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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쓴 시
황 금 찬
아래 마을 김삼수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마을 사이로 흐르는 내가 넘치게 되면
건너 마을로 가는 아이들을
업어 건너 주었다.
그것은 일 년도 아니고 하루만도 아니었다.
지금 그 내엔 신식다리가 놓이고
소낙비가 쏟아져도
물이 넘치지 않는다.
어느 날 오십이 좀 넘어 보이는
이 마을에 잘 어울리지 않게 보이는
양장의 한 숙녀가 찾아와
김삼수 할아버지를 찾았다.
『건너 마을에 살았습니다.
그 때 나이 아홉 살이었습니다.
아저씨는 나를 업고
세 번이나 냇물을 건너 주었습니다.
왠지 나는 그 때마다
세 번이나 아저씨의 목을
끌어안아 보았습니다.』
김삼수 할아버지의 무덤 앞에
갈매나무 한 그루를 심고는
빨간 손수건을 걸어두고
떠났다고-.
달
황 금 찬
누가 부르기에
문을 열었다.
자목련 가지에 걸린 달이 웃고 있다.
그는 옛 친구
고동제의 모습을 하고 다가오고 있다.
시집갔다 청춘에
눈을 감은
내 둘째 누님의 짚신 끄는 소리로
풀벌레가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자목련 가지는
달의 무게를 못 이겨
아래로 처져 있다.
내가 앞으로 더 나가자
달은 나뭇가지에서 저만큼 물러선다.
나비에게
최 은 하
너는 화사한 날개를 달았으면서도
그림자의 무게를 떨쳐버릴 수가 없구나.
언제나 스스로 떠올리는 종소리 따라
가벼이 음률로 파장지어 보지만
빈 하늘을 한 바퀴나
그 반쯤 원을 그리다 말 뿐
궂은 비 내리는 날은 예상치 못한다.
나는 너를 기를 줄 모른다.
너의 천성을 어떻게 알아낼 수 없기에
내 헤아림은 너를 가두거나
잡아맬 거미줄 이상의 무엇도 아니기에.
고운 목소리의 새가 되길 바라던
나의 꿈을 속죄하는 날
너는 훨훨 날아올라
네 하늘을 땅속에 깊이 다져 드넓히고 높여라
찬란한 날개짓 나비야
꽃술 가운데 취한 나비야.
그날, 바람 부는 날
최 은 하
나 돌아가는 날은
바람이 불게 하십시오.
나대로 어리석은 작정
마저 다 마치지 못했을지라도
시원한 바람으로 넘실거리게 하십시오.
몰아치는 바람으로 가볍게 하십시오,
하냔 텅 빈 골목 어정대고
바위산에 올라선
늦도록 고함을 지르다 돌아왔을지라도
내 떠나는 날은
한 줄기 바람 따라나서 휘날리게 하십시오.
그 누구라
내 몇 차례나
고이 마주한 적이 있습니까.
언제나 손아귀엔 흥건히 진땀 뿐이었습니다.
나이를 곱할수록 바꿔 쓰는 경이의 안경이었습니다.
눈이 아득해지고 잠귀가 밝아지는 까닭도 알아채졌습니다.
세상은 지극히 순조로움입니다.
살아서 반문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마지막 한 마디는 남겨 놓아야지요.
며칠째 마구 바람이 불어제치는 날
그 가운데 날에 바람의 숲으로
그림자 거두어 떠나고 싶습니다.
그날도 여간이나 바쁘겠지요.
찢긴 깃 폭과 함께 휘날리다가
회오리바람으로 오르고 싶습니다.
오르고 떠올라서
다시는 내려쳐지지 않길 기원합니다.
콩나물 가족
황 송 문
봄이 오기 전
매화꽃이 피기 전
꽃샘바람이 시베리아 바람을 흉내 내느라
지평선상, 휑하니 열린 들녘을
휩쓸고 지나가거나 말거나
가족은 초가삼간 오순도순 콩나물을 길렀다.
할머니도 어머니도 누이들도
잠에서 깨어나면 표주박으로
옹배기에 고인 물을 떠서는
콩나물시루 위에 쪼르륵 쪼르륵 부었다.
어머니가 새벽마다 길어오시던
향나무 생 울타리 가의 샘물을 퍼붓고 나면
물방울은 휘몰이로 뚝뚝뚝 떨어지다가
잦은 몰이로 뚜둑 뚜둑 떨어지다가
중중몰이로 뚜욱 뚝, 뚜욱 뚝―
중몰이로 뚜욱 뚜욱 뚜욱―
진양조로 뚜우욱 뚜우욱―
기다림이 그리움이 되어 물의 종교로 자랐다.
