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신춘문예 당선시를 올립니다.
울님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1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발레리나
최현우
부슬비는 계절이 체중을 줄인 흔적이다
비가 온다, 길바닥을 보고 알았다
당신의 발목을 보고 알았다
부서지고 있었다
사람이 넘어졌다 일어나는 몸짓이 처음 춤이라 불렸고
바람을 따라한 모양새였다
날씨는 가벼워지고 싶을 때 슬쩍 발목을 내민다
당신도 몰래 발 내밀고 잔다
이불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듯이
길이 반짝거리고 있다
아침에 보니 당신의 맨발이 반짝거린다
간밤에 어딘가 걸어간 것 같은데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돌았다고 한다
맨발로 춤을 췄다고 한다
발롱*! 더 높게 발롱!
한 번의 착지를 위해 수많은 추락을!
당신이 자꾸만 가여워지고 있다
*발레의 점프 동작
최현우: 1989년 서울 출생, 추계예술대 문창과 4학년 재학 중
[심사평]
발뒤꿈치 들고 도약을 시인이여, 더 높게 발롱(점프)!
매일 홍수처럼 쏟아지는 광고의 말과 현란한 드라마 대사 속에서 시가 나아갈 길은 더욱 분명해 보인다. 꽃·별·구름·사랑과 이별, 버려진 구두 한 짝, 창문의 덜컹거림, 전화기 속의 흐느낌… 등을 질료 삼아 늘 그래 왔듯 묵묵히 시를 쓰는 것. 황지우 시인은 "시란 금방 부서지기 쉬운 질그릇인데도, 우리는 그것으로 무엇인가를 떠 마신다"고 하였다. 갑갑한 소화불량의 사회에서 시는 더욱 예민해졌고 더욱 갈급한 형식이 되었다.
이번 본심에 오른 작품 중에서 송민규의 '곰팡이로 만드는 바람소리'外, 조창규의 '불안한 상속'外, 서문정숙의 '시간여행자들'外, 최현우의 '발레리나'外를 주목해 읽었다. 위 응모작들은 대체로 어느 정도 수준의 기량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새로운 시인으로서 외침은 있되 아직 그 울림이 뚜렷하지 않고 자기만의 웅얼거림에 갇혀 있는 듯했다.
고심 끝에 최현우씨의 '발레리나'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발레리나'는 '한 번의 착지를 위해' 거듭 삶을 연습해야 하는 발레리나의 내면을 잘 그려내고 있다. 특히 시에서 계절로부터 '부슬비'의 가는 발목을 발견하거나 바람으로부터 '사람이 넘어졌다 일어나는' 원시의 무용을 발견하는 응시의 시선이 돋보인다. 발레는 발뒤꿈치를 들고 돌거나 도약과 착지를 거듭해야 하는 고된 춤이다. 시도 이와 다를 게 무어랴. 당선자는 오래 습작기의 열정을 내려놓지 말기 바란다. 새로운 시인에게 시가 발롱! 더 높게 발롱!
심사위원 : 김혜순, 송찬호
----------------------------------------------------
201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오리시계
이서빈
겨울, 오리가 연못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녁이면 다시 걸어 나온다.
연못으로 들어간 발자국과 나간 발자국으로 눈은 녹는다. 시침으로 웅덩이가 닫히고, 방수까지 되는 시간들.
오리는 손목이 없는 대신 뭉툭한 부리의 시간을 가지고 있어 무심한 시보(時報)를 알린다. 시침과 분침이 걸어 나간 연못은 점점 얼어간다.
여름 지나 가을 가는 사이 흰 날짜 표지 건널목처럼 가지런하다.
시계 안엔 날짜 없고 시간만 있다.
반복하는 시차만 있다.
오리 날아간 날짜들, 어느 달은 28마리, 어느 달은 31마리
가끔 붉거나 푸른 자국도 있다.
무게가 덜 찬 몇 마리만 얼어있는 웅덩이를 보면
손목시계보다 벗어 놓고 간 시계가 더 많을 것 같다.
결빙된 시간을 깨면
수 세기 전 물속에 스며있던 오차들이
꽥꽥거리며 걸어 나올 것 같다.
웅크렸던 깃털을 털고
꽁꽁 얼다 풀리다 할 것 같다.
오늘밤 웅덩이는 캄캄하고
수억 광년 연대기를 기록한 저 별빛들이 가득 들어있는 하늘은
누군가 잃어버린 야광 시계다.
이서빈 :1961년 경북 영주 출생.한국방송통신대 국문과 졸업
심사평 : 오세영 시인, 장석주(글) 시인
이담하 조상호 정지윤 성지형 유준상 김본희 임수현 문희정 임승훈 이인숙 이서빈, 열한 분의 시가 본심에 올라왔다. 첨단과 전위는 없었다. 열린 감각, 언어 감수성, 시를 찾아내는 촉(觸) 같은 시의 기본 재능을 갖춘 시들이다.
이인숙의 ‘갈대모텔’, 임승훈의 ‘순종적인 남자’, 문희정의 ‘몽유 이후’, 임수현의 ‘노곡동’, 이서빈의 ‘오리시계’를 최종 결심작으로 골랐다. ‘갈대모텔’은 깔끔한 서정시다. ‘흔들리는 것들은 흔들리는 것들을 잠재우고/흔들림에 기대어 다시 일어선다’라는 시구 정도는 예사로 쓸 수 있는 시인이다. 다만 갈대숲을 새들과 바람의 모텔로 본 발상이 평이했다.
‘순종적인 남자’는 낯선 이미지들을 엮고 시공을 확장하는 재능이 놀라웠다. 큰 재능의 잠재성을 확인했지만 조탁(彫琢)이 더 필요하다.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유기적 관련도 느슨했다. ‘노곡동’은 홍수 속에 내팽개쳐진 이들의 시련을 따뜻한 관조와 유머에 버무려 시로 써냈다. 유머는 이 시인의 장점이다. 더 좋은 시인이 되기 위해 사유의 입체성을 갖추시길.
‘몽유 이후’는 성장통을 다룬 시다. ‘쥐젖이 돋아난 어머니의 팔 안쪽을 더 이상 만지작거리지 않았다’같은 시구처럼 체험의 구체성이 도드라졌다. 안정되었으나 화법이 새롭지는 않았다. 사유의 도약이 필요하다. 고심 끝에 심사위원들이 당선작으로 선택한 것은 이서빈의 ‘오리시계’다. 완결미가 상대적으로 돋보였다. 놀랄 만큼 새롭지는 않지만 발상이 천진하고 관찰력이 좋았다. 삶과 세계를 아우르는 교향(交響)이 있고, 특히 우주 시공을 한 점 구체적 사물로 전환시키는 마지막 연이 좋았다. 신기성(新奇性)에 쏠리고 감각의 착종에 매달리는 시류에 휩쓸려 재능을 낭비하지 않고 자기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
2014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단단한 물방울
김유진
참 단단한 물방울이라 여기면서, 밤을 깐다
복도가 나오고 수많은 문이 보인다
벌레는 아주 가끔씩 빛처럼 부서졌다
그때 흔들린 손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한 말을 다시 반복하는 뉴스는 보았다
나는 물을 마신다 물이 흩어진다 수많은 문이 열린다
흩어진 수많은 껍질을 문이라 할 수 있을까
참 단단한 물방울이라 여기면서
윗부분 중간을 칼집 내어 잡아당긴다
형광등은 자주 깜박거렸다
천장 한쪽 구석에 거미줄이 불빛에 걸려 움찔하면
아무도 없을 때 더 시끄러워지는 나는
그동안 꾼 꿈과 마주치고 다양해진다
초인종이 울린다 나는 다시 한 곳에 모인다참 단단한 물방울이라 여기면서
거울을 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어본다
웃음이 길게 늘어지며 읽을 수 없는 표정들이 지나간다
냉장고에 붙여 놓은 명언들이 노랗게 바래지고 있다
자주 삶은 베갯닛과 닮았다
인쇄해두고 한 번도 가지 않은 여행지를 자꾸 머리 속에서 내몬다
종이를 본다 얼룩진 곳이 단단하다창문 위에 물방울이 가득 맺혀 있고
방에서 물방울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약력=1963 년 서울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수료
[심사평]
온건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일상의 풍경 자아내
신춘문예 투고시가 두 켜로 나뉜 지는 오래다. 어느 정도 수준을 갖춘 소수 전문시와 흔한 생활시 다수가 그들이다. 그만그만한 표현력을 갖춘 전문시는 우리 사회에 시를 꾸준히 학습하는 이가 적지 않다는사실을 알려 준다. 생활 감각을 담아낸소박한 생활시 또한 문학이 삶의 중요한 취향문화임을 한결같이 일깨워 준다.
