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자료는 "미국 의회도서관"(Library of Congress)이 1987년에 발행한 <국가연구: 캄보디아>(A Country Study: Cambodia) 제2장에서 발췌하여,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제2장은 <크메르어-영어 대사전>을 편집한 크메르학의 대가 로버트 헤들리(Robert K. Headley, Jr)가 저술한 것이다. 헤들리는 워싱턴 카톨릭대학 교수였다. 최신 자료인 <위키피디아 영문판>의 경우도 이 자료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아,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좋은 저작 중 하나로 보인다. 하지만 이 연구는 1987년에 완결되어 1991년 이후 및 신정부 출범 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기술하지 않았다. 이후의 동향에 대해서는 다음의 게시물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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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인들의 삶에서 불교가 갖는 의미
Role of Buddhism in Cambodian Life
전통적인 남방 상좌부 승려들의 하루 한끼 식사를 탁발하기 위해 마을로 나서는 캄보디아 스님들의 모습. 행렬을 이끄는 노스님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진: Brian McMorrow) |
캄보디아인들의 삶에서 불교의 승려들은 여러 가지 역할을 담당해왔다. 이들은 공식적인 마을의 제전과 의식, 결혼과 장례에 참여한다. 또한 신생아의 작명을 해주거나 혹은 보다 작은 규모의 제사 등에도 참석한다. 하지만 승려들은 이러한 의식들을 직접 집전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의 역할은 주례, 즉 "아짜"(achar)로서 축원과 축복을 내려줄 뿐이다.
크메르의 문화적 전통에서 불교의 승려들은 오늘날의 정신과의사와 유사한 역할을 담당했고, 종종 영혼의 안식에 관한 치유를 하기도 한다. 이들은 또한 점성술에도 능하다. 전통적으로 승려들은 크메르 문화와 가치들을 보존하는 담지자였다. 이들은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모든 불자(佛子)들이 본받아야만 할 덕스러운 삶의 모델을 제공해왔다. 수세기 동안 시골지역에서는 승려들만이 문자해독이 가능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승려들은 사원의 하인들과 행자들, 그리고 새로 수계를 받은 승려들에게 교육을 베풀기도 했다. 1970년대까지 대부분의 문자해독이 가능한 남성들은 바로 이 승원에서의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 승려에 대한 캄보디아 젊은이들의 태도가 변화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에 걸친 불교로부터의 일반적 이탈을 묘사하면서, 빅케리(Vickery)는 초기 인류학자였던 메이 메이코 에비하라(May Mayko Ebihara)의 연구를 인용하거나 자신이 스스로 발견한 점들을 기술한 바 있다. 빅케리는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이미 잠시 동안 승원생활을 하면서 불교에 대해 흥미를 잃었던 젊은 청년들에게 크메르루즈가 반 종교적 감정을 주입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근대기의 승려들은 전통적인 금기사항 일부를 파기하고, 스스로 정치적 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프랑스 식민통치 시대에는 일부 승려들이 프랑스 지배자들에 맞서 항의시위를 벌이거나 반란에 가담하기도 했다. 또한 1970년대(크메르공화국 시대)에는 승려들이 친정부 집회에 참여해 공산주의를 반대하기도 했다.
반 종교적인 감정은 크메르루즈(Khmer Rouge) 시대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이 정권은 사상 최초로 승려들을 강제 환속시키고, 이들을 속인들이 가진 반 승가적 관념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크메르루즈 정권기 동안 승려들은 사찰(와트)에서 쫒겨나 강제노동을 해야했다. 1976년 제정된 "민주 캄푸치아"(크메르루즈 정권의 국명) 헌법 제20조에 따르면,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지만 "국익을 해지는" 모든 반동적 종교는 금지한다는 조건이 달려 있었다. 당시 문화부장관은 불교는 혁명과 양립할 수 없으며, 착취의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핀란드조사위원회"(Finnish Inquiry Commission)에 따르면, 크메르루즈 정권 하에서 "종교활동은 금지됐으며, 파고다(사찰)는 체계적으로 파괴됐다"고 한다. 조사자들은 크메르루즈 정권 하에서 5만명의 승려들이 처형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베트남이 침공해 들어온 이후 불교 및 여타 종교들의 위상은 크메르루즈 정권 이전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유사한 상태가 되었다.
