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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의 성결(요약)
Thomas Cook, 감리교교육국譯
저자의 의도
만약 성결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결에 도달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고 할 수 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성결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자 한다. 특별히 저자는 체험을 강조하고, 성경 안에서 말하는 성결에 대한 의무와 권리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제 1 장 허물이 없다고 완전해진 것은 아니다.
스펄존은 “신자가 불신자 보다 도덕적으로 볼 때에 높은 자리에 있는 것과 같이 신자의 자리보다는 더 높은 은혜스러운 자리가 있다”고 말하였다. 즉 그는 신자에게는 성결된 생활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성결’이란 말은 종교적인 생활과 그 발달하는 단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전부를 여기에 넣을 수 있다. 그러나 의롭다는 것과는 떠나서 특수한 체험으로 나타내는 한정된 의미로 쓰이는 일도 있다. 이런 의미로 성결은 우리의 영혼에서부터 죄의 요소를 물리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또 성결이란 원죄에서부터 정결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카-라일은 ‘성결’이란 독어로 하이리그(Heilig)인데 이 말은 건전하다는 뜻이고, 영어로 홀(Whole)과 같은 뜻으로 이 ‘거룩’이란 건전한 것 즉 건강하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더 궁극적으로 말한다면, 성결은 하나님이 우리를 적극적으로 사랑하신 은혜에 쌓이고 성령의 충만하심이 영원히 머물러 있는 경험이다.
예수님은 소경에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했을때 구체적으로 그의 요구를 들어주셨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거룩한 생활을 하다가 휩쓸리기 쉬운 잘못을 낱낱이 들어서 주께 간구한다면 한결 성결이 무엇인지 속히 깨닫게 될줄 안다. 도덕적인 죄는 완전히 씻어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 완전케 되려면 하나님의 손에 흙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다시빚으실때 가능한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실때까지 진노할 바가 없도록 우리를 지키는 도리 밖에는 없는 것이다.
제 2의 아담인 주님의 율법을 우리에게 내리심은 죄로 인하여 완전한 율법을 지킬수 없기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땅에서 이룩할 수 있는 완전이란 다만 사랑으로서 우리의 동기와 마음자리를 그리스도께 완전히 두는 것을 말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의 결과를 보시지 않고, 우리의 마음의 동기를 보신다. 온전한 사랑이란 언제나 그 성공하는 결과를 가르킴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온갖 행동에 지성을 다하여 바치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인 것이다.
제 2 장 성결과 유혹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심에 왕으로 오신 다음부터는 싸움이 멈춰지고 육에 붙은 정욕과 원죄 그리고 우리의 영혼을 썩게하는 것들과는 싸움이 끝나게 된다. 우리가 유혹을 받는다고해서 성결해지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을 할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도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신”(히4:15)분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유혹은 언제받는가
그것은 때때로 은혜를 충만하게 받기 전과 다음에 오는 예가 많다.
왜 주님은 유다가 도적인줄 알았지만 돈 주머니를 맡기셨는가?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각기 돈궤를 맡기고 계신것이다. 돈궤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충성심을 다루어 보시는데는 가장 좋은 물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혹이 심한 가운데 유혹을 이기고 충성심을 보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혹을 묵인하신다. 왜냐하면 우리의 약한 곳을 강하게 만들 수 있는 길은 유혹뿐이며 그 유혹을 이겨내면 약한 곳이 강하게 되기 때문이다.
성결함을 받은 자에게는 그 마음 속에 악을 품지 않았으므로 악념이란 없을 것이나 밖에서 들어오는 사상과 악한 귓소리는 틈틈히 들어오므로 그 때마다 이를 물리치는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것은 유혹을 만나는 것이 죄가 아니라 유혹에 빠진 결과가 죄라는 사실이다.
