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만일 행복함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세상이 정말 끔찍하게 바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희생이 된, 대구에서 일어난 끔찍한 지하철 참사도 결국 이 행복에 대한 소망이 없는 단 한사람의 과오로 인하여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반신불구가 된 자신을 바라보며 "나에게는 소망이 없다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비관하며 절망하며 자신을 채우지 못한 것에 대한 아집을 비우지 못 할때, 어둠의 세력은 그의 마음을 꼼짝못하게 붙잡아 버렸고 결국은 모든 사람들에게 불행을 나누어주는 이런 기가 막힌 일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아빠 숨이 막혀요.! 엄마! 내몸에 불이 붙었어요. 뜨거워 죽겠어요!" 전화로 들려오는 죽음을 눈앞에 둔 아들 딸의 울부짖음을 듣는 부모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그 순간이 지옥 그 자체이었을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에 아하스와 므낫세 같은 사악한 왕들이 있을때 힌놈의 골짜기라고 불리우는 몰렉신에게 제사지내는 지역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제물로 바쳐져서 불에 태우는 제사가 행해졌는데 그것이 얼마나 처참했으면 헬라어에서 지옥이란뜻의 게안나란 말이 이 골짜기의 이름인 "게 힌놈"에서 유래가 되었습니다.
이번 대구사건을 보면서 힌놈의 골짜기를 본 것 같았습니다. 한 사람의 삐뚤어지고 뒤틀린 마음을 틈탄 어둠의 세력에 의하여 정말 지옥의 제사가 행해진 것 같은 그런 처절함이 저질러진 것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행복함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전에도 한번 말씀 드렸지만 손가락도 2개밖에 없고 허벅지에 붙은 작은 발로서 페달에 연결된 막대기를 밟으면서도 피아노건반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소망을 주는 이 희아양 같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태어날때부터 기형아로 태어나서 정상적인 모든 삶을 포기해야할 그에게 마음속의 고통과 번민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나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신을 타이르며 자신에게 용기를 주며 환경이 채워 주지못한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매어 달리며 자신을 비웠을때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행복 하십니까? 우리모두 행복한 사람들이 됩시다. 우리만 행복하게 되지말고 주변사람들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 됩시다. 행복을 가슴에 안고 행복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됩시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됩니까?
오늘 이 행복에 대해서 말씀을 통하여 함께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셔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6장 7장 말씀을 가르켜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산상수훈의 시작을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하는 주제를 놓고 가르치심을 주셨습니다. 소위 말하는 팔복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팔복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신 예수님의 성품을 고스란히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상화인 것입니다. 한가지 한가지 모자이크를 해보면 예수님의 행복한 초상화가 그려집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행복한것처럼 너희도 행복하거라" 그렇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행복해 질수가 있고 행복을 누리며 살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믿으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 첫 번째 행복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3절말씀을 다시한번 크게 읽어 봅시다.
안보고 한번 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말씀하신 그 말씀은 우리가 지금 읽은 문장 보다도 훨씬 동적이고 적극적이십니다. 마카리오스! 복되도다! 하고 선포로서 시작을 합니다. 복되도다 심령이 가난한자들이여. 너희에게는 천국이 있도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첫 번째 행복은 심령이 가난한자의 행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 그 자체가 벌써 복된 것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자에게는 천국이 있고 천국이 있는 자에게는 당연히 행복이 있으니 심령이 가난한자들은 복받은 사람 복된사람이다 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가난한 심령의 행복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분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위한 첫 번째 길목이기도 하고 하나님을 잘 아시는 분들에게는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영성계발의 첫 번째 계단이기도 합니다. 이 심령의 가난함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 할 수가 없으며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또한 가질 수 없음을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것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 단어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먼저 심령이란 말입니다. 심령이란 원어는 "퓨누마"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깊은 곳의 自我(자아)를 말합니다. 이 마음이 우리의 삶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는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자아를 가난하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자들이 복된자요 행복한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난이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가난에 사용된 원어는 "프토코스"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웅크리다"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거지가 구걸을 할 때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적선을 위해서 길가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것은 병들고 지쳐 꼼짝 못하는 거지가 자기가 살길은 도움을 받는 길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도움을 주는 사람의 손에 자기 자신을 내맡기는 모습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 전혀 의지할 데가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헬라어 프토코스 즉 가난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자기 자신의 마음의 가난을 자각하는 사람이죠.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는데서부터 이 자각이 시작을 합니다. "나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내 이 모습 쓰기 부끄럽습니다. 내 힘 가지고는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함으로서 가난한 심령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나라의 주권도 잃고 제국주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가난한 민족"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비로소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가난한 심령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그들은 자기 자신의 마음의 가난함을 자각한 것입니다. 포로의 극한 상황에서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경험이 그들로 하여금 영적 경건운동을 일으켰고 진정한 천국의 행복이 어디서부터 출발하는지를 그들은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인생 속에서 하나님을 필요로 함을 알고 있는 사람, 하나님이 계셔야 하겠다고 영적인 가난함을 늘 느끼고 사는 사람, 이 사람이 진정한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영성이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합니다. 내 인생에 내 삶 속에서 늘 하나님이 계서야 되겠다고, 안 계시면 큰일나겠다고 생각하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고 깨끗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자신의 이익에 필요한 액세서리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느끼는 영성! 하나님을 붙들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수 없는 영성,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는 영성, 이것이 바로 가난한 심령이라는 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가난한 심령이 복이 된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중요한 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그 부족함을 느끼고 고백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그것을 맡겨드리고 하나님의 힘과 권능으로 채워 달라고 간구 하게되기 때문인 갓입니다. 여기에 심령이 가난한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가 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한계와 부족을 느낍니다. 어느 누구도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절대적 영적 궁핍을 알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그 보좌에 담대히 나아가게 됩니다. 그분께 도우심의 손길을 진정으로 간구하게 됩니다.
