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 1970년대 대중 앞에 나타난 18세의 시각 장애인 학생 가수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외국의 경우 호세 펠리치아노, 스티비 원더. 레이 찰스 등 걸출한 시각 장애인 가수들이 이미 맹활약하고 있었지만 국내에서는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처음 그의 존재는 호기심 어린 대상으로만 비쳐졌다. 하지만 풍부한 성량에 다양한 악기 연주와 작곡·편곡 능력을 겸비한 그의 음악성은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그는 '그 얼굴에 햇살이', '어린 시절', '마음은 집시' 등 수맣은 히트 곡 행진을 벌였던 정성의 가수였다.
또한 가수로서는 최초로 기타 연주 음반까지 발표했을 만큼 탁원한 기타리스트이기도 했다.
이용복은 대구 내당동에서 소규모 출판사를 경영했던 부친 이중구씨와 모친 이희규씨의 3남2녀중 막내로 1952년6월27일에 태어났다. 음악과는 거리감 먼 집안이었다. 1·4후퇴 때 피난간 대구에서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3살때 집안 마루에서 놀다가 마당으로 떨어지면서 돌부리에 찍혀 왼쪽 눈이 실명이 되었던 것.
한쪽 눈을 실명한 후 4살때 동네아이들과 어울려 실로폰을 처음 쳐보았다. 이후 매일 물건을 두드리며 혼자 노는 아들의 모습이 애처로웠던 부친은 하모니카를 부해 주었다. 이용복은 "하모니카는 놀아주기 보다는 흙을 던지며 따돌림 당했던 내 어린시절의 유일한 친구였다"고 회고한다. 7살때 성루 돈암동으로 올라왔다. 하지만 8살이 된 겨울 어느날. 수레 썰매를 탄 후 집으로 들어가려다 앞선 친구의 썰매 송곳에 오른쪽 눈이 찔리면서 완전 실명을 했다.
1년을 쉰 후 9살때 서울 맹아 학교에 입학했다. 2학년 담임이었던 이시경 선생님은 '용복이는 도토리같이 총명했다'고 전해준다. 4학년 겨울 방학 때 부친이 2천원 짜리 '피크형' 중고 스틸 기타를 구해왔다.
그는 '벤쳐스' '쉐도우스' '비틀스' 등 기타가 들어가는 그룹의 음악을 들으며 기타 코드를 스스로 개발해 만들었다. 60년대 말부터는 지미 헨드릭스, '크림' '야드버드' 등의 음악과 오티스 레딩 등 흑인 소울 가수들의 음악에 빠져들었다. 점자 악보를 손으로 일게 된 중3때는 선밷르과 4인조 록 그룹 '캑터스'를 결성했다.
고등학교 때는 학교 음악 부장을 맡았다. 그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작곡·편곡뿐 아니라 기타, 피아노, 드럼, 색스폰, 하모니카 등 각종 악기를 능숙하게 연주할 만큼 실력을 쌓았다. 이용복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안마사 밖에 될 수 없는 선배들의 현실을 보면서 목숨을 걸고 음악을 했다"고 털어 놓는다.
1970년8월20일 동네 음악 친구 권태수 등과 함께 록 그룹 '데블스'와 '계정희 악단'의 연주를 들으러 충무로 태평양 다방에 놀러갔다. 장기 자랑 시간이 되자 친구들의 권유로 무대에 올랐다. 계정희 밴드의 연주에 맞춰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CCR 의 'Proud Mary'를 신나게 부르자 객석에서 난리가 났다.
덩당아 우쭐해졌던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다음날 또 놀러 갔다. 그를 알아본 손님들이 어제 노래를 신청해왔다. 이번에는 비틀즈의 'Let It Be'와 소울 가수 오티스 레딩의 노래를 불렀다. 이때 우연히 그의 노래를 듣게 된 신인 작곡가 김준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김준규는 자작 곡 '검은 안경'을 주며 음반 취입을 권유했다.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김익모가 운영하는 남대문의 신진 스튜디오에서 한 시간 동안 피아노를 치며 팝송 2곡을 불러 데모 음반을 만들었다. 3개월 뒤 아리랑 레코드의 손경태 사장을 상대로 전속금 30만원과 월급까지 책정하는 파격적인 계약을 맺었다.
