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 24일 부천종합운동장 메인스타디움. 초겨울의 황량한 잿빛 하늘 아래 벽돌색 트랙 위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7명의 사나이들이 한발 한발 힘겨운 발걸음을 떼어 놓고 있었다. 이윽고 경기장의 시계가 오후 3시를 가리키자 그때까지 묵묵히 운동장을 돌던 사나이들은 힘없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동시에 트랙 주변에서 숨죽이며 이들의 레이스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트랙으로 쏟아져 들어가 순식간에 그들을 에워쌌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지옥의 레이스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영웅이 탄생되는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김현수! 그는 2001년 11월 23일 15시부터 다음날 15시까지 꼬박 24시간 동안 치러진 대한민국 최초의 24시간 달리기 대회에서 202.5km의 기록으로 우승하였다. 하지만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그의 우승을 점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그는 하마터면 이번 대회에 참가조차 못할 뻔 했었다. 24시간 동안을 달려야 하는 경기의 특성상 참가 자격이 100km 울트라 마라톤 10시간 이내 완주자(여자는 12시간)와 200km 울트라 마라톤 완주자로 제한되어 있었고, 김현수의 100km 울트라 마라톤 기록은 12시간 59분으로 참가자격에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참가신청자가 미달된 덕분에 막판에 와일드카드로 운좋게 참가자격을 얻기는 하였으나 쟁쟁한 참가자들 속에서 그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대회에서 김현수의 레이스를 돕는 서포터(supporter)로 참여했던 김기선(46세. 아마추어 마라토너)은 이렇게 회고한다.
"맞아요. 사실 아무도 김현수씨의 우승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죠. 그저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완주만 하면 성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울트라마라톤계에서 생소한 이름인 김현수에게 그것은 당연한 평가였다. 이러한 인식은 출발총성이 울리고 13명의 참가자들이 기나 긴 레이스를 시작했을 때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오직 한사람, 김현수 자신을 제외하고는.
출발 직후 김현수가 예상 외로 빠른 속력을 내면서 선두를 달리기 시작했을 때도 김기선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환호하기는 커녕 그의 오버페이스를 염려했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그에게 페이스를 낮출 것을 주문했으나 김현수는 요지부동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김기선의 2002년 12월 24일자 달리기 일지를 보자. 이 달리기 일지는 인터넷 사이트 www.rundiary.co.kr에 게시되어 공개된 것이다. 달리기 일지에서는 본명 대신에 닉네임(별명)을 사용한다. 김현수의 닉네임은 느릅나라이다.
## 느릅나라님이 초반부터 빠르게 달린다. 400미터 트랙을 2분대로 달리고 있어 오버페이스가 염려스럽다. 우리는 계속 페이스를 낮출것을 요구하지만, 알겠다는 대답만 한다. 출발후 한시간도 지나지 않아 선두로 나선 그는 아무런 표정변화도 없다. 다만 응원하고 있는 우리만 걱정스런 눈길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중략)--- 네시간이 가까와 오는데도 2:05초 내외의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 42k를 3:40분 정도에 통과한 것이다. 24시간을 달리려고 하면서 본인의 풀코스 기록에 근접하는 속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제 우리뿐만 아니라 대회관계자들도 오버페이스를 우려하는 눈치다.##
이러한 걱정은 그러나 12시간이 넘어서서 중도 탈락자가 속출한 후까지도 김현수의 선두가 계속 이어지면서 감탄과 기대로 바뀌게 된다. 김기선의 위 일지를 계속 보도록 하자.
