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조>-이상한 이야기 나라의 조
액자 하나(담과 노부부의 이야기)
붉은 장미로 가득한 음침한 벽.
그 벽에 걸린 한 무리의 말들이 그려진 네모난 액자.
카메라는 그 액자 위에서 한참을 머물러 있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는 액자식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소식이 끊긴 아들을 찾아 무작정 상경한 노부부(김수웅, 박혜진 분)는 여관에서 아들 친구 담(김동현 분)을 만난다.
담의 말에 의하면 영화 감독인 노부부의 아들(김영필 분)은 조감독 시절 그와 두 편의 영화를 함께 한 여배우 우주현이 자살하자 "어떤 이야기도 만들지 못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잠적했다는 것이다.
액자 둘(레지와 이감독의 이야기)
300만 관객으로 흥행에 성공한 이감독(조한철 분)은 다음 작품 구상을 위해 프로듀서에게 이끌리듯 시골로 내려가 '고동산 모텔'에 장기투숙한다.
무료한 그는 커피 배달을 시키고 '아리랑 다방' 레지(신동미 분)로부터 그녀가 만났었다는 영화 감독 로맨스 조(노부부의 아들)의 이야기를 전해듣게 된다.
그녀의 손목에는 자해 흔적이 있다.
뭔가 신산스러운 과거를 가진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그녀.
(다방 레지가 전하는 이야기는 다름 아닌 로맨스 조의 내레이션으로 표현된다. 재미있는 내러티브다)
-어디가 좋을지 많은 고민을 했다. 영화를 하며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다시 보고 싶었다. 게다가 주현이 누나의 흔적도 볼 수 있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 대목에서 아무런 근거가 없음에도 내가 좋아했던(지금은 세상에 없는) 아름다운 한 여배우를 떠올리게 된다)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있다.
그러나 '낭만 가득'이라는 글씨가 적힌 교각 아래 징검다리에서 개똥을 밟고 만다.
낭만은 개뿔, '깨끗하게 사라지고 싶은' 그는 공중화장실에 갔다가 벽에 붙은 '초원 사진관' 액자를 본다.
(허진호 감독 <8월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오마주다. 이광국 감독은 언젠가 '인생 영화'로 <봄날은 간다>를 거론한 적이 있다. 개인적인 얘기지만 나 역시 그렇다)
여관에서 이런저런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하던 로맨스 조는 결국 실패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래서 죽은 거야? 죽었구나..."
레지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이감독은 왜 그의 이름이 '로맨스 조' 인지를 묻는다.
로맨스 조(이하 조)라는 이름을 붙인 건 다름 아닌 레지다.
그녀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액자 셋(담이 구상중인 시나리오에 대한 이야기)
담은 조의 어머니에게 자신이 구상중인 시나리오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엄마를 찾아 헤매는 소년의 이야기이다.
소년은 오래 전 집을 나간 엄마의 편지를 들고 '아리랑 다방'을 찾아 온다.
엄마 이름은 김초희.
소년은 엄마도 같은 상처가 있었다면서 레지의 손목 흉터에 관심을 보인다.
집을 나간지 7년 만에 나타나 부모님께 아이를 맡기고 사라져버린 초희.
소년의 가출 목적은 엄마를 아는 사람을 찾아 그녀의 얘기를 듣는 것이다.
숲에서 손목을 긋고 울다 쓰러진 초희(이채은 분)를 발견한 조(이다윗 분)는 그녀를 병원으로 옮기고 다시 돌아와 초희의 체육복과 가방을 챙긴다.
(초희의 자해는 불미스러운 '소문'이 원인이고 그것은 여배우 우주현의 자살을 연상시킨다. 마치 평행이론처럼)
위험한 고비를 넘긴 초희에게 조는 고백한다.
"처음부터 널 좋아했어"
"까불지마, 너도 이제 소문 날 걸? 꽤 독하다, 그거"
"난 상관 없어, 그런 건"
그렇게 두 아이들의 풋풋한 사랑이 시작된다.
조가 초희와 함께 동굴 앞에서 나누는 '토끼'에 관한 이야기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차용한 이미지다.
(책을 좋아하는 초희와 다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 레지의 모습은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다. 그녀들의 손목에는 비슷한 상처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같은 인물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던 레지는 반대편에 앉아있는 조를 보고 그의 테이블로 간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드러나는 미장센은 바로 '액자식' 구도이다. 중앙이 오픈 된 푸드 트럭 앞쪽엔 레지가, 뒤쪽엔 조가 앉아있다. 원근법에 의해 마치 액자 속에 작은 액자가 위치하고 있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여자가 이야기를 청하자 술에 취한 조가 언성을 높인다.
