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30일 남도 다녀온 이야기 입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나들이.
2007.3.30 (금)
이회장님을 모신 열한 쌍의 미포산우회 회원들이 용산 역에 모인 것은 예정된 대로 아침 10시였다. 10시 35분 KTX를 타며 원숙한 사람들의 남도 나들이는 시작되었다. 300KM로 달리는 용산-대전간 KTX는 마치 얼음 위를 미끄러 지는 스케이트 같았지만, 대전을 지나고부터는 옛적부터 낯익은 소리, 바퀴의 침목 넘어가는 소리가 자장가로 되었다. 나들이는 나이 들어도 언제나 즐겁다. 모두에게 역 주행 자리가 주어졌지만 그것까지도 즐거웠다. 꽃샘추위도 슬어지고, 창 밖으로 봄이 무른 땅을 헤치며 그 농염한 색깔을 들어내고 있었다.
1340: 목포 역 도착. 삼호중공업의 옛 동료들이 역에 마중 나와 있었다. 그리고, MARCO POLO HOTEL에 여장을 풀었다. 오랫동안 내 버려 두었던 언덕 위의 폐가가 정성스럽게 손질되어 이제는 멋진 일급 호텔로 제 모습을 되 찾았다. 바다를 향한 SUITE ROOM들이 주어졌다.
삼호중공업 방문. 필름을 소개하기 전 강사장의 변명이 있었다. 새 필름이 거의 다 만들어 졌지만 아직 완성은 되지 않아 낡은 필름을 보여드릴 수 밖에 없다는 말씀이었다. 그의 말대로 필름은 한동안 돌더니 느닷없이 멈췄고, 손을 좀 보고 나서야 다시 돌아 가기 시작했다. 회사소개 필름에 나와서 열정적으로 업무소개를 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서른두 살이라고 자막에 적혀 있었다. 나는 짐작했다. 아, 이 필름은 2004년에 만들어졌구나. 그리고 이 젊은이들은 우리가 울산 조선소건설을 시작하던 1972년에 태어난 사람들이구나. 그때 우리가 빠졌던 그 열정의 바다에 뛰어든 이 젊은이들, 등이라도 쓸어 주고 싶었다.
조선소를 둘러 본다. 새로 증설된 육상건조시설, 숲을 이루고 있는 외국선주들의 FUNNEL MARK들, 그 동안 변화가 꽤 있었구나. 그 넓은 조선소에 어정거리는 사람보기가 어렵다. 우리는 우리 친구들, 최길선, 이연재, 그리고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강수현 사장들의 땀의 결실을 그 넓은 공간에서 느낀다. 금년에 15% 이상의 이익을 내겠다는 강사장의 자신에 넘치는 얼굴이 영화 배우처럼 훤칠하다. 조선소같은 매출이 큰 업체에서는 1%만 이익이 남아도 엄청나다고 하는데.
유달산 꽃구경이다. 처음 차에 앉은 채로 한 바퀴 돌아보고 내려올 계획이었으나 유달산 꽃 축제가 시작되어 차량통행이 금지 되었다고 한다. 오히려 봄의 냄세와 색갈속을 한가롭게 걷는 기회를 얻는다. 노적봉을 지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이순신 장군의 노적봉이구나 하고 있는데 홍석의 회장이 모두의 팔을 잡고 모퉁이로 끌고 간다. 길을 잘못 들었나 하고 따라가니 소위 “민망한 나무” 라는 것이 있었다. 아주 그럴듯하게 민망하다. 다시 노적봉으로 돌아가 “목포의 눈물 노래비”로 오른다. 어떤 이는 목포 보다 목포의 눈물이 더 목포답다는 말을 한다. 그럴듯한 말. 이난영은 삼학도를 내려다보며 그 너머 남해 바다를 바라보며 요즈음 새로운 풍경으로 자리잡은 삼호조선소를 쓰다듬듯 굽어보며 거기 살아있다. 오포대를 오른다. 유달산을 오를수록 남해의 봄기운이 짙게 무르익는다. 동백꽃이 지천으로 떨어지고 있고 개나리는 거의 끝물이다. 벛꽃은 꽃샘추위 때문에 한 주일쯤 늦어졌단다. 터지기 직전의 벚꽃과 진달래 봉우리가 우리 마음을 따스한 봄 색갈로 물들인다. 다음 행선지인 이훈동 고택과 한국음식점 옥정이 고풍스런 정원을 안고 발 아래로 내려다 보인다.
