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판 삶 51년에 작품 100편. 일 년에 두 편 꼴이다. 영화감독 임권택(71), 그는 한국 영화와 함께 살아왔고, 오늘도 스크린의 중심에 서 있다. 내년부턴 부산 동서대에서 자신의 이름을 붙인 ‘임권택영화예술대학’을 열어 영화 학도를 가르친다.
곳에 따라 기습적으로 많은 비가 내린 8월 14일 임권택 감독과 함께 ‘추억 여행’을 떠났다. 경기도 용인 임 감독 아파트에서 만나 전남 장성으로 향했다. 장성은 임 감독의 고향이다. 백양사 입구 장성호수를 굽어보는 곳에 그의 조형물이 있다.
그 앞에서 사진도 찍고, 삶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겸 해서. 먼저 임 감독의 이름을 붙인 부산 동서대 영화예술대학이 화제로 떠올랐다.
“이 나이 먹도록 영화만 했는데 이제 그 경험을 후학들에게 알려주는 것도 보람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말이 100편이지 그동안 어떤 영화를 만들었는지 뒤돌아볼 틈도 없었어요. 내 작품을 놓고 스스로 비평가가 되어 볼 좋은 기회예요.”
대학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겠다고 해 처음에는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잘되면 개인적으로 영광이고, 학교에도 좋은 일이지만 별 성과 없이 지지부진하면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임 감독의 말은 어눌한 듯 하지만 힘이 있다. 진솔함 속에 깊이가 있고 연륜과 독특한 ‘임권택표’ 체취가 묻어 나온다.
내 영화 보는 게 부끄럽다
스물여섯 청년 시절부터 일흔하나 반백의 노인이 되도록 자그마치 100편을 찍었으니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을까? 그런데 이야기 첫 대목부터 의외였다.
“난 영화가 끝나면 내 영화를 안 봐요. 왜냐면 그걸 보고 있노라면 ‘잘 찍었구나’ 하는 때도 있지만 ‘겨우 거기까지 밖에 생각이 못 미쳐 저 모양으로 찍었나’라는 생각이 들거든. 관객이야 잘 모르겠지만 만든 사람 입장에서 보면 아쉽고, 부족한 장면과 자주 부닥치거든. 그런 대목을 자주 만나면 열 받으니까 차라리 안 봐요.”
작품의 완성도로 볼 때 이만 하면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흥행이 안 되는 게 있는가 하면 조금 아쉬운 대목들이 있는데 관객이 몰리는 것도 있다. 전자가 올 4월 개봉한 100번째 영화 <천년학>이고, 후자로는 풍운아 김두한의 이야기를 극화한 <장군의 아들>이 꼽힌다. 영화 <천년학>에 대해 묻자 안색이 흐려진다.
“솔직히 어느 정도 될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와서…. 요즘 (젊은) 관객을 의식하지 않고 ‘너무 나이 먹은 영화’를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를 알리는 데 미숙하기도 했고….”
그는 <천년학>에서 남매의 이뤄지기 어려운 사랑 이야기를 춘향전을 배경으로 깔고 판소리를 통해 표현하려고 했다. 그 결과 <춘향전> 스토리와 판소리에 대해 잘 모르는 젊은 관객들에겐 무거웠으리란 임 감독의 자아비판이다. 1993년 <서편제>의 대흥행 기억을 떠올린 채 그때 <서편제>를 찾은 젊은 관객과 지금의 젊은이가 크게 다르다는 점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14년의 세월, 세대 간의 간극을 염두에 두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렇게 다른 반응을 보일 줄 몰랐지요. 빠른 속도로 전개되는 미국 영화에 길들여진 요즘 관객에게 천천히 음미하고 생각하며 봐야 할 영화를 내놓았으니….”
“감독님도 젊은 영화를 만드시지요.”
“영화도 예술인데 결국 만드는 이의 나이를 따라가는 거예요. 이 나이에 설령 젊은 취향에 맞는 걸 찍어도 그 연령대의 취향과 분위기 속으로 들어가기가 어려워요. 나이에 맞춰 세상을 보고 영화도 찍는 거예요. 괜히 시류에 맞추려고 어설픈 짓을 했다가는 이도 저도 안 돼요.”