## 우리 지원팀은 그때쯤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느릅나라님을 보살피면서, 그가 오랜기간 준비해 왔지만 참가할수 없어 안타까와 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참가한 대회의 주로에서, 모질게 굳은 결심을 하고 달린다는 것을 느낄수 있다. 느릅나라님은 쓰러진다 해도 이 속도로 달릴 것이다. 언젠가 그를 만났을때 술잔을 기울이며 들은 말이 있었다. 금년중 달리기의 어떤 한 부분에서라도 대한민국의 일인자가 되겠다고 결심을 밝혔었다. 그때는 월간주행량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될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이것이었구나! ---(중략)--- 11월 24일 00:47:38초, 출발선을 떠난지 9:47:38초만에 드디어 100k를 돌파한다. 100k 대회라도 자랑스런 기록이다. 이제 오버페이스를 우려하는 분들과 대기록을 기대하는 분들로 나뉘기 시작한다...(중략)... 다시 10K를 더 달려 총 170K를 달리고 휴식을 취한다. 앉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든다....(중략)... 매정하게 흔들어 깨워 다시 주로로 밀어 낸다. 이제부터는 그 혼자만의 달리기가 아니다. 가족이 함께 달리고 우리가 함께 달리며, 운동장에 있는 모두가 함께 달린다. 그는 너무 잘 달렸기 때문에 마음대로 쉬는 것도 허용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등을 떠밀고, 사람들은 쓰러지더라도 더 빨리 달릴 것을 요구한다 ##
결국 김현수는 한번도 선두를 뺏기지 않고 24시간을 달린 끝에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날의 레이스는 13명의 출전자 가운데 7명만이 완주했고, 그나마 200km이상 달린 것은 김현수가 유일했다. 그만큼 이 대회는 인간을 감당하기 힘든 극한까지 몰고가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시험하는 혹독한 것이었고, 그래서 무명의 김현수의 우승은 모두에게 의외이자 놀라움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은 김현수의 우승을 지켜본 사람들의 소감이다.
"초반 너무 빠르게 달리시는것 같아 후반에 뒤처질줄 알았는데 나의 오판이었다. 달리시는 모습도 어디가 불편하신것 같던데,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생각이었다" (울트라마라토너 이호재--KU게시판)
"대회가 열린 날, 김현수 님이 달리는 것을 쭈욱 지켜보았는데 인간이 아니라 모터 달린 로봇이었음!" (마라톤문학가 송파세상 김현우--KU게시판)
"페이스 운영에 있어서는 치밀하게 전략을 갖추고 대회에 임한 준비되어진 김현수팀의 모습처럼 그들의 레이스 운영방법을 24시간 내내 파악하였던 자신으로서는 무척 인상적이었으며 그러한 과학적인 자료를 근거로 대회에 임하고 운영하는 방법을 확산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최초의 한반도종단자 月野 윤장웅님--KU게시판)
"우승소식을 접하곤,'무모함'과 '부상'이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리던,제가 부끄럽습니다." (초보싱돌이--rundiary 게시판)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그의 엄청난 의지 앞에서 그 무모함을 탓했던 저의 경박함이 초라해보입니다. 대한민국의 1인자가 되신 느릅나라님께 찬사와 존경의 마음을 보냅니다." (보리오빠--rundiary 게시판) "
도대체 인간의 한계는 어디일꼬???인간이기를 포기한 느릅나라님! 당신은 진정한 불사조가 아니신지" (달려도되니--rundiary 게시판)
24시간 달리기를 지켜본 아내의 심정
(대회 후 김현수님의 처 이진옥 여사가 런다이어리에 게시한 글 중에서...)
...새벽이 되면서 나도 조금씩 지쳐가고 남편도 지쳐간다. 왜 이렇게 힘든 짓을 해야만 하는지, 왜 하고싶어 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만감이 교차한다. 화도 난다. 가슴도 애이듯 아프다. 그러나, 내색할 수도 없다. 집이면 바가지라도 긁으련만. 애처로운 내 남편의 초췌한 모습을 나는 바라만 봐야한다! 다른 팀들은 이미 많은 경험이 있어서인지 담담해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가 없다. 시간이 갈수록 남편의 발길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푸른나루님이 기어코 나를 쉬라고 차로 데리고 가신다. 고마운 마음에 거절을 못하고 가서는 한시간만에 다시 돌아와 남편을 지켰다. 자꾸만 눈물이 나오려고 해서 참는 것도 힘이 든다. 나는 남편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며는 참았던 눈물이 그대로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얼마를 남겨 놓지 않은 시점이다. 내심 부상 없이 완주만 하라고 가슴 죄이며 외쳐대는데, 옆에 계신 푸른나루님과 갓바치님은 좀 더 뛰라고 하신다. 얼마나 얄밉고 미운지 모른다. 그러나 내색 할수 없다. 얼마나 고마운 분들인데. 완주를 하고 들어오는데 참았던 눈물이 밀려 나오려해서 얼굴을 가렸다. 감격과 하루사이에 푹 늙어버린 남편의 얼굴을 차마 맨 얼굴로는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힘이 들어서 화장실로 달려갔다. 소리없는 울음으로 눈물을 쏟고 나서, 그래도 저런 사람의 옆지기라면 꿋꿋해 보여야겠다(사실은 창피해서...)는 생각으로 얼굴의 흔적을 지우고는 말없이 나가서 태연한 척했다. 누워있는 남편의 얼굴을 보며 안도와 다시는 하지 말라는 얘기를 하며 지켜보았다. 이 경험은 평생에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내 남편의 주위에는 이렇듯 좋은 사람들이 있음을 느꼈고, 정말 행복했다...
