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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초원의 나라, 몽골 알타이 서부지역 3천여km를 가다
‘고조선유적답사회’는 우리 민족의 원류를 찾아서 서른여덟 번째 행사로 ‘몽골 알타이 서부지역’을 답사하였다. 답사대원 17명, 현지가이드와 차량기사들을 합쳐 모두 24명의 답사대원들은 울란바토르~카라호름~비얀홍고르~알타이~흡스콜을 차량 다섯 대로 10박 11일 동안 대초원과 고비사막, 만년설이 쌓인 험준한 산악과 바다처럼 넓은 호수 등 다양한 몽골의 숨겨진 속살을 만났다.
한 민족과 몽골이 무슨 관계가 있냐고?
몽골과 우리나라가 국교를 수립하기 전, 몽골은 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기에 지리적으로도 갈 수 없는 먼 나라였다. 다행히 세계의 변화에 힘입어 우리나라와 몽골은 1990년에 국교를 수립하였다. 이와 동시에 1990년 조선일보는 창립 70주년 기념으로 ‘한민족문화 뿌리 찾기-몽골 학술 기행’으로 몽골에 대한 첫 학술조사팀이 꾸려졌다. 그 이후, 막연히 칭기즈칸의 나라, 몽골 반점 등으로 연상되었던 몽골이 다양한 모습으로 조금씩 그 베일을 벗으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몽골 기행은 한민족의 뿌리가 몽골 초원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 학술단체와 재야학술단체들의 몽골 방문이 이어졌다. 비중 있는 언론사들의 몽골 다큐멘터리가 연이어 방송되면서 몽골의 매력에 사로잡힌 여행객들이 앞 다퉈 몽골을 방문하게 되고, 몽골인들이 한국에 근로자로 나오면서 몽골은 이제 낯선 나라가 아니었다.
이즈음 10년 전, ‘고조선 유적 답사회’는 ‘한민족 원류를 찾아서’라는 목적아래 구성되었다. 동이족의 발상지 내몽골 홍산문화 지역, 거리마다 ‘쌍어’ 문양이 즐비한 내몽골 오르도스 지역, 선비족의 발상지 알선동굴 지역, 우리민족의 흥망성쇄가 일어났던 대흥안령 일대와 우리민족과 가장 핏줄이 같은 시베리아 남단의 오륜춘족(에벤키족)들이 사는 북극향까지 36차례나 답사하였다.
‘고조선 문화’라는 잡지도 발행하며 학술적인 의미도 가졌으며 ‘고조선 신화에서 역사로’라는 단행본을 발간해 우리 민족의 뿌리와 원류에 대해 일반인들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또한 홍산문화에 대하여 믿지 못하는 학자들에게 비용까지 들여서 두 눈으로 현장을 확인시켰다.
이러한 재야사학계와 고조선 유적 답사회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불옹성이나 다름없던 강단사학자들의 발걸음이 바쁘게 되었다. 낙숫물에 바위가 뚫린다는 속담처럼 비로소 60년 만에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에 따르면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한다(2333년).’에서 ‘건국하였다.’라고 교과서의 내용이 바뀌었다. 그만큼 우리 학계는 오랜 동안 한반도에 국한 시킨 일제 식민지 사관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불행한 역사였다. 그런 학설을 배우고 자란 우리 세대 또한 활동범위를 스스로 축소시키며 살 수밖에 없었다. 이와 더불어 중국의 동북공정이 날로 거세지면서 만주지역에서 일어났던 고구려와 발해 마저 그들의 변방국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따라서 지금은 오랜 역사의 부침 속에서 다른 나라 영토가 되었지만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 만큼은 제대로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알려야한다는 소박하지만 숭고한 뜻에서 출발했다.
우리민족의 발상지 대흥안령
외몽골 답사하기 전 우리는 수 십차례에 걸쳐 대흥안령 일대와 만주평원 그리고 내몽골 지역을 답사했다.
중국에서 ‘녹색보고’라고 하는 이 대흥안령의 남북 길이는 1200㎞이고 동서 너비는 200~300㎞로서 면적은 약 8만5000㎢에 달한다. 면적의 74%는 울창한 수림으로 덮여있으며, 그 속에 진귀한 400여종의 동물과 1000여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큰 산치고는 의외로 높지 않다. 평균고도가 1250m쯤이며, 가장 높은 산이래야 2000m를 넘지 않는다. 지금도 가을 추수한 후 볓 짚이나 옥수수 대를 가득 실은 달구지나 차량들이 이 길을 넘나들고 있다. 그래서 고구려 후예들은 별로 어렵지 않게 이 산을 넘나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목재를 가득 실어 나르는 몇 갈래의 철로가 산 중턱까지 닿아 있다. 한온대 대륙성 기후로서 평균 온도는 영하 2.8도이며 중국에서는 가장 추운 곳으로서 영하 52.3도까지 내려간 적이 있다. 북단 오륜춘 족이 사는 자그마한 ‘북극촌’은 하지를 전후해서는 하루에 무려 스무 시간이나 해를 볼 수 있는 백야가 계속되어 관광객이 폭주한다. 오륜춘 족은 시베리아의 에벤키 족과 함께 우리 민족과 핏줄이 가장 가까운 족속이라고 한다. 수렵민족으로 산에서 살던 이들은 지금은 중국 정책으로 인해 산에서 내려와 버섯을 키우고 약초를 채취하며 생활한다. 이들은 인디언 천막을 치고 순록을 키우며 산에서 살던 민족이다. 이들이 알라스카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까지 건너간 인디언들이다. 아메리카 인디언 모습과 이들은 너무 똑 같다. 수 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아메리카 대륙과 이곳에서 인디언 천막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그 뿌리가 같다는 것이다.
대흥안령은 20여개의 크고 작은 강을 품고 있으며, 연평균강수량은 700㎜에 이르러 나무나 풀이 자라는 데 적격이다. 주로 몽골계와 퉁구스 계의 24개 민족이 목축업과 임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 산속의 인구는 54만명(2005)을 헤아리며. 오늘은 3개 현과 4개 구로 나눠 행정관리하고 있다.
다음으로, 둥베이는 우리의 고대 역사와 문화가 피어난 터전이다. 고조선과 동북아 최강국 고구려, 그리고 해동성국 발해가 이 땅에서 발호(跋扈)했던 것이다. 차제에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일통삼한(一統三韓)의 내재적 한계성 때문에 우리의 민족국가인 발해까지 아우르는 완전통일을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뼈저린 역사적 교훈이다. 그 아픔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지금까지의 교과서적 통념을 벗어나 우리로 하여금 의아스럽게 하는 것은 신라를 세운 지도층이 지린성을 거쳐 남하했다는 일설이다.
또한 1215년은 신라 마지막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 후손들이 만주로 이주하여 세운 금(김)나라 수도인 베이징을 점유하여 청을 세웠다. 또한 말갈족 혹은 고구려 유민들이 흑룡강을 따라 들어가 시베리아 남단에 자리한 숲에서 정착하게 되었고 이들은 메르키드 족으로 불렸다. 칭기즈칸이 메르키드 족 핏줄을 갖고 태어났으며 그의 어머니 또한 대흥안령 너머 만주리가 고향이라면 칭기즈칸은 우리 민족과 같은 혈통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칭기즈칸은 1219~1223년까지는 중앙아시아와 러시아를 정복하여 세계 최강의 코리아 몽골제국을 이루었다. 이렇게 정복한 땅들은 아들에게 분할해 주고, 대칸에 복종하는 것을 전제로 각각 자치권을 가진 칸국을 건설하도록 하였다.
1783년 청나라 황제 건륭제의 명을 받은 한림원이 편찬한 역사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의하면, 신라의 선조인 박씨 일족은 몽골초원에서 대흥안령을 거쳐 계림(현 지린시)에 정도했다가 한반도로 남하함으로써 신라의 서북 강역은 오늘의 지린성 오랍(烏拉)이라는 것이다. 우리 학계 일부에서도 신라가 다른 곳에서 경주 일원으로 옮겨 왔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동북과 신라의 어떤 관련성을 시사하는 것은 아닌지 일고를 요하는 설이라 하겠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두 가지 편향을 함께 지양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중국이 주장하는 이른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해 고조선에서부터 발해까지의 우리 민족사를 저들의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시도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들 속에서 튀어나오는 비현실적이며 복고주의적인 ‘고토회복’ 운운이다. 역사는 후세에 의해 임의로 재단되는 것이 아니며, 변화하는 현실의 연속이다.
끝으로, 둥베이는 우리와 북방이나 서역을 이어준 징검다리다. 초원과 오아시스 실크로드가 이곳을 거쳐 한반도로 이어졌으며, 그 길을 통해 우리의 역사와 문화는 세계와 소통하고 교류했다. 그래서 둥베이와 한반도에서는 북방이나 서역과의 교류를 입증하는 유사 유물이 적잖게 발견된다. 우리는 지금 바로 그 징검다리의 서경(西境)에서 대흥안령을 관통해 칭기즈칸의 어머니 고향 만주리와 후룬베이 초원을 답사했었다.
따라서 ‘한민족 원류를 찾아서!’라는 모태로 출발한 고조선 유적 답사회는 만주 평원과 백두산 일대 그리고 대흥안령 일대와 내몽골 지역을 비롯한 여러 지역을 36차례나 답사한 후, 몽골 대륙 전반으로 넓혀 초원에서 제국을 잃은 나라와 우리 민족과의 연관성을 공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초원의 북방문화의 전파와 수용, 민족의 생성과 이동 문제를 파헤침으로써 우리 민족사의 발전 과정을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국제화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려면 구시대의 한반도 사관에서 벗어나 보다 개방적인 자세로 역사를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목적이 여기에 있다하겠다.
세계의 판도는 시시각각으로 요동치며 알 수 없는 변화에 휩쓸리고 있다. 100년, 아니 50년 안에 세계가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는 누구도 알 수가 없다. 그때를 대비해 우리 민족의 역사와 뿌리를 넓혀야 한다는 대명제가 고조선 유적 답사회의 목적이 있다 하겠다.
왜 우리는 몽골과 같은 형제라고 하는가?
몽골황실의 역사를 다룬 <<몽골비사>>를 보면 칭기즈칸 조상은 코리(고리)족이라고 나온다. 게다가 한민족의 시왕모가 마고이듯이 몽골 비사는 ‘알랑 고아’라는 코리족 여성이 시왕모로 나온다. 그래서 몽골인들은 여성을 우대하고 어머니나 아내에게 잘하는 풍습이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는 것이다.
몽골은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더욱 존경하고 섬기는 가족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칭기즈칸의 어머니가 코리(구려=고구려)족 출신으로 칭기즈칸을 잘 키워서 세계를 지배하고 경영한 위대한 태무진을 낳아서 양육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칭기즈칸의 어머니가 우리 민족과 한 혈통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칭기즈칸의 어머니의 고향이 대흥안령 자락의 후른베이 초원이기 때문이다. 대흥안령 지역은 고구려의 모태인 북부여, 고구려, 발해의 유민들이 대거 몰려가 살았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부여에서 나온 고주몽이 고구려를 세워 북부여까지 멸망시키자 북부여에 살던 백성들이 고구려의 영역을 피해 대흥안령 너머 만주리나 후룬베이 초원으로 이주해 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어머니의 고향이 고리족이라는 것이 바로 고구려족임을 말해주고 있다.
칭기즈칸이 사랑한 솔롱고스의 여인의 나라 고려
몽골에서 한국을 '솔롱고' 즉 무지개 나라라고 부르고 한국인을 '솔롱고스'라고 부른다. 이 말은 13세기 우리나라에 들어온 몽골인들이 아름다운 산천과 고려여인들에게 매료되어 그렇게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세계에서도 고려는 유일하게 몽골제국에 맞서 강화도에 도읍을 옮겨서까지 36년간이나 저항했던 보기드문 민족이다. 몽골과의 화약을 맺고는 개경으로 도읍을 옮기면서부터 많은 고려인들은 원나라 풍습을 따랐다. 이때 몽골에서 들어온 풍습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는데, 신부화장 연지곤지, 족두리, 소주, 설렁탕 등등. 많은 풍습이 지금도 남아 있다.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세운 나라가 세계를 지배했고 한국도 칭기즈칸의 말발굽 아래에서 압제당했다고 여긴다. 그때 많은 몽골 문화가 고려에 들어갔는데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반대로 우수한 고려 문화가 ‘고려양’이라는 이름으로 몽골에 퍼져 나갔다는 사실에 대해 몽골인들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또한 몽골과 고려의 혼인 풍습으로 인해 수많은 혈통이 원나라와 고려에 이어졌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원나라 황실과 귀족들은 고려여인을 선호해 후궁이나 부인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반해 중국의 한족 여인들은 후궁으로 맞이하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특히 원나라의 세력이 기울 즈음 고려인 출신 기황후가 낳은 원나라 황제에 대해서는 한국과 몽골의 역사학자들이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하겠다. 우리나라에서도 잘 살펴보면 몽골인들처럼 덩치가 크고 살집이 많은 사람들을 볼 수가 있다. 그들 족보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분명 몽골인 선조가 나올게 분명하다. 또한 몽골인들을 잘 살펴보면 마르거나 쌍거풀이 있고 피부가 하얀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터키나 카자흐스탄, 시베리아 쪽 혈통을 지닌 사람들로 구분할 수가 있다.
