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에서의 전쟁이 어떻게 될까? 에니어그램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참고가 되는 문구를 굵게 표시하였습니다.
( Enneagrem center)
EVAN THOMAS 워싱턴 지국 기자
2002-09-12
도널드 럼즈펠드 美 국방장관이 즐겨쓰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전방으로 내딛기’(leaning forward: ‘적극적 개입’을 뜻한다)다. 과거 냉전시대에 통용돼 군인들과 스파이들에게 친숙한 이 용어는 리스크를 감수하려는 의지와 공격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Rumsfeld's War
도널드 럼즈펠드 美 국방장관이 즐겨쓰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전방으로 내딛기’(leaning forward: ‘적극적 개입’을 뜻한다)다. 과거 냉전시대에 통용돼 군인들과 스파이들에게 친숙한 이 용어는 리스크를 감수하려는 의지와 공격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럼즈펠드는 지난달 캘리포니아州 샌디에이고 근처의 노스 아일랜드 해군기지의 해군·해병대 장성들이 모인 자리에서 “모두들 우리의 적극적인 개입 의지를 알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럼즈펠드는 지난해 가을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시작될 무렵 국방부에서 열렸던 교전수칙 브리핑에 실망했었다며 말을 이었다. 매우 복잡하고 법적 제약과 불확실성으로 가득차 있었다는 것이었다. 럼즈펠드는 “그런 것은 전혀 쓸모가 없다. 이것은 군사작전이며 목표는 전방으로 내딛는 것”이라고 장성들 앞에서 일갈했다. 그의 보좌관은 “적극 나서서 적을 무찌르자는 것”이라고 그 취지를 설명했다.
럼즈펠드는 ‘적극 개입해야 할’ 주체에는 軍만이 아니라 국가 전체와 대통령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뉴스위크 기자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국방장관으로 지명됐을 때 나는 조지 W. 부시 대통령 당선자에게 ‘미국이 허약해져 손쉬운 공격 목표가 됐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곧이어 중대한 위기가 닥칠 텐데 그때 나는 대통령 집무실로 찾아가서 전방으로 내딛자고 촉구하겠다’고 천명했다.” 그 중대한 위기는 지난해 9월 11일 찾아왔다.
부시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방으로 내딛는 행동’을 취했다. 그러나 이라크에서도 그렇게 할 것인가. 이라크를 공격할 경우 미국은 과연 실패를 맛볼 것인가. 언론과 정치인들은 이라크 공격에 대한 뚜렷한 명분과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했으며 그것들을 사용할 능력과 의지가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요구하고 있다.
행정부 관리들은 의회 지도자들에게 ‘이라크의 정권 교체’ 타당성을 설득하기 시작했고 부시 대통령은 12일 유엔 연설을 통해 이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호소할 것이다. 그러나 진상은 여전히 불투명하고 논리도 서지 않은 상태에서 부시의 직관력·세계관·마음가짐만 확고해질 가능성이 높다. 존스 홉킨스大 국제관계 대학원 교수로 군사역사가이며 대통령의 전쟁 수행에 관한 영향력있는 책 ‘최고사령관’(Supreme Command)을 쓴 엘리엇 코언은 “대통령의 전쟁 선포는 본능적이고 직감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금 미국이 이라크에 대해 전쟁을 해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온건파와 강경파 두 진영이 부시의 직감을 얻기 위해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온건파에서는 신중하고 참을성있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수장이며 조지 부시 前 대통령의 보좌관을 지낸 인물들과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前 국가안보 보좌관, 제임스 A. 베이커 前 국무장관 등이 그 대변인을 맡고 있으며, 홍보는 주류 언론들, 그중에서도 특히 뉴욕 타임스紙가 자임하고 나섰고, 실무는 거의 모든 미국 우방들의 수반들이 맡고 있다.
