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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라간지기 원문보기 글쓴이: 수라간지기
떡의 어원
떡이란, 대개 곡식가루를 반죽하여 찌거나 삶아 익힌 음식으로,
농경 문화의 정착과 그 역사를 함께 하는 우리의 대표적인 전통 음식 중의 하나이다.
우리 민족에게 떡은 특히 별식으로 꼽혀 왔다. 그래서 '밥 위에 떡'이란 속담도 생겨났다.
마음에 흡족하게 가졌는데도 더 주어서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을 만한 상태를 가리키는 이 말은,
밥보다 떡을 더욱 맛있게 생각하는 별식임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떡은 또 간식이기도 한데 계절적으로는 가을과 겨울에 많이 해 먹는다.
가을엔, 추수가 끝나 곡식이 넉넉하고 농한기로 접어드는 시기이므로 '무시루떡' 같은 것을 많이 해 먹는다.
그리고 겨울에는 인절미를 말랑말랑하게 구워, 꿀이나 조청 또는 홍시에 찍어 먹으며 겨울 정취를 만끽해 왔다.
이러한 떡은 그 어원을 중국의 한자에서 찾을 수 있는데, 한대(漢代) 이전에는 떡을 '이(餌)'라 표기하였다.
이 당시는 중국에 밀가루가 보급되기 전이므로 떡을 쌀 기장 조 콩 등으로 만들었다.
또, 한대 이전의 문헌인 <<주례(禮)>>에는 '구이분자(救餌粉咨 )'라는 표기도 보인다.
조선 시대의 문헌인 <<성호사설>>에는 이에 관한 해석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곧 <<주례>> 주에 이르기를 "합쳐 찌는 것이 이(餌)이고 만드는 것이 자(咨)이다."라고 했던 바,
이(餌)는 찧어 가루로 만든 다음에 반죽을 하므로 "떡으로 만든다."고 하였으며,
자는 쌀을 쪄서 매에 문드러지게 치는 까닭에 "합쳐서 찐다."고 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구(救)란 볶은 콩이고, 분(粉)이란 콩가루이므로
찹쌀이나 기장쌀로써 먼저 가루를 만들어 볶은 콩을 얹어 만든 떡이 구이(救餌)이며,
찹쌀과 기장쌀을 먼저 쪄 쳐서 만든 다음 콩가루를 묻힌 것이 분자(粉咨)라 했다.
한편, 기록에 의하면 밀가루가 보급된 한대 이후에는 떡을 가리키는 표기가 '병(餠)'으로 바뀌고 있다.
떡의 주재료가 쌀에서 밀가루로 바뀌면서 '병(餠)'이란 새로운 표기법이 쓰이게 된 것이다.
결국 떡을 나타내는 한자는 쌀을 위주로 해서 만들었을 경우 조리법에 따라 '이(餌)'나 '자(咨)'로 표기했고,
밀가루로 만들었을 경우 '병(餠)이라 표기한 셈이다.
여기에 따르면, 우리의 떡은 쌀을 위주로 하여 만들고 있는 만큼
'이(餌)'나 '자(咨)'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재료에 따른 명칭상의 구별 없이 '떡'이라 하고,
한자어로 나타날 때에는 모두 '병(餠)'이라는 표현으로 쓰고 있다.
떡의 역사
삼국 시대 이전에는
시루떡 외에도, 시루에 찐 다음 쳐서 만든 인절미와 같은 떡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앞서 떡의 어원에서 살폈듯이,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B.C. 480-222)의 <<주례>>에 곡물을 쪄서 문드러지게 치는 떡을 자( )라 표기했고,
친 떡에 콩가루를 묻혀 분자(粉)라 했던 바,
우리도 그들의 풍속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때에 만들어진 떡은 부족 국가가 가졌던 각종 제천의식(祭天儀式)에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무속행의(巫俗行儀)나 고사행의(告祠行儀), 또는 부락제(部落祭) 등에서
시루에 찐 떡을 통째로 놓고 제(祭)를 지내는 오늘날의 풍속과 그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삼국과 통일신라 시대
삼국 및 통일 신라 시대로 내려와 쌀을 중심으로 한 곡물 농업이 크게 확대되면서 떡은 크게 발달하였다.