이처럼 어느 나라나 동일민족이라는 사실은 있을 수가 없다. 특히 몽골이나 우리나라처럼 역사의 부침이 심했던 지역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징기스칸 시대에는 모국 솔롱고스라고 생각한 고려에서 13세~15세 소녀들을 매년 400~500명씩 40 여년간 2만여 명을 몽골로 데려가서 몽골의 황족 또는 귀족들과 결혼시켜 자손들을 번창하게 했다. 그러니 몽골에서는 우리 한국을 사돈의 나라라며 좋아하고 가까이 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칭기즈칸의 애첩 훌란 공주는 몽골의 전설적인 미인으로 원나라 말기의 기황후와 함께 한국 여인은 슬기롭고 아름답다는 인상을 몽골인들에게 깊이 각인시킨 솔롱고스, 즉 고구려 여인이다.
훌란 공주는 17세기 몽골 문헌인 ‘몽골원류’에 솔롱고스의 공주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당시의 솔롱고스가 고구려 후예인 대진국 발해이고 메르키드가 솔롱고스로 기록됐다면, 메르키드는 말갈일 수 있고 메르키드의 공주 훌란은 솔롱고스 공주가 된다. 훌란 공주의 아버지 다이르 우순 칸을 보카 차간 한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대진국 발해(渤海) 백왕(白王)이라는 말이다.
당시 몽골은 우리나라를 ‘솔롱고스’ 즉 무지개 나라라고 불렀다.
몽골에서는 칭기즈칸 시대에 고려 조정이 항복하고나서 몽골에 고려여인들을 끌고와 노예처럼 부렸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따져보면 몽골에 공납한 것이 아니라 칭기즈칸 어머니의 나라 솔롱고스의 아름다운 처녀들을 데려와 몽골 황족 또는 귀족들과 결혼시켜 자손들을 번창하게 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우리 민족은 어디에서 왔는가?
누구나 자신의 뿌리가 어디에 있고 또 어디에서 왔는지 몹시 궁금할 것이다. 우리 민족의 뿌리를 생각할 때마다 누구나 북쪽 지역을 쳐다본다. 사람이 죽으면 ‘북망산’ 간다는 말이 있다. 우리 민족의 뿌리가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북쪽 어느 지역인지 더욱 궁급할 수밖에 없다.
우리 민족은 대흥안령 지역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대흥안령은 산자락이 완만하고 그 언저리는 대평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당시 기후가 좋아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흥안령과 소흥안령 사이 만주벌판이 우리 선조들의 주무대였다.
이중 대흥안령은 오늘날 동북지역(둥베이)와 내몽골(네이멍구 자치구)의 경계를 이루는 거대한 산맥이다. 대흥안령은 남북으로 길게 1200km 되며 몽골 초원세력과 만주평원 세력의 접경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크기가 한반도와 맞먹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길이와 면적을 지니고 있다.
동북아시아의 지배자로 고구려가 번성했을 때 대흥안령 동몽골 지두우 지역까지 영향권 안에 두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흥안령 너머 만주리와 후룬베이 초원은 칭기즈칸 어머니의 고향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몽골 비사에 따르면 칭기즈칸 뿌리가 고리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고리국은 어디일까?
칭기즈칸 어머니의 고향은 고구려 유민들이 사는 만주리
2년 전 칭기즈칸의 어머니의 고향 만주리와 후룬베이 초원을 답사했었다. 대흥안령 넘어 서쪽 초원 만주리이다. 이곳은 내몽골, 외몽골, 러시아와 삼국이 국경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러시아와 몽골 그리고 중국 세관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만주리는 중국 달러의 위력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도시 전체가 러시아 풍 건축물이 즐비하다. 15년 전에 이곳을 방문했던 사람들 이야기로는 당시에도 러시아 여자들이 술집이나 안마시술소 같은 곳에 많이 진출했었다고 한다.
한번은 전화부스 같은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어서 살펴보았더니 유리벽으로 막힌 그 안에 인형처럼 생긴 러시아 여자가 앉아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 여자는 손만 겨우 나올 정도의 작은 구멍을 통해 손을 내밀고 중국인들은 1원씩 내고는 러시아 여자 손을 만지느라 줄을 길게 선 것이었다. 당시 풍광을 떠올리며 주위를 살폈지만 도무지 그런 재미있는 풍광은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세관 근처 기념품 가게에 들렀을 때, 내가 입고 있던 등산 조끼에 태극마크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는 한국사람이라며 좋아하는 여점원이 떠오른다. 그 여직원은 중국돈 10원과 한국돈 1천원을 바꾸자고 조른다. 당신이 손해라고해도 막무가네로 한국 돈을 기념으로 갖고 싶다고해서 하는 수 없이 바꾼 적이 있다. 중국에서 북쪽에 있는 만주리에서조차 한류열풍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한편으로는 이 여인의 피솟에 고구려인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 같은 진한 느낌이 전해왔다.
시간이 있었다면 만주리에서 하룻밤 묶으며 러시아 정취에 취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러시아 가무단의 공연이 일품이라는데, 아쉬움을 뒤로하고는 후룬호로 향했다. 아직 여름철이 아니어서 관광객들이 없는 한산 한 후룬호는 빈 보트만 손님을 기다리며 물결에 출렁거렸다. 후룬호를 구경만 해도 입장료를 내야한다고해서 우리는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칭기즈칸 말목장이 어디쯤에 있는지 표받는 관리인에게 물었더니 후룬호를 따라가면 어딘가에 말목장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출입문 옆으로 난 초원길로 들어가 후룬호를 따라 자동차를 몰았다. 이정표도 없고 사람이 살지도 않는 곳이어서 걱정은 되었지만 가다보면 안내판이라도 있을 것 같아서 길도 없는 호숫길을 선택했다. 또한 이 길을 선택한 것은 후룬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계속 보고 간다는 점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칭기즈칸 어머니의 고향이라는 후룬베이 초원의 후룬호는 맑고 깨끗했다. 70여종의 물고기가 살며 새들의 낙원이다. 잠깐 차를 세워 놓고 물가로 내려갔는데 해안에 소금띠가 있었다. 손가락으로 찍어 입에 대고 물맛을 보니 약간 짭짤한 것이 염분이 높았다.
후룬베이 초원 만주리가 칭기즈칸 어머니의 고향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답사대는 대흥안령을 넘어 만주리까지 오게 되었다. 사실 대흥안령을 직접 보지 않을 때엔 과연 만주에 살았던 고구려 유민들이 대흥안령을 넘어 이곳까지 어떻게 올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대흥안령은 높지가 않다. 지대가 고원이어서 그렇지 산세는 그다지 험하지 않고 말을 타거나 걸어서 충분히 넘어 다닐 수 있는 산세였다. 고원지대에 있는 산이 대부분 그렇듯이 말이다. 우리가 대흥안령을 넘을 때 볏가리를 가득 싣고 오는 자동차나 경운기를 보았다. 그들은 대흥안령에 보금자리를 틀고 사는 원주민들이었다. 이 도로는 새로 난 길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만주와 후룬베이 초원 사람들이 넘나들던 길이 틀림없었다. 고구려 유민들도 이 길을 따라 만주리로 갔다는 생각이 들자 그냥 평범한 길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제주도 크기의 호수를 따라가며 칭기즈칸 말목장을 찾아갔는데 주위가 어두워지는 바람에 말 목장을 볼 수가 없었다. 밤새 길도 없는 초원길을 달빛에 젖은 초원을 차창 밖으로 내다보며 새벽녘이 돼서야 도심을 만날 때까지 줄곧 칭기즈칸 어머니가 고구려의 혈통을 가진 여인이었을 것으로 짐작하며 생각에 잠겼다.
칭기즈칸과 메르키드 족 그리고 한민족의 관계
몽골황실의 역사를 다룬 <<몽골비사>>에 칭기즈칸의 조상은 코리(고리)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리족은 북부여의 유민들로 수렵족이다. 한마디로 칭기즈칸의 선조는 몽골 초원의 유목민이 아니라 북부여에서 흑룡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 바이칼 호수 아래 셀레강 가에 자리를 잡고 살았던 메르키드 족으로 알려져 있다.
몽골학자 아르다잡 교수는 칭기즈칸 어머니가 태어나 자란 메르키드는 대진국 발해의 말갈(靺鞨), 즉 고리족이라고 고증한다. 그렇다면 칭기즈칸의 혈통은 대진국 발해 유민이라는 말이다. 대진국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었던 대조영이 말갈족을 중심으로 세운 나라이다.
고리족은 본래 홍산문명이 일어난 요서지역인 임황을 중심지로 삼고 살았던 단군한국인들로 고구려가 시조로 삼은 고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단군한국시대에 고등은 몽골을 중심으로 초원지역을 지배한 단군한국의 우현왕으로 고등의 손자가 단군한국의 22대 단군천왕에 즉위한 색불루로 은나라 침략을 물리치고 황하이남을 지배하고,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고, 고조선 8조법을 제정하여 국가기강을 바로 세운 인물이다.
고씨족이 바로 고리족으로 22대 색불루 단군천왕 이후 단군한국의 황권을 장악한 황족이며, 부여시조가 되는 해모수, 부여 동명성왕인 고두막, 고구려를 개국한 고추모가 모두 단군한국의 황족인 고리족 출신들인 것이다. 고구려의 지배층이 고리족이였다면 피지배층은 말갈족이였다. 대진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몽골초원으로 이주해 간 고구려 대진국 유민인 고리족이든 말갈족이든 모두 고구려인들이였던 것이다.
오논강과 몽골초원으로 이어지는 만주 북부지역에서 수렵생활을 했던 고구려인들은 말갈족으로 어미 말을 길게 소리내게 되는 몽골초원에서는 메르키르족으로 불리었고, 유럽으로 이동하여 훗날 훈족과 합세하여 헝-가리(한-고구려)을 세운 말갈족은 마자르족이라 불리었다.
바이칼 호로 흘러드는 셀렝게강 지역에 정착하고 있던 메르키드(말갈) 족은 북만주 지역에서 살았던 고구려 유민일 것으로 보고 있다. 북부여에서 탈출한 고주몽이 고구려를 세워 동북아시아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북부여마저 정벌해 버리자 이들은 고구려의 세력을 피해 북쪽으로 달아나 흑룡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 오늘날 셀렝게 강 부근에 정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메르키드 족이 몽골 바이칼 부근 셀렝게 강 지역으로 옮겨간 시기가 광개토태왕의 북진시기로 추정하고 있다.
광개토태왕의 충신이였던 모두루(牟頭婁) 묘지(墓誌)에 의하면 고구려는 광개토왕 대(代)에 북부여를 장악하여 모두루(牟頭婁) 등에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전략. 조부 대형 염모.....조부□□, 대형 자□, 대형 □□를 거치기까지 대대로 관직의 은혜와 물품을 하사받아 왔다. 조부는 벼슬길에 나가 성민과 곡민을 함께 다스렸다. 전왕들의 보살핌이 이와 같았다. 광개토왕 대에 이르러 조부의 인연에 따라 노객인 모두루와 □□모에게 북부여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후략. 前略.祖大兄冉牟壽盡 □□於彼喪亡□由祖父 □□大兄慈□ 大兄□□ □世遭官恩恩□(賜?)祖之□ 道城民谷民幷領前王□ 育如此遝至國罡上大開土地好太聖王緣祖父□ 尒恩敎奴客牟頭婁□□ 牟敎遣令北夫餘守事.後略」牟頭婁 墓誌
또 한 가지 설은 고구려 후예들이 말갈족과 함께 세운 발해가 당나라에게 멸망되자 그 유민들이 만주 북쪽으로 이동해 북부여나 대흥안령을 넘어 초원에 자리를 잡고 살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칭기즈칸 어머니의 고향이 대흥안령 너머 후룬베이 초원에 자리한 ‘만주리’라는 사실도 이를 증명해주고 있는 사실이다.