문제는 이런 속에서 눈을 번쩍 뜨게 할 만한 작품이나 새로운 시도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적당한 수준의 언어감각을 바탕으로 소극적인 표현성에 머문 작품이 대종이다. 올해 투고 시 또한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뽑는 이의 손에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셋이었다. 조유희의 '고양이의 대화법', 김태형의 '비 내리는 공단', 그리고 김유진의 '단단한 물방울'이 그들이다.
'고양이의 대화법'은 고양이를 대상으로 삼은 날렵하고도 예각적인 인상화다. 글감으로서 흔한 고양이를 시인 나름의 신선한 서정 공간으로 감싸고자 했다. 표현주의 적인 필치까지 겨냥한 역량이 뛰어났다.
거기에 견주어 '비 내리는 공단'은 우리 사회의 가장자리 풍경에 대한 집중적인 응시가 빛나는 작품이다. 대범한 수사로 그려 담은 날카로운 현장성은 시인의 넉넉한 뒷심까지 엿보게 한다. 앞서 가는 삶보다 뒤서는 삶이 차라리 건강할 수 있음을 일깨워 주는 시다. 그럼에도 두 편 모두 당선작으로 밀기에는 완성도가 떨어졌다.
'단단한 물방울'은 방에 앉아 밤을 까는 가벼운 일상을 독특한 상상적 직조술로 즐긴 작품이다. '고양이의 대화법'처럼 표현성을 극도로 좇지도 않았고, '비 내리는 공단'과 같이 현실의 무게에 표현이 밀리지도 않았다. 그만큼 온건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풍경을 자아낸 셈이다. 이 작품이 지닌 나날살이에 대한섬세한 상상력은 아무나 넘볼 경지가 아니다. 함께 보낸 '핀셋' 또한 좋은 작품이었다. 당선작으로 밀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두어 군데 막연한 진술이 흠을 키웠다. 따라서 뽑는 이는 김유진의 '단단한 물방울'을 즐겁게 당선작으로 민다. 힘차게 날아오를 앞날을 기대해도 좋으리라. 더욱 가혹한 말의 형벌 속으로 쉼 없이 내려서기 바란다.
심사위원 ; 김명인 박태일 최영철 시인
-----------------------------------------------------------
한국일보 2014년 신춘문예 당선작
대화
김진규
메마른 나무옹이에 새 한 마리가 구겨져있다
다물어지지 않는 부리 위를 기어 다니는 어두운 벌레들
작은 구멍에 다 들어가지 않는 꺾인 날개가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들의 그림자를 쓰다듬고 있다
누군가가 억지로 밀어 넣은 새의 몸을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나도 분명 그런 적이 있었을 것이다
어울리지 않았던 것들의 속을 채워보기 위해
아귀가 맞지 않는 열쇠를 한 번 밀어 넣어 보듯이
혼자 날아가지도 못할 말들을 해본 적이 있었을 것이다
둥근 머리통을 한참 보다가 눈이 마주친다
이쪽의 눈과 저쪽에 있는 새의 눈이 마주치자,
여태껏 맞아본 적 없는 햇빛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머리통이 간지러워져서,
나도 어딘가 머리를 드밀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방에서 방으로 옮겨갈 때의 걸음을 생각해보니
나는 언제나 이곳과 저곳의 국경을 넘는 사람인 거 같아
누워있는 사람의 말을 대신 전할 때
구겨진 새의 몸을 손으로 감싸서 누구한테 내밀 듯
나도 어떤 말인지 모를 말들을 했던 것 같아
새의 부리가 날보고 웅얼거리는 것 같아서
내 귀가 어쩌면, 파닥거리다가 날아갈 것 같아서
나무옹이를 나뭇가지로 쑤신다
좀 더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라고
삼키지 못할 것들을 밀어 넣듯이 밀어 넣는다
<<김진규 시인 약력>>
*1989년 경기 안산 출생.
*안양예고 문예창작과 졸업. 경희대 국문과 4학년 재학
-------------------------------------------------------
2014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알
박세미
처음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른다
지나가던 개가 아무렇게나 싸놓은 똥처럼
거기엔 무단 투기 금지라고 쓰여 있었는데
나는 당당했지
버려진 적 없으니까
어느 날 거기 옆에 쪼그려 앉아 말했다
누가 널 낳았니
이름이 없어 좋겠다
털이 있다는 건 위험한 일이지
정체가 발각되는 것이니까
집을 나오는 길
두 발이 섞이는 것 같았다 그 다음엔 얼굴과
머리카락이 엉키고
몸의 구분이 모호해질수록
흩어져 있던 영혼의 조각들이 뭉쳐질수록
나는 아무렇게나 던져진 쓰레기로 완성되었다
처음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른다
아무도 내 정체를 모르고
아무도 나를 분류하지 않는 곳
껍질을 깨고 안으로 들어간다
자, 이제 신앙에 대해 말할 수 있지
바깥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
한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것
욕조 안으로 들어가면
반쯤 잠기는 몸
최초의 기분은 여기에 있지
출렁인다
다리 하나가 기어나간다
심사평
"세계를 향한 끝없는 질문과 대화의 자세 돋보여"
본심에 올라온 10명의 작품은 예심위원들의 젊은 안목 덕분에 정형화된 신춘문예 스타일과는 다른 개성적인 목소리가 많았다. 그래서 우리의 심사는 한 편의 ‘잘 빚어진 항아리’를 선택하기보다는 세계에 대한 ‘개성적 독법과 화법’을 찾아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여러 번 읽는 과정에서 수사적인 표현에만 의존한 시, 지나치게 관념적인 시, 낯익은 발상에 머물러 있는 시 등이 우선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남겨진 것은 박세미, 김잔디, 이현우의 작품이었다.
김잔디의 시는 이미지를 조형해 내는 솜씨가 섬세하고 감각적이라는 점에서 호감이 갔다. “풍경을 의심하는 초식동물의 눈은 까맣다”라든가 “우유곽 바닥을 훑는 빨대 소리에 놀라 수목은 뿌리를 내리고” 등 매력적인 구절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행과 이미지들이 파편적인 아름다움을 넘어 뚜렷한 구심을 형성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이현우의 시는 상상력이 활달하고 다양한 소재를 유니크하게 소화해 낸다는 점에서 범상치 않은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여겨졌다. 실러캔스, 달의 착란, 손금의 태계, 프로토아비스…. 그는 무엇이든 시로 만들 수 있지만 어떤 시에도 자신을 전폭적으로 걸지는 않는 것 같다. 이 소재주의적 경향이 그의 유창함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망설이게 했다.
박세미의 시는 간결한 언어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증폭시켜 내는 특유의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비극적 인식을 경쾌한 어조로 노래하는 그는 시적 대상의 슬픔과 고통을 진부하지 않은 방식으로 끌어안는다. 당선작인 ‘알’에서도 버려진 존재들에 대한 상투적 연민이 아니라 “껍질을 깨고 안으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새로운 난생설화를 탄생시킨다. 화자의 교체나 장면의 전환을 자연스럽게 구사하고, 행과 연을 조율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세계를 향해, 바깥을 향해, 끝없이 질문하고 대화한다. 그 질문과 대화의 자세로 오랫동안 좋은 시를 쓸 것이라 믿고, 또한 지켜볼 것이다.