삼국 시대의 고분에서 시루가 어김없이 출토되었고,
또 고구려의 안악 3호분 벽화나 양수리 고분 벽화 등에 주방의 모습과 함께
시루가 그려져 있음은 이러한 사실을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 시대에 있어서는 떡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도 적지 않다
.예컨대,<<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 유리왕 원년(298)조>에는
남해왕(南解王)이 돌아가자 유리와 탈해가 서로 왕위를 사양 했다는 기록에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탈해가 유리에게 말하기를 "왕위는 용렬한 사람이 감당할바 못되고,
듣건대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齒]가 많다고 하니 시험을 하여 결정하자."고 제의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떡을 깨물어 본 결과, 유리의 치아 수가 많아 유리가 왕위에 올랐다는 기록이다.
여기서 말하는 떡이 어떤 종류의 떡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깨물어서 잇자국이 선명하게 날 정도라면
곡물을 쪄 다시 쳐서 만든 흰떡이나 인절미 및 절편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같은 책 <열전(列傳)백결선생(百結先生)조>에는,
"백결선생은 신라 자비왕대(慈悲王代, 458-479) 사람으로 경주에 살았다."는 말과 함께
세모(歲暮)가 되어 이웃에서 떡방아 소리가 나,
부인이 가난하여 떡을 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자
거문고로 떡방아 소리를 내어 부인을 위로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떡도 떡메로 쳐서 만든 흰떡ㆍ절편ㆍ인절미 등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록은 이 시대에 이미 연말에 떡을 하는 절식(節食) 풍속이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삼국유사(三國遺事)>><효소왕대(孝昭王代, 692-702) 죽지랑(죽지랑)조>에는
"공사(公事)로 갔더니 응당 대접하리라 하고 설병(舌餠) 한 합과 술 한 병을 가지고 ."라고 기록하였는데,
여기서 '설병'이란 떡이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떡이 구체적으로 어떤 떡을 의미하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설병(舌餠)의 '설(舌)'자가 '혀'를 의미하므로 혀의 모양처럼 생긴 인절미나 절편을 생각해 볼 수 있고,
또 그 음(音)으로 미루어 설병(설병) 곧 설기떡을 생각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이 밖에 <<삼국유사>><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밭을 주관하여 세시마다 술ㆍ감주ㆍ떡ㆍ밥ㆍ차ㆍ과실 등
여러 가지를 갖추고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제향 음식의 하나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한편,우리의 상고시 대음식을 전수해 간것으로 알려진 일본의 정창원문서(正倉院文書)에는
대두병(大豆餠, 콩시루떡)ㆍ소두병(小豆餠, 팥시루떡)ㆍ이식( 食)ㆍ전병(煎餠) 등의 이름이 보인다.
따라서, 고려 시대 이전에 이미 치는 떡(인절미ㆍ절편ㆍ흰떡), 찌는떡(백설기ㆍ콩시루떡ㆍ팥시루떡) 등과 함께
증편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이식,
기름에 지져 만드는 전병 등이 만들어 졌으리라는 추정을 가능케 하고 있다.
고려시대
고려 시대로 오면 권농 정책에 따른 양곡의 증산으로 경제적인 여유가 생긴데다가
불교의 융성으로 육식이 절제되고, 음다(飮茶) 풍속이 생김에 따라
과정류와 더불어 떡은 한층 더 발달 되기에 이른다.
예컨대 단군이래 고려 시대까지의 기록을 엮어 놓은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고려인이 율고(栗 )를 잘 만든다고 칭송한 중국인의 견문이 소개되고 있다.
이로보아 이 시대에'율고'가 만들어 졌음을 알수있다.
'율고'는 원(元)의 문헌인<<거가필용(居家必用)>>에 '고려율고'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조선의 떡이었다.
그 조리법은 밤을 그늘에 말려서 껍질을 벗긴 뒤 찧어서 가루를 내고,
여기에 찹쌀 가루를 2/3 정도 섞은 다음 꿀물을 내려 시루에 찐다고 하였다.
이로써 이 떡이 밤설기의 일종임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이수광(李 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송사(宋史)>>의 기록을 인용하여
"고려에서는 상사일(上巳日)에 청애병(靑艾餠, 쑥떡)을 만들어 음식물의 으뜸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이어 그 주에서는 어린 쑥잎을 쌀가루에 섞어 쪄서 고( )를 만드는데,
이것을 '애고(艾 )'라 한다고 하여 쑥설기떡임을 알려 주고 있다.