초가집이나 기와집 밖에서는
몸서리치게 꽃샘바람이 불어도
장작불 지나간 구들의 윗목에서는
콩나물들이 깨소금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었다.
사람을 찾습니다
황 송 문
사람을 찾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민심을 외면하는 대통령도, 당리당략에 날 새는 줄 모르다가 실성실성 미쳐버린 국회의원도, 제 부모와 형제자매를 외면하고 사지로 끌려가게 하는 외교관도, 제 뱃속만 채우는 귀족노동자도, 따끔하게 나무라고 종아리 걷게 하여 회초리로 피가 질질 나게 때릴 수 있는 그런 다스림의 아비가 우리나라에는 없습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 되었습니다. 요직이라는 요직은 생선을 고급스럽게 뜯어먹는 자리올시다. 허가 낸 도둑놈들의 자리올시다. 이제는 국민의 세금을 맡길 데가 없습니다. 주인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종놈이올시다. 종중에서도 대책이 서지 않는 인간 말종이올시다. 말이 좋아 인간이지 개만도 못한 말종이올시다. 개는 도둑에게 짖고 주인에게 꼬리치지만, 이건 도둑에 꼬리치고 주인을 물어버리는 말종 중의 말종이 올시다.
우리나라는 분단이 되었지만, 농사지을 땅 한 뙈기도 없는 나의 아버지는 농부다운 농부였습니다. 자기는 굶주려도 자식에게는 먹였고, 자기는 헐벗어도 자식에게만은 입혔으며, 자기는 못 배워도 자식에게만은 배우게 하려고 해마다 도로변의 또랑농사를 지었습니다. 물이 벙벙한 또랑에다 모를 심을 때 종아리에 들어붙어 피를 빠는 거머리는 삐쩍 마른 장단지의 가난한 피를 포식하고서야 떨어졌습니다.
거머리에게 피를 빨리면서도 자식농사 지어보려고 알탕갈탕 또랑논에 돌을 건져내고 모를 심는 아버지, 가을에는 참새들이 다 빨아먹고 쭉정이만 남은 것을 그래도 농사라고 애지중지 베어 들여서 달밤에 훑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대한민국에는 눈을 씻고 봐도 없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보셨습니까?
이제 사람을 찾습니다. 나의 아버지를 닮은 그런 사람을 목마르게 찾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대통령이건, 국회위원이건, 외교관이건, 붉은 조끼 입고 하늘에 주먹 들이대며 데모하는 무리 가운데서라도 발견하신 분이 계시면 연락 주십시오. 꼭 후사하겠습니다.
사막에서
김 년 균
사막에 갔다.
마실 물도 앉을 자리도 기댈 언덕도 없고
가시뿐인 햇볕 잠시 데려갈 그늘도 없는 그 곳에,
하루도 놓지 않고 몸을 감추고 문을 닫고 울을 쳐서
구름에 뜬 마음조차 드나들 수 없는 그 곳에,
칼을 든 바람이 길을 막고 하늘은 눈을 가리고
누군가 지나간 조그만 발자국 하나 없는 그 곳에,
사납고 음흉한 자들도 겁에 질려 벌써 돌아서고
그 흔하게 널린 눈빛 하나 보이지 않는 그 곳에,
아무리 기다려도 티끌만큼 기척이 없는 그 곳에,
해는 화난 듯이 눈 부릅뜨고 시간은 오직 뒷짐만 지고
신이 밟아도 죽지 않는 질경이풀도 남지 않은 그 곳에,
깊은 숲 거느리고 어디선가 길을 뚫는 병기를 들고
기어이 다가오는 의로운 사람 하나 없는 그 곳에,
억울한 원혼들의 아우성소리 귀청을 때리고
죽음의 연기만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 곳에,
그 사막에서 돌아왔다.
다시는 머물 수 없는 그 슬픈 곳에서,
이제는 숲이 되어, 어둡고 가파른 세상 뜰에
널따란 길을 놓는 큰 나무 되어,
남몰래 언덕에서 축배를 들었다.
그러나 어인 일인가.
예전엔 왜 알지 못했는가.
여기도 사막이었다.
모양만 다를 뿐,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사는 곳은.
생각의 차이
김 년 균
꽃과 짐승은 돈만 가지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
돈만 주면 맘 드는 대로 골라잡으며 살 수 있다.
돈 가지고도 살 수 없는 물건이 과연 있을까.
그러나 사람의 마음만은 그렇게 살 수 없다.
그랬다간 벼락 맞는다. 벼랑 아래로 떨어진다.