제 3 장 죄는 없어도 산다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는 유일한 비결은 늘깨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완전한 길을 얻기위한 우리에게 요구되는 댓가인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죄와의 싸움의 끝은 새하늘과 새땅이 열리는 시기 뿐이다. 성결한 자는 죄를 못짓는 것이 아니라, 안짓는 것이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교리는 크리스챤은 죄를 범하지 않는자라고 한다. 그러나 범죄하지는 않아도 범죄할 가능성마저 없는자라고는 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죄를 범하고 그 죄에 대해 하나님께 고하면 하나님은 긍휼히 보시고 다시 더럽히지 않도록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 죄를 깨끗케 하신다. 신약에서의 죄란 그것이 죄인지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짓는 죄를 말한다. 바꿔말하면 무의식중에 지은죄에 대해서는 죄에 대한 댓가를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선을 행한다고 해서 율법이 필요치 않는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를 용납하고 시시 때때로 주님의 죽으심의 공로를 받아드리고 또한 지금까지 주님이 날 위하여 죽으신 그 은총 아래서만 살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과실이나, 연약함으로 불가피하게 죄를 짓게 된다. 그러나 거듭난 자에는 그리스도께서 도우시는 힘으로 죄를 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방법은 죄에 대하여 피하거나, 숨을 곳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악에 대하여 이길힘을 주심이다. 우리는 약하다 그러나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것을 할수 있느니라(빌 4:13)는 말씀과 같이 우리에게 힘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것을 할 수 있는것이다.
제 4 장 죄 사함과 정결함
범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고의로 범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나 심령이 부패했다는 말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으므로 그것이 자손에게 유전하여 대대로 마음의 발판을 이루었으므로 이를 가리켜 선천적인 죄(원죄)라고 말한다. 곧 죄의 구조는 원죄인 부패로 말미암아 죄를 낳게 되는 것이다. 죄를 짓는 것은 마음으로 짓는것과 행위로 짓는죄가 있듯이 구원의 방향도 두 갈래가 있다. 범죄는 구속으로, 부패는 정결함으로 구원의 행위를 이루어 놓으신다. 이때 범죄는 용서하실수 있으되 부패함은 반드시 정결하게 함으로만 없앨 수 있는 것이다.
구원에 대해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 이유는 그가 첫 구원의 감격을 맛보았을때 자신의 추한고 더럽고 썩은 모습을 바라본다면 그는 믿음이 자라기도 전에 그의 믿음이 끊길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러서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것이다.
제 5 장 신생(新生)과 완전한 성화(聖化)
누구든지 새로운 성격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얼굴은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생이란 성결의 시작이다. 이것은 완성이 아니다. 그러나 이 신생은 더러움에서 완전히 떠나지 못한 상태이다. 즉 신생에서는 죄가 억제되고 정복당하는 것이지 그 죄가 소멸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완전한 성결은 최고의 완성이며, 신생된 자에게 남아있는 성결의 적을 영혼밖으로 몰아 낸 다음 오는 상태이다. 불로서 금을 연단하듯 성결은 악독한 뿌리며 죄악의 싹들을 전부 없이 하여 버리는 작용이다. 이때가 되면 하나님을 반항하는 것은 하나 없이 마음에 화평의 왕으로 모시는 온전한 혁신이 있게 된다.
롬6:6에는 “멸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비평적 연구결과 ‘소멸한다’ ‘망한다’ ‘폐한다’ 의 뜻으로서 적극적 번역을 할 수 있음이 입증되었다. 구약에서도 죄에 대하여 몰아 내도록 권고한 말씀은 없고 도리어 ‘버리라’ ‘제하라’라고 나와있는 것이다. 또한 바울이 말한 거룩(살전5:13)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성별된 것을 말하며 또 하나는 맑고 깨끗하게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이다. 바울은 이 거룩을 ‘온전히 ’(가장 힘있는 표현)라는 단어를 통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제 6 장 순결함과 그 열매
모든 것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성결에는 그 정도의 차이조차 없다. 영어의 깨끗함이란 말은 그 뜻에 있어서 잡것과 완전히 떠난 후 혼합물이 없는 상태라고 웹스터 사전에 기록되어 있다. 즉 순수한 상태를 말한다.
‘결실’이란 말은 깨끗함은 물론 그 보다 더욱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성결에서는 마음의 깨끗함과, 그리스도인의 덕으로서 이룬 결실을 구별하고 있다. 마음의 깨끗함은 유일회적 섭리이며 그리스도인의 덕으로 이룬 결실은 교육과 훈련으로 기른 다음의 상태인 것이다. 고후7:1의 말씀에서 ‘깨끗하여 지자’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능력을 빌어서 깨끗함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넘치는 은혜를 허락하심 같이 성결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결국 깨끗함에는 그 결실이 없다. 그러나 깨끗함이 바탕이 되어야 사랑의 열매와 다른 영적인 결실을 맺을수 있는 것이다. 즉 깨끗하여 진다는 것은 죄를 몰아내는 것이며 그 때부터 결실을 거둘 수 있는 밭과 같은 것이다.