이 밖에 앞서 인용한 바 있는 <<거가필용>>에는 여진의 음식으로 시고( )라는 것이 나오는데,
여진 사람이 고구려 사람의 후예이고 보면 고려에서 만들어진 떡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시고'의 조리법은 찹쌀과 말린 감을 함께 찧어서 가루를 만들고,
여기에 다시 대추를 삶아 으깨어 진흙처럼 말린 것을 섞어서 체로 친 다음 시루에 찐다고 하였다.
이것은 이른바 '감설기떡'인 셈이다.
이렇게 보면 고려 시대 이전에 쌀가루만을 쪄낸 백설기로 대표되던 설기떡류가
고려로 내려오면서 쌀가루 또는 찹쌀 가루에다 밤ㆍ쑥ㆍ감ㆍ대추 등을 섞어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려 시대에 와서 떡의 종류와 조리법이 다양하게 발달된 것은
문화의 다양화를 증명해 주는 것이다.
특히 불교 의례와 명절 음식으로 떡을 많이 썼던 관습으로 보아도 그렇다.
고려 시대에는 설기떡류와 함께 단자류인
수단(水團: 쌀가루ㆍ밀가루를 반죽하여 경단같이 만든 다음 끓는 물에 삶아
냉수에 헹궈서 물기를 없앤 뒤 꿀물을 넣고 실백을 띄운 것)도 만들어졌다.
고려 공민왕 때의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그의 <<목은집(牧隱集)>>에서
<유두일삼영(流頭日三詠)>이란 제목 하에 유두일에 먹는 수단에 대해
"백설같이 흰 살결에 달고 신맛이 섞였더라."고 읊고 있다.
이 <<목은집>>에는 또 <점서(粘黍)>란 제목의 다음과 같은 시도 수록되어 있다.
뉘가 알까 떡의 향기를
황금빛이 면(面)에 넘치네.
팥소를 넣어서 배가 부르며
먹기 쉬워서 배고픔에 좋다.
소화되기 어려우니 배탈나기 쉽다.
이밖에도 이 시대에는 원(元)나라로부터 상화(霜花)가 도입되기도 했다.
상화는 밀가루를 부풀려 채소로 만든 소와 팥소를 넣고 찐 증편류인데,
앞 시대의 이식(餌食)과 비슷한 형태였다. 지금의 만두나 찐빵 종류였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가요 가운데는 "쌍화점에 쌍화 사라 가고신딘/ 회회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라는 내용의
<쌍화점>이란 가요가 있다.
이는 고려 시대에 쌍화 곧 쌍화를 파는 전방이 따로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렇듯 고려 시대에는 떡의 종류가 많아졌음은 물론 절식으로도 자리를 잡았던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떡이 일반화된 시기였으니,
<<고려사(高麗史)>><열전(列傳) 최승로(崔承老)조>에는 광종(光宗)이 내도장(內道場)의 떡으로
걸인(乞人)에게 시주(施主)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같은책<신돈(辛旽)조>에도 돈(旽)이 떡을 부녀자에게 던져 주었다는 기록이 있어,
떡 문화가 널리 일반화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조선시대
고려 시대에 일반화된 떡은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농업 기술과 조리 가공법 등의 발달로
전반적인 식생활 문화가 향상됨과 함께 그 종류와 맛이 한층 다양하게 변화되었다.
나아가 조선 후기에는 당시를 휩쓴 사회 풍조가 떡에도 반영되어
궁중과 반가(班家)를 중심으로 더욱 사치스럽게 발전하였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각종 요리서들, 곧
도문대작(1611년), 음식지미방(1670년경), 주방문(1600년대말), 음식보(1700년경), 증보산림경제(1766),
옹희잡지(1800년대초), 규합총서(1815), 임원십육지(1800년대중엽), 동국세시기(1849년),
군학회등(1800년대), 음식방문(연대미상), 술빚는법(1800년대말), 시의전서(시의전서, 1800년대 말).