심사위원 : 나희덕(시인), 황현산(문학평론가)
-------------------------------------------------------
2014년 대구매일 신춘문예 당선작
옹이
박주용
난다 냄새 난다 나는 내가 긁어 부스럼이라 냄새 난다 나는 나를 날린 셈인데 냄새 나는 나는 나는 새에게도 냄새 난다 냄새는 냄새를 전이시켜 새똥 싼 내 하늘도 냄새 난다 냄새는 자꾸 가려워 구름을 비벼대는 것이어서 충혈 된 내 먹구름도 냄새 난다 소나기 한 줄금 쏟아내면 냄새가 사라질 것이란 기대는 금물 사납게 짖어대는 내 번개가 아직도 그 속에 눈이 번쩍 도사리고 있어 크릉크릉 냄새 난다 아귀를 맞추어 장미꽃을 밀어 올리던 내 거미줄에도 말 달리며 방방 뛰던 꽃물이 남아 있기는 마찬가지 옹헤야 냄새 난다 어절씨구 냄새 난다 소리 높여 노래 부르기는 시기상조 이제는 내가 나를 더불고 슬금슬금 거문고를 타야 할 때 내가 나를 데리고 묵상에 들어야 할 시간 소리 없이 냄새 나고 냄새 없이 냄새 난다 내가 나를 산책한 냄새 한 무더기 내 안을 단단히 버티어 간다.
심사평
"작가 나이 앞지른 시적 미덕"
예심을 통과한 새로운 작품들을 읽는다는 것은 우선 즐거움에 가깝다. 우리 시단의 시적 근경인 난삽하고 편협한 가독성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일상과 사유가 시의 그물망에 들어왔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다만 투고한 분들의 연령층이 높다는 것은 곤혹스럽다. 등단 연령의 상승은 신춘문예 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적인 현상이 아닌가. 이십 대에 등단한다는 희망은 이제 사치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우리는 박주용 씨의 작품을 선택하는 하나의 사치를 누릴 수 있었다. 당선작은 박주용 씨가 투고한 세 작품, ‘나뭇잎 신발’, ‘데칼코마니’, ‘옹이’에서 가려야만 했다. 당선작인 ‘옹이’는 옹이를 소재로 섬세한 개성을 뽐내고 있다. 작품‘옹이’는 옹이를 기의로, 냄새를 기표로 하되, 냄새라는 독특한 흔적만으로 시적 의도를 정치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옹이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면 “나무에 박힌 가지의 그루터기. 또는 그것이 난 자리” 이면서 “굳은살”이거나 또는 “귀에 박힌 말이나 가슴에 맺힌 감정 따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작품 ‘옹이’의 배후는“귀에 박힌 말이나 가슴에 맺힌 감정 따위”에 해당되겠다. 가슴에 맺힌 개별적 감정을 옹이/냄새가 주술적 공간과 서정적 공간을 통과하면서 자기 심화에 도달하게 되는 발화 과정이 노래말로 엮어졌다. 우리말의 리듬에 기댄 이 냄새의 상상력은 낯설지만 기시감에 가깝고, 재빠르지만 부박하지 않다. 해설도 분석도 필요없이 감각으로 다가오는 시적 속도감은 ‘옹이’의 매혹이다. 박주용 씨의 ‘옹이’를 당선작으로 미는데 심사위원 두 사람이 합의했지만 씨의 연령이 오십대라는 걸 우려했다는 점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어쩌랴, 시적 미덕이 나이를 앞질렀다.
다음에 거론된 분들의 작품도 몇 번이나 읽어야만 했다. 우선 이명우의 ‘실직’과 ‘척추’, 특히 ‘실직’에는 “햇빛에 나무가 더 가늘게 깎이고 있다”라는 시선이 있고, ‘척추’에는 “골조건물에 길게 세운 철근 몇 가닥 / 바람을 빼내지 못한 인부들의 허리를 갉아먹는다”라는 쓸쓸함이 있다. 조유희의 ‘앵무새의 난독증’과 김재연의 ‘슬리퍼(Sleeper)’도 우리가 주저한 작품이었다. “슬리퍼라는 단어가 / 영원히 잠든 사람들의 발자국, / 이라고 생각해보자”라는 ‘슬리퍼(Sleeper)’의 첫 연은 이후에도 두고두고 생각나는 구절이었다. 이 분들 역시 시인이 될 수 있는 역량을 가졌다고 믿어진다.
심사위원 : 문인수시인, 송재학시인
--------------------------------------------------------
2014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바람의 징후
최재하
붉은 헝겊 같은 노을이 살다갔다
죽은 나무에 혈액형이 달라진 피를 돌려야 할
심장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기다림의 대상이, 그, 무엇이었던 동안
더 이상 풀빛은 자라지 않았다
대신에 동구 밖의 삼나무들이 푸른 잎을 마쳤다
가두어 놓았던 귀를 풀어 놓자마자
귀가 아니라 입이었다며 우는
야행의 고양이와도 같았던,
그것은 단순히 후회에 관한 피력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소문처럼 스쳤다가 간 걸음 속을 따라가다 보면
오래 전에 내렸던 눈이나 비가 다시 내계(內界)로
돌아갈지 모른다
당신이 보낸 전령사들, 그, 후로
당신이 직접 와서 지나간 자리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딜 수 있게 할 가능성은
방향에게 기대어 목을 꺾거나
내게로 오는, 그, 동안을 하르르 밟아주는 일이었다
당신은 증명하지 않고
증명되지 않는다
바람의 채집사를 자처해 보았을지도 모르는
전생보다 더 멀리서 걸어 왔던 세월 동안
뒷모습 쪽에만 대고, 훨씬 전에 지나간 유행가 같은, 낡은,
셔트를 겨누어 보기도 했을 거라는
가장 처음일 때 오고
가장 나중일 때 닿았던
당신의 징후에게, 더 이상 생의 손가락 하나를
걸어보는 행위를
파란이라거나 파탄이라는 이름으로 치유하지는 않겠다.
심사평
시는 그렇다면 기록할 수 없는것들에 관한 기록일까
적지 않은 투고작들을 빼놓지 않고 들추어내던 와중에, 한 때 왕성한 시력을 문단에 선보였던 이 지역 출신 시인의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이라는 시집의 제목이 하나 떠올랐다. 비문(非文)이었다. 그렇다면 저 문장의 속내는 해가 지지 않을 때까지의 쟁기질 정도를 이르는 말이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이라는 생뚱맞은 문장은 시적인 어법의 환기 속에서 나름대로의 매력과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시는 그렇다면 ‘기록’이상의 혹은 그 너머의 기척이며 기미까지를 비끌어 매야하는 난항과 고투와의 대면이자 확인이기도 했을 것이다. 사실 작금 시단의 기류는 그런 정도를 넘어서서, ‘읽혀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읽히기’의 방식으로까지 세를 넓혀버렸다. 그런 사이 기존의 시들은 이미 전설이 되었거나 물을 건너버린 꼴이다. 요즘 따라 부쩍 시를 읽는 일이 무거워져 버렸다.
투고시의 대부분들은 자잘한 일상의 담론들에 그쳐 있었다. 뉴스는 신산스러운데 시들은 평안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을까? 뱀이 살아요(박평숙). 늪(곽성숙), 뿌리는 닫힌 문이다 (남상진) 보고서(한영희) 꿈의 각(박순옥) 어느 일요일 오후 (홍유나) 씨 등의 시들과 함께 조유희(앵무새의 난독증)과 최재하(바람의 징후)가 마지막까지 남았다. 두 사람의 작품은 당선권에 무난했으나, 진술의 뒤에 남겨진 여운은 “바람의 징후”가 더 깊어 보였다. 다시 또 일어나 앉아 끝장이 날 때까지 “쓰는 자”만이 시인일 것이다.
심사위원 : 정윤천
----------------------------------------------------------
강원일보 2014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상강
최영숙
장독대 옆에 살던 뱀은 산으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나무는 허술해져 경계처럼 빗금을 긋는다
저렇게 주먹 불끈 쥐고 가는 길
너를 향해 가는 고추 벌레 구멍 같은 길
툭 부러지고 싶다 이제 그만 자리 잡고
눕고 싶은 생각
생각은 자면서도 깨어 있을까
꿈틀 나의 손을 치우는 돌서덜
그 돌서덜 위에서
숲은 작은 몸을 하고 툰드라의 바람으로 운다.
△ 최영숙(58)
양구군 生
한림대 평생교육원 문예창작반 수료
[심사평] 군더더기 없이 행간의 여백 만드는 솜씨 탁월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은 일정한 수준을 상회했고 개성적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시조의 경우, 시와 시조가 한 자리에서 경합한다는 점에서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매년 응모작이 늘고 있어 반가웠다. 그러나 시조의 율격을 준수하지 못한 경우와 시적 언술에 미치지 못하거나 진부한 소재와 발상을 보여 아쉬웠다.
