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원대학교’를 가다
충북 청주시 강내면 ‘한국교원대학교', 이곳은 5공의 산물이다. 5공의 교육을 거의 전담하던 이규호가 초대 총장으로 부임한 곳이기도 하다. 한국 교육을 책임질 교사를 종합적으로 만들고 관리하기 위해 1984년 만들어졌으며 수많은 정치적 논란을 거치고 이제는 평범한 대학으로 교사 양성 뿐 아니라 현직 교사의 연수기관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나는 교사가 되면서부터 교사에서 도망치려고 했다. 가장 비겁하고 무책임한 태도이자 선택이었다. 교사에 대한 가장 큰 비난, 오로지 돈을 목적으로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결핍된 교사의 모습이 나와 같다고 표현하면 조금은 과장이겠지만 본질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근본적으로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 회의하는 입장이다.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학습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등교사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교사도 마찬가지겠지만 끊임없이 소통하고 사소할 정도의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전력을 다해야만 작은 성취에 이를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의무기간 7년이 지나자 나는 구체적인 탈출의 방법을 기획했다. 현실적인 생계의 필요성은 완전한 탈출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변화를 위한 공간이 필요했다. 합법적으로 나를 점검할 수 있는 시간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원대학교’ 파견은 가장 매력적이었다. 2년 동안 대학원 과정을 이수하면서도 수당을 제외한 월급은 따박따박 나오고 수업료도 상당 부분 면제되는 좋은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7년차, 첫 번째 시도한 ‘윤리교육’ 전공시험은 실패했다. 학교를 옮기고 9년차 때 전공을 ‘교육과정’으로 바꿔 다시 시도했다. 다시 실패. 학교에서는 주요 보직을 맡아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오로지 책임에 대한 순수한 열정에 지나지 않았다. 두 번의 실패는 시험의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1996년, 시험을 통한 변화의 갈망이 실패한 후,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이 원거리 내신이었다. 어쨌든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1995년에 나는 술에 쉽게 취하고 방황하는 총각 선생에 지나지 않았다. 지독한 허무때문인지 술을 마실 때, 필림이 끊기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그렇게 세 번째 학교를 떠났다. 하지만 그 시간은 이후 나를 결정짓는 수많은 일과의 연결을 뜻하기도 하였다. 네 번째 학교는 청량리 부근의 전곡이었다.
1996년은 조금은 미스터리한 한 해였다. 이 해 7월 아버지의 70회 생신잔치가 있었다. 약간의 들뜬 분위기때문인지 건강 때문에 술을 자제하시던 아버지는 평소처럼 과음하셨다. 그것이 결정적으로 건강악화를 가져왔다. 이후 계속적으로 몸이 아프시던 아버지는 결국 9월 경(음 8.27)에 사망하셨다. 발령받은 지 1년도 채 안된 교사의 부친상은 멀리 ‘목동 성당’에서 진행되었지만, 대부분의 교사들이 조문 온 것은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비록 교장이 수업 후 조문을 허가하기는 했지만 말이다.(1년 후 사라질 교사에게. 조금은 미안하다. 나는 이후 그들의 경조사에 대해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스쳐가는 바람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슬픔이기도 하지만 어느 면에서는 안정이기도 하였다. 술에 취한 우리 아버지 세대의 행동과 존재는 사실 집안의 큰 위험요소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장례를 용인의 천주교 묘지에서 치르고 나서 그동안 버려두었던 ‘탈출’의 욕구가 다시금 분출했다. 비록 1달 조금 넘는 시간이 남았지만, 처음 시도하는 시험이 아니기에 다시 한번 도전하고 싶었다. 특별한 기대도 없이, 변화의 가능성을 시험하면서 시도한 것이다. 결과는 예상치 않은 ‘합격’이었다. 합격이라는 말을 전화로 확인했을 때, 나는 탈출의 성공을 정말로 기뻐했다. 1996년은 특별한 한 해였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 생각해서도 교원대학교에서의 2년은 멍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20년이 지난 2019년 다시 방문해서 찾아간 교원대학교의 공간은 여전히 삭막했고 싸늘했다. 좋아진 것은 도서관 시설뿐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개인적으로는 고독했고, 학과 공동체적으로는 우울했다. 합격자 중 가장 연장자가 대표를 맡는다는 관례로 나는 1년 반 정도를 교수와 학생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에 돌입해야 했다. 탈출을 꿈꾼 시간은 또 다른 억압의 공간으로의 이동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곳의 교수들, 특히 교육학과 교수들은 심심했다. 직접 관리하는 학부생도 없고, 집은 대부분 서울에 있기 때문에 이들은 주중에만 내려와 있었다. 이들의 넘치는 시간을 때워주는 역할은 오로지 파견 나온 교사들의 몫이었다. 매주 한 번씩 이루어진 수업은 일종의 파티를 위한 전야제의 성격에 지나지 않았다. 수업을 마친 후 관례적으로 교수들과의 식사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3명의 전공교수는 같이 식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일주일 4일 공부하는 동안(대부분 금요일은 전공강의가 없다) 3일을 교수를 위한 학생들의 위로잔치가 열리는 것이다.