제 7 장 성결은 현재에
성결이란 죄에서의 구원을 말함으로 다음과 같은 물음이 일어났다. 첫째. 타고난 더러움은 거듭난 후에도 남아있는가? 둘째. 만약에 더러움이 남아있다면 영원에서 부터 몰아낼 수 있을까? 셋째. 몰아 낼 수 있다면 그 때는 언제일까? 하는 것이다.
크리스챤들은 먼저 두 가지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말들을 하지만 세번 째에 와서는 의견이 나누어 진다. 어떤이는 죽은후 구원함을 받는다고 하고, 어떤이는 오랫동안 영적으로 성장한후에는 죄가 소멸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즉시로 죄에서 구속함을 받는 경험을 믿는다. 성경에는 성결을 받는 시기와 방법과 장소는 가르쳐 준바가 있지만 반드시 먼저 죽어야 구원이 온다고 가르친 곳은 없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기전에 우리를 온갖 죄에서 구원하신다. 즉 온전한 성결은 이세상애서 가능하다는 말이다. 성결은 진행과정을 의미한다. “찬송할지어다 깨끗함이여” 에서 이말은 현재 진행형으로 쓰여있다. 즉 “깨끗해 간다” 이다. 이말을 하바갈 여사는 “계속하는 현재 즉 끊임없는 현재이며, 지금 현재가 다음 순간에는 과거가 됨이 아니다. 깨끗하기 위하여 우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우물 속에 머물러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앙의 훈련을 가져야 하며 항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할 것은 물론이요 우리의 헌신도 확대해야 하는 것이다.
제 8 장 하나님께 사로잡힌 영혼
성결은 마음에 있는 모든 죄를 물리치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방향은 소극적 면과 적극적 면이 있다. 회개할때의 소극적인 부문은 속죄이고, 적극적 부문은 거듭남 즉 새생명을 얻는 것이다. 소극적 부문은 육에 붙은 정욕을 씻는 단번에 되어진 상태이며, 적극적인 은혜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하게 채우는 일이다. 즉 의롭게 됨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로 들어감이요 거룩하게 됨은 그리스도가 우리안에 들어오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마음을 주님께 맡길때 거룩은 가능한 것이다.
주님은 우리안에 계시고 영원히 떠나시지 않으신다. 주님의 말씀에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14:23)고 하셨다. 이와 같은 말씀은 구약에서는 듣지도 못하던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리 천할지라도 하나님을 진실되게 받들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안에 거하신다. 이제 우리는 겨우 죄에서만 벗어난 것이 아니라 평안과 기쁨과 승리의 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것이라는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을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내 뜻이 마지막으로 주께 항복할 때에야 비로소 생명의 부활이 오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일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 하리니 나는 나의 전부를 영원히 주께 바치고 그리스도께서 가시는 곳마다 따르기로 했다”고 결심할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는 우리를 주관하시는 것이다.
제 9 장 완전한 사랑
신약에서 쓰이는 사랑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피로스이며, 이것은 자연적인 인정을 나타내는 것이고 또하나는 아가페로 이것은 성령을 통해서 영혼으로 내려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 자연적인 사랑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나라안에 살기 전에는 얻지 못하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내리셔서 그 사랑이 우리의 것이 되면 이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이 바로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6) 하신 기도의 내용인 것이다. 이제는 “내가 저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 하라”는 새 계명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그때 우리는 가난한 자, 고통받는 자, 잃어버린 양을 돕는 주의 일을 하게되며, 이러한 동포에게 행한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은 증명되는 것이다. 또한 이때는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무서워서가 아닌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럴때 우리는 온전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바로 이 사랑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모든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사랑은 곧 하나님이시다.
제 10 장 복음적인 완전
완전을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 가노라”(빌3:14;5)라고 하였다.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은 온전히 성결된 형제의 내적 영혼이나 기질이 주 안에서 사는 도덕적 기백을 말한다. 즉 완전이란 마음 구석구석까지 주님이 들어 오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완전은 절대적 완전이란 뜻이 아니고 그 결정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함 같이 하늘에서의 완전은 획득하기 보다 「승리의 면류관을 받고 비로소 그가 달리는 길은 끝난다」라느 말씀을 우리는 주의하여 보아야 하겠다.
누구든 크리스챤의 완전을 가리켜 말하기를 이것은 잡힐듯 하면서도 사실은 우리 보다 언제나 앞에 있는 목표점이며 일생을 두고 부질없이 달려가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명령을 받은 자이며 이를 얻도록 지시받은 자들이다. 따라서 이 경험은 현재의 것이어야 한다.