먹고 살기 위해 뛰어든 영화판
여기서 잠깐 임 감독의 이력을 살펴보자. 그는 36년 일제 식민 치하에 태어났다. 장성 월평국민학교 3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중학교에 들어간 해 한국전쟁이 터졌고 좌익 활동을 한 삼촌 때문에 집안이 어려움을 겪는다. 53년 열일곱의 나이에 학업을 중단한 채 기차요금만 달랑 들고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갔다. 공사판을 전전하다 미군 부대에서 헌 구두를 내다 파는 군화 중개상을 만나 그 밑에서 일했다.
전쟁이 끝나자 군화 장사 대신 돈이 된다는 영화판에 뛰어든 군화 중개상의 연락을 받고 상경했다.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영화사 제작부의 허드렛일이 극장도 없는 시골에서 자라서 변변한 영화 한 편 본 적도 없는 청년 임권택의 영화 인생 첫걸음이다.
영화사의 눈에 든 그는 61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찍어 이듬해 감독으로 데뷔한다. 첫 작품이 흥행에 성공했지만 그에게 영화적 열망은 사치였다.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하는 그는 10년 동안 ‘주문 생산’에 급급했다. 데뷔한 뒤 11년 동안 50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스스로 이 무렵의 자신을 ‘저질 흥행 감독’이라 부른다.
“그때는 정말 기계처럼 영화를 찍어댔어요. 한 번은 TV에서 어떤 영화를 중간부터 보면서 속으로 ‘도대체 감독이 누구지?’ 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글쎄 그게 내가 찍은 거더라고요. ‘저걸 왜 TV에서 틀지’란 생각에 숨고 싶더라고요. 내 참 허허!”
73년 <증언>을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 출품해 대만(행) 비행기를 탄 뒤 그는 조국과 영화에 대해 자각한다. 모든 게 숨이 막혔던 한국을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는데 갑자기 가슴에 뜨거운 게 올라와 죽어도 이 땅을 끌어안자고 결심한다.
그 뒤 흥행을 노린 영화를 속전속결로 찍어오던 데서 문예영화로 눈을 돌린다. “지금까지 거짓을 찍어왔는데 이제 정직하게 찍자”고 다짐한다. 그 전환점이 <잡초>란 영화다. 한 여인이 여러 남자를 거치면서 수난의 세월을 잡초처럼 버티며 살아가는 내용이다.
“나 자신이 일제 치하와 해방, 한국전쟁, 5?6 쿠데타와 유신, 10?6 정변과 5?8 광주민주항쟁 등 수난과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왔어요. 그 안에서 생존하면서 수많은 삶의 질곡을 겪었고요. 바로 그런 세월에서 영화 소재를 찾고자 했어요. 그러면서 영화의 주제는 끊임없이 인간 본연의 문제, 즉 휴머니즘에 초점을 맞췄지요.”
임 감독은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영화는 만들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 자신이 직접 전쟁을 겪으며 ‘그 시대 안에 너무 묶여 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눈을 잃은 ‘소화불량 환자’라며.
“사람은 어느 시대를 타고 살았느냐에 따라 생각과 눈이 고정됩니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어떤 반쪽의 생각에 갇혀 사는 경향이 있거든요.”
임권택 감독은…
1936년전남 장성 生, 광주 숭일중학교 3년 중퇴, 가톨릭대 명예문학박사 56년 신생영화사 영화제작부 근무 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 81년 <만다라> 한국영화 최초 베를린 영화제 본선 진출 88년 <아다다> 몬트리올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90년 <장군의 아들> 최다 관객 동원, 뮌헨 영화제 <임권택 영화 주간> 행사 91년 낭트 영화제 <임권택 영화 주간> 행사 92년 프랑스 예술기사 훈장 수상 93년 <서편제> 최다 관객 동원 기록 경신 98년~ 동국대 겸임교수 00년 <춘향뎐> 한국 영화 사상 최초 칸 영화제 경쟁 부문 본선 진출 02년 <취화선> 칸 영화제 경쟁 부문 감독상 수상, 금관문화훈장 수상 03년 호암상 예술상 수상 04년 뉴욕현대미술관 <임권택감독 회고전> 개최 05년 베를린영화제 <명예황금곰상> 수상 07년 100번째 영화 <천년학> 개봉, 동서대 석좌교수
저서 <영화, 나를 찾아가는 여정> (임권택·유지나 공저, 민음사) |
한국적인 영화가 통한다분위기가 무거워 화제를 바꿨다. “좋은 영화란 어떤 거냐”고 물었다. 이에 “흥행도 어느 정도 돼야겠지만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영화가 아니겠느냐”고 대답한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영화를 아주 세련되게 잘 만들지요. 재미도 있고, 관객도 끌어 모으고…. 그런데 보고 나면 남는 게 없는 영화가 많아요. 영화는 인간의 삶을 다뤄야 해요. 그게 고통이든, 기쁨이든 간에 세상을 살아가며 풍기는 품격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게 영화예요. 그러려면 우리네 삶을 겸손한 자세로 깊이 있게 다뤄야 하는데 요즘 그런 영화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90년대 <장군의 아들>·<서편제>로 흥행 감독으로 등극한 그는 200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한국적인 것’을 찾아 나선다. 그 대표작이 <춘향뎐>이다. 판소리와 영상을 결합시키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그 결과 한국 영화론 처음으로 칸 영화제 경쟁 부문 본선에 진출했다. 여세를 몰아 임 감독은 2002년 <취화선>으로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타며 세계적인 거장 반열에 올랐다.