아들이 연애한 탓에 선도 못보고 며느릴 맞았다.
마음의 깊이야 알 수 없지만, 외양은 금방 알 수 있는지,
키가 작다느니, 몸이 약하다느니, 눈이 예쁘지 않다느니,
남의 것은 보석도 돌로만 보이는지, 예의조차 저버리며,
사람들은 눈을 맞추고 입을 삐죽거리며 수군댄다.
나 역시 덩달아서 그들의 불평 속으로 빠져든다.
과연 그런가, 내 며느리가 보석이 아니고 돌이란 말인가.
여러 날이 가도록 불안은 가시지 않는다.
어찌해야 좋을지 궁리하다 아차 하고 무릎을 친다.
며느리가 아니라 딸이라고 하자, 생각을 바꿔 보자,
그러자 얼음이 녹듯 마음이 풀리기 시작한다.
탐탁지 않아 보이던 일도 이젠 그렇지 않고,
하는 일도 차츰 기특해지고, 하는 말도 고와 보이고,
작은 키조차 오히려 아담하고 우아해 보인다.
며칠이 더 지나니, 귀엽지 않은 것이 별로 없다.
아이쿠, 귀여운 내 딸 누가 밉다고 했지.
사람은 동물과 달리 생각을 달고 산다.
생각은 몸보다 천 길 앞서 간다.
생각이 깊으면 큰 길이 보인다.
호수가의 풍경
최 창 일
호수는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쉴 곳 되어
빈 자리 내어줍니다.
늘 흐르면서 한결같이
가장 낮은 자의 겸손을
노래합니다.
호수는 사람 사는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다정한
목소리를 하나씩 들려줍니다.
산 그림자 하나둘 잠기는 밤이면
호수는 그날의 풍경들을 어머니가 들려주는
옛이야기처럼 나에게 풀어놓습니다.
하늘과 내 마음이 안기는 그곳
잠든 행복을 깨어 주는 그곳
가누지 못한 그리움도 흘러 보내는 그곳
나 살아온 내 인생의 나이테도
여기 호수에 부려놓아서 아름다운 무늬 되고
사랑의 노래되어 호수가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오래도록 기억되고 싶습니다.
팝콘 하늘에 놀다
최 창 일
겨울나무 끝에 떠 있던
까치집에 경사가 났을까
벚꽃이 팝콘 파티를 열었네.
밤 빗소리 잠 이루지 못하고
달빛 벚꽃 보니
팝콘 하늘
극장의 팝콘은 연인들
따뜻한 손 기다리고,
창경원 벚나무에 메달린
팝콘은 연인들 눈길에 웃는다.
팝콘 하늘에 내 마음 놀다
팝콘 하늘에 그대 마음 놀다.
무지개를 찾아서
이 오 장
토함산 비탈길 오르며
금강송에 내걸은 무지개
휘젓는 옷깃으로 흐뜨려버리고
몇 글자 외우던 부처의 말씀
돌부리에 부딪쳐 잊어버린다.
골짜기 가득한 나무는
제 각기 차지한 자리에서 하늘 향하고
이리저리 날으는 새들
다른 소리 내어도 알아듣는 산길
푸른 물빛으로 번져 출렁이는 바람결
감포 앞 바다 쪽으로 풀어놓고
성큼 올라선 석굴암 감실에서
손 모으고 귀 기울이다가
내 숨소리만 듣고 내려온다.
바다로 내달리는 산줄기가
파도와 만나 피워 올리는 무지개
풀어진 어깨 위에 걸치고
계단을 헤아리며 새 길을 찾는다.
왕릉은 말한다 ∙ 7
-단종 장릉
이 오 장
왕방연이 갔구나
산 고개 넘어가며 불러주던 이별가
휘돌아진 동강물이 삼켜버리고
강물위에 어린 소나무 그림자도 높은 울타리 되어
한 발짝 가지 못하게 하는 나를 두고
말방울 떼어버린 체 가고 말았구나.
태어난 다음날 어머니 여의고
책 한권 외우기전에 할아버지 잃은 내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자리 지키지 못해
산짐승이 지키는 골짜기에 갇혀
이름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군사들에 끌려 떠나오던 날
처마 뒤에 숨어 울던 신하들과
청계천 다리 통곡으로 흔들던 왕후는
이곳이 어딘지 알고 있을지.
아무리 고함질러도
내 목소리만 들리는 여기가 대체 어느 땅인가
이대로 새가 되어 날아가면
부모님 곁에 가 닿으려나
날개 펼치려고 뛰어오르다가
그 자리에 쓰러져 숨이 멎거든
나를 강물에 띄워주오
흘러흘러 아무도 모르는 곳에 멈추면
혼자서 내 이름 부르며 살겠노라.