복음적 완전은 다음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 우리 각자의 능력에 비하여 내리신 사랑의 완전 둘째, 우리의 형편과 재능과 힘이 더하여 감에 따라서 동행하는 사랑의 발전 이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사랑을 원하시며 또 그 완전한 사랑을 실행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약속이라 생각된다.
제 11 장 성령의 충만
성령의 세례는 죄에서 깨끗케 하셨음을 알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충만하심은 곧 성화됨과 같은 뜻이다. 이 성령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오는 것이며 옛날이나 지금이나 성령의 세례는 오순절 때와같이 승리의 생애를 시작하는 출발하는 것이다. 여기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서에 밝히 나타남과 같이 모든 신자는 다 같이 성령과 사귄다는 것이다.
이 성령은 마음에 오시면 사랑의 불이 되어 그 능력에 불붙이는 기름병이 되시는 것이다.
오순절에 내린 성령은 그 다음에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내리실 것이라는 보증금과 같은 것이며 우리는 이러한 성령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거듭난 다음 성령으로 충만하여 지는 특권이 되는 것이다. 주시려는 그 은혜에 우리가 순종하고 받아들인다면 연약한 자에게라도 무한한 선물로서 주어질 것이다.
성령의 오시는 모습은 때로는 이슬과 같이 내리며 때로는 조용한 봄비와 같이 내리며 혹은 사나운 소낙비와 같이 쳐들어오기도 한다. 받는 자에게도 혹은 성령이 임재하실 때 넘어지도록 무섭게 오시기도 하며 혹은 기쁨과 확신 속에 오시기도 한다.
제 12 장 산제물
구약시대에 드린 희생의 제물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속죄를 위함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표로서 드리는 제사이다. 신약시대에 속죄제는 갈보리에서 어린양의 보혈로 온전히 이루어 놓으셨으나 헌신하는 제사는 아직도 교회에서 계속한다. 산제사는 과거 율법아래 묻혔던 희생의 제물과 좋은 대조가 되는 말이며, 이것은 불에 사르는 희생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에게 몸바쳐서 일생봉사하는 생활을 의미한다.
제사는 속죄를 위한 것과 또 하나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표로서 드리는 제사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밝히 보여주시는 뜻에 따라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산제물이 되어야 한다. 즉 주님께 우리의 영육을 바쳐 그의 절대적 명령에 순종하고 먹으나 굶으나 주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표준에서 비추어 볼 때는 비천하고 나약하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안에 계시고 우리 행동을 주관 하시면 이 타락한 세상에서도 주님의 역군이 되기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주님께 헌신한 것에서 얻어지는 그 이들은 세상의 어느것과 비교할 수 없으며 생명에 이르는 문인 것이다. 물론 그 길은 멀고 험난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길로 부르시고 순종하도록 마음을 녹이는 것은 곧 자비하심인 것이다.
제 13 장 하나님과의 동행
성결이라는 마음의 상태가 아니고 길이다. 또한 길만이 아니고 속죄함 받은 자가 걸어갈 큰 길이다. 우리가 이길을 걸을 때에는 항상 그리스도와 행동할 수가 있다.
하나님과의 함께 걷는 길은 길동무, 사귐, 진보 이 세가지가 있다.
1)길동무
이 사귐은 어느 물질로도 막을 수는 없고, 또 시간,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사귐이다. 이야말로 참된 마음의 벗이며, 참 사랑은 하나님께나 사람에게 이와 같은 것이다. 주님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신다. 이것은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실 것이다. 그때 그리스도인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것이며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긴요한 비결인 것이다.
2)사귐
크리스챤이 사귐이라 할때는 언제나 그리스도와 내가 영적으로 결합한 것을 의미한다. 서로 말하는 동안 상대자와는 마음이 통하는 것이다. 이때는 서로의 고통을 나눌 수 있고 해결 책을 주기도 한다. 신약에서는 주님과 신자간의 사귐을 개인적으로 알고 친구로서 사귀는 것으로 기록하였다.
사귐이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말하며 듣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서 말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주께서 달리시는 십자가도 친구로서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그 은혜를 내리실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섭리하시는 바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주님과 사귐을 갖기 위해서는 너무도 번잡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3)진보
하나님은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걸으면 우리도 후퇴할 까닭이 없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은 전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진보를 위해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서 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께 감사하고 주께서 나에게 계시는 동안 그리스도의 형상을 서서히 완전해 가는 것이다.
