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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나무가 삼남대로 이정표라니...
칠괴동(七槐)산업단지 입구의 아침 공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출근버스의 매연으로 매케해지기 시작했다.
지극히 일부지만 자전거 패달을 열심히 밟으며 출근하는 이들의
모습이 오히려 싱그러워 보였다.
그런데 중국을 비롯해서 다수가 자전거를 출퇴근 교통수단으로
활용하는 외국인들처럼 평상시와 다름 없는 복장이면 안되나?
안전 제일이라고는 하나 위험 부담이 큰 경주에 임하는 선수처럼
요란한 장구가 꼭 필요한지?
자전거 동호인들의 사치스럽기가 그지없는 복장과 보호장구들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하긴, 뒷동산에 오르면서도 마치 에베레스트 등반인들처럼 고가
장비를 갖추고 뽐낸다는 비아냥을 유비무환의 자세에 대한 괜한
시비라고 일축해야 할까.
엉터리 이정표, 그나마도 인색하기가 유감스럽게도 OECD 국가
중에서 으뜸이라는 불명예는 다 아는 사실이다.
길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왜 필요하겠는가.
모르는 이들을 위한 안내판이라면 이럴 수는 없을 것이다.
평택~음성간 40번고속국도 밑을 통과해 도일리 입구 사거리변에
선 엄나무가 확신을 줄 때까지는 미심쩍기만 했던 안내판이었다.
나이 500년(키 18m, 몸통 1.5m)의 엄나무가 서있는 이 길이 삼남
대로였다는 평택시의 설명판이 안심을 주었으니니까.
이 일대에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일명 감주(甘酒)거리라 했단다.
당연히 성황당, 성황나무가 있어 오가는 이들이 소원을 빌었는데
성황당은 사라지고 두 그루의 엄나무중 1그루만 남아 있다고.
302번과 317번 지방도 교차로에서 삼남대로 이정표 노릇하는
500년생 엄나무
대백치 고개마루의 에코 브리지
안성과 화성을 잇는 302번(구340번)지방도로와 십자로를 만들고
북상하는 꼬부랑 삼남대로는 말숙하게 포장되어 317번을 달았다.
길가에는 <국립한국재활복지대학>이 들어섰고 좌우 야산지대는
목장과 과수농원으로 변신했다.
동막골로 넘어가는 대백치(大白峙) 고개마루에는 깎인 높이 위에
에코 브리지(eco-bridge)를 놓았다.
"야생 동물이 지나가고 있어요!"
브리지 설명에다 친절하게도 <삼남대로동물이동 통로>라고 명명
하여 길 안내역까지 맡겼다.
과연 이 통로를 통해 이동할 지는 그들에게 물어봐야 하겠지만.
자기는 늙지 않나
진위면(振威面 馬山里)과 경계인 송북동(松北) 동막천 일대에도
대대적인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정지작업과 도로와 교량의 개설 등이 한창이다.
송탄 일대는 행정상으로 혼란스럽게 변화 무쌍했던 곳이다.
참나무가 울창하여 숯굽는 곳이 많았단다.
왕래하는 숯장사들이 쉬어가던 고개가 숯고개(炭峴)였다.
숯[炭]이 나는 고개[峴]라는 뜻이다.
쑥고개는 숯고개의 변음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진위군(당시 진위가 郡)의 송장, 탄현,
일탄면과 인근 여방면의 일부를 병합하여 송탄면이라 했다.
미군 주둔 등의 영향으로 급격히 발전하여 1981년에는 송탄시로
승격되었으나 1995년에 평택시, 평택군, 송탄시 등이 다시 통합,
평택시가 되면서 급전직하로 강등되었다.
송탄동이라는 이름으로 간신히 지명을 남기게 된 것.
아침 겸 점심을 먹으려고 식당에 들어갔다.
공사장의 한바(飯場)에 다름 아니지만 내 취향에 맞는 집이다.
중기 기사인 듯 한 젊은 이가 식혜 한 컴을 내게 권했다.
