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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목록]
1. 대입실패 이렇게 극복하자.
2. 노량진일대 고시촌에서는
3.. 열반 드신 혜암 종정 "공부하다 죽어라."
4. 선배들의 100점짜리 대학생활'공부는 자신과의 싸움'
5. 공부가 제일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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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 재 일 : 2002년 01월 08일 중앙일보
[NIE] 대입실패 이렇게 극복하자
2002학년 대학 입학 수학능력시험 응시생 63만8천여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32만명이 4년제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실패를 경험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가운데는 훗날 칠전팔기(七顚八起)의
신화를 만들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번의 실패로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도 나올 것이다. 실패, 어떻게 다뤄야 할까?
◇ 실패를 보는 눈
계획을 많이 세운 사람일수록 더 많은 난관에 부닥치게 마련이다. 고난 속에서도 낙관적인 사람은 재기해 또다른 목표를 달성하지만 비관적인
사람은 좌절하기 쉽다.
최근 국내외에서 유행하는 `실패학`의 골자는 실패의 원인을 분석해 실패 자체를 성공의 토양으로 삼자는 것이다.
일본에서 실패학 바람을 일으킨 도쿄대 하타무라 요타로 교수는 그의 저서 『실패를 감추는 사람, 실패를 살리는 사람』(2001.세종서적)에서
"성공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실패를 다루는 태도에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에선 1986년 11월 28일 오전 11시 38분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폭발한 사고를 계기로 실패를 교훈으로 삼자는 운동이 시작됐고,
이 운동에 힘입어 사법거래제도가 탄생했다. 실패한 사람이 법적 면책을 조건으로 고백하는 실패 과정을 자료화함으로써 실패를 학습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다. 그 뒤 미국의 우주왕복선은 무사고 운항하고 있다.
◇ 활동 주제
①과학자와 발명가들은 가설을 증명하려고 실험을 거듭하며, 연속된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노력해 인류 발전에 이바지했다. 실패가 전화위복으로 이어진 사례 세가지와
그 배경을 정리한다.
☞포스트잇, 물에 뜨는 아이보리 비누, 푸른 천막천으로 만든 청바지 등.
②5년 연속 고객만족 경영대상(능률협회 주최)을 받은 삼성에버랜드는 고객의 불만이
접수되거나 문제가 발생하면 `실패 파티`를 연다. 실패한 사람이 사례를 발표하면 이를
데이터베이스화해 직원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다.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시도다.
급우들과 다섯명이 한 모둠이 되어 잊혀지지 않는 실패 경험을 리스트로 만들어 돌아가며 발표한다. 그 뒤 이 실패들에서 공통 원인을 찾는 작업을 한다.
③어려운 환경을 이기고 뜻을 이룬 사람을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 한다. 지난해 고난을 극복하고 가장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신문에서 찾아 그 사람이 성공하기까지
실패를 어떻게 다뤘는지 알아보자.
기사 검색은 한국언론재단이 서비스하는 종합뉴스 DB(http://www.kinds.or.kr)를 활용하면 좋다.
④KBS2 TV의 `실패열전!장밋빛 인생`은 인생의 정점에서 추락한 사람들의 사연을 통해 `실패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실패학 교과서다. 방송 시청 후 주인공에게 실패를
딛고 일어설 방법을 제시하는 격려의 편지를 띄운다.
또는 최근 신문에 소개된 인물 가운데 역경을 딛고 일어선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예를 동봉함으로써 반면교사(反面敎師=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가르침을 얻음)로 삼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⑤지난해 세웠던 목표 가운데 이루지 못한 것이 있다면 원인(생활 습관이나 공부 방법
등의 문제점)을 분석한 뒤 다시 계획을 세워 실천한다. 그리고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적합한 내용의 사자성어나 격언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교훈으로 삼고 나와 같은 입장의 친구들에게도 e-메일을 통해 새해 인사말로 보내도 좋다.
⑥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 교수의 『무력감 이론』(1976년)에 의하면 낙관적인 사람과 비관적인 사람은 실패에 대해 변명하는 태도가 상반되며, 실패친화도가
높을수록(실패에 대해 낙관적인 태도를 가질수록) 역경을 긍정적으로 해석해 인생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한다. 내가 최근 겪은 실패에 대해 낙관적 성향의 설명을 해보자.