등에 기록된 떡의 종류를 종합해 보면 그 변화 양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먼저 설기류를 살펴보면, 기존의 백설기ㆍ밤설기ㆍ쑥설기ㆍ감설기 외
석탄병(惜呑餠)ㆍ잡과점설기ㆍ잡과꿀설기ㆍ도행병(桃杏餠)ㆍ꿀설기석이병ㆍ괴엽병(槐葉餠)ㆍ
무떡ㆍ송기떡ㆍ설기ㆍ막우설기ㆍ복령조화고(茯造化)ㆍ상자병(橡子餠)ㆍ산삼병(山蔘餠)ㆍ남방감저병ㆍ
감자병ㆍ유고ㆍ기단가오 등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석탕병은 고려 시대의 감설기가 한층 발전한 것으로,
기존의 부재료인 감가루ㆍ대추 외에 밤ㆍ귤병ㆍ계핏가루ㆍ잣ㆍ꿀 등의 재료를 가미시켜 만든 떡이다.
즉, <<규합총서>>에는 이 떡에 대하여 "맛이 차마 삼키기 안타까운 고로 석탄병"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막우설기에 대해서는 <<음식방문>>에서
"백미 정히 쓰러 떡가루로 가는 체에 쳐서 꿀물 진히 타서 버무리되,
삶은 밤과 대추씨 발라 넣어 버무려 쓰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 떡은 밤과 대추를 섞어 찐무리의 일종인 셈이다.
또하나 특기할 것은 남방감저병으로, <<규합총서>>에 따르면
이것은 고구마를 껍질째 씻어 말려 가루로 만들어 찰가루에 섞어 찐 떡이다.
고구마가 1763년에 우리 나라에 들어올 때 감저(甘藷)라는 이름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기단가오와 유고도 이 시대에만 보이는 특이한 설기류이다.
이 가운데 기단가오는 문헌상으로는 유일하게 <<규합총서>>에서 그 조리법을 말해 주고 있는데,
"메조가루로 찧고 좋은 대추씨 빼지 말고 왼 채로 콩ㆍ팥과 함께 넣어 삶아
가루에 섞어 켜로 안치지 말고 막 부어 찐다."고 하였다.
이 떡은 메조 가루로 설기류를 만든 것인데,
치진 메조가 나는 북쪽 지방의 향토떡으로서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유고는 <<역주방문>>에 조리법이 있다.
그 내용은 대략 참기름에 소금을 약간 넣어 쌀가루에 섞은 다음
잣과 대추를 잘게 썰어서 고명으로 얹어 시루에 찐다는 것이다.
참기름을 떡가루에 섞는 색다른 방식의 떡이나, 이것 또한 오늘날에는 그 이름조차 생소해진 상태이다.
시루떡류는 이전의 팥시루떡ㆍ콩시루떡 외에
무시루떡ㆍ꿀찰편ㆍ꿀편ㆍ청애 메시루떡ㆍ녹두편ㆍ거피팥 녹두 시루편ㆍ깨찰편ㆍ적복령편ㆍ
승검초편 ㆍ호박편ㆍ두텁떡ㆍ혼돈병ㆍ송피병ㆍ찰시루떡ㆍ각색 찰시루떡ㆍ잡과고ㆍ신과병 등
거의 20여 종에 이르는 시루떡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무시루떡에 대해서는 <<규합총서>>에 이르기를 "반드시 찰가루를 섞어 쪄야 품위가 있다."고 했다.
또한, 꿀찰편과 꿀편에 대해서는 <<음식방문>>에 이르기를,
"꿀찰편은 찹쌀을 가루로 빻아 꿀에 버무려 거피한 흰깨를 고물로 하여 만들라."고 했고,
꿀편은 "맨가루에 꿀물을 진하게 타서 가루에 버무려 도톰이로 쳐서 안치되,
켜를 두껍게 하고 대추ㆍ밤ㆍ잣 등을 고명으로 하라."고 했다.
또, 이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두텁떡은 <<음식방문>>과 <<규합총서>>에서 그 조리법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 나타나 있듯이, 두텁떡은 찹쌀 가루를 쪄서 유자청 등의 소를 박고
볶은 팥가루 고물을 얹어 찐 독특한 떡으로,
그 조리법이 한층 발달되어 오늘날까지 잘 전승되고 있는 최고의 떡이다.
이 밖에 혼돈병도 특이한 떡으로 꼽히는데, <<규합총서>>에 기록된 조리법에 따르면
찹쌀 가루ㆍ승검촛가루ㆍ후춧가루ㆍ계핏가루ㆍ건강(乾薑)ㆍ꿀ㆍ잣 등으로 만들어 졌으며,
그 만드는 방법은 대략 두텁떡과 비슷하다.