진보는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길에 따라가는데서만 찾아 볼 수 있다. 의심없이 믿고 거역함 없이 순종하는 그 믿음의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가리킴을 받고 나아가는 자이다.
제 14 장 비율라의 언덕
존 번연의 책 천로역정에는 순례자가 죽음의 강을 건너기 전에 비율라의 세상을 지나는 장면이 있다. 거기서 그는 약속의 땅을 생각한다. 바울은 그곳을 가리쳐 하늘 곳 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존 번연은 이를 가리켜 비율라의 땅이라고 기록한다. 이 하늘 곳은 하늘 나라를 가르키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죄와 슬픔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살고 있으나 마음만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예수가 계신 곳은 비록 이 세상이라도 하늘 나라이다. 하늘 나라는 장소보다 영적 분위기를 이룬 곳을 말한다. 하늘 나라는 어느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영적 분위기를 이룬 곳을 말한다. 하늘나라는 장소 보다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어느 저자는 이 비율라를 천국 가는 길가의 작은 천국이라고도 하였다. 사람들은 천국은 죽은 후에 갈 수 있는 곳으로 인식하지만 사실 믿는 우리들에게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이다. 만약 믿음만이 비율라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라면 우리는 믿음을 얻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제 15 장 영혼의 안식처
우리가 의식하는 안식이야말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자에게 무엇보다도 뚜렷한 증거의 하나이다. 히브리서에 나타난 바를 말하면 이 안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우리의 수고를 쉬게하는 안식 둘째,번뇌와 공포에서 벗어나는 안식 셋째, 속 싸움을 그치고 쉬는 안식 즉 마음속의 뿌리 밖은 죄에서 구원하는 안식을 말한다.
1.이 안식은 우리의 수고를 끝맺는 안식이다.
많은 신자들이 잘못되는 원인은 곧 저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일생을 보내려고 하는데 보다 자기의 결심으로 생애를 잘 보내려는데 있다. 복음의 방법은 우리의 의지를 강철같이 굳게 단결해서 반드시 이기도록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영혼을 온전히 그리스도에게 바치는데 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의 잘못된 점은 자신의 일생을 자기의 결심으로 보내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잘못된 것이며 우리는 눈을 들어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지만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 자신의 맹세에 의거하여 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을 보게 된다.
2.이 안식은 장래의 불행과 재난의 심령에서 떠나는 안식이다.
모든 염려의 밑바닥에는 하나님을 의심하는 마음이 깔려있다. 안정성의 비결은 의뢰함이다. 우리를 위하여 세워두신 하나님의 계획은 그 어느것 하나도 하나님의 뜻인 이상 염려할 것은 없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가 하나님의 실수를 염려할 필요가 있는가? 완전한 의뢰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오는 것이며 우리는 그분만을 의지하여야 한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 뜻은 곧 완전한 의뢰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완전한 만족이 온다는 것이다.
3. 속마음의 안식
안식이란 싸움을 끝내는 것이다. 곧 안식을 얻는 자는 육과의 싸움을 그치는 자이다. 이제는 더이상 싸움을 하지 않고 생명을 얻는 것이다.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을 밖아 버린다는 것이다.
제 16 장 교회에 남긴 그리스도의 유산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때 그 유물들을 아래와 같이 분배 하였다. 그 영혼은 천부께, 몸은 아리마대 요셉에게, 옷은 군병들에게, 어머니는 요한에게 그러나 주를 위해 모든것을 버리고 따라 다니던 제자들에게는 은이나 금을 주신것이 아니라 평안이다. 그러나 이 평안은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평안이며 하늘로부터 믿는 자의 영혼 위에 내리는 평안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과 화목한 자라고 하겠으나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평안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이 평안은 사람들이 작 중심으로 살 때에 일어나는 불안과 염려와는 반대로 온전히 하나님께 의지함에서 얻어진 평안 곧 주 예수께서 「나의 평안」이라 부르신 평안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사정과 형편이 평안할 때 안정하기란 쉬운 일이지만 고난과 걱정의 물결이 닥칠 땐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안은 이러한 폭풍속에서도 조금의 동요도 없는 것이다. 이 평안은 오로지 주님안에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은사를 구하지만 말고 먼저 주를 찾아야 한 것과도 같다. 그리스도의 평안은 세상 끝날 까지 영원히 안전한 대양에 이르기 까지 가득찬 축복으로 점점 더 깊어만 가고 넓어져 가는 강과 같다.