신진레코드에서 데뷔 곡 '검은 안경'등 10곡의 팝송을 엮어 데뷔 음반 <검은 안경-70년>을 발매했다. 18세의 서울 맹학교 2학년 시각 장애인 가수는 장안의 화제였다. 그는 '한국의 레이 찰스'로 주목을 받았다.
처음엔 음악보다는 장애자라는 이유로만 관심을 끌었다. 데뷔 초기 그는 장르를 초월해 외국가수들의 히트 팝송을 닥치는 대로 흉내내며 1년동안 무려 5장의 음반을 발표하는 왕성한 활동을 했다. 이용복은 "데뷔 초 취입한 동경가요제 대상 곡 '내 사랑 나오미'와 '사라진 무지게'가 라디오를 통해 방송이 되자 반응이 대단했다. 하지만 '왜색풍'이라는 이유로 방송을 금지를 당했다."고 당시의 아쉬움을 전한다.
그는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장애인을 경시하고 배척했던 당시의 일그러진 사회 분위기는 타고난 음악성과 노력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벽이었다. 데뷔 초 그의 모습을 방송해준 TV는 TBC가 유일했을 만큼 방송국의 냉대 또한 가혹했다.
그룹 활동에 제약을 느껴 온 그는 71년부터 일간스포츠 김유생 기자의 권유로 활동이 손쉬운 포크로 전향을 시도했다. 그는 라디오의 DJ프로와 YWCA '청개구리'를 주무대를 활동하며 71년 4월에는 YMCA에서 '이용복 리싸이틀'을 개최해 젊은층의 관심을 끌었다. 71년 7월 꿈에서나 그렸던 시민회관 무대에 출연하고 쇼 단 '플레이 보이 클럽'에서 가요상을 받았다.
이어 소녀 가수 하춘화와 함께 한국연예개발협회가 선정하는 '9월의 가수'에 선정되고 차중락 추모대회에서는 '낙엽 상', 그리고 71년 플레이보이배 그룹 사운드 사운드경연대회에서 포크 부문의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당시 내가 나오자, 송창식이 보따리를 싸고 돌아갔다는 소문이 돌았다"며 이용복은 미소 짓는다. 연이은 수상소식에 모든 TV에서 관심을 보여 왔다.
이용복은 1971년 TBC주최 제7회 방송가요대상의 신인가수 부문 후보에 오르며 장애인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당시 맹아학교의 청소년들은 “용복이 형 같은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가히 폭발적인 인기였다.
하지만 “단순히 인기가 올라가는 것보다는 노래가 저같이 불우한 사람들에게 조그만 삶의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그는 겸손해 했다.
72년 2월 서울맹아학교 졸업식장. 12년 만에 졸업하는 그를 취재하려는 보도진으로 북적거리자 학교측은 “개교이래 최대의 경사”라며 공로상을 수여했다. 3월엔 신체의 불우함을 딛고 인기가수로 성장한 그의 일대기가 김묵 감독에 의해 ‘어머니 왜 날 나셨나요’라는 제목의 다큐 영화로 제작되었다.
그의 히트 곡 ‘1943년 3월4일생’의 가사내용을 담은 이 영화에는 인기가수 남진이 그의 역할을 맡았고 누이 역엔 윤정희가 선정되었다. 이용복은 특별출연해 화제를 몰고 왔다.
72년 어느 날 이해성, 신태성씨가 김민기, 양희은과 함께 이용복을 불러 “포크를 부흥시키자”며 음반제작을 의뢰했다. 이 음반이 바로 ‘아침이슬’이 수록된 양희은의 데뷔 앨범이다. 김민기가 클래식 기타를 치고 이용복은 12줄 스틸기타로 멜로디 부분을 맡았다.
이용복은 “당시 김민기 곡을 잘 몰라 눈치로 즉흥적인 애드립으로 따라갔다. 그는 밥 딜런의 영향을 많이 받은 느낌이었는데 우리나라에도 진짜 포크가 탄생한다는 생각에 참신함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이후 대학축제나 방송에서 이용복은 양희은의 노래반주를 몇 차례 해주었지만 음악 방향이 달랐기 때문에 음악적 연결 고리는 없었다.
그는 조용필, 투코리안스와 함께 전속금 100만원이란 파격적인 조건으로 오아시스와 전속계약을 맺었다. 당시 오아시스 손진석 사장은 “뽕짝 왕국 오아시스가 드디어 세계적인 흐름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 자랑했다.