시의 경우, 좋은 작품이 많아 즐거운 고민을 하는 가운데 의구심도 있었다. 새로운 독법을 요구하는 듯 보이는 낯설게하기가 지나친 기교주의로 흐른다는 느낌. 비틀리고 장황한 언술들을 독자가 어떻게 이해하고 공감, 공명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고 최종에 오른 작품은 `적멸보궁', `디딤돌이 있는 풍경', `모서리의 비밀', `상강'이었다. `적멸보궁'은 사유의 깊이와 묘사력이 돋보였으나 참신성과 독창성이 부족했다. `디딤돌이 있는 풍경'은 한 폭의 동화를 보는 듯 시상이 맑고 깨끗하게 다가왔으나 시는 사상과 형식의 등가물이란 점에서 볼 때 내면적 깊이가 약했고, `모서리의 비밀'은 전체를 견인하는 결미의 주제의식이 부족했다. 최종적으로 최영숙의 `상강'은 기교주의에 빠지지 않은 가운데 산뜻하게 응축된 시상이 참신하고 진정성을 겸비한 작품으로 다가와 당선작으로 올렸다. 상강 절기의 자연이법을 선명한 이미지로 포착하면서 고도의 상상력과 직관으로 군더더기 없이 행간의 여백을 만드는 솜씨가 탁월했다. 함께 응모한 `풍장' 역시 절제된 비유와 표현으로 깊은 인상을 주었다. 영예의 당선자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며 시인으로서 대성하길 축원 드린다.
심사위원 : 이영춘·홍성란 시인
-------------------------------------------------------------------------------------
불교신문 2014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바람의 사슬
심수자
거미도 없는 빈 거미줄이 도처에 무성하다
초읍동 일층 단칸방에 살다가
얇은 요위에서 오년 만에 발견된
독거노인은 백골이다
산동네 좁은 골목길이 얼키고 설켜
커다란 거미 한 마리쯤은 키웠겠다
한 생을 다한 그녀는 거미 몸에 들어
자신을 갇히게 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채
풀어낸 실로 여리고 성을 쌓은 것이다
방 한쪽 구석엔 냄비와 그릇 두어개
빈 가스버너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녀, 한 겹 두 겹 아홉 겹 까지 껴입은 옷은
추위 멈추고 싶은 몸부림 이었겠지
무뎌진 낮과 밤의 경계에서
이끼는 바닥의 습기를 먹고 자라고 있었다
그녀가 백골이 되어 가면서
곤충들 더 이상 걸려들지 않을 때
거미는 자신을 걸어둘 장치로
바람 속에 집을 지은 것인지도 모른다
도처에 걸린 거미줄이 내 얼굴에 닿을 때
초읍동 반 마장 거리의 파도 자락은
이미 떠나고 없는 배의 후미인 듯
거미집 바람벽을 밀고 있었다
시 심사평 / 고은
이 시대를 실감케 하다
또 이 일을 맡았다. 가는 해 끝자락에서 만난 시가 새해의 시로 태어나는 일에 나도 설레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많은 응모작들을 예선이라는 체로 걸러서 나에게 온 것들도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었다. 숨찼다.
작자는 멀리 칠레까지도 가 있고 오세아니아의 어디에도 가 있는 화자(話者)로 등장한다. 지난 시대의 상습적인 고향타령은 이제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이것이 시의 깊이보다 넓이 쪽으로 기울어지는 함정이 되기로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쪽의 경향들이 더 바람직할 가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요컨대 시의 길은 세상 안에서나 자아 안에서나 쉬운 노릇이 아니다.
예선작의 소감이 더 있다. 첫째 어떤 작자의 태도가 자신의 언어를 불손하게 다루고 있는 사실이다. 토속말로 우자부리는 수작이었다.
이런 현상 말고도 의식과잉이 자주 보였다. 그 과잉이 현학적인 기분이나 내고 있을 때는 눈살을 찌푸리게 될 만하다. 20세기 모더니즘 공과론에서 과(過)쪽에 속할 것이다. 지적인 분식은 어떤 경우에는 시 속의 죄악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월과 백석으로 돌아가라는 정서소급을 위한 독려가 옳다는 것도 아니다.
이것저것 고르고 고르다가 6편이 남았다. ‘일출역동기’, ‘꿈의 잔영’, ‘내 데칼꼬마니’, ‘어머님, 그 해 가을은 행복했습니다’, ‘엇갈림’, ‘몸뻬바지’, ‘바람의 사슬’이다.
‘일출역동기’는 비교적 탄탄한 구문으로 되었다. 하지만 시가 표현이 아니라 해설이 될 위험이 있다. 긴 호흡은 장점이다. ‘꿈의 잔영’, ‘내 데깔꼬마니’는 시의 맛을 터득한 작품이다. 앞으로 시인생활이 보장되는 그런 작품이다. 다만 치열성이 뒤따라야겠다. ‘어머님, 그해 가을은 행복했습니다’는 풍성한 울림을 가진 작품이다. 그리고 쉽다. 서정의 힘은 지식의 조각 나열 따위나 은유의 자폐증 따위를 벗어난다. 하지만 어딘지 빈곤하다.
‘엇갈림’과 ‘몸뻬바지’, ‘바람의 사슬’은 서로 겨룰만한 것들이다. 셋 중의 어느 하나를 고르기가 망설여졌다. 그럼에도 우리 동시대의 처절한 삶의 비극성 도출에 방점이 찍혔다. 물러선 두 편의 작자는 이번 말고 다른 기회에 세상의 문을 두드릴 것을 바란다. ‘바람의 사슬’의 실감이야말로 이 시대의 시적 절실성이다. 당선을 축하한다.
--------------------------------------------------------------------------------
경인일보 2014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앵무새의 난독증
조유희
의자 위에 두 개의 오렌지가 놓여 있어요 나는 저 오렌지를 노란 앵무새라 불러요 한 마리는 어제로부터 날아왔고, 또 한 마리는 내일로부터 날아왔어요 어제의 혀가 내일의 혀를 그리워할 때, 당신은 내게 상큼한 거짓말로 다가왔어요
나는 당신을 앵무새라 불렀지요 당신과 나 사이의 간격은 너무 아슬해서 도저히 잡을 수 없어요 한 자리에 오래 머물지 못한 앵무새는 사ㆍ랑ㆍ해ㆍ사ㆍ랑ㆍ해를 원했어요 그럴 때마다 하나씩 뽑아낸 깃털 때문인지 앵무새는 몇 초마다 각을 세워요 나는 우울한 오렌지를 갖고 싶었지요
구차한 변명 따윈 상관하지 않을래요 잊지 말자는 그 매혹적인 말, 그 말을 따라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 어제의 의자에 내가 머물지 못한 것은 오늘의 당신이 혼자이기 때문이지요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서 오렌지는 앵무새가 되고, 오늘의 의자가 어제의 오렌지를 기억하듯 나도 내일의 앵무새를 기억할래요 오렌지가 오렌지를 사랑하는 오늘밤에 과연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 약력
1967년 목포 출생
2013 목포문학상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 재학중
<시부문 심사평/ 고은ㆍ최원식>
“연애시 빌려 불통의 시대 횡단”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11인의 총 39편이다. 모처럼 따듯한 성탄 전날, 수원본사에서 회동한 심사위원들은 단도직입적으로 당선작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엘뤼시온」과 「앵무새의 난독증」이 단연 돋보인다는 점에 쉽게 합의했다. 우선 두 후보자 모두 응모작들의 전체적 수준이 비교적 고르다는 점이 고려되었다. 작품들 사이의 비대칭성이 눈에 띄게 두드러지면 미래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의 시는 아류로부터 자유롭다.
만만치 않은 시력(詩歷)이 감지됨에도 불구하고 읽고 나면 어떤 기시감(旣視感)에 약간의 실망을 금치 못하던 작품들에 대한 안타까움 탓에 두 작품이 보여준 자신만의 활달한 어법은 종요롭다.
「엘뤼시온」은 무엇보다 관념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유능력이 주목된다. “타인의 웅변에 깃들어 살아왔다”로 시작되는 그 서두도 범상치 않지만 남의 시선에 지핀 즉자(卽自)가 그 장막을 찢고 스스로 대자(對自)로 진화하는 정신의 율동을 싱싱하게 보여주는 바가 아름답기조차 한 터다. 그런데 시 후반부로 갈수록 주의적(主意的)인 경구(警句)들이 돌출하여 관념성을 노출하는 게 흠이다. 교훈시 비슷한 경향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과제다.
