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서)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영문판 (번 역) 크메르의 세계 (문서 최종수정) 2009-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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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장 식민지 시대의 캄보디아 (상)
프랑스 보호령 시대의 캄보디아 국기
កម្ពុជាសម័យអាណានិគ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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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보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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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도 |
프놈펜 |
언 어 |
프랑스어, 크메르어 |
정치구조 |
보호령 |
국 왕 |
- 1860-1904 |
노로돔 |
역사시대 |
신제국주의 |
- 보호령 시작 |
1863년 |
- 인도차이나 연합편입 |
1887년 |
- 독립 |
1953년 11월 9일 | |
1863년 노로돔(Norodom) 왕 치하의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된다. 1887년 10월, 프랑스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The Union Indochinoise)의 성립을 선포하는데, 이미 프랑스 자치령이었던 캄보디아를 비롯해 베트남의 3개 지역을 합친 것이었다. 베트남의 3개 지역은 통킹(Tonkin), 안남(Annam), 코친차이나(Cochinchina)였다. 1893년, 프랑스가 전쟁을 통해 시암(태국)의 국왕 출라롱콘(Chulalongkorn)을 압박해 라오스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토록 하였고, 그로 인해 라오스도 이 연방으로 편입된다.
목 차
- 1. 프랑스의 식민통치
- 2. 프랑스 식민통치시대의 경제
- 3. 크메르 민족주의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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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의 식민통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French Indochina)의 총독부는 현재 베트남 북부 통킹 만의 하노이에 위치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부분인 캄보디아는 파리의 “해양식민지부”(the Ministry of Marine and Colonies)에서 직접 파견한 “선임주재이사”(Résident Supérieur)가 통치했다.
[역자 주] “선임주재이사”라는 용어가 생소하지만, 현재 마땅한 선행 번역어를 발견하지 못해 일제 때 통감부(총독부) 하부기관을 “이사청”(理事廳)이라 부른 것을 참조하여 한국어 번역어로 채택하였음. |
선임주재이사는 그 밑으로 부주재이사들(Residents)과 각 지방으로 파견한 지방장관들(local governors)을 두고 있었다. 지방장관이 파견된 곳으로는 밧덤벙(Battambang, 바탐방), 뽀우삿(Pursat, 푸르삿), 우덩(Odong)이었고, 시엠립과 수도인 프놈펜은 선임주재이사의 직접 관할 하에 있었다.
선임주재이사는 상당한 권력을 갖고 있었지만, 종종 그 직위에 임명된 이들은 보다 많은 것을 원하곤 했다. 1897년 선임주재이사는 파리 정부에 대해, 현재의 캄보디아 국왕 노로돔은 통치능력이 부족하다고 불평하고, 그가 가진 권한 중 세금징수, 국왕령 선포, 심지어 대신들과 세자책봉권까지도 제한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농민들에겐 노로돔 국왕이 아직도 “신왕”(神王)으로 보였어도, 이제 그는 단지 얼굴마담이자 캄보디아 불교의 수호자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모든 권한이 상주선임이사와 식민정부 관료들의 손에 있었다. 식민정부의 관료는 대부분 프랑스 공무원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베트남계 아시아인들만은 관료가 될 수 있었다. 이들 베트남계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주류적 아시아인으로 비춰졌다.
1904년 노로돔 국왕이 사망했다. 프랑스는 그의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지 않고 노로돔 왕의 동생인 시소왓(Sisowath)을 즉위시켰다. 프랑스의 눈에는 노로돔 왕 직계들이 상대적으로 민족주의적인 가계로 보였고, 반면 시소왓 계통의 왕족들이 프랑스에 대해 보다 순종적 경향을 가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또한 지속적으로 발생한 프랑스 반대 저항에도 일정 부분 노로돔 국왕의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또 다른 이유로는 노로돔 국왕이 가장 아꼈던 아들이자 그 스스로도 왕위를 계승하길 원했던 유깐토(Yukanthor) 왕자가, 유럽 여행길에서 캄보디아 내 프랑스 통치가 무자비하다는 공적 발언이 알려진 데도 원인이 있었다.
[좌측사진] 노로돔 국왕의 모습
1907년 시소왓(Sisowath) 국왕 시대에 시엠립, 밧덤벙, 쁘레아 위히어를 태국으로부터 반환받았다.