“막대한 제작비와 첨단 장비, 우수한 인력으로 무장한 미국 영화와 맞서 감독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뭐냐고 스스로 물었지요. 정답은 미국 영화가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개성을 갖추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한국인만이 갖는 문화적 개성을 찾아 영화에 담기로 한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우리 선조의 예술과 혼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 중 하나가 판소리입니다. 소리가 주는 감동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더라고요. 한국 사람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가장 한국적인 영화를 만들자는 생각이에요.”
굵은 빗방울이 뿌렸다. 천안~논산 간 고속도로 정암휴게소에 들렀다.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담배를 피우는 임 감독을 한 무리의 청년들이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한다. “건강하세요!”라고. “사람들이 알아보는 게 영 부담스럽고 조심스러워요. 유명세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던데….”
휴게소 식당에서 올갱이아욱국을 시켰다. “고향의 맛”이라며 말끔히 비웠다. 식기를 반납하고 오는데 음수대 앞에서 임 감독이 미리 따라놓은 물잔을 건넨다. 아이구! 큰 형님 같은 분이 이러니 미안함이 앞선다.
감독도, 배우도 치열하게 찍어야차량이 전북 김제를 지나 정읍을 향해 달렸다. 비가 그친 들판이 싱그럽다. 사방을 둘러봐도 그 끝은 산이다. 여기서 임 감독의 우리 강토 예찬론이 나온다. 그가 정감 어린 시골을 배경으로 <서편제>·<천년학>을 찍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 산하만큼 아름다운 곳이 없어요. 그게 다 예술이고 그림이에요. 정이 우러나는 산천이지요. 거기에다 정을 주고 보면서 (영화를) 찍어야 아름다움이 묻어 나옵니다.”
드디어 장성에 도착했다. 하늘은 여전히 흐렸지만 비는 그쳤다. 비구름은 백양사 쪽 백암산 정상을 휘감고 있었다. 지난해 6월 설치된 자신의 조형물을 유심히 살피는 임 감독. 감회가 새로운 듯 했다.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너무 크게 만들어 부담스러워요. 한 쪽에 조그맣게 했으면 나았을 걸….”
오른손에 <천년학> 각본을 들고 있는 모습의 조형물은 정회만 조선대 교수 작품으로 지난해 6월 세워졌다. 사람들이 많이 만져서인지 손과 뺨, 귀 부분이 반질반질하다.
영화를 100편이나 찍은 ‘국민 감독’ 임권택도 여러 가지 표정과 자세를 요구하는 사진기자의 요청에 어색해한다. 그래도 비가 그쳐서 다행이라고 하자 임 감독은 “비가 오면 운치가 더 있지요. 돌에 물기가 있으면 색깔이 튀지 않아 사진 색감이 더 좋게 나오거든”하며 웃는다.
“오늘 내가 배우가 돼 사진을 찍으며 또 한 수 배웠수다. (배우들이) 저렇게 찍힘을 당하는 데 (감독인) 내가 태만해선 안 된다고.”
임 감독은 자주 담배를 피워 물었다. 92년 <서편제>를 찍을 때 끊었는데 14년여 만에 그 속편 격인 <천년학>을 제작하면서 다시 피우게 됐다. 영화 제작이 은근히 스트레스를 많이 주는 작업이라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인생
60년대 “먹고 살기 위해 찍었다.” 주문 배수형 액션영화 제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전쟁과 노인>·<청사초롱> · <돌아온 왼손잡이> ·<상해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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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흥행 감독으로 등극 <장군의 아들>·<개벽>·<서편제>·<태백산맥>·<축제>·<창>…
2000년대 한국적 미 찾는 세계적 거장 <춘향뎐>·<취화선>·<하류 인생>·<천년학> |
사람은 다 자기 색깔이 있다 임 감독은 스스로를 워커홀릭(일 중독증 환자)이라 부른다. 그동안 100편의 영화를 찍으면서 밥 먹고, 잠 자고, 영화 찍다 보니 쉴 틈이 없었다.