마른 꽃
유 회 숙
한 줄은 보랏빛 스타티스
한 줄은 안개꽃으로
편지를 쓴다
시간이 이만큼 흐른 후에
한 사람에게
그에게서 받은 편지
눈부신 장미 꽃다발
우표처럼
연보랏빛 리본이 달려 있다
모딜리아니의
목이 긴
푸른 꽃병에
마른 꽃을 장식한다.
개구리밥
유 회 숙
비를 맞는다. 사막에서 폭우를 기다리는 갈증처럼, 어둠 속에서도 꼭 쥐고 있었던 생각 가물가물 꺼져가는 심지 끝에 촛불 같은, 어쩌면 슬픈 향기를 품은 한 톨의 씨앗이다. 물을 딛고 아른아른 봄의 적막을 깨운다.
따뜻했다. 한 겹 한 겹 얼음 알갱이며 어둠이며 훌훌 털어버리고 새벽안개 피어나는 봄물 속으로 텀벙,
소쩍소쩍 소쩍새 울음 봄을 건너다닌다.
꽃은 어떻게 피는가
정 희
고요한 거울
마침내 동백나무에 불꽃이 튄다.
남해의 푸른 바다가 빨갛게 물들어
떨며 열리는
작은 면경 세계
아직 이른 잠에서 깨어난
아침 해는
일제히 터뜨리는 함성
물결따라 꿈틀대고
황홀한 절정으로
내 거울을 밝히는
동백꽃
늙은 시계수리공
정 희
남대문 시장 시계 골목
작은 시계수리점 남일사
한 평 남짓한 골방에 개구리눈으로 툭 불거져 나온
돋보기 시계수리공 김씨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에 육순을 훌쩍 넘기고
고장 난 시계를 오늘도 만진다.
낡은 시계들이 꼬리표를 달고
먼지 속에 쌓여 있다.
시계줄이 그를 꼭 잡고 있다.
고향마을 허교장
오 정 수
어릴 적 고향 갯마을 분교 허교장은
보통학교도 간신히 졸업했다는데
교장 선생님이 되고보니 희한한 일이라고들 수군거리고
유난히 배를 내밀고
벗겨진 이마에 지팡이 휘두르며 걸어가면
아낙들은 별꼴이라 하였네.
허풍이 센데다가
정치이야기에 열변을 토하고
게다가 바람둥이인지라 누가 뭐라면
영웅호색이라고 둘러대기 일쑤였다네.
어느 날 찾아가보니
우거진 잡초 속에 돌담 담쟁이는 웃자라 뻗었고
허교장은 큰 수술 받아
딴 사람 되어있었네.
육지로 떠난 자식들은 소식 끊긴지 오래고
이젠 양지쪽에 나앉아
오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말 걸어보기도 하고
때론 수협창고 너머 먼 바다만 바라보더니
그이 장사 치르는 날
때 아닌 비는 억수로 쏟아지고
돌아오는 길
마을사람들은 장사 한번 힘들게 치뤘다고들 입을 모았네.
산사에 찾아 온 고라니
오 정 수
노송 우거진 큰 바위산 아래
조그만 암자
새벽녘 솔가지 꺾이는 소리 들리고
못 다한 설법인양
아직도 잔설은 내리고
눈밭을 지나 법당에 오르는 스님
어느새 들어 왔는지
잿밥 알갱이 입에 문 산새
불상머리에 앉았고
법당언저리 눈밭엔 짐승 발자국
지난 해 덫에 걸린 고라니 함께 지내다
풀어놔 산중으로 떠나보낸 후
이따금 내려와 고수레밥 치우곤 하더니
요즈음 보이질 않네.
계곡은 꽁꽁 얼고
봄은 아직 먼데
또 다시 강설이 몰아치던 그믐께 밤
아궁이 군불지피다 정지문 흔드는 소리
새끼와 함께 온 고라니 문 밖에 서있네.
벽
송 선 애
화사한 벽지 안에
응고된 시멘트가 방패처럼
완강히 못을 거부하고 있다.
세상에는
못으로 뚫을 수 없는
견고한 어둠이 깔려있다.
인력시장의 근로자와 전과자에
신용불량자 꼬리표가 붙으면
어깨는 더욱 처지고
나락으로 떨어져 내린다.
별을 헤아리던 밤이 어제인가
어둠에 길을 잃어
북극성을 찾아 나서지만
굳게 닫힌 성문처럼
가슴을 열지 않는다.