비록 꼭두각시 국왕이자 프랑스의 구미에 맞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지만, 시소왓 왕 및 그의 아들 시소왓 모니웡(Sisowath Monivong) 국왕의 재임기간은 평화로왔다. 1907년 시소왓 국앙 재임기에 프랑스는 태국의 개혁군주 출라롱콘 국왕으로 하여금, 밧덤벙과 시엠립을 포함한 서북지역을 캄보디아의 영토로 반환하는 조약에 서명토록 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모든 일이 공격적인 프랑스의 식민통치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바로 이 점에서 시소왓 왕가는 캄보디아 영토를 회복한 이미지로 비춰지고 있다.
2. 프랑스 식민통치시대의 경제
1863년 프랑스가 캄보디아에서 보호령을 수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는 캄보디아를 “인도차이나의 싱가포르”로 만든다는 계획이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과 캄보디아에 달리 숨겨진 부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인용 필요) 그로 인해 캄보디아 경제는 의미있는 근대화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하지만 촌락경제에는 몇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프랑스는 비-베트남계에 대한 차별정책을 지속했는데, 특히 이 정책은 인도차이나에서 인구 일인 당 세금이 가장 비쌌다는 데서도 나타난다. 1916년 수만 명의 농민들이 시소왓 모니웡 국왕에게 세금감면을 청원하기 위해 몰려든 세금저항이 발생했다. 캄보디아는 대단히 평온하며 조직적 저항도 없을 것이라 판단했던 프랑스로서는 충격적인 일이었다.(인용각주 필요) 이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시소왓 모니웡 국왕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925년 세금체납자를 구속한 프랑스 부주재이사 한 사람을 농민들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부 지역의 경제는 프랑스 방식으로 개발되었다. 프랑스는 캄보디아 국내에 약간의 도로와 철도를 건설했다. 개설된 철로는 비교적 짧은 거리였고, 그 중 중요한 노선은 밧덤벙을 경유해 프놈펜과 태국의 국경을 연결하는 철도였다.
고무와 곡물 재배는 경제적으로 중요했는데, 밧덤벙과 시엠립 지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차이나의 쌀농사 곡창 구실을 하게 되었다. 1920년대 고무와 곡물 수요의 증가로 캄보디아는 이익을 보았지만,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되자 캄보디아도 고통을 겪게 된다. 특히 수입이 감소한 벼재배 농가들 중 일부는 고리대금의 희생자로 이중의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산업은 주로 지역 내 수요나 수출을 위한 원자재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이 시대에 캄보디아로의 이민이 급증하여 현저한 인종적 다양성을 갖추게 된다. 이곳에서도 영국이 통치했던 버마나 인도네시아와 마찬가지로 외국인들이 경제권을 장악한다. 상당히 우월적인 지위를 가졌었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인들이 고무농장 노동자로 고용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부와 상인으로서 베트남인들이 식민지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한다.
프랑스 식민지 이전부터 이미 수 세기 동안 캄보디아에 살고 있던 화교들(중국계)은 일찍부터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식민지 기간 동안에도 이 상태는 그대로 유지됐지만, 프랑스는 화교들에 대해 일정한 제한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화교 상인과 은행가들은 상업적 조직망을 결성해, 그 네트워크를 인도차이나 전역과 중국까지 확장시켰다.
3. 크메르 민족주의의 출현
베트남과 달리 1900년대 초 캄보디아의 민족주의 운동은 정치적으로 조용한 편이었다. 아마도 이러한 현상은 당시 재위 중인 국왕과 그 국왕을 조정하는 프랑스의 통치방식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크메르 백성들은 국왕이 옥좌에 앉아 있는 한 캄보디아는 평온할 것이란 믿음에 어떤 중독성을 보이는듯 했다. 또한 프랑스가 급격하게 개선하려 했던 높은 문맹율도 베트남과 같은 민족주의의 발효를 막고 있었다.