후룬베이 초원과 북부여 일대에 살았던 일부 고구려나 발해 유민들은 흑룡강 상류를 따라 올라가 셀렝게 강 부근에 정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사실 흑룡강은 중국에서 부르는 강이고 상류인 몽골에서는 오논 강으로 러시아에서는 아무르 강으로 불린다. 이 강을 사이에 삼국이 국경을 이루고 있다.
오늘날 만주리는 러시아, 외몽골, 내몽골 국경을 이루고 있는 지역으로서 3국의 세관이 자리하고 있는 국제도시이다.
아무튼 두 가지 설은 있지만 하나같이 고구려 혈통의 유민들이라는 사실은 똑 같다. 그렇다면 몽골 바이칼 부근 셀렝가 강 부근에 살던 메르키드 족은 고구려 계통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사실이다.
몽골의 약탈 혼과 복수전
칭기즈칸의 어머니는 메르키드 족이 모여 사는 셀렝게 강 지역에서 출생하여 그곳 부족장의 아우 예케 칠레두와 결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보르지긴 씨족의 예수게이는 칠레두의 아내 후엘룬(고리족 출신)을 납치해 고향 헨티로 돌아간다. 그녀는 이미 임신한 상태에서 납치가 된 것이다.
부족장 예수게이가 타타르를 정벌한 후 고향에 돌아와 말에서 내리니 후엘룬이 아기를 낳았다. 에수게이는 그 아들이 자신의 씨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어쨌든 자신의 아들로 인정한다. 그리고는 타타르 원정에서 포로로 잡은 적장 ‘테무진 우게’의 이름을 따서 아들에게 ‘테무진’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당시 적장의 이름을 아들 이름으로 지어주는 관습이 있었다.
후엘룬 역시 실제로 메르키드족 남편인 칠레두는 잊고 현재의 남편 에수게이를 남편으로 받들고 헨티에서 살아간다. 당시 유목민족들 사이에선 ‘약탈 혼’이 비일비재했을 것으로보고 있으나 증명된 것은 없다. 다만 적으로 여기는 부족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여인들은 납치를 당했을 것이고, 납치당한 쪽은 복수혈전을 벌이며 보복을 했을 것이다. 그런 혼란의 시대였으므로 여자가 일부종사를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 오늘날 시각으로 비난할 수가 없다.
칭기즈칸은 어머니를 납치해 온 에수게이를 친아버지로 믿고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한다. 그리고 칭기스칸은 아홉 살 때 옹기라트 부족장인 데이 세첸의 딸 버르테와 결혼을 했고, 당시 풍습에 따라 처가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 에수게이가 타타르 부족이 독을 탄 술을 마시고 사망했다는 비보를 듣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에수게이가 죽자 많은 부족들이 떠나고 다른 부족들의 침입을 받아 힘들게 살아간다.
몇 년 후 성장한 버르테를 데리고 온 칭기스칸이 가족들과 함께 케룰렌강 상류 몽골어로 보르기 에르기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희뿌연 안개가 피어오르는 고요한 새벽에 3백 명의 메르키트 부족 전사들이 그곳을 습격했다. 그들은 칭기스칸의 양아버지 예수게이에게 칭기스칸의 어머니 허엘룬을 약탈당한 데 대한 보복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이동식 게르에는 말 8덞 마리가 있었는데 테무진의 아내 버르테가 타고갈 말이 없었다. 결국 양털로 둘둘 감아 마차에 숨겼는데 그만 발각되어 납치된 것이다. 훗날 버르테가 납치된 언덕 보르기에르기는 ‘피눈물 어린 물안개 피는 언덕’이라고 불렀다. 울란바토르에서 약 100km에 있으며 3시간 거리이다.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긴 테무진은 아내를 지켜주지 못한 못난 자신을 한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 앞에 밀어닥친 엄청난 비극 속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았다. 당시 그들의 방식대로 메르키드족에게 그에 상당한 보복을 하면 되는 것이다.
당시 몽골 최고의 실력자는 케레이트 부족의 옹칸이었다. 그는 칭기스칸의 아버지 예수게이와 의형제였다. 칭기스칸은 옹칸을 설득하고, 자신의 의형제였던 자모카의 군대까지 끌어들여 메르키트 공략에 나섰다.
사실 테무진이 시작한 메르케드족과의 복수혈전은 ‘아내 구하기 전쟁’이다. 이에 대해 [몽골비사]는 실감나게 전하고 있다. [몽골비사]는 몽골 유목민들의 역사를 알리는 최고(最古)의 기록이다.
한밤의 기습에 메르키트 백성들은 허둥대며
셀렝게강을 따라 급하게 도망쳤다.
테무진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는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버르테! 버르테!”를 절규하며 외쳐댔다.
그리운 아내를 애타게 찾았다.
바로 그때 도망치는 한 무리의 백성들 가운데
그 소리를 듣고 우차(牛車)에서 뛰어내리는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자기를 부르는 곳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그리고 번쩍번쩍 빛나는 테무진의 말고삐와 말에 맨 끝들을 움켜잡았다.
밤하늘에는 둥근 달이 휘황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 버르테!”
말없이 흐르는 격정의 눈물 속에 테무진과 버르테는
서로를 맹렬히 끌어안았다.
2년 만에 아내를 구출한 칭기즈칸, 그러나 아내 버르테의 뱃속에는 적장 칠게르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버르테는 남편과 재회한 후 곧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모두 말이 없었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주저하지 않고 이 아이를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였다. 양부 에수게이가 자신을 아들로 인정했던 것처럼 말이다.
칭기즈칸은 버르테가 낳은 아이에게 “우리 몽골인에게 나그네처럼 다가온 아이”라 하여 ‘조치’(나그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적의 딸을 ‘며느리’로 삼는 것과 적의 아들을 ‘아들’로 삼는 것은 유목민에게 있어서는 필연이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앞에서 언급한 조치의 출생문제를 거론한 유일한 인물은 테무진의 둘째 아들이자 조치의 바로 밑 아우인 '차카타이'였다. 칭기즈칸이 콰레즘제국과 한참 전쟁을 할 무렵, 작전회의 도중에 차카타이가 칭기스칸에게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
"왜 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조치와 상의해라, 조치와 의논해라'라고 하십니까? 조치는 저 망할 놈의 메르키트의 후레자식인데." 그 자리에 있던 조치는 이성을 잃었다. 칭기스칸과 모든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조치와 차카타이는 멱살을 잡고 싸웠다.
그들이 그렇게 싸우는 동안, 칭기스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몽골의 샤먼이자 가족의 보호자 격인 쿠쿠추가 나서 두 사람의 어머니인 버르테를 변호했다. [몽골비사]는 이렇게 전한다.
그대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별이 있는 하늘은 돌고 있었다
여러 나라가 싸우고 있었다
제 자리에 들지 아니하고
서로 빼앗고 있었다
흙이 있는 대지는 뒤집히고 있었다
모든 나라가 싸우고 있었다
제 담요에서 아니 자고
서로 공격하고 있었다. 그럴 때
다른 남자를 원해서 간 것이 아니다
교전 중에 그리 되었다
다른 남자에게로 도망친 것이 아니다
전투 중에 그리 되었다
다른 남자를 사랑하여 간 것이 아니다
서로 죽일 때 그리 되었다
그대들의 어머니는 함께 고생하며
높다랗게 머리를 묶고
잘끈 허리띠를 동여매고
모자를 단단히 눌러 쓰고
그대들을 기를 때
음식을 삼킬 사이에 그대들을 주고
당신의 목구멍을 좁혀
당신의 모든 것을 주고
주린 채 다녔다
그대들의 빗장뼈를 당겨
남자답게 누가 만들었는가?
그대들의 목을 잡아 늘려
사람답게 누가 만들었는가?
그대들의 몸을 씻기고
그대들의 발꿈치를 들게 하여
남자의 어깨뼈에
거세마의 엉덩이에 닿게 하고
이제 그대들이 잘되기를 보겠다고
생각하고 계시지 않는가?
파란만장한 어머니의 삶을 전해들은 두 아들은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잠시 싸움을 멈췄다. 칭기즈칸은 두 아들의 싸움을 쳐다보기만 할 뿐, 말리지도 혼내지도 않았다. 두 아들을 놓고 잠시 갈등이 일었다. 언젠가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테무진은 평생 동안 조치를 큰아들로 대했다. 조치는 테무진의 도움으로 맏아들의 권위를 언제나 누렸고, 나라의 운명을 건 전쟁에서는 언제나 대규모 군단을 이끌며 중요한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어찌되었던 조치는 의심할 수 없는 칭기즈칸의 장자였다.
조치와 그의 아들 바투는 초원을 질주해가며 여러 도시를 점령한다. 반항하는 자들은 적으로 간주해 잿더미로 만들었고, 몽골군에게 항복하고 따르면 그들의 지위를 그대로인정해 주었다. 조치와 바투는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하며 킵차크칸국(알탄오르도)을 건설하였다. 킵차크칸국은 일칸국, 차가다이칸국, 어거데이칸국과 함께 몽골 제국의 4대 칸국 중 하나이다. 몽골제국 영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막강한 세력이었다.
하지만 몽골 수뇌부는 조치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큰 전쟁을 앞두고 조치를 불러들였다. 하지만 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는 오지 않았다. 조치가 자신이 건설한 제국에서 칭기즈칸을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키려한다는 소리도 나왔다. 그러나 전령이 뒤늦게 도착해 전한 소식은 조치의 죽음이었다. 유럽 침공작전 중 전사했다는 것이다. 칭기즈칸은 하루 종일 겔 안에 틀어박혀 슬피 울었다고 한다. 자식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상처 속에서 자라난 자식에 대한 사랑과 연민 때문이 아니었을까?
조강지처를 대우한 칭기즈칸
칭기즈칸은 여러 명의 여인을 아내로 삼았지만 조강지처에게 최선의 대우를 했다. 그는 허엘룬이 낳은 네 아들(조치, 차카타이, 어거데이, 톨로이)과 이들의 직계후손만이 제국의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카간의 입후보 자격을 한정시킨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적통이 아니라고해서 조치를 배제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칭기즈칸은 대범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 허엘룬이 낳은 조치도 그의 자식이었다. 하엘룬의 뜨거운 자궁에서 나온 자식들은 아비가 누구이던 모두 자신의 가족이었다.
당시 몽골이라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는 내 아내도 내 딸도 그렇게 될 수 있는 상화이었다. 타의에 의해서 어쩔 수 없는 기로에 설 수 밖에 없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사내로서 가족을 지키지 못했고 아내를 내가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했던 것은 아닐까. 시답지 않게 이런저런 이유를 끌어들이지 않고 현실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인 것이다. 그런 기질이야말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과연 농사나 짓는 정착민 중에서 강간당한 아내가 낳은 자식을 친자식처럼 키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늘날에도 몽골에서도 딸이 도시에 나가 아이를 낳아 고향 부모에게 맡기러 와도 아버지가 누구인지 묻지 않는다고 한다는데, 이런 오래된 관습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알타이를 향하여!
우리는 언어와 민족을 말할 때 흔히 ‘알타이어 계통’, ‘알타이어족’이라고들 말한다. 우리 민족의 뿌리가 알타이 지역에서 시작되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우리말과 몽골 어는 어순이 같으며, 몽골반점은 친밀감 그 이상의 한 핏줄이라는 상징성이 있다. 이 밖에 문화적으로는 서낭당과 같은 모양의 오보, 문양, 고려 향, 몽골 풍 등등 우리나라와 연관된 문화적 고리가 깊다. 어떤 역사성을 연결 짓지 않아도 ‘알타이’는 우리 민족의 원향이라는 생각에서 한번 쯤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다. 하지만 알타이는 울란바토르에서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제대로 된 도로가 없다. 또 사막이나 초원이다 보니 마을이 형성되어 있지 않는 곳이 많아서 여행객들은 자동차 편으로는 쉽게 다가설 수가 없는 지역이다.
몽골의 주 교통수단은 철도와 러시아제 쌍발기가 주를 이룬다. 요즘은 도로가 개설되고 자동차가 늘어나면서 주 교통수단이 자동차로 바뀌고 있는 추세이다.
고조선 유적 답사회는 국내선 항공기 대신 자동차로 초원을 누비며 몽골 초원에 숨겨진 속살을 만나는 여행을 하기로 결정했다.
자동차 길이 없는 초원의 길은 이동거리가 멀다보니 차량 5대는 번갈아가며 두 세 번은 펑크나 고장을 일으켰다. 가이드와 운전자들도 이 코스를 와 본적이 없어서 이정표가 없는 길을 가다보니 두 차례나 길을 잃기도 했다. 오히려 길을 잘못 들어섰지만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훈족들의 무덤 적석총 수천기가 이어져 있는 무덤의 계곡을 만난 것은 이번 답사의 가장 큰 성과이기도 하다.