⑦실패를 재도약의 호재로 생각하는 등 실패 친화도가 높은 서양 사람에게 대학입시에
떨어지거나 기업이 부도나서 자살한 우리나라의 사례를 이해시키려면 힘이 든다. 동서양의 실패 인식에서 드러나는 행동 양식의 차이에 대해 1천2백자 안팎으로 논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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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 재 일 : 2001년 11월 09일 중앙일보
[메트로와이드] 노량진 일대 `고시촌`에선…
최악의 취업난으로 취업 준비생들의 시름이 깊다. 그 중에서도 지방대생 등은 "기업들이 차별
대우를 한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그래서 이들은
공무원시험 등 `가장 공정한 취직시험`으로 불리는 국가고시에 매달린다. 혈기를 잠시 접고 미래를 준비하는 젊음이 있는 곳, 서울 노량진 학원가와 고시촌의 애환을 살짝 엿보았다.
#에피소드 1.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떨어졌다`는 말을 하지않는 게 불문율입니다. 그래서 지우개가 책상에서
떨어진 경우에도 "지우개가 떨어졌다"가 아니라
"지우개가 바닥에 찰싹 붙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에피소드 2.
길거리의 인형뽑기 기계에서 인형 7개를 뽑으면
합격한다는 규칙을 재미 삼아 정했습니다. 그런데 시험 이틀 전까지 4개밖에 뽑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시험 전날, 그 중요한 날에 밤 12시가 넘어 인형뽑기 기계 앞에서 1시간 동안 나머지 3마리를 뽑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지요.
지난해 말 5년간의 수험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한 고시생의 후일담이다. 노량진에서 만난 젊은이들은 이처럼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싸우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중압감에 비례해 생활은 단순하고 얼굴은 창백하다.
◇ 생존을 위한 전쟁터=서울의 대표적 고시촌은 관악구 신림동과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다. 신림동은 사법시험처럼 합격이 취직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고급 고시`를 준비하는 고시생들이 많다. 반면 노량진은 7.9급 공무원시험, 교사임용고시 등 보통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소박한 꿈을 간직한 수험생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4년간 노량진에서 공부하다 지금은 인터넷 사이트 `시험 아카데미`(exam.ac)를 운영하고 있는 이승영(李承泳.32)씨는 "사법고시 등은 졸업후 2~3년 공부하는 게 당연하다는 분위기지만 공무원시험은 졸업후 1년만 지나도 주위의 시선이 따갑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공무원시험 등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응시자의 90%가 대졸자이고, 준비기간이 평균 1년은 넘는 데다 90점 이상은 돼야 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쟁률도 수백대 1은 보통이다.
그래서인지 노량진에서 만난 수험생들은 이구동성으로 "부모님께 미안하다"고 말했다.
검찰직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朴모(29)씨는 "부모님 뵙기가 미안해 추석에
고향에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경남 진주 출신인 朴씨는 지난해 5월 시험에 떨어지고 11월부터 노량진에 둥지를 틀었다. 가족들에게 부담이 되기 싫어 그는 고시원에서 총무 일을 하고 있다. 총무는 고시원에서 청소 등 관리업무를 하는 대신 방값과 식대를 면제받는다.
서울 출신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대학 졸업반인 홍진철(洪鎭哲.28.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씨는 기업에 원서를 넣어보곤 있지만 마냥 기다릴 수 없어 최근 관세직 9급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오전 8시 집에서 나와 오전 9시~오후 1시 수업을 듣고
점심을 먹은 뒤 학원에 딸린 자습실에서 공부를 하다 오후 10시쯤 집으로 향하는, 쳇바퀴 도는 듯한 생활을 하고 있다.
洪씨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공부하기 때문에 집중할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혼자서 외롭게 이겨나가야 한다는 점이 가장 힘들다"고 토로했다.
◇ 수험 인프라=동작구 노량진 일대에는 대형 고시학원 및 입시학원 30개와 고시원 50여개가 몰려 있다. 입시학원인 중앙학원과 대성학원이 각각 1952년과 65년 개원하면서 학원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학원가`가 된 것은 공무원시험의 경쟁률이 높아진 80년대 중반부터. 서울고시학원의 공성호(孔成浩)주임은 "노량진 일대의 수험생은 1만5천~2만명이고 이 중
70%가 지방 학생들"이라고 귀띔했다.
학원이 늘어나면서 수험생을 위한 인프라도 점차 갖춰졌다. 수험생들이 잠깐 머리를
식힐 수 있는 만화방.PC방이 각각 30여곳 영업하고 있다. 정 만화방의 정건균(鄭建均.34)씨는 "점심, 저녁 식사 후에 손님이 많지만 1시간30분을 넘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식사는 수험생 대상 전문 음식점과 분식점에서 해결한다. 된장찌개가 2천5백원일 정도로 가격은 서울시내 다른 지역에 비해 싼 편이다. 식비는 한달에 13만원 안팎, 10장
쿠폰은 1만8천원 정도다. 수험생 전문 식당은 대부분 뷔페식이다.