하지만 도시의 지식인 엘리트를 중심으로 캄보디아의 민족주의는 출현하고 있었다. 프랑스가 앙코르와트(Angkor Wat)를 복원하자, 많은 캄보디아인들이 자신의 조국과 그 과거의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새로운 지식인 엘리트의 다수는 프놈펜에 있던 “리셰 시소왓”(Lycee Sisowath) 사학과 출신들이었다. 1930년대에 베트남 학생 우대에 분노하여 모니웡 국왕에게 청원하는 일이 발생했다. 두드러지는 점은 최초의 주요한 민족주의자들이 “크메르 끄롬”(Khmer Krom), 즉 베트남에 살고 있던 크메르 소수인들이었다는 것이다. 손 웟 탄(Son Ngoc Than)과 빳 초은(Pach Chhoeun 혹은 Pach Choeun)은 최초의 크메르어 신문 <나가러왓>(Nagaravatta: 앙코르 와트)을 발행했다. 이 신문의 논조는 부드러웠지만 프랑스 식민정책과 부정부패, 그리고 시골지역에서의 고리대금을 비판했다. 또한 외국계의 경제권 장악과 인도차이나에 있어서 베트남계의 우월적 지위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민중이 받았던 고통을 피해갔다는 점에서 크메르 민족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1940년 프랑스에서 비시(Vichy) 정권이 들어선 직후, 일본군은 베트남으로 진격해 프랑스 당국을 무력화시켰다. 1941년 중반 일본군이 캄보디아로 들어왔지만, 비시 정권의 프랑스 식민지 관료들을 그대로 행정을 담당하도록 했다.
육군 원수 피분송크람(Phibunsongkhram)이 이끌던 태국의 친-일본계 정권은 프랑스 종주권이 약화된 때를 틈타, 비시 정권에 대해 예전에 태국에 귀속되어 있었던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영토를 방콕 당국의 관할권으로 반환한다는 확답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1940년 12월 프랑스-태국 간 전쟁이 발발했고, 그 다음 달에 태국의 부라파 군대(Burapha Army)가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프랑스는 육상과 공중에서는 더 나은 무장력을 지닌 태국군에 고전했지만, 타이만(태국만)의 해전에서 간신히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 도쿄의 일본 정부는 프랑스로 하여금 밧덤벙과 시엠립 도의 일부를 태국에 소액 배상금으로 양도하는 선에서 조약에 서명토록 압력을 행사했다. 어찌되었든 캄보디아는 앙코르 지역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태국의 공격이 서북지역 바깥에 사는 대부분의 크메르인들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1941년 모니웡 국왕이 서거했다. 모니웡 국왕의 아들 모니짜오(Monichao) 왕자가 후계자로 인정받고 있었음에도, 프랑스 정부는 노로돔 국왕의 증손자인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를 선택했다. 아직 어리고(당시 19세) 미숙하며 유순하다는 점에서 보면 시하누크는 이상적인 후보였다.
비록 인도차이나의 식민지 당국의 전형적인 행동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일본 정부는 “대동아 공영권”(아시아인들을 위한 아시아)을 주장했고, 캄보디아 민족주의자들 중에도 이에 동조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1942년 7월, 프랑스 당국은 불교계의 정치적 행동주의자 헴 찌우(Hem Chieu) 스님을 구속하고, 아무런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승적을 박탈했다. <나가러왓> 신문의 편집진은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주도했다. 다른 민족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일본의 진심을 과대평가했는데, 프랑스는 재빨리 시위자들을 구속하고 편집진의 한 사람인 뻣 쪼은(Pach Choeun)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나머지 편집인 손 웟 탄(Son Ngoc Than)은 프놈펜을 탈출해 이듬해 도쿄로 망명했다.
2차 대전의 마지막 달에 캄보디아는 필사적으로 국내적인 전쟁 지원에 가담하려고 노력했지만, 일본은 1945년 3월 9월에 프랑스 식민당국을 해산시키고캄보디아로 하여금 “대동아 공영권” 내에서 독립을 선포토록 종용했다. 4일 후 시하누크 국왕은 캄푸치아(“캄보디아”의 크메르어 발음 [역자 주]원어민들은 “껌뿌찌어”라고 발음함)의 독립을 선언하는 국왕 포고령을 선포했다. 5월에 손 웟 탄은 도쿄에서 귀국해 외무부장관으로 임명됐다. 일본의 패망일인 1945년 8월 15일에 손 웟 탄을 총리로 하는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다. 10월이 되자 프놈펜을 점령한 연합군이 탄을 일본군 부역자로 체포하여 프랑스로 추방했고, 그곳에서 그는 가택연금을 당했다. 그의 지지자들 중 일부는 여전히 태국의 치하에 있던 캄보디아 서북부로 가, 1940년대에 태국의 지원으로 시작된 “크메르이싸락”(Khmer Issarak) 운동의 한 분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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