제 17 장 성령의 기쁨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유혹을 이기려면 저들보다 나은 음악과 기악이 있어야한다. 세상의 기쁨을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의 기쁨을 체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맛보게 되면 세상의 것에 대하여 눈을 돌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따라서 성령의 기쁨을 맛본 자는 언제나 초연한 모습과 기쁜 낯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기쁨에 차 있는 성도의 얼굴을 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까닭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마음으로 부터 노래하지 않고는 못견디는 지경이면 이는 확실히 성령이 임하신 증거이다.
챨스 웨슬레의 찬송가에 나타난 기쁨과 승리가 오늘날의 신자에게서 사라져버린 이유는 그리스도의 참된 구원을 각자가 실지로 맛보지 못한데서 왔다고 본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성령충만과 술마시는 것을 항상 동시에 취급한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심을 받았을 때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기쁨을 나누게 되는 것이다.
제 18 장 봉사의 힘
영적으로 일하는 자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영적인 힘이다. 물론 다른 능력도 헛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령에게 의존하지 않고 그 재주와 기능에만 의지한다면 위태롭다.
사람들이 거듭남도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그를 움직여 그 능력으로 구원해 내는 것이다. 성령은 한분이지만 받는 사람의 성격과 소질과 영적인 역량에 따라서 그 결과는 달라진다.
오늘날도 성령을 받은 자는 그의 주변 여건과 자질과는 상관없이 그가 일하는 곳에서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성령은 사람이 공상하는대로 우리에게 그 성격을 빌리시는게 아니고 반드시 자신이 우리의 마음 안으로 임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내리시는 은사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
능력으로 일년을 일하면 자기 힘으로 백년을 일 한 것보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제 19 장 귀하게 쓰이는 그릇
크리스챤에는 두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는 남을 해롭게도 않고 선한 사업을 힘쓰며 대체로 악과 멀리하며 하나님의 예배에 참석한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그들은 세상과 싸우려는 열심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분투하는 노력도 희미하다. 둘째는 악과는 물론 멀리할 뿐만 아니라 모두 착한일에 적극적이다. 저들은 모든 예배에 참석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성품대로 살아가려고 분투하는 자들이다. 이런 자야말로 귀하게 쓰일 그릇이며 그리스도의 교회안에서 귀한 인물이다.
1. 거룩해진 것
즉 하나님께 바치려는 짐승을 무리에서 구별한 첫 짐승을 일컫기도 하였다. 즉 보통 사용하는것과 구별하여 신성하게 하기 위하여 쓰이는 말이었다. 이처럼 성화의 근본적인 사상은 떼어둔다는 것이다. 악한 것으로부터 멀리하여 그 마음과 생애를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토록 만들어 바칠 때에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이 거룩하기 위한 것은 헌신의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가 헌신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정결케 하신다. 우리가 헌신하자마자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행하신다.
그리스도인의 헌신을 주 예수의 날까지 온전히 이루어진 흠잡을 곳이 없이 보존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 주께 쓰이는 그릇
쓰임은 주인에게 알맞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사회인의 영혼에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 주는 파이프이다. 그러나 못쓰게 녹슨부분은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만 누구에게든 하나님의 은혜를 풍족히 나눠줄 수가 있을 것이다. 거룩한 교역자는 하나님의 손아귀에 있는 예리한 무기와도 같다. 성결과 쓰임은 서로 떠날 수 없는 관계이다.
아무리 그릇이 좋아도 그 그릇이 좋은 주인에게 쓰이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는 것처럼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께 쓰여져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참된 믿음으로 돌아간 자라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하나님이 원하시대로 정결하게 씻기운 그릇이 되어야 한다.
3. 모든 선한일에 예비되는 것.
이말은 모든 봉사에 응하도록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준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연한 일이라도 꼭 핋요하다면 크리소스톰의 말과 같이 죽기까지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음성을 들었을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한것같이 우리에게도 죄를 씻는 날 하나님의 부르심에 개의치 않고 앞으로 나갈것이다.
제 20 장 헌신
크리스챤이 영적으로 거듭난 체험을 말하는 자들에게는 두가지의 주장이 있다. 하나는 거듭나려면 사람의 의지에 중점을 두고 인간이 절대 복종해야만 한다고 주장이고, 다른하나는 은혜를 받으려면 믿음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완전히 주께 의지하려면 완전한 복종이 있어야 하며, 또 믿지 않으면 복종할 수도 없기 때문에 이 두주장이 모두 옳다고 하겠다.