서점은 정보 교환소 역할을 한다. 시험 서적만 취급하며 일반서점에선 보기 힘든 유명
강사의 강의 녹음 테이프를 판다. 헌책방 `청학동`의 이상규(李祥珪.33)씨는 "시험경향
등을 잘 아는 고시 경험자라야 책방을 꾸려갈 수 있다"고 말했다.
소음 방지용 귀마개(1천~2천원)나 책을 세워 놓고 볼 수 있는 독서대(1만~2만원)등
수험생용 상품도 눈길을 끈다. 두꺼운 책을 서너개 묶음으로 나눠서 휴대하기 편하게
하는 분철(分綴)도 학원가의 독특한 풍경이다.
고시원은 시설에 따라 월 10만원에서 30만원까지 다양하다. 방 크기는 1평~1.5평. 한
고시원 관계자는 "지방 학생의 경우 적어도 월 40만~50만원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영훈 기자<a href=mailto:filich@joongang.co.kr>filich@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 <a href=mailto:filich@joongang.co.kr>filich@joongang.co.kr>
*** 고시원에도 새바람
생활 수준의 향상과 자기 주장이 강한 신세대들의 등장으로 학원가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콘크리트벽 고시원`의 출현이다. 과거 고시원은 방과 방을 합판이나 스티로폼으로 만든 간이벽으로 구분했지만 최근 문을
여는 고시원들은 정식으로 벽을 만들어 소음을
줄이고 있다.
잠을 자려면 의자를 책상 위에 올려 놓아야 했던
방의 크기도 커져서 붙박이 침대와 책장이 갖춰진 곳이 많다. 에어컨이나 초고속 인터넷 통신망을 설치한 고시원들도 늘고 있는 추세다. 이런
곳은 한달에 방값이 30만원에 이른다.
수험생 최은수(여.26)씨는 "방값이 다소 부담스럽지만 더 깨끗한 환경에서 공부하고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 능률이 오른다"고 말했다.
여성전용 고시원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금남의 집`이지만 관리인 격인 총무는 남자
고시생들이 맡는다. 한 여성전용 고시원 관계자는 "방안에 사람이 있을 경우엔 어떤 경우라도 문을 열 수 없다는 것이 철칙"이라고 말했다.
변한 것은 잠자리뿐이 아니다. 과거 분식점과 쿠폰식 전용음식점만 있던 거리에는 최근 닭갈비집.패스트푸드점.테이크아웃 커피점 등이 다양하게 들어섰다. 7년째 이곳에서 식당을 하고 있는 홍기만(65)씨는 "음식이 입맛에 안맞으면 바로 식당을 옮기거나
항의할 정도로 수험생들의 자기 주장이 강해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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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 재 일 : 2002년 01월 04일 중앙일보
열반 드신 혜암 종정 "공부하다 죽어라."
"공부하다 죽어라."
지난해 12월 31일 입적한 혜암(慧菴)큰스님은
평생 깨달음을 찾아 꼿꼿이 참선해온 선승(禪僧)이었다. 잠 잘 때도 자리에 눕지 않고 않은 채로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않는 장좌불와(長坐不臥), 그 50여년의 오랜 수행에 "누워있으면 더
불편하다"던 스님이다.
스님은 이처럼 부단한 용맹정진의 모범을 보인
참 선승이었을 뿐 아니라 불교계가 혼돈할 때면
분연히 나서 중심을 잡아주던 큰 스승이었다. 깡
마르고 형형한 눈빛, 그러나 오랜 불와(不臥)로
제대로 곧은 척추라곤 한 마디도 없던 큰 스승의
육신은 깨달음의 흔적처럼 55년전 출가했던 해인사에 남겨졌다.
1946년 출가당시 인곡(麟谷)스님과의 문답은 선방(禪房)의 유명한 일화다. 인곡 스님이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아악-."
혜암은 당돌하게도 고승들이 말로 표현하기 힘든 크나 큰 깨달음을 가르칠 때 내뱉는 `할(喝.큰 고함)`로 대답을 대신했다. 빙긋 웃던 인곡 스님이 다시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
혜암은 허공에 큰 원을 그렸다. 출가를 결심한 마당에 고향이나 이름 같은 세속의 인연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인곡 스님은 출가를 허용했고, 혜암은 "출가하고 일주일만에
도를 깨치겠다"는 결심에 밤을 세워 참선하는 철야정진에 들어갔다고 한다.