반면 ‘전방으로 내딛기’를 주장하는 강경파는 딕 체니 부통령과 럼즈펠드가 지휘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상징적인 의미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난주 파월이 남아공에서 열린 지구정상회의에서 미국에 대한 야유에 시달리고 있을 때 부시가 럼즈펠드의 공관에서 저녁 뷔페를 즐기며 군장성들과 다정스럽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부시는 럼즈펠드와 체니가 주장하는 독자노선을 받아들일 것인지 혹은 미국의 힘이 세계의 우방들에 달려 있다는 파월의 경고에 좀 더 귀를 기울일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이번주 유엔 연설에서도 부시는 중도노선을 추구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부시가 이라크에 대해 선제공격도 배제하지 않는 군사행동에 나서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파월과 럼즈펠드는 워싱턴 정가의 양대 세계관을 대표한다.
그들의 상반되는 세계관은 개인적인 경험과 배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 사이의 투쟁이 어떻게 끝나느냐에 따라 미국이 이슬람권의 또다른 세대를 급진주의자들로 만드는 ‘건달’ 국가로 비쳐질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신망높은 나라가 될 것인가가 판가름날 것이다.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체니 부통령이 가장 막강한 배후 실력자일지 모른다. 그러나 현재 이라크 공격을 주장하는 선봉장은 럼즈펠드다. 그는 대담함과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으며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의 집무실 책상 위에는 뉴햄프셔州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청동판이 세워져 있다. 거기에는 “정의를 위한 저돌적인 투쟁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스포츠”라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말이 새겨져 있다.
럼즈펠드는 “친절한 말만 했을 때보다는 친절한 말과 총을 함께 쓸 때 더 효과가 있다”는 알 카포네의 말도 즐겨 인용한다. 럼즈펠드의 솔직하고 자신만만한 모습은 9·11 이후 불안한 미국인들을 안심시켰지만 지금은 그것이 ‘럼즈펠드는 무모한 전쟁도발자’라는 비난의 빌미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가장 친한 동료들은 럼즈펠드의 장점은 ‘불 같은 호기’가 아니라 골치아픈 문제의 근본을 파고들며 통념에 문제를 제기하려는 태도에 있다고 말한다.
부통령 비서실장인 I. 루이스 (스쿠터) 리비는 “럼즈펠드를 직접 만나본 사람이라면 그가 거만하다거나 도박사 같다는 말은 결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리비는 이라크에 대해 ‘전방으로 내디디려는’ 럼즈펠드의 생각은 “행동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안게 되는 리스크가 행동을 취함으로써 안게 되는 리스크보다 훨씬 크다고 보는 관점과 맞아떨어진다”고 지적했다.
럼즈펠드는 오랫동안 빛을 못 보던 시대와 그 세대의 상징이지만 지금은 그들의 세계관과 태도가 미국 행정부 최고위층에서 화려한 컴백을 맞고 있다. 조기 출세에 이은 야인생활을 거쳐 다시 권좌에 복귀한 럼즈펠드의 인생궤적은 이라크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을 이끄는 배후 세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럼즈펠드의 한 측근은 “럼즈펠드에게서는 냉소적인 요소나 포스트모더니즘적 불확실성과 불안감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 25년간 미국의 외교팀과 국방부는 리스크를 꺼리는 공룡으로 변해갔다. 럼즈펠드는 그런 기성 문화에 반기를 들었다. 럼즈펠드의 배경과 경험에서 보면 이라크 공격에 대한 논의는 2차대전을 겪은 ‘위대한 세대’ 및 초기 냉전시대 전사들의 가치관과 워터게이트 스캔들·베트남戰 이후에 권력을 얻게 된 베이비붐 세대의 가치관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에 다름 아니다. 헨리 키신저 前 국무장관은 “럼즈펠드는 미국의 불완전함과 한계에 초점을 맞춘 베트남戰 세대의 태도를 불식시키기 위해 강대국의 책임과 봉사의 의미를 부활시키려고 애쓰고 있다”고 평했다.