다섯 번은 사막과 초원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을하였으며, 나머지 다섯 번은 울란바토르와 관광배후 도시를 지날 때에 만난 도심지의 호텔이나 게르에서 숙박하였다.
고조선 유적답사회는 옛 몽골의 수도 카라호름, 우리민족의 시원이라고 불리는 알타이 지역, 동이족의 선조들로 이루어진 훈족(흉노)들의 삶의 터전을 질주하며 조상들의 기백과 강인한 정신을 배우며 10박 11일간의 약 3000km의 대장정을 마치고는 8월 10일 귀국했다.
‘와일드’ ‘와일드’ 몽골 대초원
한마디로 몽골은 와일드~ 와일드이다. 동쪽으로는 중국 내몽골과 경계를 이루는 대흥안령 서쪽에서부터(대흥안령 동쪽은 중국 내몽골이다. 몽골에서는 중국의 내몽골을 외몽골로 부른다.) 서쪽의 알타이 산맥까지 크게 면적을 아우른다. 크게 나누면 두 개의 거대한 산맥 안의 분지에 살고 있는 셈이다. 이 영토는 자그마치 우리나라의 7.4배에 달하는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인구는 고작 280만 명밖에 안 된다. 그나마도 수도인 울란바토르에 50% 이상이 모여 살고 있어서 울란바토르는 인구밀도가 매우 높다. 나머지는 울란바토르 인근 초원에 형성된 무릉을 비롯한 관광 배후 도시에 모여살고 있다. 일부는 작은 마을에 모여 살거나 독자적으로 짐승을 키우며 초원을 이동하는 전통적인 유목생활을 한다. 그나마도 한국에만 근로자로 4만 정도가 나와 살고 있다보니(한때는 7만정도) 초원에선 사람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몽골인들은 러시아와 중국의 영토협상 과정에서 빼앗겼다고 주장하는 내몽골까지 합치면 우리나라의 14배 정도나 되는 엄청난 영토를 가진 나라이다. 이러한 자연환경으로 인해 드넓은 초원에는 사람보단 양이나 야크, 낙타가 더 많고 자동차 보다는 말이 더 소중한 교통수단이다.
생업은 주로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방식으로 이동식 가옥인 게르를 옮겨 다니며 유목 생활하며 살아간다. 봄에는 얕은 구릉의 정상에서 짐승을 기르고 여름과 가을에는 중간 정도의 구릉지대에서 그리고 겨울에는 구릉지대 밑의 평지에서 짐승을 기른다. 한겨울엔 알타이 지역은 영하 40도까지 수은주가 내려가는 까닭에 통나무로 된 우리를 만들어 밤에는 짐승을 가둬놓는다. 굶주린 늑대나 여우들로부터 보호를 할 수 있고 추위를 막아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침 햇살이 비치면 짐승들을 초원으로 내보내 풀뿌리를 뜯어 먹으며 긴 겨울을 난다.
원래 몽골초원은 눈이 오지 않거나 살짝 초원에 깔리는 정도의 기후이다. 시베리아의 얼어붙은 눈이 매서운 북풍을 타고 날아와 초원에 살짝 내리는 정도여서 짐승들은 풀뿌리를 캐먹으며 겨울을 날 수 있다. 요즘 들어 이상기온으로 인해 눈이 많이 내리는 바람에 짐승들이 굶어 죽는 경우가 종종 일어나고 있다. 기르던 가축을 잃게되면 이들은 도시로 옮겨가 노동판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도시빈민층으로 전락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들 또한 죽은 고기는 절대 먹지 않는 풍습이 있어서 짐승이 얼어 죽으면 몽골인들은 살기위해 도시로 탈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들의 주식은 주로 양고기와 염소고기 말고기를 음식으로 조리해 먹는다. 항가이 산맥 부근 사람들은 양이나 염소고기보다는 소고기를 주식으로 즐겨 먹는 풍습이 있다. 야크 젖이나 말 젖을 이용해 술도 만들어 마유주나 아이락이라는 술을 마신다. 음식 조리는 주로 양철통에 고기를 넣고는 뜨겁게 달군 주먹만 한 자갈을 차곡차곡 쌓아서 익혀 먹는데 ‘허르헉’이라고 부른다. 기름이 빠진 허르헉은 먼 길을 여행할 때에 가지고 다니며 음식으로 먹는다. 허르헉에서 빼낸 자갈은 추운 날씨의 몽골인들에겐 핫 팩처럼 사용한다. 허르헉은 보통 3시간에서 4시간 정도 시간이 걸리는 음식이어서 자주 조리해서 먹을 순 없다. 따라서 고기를 주로 잘라서 감자와 향신료를 넣고 삶은 음식이 주를 이룬다.
4년 만에 다시 가는 몽골 답사
여러 민족이 혼합되어 역사의 부침이 심했던 몽골초원에서 제일 먼저 나라를 세운 것은 훈족이다. 훈족은 중국인들이 가장 두려운 존재로 여겨 북방 오랑케라 부르며 ‘흉노匈奴’라고 불린 것이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흉노는 우리나라 민족과 깊은 연관이 있다. 훈족이 세운 나라가 얼마나 위대하고 큰 나라였는지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시원과 연관성이 짙은 오버(어워), 무당, 문양, 언어, 각배, 적석총 등등이 남아 있는 몽골초원을 직접 밟으며 역사적 유적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고대 훈족(흉노)의 정복왕 아틸라(406ㅡ453)는 중앙 아시아 카스피 해 연안에서 동유럽과 발칸 반도에 이르는 전 지역을 장악하고 제국을 건설했다. 훈족 세력에 밀려서 게르만 족이 이동하면서 로마제국이 붕괴한 것은 우리가 이미 역사에서 배운바가 있다(게르만 족의 대이동). 아틸라가 유럽에 끼친 문화적인 충격은 너무 엄청나서 문학과 음악의 주제가 되기도 했고 소위 황화론 黃禍論(Yellow Peril) 이라는 황색인종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아틸라 사후 800년만에 몽골의 징기스칸( 1162ㅡ1227) 이 다시 한번 중앙아시아와 터키 이란 러시아 우크라이나 발칸반도와 동유럽을 정복하고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판도를 가진 제국을 건설 했다.
우리는 이처럼 넓은 대륙을 호령했던 흉노와 한 핏줄이며 훈족의 일원으로 한 무제의 등장 전까지 초원의 지배자였다.
사실 이번 답사는 4년 전,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팀이 울란바토르 동북쪽 시베리아 남단 ‘도르닉 나르스(둥근소나무 마을)’라는 지역에서 ‘흉노왕’ 무덤인 적석총(이 무덤에서는 순장된 말 한 마리가 발굴되어 적어도 왕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을 발굴하는 곳을 다녀오면서 2년의 준비를 거쳐 알타이 답사를 기획하였다.
그러나 동북쪽과는 정 반대인 서쪽에 있는 알타이는 우리를 쉽게 받아주질 않았다. 2012년 6월, 몇 차례 항공기 연착으로 출발이 연기되더니 어렵게 잡힌 출발 일에 공항에 나가자 승객들로 공항은 인산인해였다. 결국 한정된 좌석을 놓고는 세계 제일의 인천국제공항 로비에서 탑승권을 걸고는 가위 바위 보로 최후의 결전을 벌인 웃지 못 할 일들이 일어났다. 이긴 쪽은 승리의 함성을 진 쪽은 한숨 소리로 공항로비는 떠나갈 듯 했다. 결승까지 오른 나는 하필이면 친구 노영옥이가 이끄는 대학생 선교 팀과 최후의 결투를 벌였다. 나는 상대에게 아버지와 할아버지 같은 사람들에게 양보하라며 은근히 압력을 행사하였지만 장유유서는 안 먹혔다. 결국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위바위보는 시작되었고 그만 내가 보를 내는 바람에 우리 팀의 탑승권을 허공에 날려 보냈다. 이겨 놓고도 어쩔 줄 몰라하는 친구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뒤로하고는 “다 무슨 뜻이 있겠지.”하는 자책성 위로를하며 2년 후를 다시 기약하며 무거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그날 이후, 심기일전하여 2년 후인 2014년 5월부터 이번 답사를 준비하였다. 5월인데도 몽골로 가는 정기편 탑승권은 매진된 상태였다. 참 알 수 없는 나라였다. 예비탑승권을 받아들고서 2년 전 과거의 악몽이 재현될까봐 노심초사 그 자체였다. 다행히 2014년 7월31일 오후 11시 50분,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다음날 새벽 3시 30분에 울란바토르 칭기즈칸 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오래전부터 기다렸던 알타이 답사 여정이 대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몽골 울란바토르 현지 인쇄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서울인쇄조합에서 파견나가 있는 신익재 사장이 있어서 수시로 준비사항과 코스 변경에 따른 문제들을 찬찬히 점검할 수 있었다.
우리 민족의 원향 알타이 여정의 시작
7월 31일 11시 50분 인천공항을 출발해 8월 1일 새벽 4시 경, 출입 수속을 마치고 칭기즈칸 공항을 빠져 나오자 한기가 엄습한다. 칭기즈칸 공항은 4년 전 모습과 그대로이다.
서울은 열대아가 한창인데 가을 날씨 같은 느낌이다. 알타이지역은 8월에도 얼음이 언다며 반드시 방한복을 준비해오라고 신신당부하던 현지에 있는 신 사장의 말이 사실이었다. 2년 전, 도르닉나르스 지역을 갈 때엔, 호텔에서 이불을 빌려갔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몽골은 겨울이 길고 추워서 사람이 활동하기 좋은 계절은 6월부터 8월까지 뿐이라고 한다. 몽골을 찾는 관광객도 이 기간뿐이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가 영하 30도가 넘다보니 5성급 호텔도 대부분 문을 닫는다고 한다. 올해는 이상기온으로 더 춥다면서 알타이 지역은 만년설이 있는 산악지역이어서 한겨울에 영하 40~50도까지 떨어지는 곳이라며 겁을 준다. 대원들은 모두 서둘러 겨울 점퍼나 패딩으로 갈아입는다.
1시간이 지났는데도 차량은 움직일 기세가 없다. 서울에서 준비해온 짐이 너무 많다며 잠시 기사들과 실랑이가 있었다. 결국 새벽에 한 대를 더 추가하여 다섯 대의 차량에 동승, 여명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의 어둠을 가르며 울란바토르를 빠져 나갔다. 새벽에 나이든 여자가 함께와서 가이드인가 싶어 물었더니 남편이 돈 받으면 노름할까봐 직접 돈을 받아가기 위해 나왔다고 한다. 몽골이나 한국이나 여자들이 경제권을 쥐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웃음이 나왔다. 하기사 이들은 6월부터 8월까지만 관광으로 수입을 얻을 수 있는데, 이번 답사를 갔다오면 그 돈으로 한 달은 편하게 쉬면서 먹고 산다고한다.
먼동이 트이면서 끝없이 펼쳐진 초원의 끝과 이어진 하늘, 티 하나 없는 맑고 깨끗한 푸른 창공에 떠다니는 구름, 그 아래 초원에서 뛰노는 말과 양떼들.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풍광이 아름답고 이채롭다.
초원길을 벗어나 점심을 올기 호수에서 해먹었다. 바다가 없는 몽골인들에게 호수는 휴양지이다. 하지만 강과 호수를 많이 접하고 사는 우리로서는 별 다른 감흥이 없다. 가이드인 저리고는 얼마 전에 이곳에 놀러와 물고기를 50마리나 잡았다고 자랑했다. 바람이 거세 깔판이 날아가 호수에 둥둥 떠다녔다. 흙먼지가 일정도로 바람은 거세고 나무 한그루 없는 뙤약볕에서 서둘러 점심을 해먹고는 카라호름을 향해 출발했다.
몽골제국의 옛수도 카라호름에 도착하다
카라호름으로 가다가 초원에 우뚝 솟은 사원처럼 생긴 건물이 보였다. 투르크 박물관이었다. 입구에는 터키 국기와 몽골 국기가 바람에 펄럭인다. 초원에서 투르크(돌궐) 비석과 유물이 나와 터키에서 직접 박물관을 짓고 카라호름까지 아스팔트 도로를 만들 정도로 적극적이다. 자신들의 조상인 훈족들의 유적이라고 생각하고는 일년에 이곳에 와서 기념행사를 한다고 한다. 박물관 안에는 초원에서 발굴된 사람 키 두 세배는 될 법한 거대한 석비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 하나는 청나라 때 세운 석비가 있었다. 입장료 이외에 사진 촬영비로 50,000 투그릭을 달라고 한다. 비싼 것 같아 사진작가 윤명도기자만 사진 촬영을 하기로 하였다.