비록 일주일만에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지만 혜암 스님의 의지는 맹렬했고, 이듬해인
47년 해인사에 들른 성철(性徹.전 종정)스님으로부터 `결사(結社)`를 제의받고는 곧장
경북 문경 봉암사로 따라 나섰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참선수행한다는 자세를 강조했던 이 `봉암사 결사`는 한국불교의 청정한 선맥(禪脈)을 자리매김했으며 이후 참선수행하는 절집 생활의 교과서가 됐다.
혜암 스님은 6.25전쟁으로 봉암사 생활이 불가능해지자 오대산으로 들어가 물과 잣나무 잎을 갈아 먹으면서 "죽기를 작심하고" 참선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엄격한 수행의
길을 걸어왔다.
스님이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다섯가지 가르침은 모두 이런 청정수행의 방도다. `공부하다 죽어라`외에 `밥을 많이 먹지 말라``남을 도와라``감투를 맡지 말라``일의일발(一依一鉢.옷 한 벌과 밥그릇 하나)로 살아라` 등이다. 모두가 욕심을 경계하는 말이다.
크고 작은 절집의 감투를 마다하며 평생 선방(禪房)에서 살아온 스님은 93년 성철 스님이 입적하자 비로소 뒤를 이어 해인총림 방장에 추대됐다. 이어 94년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으로 추대됐다. 감투라면 감투랄 수 있지만 모두 정신적인, 혹은 상징적인 자리다. 주지나 총무원장 같은 행정적인 자리가 아니다.
스님의 목소리가 세속적으로 주목받은 것은 98.99년 조계종 분규 당시다.스님은 당시
종단을 흔들던 정화개혁측을 물리치고 기존의 법통을 지키는 쪽을 지지하는 확고한 자세로 분규의 확산을 막았다. 그리고 분규가 일단락된 99년 5월 종정의 자리에 추대됐다. 역시 정신적.상징적인 자리다. 현재 정대 총무원장 체제도 혜암 스님의 정신적 후원하에 출범한 셈이다.
오랜 고행(苦行)으로 건강이 좋지않아 지난해부터는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해인사 원당암에 칩거해왔다. 그리고 평생의 깨달음을 몇 마디 열반송으로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오병상 기자 <obsang@joongang.co.kr>
<혜암스님 연보>
▶1920년 전남 장성 출생.
▶46년 해인사에서 출가.
▶해인사 ·송광사 ·통도사 ·범어사 등에서 수행.
▶93년 해인총림 방장.
▶95년 용성(龍城)문도회장.
▶99년 조계종 제 10대 종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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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 재 일 : 2001년 12월 06일 중앙일보
[선배들의 100점짜리 대학생활] 공부는 자신과의 싸움
지금 생각해 보면 대학생활은 육체적으로 가장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자신감에 차 있는 기간이었다.
신입생에게 처음 대학생활로 다가오는 것은 학교에서 마련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다. 요즈음 대학에 들어오는 신입생들은 이 소중한 기회를 많이 놓친다. 나는 여기서 많은 선배들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대학생활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얻었다.
무슨 과목은 어떻게 공부해야 하고, 동아리는 어떤 것이 좋고, 어학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고 등등.
실제 대학생활에서는 조교실 선배들의 조언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장학금.출석 등 학사에 관한
모든 사항들은 조교실에서 근무하는 선배들의
친절한 한마디를 통해 해결되었다.
생활 자체는 주변의 많은 조언들을 통해 해결되지만 학과에서 이뤄지는 전공공부는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한동안 자유로움 속에서 놓았던 책을 다시 잡기까지 무척 힘들었다.
1학년의
경우 대부분 교양으로
이뤄져
있어 공부하기도
쉬운 편이었으나 2학년부터 전공수업을 통해 교수님들이 선정해주신 몇권의 원서들은 진도를
따라가기가 벅찰 만큼의 많은 학습량을 요구하는 방증인 셈이었다.
물론 선정된 원서를 통해 예.복습을 반복하는 방법이 가장 좋지만 한순간 멀어져버린 진도를 따라가기 위해 어떤 학생들은 비슷한 내용의 한글
번역서를 가지고 비슷한 부분을 찾아가면서 공부를 진행하기도 했다.
전산과 공대생으로 대학생활을 보낸 나는 번역서와 원서, 문제에 대한 해설서를 병행하면서 공부를 진행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학에서의 공부는 자연계나 인문계를 떠나 단순히 암기하는 것 이상의 사고력을 요구한다.