이훈동 고택으로 들어선다. 개방을 잘 하지 않는데 강사장의 부탁으로 특별히 열었다고 한다. 고택이라고 하면 조선시대 고산이나 다산이 살던 곳처럼 옛 선비의 손때가 묻고 그들의 호흡이 젖은 아주 쇄락한 고가를 생각한다. 그러나 이훈동 선생은 91세의 나이로 정정한 삶을 살고 있는 현역이다. 우리나라 내화 벽돌 계에 태두로 제철소 건설에 그 기초를 놓았고, 수많은 문화재를 수집해서 전시하고 있었고, 어머니에 극진한 효자였고, 여러 예술인들과 교우를 나누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두 번이나 그 집에 와서 주무셨고, 스스로 상당한 달필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부러웠던 것은 AGE SHOOTING 을 여러 번 기록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건강관리를 통해서 그의 부귀도 영화도 이루어냈던 것이다. 중국 寧波의 명품 고택 “天一閣”과도 비교가 될 법 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동훈 고택과 한정식집 옥정은 담을 사이에 두고 붙어있다. 개구멍 같은 담 옆 문으로 들어서면 옥정이다. 깨끗하고 단정한 집의 배치가 남도의 맛갈진 밥집의 때깔이라고 하겠지만 미리 와서 식단과 자리배정까지 살핀 조선소 사람들의 정성도 함께 거기 있었다. 술잔이 채워지기 전 소리가 시작된다. 가야금과 아쟁과 장고가 어우러지는가 싶더니, 임방울 선생의 “쑥대머리” 한마당이 들어선다. 얼굴이 펑퍼짐한, 목소리도 특출 하지 않은 아낙이 느닷없이 쑥대머리 한마당을 쑤욱 내 밀었던 것이다. 그렇지 거기가 남도니까. 쑥대머리도 마치 “돌아와요 부산항”처럼 예사롭구나. 숙성된 고막이 맛갈스럽다. 홍어도 여러 모습으로 들어오는데 서울 사람의 입맛에 맞추느라 전혀 삭히지 않은 생짜다. 오늘의 단 하나의 실패작이다. 뻑뻑한 탁주 한 사발에 내장까지 찌르르 하게 훑어 내릴 홍어찜도 괞찮았을텐데. 금가루가 떠다니는 매실주가 끊임 없이 돌아 다녔다.
아홉시 넘어 호텔로 돌아왔다. 드넓은 바다를 향한 스위트 룸으로 돌아왔으나 휴식은 허용되지 않았다. 지하실의 거대한 Stage를 가진 홀이 노래장비를 갖춘 채 내려 오라고 채근 이었다. 이무남 회장 사모님의 반나의 가장 무도는 잔치의 압권이었다. 지 회장 사모님 흥행은 그날을 완벽하게 끝내주었다. 지 회장의 끼는 사실은 사모님에게서 전수된 것이었던가.
3월 31일(토요일)
아쉽고 아쉬운 것은 그 아름다운 방에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일찍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정까지 술을 마셨으니 목욕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침대에 쓰러진 뒤 눈을 뜨니 아침 일곱시였다. 짐 싸고 아침 먹으러 가며 그 아름다운 스위트 룸과 작별을 하였다. 그래 언젠가 다시 와야지. 남해를 굽어보며 그 남해에 떠 있는 다도해를 향한 테라스에서 여우 같은 아내와 백 포도주 한잔 마셔야지. 그 때는 시간을 갖고 느긋하게 그 방이 주는 아름다움을 한껏 향유해야지.