마이클 빅케리(Michael Vickery)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의 종교정책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으로 서술했는데, 그에 따르면 불교와 이슬람교가 다시 복원되었고, 정부의 정책은 캄보디아 국민이 불교를 믿든 안 믿든 개인의 자유에 맡겨놓았다고 한다. 빅케리는 새로 복원된 불교는 이전에 비해 약간의 차이를 갖고 있었다고 적었다. 종교에 관한 사항은 PRK의 정치조직인 "캄푸치아 구국민족 통일전선"(KUFNCD)이 감독하였고, 여성, 청년, 노동자, 종교 등의 분야가 각각 대중사회조직으로 재편되었다. 1987년에 이르러서도 담마윳띠까 니까야(Thommayut, 텀마윳: 법집파) 종단이 복원되지 않아, 캄보디아에는 오직 하나의 종단만이 존재했다. 따라서 승단조직도 일원화되었다. 승왕(僧王: 산·빨-상가라자[sangharaja], 크-성까리엇) 직위도 의장(쁘라티언[prathean])으로 바뀌었다. 와트(사찰)를 세우고자 하는 마을들은 "구국민족통일전선"의 지역위원회에서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와트들은 재가신자들의 위원회가 관리했다. 내전과 크메르루즈(Khmer Rouge) 정권기에 사찰들을 지원하던 개인적 기부체계가 붕괴되었지만, 새롭게 와트들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기부체계가 다시금 큰 힘이 되었다. 위계에 따라 승려들에 대해 계를 주는 의식 역시 1979년 베트남에 있던 불교승단 대표들이 캄보디아로 들어와 복원시켰다. 이 서품에 대한 효력 문제는 여전히 의문시되고 있다. 와트 당 승려수도 2-4인에 지나지 않아 1975년 이전에 비해 현저히 줄어든 규모였다. 1981년 무렵 캄보디아에는 740개의 사찰에 4,930명의 승려가 재적했다. 1년 후 "불교도위원회"(Buddhist General Assembly)는 1,821개 사찰에 7,000명의 승려가 있다고 보고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1969년에는 3,000개 이상의 사찰에 53,400명의 승려와 40,000명의 행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빅케리는 이 주제에 대한 자신의 연구 결론을 "[PRK] 정부는 전통 불교에 대한 자유를 허용한다는 약속은 지켰지만, 적극적으로 장려하진 않았다"고 요약했다.
한편 마틴(Martin)은 1980년대 후반의 캄보디아 종교에 대해 보다 부정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1986년에 발표된 연구에서 그녀는 PRK가 일부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긴 했지만, 방관자적 입장을 견지한다고 서술했다. 그녀는 또한 복원된 소수 와트들에는 나이든 승려 2-3인만이 상주하고 있으며, 대중적 참여도 미약하다고 적었다. 승려들은 아침 무렵 혹은 불교축일에 탁발(식사)을 위한 1시간 동안만 외출하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한다. 재가신자들 역시 승려들만큼이나 늙은 사람들로 저녘에만 사찰 방문이 허락되었다고 한다. 정부에서 내려보낸 한 지침을 보면, 공무원들에게 전통적인 크메르 신년(쪼울 츠남) 명절을 쇠지 못하도록 했다. 일부 불교축일들은 허용됐지만, 보시금(시주금)의 50%를 정부가 세금으로 가져갔다. 마틴은 캄보디아 불교가 정부의 압력과 저저한 후원으로 외부적 위협을 받았고, 내부적으로는 자격미달의 승려들로 인해 위협받았다고 보았다. 그녀는 또한 두 사람의 불교지도자 롱 침(Long Chhim) 스님과 뗍 웡(Tep Vong, 텝봉) 스님이 모두 베트남에서 들어온 세력이라 생각했다. 현재도 승왕을 맡고 있는 뗍 웡 종사는 PRK 국회의 의원이며, "캄푸치아 구국민족통일전선"(KUFNCD) 국가위원회의 부의장을 맡고 있었다. 마틴은 한 난민의 증언을 인용했는데, 이 난민은 "베트남 전문가와 함께 일하는 캄보디아 공무원을 만났을 때, "종교는 독이며 아편이다. 차라리 보시금을 군대에 기부하여 그들로 하여금 전투를 수행하게 하는 편이 낫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사진: KI-MEDIA) 캄보디아에서는 스님들의 탁발은 캄보디아 아침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스님께 공양(돈이나 음식물)을 보시한 후, 축원 독경을 해주는 사이 함께 기원하고 있는 신자의 모습.
다양한 캄보디아 난민 공동체들에서 불교는 여전히 강력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비록 일부 젊은 승려들이 외국문화에 혼란스러워하며 승려생활을 포기하고 환속하기도 했지만, 1984년에 미국에는 12곳의 캄보디아 불교 사찰과 21명 정도의 캄보디아 승려들이 재적했다. 1980년대에 캄보디아 불교도들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캄보디아 불교 사찰을 건립했다. 이는 북미 전역에 걸친 캄보디아 불교도들의 열렬한 대중적 기부로 인해 가능하였다. 현재 이 사찰은 동남아시아 바깥에서 승려 수계가 이루어지는 몇 안되는 본사 중 하나가 되었다.
