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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남한강에 흐르는 전통과 현대 여주는 29개 시군으로 이뤄진 경기도에서 가평·양평·연천과 더불어 아직 군으로 남은 4곳 가운데 하나다. 이것은 여주가 다른 지역에 비해 전통적인 모습을 많이 지키고 있고, 현대화의 흐름에서 조금은 비켜나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1읍 9면의 행정구역에 약 11만 명의 주민이 살아가는 여주는, 인근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덜 현대적’인 덕분에 수도권의 청정 관광지로서 위상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신륵사 앞에서 바라본 정자와 남한강)
영동고속도로 여주IC를 통해 여주 땅으로 접어들어 가장 먼저 찾을 수 있는 유적지는 여주읍 능현리에 있는 명성황후 생가이다. 1851년 이곳에서 태어나 8세 때까지 살았던 명성황후는 16세 때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황제의 비로 책봉되었고,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인들에 의해 무참히 시해되며 45세의 나이로 삶을 마친 비운의 여걸. 명성황후 생가는 원래 조선 숙종 13년(1687년)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를 관리하기 위한 묘막으로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건물로는 안채만 남아 있었으나 1995년 부속 건물들을 복원하고 생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해 현재는 명성황후 기념관·공연장·추모비·조각공원 등이 설치되어 있다. 생가 옆에 세워진 기념관에는 명성황후의 유품과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짧았지만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애를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명성황후 생가와 기념관)
여주는 유난히 많은 왕비가 태어난 고장이기도 하다.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무려 아홉 명이나 되는 왕비를 배출한 것이다. 고려 때의 왕비로는 24대 왕 원종의 비인 순경태후 김씨가 있고, 조선 때는 명성황후 외에도 3대 태종의 비이며 세종의 어머니이기도 한 원경왕후 민씨, 19대 숙종의 비이며 장희빈에 의해 폐출되었다 복위된 것으로 잘 알려진 인현왕후 민씨 등 유명한 왕비들이 포함되어 있다. 명성황후는 태어났고 세종과 효종은 잠들었다 능서면 왕대리에는 두 개의 왕릉이 있으니 곧 세종과 효종의 능이다. 능묘는 임금의 행차가 쉽도록 궁궐 가까운 곳에 자리하는 것이 상례인데,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어 죽은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면 세종과 효종의 능이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한다. 세종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임금. 그는 한글을 창제했고, 측우기와 해시계 등 과학기구를 발명했으며, 농업을 발전시켰다. 국방을 강화해 우리나라의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확정한 이도 세종이다. 이러한 세종이 소헌왕후와 합장되어 영릉(英陵)에 잠들고 있는 것이다. 영릉은 당초 서울에 있었으나 예종 원년(1469년) 여주로 옮겨졌다. 1975년에는 영릉 보수 정화사업을 추진하여 유물 전시관인 세종전을 재실 맞은편에 세웠다. 세종전 안에는 대왕의 업적을 살펴볼 수 있는 각종 유물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주변 야외에는 당시 발명품인 자격루·혼상·간의·해시계 등의 과학기구를 복원해놓았다.
(세종대왕 부부를 합장해 모신 영릉)
(세종대왕 관련 각종 자료를 전시한 세종전. 야외에는 당시의 발명품 모형들이 전시되어 있다.)
세종의 영릉 지척에 있는 효종의 무덤 또한 한자 표기만 다른 영릉(寧陵)이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병자호란으로 인해 청나라에서 8년 동안이나 볼모생활을 했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 오랑캐에게 당한 치욕을 씻기 위해 청나라 정벌의 꿈을 키웠으나 갑자기 승하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효종의 영릉은 효종과 인선왕후를 따로 모신 쌍릉인데, 양주(현재의 구리시)에 있던 것을 현종 14년(1673년)에 옮겨왔다고 한다. 여주에는 이처럼 성군 세종과 북벌의 웅지를 품었던 효종이 잠들어 있는 것이다. 여주군 북서쪽인 금사면에서 이포대교로 남한강을 건너니 대신면 천서리인데, 마을 어귀에 ‘천서리막국수촌’이라는 안내기둥이 세워져 있다. 여기저기 보이는 막국숫집 가운데 한 집으로 들어가 매큼한 비빔 막국수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눈앞에 보이는 파사산에 오르기로 했다. 해발 250미터 쯤 되는 산 정상을 중심으로 신라 제5대 왕인 파사왕 때 쌓았다는 산성이 있기 때문이다(파사왕은 서기 80~112년 재위했는데, 이 시기에는 여주가 실제로는 백제의 영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산길로 접어드니 전날 내린 눈이 채 녹지 않아 미끄러워서 오를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이번에는 북내면 상교리의 고달사지로 향했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년) 창건됐으며 고려 초기에는 국가에서 관장하는 3대 선원의 하나로 꼽힐 만큼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고달사지에 이르니 현재 발굴조사가 진행 중인데 과연 그 터가 넓기는 하다. 하지만 지난날의 영화는 간 데 없고 석불이 안치돼 있었을 좌대와 원종대사 혜진탑 등 일부 유물만이 쓸쓸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고달사지 유물) 고려 초부터 도자기 산지… 불교 유적과 박물관도 다양 여주를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도자기이다. 여주의 도자기 역사는 고려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99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여주 지역 도요지 지표조사를 할 때 북내면 중암리에서 고려백자 가마터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또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도기소(陶器所) 하나가 여주 관청의 북쪽 관산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일설에는 광주 관요의 도공 다섯 명이 대신면과 북내면 사이에 솟은 싸리산에서 생산되는 고령토를 뱃길로 운반해 사용하다 아예 북내면 오금리로 옮겨오면서 도자기 산업이 정착되었다고 한다.
