까, 그 이야기만 하고, 십자가에서 이유 없는, 까닭 없는 축복 그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거죠.
까닭 없는 축복을 이야기할 때는 기분 좋지만, 까닭 없는 저주 이야기하면 기분 나쁘잖아요. 그게 기분 나쁘거든. 당신이 이번에 애 대학 떨어진 것도 다 뜻입니다, 하면 대게 기분 나쁘단 말이죠. 그런 것은 나는 알고 떨어진 애 재수해서 더 좋은 대학 가는 방법을 이야기 해 달라는 겁니다. 금식을 몇 일 할까요? 그 방법을 이야기하라는 거죠. 목사들이 자료 추적해가지고, 아, 경기도, 충청남도 서산 보령군에 가면 40일 금식 기도 해가지고 된 사람이 있는데 그것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건 전설의 고향이죠. ‘전설의 고향 충청도 보령군에 40금식해서 서울대 통과한 사람, 수능 150점 맞고 톱 끊은 사람’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러면 조작이든 뭐든간에 희망입니다. 희망, 한 풀이가 되요. 한, 한이 맺혔는데, 희망 품고 가니까 이번 일 성사만 잘 되면 다이아몬드가 문제겠습니까? 하면 듬뿍 헌금하고 간다는 말이죠. 장사는 이렇게 하는 겁니다.
욥 11장 19절 “네가 누워도 두렵게 할 자가 없겠고 많은 사람이 네게 첨을 드리리라” 네가 만일 회개한다면, 나에게 첨이란 아첨이죠. 아첨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뇌물을 가지고 오니까 너는 그런 걱정하지 말고 회개나 하라는 이 말이죠.
그 이야기가, 욥이 대답하되 욥 12장 2절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가 죽겠구나” 아이고 인간아, 나도 너희처럼 총명이 있어. 너만 하지 못한 줄 아느냐? 어디서 바둑 9급이 이창호를 훈수한다고, 거기 두면 안 되는데... 하수가 바둑 두는데 더 하냐는 겁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은 낮선 고난이고, 지금 너희는 해명이 안 돼. 이건 하늘과 나 사이의 문제야. 의사 소통이 됩니까? 안 됩니까? 차단되어 있어요. 안 돼요. 성령이 와야 됩니다. 그저 이 밤에 성령 많이 받아가지고 의사 소통 잘 되시는 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일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