돌궐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여겨 터키 정부가 직접 나서서 엄청난 자금을 들여 초원에 방치되어 있던 석비와 유물들을 발굴하였다. 그리곤 초원에 박물관을 세워 전시하고 있을 정도로 몽골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우리 민족도 몽골초원에서 기원전 3세기 경 나라를 세운 훈족과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정치적·역사적·지리적 환경요인으로 인해 단절되었던 지나온 세월이 너무 안타까웠다. 이제 우리민족의 원향인 알타이로 가면서 초원 곳곳에 남아있는 우리민족과 연관이 있는 어마어마한 유적들을 만나게 된다는 기대감으로 아쉬움을 달래며 카라호름으로 들어갔다.
이곳 투르크 박물관에서 카라호름까지는 50km이다. 터키 정부가 포장한 도로를 쏜살같이 달렸다. 가는 길에 푸른 잎을 피우고 있는 미루나무 단지가 보인다. 강이 흐르는 것도 아닌데 사막과 다름없는 초원에 나무가 자라는 것이 궁금했다. 우리나라 어느 기업이 강물을 끌어들여 밀 같은 농작물을 키우고 그 덕에 미루나무가 초원에 자라고 있다고 들려준다. 여기까지 우리나라의 영향력이 뻗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터키 못지않은 자긍심이 생긴다.
옛 영광은 어디에 카라호름
칭기즈칸이 세운 수도인 카라호름에 도착한 우리는 다소 실망했다. 칭기즈칸이 나라를 세워 세계를 호령했던 도시의 모습을 기대했는데 오늘날 모습은 아주 초라하기 그지없다.
칭기즈칸이 초원을 정복해 나라를 세우고 도로를 건설하여 수도로 정한 후, 30년 동안 몽골의 수도로 위세를 떨쳤던 도시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카라호름은 손자 쿠빌라이 칸이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면서 수도로서의 그 기능을 잃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점차 사라졌다.
한때, 몽골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명나라에게 북경을 빼앗기게 되자 고려 여인 기황후는 어린 황태자를 데리고 초원 깊숙이 피신하여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 후, 몽골은 다섯 개의 소왕국으로 분리되어 지역을 관할 통치하였다.
훗날 몽골 전체를 지배한 것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이다. 만주족에게 카라호름은 철저히 파괴당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다가 16세기에 다시 카라호름을 재건해 오늘에 이른다.
청나라는 호전적인 몽골족들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장자만 빼고 승려에 입교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순전히 종교적 삶을 통해 몽골인들의 호전적인 기를 꺾기 위한 정책이었다. 심지어 몽골을 완전히 불교국가로 만들고는 승려를 몽골 왕으로 추대하는 등 몽골인들의 용맹성을 빼앗는 책략을 일삼았다.
카라호름에서 그 나마 만날 수 있는 유적은 1585년에 세운 에르덴조(Erdenezuu) 사원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에르덴조 사원은 몽골 역사의 흥망성쇄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다. 에르덴조 사원은 중국식 사원과 티벳식 사원으로 나뉘어져 있다. 사원을 에워싸고 있는 수투바 160개 만이 한때 번성했던 사원의 규모를 말해주고 있다. 지금은 108개의 수트바가 남아있다. 이곳에서 머물던 승려가 한때 1천여 명이 넘었다니 그 위세는 대단했을 것 같다.
에르덴죠 사원은 여러 채의 사원이 있고 곳곳에 활불과 부처님이 모셔져있다. 간절한 소망을 비는 몽골인 들이 기도를 보며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노곤함이 드러난다. 대 초원 사막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사원의 크기와 화려한 외관 그 예술성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에르덴조 사원 뒷문을 나서면 옛 왕궁이 있었다는 터만 덩그러니 초원에 묻혀있다.
하라호름(카라코룸)에서 도로 공사 중 AD 731년에 설치된 돌궐 문자비와 AD 734년에 설치된 당나라 문자비가 발굴되어 하라호름의 위치를 찾았을 정도로 몽골 역사에서 카라호름은 사라진 도시였다.
칭기즈칸의 아들 오고타이가 1228~1238년에 카라코룸(카라호름)을 수도를 건설하고 그 중심에는 ‘투멩암갈랑’ 이라는 궁전을 세웠다. 그 후 구육 왕, 뭉크 왕 시대에도 몽골제국의 수도였으나 울란바트로로 수도를 옮겨 이후 폐허가 되었다. 카라호름을 기점으로 고비 사막과 알타이 산맥을 넘어 세계를 지배했던 왕궁의 위용은 모두 사라졌다. 초원 거센 바람만이 불고 있는 빈터에 서 있는 표지판만이 유일하게 칭기즈칸 제국의 왕궁 터였음만 말해주고 있다.
대원들이 거북석비를 본다며 우루르 초원으로 나선다. 뜨거운 직사광선을 받으며 몰려가는 대원들이 참으로 대견하다. 나는 에르덴조 사원 뒷문에 서서는 칭기즈칸이 호령하던 옛 왕궁터를 바라본다.
먼지를 일으키며 초원의 바람만이 쓸고 지나가는 옛 왕궁터를 바라보니 인생의 허망함이 한눈에 들어온다. 모든 것이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카라호름에 와서 깨닫는다.
사진: 예르덴조 사원
초원에서의 하룻밤
카라호름에는 에르덴죠 사원을 보려고 온 유럽 관광객들도 간간히 눈에 띄었다. 그래서인지 배낭여행객들을 위한 숙소가 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해가 있을 때 좀더 알타이 가까이 가기 위해 박물관을 둘러보고는 서둘러 차를 몰았다.
원래 첫날 머무를 곳이 바얀항거르에 있는 온천 지역이었지만 볼 것 없는 ‘올기’ 호수에서 너무 지체하는 바람에 바얀항거르까지까지 가지 못했다. 결국 ‘드림 랜드’ 캠프촌에 숙소를 정했다.
울란바토르에서 온천이 있는 숙소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의뢰했더니 한국 사람들이 여기에 왜 오는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고 한다. 몽골에서 온천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주로 가는 곳이라고 한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온천에 가지 못하고 드림 캠프촌에 입성하게 된 것이다.
하라호름시 서쪽 오레혼 강(Orhon l.) (한가이 산맥에서 발원하여 바이칼 호-안가라 강-예니세이 강-북 시베리아 저지-카라 해-북극해까지 흐른다.) 강변에 있는 드림 랜드 캠프장에 도착해 일반인들이 묵는 게르를 빌렸다. 3~4명이 잘 수 있는데 침대가 있고 공동 화장실과 샤워 실이 있다. 관광지여서 인지 제법 시설이 괜찮은 듯하지만 호텔보다 비싸다.
게르의 주인은 몽골인으로 일본에 귀화했던 스모 선수로 ‘요코즈나’에 몇 번이나 오른 몽골에서 스포츠 인으로는 제일 유명한 사람이었다. 은퇴한 후, 몽골 정부로부터 이 땅을 불하받아 이곳에 관광 게르촌을 만들었다고 한다.
게르촌에 가면 물건이 비싸다고해서 술을 사려고 근처의 마을 수퍼에 들렸다. 하지만 매월 1일에는 술을 못 팔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어서 살 수가 없었다. 몽골 정부에서는 술로 인한 피해가 심각하자 매월 1일은 금주의 날로 정해 가게에서도 술을 판매하지 않고 마시지도 않는 법을 만들었다. 놀랍게도 국민들이 잘 지키고 있다고 한다. 술을 팔다가 걸리면 우리나라 돈으로 20만원 벌금을 내야하고 몇 번 걸리게되면 아예 문을 닫아야하기 때문에 잘 지킨다고 한다. 공산주의 통치의 분위기가 아직까지도 전해지고 있는 듯 하다.
게르촌에는 스모 선수들처럼 생긴 덩치 큰 사내들이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밤이 되자 공연장이 있는 게르에서 밴드 연주소리와 함께 노래 소리가 들렸다. 나는 샤워장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음주 가무가 한창인 파티장으로 들어갔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양고기를 다듬던 직원이 황급히 손을 잡아끌고는 가라고 했다. 슬쩍 안을 살펴보니 은퇴한 스모 선수들 같은 덩치 큰 사내들이 앉아 있고 밴드 마스터가 음악을 연주하고 그 옆에는 낮에 수퍼에서 보았던 여자들이 앉아 있었다. 드림 랜드 캠프촌에 오기 전 술과 물을 사러 인근 수퍼에 갔다가 도회지 냄새가 폴폴 나는 젊은 여자들 셋을 만났는데 그 여자들이었다. 이곳이 휴양지여서 놀러 온 모양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이제 보니 울란바토르에서 12시간을 달려 칸의 부름을 받고 출장을 나온 도우미들인 것 같았다. 칸의 부하들에게 끌려나오면서 쓴 웃음을 날리고는 샤워장을 찾아 돌아다녔다. 샤워장은 온수도 나오고 그런대로 괜찮았다.
해가 질 무렵 사나운 바람과 함께 억수 같은 장대비가 30여 분 줄기차게 쏟아졌다. 우리는 게르 안으로 흘러내리는 비를 피해 침상을 옮기면서 장작을 많이 넣었다. 비가 그치자 저녁을 해먹기 위해 밖에 나와 밥을 하고 소고기를 구웠다. 게르촌 주위로 소고기 굽는 냄새와 함께 연기가 주위에 퍼지자 관리자가 나와 못하게 말렸다. 게르 안에 들어가서 조리를 하라는 것이었다. 몇 번이나 실랑이 끝에 겨우 저녁을 먹었다.
밤이 되자 추위가 엄습했다. 화로에 장작을 더 집어넣고는 불을 피웠다. 금새 온기가 돌더니 급기야 너무 더워 문을 열었다. 화로위에 물을 끓여 커피를 마시는 여유를 가졌다. 아직도 불을 피우지 못한 게르에서는 연기와 씨름하며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의기양양해서 불붙은 장작개비를 들고 다니며 불과 씨름하는 게르에 나눠주었다.
밖에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들이 모래알처럼 가득하다. 잠시 초승달 빛에 취해 강가에 다가서니 바람에 백양목이 흔들리며 쏴아쏴아 소리를 내며 울부짖는다. 마치 고려를 떠나 이역만리 몽골초원까지 끌려온 고려여인의 울부짖음 같다. 하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면 다시 생각해 봐야할 문제가 있다.
세계의 절반을 차지한 칭기즈칸 제국의 귀족들이 고려여인을 선호했고 그들의 피를 받아 아이를 낳아 길렀던 땅이다. 고려 여인의 핏줄이 지금 곳곳에서 삶의 터전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니 뼈아프다기보다는 친근감이 다가온다. 칭기즈칸 시대에는 고려를 모국이라고 생각했다.
칭기즈칸 시대에는 우리나라를 ‘솔롱고스’ 즉 무지개 나라라고 불렀다. 모국 솔롱고스라고 생각한 고려에서 13세~15세 소녀들을 매년 400~500명씩 40 여년 간 2만여 명을 몽골로 데려가서 몽골의 황족 또는 귀족들과 결혼시켜 자손들을 번창하게 했다. 그러니 몽골에서는 우리 한국을 사돈의 나라라며 좋아하고 가까이 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칭기즈칸의 애첩 훌란 공주는 몽골의 전설적인 미인으로 원나라 말기의 기황후와 함께 한국 여인은 슬기롭고 아름답다는 인상을 몽골인들에게 깊이 각인시킨 솔롱고스, 즉 고구려 여인이다.
또한 훌란 공주는 17세기 몽골 문헌인 ‘몽골원류’에 솔롱고스의 공주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당시의 솔롱고스가 고구려 후예인 대진국 발해이고 메르키드가 솔롱고스로 기록됐다면, 메르키드는 말갈일 수 있고 메르키드의 공주 훌란은 솔롱고스 공주가 된다. 훌란 공주의 아버지 다이르 우순 칸을 보카 차간 한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대진국 발해(渤海) 백왕(白王)이라는 말이다.
몽골에서는 칭기즈칸 시대에 고려 조정이 항복하고나서 몽골에 고려여인들을 끌고와 노예처럼 부렸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따져보면 몽골에 공납한 것이 아니라 칭기즈칸 어머니의 나라 솔롱고스의 아름다운 처녀들을 데려와 몽골 황족 또는 귀족들과 결혼시켜 자손들을 번창하게 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별빛이 흐르는 강물을 따라 걸으니 사막의 초승달이 홀연히 내 발길을 비춰주고 있다. 고려 여인의 눈썹처럼 생긴 초승달을 가슴에 담고는 게르로 돌아왔다.