어찌나 차갑고 단지 더위가 싹 가셔버렸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매콤한 콩나물국이 입맛을 다시게 했다.
사제(私製) 막걸리 한 잔을 곁들여 모처럼 신나는 식사를 했다.
여기까지는 좋은 아침(good morning)이었다.
그러나 온 얼굴에 심술이 덕지덕지한데다 실귀까지 먹은 드럼통
여주인이 약주고 병주기를 하려는 것인가.
허드렛 일에 익숙치 않은 노파가 어쩌다 파트 타임 일을 하는 듯
한데 닥다르는 앙칼진 소리에 이 늙은 길손의 속이 아려왔다.
아직 중년인데 노모같은 분에게 이렇듯 매정할 수 있단 말인가.
듣다 못해 한 마디 했으나 알아 듣지 못해서 인지 웬 참견이냐는
투의 표정이었다.
저런 여인이 음식 맛을 낼 줄 안다는 게 기적같기만 했다.
자기는 늙지 않고 이 알량한 식당이나마 평생 주인 노릇만 하라
고 점지라도 받았나.
구박받고 풀이 죽은 노파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무소불위?
동막천 신설 다리를 무심코 걷다가 돌아서서 동막마을로 갔다.
삼남대로는 이 신설교량 위가 아니고 바로 우측의 동막마을을
관통하고 소백치를 넘어서 진위땅에 들게 되는 것 아닌가.
마을 초입의 느티나무(마을나무) 그늘이 미치는 지점 길가에서
고추 고르기를 하는 영감에게 말을 걸었다.
삼남대로의 원형(原形)에 대해서 였을 뿐인데 그는 묻는 나보다
많이 앞서 나갔다.
최근에 개통한 새 도로(317번 지방도로) 이전만 해도 꼬불꼬불
마을주택 사잇길을 따라 올라가 고개를 넘으면 진위면이었으며
그렇게 해서 오산장까지 보러 다녔다는 것.
동막마을 보호수
동막마을에서 소백치 에코 브리지(4)로 올라가는 삼남대로 옛길(1~3)
신작로가 생긴 후 다니는 이가 없으니까 길은 희미해졌고 절로
숲이 우거졌다면서 경부고속국도 비사까지 꺼냈다.
경부고속국도(1번)가 당초에는 지금 317번 지방도로가 된 삼남
대로 대백치와 소백치를 지나 진위천을 건너게 되어 있었단다.
그래서 일대를 벌목하는 등 준비를 하는 중에 평택보다 힘이 센
안성출신 국회의원의 등장으로 노선이 변경된 것이라고.
당시에는 실망이 컸고 마을 분위기도 침통했으나 고속도로가
마을 발전에 긍정적이라기 보다는 소음 공해가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되어 오히려 전화위복의 분위기란다.
혹, 자위하는 법을 터득한 것 아닐까.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도로에 이르기 까지 무소불위인가.
지병 때문에 많이 늙어 보인다는 62세의 장 영감에게 사례하고
잠시나마 옛길을 따라 소백치에 올랐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도로의 노선, 등급, 이름까지 권력게임에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탄했다.
소백치에도 에코 브리지가 놓여 있다.
동물들이 비교적 안심하고 이동할 만한 분위기라 여겨져 다행
이었는데 이는 다분히 가설자들의 관심과 배려에 좌우된다.
인품보다 의지에 경의를 보냈던 분
진위면 마산2리, 울창한 숲(藪) 속에 있는 마을(村)이라는 수촌
(평택 칠원동 '水村'이 아님) 길가 <부부화가네>가 늙은 길손의
걸음을 잠시 멈추게 했다.
서양화와 한국화의 부부(수촌갤러리)가 가난한 화가라기 보다는
게으른 화가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전남 장성 남면의 <마음에 여유를 갖고자 하는 자리>(엣길 23번
글 참조)와 매우 대조적이라 그랬을 것이다.