「앵무새의 난독증」은 ‘당신’의 유혹에 응답하는 일종의 연애시다. 그렇다고 그냥 익숙한 낭만적 서정시냐 하면 아니다. 지적 조작이 만만치 않다. 리듬과 리듬, 이미지와 이미지, 그리고 논리와 논리 사이의 연락이 마치 재봉 자국이 보이지 않을 만큼 조밀한 터다. 그렇다고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나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 시를 지배하는 어조는 기본적으로 해학이다. “어제의 혀가 내일의 혀를 그리워할 때, 당신은 내게 상큼한 거짓말로 다가왔어요”라든가, “잊지 말자는 그 매혹적인 말, 그 말을 따라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처럼 말과 말 사이가 성글다. 그 틈 사이로 사랑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실험하는 물음이 솟아오른다. “오렌지가 오렌지를 사랑하는 오늘밤에 과연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연애시를 빌려 이 불통의 시대를 횡단하는 용기를 불사하는 시인의 뜻이 이만큼 절실하다.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삼는 데 최종 합의하였다. 축하한다. 정진을 바란다.
----------------------------------------------------------
광주일보 2014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몬드리안의 담요
배세복
성큼성큼 들어와 붉은 사각형을 담요에 던지며 그가 말했다 너희들에게 어울리는 빛이야 그때부터 그는 우리집 벽에 살았다 어느 해 나는 내 서재를 한 번도 열어주지 않으면서도 간신히 아내의 장롱 속에 들어간 적 있다 캄캄했다 오래 전 걸어두었던 희망 같은 단어에 곰팡이가 슬기 시작했다 그날 그는 검푸른 색깔을 마구 칠했다 살짝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 무렵 나는 회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유사한 색깔의 연속은 불안을 가져온다 마치 잘못 맞춰진 목욕탕 타일의 무늬처럼, 그리하여 바람 푸르던 날 우리는 감탄사들을 날려 보냈다 공중에서 흩어지는, 알고 보니 겨우 몇 개 밖에 안 되던 노란 한숨 같은 것, 올해에는 어떤 색을 보여줄까 형형색색의 아주 큰 보석을 보여줄게! 그는 한 해에 하나씩 그린 아홉 개의 사각형에 테두리를 치고 있었다 집을 지은 후 귀퉁이를 여러 날 마름질하듯 천천히, 잠이 덜 깬 우리들을 격자무늬로 엮어주며 서서히 벽 속으로 사라져갔다
**배세복
▲1974년 충남 홍성 출생
▲한남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충남여고 교사
[심사평] “차분히 읊조리는 시어 … 서사·서정적 감각 균형”
시들이 독자에게 애써 말을 건네지 않는다. 어떤 절실한 심장을 향해 하소연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 않고 독자를 설득하려는 마음도 없다. 그저 중얼거린다. 일정한 수준에 올라와 있는 시들일수록 소재가 제한적이다. 일상의 소소한 안쪽을 들춰 보여줄 뿐이다.
분명히 다른 사람이 쓴 시인데 시어가 중복되는 경우가 수없이 많이 발견된다. 이미지를 비틀지도 않고 파격도 엿보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이 시단의 흐름이라면 새로운 시인은 주도적인 흐름을 혁파하는 자세를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당선작으로 고른 배세복 씨의 ‘몬드리안의 담요’도 위와 같은 혐의에서 크게 자유롭지는 않다. 하지만 서사적인 것과 서정적인 것을 균형 잡힌 감각으로 배합하는 능력은 다른 응모자들의 시와 뚜렷이 구별된다.
말하고자 하는 것을 언어의 내부로 숨기면서 결국은 할 말을 다 하는 시다. 화자의 목소리가 들뜨지 않고 차분한 것은 그만큼 내공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함께 응모한 시들도 단아한 서정의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신뢰를 두텁게 했다.
고현도 씨의 ‘까치의 독후감’은 그리 새롭지 않은 소재를 자신으로 눈으로 해석하는 남다른 기량이 엿보인다. 시적 대상을 꼼꼼하게 묘사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어 호감이 간다. 그러나 시를 전개하는 데 몰두하다 보니 시인의 사유가 배어들 틈을 만들지 못한 게 걸렸다.
이정희 씨의 ‘신바람 수선집’은 유쾌한 동시적 작풍이 눈길을 끌었다. 수선집에 있을 법한 사물들이 마치 식구들처럼 명랑하게 움직이고 있어 흥미로웠다. 다만 시를 마무리하는 후반부가 지나치게 작위적이어서 아쉽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 중에서 김옥진, 최영은, 문화영, 조희진, 이세빈 씨의 시들을 마지막까지 눈여겨 읽었다. 모두들 건투를 빈다.
**안도현
▲우석대 문창과 교수
---------------------------------------------------
무등일보 2014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바람의 징후
최재하
붉은 헝겊 같은 노을이 살다갔다
죽은 나무에 혈액형이 달라진 피를 돌려야 할
심장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기다림의 대상이, 그, 무엇이었던 동안
더 이상 풀빛은 자라지 않았다
대신에 동구 밖의 삼나무들이 푸른 잎을 마쳤다
가두어 놓았던 귀를 풀어 놓자마자
귀가 아니라 입이었다며 우는
야행의 고양이와도 같았던,
그것은 단순히 후회에 관한 피력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소문처럼 스쳤다가 간 걸음 속을 따라가다 보면
오래 전에 내렸던 눈이나 비가 다시 내계(內界)로
돌아갈지 모른다
당신이 보낸 전령사들, 그, 후로
당신이 직접 와서 지나간 자리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딜 수 있게 할 가능성은
방향에게 기대어 목을 꺾거나
내게로 오는, 그, 동안을 하르르 밟아주는 일이었다
당신은 증명하지 않고
증명되지 않는다
바람의 채집사를 자처해 보았을지도 모르는
전생보다 더 멀리서 걸어 왔던 세월 동안
뒷모습 쪽에만 대고, 훨씬 전에 지나간 유행가 같은, 낡은,
셔터를 겨누어 보기도 했을 거라는
가장 처음일 때 오고
가장 나중일 때 닿았던
당신의 징후에게, 더 이상 생의 손가락 하나를
걸어보는 행위를
파란이라거나 파탄이라는 이름으로 치유하지는 않겠다.
<심사평> --------------------
시는 그렇다면 기록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한 기록일까
정윤천 (시인)
적지 않은 투고작들을 빼놓지 않고 들추어내던 와중에, 한 때 왕성한 시력을 문단에 선보였던 이 지역 출신 시인의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이라는 시집의 제목이 하나 떠올랐다. 비문(非文)이었다. 그렇다면 저 문장의 속내는 해가 지지 않을 때까지의 쟁기질 정도를 이르는 말이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이라는 생뚱맞은 문장은 시적인 어법의 환기 속에서 나름대로의 매력과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시는 그렇다면 ‘기록’이상의 혹은 그 너머의 기척이며 기미까지를 비끌어 매야하는 난항과 고투와의 대면이자 확인이기도 했을 것이다. 사실 작금 시단의 기류는 그런 정도를 넘어서서, ‘읽혀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읽히기’의 방식으로까지 세를 넓혀버렸다. 그런 사이 기존의 시들은 이미 전설이 되었거나 물을 건너버린 꼴이다. 요즘 따라 부쩍 시를 읽는 일이 무거워져 버렸다.
투고시의 대부분들은 자잘한 일상의 담론들에 그쳐 있었다. 뉴스는 신산스러운데 시들은 평안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을까? 뱀이 살아요(박평숙). 늪(곽성숙), 뿌리는 닫힌 문이다 (남상진) 보고서(한영희) 꿈의 각(박순옥) 어느 일요일 오후 (홍유나) 씨 등의 시들과 함께 조유희(앵무새의 난독증)과 최재하(바람의 징후)가 마지막까지 남았다. 두 사람의 작품은 당선권에 무난했으나, 진술의 뒤에 남겨진 여운은 “바람의 징후”가 더 깊어 보였다. 다시 또 일어나 앉아 끝장이 날 때까지 “쓰는 자”만이 시인일 것이다.