"우린 왜 이야기를 해야만 합니까? 이야기가 없는 나는 왜 죽어야 합니까?"
('이야기'는 조의 생명이고, 다방 레지의 삶의 수단이며, 결국 이 영화를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 의미이다)
조와 하룻밤을 보낸 레지는 전날 그가 썼던 유서를 발견한다.
-...뭔가를 꼭 해야 한다면, 그래야만 한다면 인사를 하고 싶어요. 모두 안녕하시길...-
여자는 그의 유서를 찢어버린다.
그런데 담은 '시나리오 속 조'의 생사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의 이름이 담(이야기)이라는 것을 상기하자!)
조의 어머니는 다방 레지가 소년의 엄마이거나 소년의 친부가 조이길 바라고 있다.
(복잡한 서사 속에서 관객들은 하나 둘 길을 잃는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면서 액자식 구조는 점차 뫼비우스의 띠처럼 경계가 모호해진다.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이야기 중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지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희한하게도 이해를 포기하는 순간 감독이 의도한 바대로 우리의 상상력은 극대화 되기 시작한다)
액자 넷(어머니가 회상하는 조의 짧은 가출에 관한 일화)
초희를 따라 가출한 조가 서울의 한 여관방 냉장고에서 발견한 책은 다방 레지가 읽고 있던 '마담 보바리'이다.
결국 조는 낯선 여관방에 초희를 남겨둔 채 울면서 도망친다.
십대 소년의 충동적인 가출이 주는 두려움이 첫사랑의 달콤한 로맨스를 이겨버린 것이다.
이제 이야기는 끝을 향해 달려간다.
초희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는 조에게 레지는 이야기가 없으면 '자기 얘기를 만들라'고 충고한다.
거리의 여자가 된 초희는 우연히 길에서 영화를 찍고 있는 대학생 조를 보고, 그의 첫 영화 '로맨스 조'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게 된다.
조는 초희를 몰라보지만 그들의 순수한 사랑이 고스란히 담긴 시나리오를 본 그녀는 환하게 웃음짓는다.
레지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나고, 그녀의 이야기에 영감을 얻은 이감독의 시나리오는 비로소 시작된다.
그런데 이광국 감독은 또 한 번 관객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동료 종업원에 의해 레지의 정체가 밝혀지는데, 그녀는 지방대 국문과 출신으로 그녀에게도 떨어져 사는 아이가 있고 이제껏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는 상대가 듣고 싶어하는 '맞춤식' 허구라는 것이다.
(그녀가 읽고 있던 '마담 보바리'의 주인공 '엠마'의 불행한 삶은 이 이야기 속 모든 여성들(우주현, 초희, 레지)의 삶과 중첩된다. 말하자면 그들은 같은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 액자(조와 소년의 이야기)
고향으로 돌아간 조는 처음 초희를 만났던 그 숲에서 소년과 마주친다.
소년의 이야기 속 아버지는 어쩐지 조를 연상시킨다.
그를 바라보는 소년에게 조가 묻는다.
"왜, 무슨 할 얘기 있어?"
소년은 가슴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보고는 말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토끼처럼)
"할 이야기가 있긴 한데 시간이 다 된 것 같아요"
조는 어리둥절하지만 관객들은 안다.
그가 '이상한 이야기 나라' 속 조이며 이제 곧 영화는 끝이 난다는 것을.
이광국 감독의 <로맨스 조>는 '2010 씨네21' 신인 감독 발굴 프로젝트 당선작으로 임순례 감독이 제작을 맡았다.
홍상수 영화의 조감독이었던 그의 이력은 영화 내, 외적으로 무시 못할 영향을 미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의 영화는 충동적이고 냉소적인 홍상수의 스타일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그의 터치는 좀 더 치밀하고 따뜻하다.
이 영화에 각별한 애정을 느끼는 한 사람으로서 그가 '홍상수 키즈'라는 타이틀을 지나 '청출어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내게 영화는 사랑과도 같다.
쉽게 빠져들고 금세 잊히는 만남이 있는가 하면, 처절하게 아프고도 모든 게 용서되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내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방법은 '기억'이다.
<로맨스 조>는 오래도록 기억 될 영화이다.
글/배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