92년 <태백산맥>을 찍을 준비를 하면서 집에서 연출보와 얘기하다 문득 TV를 켰다. 순간 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춘향제에 나온 한 후보의 클로즈업된 얼굴을 보고. 쌍꺼풀도 없고 썩 이쁜 얼굴은 아니지만 영락 없는 한국 미인이었다. 연출보에게 “쟤, 춘향으로 뽑히든 말든 <태백산맥>에 쓰자”고 말했다. 그녀는 춘향으로 뽑혔고, 배우로도 발탁됐다. 바로 배우 오정해다.
“태백산맥을 촬영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정부의 개입이 들어왔어요. ‘아직은 (지리산 빨치산을) 객관적으로 다룰 시기가 아니지 않느냐’며 노골적으로 압박을 가하더라고요. 결국 1년 쉬기로 했지요. 그해 대선에서 정권이 바뀌면 찍자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생각해낸 게 <서편제>랍니다. 마치 운명처럼 내 앞에 다가왔어요.”
판소리 영화? 흥행이 안 될 게 뻔했다. 그래도 꼭 한 번 찍고 싶었다. 운이 좋은 게 먼저 소리를 할 줄 아는 두 배우(김명곤겳읒ㅗ?가 있었다. 또 당시 태흥영화사가 임 감독이 영화사에 떠밀려 만든 <장군의 아들> 시리즈로 돈을 꽤 번 좋은 시절이었다.
“흥행할 영화가 아니다”라고 선언한 뒤 부담 없이 훨훨 나는 듯한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찍었다. 내심 5만 명만 봐줬으면 했다. 찍으면서 느낌이 좋았다. 93년 개봉하자 단관(서울은 단성사 한 곳) 상영에서 관객 100만을 넘는 대기록을 세웠다.
많은 배우와 함께 일한 임 감독. 특별히 아끼는 배우가 있을까?
“연기자는 누구나 다 자기 색깔이 있어요. 어느 한 가지 기준으로 평가할 순 없습니다. 자기 연기는 자기가 다 알아요. 그래도 역시 연기를 잘 하려면 먼저 작품을 제대로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연기자로서의 기본 자세가 중요하다는 뜻이리라. 문득 그의 눈을 보았다. 참 맑고 깊다. ‘저 눈에서 그런 영화가 나오나’란 생각이 절로 든다. 법 없이 착하게 사는 이웃집 아저씨 같다. 그러면서 몸 전체론 거역하기 힘든 강한 힘이 느껴진다.
100이란 숫자는 마감이 아닌 시작스무 살 때 영화사에 들어가 스물여섯 살에 감독으로 데뷔해 영화와 살다 보니 결혼이 늦어졌다. 부인 채령(본명 채혜숙) 씨는 모델 출신이다. 우리 나이 서른여섯에 만나 7년 넘게 사귀다 마흔넷에 결혼했다. 마흔다섯에 본 첫째 아들 동준(27)은 영화 제작일을 하고, 둘째 아들 동재(26)는 대학 연극영화과 졸업반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영화를 안 하려고 했는데 결국 같은 길을 걷게 됐어요.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렸지요. 내가 영화판을 아니까. 결과적으로 내가 원인 제공을 한 셈이 되고 말았지만…. 어떻게든 지들 힘으로 해 나가야지.”
그러면서도 영화에 빠져 자식들에게 잘 해주지 못한 점을 아쉬워 한다. 영락없는 우리네 부모 모습이다.
“내가 30대에 결혼했다면 얘들 키우며 지지고 볶는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을 거예요. 싫든 좋든 자기 경험이 영화에 들어갑니다. 체험만큼 확실한 게 없어요. 지(자기) 안에 없는 소리는 다 거짓말이에요.”
그는 영화를 철저하게 찍기로 소문났다. 81년 한국영화 최초로 베를린 영화제에 본선 진출한 <만다라> 이후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사계절의 자연을 배경으로 담는 게 많아졌다. 촬영 기간이 1년 정도로 길다. 남들은 서너 달이면 한 편 찍는데 말이다.