-----------------------------------------------------
전북도민일보 2014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열화되다
이승은
나무들의 연대가 적요롭다
몸 말아 등선이 고운 태아처럼
묵언수행을 선언한 지난 계절부터
딱 그만 크기의 추를 세우고
조그맣게 서 있다
저 추가 어떻게 뜨거움을 보여줄 것인가
작년 봄 2쪽 그즈음과 같은 모양새여서
땅이 열렸을 때부터 생긴 약속이라고
얼추 들은 터라
새로울 것도 없다고 생각이 넘나드는 순간
추가 넘어졌다
토해낸 숨결 안과 밖 경계선이 무너지고
추는 중심을 잡으려 안간힘을 쓴다
매화꽃 일생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말도
화르르 소란스럽다
단 한 개의 귀를 지닌 추는 냉정을 잃고
물기에 젖어 파리한 소리는 적막을 뚫고
꽃 이파리 하나 열린다
열화되지 않은 꽃은 없으리
바닥 바닥으로만 음각했던
우리들의 희망이 달리 드러난 것이다
여러 번 꽁꽁 얼어 있던 약속이
심장 속 온도에 팔딱거리는
작은 기립을 지지한다
쉿! 다음 쪽 봄꽃도 뜨거워지려 한다
<심사평> ------------------------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생각의 재탄생’
신춘문예를 통해 이 땅의 시인으로 세상에 첫 선을 보이는 것은 눈부신 기쁨이다. 전국 각지에서 응모한 137명의 시 569편을 심사했다.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섬세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것은 누에가 고치를 만드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토해 나오는 비단실을 보는 것과 같다. 떨리는 가슴으로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어 시를 쓰고 응모한 예비 시인들의 문학을 향한 열정에 큰 박수를 보낸다.
당선작으로 이승은의 ‘열화되다’를 뽑았다. ‘나무들의 연대가 적요롭다/ 몸 말아 등선이 고운 태아처럼/묵언수행을 선언한 지난 계절부터’라는 첫머리부터 시선을 끌었다. ‘토해낸 숨결 안과 밖 경계선이 무너지고/추는 중심을 잡으려 안간힘을 쓴다’ 꽃이 열리는 순간의 경이로움을 호흡을 잠시 멈추고서 한 줄의 시로 완성한 모습이 시를 읽은 사람에게 큰 기쁨을 주고 있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생각이 언어를 통해 재탄생하는 모습이 반갑다. 앞으로 좋은 시인으로 성장할 것으로 믿는다.
구민숙의 ‘뒤란’은 오래 들고 있었던 작품이다. 바람처럼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이야기들이 떠오르는 영상과도 같았다. 생각의 깊이를 더하여 시의 언어를 조율한다면 머지않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최윤정의 ‘풍화’, 김완수의 ‘독방일기’, 김종득의 ‘돌아온 만경들’ 역시 좋은 작품이었다. 아깝게 낙선한 분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조미애<국제펜클럽한국본부 및 한국문인협회 이사>
매일신문 2014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옹이
박주용
난다 냄새 난다 나는 내가 긁어 부스럼이라 냄새 난다 나는 나를 날린 셈인데 냄새 나는 나는 나는 새에게도 냄새 난다 냄새는 냄새를 전이시켜 새똥 싼 내 하늘도 냄새 난다 냄새는 자꾸 가려워 구름을 비벼대는 것이어서 충혈 된 내 먹구름도 냄새 난다 소나기 한 줄금 쏟아내면 냄새가 사라질 것이란 기대는 금물 사납게 짖어대는 내 번개가 아직도 그 속에 눈이 번쩍 도사리고 있어 크릉크릉 냄새 난다 아귀를 맞추어 장미꽃을 밀어 올리던 내 거미줄에도 말 달리며 방방 뛰던 꽃물이 남아 있기는 마찬가지 옹헤야 냄새 난다 어절씨구 냄새 난다 소리 높여 노래 부르기는 시기상조 이제는 내가 나를 더불고 슬금슬금 거문고를 타야 할 때 내가 나를 데리고 묵상에 들어야 할 시간 소리 없이 냄새 나고 냄새 없이 냄새 난다 내가 나를 산책한 냄새 한 무더기 내 안을 단단히 버티어 간다.
이름 : 박주용(1961년생)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건양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건양대학교병설 건양고등학교 교사
[2014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반가사유상
최찬상
면벽한 자세만
철로 남기고
그는 어디 가고 없다
어떤 것은 자세만으로도
생각이므로
그는 그 안에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겠다
한 자세로
녹이 슬었으므로
천 갈래 만 갈래로 흘러내린 생각이
이제, 어디 가닿는 데가 없어도
반짝이겠다
▲ 1960년 경북 칠곡 출생 ▲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심사평> 상투성 과감하게 벗어나… 힘의 낭비없이 짜여져
신춘문예 당선시에 어떤 유형이 있다고 여겨져 가능한 한 그 유형에서 벗어난 작품을 선택하자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다. 김고유의 ‘마음론’, 박민서의 ‘구유’, 김미선의 ‘고요한 천둥’, 최찬상의 ‘반가사유상’ 등이 그런 관점에서 최종심에 올랐다.
‘마음론’은 인간의 마음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짐승’에 비유한 점이 신선했으나 ‘순백의 언어가 차갑게 빛난다’ 등의 구태의연한 표현들이 그 신선함을 떨어뜨렸다.
‘구유’는 왜 굳이 산문 형식으로 써야 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 주었으며, 이는 한국현대시의 어떤 유형의 유행에 의존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고요한 천둥’은 일상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의 다양한 의미를 다각도로 추구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 역시 군더더기가 많았다. ‘이제 당신은 처음의 고요다’ 이후 마지막 두 연은 삭제하는 게 시의 완결성을 위해서는 오히려 더 나았다.
당선작 ‘반가사유상’은 신춘문예 시의 상투성을 과감하게 벗어난 작품이어서 눈에 띄었다. ‘반가사유’라는 관념과 추상을 ‘반가사유상’으로 구체화하는 데 성공했다.
전체적으로 잘 짜여 있음으로써 힘의 낭비가 없었다. 둘째 연 ‘어떤 것은 자세만으로도/ 생각이므로/ 그는 그 안에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겠다’는 이 시의 백미다. 외면의 형상을 통해 존재의 내면에 대한 구도적 성찰이 돋보인다.
<논어>에 나오는 ‘회사후소(繪事後素)’ ‘본질이 있은 연후에 꾸밈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깊게 생각하게 해주는 시다. 시는 인간을 이해하게 하는 부분이 있으므로 당선자는 더욱 인간을 이해하게 할 수 있는 시를 열심히 써주길 바란다.
심사위원 황동규·정호승
-------------------------------------------------------
[2014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체면
오서윤 (본명 오정순)
막, 죽음을 넘어선 지점을 감추려
서둘러 흰 천으로 덮어놓고 있던 익사자
최초의 조문이 빙 둘러서 있다
발을 덮지 않는 것은 죽은 자의 상징일까
얼굴은 다 덮고 발을 내놓고 있다
다 끌어올려도 꼭 모자라는 내력이 있다
태어날 때 가장 늦게 나온 발
저 맨발은 결국 물을 밟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복사기처럼 훑던 흰 천
끝내 남은 미련을 뚝 끊듯 발목에 걸쳐져 있는 체면
가시밭길을 걷고 있거나
아니면 용케 빠져나와 눈밭을 지났거나
물길을 걷다가 수습되어 왔을 것이다
발은 죽어서도 끊임없이 걷고 있어 덮지 않는 것일까
만약에 발까지 덮어놓았다면
자루이거나 작은 목선 한 척이었을 것이다
경계는 저 물 속이 아닌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둔 곳인지 모른다
발이 나와 있으므로 익사자다
고통도 화장도 다 지워진 얼굴은
체면이 없다
누군가 흰 천을 끌어당겨 체면을 덮어준 것이다
△1958년 대구 출생 △국민대학교 졸업 △2011년 천강문학상 시 부문 대상 △2013년 평화신문 신춘문예 당선
심사평 "인식의 힘 보여준 세심한 관찰"
응모작들은 대부분 일상성에 주목하고 있었다. 생활에 밀착하면서도 소통과 공감에 주력하는 시들이 많았다. 일상의 소소한 문제들을 내면화하여 구체적인 실감을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겠으나 타인의 삶과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고민이 결여된 점은 아쉬웠다는 것이 심사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다양한 분야와 계층의 사람들이 투고하는 것이 신춘문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 응모작들을 통해 우리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성도와 신인으로서의 새로움, 진지하면서도 노력의 흔적이 엿보이는 작품을 선택하자는 합의를 거쳐 이서빈, 문민철, 오서윤 씨의 작품을 최종심에 올렸다.