럼즈펠드는 부친이 38세의 나이에 해군 수병으로 자원 입대해 2차대전 동안 항공모함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 한다. 시카고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럼즈펠드는 “‘불가능이란 없다’는 긍정적인 사고가 지배하던 시대에 성장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고 그의 한 측근은 말했다. 프린스턴大에서 급우들에 의해 ‘최고의 몸매를 가진 사나이’ 3위에 뽑혔던 럼즈펠드는 레슬링 선수로 활약했다. ‘국가에 봉사하자’라는 프린스턴大 표어를 신봉했던 그는 졸업생 파티에서 1922년도 졸업생이자 정치가인 애들라이 스티븐슨이 국가 봉사에 관해 한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아 아직도 그 연설문 사본을 친구나 기자들에게 나눠주곤 한다.
럼즈펠드는 언제나 앞뒤를 가리지 않고 덤비는 편이었다. 해군에서 조종사로 근무한 그는 스카이 다이빙에 도전하고 모터사이클을 탔으며,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수상 스키를 타기도 했다. 그러나 대학시절에는 뻔한 답에는 만족하려 하지 않는 공부벌레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열정을 유머감각으로 커버했다. 늘 조급하게 앞만 보고 달음박질친 그는 30세 때 하원의원에 선출됐고 42세에 백악관 비서실장이 됐으며 43세 때 국방장관에 올랐다(최연소 기록이다).
럼즈펠드는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힘을 상실하던 시기에 권력층에 진출한 불운아였다. 1975년 럼즈펠드가 자신의 첫 국방장관직을 맡았을 때 미국은 베트남戰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는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에서 승승장구하던 아이비 리그 출신들이 비난의 대상이 됐던 시절이었다. 한때 자신만만했던 ‘앵글로색슨계 백인 신교도’(WASP) 계층이 신념을 잃고 쇠퇴하고 있었다. 동시에 백악관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휘청거렸다. 정가의 위계질서에서 ‘제왕적 위치’는 기성 행정부 지도층에서 언론인·검사 등 새로운 反체제 세력으로 옮겨갔다.
행정부 요직은 점차 출세지향적인 테크노크랫으로 채워졌다. 이들은 증권가나 법조계에서 활동하다 2차대전 이후 정계에 입문한 아마추어 관료들보다 논쟁을 더 좋아하고 속임수에 능했다. 럼즈펠드가 지닌 대학생 같은 열정은 외교 전문가들에게는 냉대를 받았다. 한번은 럼즈펠드가 백악관에서 제럴드 포드 대통령·키신저 국무장관과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대학시절 룸메이트를 우연히 만났다. 럼즈펠드는 장난삼아 옛 친구를 레슬링하듯이 잡았다. 그러자 놀란 경호요원이 총을 꺼내 들었다. 키신저는 “아마 프린스턴大 출신인가 보군”이라고 중얼거렸다.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워싱턴 정가는 혼란스럽고 불안정했다. 그런 상황에서 출세를 노리던 럼즈펠드는 새로운 질서의 좋지 않은 면을 취했다. 그 자신도 술수에 능한 관료주의적인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직접 반대의사를 한번도 표명하지 않고서도 포드 행정부의 전략무기제한협정 II(SALT II) 체결을 무산시켰다. 관료적 정치놀음에 일가견이 있는 키신저는 그것이 럼즈펠드의 신념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어느 정도는 그가 나중에 대통령 출마를 위해 공화당 우익세력의 비위를 맞춘 것이라고 의심했다.
럼즈펠드는 1988년 대통령 후보 출마를 잠시 고려한 적은 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1976년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정계를 떠나 줄곧 민간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는 하이테크 회사와 제약 회사의 경영인으로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그는 국방 문제에 대해서는 계속 관여를 해왔다(그는 1998년 미사일 방어를 추진한 독립위원회를 이끌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2001년 국방장관직을 제의했을 때 럼즈펠드는 거액의 방산업체 주식을 포기하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면서도 이를 즉시 수락했다.
그때는 이미 럼즈펠드의 정치적 야망이 사그라든지 오래였다. 럼즈펠드의 라이벌이었다가 나중에 친구가 된 키신저는 “그의 태도가 달라졌다. 모두들 그가 전적으로 업무에만 매진한다고 보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동안 국방부 조직 자체도 달라져 갔다. 민간인 아웃사이더로서는 장악하기 힘든 조직으로 변한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군 수뇌부가 베트남戰 때 하급 장교로서 겪은 잔혹한 경험에 의해 사고가 형성된 사람들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군사역사가인 코언은 “사람들이 터무니없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한 그들은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막으려 했다”고 말했다.