(도예품 전시판매장)
1960년대 후반 도자기 산업이 호황을 누리자 여주에는 많은 공장이 설립되었는데, 현재 600여 개의 도자기 공장이 여주 도자기 생산을 주도하고 있다. 특히 여주읍 오학리에서 현암리까지 약 3㎞에 이르는 도로변에는 도자기 가게들이 곳곳에 늘어서 있어 일명 ‘도예촌’이라고도 불린다. 가게들이 한 곳에 밀집한 것이 아니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고 물건들이 바깥에 나와 있기 때문에 차를 타고 가다가도 멈춰 구경할 수가 있다. 이곳 오학리 도예촌에서 1㎞ 남짓 떨어진 천송리에는 세계생활도자관이 있다. 이곳은 국내외 각종 도자기를 전시하는 도자기 전문 전시관으로, 도자기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준다. 이 일대에서는 지난 봄 제4회 세계 도자비엔날레가 열렸으며 해마다 도자기축제가 열리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세계생활도자관 인근에도 도자기 판매장들이 들어섰고, 도예체험장도 마련되어 있다. 세계생활도자관에서 남한강 쪽으로 조금 내려가니 강 옆에 사찰 하나가 있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오는 신륵사다. 산사山寺가 아니라 강사江寺라고나 할까,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변의 수려한 풍광과 어우러진 신륵사는 특이한 문화재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우리나라 석탑은 대부분 화강암을 다듬어 만드는데 이곳 다층석탑은 흰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또 벽돌을 쌓아 만든 다층전탑은 고려시대의 것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한다.
(신륵사와 신륵사 다층전탑)
신륵사와 남한강이 만나는 암벽 위 정자에서 바라보니 강물에는 겨울새들이 한가로이 떠 있고 멀리 한 척의 커다란 목선도 보인다. 여주대교 부근 강변유원지와 신륵사관광지 등을 오가는 황포돛배일 터이다. 하지만 관광객이 적은 겨울이어선가, 배는 돛을 내렸고 다만 바람결에 가끔 몸을 움직일 따름이다. 이번에는 강천면 이호리에 있는 목아박물관을 찾았다. 1993년 개관한 목아박물관은 전통 목조각 및 불교의 전승과 발전을 위해 세운 사설 박물관이다. 한국의 전통 불교조각 기법을 보존하고 나아가 새로운 기법으로 계승 발전시키는 한편, 우수한 전통 공예문화를 후세에 알리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불교와 관련된 문화유산과 현대의 불교 조각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감상하면서 선인의 기술과 장인정신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목아박물관과 여성생활사박물관)
강천면에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박물관이 있는데 굴암리의 여성생활사박물관이 그것이다. 강천초등학교 강남분교(1999년 폐교) 시설을 이용해 설립한 여성생활사박물관은 여성에 관련된 유물 전시는 물론이고, 다도·천연염색·전통예절 등의 체험 및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남한강이 선물해 준 너른 들과 풍족한 물산 지도를 놓고 보면 남한강은 남동쪽에서 북서쪽을 향해 흐르며 여주군을 둘로 가르듯 관통하고 있다. 남한강은 여주의 젖줄이다. 너른 들을 형성해 물산이 풍족하게 했고, 그 물산은 수로를 따라 서울 등 곳곳으로 운송되었던 것이다. 여주에 일찍이 도자기 산업이 발달한 이유도 좋은 원료흙이 있었던 데다 뱃길을 통한 대량 운송이 가능했던 때문일 수 있다. 남한강은 한강의 본류로 강원도에서 발원해 중류 지역인 여주에 이르면서 유속을 늦추고 드넓은 침식분지를 형성해 놓았다. 오랜 세월 토사가 밀려와 쌓인 이 기름진 평야에서는 당연히 품질 좋은 쌀이 나온다. 여주 쌀은 품질인증이 된 것에 한해 ‘대왕님표’라는 브랜드로 판매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도자기를 놓고 여주와 이천이 전국 제일을 다투듯이 쌀도 서로 선의의 경쟁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여주의 쌀 브랜드가 ‘대왕님표’인데 이천의 쌀 브랜드는 ‘임금님표’이다. 이 두 지역은 해마다 ‘전국 최초 모내기’ ‘전국 최초 벼 수확’ 등의 기사로 언론에 오르내리기도 한다. 이러한 경쟁은 급기야 올해 여주에서 최초로 무가온 2기작 벼 수확 성공이라는 성과로 나타나기도 했다.
(여주의 젖줄 남한강)
여주는 이처럼 벼농사가 발달했고 그만큼 전통적인 모습을 간직한 마을도 많아, 이 마을들이 최근에는 도시민들에게 팜스테이나 전통체험을 제공하는 마을로 거듭나고 있다. 능서면 광대리(그린투어마을), 금사면 상호리(버섯마을)와 주록리(사슴마을), 강천면 부평리(해바라기마을)와 가야리(오감 도토리마을) 등이 농업이나 전통을 테마로 하여 주5일 근무제 등으로 여가활동이 늘어나고 있는 도시민과 농업·농촌을 접할 기회가 적은 청소년들에게 휴식과 새로운 체험의 장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여주가 전통적인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고 해서 전통에 갇혀 미래를 외면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주도 최근에는 도시화가 급격히 진전되고 있다. 하지만 여주는 수도권에서 여전히 ‘덜 현대적’인 모습으로 남아 속도와 정보의 경쟁에 지친 많은 사람들에게 휴식과 재충전의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그 여주의 한가운데를 남한강은 오늘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남한강은 서해바다를 향해 흐르기도 하거니와, 여주의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며 미래를 향해 흘러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주에서;땅콩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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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보올리느냐 수고햇어요 늘 건강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