이서빈 씨의 뒤집기는 유비적인 상상력을 사용하여 아이의 첫 뒤집기와 노모의 화투패 뒤집기를 겹쳐 놓음으로써 탄생과 소멸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비적 상상력이 주는 단순함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문민철 씨 작품의 경우 거침 없는 화법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시간과 기억의 문제를 자신만의 문체로 이끌어가는 힘도 좋았다. 신인다운 패기가 큰 장점이었지만 전체적인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것이 흠이었다.
심사자들은 어떤 이견도 없이 오서윤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택하였다. 오서윤 씨는 세심한 관찰력을 통해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인식의 힘을 보여주었다. 간결한 문체를 사용하고 시의 호흡을 잘 조절하고 있다는 점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당선작 ‘체면’은 익사자를 덮은 흰 천에서 삐져나온 발을 통해 삶과 죽음, 인간의 문제를 존재론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태어날 때 가장 늦게 나온 발’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가고 있으며, 발의 드러냄과 감춤이 인간의 근본적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통해 몸과 삶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시이다. 고통스럽지만 기쁜, 이중적이고 역설적인 시의 길에 들어선 것을 축하드리며 한국 시단을 빛낼 소중한 시인이 되시길 바란다.
<심사위원 최영철 배한봉 장만호>
--------------------------------------------------
[2014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시 당선작]
길고양이
정순
다음엔 용서 할 수 없어
좀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가볍고 은밀한 흔적들
생선과 맞바꾼 몇 개의 발자국 속엔
아직도 비린내의 안쪽을 훔쳐봤을 집요한 눈빛이 묻어있고
문 열린 주방 한 켠 함지박에 담가놓았던
저녁의 분량만이 온데간데없이 썰렁하다
도둑맞은 함지박 속의 물들은 꺼른하다
아직도 미련을 놓지 못한 듯 우물거리고 있는
갈치의 미세한 비늘만이
느릿한 공복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는 한때
함지박 속의 사연들은 내 오랜 날들의 청빈을 닮았다
쉽사리 쏟아버리기엔 못내 아쉬운 애증의 볼모같은 것
나는 오랫동안 비린내 어린 시장기를 구해와
어스름의 도둑들을 초대해 왔다
한낮의 환한 부주의를 풀어 놓고서
공복의 저녁들을 키워 왔다
아끼면 아낄수록 말썽을 부리는 무수한 날들의 불청객,
소금 한줌 집어와 좀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어스름들에게
희고 짭짜름한 충고를 야광처럼 던져주었다
■ 정순
● 1959년 전북 완주 출생
● 2011년 평사리문학대상 대상 수상
● 차령문학 동인
● 한국 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재학
시 부문 심사평 / 길고양이 통해 인간의 삶 접근...고정관념 벗어나
선자에게 넘겨진 응모작품(469편)들을 숙독하고 느낀 점은 모두 일정수준을 갖췄으나 새롭게 내놓을만한 작품으로 가능성이 돋보이는 작품을 찾기는 쉬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작품들이 엇비슷한 것은 전국 각지에서 벌이고 있는 각종 문학강좌의 탓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념적이고 상투적인 어휘들이 난무하고 난삽한 작품들이 많아 아쉬움을 떨칠 수 없었다.
선자의 손에 마지막까지 우열을 겨룬 작품으로는 김현승의 ‘엄마의 완경기’와 김지숙의 ‘주막’ 그리고 권인희의 ‘고등어 굽는 여자’ 와 정 순의 ‘길고양이’란 작품이다.
김현승의 ‘엄마의 완경기는 꽃피는 봄철이 오면 고향집 앞뜰에 채색된 봄이 피는 엄마의 우주를 그려내고 있다. 완경기란 폐경기를 말하는데 이는 여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의 전환기를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 착상이 돋보였다.
김지숙의 ‘주막’이란 작품은 장삿길 떠난 아들을 위해 사거리 큰 도로 옆에 작은 주막을 차리고 기다리는 모정을 그리고 있다. 강나루가 사라지고 버스정류장이 생기고 아들이름을 내건 주막에서 인생의 석양을 맞는다. 세상을 뜨고 빈 집만 남아 노모의 가슴처럼 기다림의 애틋한 정감을 더하고 있다.
권인희의 ‘고등어 굽는 여자’에서 달빛에 고등어를 굽는 여자의 삶 속에서 여자의 삶이 고등어를 닮아가는 팽팽한 삶 그물자락을 바다 한가운데서 펼쳐 보이며 여자가 그물 옷에 묻은 저녁을 털어내고 있다는 등 바람의 흔적이 끊이질 않는 작품이다.
정 순의 ‘길고양이’란 작품은 삶이란 명제에서 길고양이와 인간의 삶이 하나로 오버랩되고 있다. 콜렛은 ‘고양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절대 낭비되는 시간이 아니다’라고 했고 웨슬리 베이츠는 ‘고양이가 있는 집에는 특별한 장식물이 필요 없다’고 했는데 집고양이가 아닌 길고양이와의 관계에도 적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진다. 다각적인 상황에서 나타나는 동시다발적인 것들이 삶의 실체 속에서 적절한 관계 접근을 통해 내포한 고정관념을 벗어나고 있다.
정 순의 길고양이를 당선작으로 밀며 앞으로 튼실하고 절제된 탈관념의 사물시 쓰기에 정진하기를 바란다.
-----------------------------------------
2014 영남일보 문학상 시 당선작
피운다는 것은
송지은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어둠이 찰 지게 들어있는 방에서 꽃은
게으른 손목에 잡혀 나오지 못하고 있다
물이 스민 계절은 부풀고
어디에도 합류하지 못한 이력서 같은
천리향 나무 잎사귀 몇 장이
형광등 불빛에 말라 떨어지고 있다
손톱만한 잎사귀의 먼지를 닦아내면
바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다
목마름을 견디며 버틴 푸른 힘줄이 보인다
비정규직 자리에 새 흙을 끌어와 분갈이를 한다
온도가 상승하면서 나무에 물이 오르면
꽃잎 하나가 어둠을 빠져나와
봄의 이마에 붉은 웃음을 낙점하고 확대한다
살아있는 동안은
누구에게나 꽃피울 자리는 있다
피운다는 것은 쓰러지기 위한 눈부신 허무
향기를 피우고
곰팡이를 피우고
바닥의 통증까지 밀어올리고나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도둑처럼 사라진다
피우는 것들은 모두
어둠을 본적지로 두고 있다
(심사평)
시대 아픔 녹여낸 어두운 응모작 많아
당선작, 매 순간 삶 꽃피우는 힘 내재
2014년을 영남일보문학상 시 부문 응모작과 응모자 수는 총 1천862편에 389명. 대한민국이 여전히 문학을 귀히 여기는 문학공화국임을 과시하는 놀라운 수다. 전 세계 보기 드문 우리 민족의 문학 열기에 부응하기 위해 심사에 더욱 엄정을 기했다.
남녀노소 고루 보내온 응모작을 당대의 삶과 사회의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현상지. 올해 응모작은 어두웠다.
혁명도 사랑도 순정도 없는 시대를 살아내는 아픔들이 그대로 현상돼 나왔다. 특히 ‘비정규직’이 우리 시대의 키워드로 떠오르며 신유목시대 뿌리 뽑힌 이미지가 곳곳에 편재해 있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응모자는 25명. 읽고 또 감상하며, 논의에 논의를 거듭한 끝에 송지은씨의 ‘피운다는 것은’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자잘한 우리네 일상에서 삶의 끝, 간 데 없는 깊이를 천착해가며 우리 사회를 둘러보게 하는 힘, 끝내는 허무일지라도 푸른 힘줄처럼 매 순간의 삶을 꽃피우는 힘이 있었다.