캄보디아의 주요한 명절은 대부분 불교와 관련이 있다. 크메르 신년(쪼울 츠남 chol chnam)은 주로 4월 중순경이 되는데, 이 명절은 심지어 크메르루즈 집권기에도 허용됐었다. 9-10월에 쇠는 조상의 날(프쭘 번 phchun ben)은 세상을 떠난 조상님들과 친지들을 기리는 날이다. 1-2월 사이에 쇠게 되는 만불제(미어 보찌어 Meak bochea)는 붓다의 설법을 기념하는 날이다. 4-5월에 맞이하는 캄보디아의 부처님오신날(삐사 보찌어 Vissakh bochea)은 붓다의 탄생과 성도, 열반의 세 사건을 기리는 날이다. 6-7월에 맞이하는 쪼울 웟사(chol vossa 입제일)는 승려들이 사원 안에만 머무르면서 참회를 시작하는 한 계절의 시작일이다. 그리고 이 계절의 끝이 까텐(kathen 해제일)으로 9월에 맞이하는데, 이 날 승려들에게 새로운 가사(승복)을 바치는 것을 비롯한 공양행사가 열린다. 1980년대 말 PRK 정권 하에서도 여전히 까텐 행사는 유지되고 있다.
캄보디아 불교는 불교가 도래하기 이전의 정령신앙(animism) 및 바라문교적 요소들과 나란히 혹은 융합된 형태로 존재한다. 대부분의 캄보디아인들은 불교도이든 이슬람교도이든 초자연적 세계를 믿고 있다. 병이 들거나 인생의 위기가 닥쳐 초자연적 도움을 원할 때, 캄보디아인들은 다양한 영들을 불러들여 도움을 얻게 해준다고 믿는 종교인들(무속인)을 초빙한다. 다양한 존재물에 거주한다고 믿어지는 토착적 신들을 위한 작은 신전들을 집 안이나 절을 물론이고, 도로가나 숲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캄보디아인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초자연적 존재들에는 몇 종류가 있다. 이 존재들은 설명불가능한 소리나 사건을 통해 현시한다고 한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존재들이 대표적이다.
- 크마웃(khmoc) : 유령
- 쁘레앳(pret)과 버이삿(besach) : 특히 사고나 비명행사를 당한 불쾌한 영혼들
- 아레악(arak) : 특히 여성이며 악령임.
- 네약 따(neak ta) : 비 정신적 사물들을 주재하는 수호령
- 믄니엉 프떼아(mneang phteah) : 집의 수호령
- 메바(meba) : 조상의 영혼
- 머렌 꽁위얼(mrenh kongveal) : 요정을 닮은 가축들의 수호령
믄니엉 프떼아와 머렌 꽁위얼을 제외한 모든 영들은 자신들의 적절한 측면들을 보이게 되어 있으며, 작은 장난에서부터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현시한다고 한다. 이들로부터 사람들을 구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이 영들을 위해 음식을 공양하는 것이다. 만일 음식을 공양하지 않으면, 이 영들이 사람들을 위협하는 문제를 발생시킨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만일 살아있는 자식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음식을 공양하지 않으면 영혼은 자식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계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때는 끄루(kru: 무속인), 아짜(achar: 제관), 트몹(thmup: 마술사), 룹 아레악(rup arak: 영매, 대체로 남성)의 도움을 받는다. "끄루"는 영들을 달래는 수호물을 만들거나 부적을 적어 신들린 사람을 보호하는 사람이다. 그는 병을 치유하고, 잃어버린 물건을 찾거나 마술적 환약을 만든다. 전통적으로 캄보디아인들은 수호물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갖고 있다. 군인들이 총탄을 피하게 해줄 부적을 소유하는 일은 매우 일반적인 것이다. 끄루는 부적을 만들고 그것과 그 소유자 사이의 초자연적 관계를 만들어주는 힘을 가졌다고 믿는다. 통상 끄루들은 지역 공동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전직 승려였던 경우가 많다.
또다른 마법적 실행자인 "아짜"는 제의에 관한 전문가이다. 그는 통과의례(life-cycle ceremonies)와 관련한 영혼 숭배를 사찰에서 행할 때, 그 의식을 주관하여 집전한다. 룹 아레악은 영혼을 빙의하여 영계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영매이다. 트몹은 병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저주)을 가진 마술사를 말한다.
(사진: EPA) 태국과의 국경분쟁이 발생했던 쁘레아 위히어 사원에서 포착된 캄보디아 특수부대 병사와 스님의 모습 (2008년 가을 경)
"하오 띠어이"(haor teay)라 불리는 역술인들도 캄보디아인들의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들은 결혼이나 건물 신축, 장기간의 여행과 같은 문제에 대해 상담해준다. 이들은 미래의 일을 예견하고 다양한 활동의 길흉을 점칠 수 있다고 믿어지고 있다.
촌락 사람들은 영계 및 그 힘에 대해 민감하다. 1970년대 미국 선교단의 조사는, 촌락민들이 이듬해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토착적인 수호령에게 제사를 지냈고, 신임 도지사가 지역의 안위를 위해 고사를 지내고, 병사들이 영매나 무속인들에게서 적군의 총탄을 피할 부적이나 마법 옷을 받았음을 기록했다. 또한 적군과 전투를 치르기 전에 지방 사령관이 향을 피우고 적군을 패퇴시키도록 영혼을 청하기도 하였다. 국가의 안녕과 관련한 다양한 바라문교적 제의들도 통치자 및 바꾸(baku: 왕실의 바라문 사제)를 통해 거행됐는데, 1970년 시하누크(Sihanouk) 공이 실각한 후 중단되기도 했다.
연구발표: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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