그에 따라 정복을 입은 군인들이 민간인 장관으로부터 국방부의 실권을 접수했다. 국방부를 강력하게 장악한 마지막 장관은 1960년대의 로버트 맥나마라였다(맥나마라의 보좌관 가운데 한명은 커티스 르메이 공군 참모총장에게 “장군께서는 전쟁계획이 아니라 오르가슴만 갖고 있습니다”라고 당돌하게 말한 적이 있다). 베트남戰 이후 대다수 장성들은 무공훈장보다는 학위를 더 많이 땄고 전장에서보다는 교실에서 훨씬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어느 장관보다 예산을 짜고 무기체계를 도입하는 데 훨씬 더 밝았다.
실무를 직접 챙기는 럼즈펠드의 스타일은 국방부의 그런 문화와 정면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럼즈펠드는 ‘예스맨’을 혐오했고 난상토론을 즐긴다. 그는 자신의 주변을 “잘 굴러가는 자전거 바퀴에 막대기를 찔러넣기를 즐기는 참모들로 포진시켰다”고 한 보좌관은 말했다. 반면 정치 군인들은 논쟁과 대립을 피함으로써 승진했다. 여성운동과 ‘테일후크’ 성추행 사건 같은 스캔들 때문에 군부는 점점 온순한 경향을 띠게 됐고, 심지어 엄격한 청교도주의자처럼 변했다.
지금은 군인으로 출세하려면 경력에서 조그만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따라서 야망을 가진 장성들로서는 리스크를 안는 일이 금기일 수밖에 없다. ‘無결함’과 ‘無관용’이 장성들 사이에서 캐치프레이즈가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모범적인 장성의 예가 바로 콜린 파월이다. 럼즈펠드가 호기만만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前 대통령의 말을 신봉한다면 파월은 “힘의 표현 가운데서 가장 깊은 감명을 주는 것은 바로 자제력”이라는 투키디데스의 명언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럼즈펠드는 이단아를 높이 사며 그들을 보호하고 격려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그중 한명이 국방부 관리인 앤드루 마셜이다. 그는 오랫동안 ‘군사 혁신’에 관한 급진적인 개념을 주창해왔다. 럼즈펠드는 국방장관에 취임한 직후 어느날 사무실에 들어서며 보좌관에게 “마셜과 점심을 같이 했어. 그게 하나의 신호가 될 거야”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랬다. 장성들은 럼즈펠드가 최첨단 무기에 관한 마셜의 파격적인 아이디어에 홀딱 빠져 기존의 재래식 무기를 없애버리려 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들은 럼즈펠드가 군 자체를 붕괴시키려 한다고 기자들과 의원들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국방부의 가장 은밀한 곳은 ‘탱크’라고 불린다. 합동참모본부가 전략을 논의하고 도입할 무기를 결정하는 곳이다. 2001년 여름 합동참모본부가 럼즈펠드를 탱크로 초청, 비공개로 견해차에 관해 토론을 벌였다. 토론은 시종일관 격렬했다. 다음날 워싱턴 포스트紙에 그 토론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럼즈펠드는 격분했다. 당시의 합참의장이 던 헨리 셸턴이 럼즈펠드에게 다시 탱크에 모여 논의하자고 제안했지만 럼즈펠드는 “난 가지 않겠다. 탱크가 새고 있는데 무슨 소용이냐”고 잘라 말했다. 그 뒤로 럼즈펠드는 탱크에 한두번밖에 가지 않았다.
그로써 국방부의 세력 중심이 서서히 옮겨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방부 내 실권 이동의 진정한 계기는 9·11 테러 사태였다. 럼즈펠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을 몰아내라는 부시 대통령의 명령을 받고 최대한 빨리 미군을 현지에 투입하려 했다. 결국 불과 12일만에 특전대 1진이 아프가니스탄에 잠입했다. 그러나 한 측근은 “럼즈펠드의 채근으로 12일이 12년처럼 느껴졌다. 괴로운 나날이었다. 럼즈펠드는 일이 신속히 진행되지 않으면 참지 못한다. 그는 ‘내가 두달 전에 지시했잖아?’라고 말하면 우리는 ‘장관님 바로 이틀 전이었는데요’라고 대답하는 식”이라고 말했다.