코끝을 찌르는 매케한 연기와 함께 “타닥타닥” 장작불이 타고 있었다. 게르는 훈훈하다.
미루나무가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초원에서의 첫날밤. 어찌되었든 정든 고향을 떠나 먼 이곳까지 와서 살아야한다는 것은 슬픈 현실이다. 그것도 내가 원해서 간 것도 아니고 몽골제국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없었기에 온 것이다. 물론 후에는 서로 앞다퉈 원나라 귀족들에게 딸을 시집보내는 일들이 많았지만, 어찌되었든 부모 형제를 떠난 고려여인의 눈물과 한숨을 가슴에 품고는 초승달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밤을 지새웠다.
고비사막에서 길을 잃다
카라호름 캠프촌의 새벽의 어스름이 초원을 깨웠다. 하나둘씩 게르를 나와 강물소리가 들려 강으로 나갔다. 아침 햇살이 초원에 번지면서 금빛으로 물들였다.
대원들 대부분이 일찍 일어나 강가를 거닐며 몽골 역사와 훈족의 역사 그리고 고려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아침을 맞이했다. 강가에서 구릉 밑에 있는 마을을 바라보니 200여 호나 됨직한 게르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다.
떠나기 직전 울란바토르에서 사업한다는 한국인 일행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가 알타이시에 간다고하니 관광객들은 가지 않는 곳이라며 매우 의아해했다.
우리는 서둘러 캠프촌을 떠났다. 새벽에 떠났어야 했는데 또 일정이 늦어졌다. 바얀항거르를 지나 알타이 까지 가려면 새벽 일찍 떠나면 밤늦게 알타이시 부근에 도착할 수 있다는 계획이었다. 서둘러 캠프촌을 떠났다. 그리고 바얀항거르를 지나자 지금까지 보지 못한 황량한 풍광이 나타났다. 드디어 하늘과 맞닿은 끝없는 대평원 고비사막에 들어선 것이다.
고비사막은 아시아에서는 제일 큰 사막이며 몽골영토의 41%가 고비사막에 속한다. 몽골어로 ‘풀이 자라지 않는 땅’이라는 뜻을 가진 고비사막은 실크로드 대상들이 오갔던 매우 중요한 동서양의 교통로이다.
고비사막의 크기는 동서가 약 1,600킬로미터이고, 남북의 길이가 500~1000킬로미터의 광활한 곳이다. 대부분이 잔돌과 황토, 모래사막으로 이루어진 메마른 고비 사막은 비의 양이 매우 적다, 내리는 비의 대부분은 목초와 농작물이 잘 자라는 여름에 집중되어 있다. 사막 안쪽에는 1년에 내리는 비의 양을 다 합쳐도 100밀리미터여서 우리나라의 10분의 1도 못 된다. 이러한 자연환경 속에서 유목민들은 양, 염소, 소, 말, 야크를 키우며 전통방식인 유목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고비사막은 너무 넓어서 어디에도 도로는 없으나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 펼쳐져 있다. 다섯 대의 차량은 먼지를 일으키며 앞서 달리는 차량을 피해 랠리 경기를 하듯 앞서고 뒷서며 나란히 달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다섯 대의 차량은 보이질 않고 각각 길을 잃었다.
시간은 오후 7시가 조금 넘었다. 고비 사막의 해거름이 몰려오면서 서쪽으로 지면서 붉은 물감을 뿌려 놓은 듯 하늘 끝이 총천연색이다. 눈물이 날만큼 환상적이고 아름답지만,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메고 있는 상황에서 아름다움을 감상할 겨를이 없다. 기지국이 없으니 휴대폰은 무용지물이다.
멀리서 전봇대가 줄지어 세워져 있고 차량이 외롭게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는것이 눈에 들어왔다. 바얀홍고르에서 알타이로 가는 주도로일 거라고 생각했다. 전봇대가 있는 도로에서 차량을 세워 놓고는 기다렸다. 사막에서 각자 길을 잃고 날을 세워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주위가 먹물을 뿌려 놓은 것처럼 어두워지며 하늘과 사막을 뒤덮을 즈음, 멀리서 차량의 불빛이 보였다. 잠시 후, 네 대의 차량이 줄 지어 라이트를 켜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각자 달리다가 걱정이 되어 서로 주도로를 찾아서 오다보니 만났다는 것이다.
길도 없는 사막의 어둠을 뚫고 알타이 시까지 횡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둘러 사막 바람을 막아줄 수 있는 산 아래쪽 둔덕을 찾아 야영준비를 하였다. 갑자기 주위가 스산해지더니 하늘에서 비바람이 거세게 내리친다. 해가지고 어둠이 몰려오면서 낯 동안 뜨겁게 달구어진 대지와 찬 공기가 만나서 생기는 자연현상이다. 사막폭풍으로 거센 바람에 텐트가 날아가지 못하도록 여럿이서 붙잡고 굵은 빗방울에 옷을 적시며 겨우 텐트를 쳤다. 고도 1750m였다.
30분 정도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비바람이 그치고 사막의 하늘에 달이 떴다. 늦은 저녁으로 라면을 먹고는 마유주를 마시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모래알처럼 별들이 가득하다. 낮에는 모기 같은 벌레들이 활기를 치지만 밤이 되면 추워서 모두 바깥 외출을 삼간 덕에 모기가 전혀 없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밤의 파노라마를 즐기다가 문뜩 칭기즈칸의 역참이 초원 곳곳을 연결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초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는 어둠뿐인 초원을 할퀴고 지나가는 거센 바람 속에서 칭기즈칸의 말발굽 소리를 찾았다.
세계를 제패한 칭기즈칸의 군대는 역참제도를 이용해 기병이 호라즘 제국을 정벌할 당시 1일 최대 134km를 이동했다.
칭기즈칸의 유럽원정군인 파발마는 1일 동안 무려 352km를 달렸다. 30km마다 설치된 역참을 통해 최고 속도를 내어 파발꾼을 바꿔 릴레이로 달렸으며, 중국 북경에 있는 오고타이 칸이 바투의 서신을 받아보는 데 2주 정도 걸렸다고 하니 실로 놀라운 속도였다.
우리도 하루 300km 이상을 갈 때도 있으니 과거 칭기즈칸 군대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들은 말을 타고 우리는 사륜구동을 타고 무엇을 찾아 이토록 초원을 헤메고 있는 것일까!
8월, 몽골 초원의 밤은 너무 춥다
새벽이 되자 바람이 거칠어지면서 비바람이 퍼붓는다. 텐트는 바람에 날아갈 듯 펄럭이고 침낭에 들어가 있는데도 온몸이 덜덜 떨린다. 고비사막의 밤은 너무 춥다. 침낭과 오리털 파커를 반드시 가져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던 현지가이드의 말이 진실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나마 5cm나 되는 에어 깔창을 준비해서 바닥 냉기는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나는 가을 날씨로 생각하고는 가벼운 오리털 패딩을 가져왔는데, 초저녁 모자까지 달린 두터운 방한복을 가져와 텐트를 치며 추위를 즐기는 대원들이 부러웠다. 그런데 같은 텐트에서 잠을 자는 85세의 김세환 선생이 침낭과 방한복을 준비하지 않은 것이다. 8월인데 추우면 얼마나 춥겠냐면서 지금까지 수 십 차례나 겨울 답사 할 때도 다 지금 옷차림으로 다녔다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이대로 잠을 잤다가는 큰일이 일어날 것 같아 서둘러 침낭을 구해오고, 그래도 젊은 내가 낫겠지 싶어 입고 자려던 패딩을 드렸다.
새벽녘에 또 다시 비바람이 몰아쳤다. 텐트가 펄럭이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하도 머리가 시려워 어둠속에서 배낭을 뒤져 옷을 꺼내 머리에 뒤집어쓰니 금새 온기가 느껴졌다.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모자 보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간밤에 무슨 짓을 했냐며 함께 잔 대원들이 놀린다. 내가 갈아입고 벗어 놓은 땀에 젖은 팬티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는 게 아닌가!
아무튼 고비사막뿐만 아니라 몽골 초원의 밤은 참 춥다. 추위에 떨다보니 일찍 일어난 대원들은 말똥을 모아 불을 피워 언 몸을 녹였다.
한 번 벗어준 오리털은 끝내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답사 내내 어르신이 내 오리털 파커를 입고 다녀서 나는 추위 때문에 저녁 무렵이면 걱정이 앞섰다. 하기사 내가 가져온 가벼운 파커로는 모진 추위를 견디기도 힘들었겠지만, 아무튼 여기저기 텐트를 돌아다니며 방한복 동냥에 나섰고, 며칠 지나서 가이드가 방한복 여분이 있을 거라는 말에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몽골의 추위여 이젠 안녕!
8월부터 겨울준비에 들어가는 몽골 초원
초원이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더니 이내 햇살이 온 대지에 흩뿌린다. 밤새 얼어붙은 대지가 열을 받아들여 금새 공기가 훈훈해진다.
몽골 초원의 낮은 밤과는 달리 무척 뜨겁다. 나무 한그루 없는 초원에 직사광선이 작렬한다. 창문을 열면 시원한 바람이 차안으로 들어온다. 밖에 나가면 태양의 열기가 대단해 바닷가에 온 것처럼 얼굴이 따갑고 달아오른다. 하지만 무덥지는 않아서 그늘에 있으면 가을 같은 날씨이다. 직사광선이 뜨겁게 대지를 달궈 습도가 없기 때문에 땀이 흐르지 않는다. 고원지대인 이란의 사막과 같은 느낌이다.
초원을 가만히 살펴보니 풀들이 낮게 드러누워 있다. 비가 적게오고 바람이 거세고 추위가 일찍 찾아오는 몽골초원은 풀이 높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그래서 살기위한 방법으로 거친 대지에 뿌리를 넓게 펼쳐서 서로 엉켜 사는 생존을 터득했다. 그 거친 풀을 뜯어 먹고 몽골의 짐승은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살이 통통하게 오른 짐승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하지만 건강해 보이기는 하다.
초원에는 작은 쥐들이 요리조리 돌아다니다가 구멍으로 숨는다. 가만히 살펴보니 초원 전체가 풀쥐들이 뚫어 놓은 집들로 온통 구멍투성이다. 초원의 쥐들은 풀만 먹고 살아서인지 매우 작다. 초원에서 풀 말고는 먹을게 없다보니 ‘풀쥐’라고 부른다. 풀 쥐가 사는 구멍 앞에 풀이 많이 쌓여 있으면 그해 겨울은 춥다고 생각하고는 단단히 겨울을 준비한다고 한다. 또한 이쪽 지역 초원은 염소나 양들도 먹지 않는 허브 냄새가 나는 거친 풀이 대지를 덮고 있다. 이 풀은 짐승들이 싫어하는데 유일하게 낙타만 먹는다고 한다. 어떤 집에서는 향이 나는 풀을 돼지에게 먹여 비싼 값에 팔기도 한다고하는데, 유목민들은 좋아하지 않는 풀이라고 한다. 살에 닿으면 가시가 있는 듯 아프기까지 하다.
흔히 몽골하면 초원을 떠올리지만, 서쪽으로 가면 알타이 산맥이 3천km나 이어져 있고, 그 지맥이 여러 갈래로 이어져 있는 산악지역이기도 하다. 해발고도가 2600m이 넘고, 연중 강우량이 양, 염소, 소, 말이 많고 서족 고지대로 가면 야크나 낙타가 더 많은 지역이다.
이곳은 1700m이상의 고원지대여서 말과 야크 무리들이 눈에 자주 띈다. 4년 전 도르닉 나르스에 갔을 때에는 낙타는 보기 힘들었다. 그만큼 알타이 지역으로 갈수록 고도가 높기 때문이다.
말을 키우는 게르가 보였다. 몽골에서 추위와 더위를 막아 주는 이동식 천막 ‘겔’ 만큼이나 없어서는 안 될,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말’이다. 말은 유목민들이 살아가는 데 기본이 되는 가축이다. 말은 몽골 사람들의 교통수단이며 식량자원이다. 말고기는 육포로 만들어 오래 두고 먹는다. 말 육포는 약간 특유의 냄새가 나지만 마유주를 곁들여 마시니 그런대로 맛이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와는 달리 소고기로는 육포를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소고기도 즐겨 먹지 않는데, 소고기를 즐겨 먹는 지역은 항가이 산맥 부근이라고 한다.