완전한 주님께 대한 의지는 완전한 복종과 또 그 믿음이 중요하다. 온전한 순종은 곧 헌신하는데서 온다. 하나님이 원하시는바에 따라 살고 그 뜻대로 고생까지 견디어 가는 자이다. 우리는 전부를 바쳐서 그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며 신실한 종으로 살려는 결심이 서야 한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산자로 여겨야 한다.
제 21 장 거룩한 믿음
헌신과 온전한 거룩과는 서로 다르다. 즉 헌신이란 각자 하나님의 도우심을 빌어 자기가 이룩할 일이며 거룩함은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안에 오셔서 이루시는 바를 말한다. 온전한 헌신이 없이 성결함을 바랄수는 없다. 온전히 헌신한 다음에는 마음을 정결하게 하기를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믿음으로 이루어주실 것이다.
속죄함을 얻으려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이해시키는데 어렵다고 느끼는 점은 곧 믿음이다. 거룩함도 자기의 수고를 끝내고 그리스도에게로 있는 바 전부를 의탁할 때에 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믿음을 「보는 것」 「만지는 것」 「얻는 것」 으로 나타난다. 즉 믿음은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받는 손이다.
믿음에는 먼저 아는 것이다. 믿음은 약속이상이며 약속하신 분을 보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주시므로 우리가 받는다」 는 말씀없이는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감을 알아야 한다.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야 할 것이며 우리의 감정에서 출발하여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먼저믿고 다음에 아는 것이다. 감정없이 의지하는 바가 위험할 것 같으나 그러나 이것이 올바른 방법인 것이다.
그 다음은 그 약속의 말씀안에 있는 성령의 은사이다. 기다림이란 우리의 온전한 믿음이며 모든 감정과는 떠나서 직각적으로 받아지는 선물이다. 우리가 받을 줄 믿는 시간에 하나님은 주신다.
제 22 장 구하는 자에게 권고하는 말
온전한 성결을 체험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이같은 교리는 아니라도 온전한 성결의 방향을 안다면 성결함도 속히 이루어질 것이다. 정말 우리들은 위에서 나열한 것처럼 성령의 모든 것을 현재라도 이룰 수 있으리라고 믿겠는가? 무슨 일이던 그 일에 성공을 확신하는 마음이야 말로 가장 큰 밑받침이 된다. 이와 마찬 가지로 이 거룩함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약속되어 있다.(겔 36: 25) 많은 말씀가운데 가장 고마운 말씀은 「하나님 이렇게 말씀하신다」이다.
더 이상 일에 대하여 주저하지 말고 각오하고 나서야 한다. 우리가 만일 이 때를 잡지 못하고 놓친다면 우리의 노력은 약해지고 열렬한 소원도 식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결하라”하시는 말씀을 듣기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붙들고 놓지 않겠노라고 단단히 결심하여 보라. 굳게 서서 물러나지 말고 양보도 하지 않겠다는 결심만 하면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어떤 자는 자기도 유명인이 되려는 자들도 있다. 이들은 성결의 은혜에서 오는 기쁨은 목표삼지 않는다. 저들의 소원은 안락한 생활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나서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의 어느 무엇에 비할 수 없는 매력에 끌려서이지 결코 하나님의 은사만을 보려는 것은 아니다.
제 23 장 은혜를 간직하는 길
은혜를 간직하려면 우리가 힘써 지켜가야 할 것이다. 한편에서 보면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말이 진실하거니와 성령과 그 은사는 우리가 어떤 조건 아래서만 받은 만큼 우리의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으면 그 길에서는 절대로 돌아서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우리를 간직해야 할 것이다. 이 일은 은총이 어떤 경우에도 진실된 것과 같이 성결의 상태에서도 그렇다.
1. 빛 가운데 걸어가야 한다.
우리에게 빛이 비추이는 범위가 넓을 수록 헌신하는 도량도 커가야만 된다. 헌신하는 데도 초기에 일어났던 일들을 되풀이 할 것은 없다. 다만 하루하루 이를 반성하고 확증함이 필요하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길은 순종하면서 가지 않고 회피할 때에 하나님과의 사귐이 끝나는 것이다. 성경은 시종 여일하게 타협하지 않는 순종을 오래도록 요구하고 계신다.
2. 단순한 믿음으로 따라가자.