“내 영화라고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스테프들이 죽을 맛이죠. 자기 영화라고 생각하고 미쳐서 하니까 되지, 그렇지 않으면 작품이 안 돼요. 일하다 보면 감독이 뭐라고 안 해도 말단 조수나 조명보겷篤돎린?스스로 나서 ‘이것 다시 찍지요’라고 해요.”
이렇게 100편의 영화를 찍은 임 감독. 어떤 영화든 다 찍고 돌아서면 잊어버린단다. 하지만 지금 찍고 있는 영화는 500컷 아니 1,000컷이 넘어도 한 컷 한 컷을 전부 기억한다고. 그만큼 매 순간 열정을 다해 치열하게 영화를 만든다는 의미다. 칸 영화제 감독상과 영화 100편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101번 째 작품에 대해 묻자 “올해는 좀 쉬고 내년에 생각하려고 해요”라며 먼 하늘을 바라본다.
귀경길에 임 감독이 영화 찍을 때 가봤다는 매운탕 집에 들렀다. 젊을 적 소주를 참 즐겨 마셨다는 그는 반주로 딱 석 잔 들고 사양했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았어. 소주 참 좋은 술이죠. 그게 나쁜 술이었다면 난 벌써 죽었을 거야”라며 껄껄 웃었다. 풋고추에 물엿과 멸치, 간장을 넣고 조린 반찬이 맛있다며 한 접시를 더 시켜 먹은 그는 집에 가서 부인에게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단다.
천안휴게소에 잠시 멈췄다. 임 감독이 내리면서 뒷좌석 창문 옆에서 뭔가를 꺼낸다. 재떨이였다. 그는 재떨이를 말끔히 비운 뒤 화장실에서 물로 씻어냈다. 쉽지 않은 배려다.
세계적 거장과의 10시간에 걸친 시네마 여행은 넉넉하고 편안했다. 그러면서도 깊이가 있었다. 누가 이야기했던가.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맛이 느껴진다고. 칠순의 노감독은 동생 뻘 기자들이 탄 차량이 아파트 어귀를 돌 때까지 1층 입구에 서 있었다.
실명 쓴 국내 첫 학교 동서대 임권택영화예술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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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지난 6월 동서대에서 ‘천년학과 나의 영화 이야기’란 주제로 특강하는 임 감독. (우) 동서미디어센터에서 촬영 실습 중인 학생들. | | 부산 동서대가 지난 7월 말 단과대학으로 ‘임권택영화예술대학’을 신설했다. 영화과·뮤지컬과·연기과 등 3개 학과로 구성된 이 대학은 오는 9월 수시 2모집부터 신입생을 뽑는다.
국내에서 학교 이름에 실명(實名)을 쓰긴 처음이다. 그것도 창학자나 기부자가 아닌 어느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의 이름을 대학 명칭으로 정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그동안 국립대는 지역 이름을, 사립대는 창학 이념이나 설립자 아호를 써왔다.
물론 외국에 하버드대나 존스홉킨스대처럼 실명이 들어간 대학이 있지만 대부분 창학자나 기부자 이름을 땄다. 박동순 동서대 총장은 “한국 영화계에 큰 족적을 남긴 임권택 감독의 명예를 후세에 길이 남기기 위해서”라고 그 취지를 밝혔다.
임 감독이 동서대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06년 아시아 필름 아카데미(AFA·Asian Film Academy)의 교장을 맡으면서다. 이때 동서대에서 조명·촬영 기자재를 대 주었고 영화과 학생들이 자원봉사로 그를 도왔다. 임 감독은 8월 23일자로 동서대 석좌교수로 위촉돼 가을 학기부터 실질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한다. 이미 동서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강도 했다.
“여기 대학 시설이 세계 최고 수준이야. 학교 측 열정도 대단하고…. 뭘 하기로 결정하면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실행하는 점도 좋고요. 정말로 영화를 하고자 하는 인재만 와 준다면 해 볼만 할 거예요. 영화인으로서의 자질은 쉽게 드러나지 않아요. 잠재 능력을 지닌 젊은이들을 키운다는 게 큰 보람이 될 겁니다.”
충무로 ‘임권택 사단’ 영화인들도 대거 겸임교수와 강사로 강단에 선다. 촬영에 정일성 교수, 연기에 강수연·오정해·조재현 강사 등이다. 동서대는 9월 중 교내에 ‘임권택 영화연구소’도 설치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