또 말 젖으로 신선한 우유를 짜서 마시기도 하는데, 절대로 생우유는 먹지 않는다고 한다. 말 젖을 발효시켜 요구르트나 치즈를 만든다. 8월에 빗는 마유주가 제일 신선하고 맛이 좋아 게르마다 ‘마유주’를 빗느라 바쁜 철이라고 한다.
유목민들은 말은 소나 양보다 더 깨끗해서 ‘술’은 반드시 말 젖으로 만든다. 겨울철 땔깜으로 연료도 말똥을 주로 사용하는데, 소똥에 비해 연기가 덜 나고 화력이 좋다고 한다. 말똥 하나면 라면하나 끓여 먹을 수 있다고 하니 유목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짐승이 바로 ‘말’이다.
말 젖을 담은 술통에 효소를 넣고는 밤새 가족들이 돌아가며 저으면 마유주가 탄생한다. 마셔보니 신선한 요구르트 맛이 난다. 도수도 약해 누구나 먹을 만하다. 몇 병을 사서 차에 싣고 다니며 목마를 때 마셨는데, 시간이 지날 수 록 더 발효가 되어 시크름한 것이 요구르트 오래된 맛이 난다. 마유주를 많이 마셔둬야 겨울에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가족 이외에는 절대로 외부인에게 말 젖이 담겨 있는 술통을 보여주지 않는 불문율이 있다. 외부인은 술통 가까이 가지도 말아야하고 사진을 찍어서도 안 된다.
게르 밖에서는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며 아이들은 염소나 양 뼈마디로 돌 대신 공기를 하고 있다. 공기놀이 방법이 우리나라와 똑 같다. 아이들을 만나 사탕이며 과자를 주니 입이 금방 헤벌어져 내 곁을 맴돈다.
아! 알타이 산맥을 바라보며!
해가 질 무렵에서야 우리는 알타이 시 초입에 있는 검문소에 다다랐다. 드디어 알타이 시에 도착한 것이다. 초원 한 가운데에 알타이 산맥이 왼편으로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알타이 시가 꽤 큰 도시라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초원에 세운 도시여서 우리가 보기엔 우리나라의 읍 정도의 규모였다.
알타이 산맥은 카자흐스탄 쪽에서 시작하여 3500km의 험준한 산맥을 이루며 알타이에서 사막으로 사라진다. 알타이 산맥 언저리에 ‘알타이’라는 지명을 가진 도시가 고비 알타이를 비롯해 세 곳이나 될 정도로 ‘알타이’는 이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말이다.
알타이는 ‘金’이라는 뜻으로 해가 비칠 때 붉은 빛을 발산하는 알타이 산맥이 황금처럼 보여서 금산으로 불렸던 것 같다.
알타이는 울란바토르에서 1301km 정도 떨어져 있고 가는 길도 사막이나 초원이 대부분이다보니 마을이 있을 곳이 없다. 특별한 유적지가 있는 곳도 아니어서 일반 여행객들이 방문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울란바토르에서 떠나는 정기노선 버스로는 봉고 크기의 러시아제 미니버스가 주로 운행되고 있다. 요즘엔 울란바토르에서 카라호름까지 포장도로가 생겨 알타이까지는 꼬박 쉬지 않고 달리면 2~3일 정도 걸린다고 한다. 알타이는 아직도 교통이 불편해 이 지역 주민들도 대부분 러시아제 쌍발기로 타고 울란바토르를 다녀오곤 한다.
알이 험난한 오지를 자동차로 10일 동안 답사하려는 목적은 우리 민족의 시원이 그곳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언어는 ‘알타이어족’이라고 한다. 몽골어와 어순이 같으며 몽골반점, 동이족의 후예인 훈족(흉노), 서낭당의 시원 오보, 고려향, 몽골풍 등등 우리나라와 연관된 역사와 문화적 고리가 깊다. 어떤 역사성이나 문화를 연결 짓지 않아도 ‘알타이’는 우리 민족의 원향이라는 생각에서 한번 쯤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다. 특히 김씨들의 원향이이어서 김씨 성을 가진 대원들은 멀고 험난한 코스이지만 반드시 알타이에 가야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폐교나 다름없는 산장
우리는 해가 지기 전 숙소로 가기 위해 알타이 시에서 조금 벗어난 산악지대에 있는 ‘마더 마운틴’ 산장으로 향했다. 그 곳이 몽골에서 손꼽히는 풍경지구이고 산장이 있다고 해서 모두 편안한 잠자리를 생각하며 덜컹거리는 차량에 몸을 맡기고는 산을 올랐다.
지금까지 끝없는 초원만 달려오다가 높은 산에 오르며 내려다보인 탁 트인 대초원의 모습에 모두들 넋을 잃고는 탄성을 질렀다. 우리가 달려온 아주 평범한 지루하기까지 했던 초원은 그랜드 케년이 연상될 정도로 장관이 펼쳐져 있다. 게다가 노을이 지면서 대지에 뿌려 놓은 황금색으로 물든 초원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몇 번에 걸쳐 산을 오르락 내리락 하다가 드디어 어둠이 몰려올 즈음, 산 아래 계곡에 자리한 산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산장에 들어서는 순간 다시 한 번 우리는 놀라고 말았다. 폐교나 다름없는 산장은 전기는 아예 없고 불이 없었다. 샤워시설을 생각했던 우리는 그만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수용소 같은 방에 철제 침대가 여섯 개 정도 들어가 있었다. 랜턴을 휘젓고 다니며 겨우 짐을 풀었다. 밖에서는 저녁을 짓느라 모두 랜턴을 비춰가며 음식 조리하느라 분주하다. 뼛속까지 찌르는 얼음장 같은 계곡 물로 대충 씻고는 삐걱거리는 철제 침대에 누웠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모른 모포를 뒤집어쓰고는 지친 심신을 달래며 잠이 들었다. 흔들거리는 창문으로 스며든 달빛이 방안에 가득했다. 모두 곤한 잠이 든 늦은 밤, 일흔이 다 넘은 노인들이 따뜻한 집을 떠나 이 고생을 하는지 안스러운 생각이 들고, 한편으로 언제 이런 문화체험을 해 볼 수 있을까 위안을 삼으며 잠을 청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을 나섰다. 산장 앞을 흐르는 개울을 건너 산으로 올라갔다. 고산지대여서인지 숨이 가빴다. 산 정상을 향해 오르다보니 서리가 내려앉았다. 산 정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산으로 에워싸여 있어서 초원이 보이지 않는다. 알타이가 산악지대라는 사실이 실감났다.
아침을 먹고 나자 어제 저녁 잡기로 약속한 염소를 잡아야 한다며 기사들이 요구했다. 가이드는 기사들을 잘 먹여야 불만이 없다며 염소를 잡자고 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인간문화재 급이 이 산장에서 염소를 조리한다는 것이다.
몽골인들에게 염소를 잡으라고하고는 우리는 서둘러 개울을 따라 계곡으로 올라갔다. 그 곳에서 약수라고 불리는 샘에 가서 물을 마셨다. 물이 달았다. 계곡물은 손을 씻기조차 힘들 정도로 차가왔다.
대원들은 어머니의 자궁 앞에 남근석이 솟아있는 바위에 올라가서 3시간이 넘게 몽골역사와 우리나라 역사, 그리고 홍익인간 정신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몽골 고원의 첫 지배자 흉노(훈족)와 한민족
몽골고원은 구석기에서부터 출발하지만 이곳에서 나라를 제일 먼저 세운 것은 훈족이다. 중국의 한족들이 제일 두려워한 민족 훈족은 북쪽 오랑케라고해서 ‘흉노匈奴’라고 낮춰 부르게 된 것이 오늘날 자연스럽게 흉노라는 이름으로 굳혀졌다.
그래서 몽골 초원은 흉노의 고향이다. 흉노는 요, 순 시절부터 하, 은, 주 3대를 거쳐 진나라, 한나라시기에 이르기까지 2천 여 년이 넘는 오랜 기간 북방 초원지역의 역사를 이끌어 왔다.
훈족은 흑해 연안의 스키타이로부터 스키토·시베리아의 금속 문화를 받아들이며 기원전 3세기에 이르러 유목 기마 민족 국가를 건설하여 중국의 한(漢)나라를 괴롭혔다. 기원전 48년 흉노국가가 남북으로 나뉘면서 패망의 길을 걷게 될 때까지 선비와 오환, 유연, 터어키(돌궐) 계통의 투르크 제국, 8세기의 위구르 제국을 거쳐 9세기에 이르러 몽골족이 다시 이 일대를 지배할 때까지 약 2천년 동안 이 일대를 지배하였다. 이러한 역사의 부침 속에서 이어오다가 칭기즈칸이 몽골족과 튀르크의 모든 종족을 하나로 묶어 몽골 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한마디로 몽골 초원은 우리의 선조인 동이족의 후예인 훈족과 초원의 여러 민족이 혼합된 종족들로 이루어진 초원의 제국이다. 유독 흉노의 상징처럼 발견되는 동물 뼈로 만든 술잔 ‘각배’가 삼국 중 신라왕릉에서만 발견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각배는 몽골에서 얼마전까지 무당들이 도구로 사용했다고 전한다. 흉노지역에서 살았던 김씨들이 몽골 초원을 거쳐 신라에 들어올 때 가져왔을 가능성이 크다하겠다.
인간문화재가 잡는다는 염소
점심때가 한참 지났는데도 여전히 염소는 불에 그을려지며 노릿한 냄새만 풍길 뿐이다. 우리 일행은 차를 타고 어머니의 자궁이 제대로 보인다는 산 정상 부근으로 올라갔다.
염소 주인이 산다는 산 중턱을 올라갔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니 어머니의 자궁을 닮은 계곡이 한눈에 들어왔다. 왜 이곳이 ‘어머니의 산’이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그 곳에서 야크와 염소, 양을 키우며 살고 있는 유목민 집을 방문했다. 주인은 한국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외부인 방문이 즐거운지 맛있는 마테차를 따라주면서 마시라고 했다. 겨울에 먹는다는 치즈 굳힌 것과 과자를 맛있게 먹었다. 김석규 단장님이 약간의 달러를 아이들 학용품 사주라며 감사의 뜻으로 드렸다.
유목민들은 게르 안에서 생활하는데, 출입문 턱을 밟지 말아야 하고, 왼쪽에는 손님이, 오른쪽은 부부 침실, 발밑에는 아이들이 잠자는 공간이다. 게르에는 칭기즈칸 사진이 정면에 반드시 붙어있다. 칭기즈칸이 그들에겐 존경의 대상이며 종교이다. 때로는 달라이라마 사진이 걸려 있기도 하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을 알 수 있도록 가족사진들이 붙어 있다.
몽골의 전통에 따르면 외부인이 게르를 찾아오면 성장한 딸이나 처가 잠자리를 같이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외부인을 잘 대접하지 않으면 자신의 가족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과, 이동 없이 넓은 대지에 거의 홀로 남아 사는 유목민들은 나름대로 우수한 유전자를 얻기 위한 방편의 하나였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에스키모 부족들 사이에서도 흔히 있었던 일이다. 그래서 몽골이나 에스키모인들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묻지 않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몽골도 여전히 오랫동안 모계사회 전통을 유지해오고 있다.
사진: 어머니의 자궁처럼 생긴 마더 마운틴
사진: 산 중턱에 있는 게르
사진: 염소를 전통방식으로 조리하는 몽골인들. 6시간 정도 걸린다.
사실 염소는 우리 대원들이 먹으려고 잡은 것은 아니다. 장기간 동안 운전을 해야하는 기사들의 음식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대원들이야 몇 점 먹어보면 그만인 것을 일정에 차질을 생기면서까지 염소조리를 해야하는지 답답하다. 참다못한 대원들이 차량 한 대는 기다렸다가 염소고기를 가져오고 나머지 차량은 대원들을 싣고시간이 없으니 알타이시 박물관에 가자며 소리친다. 안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는 몽골인들의 느긋함. 그러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목적을 이루는 몽골인들의 관습에 빨리 빨리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나라 사람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염소고기가 익어가는 동안 실랑이가 벌어졌고 결국 3시가 넘어서야 점심으로 염소고기를 맛볼 수 있었다. 염소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불에 달군 자갈을 넣어 다시 봉합한 다음 가죽을 태워 살을 익히는 전통방식이었다. 몇 시간이 지난 후에 배를 개방하니 그 안에 육수가 생겨 펄펄 끓고 있었다. 염소고기와 함께 국처럼 마셨는데 짭짤한게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일부 대원은 비위가 약하다며 마시지 않았다. 내장에서 꺼낸 자갈은 기름이 잔뜩 묻었는데 손에 댈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뜨거운 자갈은 혈을 도는데 좋다며 반복적으로 만졌다.