우리가 육체 안에서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주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의지하는 믿음으로 그 안에 사는 것이다. 이때 성령은 거룩한 신자의 영혼에게 머물러 계셔서 저들에게는 혹 감각이 희미해질 때일찌라도 임재하신다.
유혹이 오고 의심이 일어나며, 믿음이 몽롱해질 때도 우리의 입장이 바로 서 있어야 한다. 우리는 시련이 지날 때까지 하나님은 참되시다고 주장하며 단순한 믿음으로 이 자리를 막아내야 한다.
우리는 의심의 구름이 엄습해 올때마다 하나님이 진실하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 지리라고 확신함으로써 우리의 신앙도 변화하지 말아야 한다.
3.하나님의 말씀을 깊히 명상하는 시간을 가지라
우리가 만일 하늘에 살려면 성경을 주요한 책으로 여겨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때는 요나단이 꿀을 먹고난 다음 같이 눈이 맑아지는 법이다. 이 세상에 붙은 정신은 성경을 덮어버릴찌라도 성경은 내 마음에 불로서 성경의 온갖 진리와 영광을 타오르게 하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신을 깊이 하고 죄의 자각과 강하게 하며,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힘을 얻으려면 항상 기도하고 끊임없이 성경을 배우는 것 밖에 더 중요한 것은 없다.
4. 기독교 사업에 열심으로나서야 한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또한 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남에게 줄 것마저 없어지고 만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방법으로 자기의 사생활을 모범적으로 행하는 일이 결코 직접적으로 불신자에게 주는 영향보다 값어치에 있어서 떨어지는 일은 아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의무는 우리에게 붙여진 날개이다. 날지 않으면 그 날개가 필요없고 불필요한 것처럼 우리에게 의무는 짐이 될 수 도 있다. 하지만 날때는 그 날개에 대해 감사하게 될 것이다.
5. 결코 현재 서 있는 자리만을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이 깨끗함은 지식과 사랑과 성결된 생활로 들어가는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만일 은혜안에 자라려면 언제나 우리 보다 앞에 있는 것을 목표 삼아야 한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결정지은 것도 없고, 최후의 단안을 내린 것도 없이 다만 성경을 간직하려면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끊임없는 힘을 쓰며 나아가야 한다.
제 24 장 심령의 주관자
선한 양심을 따라 하루하루 사는 일이란 신앙생활에 있어서 필수적 요건이다. 양심은 우리가 빛으로따라가기를 요구할 뿐더러 모든 빛을 순종하고 힘써 빛 가운데서 일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양심이란 선한 방향만 제시하므로 지식과 건전한 판단력이 결여되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고 주장할지라도 결과적으로 큰 해를 끼칠수 있다.
만약 빛을 받지 못했다면 그런양심은 무서운 독재자를 낳을 것이다. 또한 불행중에도 교양은 쌓았으나 잔 걱정과 공포심에 쌓여있는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는 평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안을 말하며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하신 평안은 주님을 평안의 하나님이며 마음의 임금으로 모시게 될때 받아지는 정신적인 깊은 평안을 말한다. 평안히 우리에게 임재하면 우리는 자연히 영혼을 교란시킬 것은 피하고 잠시라도 주님의 얼굴을 가리우게 할 일에서 피하게 된다. 참으로 하나님의 평안을 마음의 주장자로 모시는 자는 복이 있다.
제 25 장 증거
웨슬레 전도의 동기에는 마음이 순결해졌음을 고백하는데 신중하게 권하다시피 하였으나 그의 교리와 체험이 널리 알려진 다음부터는 교역자나 신자에게까지 오히려 신앙간증하는 것을 의무로 삼도록 권장한다. 오늘날 가장 긴요한 것은 증거하는 교회, 산증거의 척도이어야 한다. 주님을 들어내는 것은 곧 우리에게 어떠한 분이심을 들어내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크신 일을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셨는지 나타내면 이로 말미암아 믿음이 약한 영혼에게 힘주고 우리와 같이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열심을 품게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
본 저서를 읽는동안 필자는 계속적인 도전과 함께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인간에 대한 소망 즉 체험을 통한 성결의 모습에 대한 약속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그리스도인들이 행할수 있는 범위에서의 완전이라는 범위설정에서 그렇다. 만약 우리가 절대적인 성결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포기하고 말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요구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걸러진 인간으로 행할수 있는 성결의 모습이기에 더욱이 희망이 있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된다.
인간은 죄를 지을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본 저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피할길과 함께 그리스도로 더불어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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