어떤 이론에 대한 실용적인 측면에서부터 이론이 도출되는 과정과 응용되는 문제들까지 항상
이해에 대한 준비가 돼있지 않으면 잠깐 사이에
뒤처지는 경험을 해보면 가장 효과적으로 공부하는 시기가 바로 대학생활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
김상일<경희대 전자계산학과 96년 졸업.미국의
소리 방송 리서치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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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 재 일 : 1996년 10월 29일 중앙일보
<데스크의눈> 공부가 제일 쉽다
『내 딸도 골프나 시킬 걸….』 프로골퍼 「슈퍼신인」 박세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그녀는 프로데뷔 6개월만에 상금으로 2억7천9백여만원을 벌어들였다.상금 뿐만이 아니다.삼성으로부터도 앞으로 10년간 30억원을 지원받기로 돼있다.또 광고모델로도 출연할 것이므로 그녀 의 수입은 엄청날 것으로 보인다.
19세 어린 나이에 돈방석에 앉게 됐으니 그녀를 부러워 할만도 하다.그래서 일부 부모들간에 『자식에게 골프나…』라는 말이나오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이는 뭐를 몰라도
한참 모르고 하는말이다.유명 스포츠.연예인들을 얼마간 깔보는데 서 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스포츠.연예계 유명인사들의 오늘은 거저 된 것이 아니다.우선재능이 있어야 한다.스포츠나 연예계에서의 출세는 노력만으론 어렵다.노력은 어느 수준에까지 올라가도록
해줄 뿐이다.재능은 필수적이다.그렇다고 재능만 있다고 성공이 보장되지 도 않는다.부단한 자기노력이 필요하다.
박세리의 오늘이 있기까지를 살펴보면 이를 알 수 있다.그녀는지난 20일 삼성월드챔피언십 여자골프대회 마지막날 『이제 4일간의 휴가가 끝났다』며 아쉬워했다.타수
하나하나가 성적과 돈으로 연결되는,피를 말리는듯한 경기가 끝나면 해방 감에 사로잡힐만도 한데 그녀는 반대말을 했다.경기종료는 지긋지긋한 훈련의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회기간중에는 드라이버샷과 퍼팅연습 몇번으로 가볍게 몸만 풀면 된다.그러나 경기가 끝나면 그녀는 매일 오전5시30분에 일어나 15층 아파트계단 오르내리기를 5회씩
반복하는 훈련으로 하루를 시작한다.그런 다음 몸의 유연성을 기르기 위해 한시간동안
요가를 한다.매일 6㎞ 구보훈련도 한다.또 하루 샷연습 8백회와 6백번 정도의 퍼팅연습을 오후10시까지 반복한다.초등학교 6학년때부터 박세리는 이같은 훈련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해왔다.친구 만날 사이도 없었다.
이쯤 되면 『골프나…』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골프 뿐만이 아니다.야구.축구.농구 등 각종 스포츠의 유명 선수들과 인기 연예인들의 뒤에는 항상 엄청난 피땀이 있었다.이들이기울이는 노력은 입시지옥에서 고생하는 수험생 이 상이라 할 수있다.재능이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하지 않으면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스포츠나 연예는 공부보다 밥벌어먹기가 더 힘든지도 모른다.박세리 얘기가 나왔으니
골프를 예로 들어보자.우리나라에 프로골퍼는 남자가 2백10명,여자가 1백19명이다.골프상금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려면 연간 받는 상금액수가 1억원 이상은 돼야 한다.
대회참가경비.연습비 등 들어가는 돈도 수월찮은 탓이다.올해 이조건을 충족시킨 골퍼는 남녀 각 3명뿐이다.물론 상금 대신 레슨으로 부수입을 올려 생활은 꾸려간다.그러나 연습 대신 레슨을해야 하는 프로골퍼는 그만큼 시간 을 빼앗겨 골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어렵다.
한편 체육특기자로 대학에 진학하기도 쉽지 않다.종목에 따라 틀리나 일반적으로 전국규모 대회에서 단체 4위,개인 3위이내에입상해야 한다.시험을 봐서 대학가기보다 더
어려운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중에 스포츠로 생계를 꾸려가려면 소위 스타플레이어가 돼야 한다.또 『장사나 해야지』라는 말도 흔히 한다.위아래 눈치 보며 인사 때마다 가슴죄며 살아야 하는
월급쟁이들의 자조섞인 말이나 그 또한 쉽지 않다.
그러나 공부는 IQ가 세자리수만 된다면 노력할 경우 누구나 잘할 수 있다.한해 서울대에 들어가는 학생만 해도 5천명이상 된다.웬만한 대학을 나오면 대체로 월급쟁이가 돼
생계유지에 큰지장은 없다.그래서 공부하기 싫어하는 자식을 둔 부모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네가 다른 것을 하겠다면 해라.그러나 이 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쉽다』고.
(체육부장) 이석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