아침은 천정 높이가 5미터는 넘어 보이는 식당에서 먹는다. 앞으로 트인 바다와 높은 천정이 마음을 화악 뚫어 놓는다. 호텔의 경제성은 의문이지만, 음식도 좋고 서비스도 일류다. 끊임없이 종업원을 훈련시킨 결과라는 강사장의 자랑이다. 그러고 보니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 얼굴이 눈에 익다. 그렇지. 관리자들 대부분이 다이아몬드호텔에서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마침 신입사원들의 부모를 초청해서 하루씩 머물게 하고 자식들이 다니는 회사를 소개 한다고 한다. 아주 확실히 농부로 보이는 한 노인은 너무 좋아 엘리베이터에서 초면인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들 하나 잘 둥께 이래 호강도 하나벼” 그 분의 등뒤로 강사장의 흐뭇한 미소를 나는 느끼고 있었다.
어제 쾌청하던 하늘에서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일행과 헤어져 고려조선, 대한조선의 건설현장으로 떠나고, 일행은 차 밭, 왕인 박사 유적지로 향했다. 다시 모인 것은 점심때 영란횟집에서였다. 어머니가 딸이름을 따서 이름했다는 영란횟집의 영란 사장이 손수 시중을 들었다. 나는 이회장께 보고했다. “저 영란사장이 저보고 멋장이라고 하는데요” 이회장이 말씀하셨다. “잘못 아셨구만. 황가에 곱슬머리에 옹니백이가 이 점심을 내는 것이 아니고 저기 저 강사장이 내는 거라니까” 그러나 영란씨는 말했다. “멋있잖아요.” 영란 사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영란횟집의 민어요리는 참 맛이 있고 멋이 있었다. 많이 먹는다는 구박을 귓전에 흘리고 장병수 사장과 나는 경쟁하듯 일년 먹을 민어를 그날 다 먹어 두었다. 오래 전 장병수 사장의 주선으로 몇번 찾았던 신설동의 괴퍅한 영감이 꾸려 나가던 민어집을 기억 했다. 비싸긴 했지만 나름대로의 스타일과 풍미를 지닌 그 허름한 집을. 내 옆에 앉았던 한종서 형이 말했다. 말이 없지만 한마디하면 頂門一針이었다. “미포산우회 사모님들은 나올 때마다 점점 더 아름다워진단 말이야.” 아아 만고의 진리.
이회장과 지회장이 일찍 떠나시고 난 뒤 해양유물전시관과 남농기념관을 들러 보았으나 그저 시간 때우기였다. 몇 번씩 갔던 곳이기 때문이다. KTX로 돌아오는 길은 조금도 피곤하지도 지루하지 않았다. 이 회장께서 하사하신 거금으로 용산 역에 내려서 먹은 냉면도 좋았다. 좋았다. 모든 것이 좋았다.
미포산우회의 존재 이유이며 정신적 지주이신 이춘림회장의 보살핌에 감사 드리며 오래오래 이끌어주시기를 빈다. 나들이 할 때마다 점점 더 예뻐지시는 사모님들. 해마다 더 우아해지시기를. 홍석의 회장의 한결 같은 리더쉽은 미포 산우회를 나날이 살찌운다. 고마울 뿐이다. 갑자기 총무직을 맡아 여정을 완벽하게 진행한 권수식 사장께 감사드리고, 나이를 잊고 사는 미포산우회 회원 여러분의 건강한 모습 오래 계속 되기를 빈다. 우리의 짧은 일정을 생애에 남는 행사로 만들어주신 강수연 사장, 박철제 부사장, 김남균 상무, 김종도 차장께 행운이 가득하시길 빌고, 삼호중공업이 한국조선공업에 큰 발자국 남길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첫댓글 멋진 기행문, 저도 그 자리에 함께 있는 듯 착각하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