럼즈펠드는 전쟁계획 수립을 위한 기존의 복잡한 절차를 싫어했다. 통상적으로 전쟁계획은 현지 담당 사령관(아프가니스탄의 경우는 중부사령부의 토미 프랭크스 대장)이 세워 합동참모본부에서 논의된 뒤 국방장관의 결재를 받는다. 그러나 럼즈펠드는 형식적인 결재만 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처음부터 프랭크스 대장을 불러서 질문을 퍼부었다. 결국 아프가니스탄 전쟁계획은 탱크에서가 아니라 럼즈펠드의 집무실에서 세워졌다.
럼즈펠드는 지금도 하루 서너차례씩 프랭크스 대장과 회의를 한다.
합동참모본부의 몇몇 장성들은 이런 상황에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그들은 이라크 공격을 저지하려는 의도에서 언론에 공격 시나리오를 유출해왔다. 정보 유출에 분노한 럼즈펠드는 美 연방수사국(FBI)에 수사를 의뢰했다. 그는 아직도 군 간부들로부터 솔직한 대답을 얻기가 어렵고 첩보 수준도 형편없다는데 실망하고 있다.
럼즈펠드는 자기의 명령이 그대로 전달되지 않는 사태를 우려하고 있다. 군법 전문가들과 소심한 사령관들이 적극적인 교전수칙을 희석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한 보좌관은 “전동장치의 벨트와 같다. 모든 전동장치에는 벨트가 미끄러져 생기는 손실이 있게 마련이다. 교전수칙이 그런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전선에 도달하면 병사들은 그것을 무기를 사용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럼즈펠드를 똑똑한 체하는 인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럼즈펠드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너무도 자신만만한 나머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스스럼없이 인정하는 사람이다. 최고위 보좌관들인 토리 클라크와 래리 디리타는 그처럼 솔직하고 화통한 사람이 어떻게 ‘관료주의 9단’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럼즈펠드는 깐깐한 성격 때문에 때로는 불필요하게 국방부뿐 아니라 행정부 전체에 적을 만들었다.
럼즈펠드와 파월은 서로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친한 사이다. 그들은 서로를 무자비하게 놀려댄다. 럼즈펠드가 관절 수술을 한 뒤 팔에 깁스를 하자 파월은 그것을 보고 ‘하이 파이브를 하자’며 익살을 떨었다. 그러나 백악관은 럼즈펠드와 그의 매파 참모들이 이라크 문제에서 너무 강하게 밀어붙이면 파월이 국무장관직을 사임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다.
한 고위 행정부 관리에 따르면 부시 대통령도 럼즈펠드가 국방장관뿐 아니라 국무장관 역할까지 도맡으려 하지 않나 우려하고 있다(럼즈펠드는 지난주 워싱턴 포스트紙에 이라크 선제공격의 정당성을 주당하는 기고문을 내려 했다가 취소함으로써 한발 물러섰다). 부시는 미국 국민들과 국제사회의 지지를 규합해야 하는 상황에서 혼란스러운 논쟁을 두고볼 수만은 없는 처지다.
부시는 파월의 견해를 경청하며 그를 존중한다. 그러나 백악관 소식통에 따르면 부시의 속마음은 럼즈펠드에 더 가깝다. 특히 9·11 이후 부시는 외교의 모호성보다 대담한 행동을 선호하게 됐다. 그는 전쟁이 가져올 정치적인 부작용과 리스크에 대해 우려하고 있긴 하지만 럼즈펠드의 ‘이라크로 진격!’ 주장에 더 마음이 가 있는 것 같다.
With KEVIN PERAINO, JOHN BARRY, MARTHA BRANT,
MICHAEL HIRSH and ROY GUT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