어수선한 부부화가네 수촌갤러리
진위는 어쩌다가 외진 지역이 되었으나 옛 군(郡) 소재지였던 곳
답게 면 치고는 대형의 인상이다.
진위땅을 통과하기 전 날인 어제 밤(9월 16일)에 진위중.고교에
대한 인터넷 검색을 했다.
권오겸 설립자의 근황이 궁금해서 였는데 이럴 수가.
3년 전인 2005년에 별세하셨단다.
1960년대 초에 진위에는 진위고등공민학교가 있을 뿐이었다.
설립자는 정규 중학교 인가를 받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1964년 말, 그는 각고 끝에 학교법인 광염의숙과 진위중학교의
설립 인가를 받고 곧 이어 교장이 되었다.
기독교의 장로인 그와 한 방에서 유사한 분야의 일을 하던 나는
그의 인품보다 좌절을 모르고 육전 칠기하는 불요불굴의 의지에
경의를 갖고 있었다.
한 번 들르려 벼르던 중이었기에 마침 잘 됐다 싶었는데 허전한
마음으로 진위땅을 통과할 수 밖에 없었다.
추석이 지났는데도 더위는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저항이라도 하듯 가곡리(佳曲)고개 중턱의 한흥마트에서 메로나,
팥빙수, 우유 등을 마구 먹고 마셔댔다.
"장사 집어치우고 어르신 따라 길이나 걸을까"
내가 젊고 건강하게 보인다며 마트의 두 여인이 한 말이다.
그녀들은 정녕 장사에 도가 텄나.
밉상 아닌 것처럼 말도 호감가게 할 줄 아는 여자들이다.
감회 깊은 UN군 초전비와 세마대
21번 시군도를 따라 오산땅(烏山)으로 넘어갔다.
오산도 4반세기가 채못되는 사이에 격세지감을 느끼도록 변했다.
80년대, 아직 화성군 오산읍이었던 때 일대에서 불철주야 심혈을
기울인 적이 있어 이 지역에 대해서 웬만큼은 알고 있다.
하도 많이 변해서 토플러(A. Toffler)의 말을 빌리면 충격(shock)
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벌쭉하게 장이 섰고, 삼남대로 행인에게 편의를 제공하던
오산점(店)이 있었을 뿐 별 특징 없는 곳이던 것처럼 지금도 고층
아파트 단지만 늘어나고 있을 뿐 특색을 느끼기엔 역부족이라는
느낌이다.
간 밤에 잠을 설친데다 더위에 시달리고 지친 탓인가.
졸면서 걸을 정도가 되어 버스정류장을 비롯해 그늘 밑 장의자만
나타나면 눈붙이기를 반복했다.
내삼미동(內三美) 죽미령(竹美嶺)으로 오르다가 냉면집에 들러
얼음냉면국물을 실컷 마셨더니 정신이 버쩍 드는 듯 했다.
저녁노을이 폼을 잡으려는 시각, 마음이 조급해지려 할 때인데도
죽미령, <UN군초전비> 앞에 도착해서는 잠시 회상에 잠겼다.
6. 25 동란이 발발해 10일째 되는 날이었다.
1950년 7월 5일, UN군의 이름으로 참전한 미육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 공산군과 최초의 교전을 벌인 곳이다.
나는 서울 함락 후 밤마다 이불 속에서 듣는 미국의소리 (Voice
of America) 우리말 단파방송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았다.
1955년에 건립된 이후 64년, 72년에 보수와 확장을 거듭하다가
1981년에는 널따랗게 조성된 현위치에 위용있게 재건립했다.
이 때, 나는 교육기관 대표로 참석하여 헌화했는데 어언 세월이
많이도 흘렀구나.
UN군 초전비
한데, 이 죽미령이 삼남대로의 중미현(中彌峴:대동지지)과 동일
고개라면 '竹美'가 옳은 표기라고 생각된다.