메이저 레코드사의 탄탄한 지원을 등에 업은 이용복은 ‘친구’, ‘사랑의 모닥불’ 등으로 가요차트 정상에 오르는 히트 퍼레이드를 이어 나갔다. 탁월한 기타리스트이기도 한 그는 73년 7월 자신의 히트곡과 흘러간 옛 노래 12곡이 수록된 기타 연주 집을 발표했다. 가수의 연주 독집은 국내 처음이었다.
그는 72년, 73년 MBC 10대가수상을 연속 수상하며 절정기를 구가했다. 지구레코드로 전속을 옮긴 그는 ‘어린 시절’, ‘순이 생각’ 등으로 여전히 사랑을 받았다. 74년에는 두 번째로 자신의 히트곡이 영화로 제작된 조문진 감독의 ‘이용복의 어린 시절’에 주연 배우을 맡았다. 상대 여배우는 박지영씨.
그는 또 ‘서울의 거리’를 강소희에게 주는 등 작곡가로도 능력을 과시했다. 75년 청년 이용복에게도 핑크빛 염문설이 나돌았다. 당시 그의 집에는 아침에 출근하듯 와서 살림을 돕다가 오후 5시에 돌아가는 젊은 여성들이 많았는데, 73년부터 연애한 김연희씨와 80년 결혼해 주원, 효원 쌍둥이 아들을 두고 있다.
75년 가요정화운동 당시 장애인에 대해 일부 비판적인 시각이 불거지면서 그에게도 좌절의 시기가 찾아왔다. 신세계레코드를 거쳐 76년엔 3년 만에 오아시스로 전속을 옮겨가며 권토중래를 꿈꿨지만 ‘줄리아’정도만 반짝 인기를 되찾아 주었을 뿐, 예전의 인기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77년 7월 이용복은 8채널 앰프와 녹음기를 구입해 집 지하에 ‘강남 녹음실’을 차리고 새로운 스타일의 노래 취입을 시도했다. 스스로 연주, 노래, 백 코러스 등을 하는 ‘원맨 밴드’라는 색다른 시도였다. 하지만 고가의 녹음기기들을 이듬해 11월 25일 도난 당해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78년 외국 곡 ‘아낙’을 번안해 발표한 후 그는 가요계에서 사라졌다. 사실 여부는 분명치 않지만 “일부 고위층의 거부 반응 때문에 방송금지를 받고 TV에서 모습을 감췄다”는 황당한 소문도 나돌았다.
이후 그는 밤무대와 장애자를 위한 자선 모임에서만 노래하다 84년 대치동에 ‘강남녹음실’을 정식으로 오픈 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의 상처를 입은 그는 85년 미국 장로교연합회의 초청을 받아 복음성가가수로 변신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이때 한국맹인복지협회는 보사부 등 관계당국에 “장애인의 재활의지를 북돋아 주기 위해 이용복과 같은 맹인 연예인들이 다시 방송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건의문을 보낼 정도로 떠나간 그를 아쉬워했다. 7년 만인 91년 8월에 귀국한 그는 동대문구 답십리에 최고급 자재와 악기를 갖추고 85평 규모의 녹음실 사업을 펼쳤다.
그리고 이듬해 SBS TV ‘사랑의 징검다리’와 98년 KBS 2TV ‘스타스페셜 나의 노래’등에 간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2000년 6월 용문사 입구로 옮겨 모텔과 녹음실을 병행 운영하다 2001년 4월 녹음사업을 접고 양평으로 가 비행기를 개조한 ‘공항’ 카페를 열었다.
그의 집에는 지금도 장애자 팬들로부터 활동 재개를 간청하는 편지가 끊이질 않는다. 78년 활동중단 후 20여년 간 그는 침묵하면서도 음반 녹음 세션과 작곡만은 계속해 왔다.
“인기만 좇다보니 내 노래색깔을 잃어버렸다”는 이용복은 흑인들의 슬픈 영혼이 밴 소울에 대한 미련을 지금껏 버리지 못하고 있다. 올 들어 다시 방송활동을 시작하며 4월로 예정된 25년만의 신보 발표를 앞두고 마지막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hoi@hk.co.kr >
[ 출처 : 주간한국( http://weekly.hankooki.com/ ) 200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