"주님! 주님밖에 의지할곳이 없습니다. 주님 밖에는 갈데가 없습니다. 두손들고 나오나니 주여 받아 주시옵소서!" 그럴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풍성하심으로 채우시게 됩니다. 가난한 마음 그 자체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마음으로 자신의 부족을 아뢰고 간구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게 되고 넘치게되어 그래서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워진 자아로 말미암아 가난한 심령 그러나 채워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풍성한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예수님 안에서 심령의 가난함을 느꼈을 때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빈자리가 채워졌을때 그간 한 고백을 보십시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궁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제가 공부했던 신학교에 세계적으로 이름 있는 조직신학자 한분이 게셨습니다. 너무나도 겸손하시고 이 분은 여름 내내 똑같은 반팔 와이셔츠 하나로 지내실 정도로 검소하게 사시는 분이었습니다. 저희가 농담으로 빨래는 언제해서 입으실까 할 정도로 그렇게 사시는 분이었습니다. 정작 옷보다도 우리가 관심이 있었던 것은 이런 분은 어떤 교회를 나가시며 어떤일을 하실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얼마나 부담이 될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다른 사람을 통하여 이 질문에 관한 정보를 얻고 저희들은 깜짝 놀라며 마음속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아주 조그마한 교회에서 주일학교 반사선생님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일학교 디렉터도 아니요 몇 명의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주일학교 교사로서 평생을 봉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계적인 신학자가 이름없는 조그마한 교회에서 몇 명의 어린이들의 영혼을 위하여 봉사하는 그 손길! 심령이 가난한 사람만이 할수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만이 줄 수 있는 잔잔하지만 가슴깊은 감동인 것입니다.
어느날 채플 시간에 그분께서 설교말씀을 하신적이 있었습니다. 말씀가운데에 자신의 딸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아버지로서 자신이 겪은 고통과 아픔과 갈등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듣고 또 한번 놀랐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머물지 않고 비참하게 허물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온전히 자신을 주님께 맡기게되고 그때부터 다시 교제하게된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관계의 회복에 대한 간증을 통하여 큰 도전을 받은일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함으로 복을 소유하게된 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저는 한 경직 목사님을 존경합니다. 저는 그 분이 가졌던 가난한 마음을 좋아하고 저도 어떻게든 그 분의 발 뒤꿈치라도 따라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 분은 늘 "저는 부족한 종입니다"하고 고백을 했습니다. 단순히 겸손을 보일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부족한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 없이는 설 수 없는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고백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맡길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복을 경험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우는 템플턴상을 수상하고 오셔서 그분은 말씀 하십니다. "저는 그 상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가난한 마음과 그것 때문에 주님께 모든 것을 온전히 맡긴 그 모습을 향하여 어느 누구 하나 돌을 던질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저도 제 자신을 바라보면 너무나 부족함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양 무리를 먹이는 목자로서 너무나 모자라는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지난 한주간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생각 했습니다. 이 부족함이 있기 때문에 더욱 가능한 것 아닌가? 이 부족함을 깨닫고 이 부족함을 온전히 주님께 맡긴다면 나도 복되고 복된 목회자가 될수 있지 않겠는가! 여러분들 저를 위해 기도 할 때 이렇게 기도해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목사님 부족한 것 많이 깨닫게 해 주세요. 깨닫는것에 그치지 않고 주님께 온전히 맡겨 드리게 해 주세요. 처절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게 해 주세요. 저도 여러분들을 위하여 그렇게 기도 하겠습니다. 가난한 마음 그러나 풍성한 마음 복된 삶을 우리가 늘 경험 할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자는 무엇을 소유하게 됩니까?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저희 것이다"라고 말씀 하십니다.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말씀 속 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을 받았다 는 이야기입니다.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 나라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영생을 값없이 얻은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구원을 주신 하나님 앞에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왜 입니까? 구원 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그런것입니다. 하나님의 궁휼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칩니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이 시간 주님이 이 자리 에서 우리의 영과 육이 병든 것을 치유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의 임재가 이곳에 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얻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공들이 이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씀의 두 번째 의미는 이렇습니다. 