그는 보통사람이다.
24시간을 달린다는 것은 분명 일반인 뿐 아니라 웬만한 마라토너에게도 감히 도전해 볼 엄두조차 내기 힘든 일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김현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전문적인 운동선수 출신이거나 적어도 선천적으로 탁월한 운동신경을 가진 사람 쯤 되는 것으로 생각될 법도 하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지극히 평범한 보통사람이다.
58년생 개띠. 올해 46세. 직업은 산림청 소속 공무원. 부인 이진옥 여사와의 사이에 딸 3명을 두고 있음. 그의 신상명세는 도무지 특별한 구석이 없다. 게다가 165cm의 키 60kg의 몸무게에 근육질과는 거리가 먼 그의 신체는 오히려 일반인보다 왜소하기까지 하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에 선한 웃음을 짓는 영락없는 동네 아저씨 같은 그를 만나보면 이 사람이 24시간 달리기 우승자라는 사실을 좀처럼 믿기 어렵다. 그는 2001년 9월 4일 불혹을 훌쩍 넘긴 44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운동이란 것을 시작했다. 담배를 끊은 후 불어나는 체중을 줄여보고 싶어서였다.
달리기 입문 전의 김현수님과 딸
그의 운동신경은 신통치 않아 보인다. 운동을 시작한 후 걷기와 달리기를 반복하다가 10일 후에 처음으로 2km를 뛸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그날 인터넷 달리기 사이트인 런다이어리(www.rundiary.co.kr)에 가입하고 달리기 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첫번째 일지에서 2km를 처음으로 달릴 수 있게된 사실을 이렇게 적고 있다.
## 지난 9월4일 부터 달리기를 시작하였습니다.사랑하는 둘째딸 지원이와 같이...아침 6시30분이면 옷을 챙겨입고 운동화를 신고 천변으로 나갑니다. 마침 우리동네(우성아파트) 바로 옆에는...운동할 수 있는 강변공원이 조성 되어 있어서 행운입니다. 어제까지는 약 100m 달리고 100m 걷는 방식으로 약 2km를 달렸습니다. 오늘부터는 운동시간과 거리를 늘리려 6시에 나서기로...어제 저녁부터 다짐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비가 내렸어요. 이런, 달리기 하러 나가야 하는데?...마침 6시30분경 비가 그쳐서 천변에 달리러 나갔답니다. 그리고, 2km를 쉬지않고 달렸습니다. 사랑하는 지원이와 같이..... 빨리 내일 아침이 와서 달리고 싶군요... ## (2001. 9. 14.런다이어리)
운동을 시작하고 10일 만에야 겨우 2km를 달릴 수 있게 된 그는 그로부터 꼬박 1달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10km를 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날의 일지를 보자.
## 며칠동안 그렇게 달려보고 싶던 10km! 오늘쯤 10km를 달리라는 샘머리님의 충고도 있고...무릅도 회복된것 같으니... '오늘은 반드시 달려야지!' ....(중략)...처음 출발은 천천히 달리라는 삼천포대교님의 충고를 머리에 세기면서...1km를 달렸다. 6분12초! 그동안 빠른 속도로 거의 달리지 않아 그런지 이정도 속도도 힘이든다....(중략)...10km 결승지점을 통과하면서 스톱워치 버튼을 눌렀다.60분02초! ## (2001. 10. 23. 런다이어리)
10km를 뛰고서 이렇게 좋아하던 그가 불과 1년여 후에 200km를 뛰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이후 그는 차례로 하프와 풀코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게 되지만 기록은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첫 하프기록은 2시간 6분대, 첫 풀코스 기록은 4시간 12분대였다. 특별한 운동경력도 없고, 별반 운동신경이 탁월해 보이지도 않는 그가 운동시작 1년 2개월여만에 24시간주 부문 대한민국 1위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데는 분명 남다른 무언가가 있었을 법하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한다면 한다. 그것을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더 좋다
2001년 12월 17일 저녁 김현수는 그의 집 부근에 있는 '사랑방'이라는 선술집에서 런다이어리 회원인 김인호, 백승룡, 황정인 등과 첫대면을 하게 된다. 이날 황정인은 김현수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의 일지를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