또한 상설편도 생소한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 떡이 조리법은 <<음식방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곧 "도토리를 껍질째 삶아 데쳐 말려 오랫동안 무르게 삶아 채반에 널어 이슬을 맞힌 뒤
볕에 쐬어 오래 작말하여 찰가루에 섞어 고명 두고 팥켜로 찌면 좋으니라."고 했다.
이로 보아 상설편은 찹쌀 가루에 도토리가루를 섞어 찐 도토리 시루떡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이르면 인절미도 찹씰을 쪄서 칠 때 재료를 다양하게 넣어
쑥인절미ㆍ대추인절미ㆍ당귀잎인절미 등을 만들었고,
주재료도 찹쌀에 기장조를 섞어 기장조인절미를 만들기도 했다.
흰떡 또한 산병ㆍ환병ㆍ골무편 등으로 모양을 바꾸어 가며 여러 가지로 만들었고,
절편도 떡을 할때 넣는 부재료를 달리하여 쑥절편ㆍ수리취절편ㆍ송기절편ㆍ각색절편 등을 만들었다.
조선 시대에는 또 그 이전 시대까지 추정 단계에 있던 개피떡이 본격적으로 문헌에 등장하고 있다.
곧 <<음식방문>>에는 송기절편 빚는 법을 설명하면서
개피떡 빚는 법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잠깐 언급하고 있다.
솔나무 생슨 껍질 벗겨 겉껍질 긁어 버리고 물을 많이 붓고 푹 삶아 건져 물에 빨아 담가
여러 날 우려 건져 잘 짜 나른하게 찧어 떡된가 오르거든 얹어 푹 쪄서 절편 만들고
팥소 넣어 개피떡하여 기름 발라 뜨면 질기고 맛이 각별하니라.
그런가 하면 찰수수전병으로 대표되던 앞 시대의 전병류도 여러 재료를 이용하여
더덕전병ㆍ토란병ㆍ산약병ㆍ서여향병ㆍ유병ㆍ권전병ㆍ송풍병 등으로 폭넓게 만들어졌다.
이 가운데 유병은 찹쌀 가루로 떡을 만들어 기름에 지져 익힌 음식으로, 지금의 찰전병 정도인 듯 싶다.
그리고 권전병과 송풍병은 유일하게 <<규합총서>>에 그 조리법이 나타나 있는데,
"설탕 가루와 꿀을 메밀가루에 반죽하되 시루에 쪄 오얏 만큼씩 비벼 대로 얇게 밀어 지지면
모양이 연한 연잎 같으니 권전병이요, 둥글게 베인 것은 송풍병"이라고 했다.
전병류로는 또 조선 시대의 문헌인 <<음식지미방>>에 '젼화법'이 기록되어 있어
지금의 화전이 이 당시 벌써 만들어졌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 방법을 보면 "찹쌀 가루와 거피한 메밀가루를 섞어 두견화ㆍ장미화ㆍ출단화의 꽃을 많이 놓고
눅게 말아 끓는 기름에 뚝뚝 떠 넣어 바싹 지져 낸다음 꿀을 얹어서 쓴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화전 만드는 법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는 전병의 한 가지인 주악도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주악은 1740년대의 문헌인 <<소문사설( 聞事說)>>에 조악전아라 하여,
백미가루를 설탕물로 반죽하여 설탕 가루 소를 넣고 빚어 기름에 지진 음식이었다.
그러다가 1800년대의 문헌인 <<규합총서>>에 밤주악ㆍ대추주악이 등장하면서 주재료가 찹쌀로 바뀌고 있다.
이 밖에 조선 시대로 오면 경단류ㆍ단자류 등도 새롭게 만들어져 떡의 종류를 다양화시키고 있다.
먼저 경단류를 보면 1680년경의 문헌인 <<요록>>에 경단병이란 이름으로 처음 기록되고 있다.
그 조리법은 찹쌀 가루로 떡을 만들어 삶아 익힌 뒤,
꿀물에 담궜다가 꺼내어 청향을 바르고 그릇에 담아 다시 그 위에 꿀을 더한다고 했다.
이렇게 시작된 경단은 그 후의 문헌인 <<음식 방문>>과 <<시의전서>> 등에도 나타나 있는데,
고물을 묻히는 방법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인 방법은 대략 같다.
그리고 단자류는 1766년의 문헌인 <<증보산림경제>>에 '향애(香艾)단자'란 이름으로 처음 기록 되고 있다.