우리의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을 온통 다스리시는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누가복음 17장 21절을 보면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은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 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마음이 기쁨과 행복으로 얼마나 충만해지는지 모릅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잘 먹고 마시고 편안하게 살아도, 즐기고 싶은 것 다 즐겨도 거기 에는 천국이 없습니다. 진수성찬을 차려 놓은 밥상에 천국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좋다는 것은 다 갖다 쌓아 놓은 집에도 천국은 없습니다. 천국은 그런 데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심령에 임합니다. 그 천국이 임하면 의를 사랑합니다. 의를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기쁨이 있습니다. 악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사탄 의 불행이 있지만 의를 사랑하는 자의 마음에는 하나님 자신의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서 다스리시는 천국이 임하면 내 안에는 세상 이 줄 수 없는 평강이 있습니다. 남편에게 기댈 때도 느끼지 못했던 평 강, 쌓아 놓은 돈에 기댈 때도 느끼지 못했던 평강,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참한 자식들에게 기댈 때도 느끼지 못했던 평강, 내 건강을 의지할 때도 느끼지 못했던 평강을 주님이 내 안에 계심으로써 느끼게 만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천국이요, 희락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기뻐할 일이 없지만 마음에는 예수님만 생각하면 가슴이 뛰는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이 천국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신이 사람에게 행복을 주실 때, 바로 주시지 아니 하고 천사에게 맡겨서 너희가 갔다 줘라 그랬댑니다. 그 천사들이 사람들이 너무 행복하게 사는게 좀 마음에 걸리고 질투가 생겨서 행복을 숨겨두기로 했답니다. 저희 들끼리 의논을 하고 그래서
"바다 깊은 곳에다 숨겨둘까?"
그랬더니 다른 천사가 말하기를, 사람들은 재주가 많아서 그거 다 찾아 낼 거라고. 그러면
"아주 높은 산중 꼭대 기에다 갖다 감춰놓을까?"
사람들 은 모험심이 많아서 거기까지 뒤져 서 행복을 다 찾아 낼거라고. 그래서 어떤 천사가 말하기를 사람들은 자기 머리만 믿고, 재주만 믿고 자랑하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가슴에 다 두면 못 찾을 거라고. 그래서 가슴에 감추었다고 합니다. 정말 사람들이 자기 머리만 믿고 자랑하면 서 가장 가까운 가슴에 행복이 있다 는 것을 모르고 저멀리 바다같이 깊은데에 산같이 높은데에만 있는줄 알고 그렇게 살더라. 그런 얘기입니다. 이야기지만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신약성경 당시 사람들은 지중해에 있는 구브로섬을 *마카리아* 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행복한 섬이란 뜻입니다. 구브로에는 좋은 기후와 아름다운 꽃과 과일과 숲이 있었고 완전한 행복을 줄 만한 각종 모든 광물과 천연자원이 있었습니다. 2개의 아름다운 산이 있고 그 산사이의 분지와 계곡은 땅이 비옥하고 기름져서 포도와 각종과일이 풍성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이라는 단어 마카리오스에서 따와서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여러분들의 마카리아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습니까? 산꼭대기에 있습니까? 바다 깊은곳에 있습니까? 구브로섬같이 기름진 육신적인 환경에 있습니까? 우리의 마카리아는 바로 주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행복입니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풍요와 비옥함이 있고 아름다운 꽃과 과일과 푸른 초장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행복을 줄 모든 것들이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찾아서 높은산으로 바다 건너 다른 곳으로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자신들은 부족하지만, 우리의 환경은 부족하지만 그 분으로 말미암아 절대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슴에 있는자들, 천국을 소유한 복된자의 고백이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 험한 세상을 우리가 살아가면서 진정한 하늘의 기쁨을 누리고 하늘의 소망을 가지는 첫 번째 비결은 가난한 심령을 가지는 것입니다. 웅크린 거지가 땅에 엎드려서 간절하게 구걸하듯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낮아지며 엎드리는 것 밖에 없습니다. 나의 약함을 고백하고 나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십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힘과 권능을 주십니다. 풍성한 은혜로 빈자리를 채워 주십니다. 우리의 가난한 마음을 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마음으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감격 속에서 감사하며 내 심령속에 넘치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천국의 기쁨을 맛보며 주님 만날 그 날까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풍성한 심령이 가난한자의 행복이 저와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첫댓글이성희 목사님 ! 실로 오랜만에 네 글 보는구나.물리적으로는 이역만리 떨어져 살고 있지만 Cyber 세상에서는 이렇게 같은 시간에 '접속'하고 있다는 이 경이로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가난하더라도 마음은 풍성하게 그리고 행복하게..진리의 말씀이다.지금 한국시간은 새벽 1시 조금 넘었다. Have a fantastic time !!
첫댓글 이성희 목사님 ! 실로 오랜만에 네 글 보는구나.물리적으로는 이역만리 떨어져 살고 있지만 Cyber 세상에서는 이렇게 같은 시간에 '접속'하고 있다는 이 경이로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가난하더라도 마음은 풍성하게 그리고 행복하게..진리의 말씀이다.지금 한국시간은 새벽 1시 조금 넘었다. Have a fantastic ti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