이 지역에 대나무가 많았던데다 22대 정조가 삼미(三美)라 칭한
세 곳 중 하나가 이곳이었기에 죽미가 됐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병점으로 내려가는데 서쪽 독산성(禿山城)이 가까이 다가왔다.
백제때 축성된 것으로 알려진 이 성의 정상에는 사적 제 140호인
세마대(洗馬臺)가 있는데 그 내력은 임진왜난때로 올라간다.
1592년, 왜장 가토(加藤淸正)의 대병력이 성 안에 주둔중인 권율
(權慄) 장군의 1만여 군사를 포위했다.
산성 내의 식수 사정이 좋지 않은 것을 간파한 가토는 성 안으로
물 1지게를 올려 보내 조롱하고 염탐하며 고사작전을 폈다.
이에 권율 장군은 밝은 아침에 여러 필의 말을 잘 보아는 산정에
세우고 마치 물로 말을 씻는 것처럼 흰 쌀을 말 등에 퍼부었다.
결국 왜군은 성내에 물이 풍부하다고 판단, 포위망을 풀고 퇴각
했으며 훗날 이 자리를 세마대라 명명했다는 것.
짬이 날 때마다 올라가 장군의 기지에 경탄하던 곳이다.
독산성 세마대(전재)
번화가로 변신한 떡전거리(餠店)도 삼남대로 길목이었다.
당연히 떡장수들이 많았기에 그 이름을 갖게 되었을 터.
옛 수원군 태촌면에서 바뀌기를 거듭해 지금은 화성시(華城市)
병점동이다.
사고가 잦던 경부선 건널목은 입체 교차로로 변신했고 전철역은
수도권대학 학생들로 성황이다.
위험함을 번연히 알면서도 서울발 총알택시로 드나들며 심혈을
기울였던 곳이라 늙은 길손이 되고서도 감회가 새로운 것이리라.
내 몸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어둡기 전에 수원땅에 당도하려고 걸음을 재촉했다.
군당국의 초청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음은 물론 전투기 조종간에
앉아보기도 했던 지척의 00 비행단 담장과 동행했다.
아직 밝을 때 수원시 권선구 세류동(대동지지의下柳川)에 들어
선 후로는 또 나태해지기 시작하는가.
더구나 인도 위를 걷게 되면서는 안심이 돼서인지 더욱 그랬다.
패스트 푸드집에 들르기도 했다.
전일 예상한 대로 내일 한양 문안에 들어설 수 있을 것 같다.
수월하게 그리 되려면 장안문까지 가야 한다는 판단에 몸이 천근
인데도 마음만은 더욱 가벼운 듯 했다.
그래서 이미 밤인데도 걸음은 계속되었다.
밤길인 것이 아쉬웠으나 오히려 밤이 더 좋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일부러 오거나 경유하는 일이 얼마나 잦았던 곳인가.
그러니까 꽤 알만한 도시다.
그러나 늘 낮에만 이뤄졌기에 밤길도 걸을만 하며 야경도 감상할
기회가 되어 좋다는 것이다.
팔달문 ~ 화성행궁 ~ 장안문 바로 앞까지 갔다.
노상까지 밀려나온 호프집에서 감자전에 생맥주를 마셨다.
삼남대로 상에서는 처음이다.
그 새, 술집 정서를 잊기라도 했나 홀 늙은 이가 스스로 어색해서
마치 이방인이 된 느낌이었다.
그래도 되살아나는 듯한 기운에 장안문에서 화서문과 화홍문 등
성곽따라 오가며 세계문화유산 화성의 야경을 즐겼다.
밤의 장안문
마지막 날인 내일을 위한 마지막 쉴 곳 찾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묻고 물어, 돌고 돌아 장안구 북단 조원동까지 갔다.
이처럼 늦게 들기도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택시타면 지극히 간단히 풀 문제를 고집때문에 또 어렵게 풀었다.
자주 쉬어야 하는 몸으로 참 많이도 걸었다.
원 없이, 후회 없이 걸은 하루다.
몸에게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만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