단자류는 그 후 향내 나는 쑥 이외에도 여러 가지 재료를 이용하여,
밤단자ㆍ대추단자ㆍ승검초단자ㆍ유자단자ㆍ토란단자건시단자ㆍ마단자ㆍ귤병단자ㆍ꿀단자 등이 만들어졌다.
한편, 이 시대에는 빈자떡이라 불리는 녹두 부침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추석 명절의 대표적인 절식으로 지금까지 꼽혀 오고 있는 송편,
여름철의 절식인 증편 등이 널리 유행하여 계절식과 명절 음식으로 크게 발달했다.
이렇듯 다채롭게 발달했던 조선 시대의 떡은 재례ㆍ빈례ㆍ혼례 등 각종 의례 행사는 물론,
대ㆍ소연회에도 필수 음식으로 쓰였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유교가 사회 깊숙이 퍼져 가면서 관혼상제의 풍습이 일반화된 것과 궤를 같이하며,
특히 떡은 음식 가운데에서도 연회와 상제사 등을 통해서 필수적인 특별식으로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
근대 이후
19세기말로 들어서면서 물밀 듯이 들어온 서양 문물과 1910년부터 36년간 이어진 일제의 압정,
뒤이어 발발한 6ㆍ25 전쟁 등 급속한 사회 변동은 우리 전통 식생활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이에 다채롭게 발달되어 오던 떡도 주춤한 상태에서 서양 빵에 그 세력이 밀리게 되었다.
그러나 소용돌이치는 사회 환경 속에서도 나름대로의 작은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시루떡류의 경우 멥쌀이나 찹쌀에 콩을 섞어 만든 콩버무리떡ㆍ콩설기ㆍ콩시루편,
밤ㆍ대추를 섞은 찹쌀 가루에 불린 콩을 켜켜로 안쳐 찐 쇠머리떡등이 서민들에게 각광을 받았고,
푸른팥을 거피하여 멥쌀 가루와 켜켜로 안쳐 찐 거피팥시루떡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인절미류도 차조로 만든 청정미인절미,
느티나무 잎을 넣어 만든 고엽찰떡 등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인절미를 만드는 법은 이제까지 찰밥을 지어 쳐서 만드는 법과
찹쌀 가루를 쪄 쳐서 만드는 법의 두 가지가 공존해 왔으나,
이 때에 이르러 만들기에 편리한 후자의 방법이 줄기를 이루어 지금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편,개피떡류도 흰떡에다 송기를 넣어 만든 송기개피가 생겨 났으며,
쑥개피ㆍ송기개피ㆍ흰개피를 만들어 끝을 맞붙인 셋붙이 등도 생겨났고,
개피떡과 같이 만들되 갖은 양념을 한 채소(숙주ㆍ오이ㆍ미나리 등)소를 넣어 만든
어름소편이 새롭게 등장하기도 했다.
또, 경단류도 여러 가지가 만들어져서 생률경단ㆍ율무경단ㆍ대추경단ㆍ청매경단 등이 나오고,
감자가 많이 생산되는 원도 같은 곳에서는 감자경단을 만들기도 했다.
단자류 또한 다양하게 만들어져서 팥단자ㆍ복숭아단자ㆍ율무단자ㆍ생강단자 등이 생겨났고,
송편의 일종인 재증병ㆍ물송편ㆍ감자송편 등이 입맛을 돋구기도 했다.
그리고 기존의 증편에 팥고물을 사이에 끼워 봉오리로 만들어 찌는
방울 증편이 등장하여 지금까지 강릉 지방의 향토 음식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상과 같이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떡은
얼음소편ㆍ일홍ㆍ물송편 등 이름마저 생소한 채 그 맥이 끊어진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미미하게나마 지금까지 계승되어 오고 있다.
하지만, 사회 환경의 변화로 예전처럼 떡을 집에서 직접 해 먹는 경우는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의 생활 환경이 분화하면서 떡방앗간이 증가했고,
떡을 이 곳에서 맞추는 것이 풍습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떡집에서 떡을 사다 먹는 경우도 많아졌다.
심지어 결혼이나 생일과 같은 잔치 때나 상제사,
설이나 추석과 같은 큰 명절에도 떡집에서 떡을 맞추어 쓰는 것이 일반화되었고,
떡국처럼 요리로서 음식점에서 파는 풍습이 크게 유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