공부를 위해 온 학교가 아닌 복종과 유흥을 학습하는 학교로 변모한 것이다. 교수들이 전권을 가진 상황에서 파견 나온 교사들의 선택은 특별한 것이 있을 수 없었다. 그저 그들의 선택을 따랐고 그 길이 논문심사 때 긍정적 결과로 나타날 것으로 믿었다. 그것은 단순한 기우는 아니었다. 가끔 박사과정 교사들이 올 때 교수들이 보이는 일종의 ‘길들이기’ 태도는 철저한 굴종과 아부를 요구하는 권력의 야비한 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나는 학위를 위해서 이곳에 오진 않았다. 다만 탈출을 꿈궜을 뿐이었다. 하지만 대표의 책임을 방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5월 15일 스승의 날 행사를 가졌다. 진하게 노래하고 술마시면서 진한 ‘사제의 정’(?)을 나누었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지도교수에게 ‘논문포기’를 전달했다. 그것은 이제 그들과의 회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신호였으며, 동기생들에게는 이제 각자의 힘으로 교수를 상대하라는 일종의 해체선언이기도 하였다. 그들과의 회식은 연말 송별회 때 다시 이루어졌고, 나는 그 이후 누구도 ‘교원대학교’ 사람들과 만남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논문 포기를 선언한 후 얻게 된 시간은 그다지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했던 것같다. 학교에서는 여전히 고독했고, 동기생들과의 교류도 근본적으로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수강과목도 개별적 선택과목이었기 때문에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없었다. 다만 지도교수에게는 가끔 찾아가는 정도였다. 그동안은 그의 연구실에서 있었지만 그곳과도 이제는 이별이었다. 남은 시간은 엉뚱하게도 대학과 관계없는 곳에서 보냈다. 당시 연세대학교에서 개설한 ‘컴퓨터 OA’강좌를 들었고, 조치원 운전학원에서 ‘1종면허’를 취득했던 것이다.
지독한 진부함과 무의미함에서 탈출하고 싶었고, ‘어쩌면’이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교원대학교의 2년은 지루한 자유와 피곤한 인간관계만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교사의 가치와 매력은 오히려 떨어졌다. 1988년 자동차 사고 이후 잠시 동안 가졌던 교사의 희망적 방향에 대한 시도도 완전하게 사라져갔던 것이다. 그러한 이유에서인지, 다시 방문한 교원대학교의 모습은 여전히 냉냉했다. 학생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러한 일상만이 기억에 남아 았다. 학교 주변의 회식장소로 애용하던 식당이 아직도 성업하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기도 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교원대학교’와 관련된 좋은 기억은 학교가 아닌 이곳으로 오면서 겪게 된 ‘S’와의 추억이었다. 만남이 간혹 이루어지던 시절, 그녀는 합격소식에 반가워하며, 개인적인 장학금을 주었다. 기숙사를 구하지 못한 1학년 시절, 방을 구하기 위해 같이 동분서주하였고 이사하는 날은 당연히 그녀의 차가 이용되었다. 당시 나의 일정은 월요일 새벽에 영등포역에서 기차를 타고 조치원에 가서 버스를 이용하여 대학원에 가는 것이고, 금요일 오후에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오는 것이었다. 월요일 새벽 5시마다 그녀는 영등포역에 태워주었고, 금요일마다 서울에서 만나 술을 마셨다. 금요일에 마시는 술은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술기운에 토요일 내내 잠을 잤고 가족과 일요일을 보낸 후, 월요일 새벽에 나서는 것이었다.
한 장소에서 특별한 2년, 그러나 그 곳의 기억은 여전히 황량하다. 아니 내가 사는 삶의 모습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최신 시설로 바뀐 도서관이 유독 마음에 들어, 회원 신청을 하려다, 이곳이 무척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내가 정식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곳을 또 하나 가졌다는 생각은 흡족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네 곳의 대학이상의 과정을 밟았다. 서울교육대학교, 방송통신대학교, 교원대학교(대학원), 가톨릭대학교(대학원)이다. 남은 게 없는 것같다. 내용도, 사람도, 다만 남은 것은 장소이자 권리뿐이다. 방문할 수 있는 권리와 완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격은 커다란 자산이다. 내가 사회적으로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 가톨릭 대학교 도서관을 이용하면서 갖는 생각이다. ‘교원대학교’는 여전히 의미를 발견하기 쉽지 않다. 30대의 후반을 보낸 이곳에서 행복한 기억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아쉬었다. 그렇게 세월은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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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탈출은 또하나의 과정일 뿐! 삶의 흔적에 머무는 감상적인 시간이 우리 나이 때의 특징일지도... 개별적으로는 그 결과에 상관없이 특별하고 소중한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