분갈이
송 선 애
화분 밖으로 뻗어 나온
한 움큼의 초록 목숨들
꿈의 이주를 기다리고 있다.
덕지덕지 붙은 잡념들의
줄기를 들어올려
홀가분하게 털어낸다.
발돋움하는 날개
낯가림하는 꿈길에 접어두고
이따금 뒤를 돌아본다.
거미줄에 붙들린
곤충이 되지 않겠다는 듯……
퇴근길에 내리는 눈
박 기 동
봄을 재촉하는 2월
눈 내린다
사거리 자동차들
앞으로 또는 후진
빙글빙글 속도계가 없다.
펑펑 내리는 눈
옷깃 여민 내 안으로
파고들며
할머니 생각만큼 쌓인다
발자국 남기지 않으시고
저 눈을 따라
할머니 돌아가신 날
오늘처럼 눈이 내렸다.
이런저런 생각을 짚고
당당히 살아온 오십년 주마등
... ...
앞뒤에서
빵~빵
사정없이 울리는 경적소리
자존심 푹! 꺾이고서도
가벼워진다. 눈처럼
자화상(2)
- 외고집
박 기 동
제복을 입지 못하는 사내
머리숱이 유달리 거울을 가리우고
철지난 외투깃을 치켜올린 사내여
혹 남들은
너를 다정다감하다 말하였으리.
아내여
나는 제복을 입거나 결코 벗질 못해
나를 내 속에 가두어 두고 있나니
결코 탓하지 마라.
봄맞이
이 병 훈
지난 겨울 내건 간판을
매섭게 쏘아 보던
옆 가게 마담의 눈초리가
한풀 꺾인 듯하다.
한파를 이겨내고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던
단골손님들이 골목에서
웅성거리고 있다.
다소곳하던 동백도
새파란 이파리 사이로
봉곳한 꽃망울을 내밀고
립스틱을 짙게 발랐다.
오시는 봄 손님에게
눈길을 끌려는지……
소(牛)
이 병 훈
깊은 밤 외양간에서
큰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지난 일들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무엇이 크게 잘못되었는지
가끔, 머리를 흔드는 워낭소리
무겁게 쩔렁거린다.
짐을 지고 언덕을 오를 때나
전답을 갈아엎을 때
힘을 아꼈다고 생각하는지
스스로 채찍질을 하듯
끊겼다 이어지는 소리……
밤이 깊어 갈수록
식어가는 구들장에 피로를 재우고
자식을 심하게 야단쳤다 싶었는지
고단한 경운기 소리처럼 코를 골다가도
아버지는 길게 한숨을 내 쉬셨다.
몇 번인가 입을 오물거리시더니
묵은 빚을 청산하시겠다는 듯
어금니를 힘주어 깨무셨다.
이제 다시는 볼 수가 없는데
저승에서도 쟁기질을 하고 계실까
아직도 철들 줄 모르는 자식 때문에,
겨울나무
최 연 숙
지난 밤 찬바람에도
가지마다 하늘 향하여
맨 몸으로 우러른다.
잎새는 멀리 떠나지 못하고
떨어진 자리 맴돈다.
잃어버린 옛 이야기 찾아
길 위에서 뒹굴다가
제 발치에 쌓인다.
푸르던 날 어우르던 새들 떠나가고
한겨울 바람소리 내달리는 언덕에
깃털 하나 내려앉는다.
나무는 바람에 휘감기며
봄날을 기다리는 제 자리에서
하얀 길을 내다본다.
가로등과 달맞이꽃
최 연 숙
서녁 하늘에 노을이 물들기 시작하면
대문 앞 가로등 아래
달맞이꽃이 피어나네.
불어오는 미풍에 깜박이더니
어둠 속에서 헤매다
남쪽으로 떠나며 산 넘고 넘었네.
빛을 삼킨 골목길 더듬거리다가
담벼락에 부딪칠 때 마다
시간은 정지된 듯싶었고
창문 흔드는 바람 소리에
서둘러 커튼 드리우고 안경 벗었네.
내 발걸음만 비추던 가로등불빛
온 동네 환하게 밝히어
골목마다 무수히 피어나고 있네.
밤이 깊어지고 더 또렷해지는 자태로
향기 피어 올려 새벽을 밝히네.
첫댓글 이번달 낭송작품 올림이 늦었사옵니다..거랑의 게으런 탓이옵니다..그래도 3월달 작품속에 김년균 시인님의 사막에서는 가슴이 탔습니다..문협이사장님 늘 좋은 일 생기시길..그리고 발전을 빕니다.. 허구요 <왕릉>시집을 상제하신 이오장 총무님의 부지런함에 박수를 보냅시더..짝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