같이 보내온 응모작 ‘벙어리 뻐꾸기’의 한 부분 “울음의 표기법이 달라서 건너갈 수 없는 슬픔/ 가슴을 쳐서 북이 된다면/ 살에 닿는 아픔을 녹여 수수꽃다리 같은 소리를/ 너에게 물려주고 싶었다”에서 처럼 소통과 감동이 있었다. 머리로 짓는 시가 아니라 생살 터지는 아픔을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하는 그 감동, 진정성의 힘이 있기에 당선작으로 흔쾌히 밀었다.
당선작과 함께 ‘해바라기’와 ‘오랑캐꽃을 위한 광시곡’이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다.
같이 보내온 작품들을 참조하며 면밀히 비교, 검토한 결과 ‘해바라기’는 아직 덜 영글어서, 이에 비해 ‘오랑캐…’는 절실하기는 하나 너무 농익어, 무엇보다 기성시인들의 시법과 시의 구절 등이 자꾸 연상될 정도로 개성이 약한 게 흠이었다.
심사위원 : 이경철·이산하
----------------------------------------------------------------
[2014 경제신춘문예 시 당선작]
집배원
권삼현
그동안 뭐 했냐고 묻지 마라
우체국으로 걸어간 봄은 온통 꽃 필 생각이다
울퉁불퉁 생긴 대로 볼품없는 세월
집배실 옆 차르르르 햇살 엎질러진 모과나무는 안다
향기란 어쩌면 제 몸을 뚫고 나오는 연둣빛 새순 같은 것
오늘도 백오십리길
꽃 소식 앞장세우고 배달 나가는 집배원
빨간 오토바이 휘청이도록 봄바람 분다
풀빛 연애편지는 내가 업어주고 싶은 것들
바람 불고 황사 자욱한 땅에 모과나무는
한 발 내딛을 때마다 꽃 필 생각이다
봄을 찾아 가다가 막막했던 모든 것들이 꽃길이다
번지가 지워진 봄날의 주소를 한 땀 한 땀 기워가며
환한 우표로 들여다보았을 그처럼
제 몸에 감춘 것들은 기다리다가 꽃이 된다
아침 오는 길목 푸른 물길 지피는 봄바람 속에
우리 살아가는 동안 봄날이다
꽃 피는 나무다
■심사위원 : 정연덕(시인)
------------------------------------------------
[2014 영주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을, 낯선 도시를 헹구다
김지희
한잔 노동이 넘실대는 부엌에는
여자의 일생이 부조되어 있다
엄마 허벅지 베개 삼아 달게 잠들었던 소녀시절이
캄캄해 보이지 않는 새벽 어스름
잠든 아이의 꿈자리를 지나
슬그머니 부엌에 나가 불을 켠다
문득 완전한 어둠 속에 던져졌던 세상 한 곳이 환하다
옹이 박힌 가슴으로 숭숭 새는 물소리를 잠근다
부엌 속에 갇혀 맵고 짜고 달고
가끔 바삭바삭 타는 소리 너머
나는 세상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나온
존재하지 않은 가을이었다
부엌에 앉아 작은 상을 성좌처럼 펴고
나의 언어를, 별을 찾다가 웅크린 어깨선이
어느 파도에 부딪혀 무너지는지 속이 거북하다
살다 남은 시간을 쪼개고
찬 손을 비비고
싱크대 속에 갇혀 몇 년째 속앓이 한 냄비를 닦고
예리한 어둠에 그을린 낯선 도시를 헹구며
깊은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세우고 국을 끓인다
파, 시금치 온통 날것인 것들이 불꽃으로 저를 살라
새로운 맛을 낸다
모든 사랑의 고통의… 뉘우침으로
한 그릇을 위한 부엌의 노동엔 어떤 해석도 필요치 않다
성찬식 밀떡처럼 작은 평화를 입에 물고
부조의 문을 밀고 나와
식구들의 잠든 귀를 깨끗하게 여는 저 폐경기의 새벽!
약력: 성주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정 수료
[시부문 심사평]
삶의 곡진한 국면과 신선한 이미저리의 조화
올해 마지막 수확을 거두고자 하는 의욕 덕분인지, 이번 영주 신춘문예에는 멀리 호주와 미국을 비롯 한국어의 영토가 펼쳐진 곳들로부터 많은 응모작들이 쏟아졌다.
문학적 열정으로 가득 찬 1천여 편의 작품들을 꼼꼼하게 읽어 내려가며 선자들은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응모작들의 분량도 예년에 비해 몰라보게 불어났지만, 문학적 성취의 경중을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시편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자들은 흔히 신춘문예 투라 불리는 지나친 수사와 단단하게 엮여 있지 않은 이미저리의 남발이 불거지는 시편들을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하자는 데 합의하였다.
개중에 어떤 이의 작품은 명징한 이미저리의 구사에도 불구하고 시적 전개를 뒤에서부터 뒤집었더라면 더 효과적일 것 같기도 하였다. 그만큼 작자의 마음이 담기지 않은 작위적이고, 파편적인 사유가 팽배된 시편들이 적지 않았다.
이에 선자들은 시적 유행에 흔들리지 않는 분별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네 삶의 다양한 국면을 진지하게 담고 있는 시들, 시적 역량을 충분히 보여주는 이미저리의 구사 능력, 사전적 의미를 넘어 사물을 다양하게 바라보는 신선한 시각을 가졌는가 등의 여부에 중점을 두어 본심에서 논의할 만한 작품들을 골랐다.
그 결과 김은정 씨의 <폭설>, 김곳 씨의 <읽어버린 길>, 이명옥 씨의 <구두코를 향하여>, 김지희 씨의 <가을, 낯선 도시를 헹구다> 등을 본심에 올려놓고 논의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사물을 새롭게 보게 하는 묘사력과 사전적 의미에서 벗어나 신선한 의미망을 환기하는 데 상당한 수준을 견지하고 있었다.
김은정의 작품들은 그 같은 점에서 주목이 갔지만 작자가 품은 세계관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고, 시상의 전개가 지나치게 작위적이어서 아직 착근이 덜 되었다는 데서 아쉬움을 남겼다. 김곳의 작품들은 이중적 의미망을 엮어가는 알레고리의 구사에 치중하였지만 모호하거나 충분한 전개가 되지 못한 채 마무리를 서두르는 미숙함을 노출하였다.
이명옥의 작품들은 해체적이면서도 명징한 이미저리들이 돋보였지만 현실과의 긴장 관계가 이완되어 그 절실함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었다.
김지희 씨의 작품들은 여성의 삶의 무대인 살림이 갖고 있는 의미에 대한 사려 깊은 천착에 바탕해 있다. 피로를 유발하는 도로를 넘어 화자를 참인간으로 재탄생하게 하며, 나아가 식구들의 건강하고 밝은 삶을 묵묵히 뒷받침하는 사랑의 정신을 담지하고 있다.
그것들이 과하지 않은 이미저리를 동반하여 처리되고 있는 점들이 주목을 끌었다. 몇 군데 매끄럽게 다듬어지지 않은 산문적 잔재와, 다소 부족한 정적(靜的) 모티프 들이 선자들의 아쉬움을 자아냈다.
선자들은 본심에 오른 작품을 놓고 벌인 토론과 장고 끝에 최근 들어 지나치게 언어 유희와 낯선 상상력의 세계로만 치닫는 신춘문예의 병폐를 답습해서는 안 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에 따라 삶의 곡진한 국면들을 시의 그릇에 담아내면서도, 명징한 이미저리의 강구를 통해 사상(事象)들에게 새롭게 접근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은 점들을 사서 김지희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기로 하였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말과 함께 앞으로의 정진과 분발을 당부하며, 아울러 이번에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이들도 더욱 정진하여 새로운 기회의 문을 활짝 열기 바란다.
심사위원 : 박몽구(시인, 글), 변종태(시인)
첫댓글 감사해요^.~
회장님 덕분에
신춘문예 잘 감상해요
맞습니다 미란님 말씀이 맞습니다
신선한 혈액 공급받았습니당
심심할때 가끔 들려서 한편씩 읽고 나가니까 참 좋네요..
읽는것 만으로도 공부가 되는것같지요?
회장님! 감사합니다.
그럴께요.
들어 올 때마다 한 편씩 읽고 나가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회장님! 고맙습니다...(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