그날 잡은 염소 한 마리가 수고비까지 합쳐서 30만원이 넘는 돈이 지불되었다. 참으로 비싼 염소고기로 점심을 먹었지만 우리들을 무사히 이끌고 울란바토르까지 가야할 기사들의 사기를 생각해 비싼 돈을 치렀다. 이제 여행은 아끼면서 다니는 것이 최선이 아니다. 오지에 살고 있는 현지인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쓰는 여행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깝지는 않았다.
몽골초원에서의 부고
서둘러 알타이 시에 내려와 자연사 박물관으로 향했다. 직원들이 막 퇴근하면서 문을 닫고 있었다. 이에 한국에서 알타이에 온 사정을 말하고는 양해를 구했다. 박물관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와 관람하라며 문을 다시 열어주었다.
자연사 박물관은 알타이 산맥에 사는 수많은 동식물이 주를 이루었다. 몽골은 겨울이 길고 독수리나 매 등 날짐승이 많아서 뱀 같은 파충류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표본을 보니 크기가 매우 작은 뱀이 알타이 산맥 부근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를 산장까지 길 안내를 해준 알타이 시에 사는 청년에게 약간의 수고비를 주었다. 그는 돈을 받아들고는 좋아하며 기다리고 있는 애인과 함께 저녁을 먹으로 사라졌다. 즐거운 저녁이 되기를 축복해 주었다. 알고보니 우리가 잡은 염소가 청년의 친척집에서 기르던 염소였다고 한다.
알타이 시의 자연사 박물관이긴 하나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다. 대충 박물관을 둘러보고는 물과 빵을 사서 대원들에게 나눠 주고는 서둘러 율리아나스타를 향해 달렸다. 처음 계획은 알타이 시에서 서북쪽으로 길게 이어진 알타이 산맥을 따라 흡드를 거쳐 울랑곰~흡스콜~알타이로 오는 코스를 잡았었다. 이 코스대로 하려면 15일에서 20일 정도 걸리고 또 모래사막이 있어서 차량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해서 코스를 변경해 오른쪽에 항가이 산맥을 두고 흡스콜까지 북진 코스를 잡았다.
이제부터는 시베리아 남단에 있는 몽골 최고의 휴양지 흡스콜을 향해 북진만이 남아 있다. 도로가 거의 없는 초원길이어서 속력을 낼 수가 없다. 빨리 간다해도 2~3일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마더 마운틴 산장에서 게으른 점심을 먹은 탓에 겨우 알타이 시에서 74km 정도 달렸는데 해가지고 있었다. 결국 더 이상 운행은 무리라는 생각에 냇물이 흐르는 곳을 찾아 고도 1925m 지점에서 야영을 했다.
어두워지기 전에 야영지를 물색해서 다행이었다. 게다가 다른 곳과는 달리 강물이 있어서 더욱 안성맞춤이었다.
소똥, 말똥을 치우고 모래사장에 텐트를 쳤다. 더구나 강물이 가까이 있어서 쉽게 세면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저녁을 먹고는 불을 피워 오랜만에 여유롭게 술도 마시고 하늘에 별도 바라보면서 숱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따라 날씨가 좋아서인지 하늘의 별들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별을 보면서 방금 돌아가신 도서관 할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조금 전 마을을 지날 때, 휴대폰 메시지에 뜬 도서관 할머니의 부고를 접했다. 여든 아홉이신 우리 어머니와 동갑이셨던 할머니는 젊은시절 공부할 때 아들처럼 나를 생각해 주셨던 분이셨다. 이번 몽골에 다녀와서 한번 찾아봬야겠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뜨셨다. 방법이 없어서 장례식장에 조화를 보내라고 연락하고 상주와 통화를 하는 것으로 조의를 표했다. 놀라운 사실은 오지나 다름없는 고립된 초원에 20가구가 모여 사는 마을이 있으면 휴대폰이 연결되는 곳이 많다는 것이다. 만약에 휴대폰 메시지가 터지지 않았더라면 정말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 같다. 세상과 동떨어진 몽골 초원에서 문명의 이기를 직접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초원을 흐르는 강물소리를 들으며 나는 하늘에서 무수히 쏟아져 초원으로 떨어져 내리는 별들의 향연을 바라보며 도서관 할머니와의 오래된 앨범을 넘기듯 그렇게 흔적을 되새기며 새벽을 맞이했다.
율리아스티아나로 향하다
강가에서 야영하고는 아침 일찍 서둘러 자리를 떴다. 유 선생이 몸이 안 좋다며 텐트에서 일어나지를 못한다. 몸살기가 있었는데 어젯밤 늦게까지 별을 보며 독한 술을 마신 것이 원인인 듯 했다. 땀을 뻘뻘 흘렸다. 우리가 아는 큰 도시는 훕스콜 배후 도시 무릉이다. 그곳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이틀이 걸린다.
아무튼 오랜 동안 야영생활로 인해 환자라도 발생하면 상비약뿐이어서 걱정이 앞선다. 고령자가 많아서 걱정이다. 우선 운전석 옆 좌석에 자리를 마련하고는 진통제와 감기약을 주고는 출발했다.
오늘은 최대한 많이 북진을 해야만 일정을 맞출 수가 있다. 밤에는 춥지만 낮의 열기로 인해 자연스럽게 몸에서 한기가 사라진다. 이제부터는 시베리아 남단에 위치한 몽골 최고의 휴양지 흡스콜을 향하는 북진길이다. 도시의 불빛을 보려면 적어도 이틀 정도 달려야 한다. 어쩌면 초원의 사막을 벗어나면 산악도시인 율리아스티나 도시가 제법 규모가 있을 것 같다. 부족한 물품을 그곳에서 구입하기로 했다.
산과 산 사이 평지에 이루어진 몽골초원은 8월인데도 푸르지 않다. 나무 한 그루 없고 이미 꽃들이 져버려 초원 자체만으로는 황량한 느낌이다. 다행히 파란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양떼나 말무리가 초원과 잘 어우러져 한 폭의 아름다운 풍광을 나타낸다.
몽골 초원은 대부분 구릉처럼 생긴 낮은 산과 초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몽골 초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푸른 초원은 아니다. 거센 바람과 척박한 토양, 추운 날씨로 인해 뿌리만 강하게 퍼지고 풀은 바닥에서 1~2cm 정도 겨우 붙어 있을 정도로 바짝 누웠다. 그 초원에는 쥐구멍이 무척 많은데, 우리나라 들쥐보다 조금 작은 녀석들이 초원에서 시원하게 볼일을 볼라치면 쏜살같이 제집으로 숨어든다. 초원에서 풀을 먹고 사는 ‘풀 쥐’인데, 유목민들은 쥐구멍 앞에 풀이 많이 쌓여 있으면 그해 겨울이 춥다고 여기고는 월동준비를 단단히 한다고 한다.
산악지역은 만년설이 있는 알타이 산맥 줄기와 항가이 산맥 부근이 높은 산으로 에워싸여 있다. 나머지는 나무 한그루 없는 구릉 정도의 낮은 산이 초원에 산재해 있으며 유목민들은 철따라 구릉지대의 초지를 이동하며 짐승을 키운다.
간편한 이동식 가옥인 ‘게르’에 살면서 봄에는 산 정상부근의 초지, 여름에는 산 중턱, 가을에는 좀 더 밑으로 내려오면서 짐승을 키운다. 그리고 추운 겨울에는 산 밑의 평지에서 통나무 집을 짓고는 겨울을 이겨낸다.
추운 지역 알타이 지역은 영하 50도까지 내려가고 울란바토르도 영하 30도가 넘다보니, 6월부터 8월까지만 외부 관광객들이 울란바토르를 찾는다. 한 겨울엔 시내 호텔들도 대부분 문을 닫는다고 한다. 한겨울 난방을 위해 석탄을 계속 태우다보니 석탄연기로 울란바토르 하늘이 해가 빛을 잃을 지경이고 숨조차 쉬기 어렵다고 한다.
여기보다 덜 추운 울란바토르가 이 정도니 영하 40~50도가 넘나드는 이곳 지역의 겨울은 상상을 초월한다. 겨울이면 짐승들은 유목민을 따라 산 밑까지 내려와 유목민 산막 부근의 초원에서 지낸다. 해가 뜨는 아침이면 모두 초원으로 나가 언 몸을 달래며 얼어붙은 초지에 누워 있는 풀뿌리를 캐 먹으며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다.
원래 몽골 고원은 대부분 눈이 내리지 않는다. 시베리아의 한냉 기류가 몰고 온 눈가루가 살짝 초원을 뿌리는 정도여서 짐승들은 풀뿌리를 캐먹으며 겨울을 난다. 하지만 요즘 이상기온으로 인해 눈이 많이 내려 풀뿌리를 찾지 못해 굶어죽는 경우가 자주 일어나고 있다. 원래 몽골인들은 죽은 고기는 먹지 않는 풍습 때문에 겨울식량을 단단히 준비하지 못하면 꼼짝 없이 굶는다.
생각해보면 몽골은 활동하기 좋은 계절은 6월부터 8월까지이고 대부분이 긴 겨울에 속해있어 추위와의 투쟁이라는 생각이 들자,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강인함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흉노들의 무덤을 찾아가다
율리아나스타를 향해 가던 중 우리는 설산을 보러 갔다가 그만 길을 잃었다. 원래 만년설 밑에서 점심을 먹고 일부는 등반을 하기로 했는데 길도 없고 이정표도 없는 곳이어서 지나쳐 버린 것이다. 언제나 계획은 좋지만 막상 현실은 그렇지 못한 곳이 몽골 초원이다.
율리아나스타를 향해 방향을 잡고는 달렸다. 왼쪽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오른쪽으로 높은 산이 이어져 있는 게곡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50km 정도되는 계곡을 끼고 집안에서 본 돌을 쌓아 만든 적석총들이 계속 이어졌다. 초원위에 드러난 석곽묘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마더 마운틴에서 알타이 시로 내려올 때 산 아래에서 사방형 돌무덤을 발견했다. 봉분이 사라졌지만 주위에 돌들이 흩어져 있고 장방형으로 돌이 깔려 있어서 무덤이 아니면 제단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알타이 시 부근이 흉노들의 본거지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계곡을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된 적석총은 눈에 띄는 것만 봐도 무려 5천기 이상은 될 법했다.
우리 대원들은 1970년대 조선일보 답사팀이 바얀항거르에서 살짝 보았다는 적석총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생각도 못한 지역에서 그토록 보고 싶었던 적석총 무덤들을 만난 것이다. 대원들은 흥분한 상태로 적석총을 향해 카메리 셔터를 눌렀고 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적석총은 흉노들 중 장군이나 왕이 죽으면 묻히는 무덤이다. 이 양식이 몽골초원을 거쳐 만주에 이르러 고구려의 적석총이 되었으며 경주의 적석총에까지 이어졌다. 경주와 만주에서 만났던 적석총을 이곳에서 만났다는 사실에 우리는 한층 고무되었다. 한민족의 이동경로와 함께 우리 민족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신라왕릉 적석총과 석탈해의 각배에 담긴 한국 고대사의 수수께끼
<<진서 북흉노전>>에 “하나라는 훈육(薰鬻), 은나라는 귀방(鬼方), 주나라는 험윤(獫狁), 한나라는 흉노(匈奴)라고 불렀다”는 기록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초원의 유목 민족 묵돌이 연합하여 세력이 번창하더니 동으로 열하에서 서쪽으로는 알타이 산맥 북단의 키르기스 지방까지 석권하였고, 서북쪽으로는 바이칼 지역, 예니세이 강의 상류 지방까지, 남쪽으로는 오르도스 지역, 동남쪽으로는 중국의 천산산맥 산서성까지 그들의 세력이 뻗쳤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도 흉노의 남하에 위협을 느끼고는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훈족(暈族)을 낮춰서 흉한 노예라며 ‘흉노’로 부른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역사의 부침이 심했던 몽골초원에서 중국인들이 가장 두려워한 초원의 전사 훈족(흉노)들이 얼마나 위대하고 큰 나라였는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이번 답사를 계획하게 된 것은 4년 전,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팀이 울란바토르 동북쪽 시베리아 남단 ‘도르닉 나르스’라는 지역에서 ‘흉노왕’ 무덤인 적석총을 발굴하는 곳을 다녀오면서였다. 그곳에서 신라 왕족들이 묻힌 돌무더기 적석총 고분을 보면서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히루기수르라고 불리는 적석총과 입석 형태의 사슴돌돌은 주로 몽골 중앙 서부지역에 산재해 있는데, 만주를 거쳐 경주에까지 적석총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라왕족이 흉노였다는 사실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 관계로인해 김씨들의 원향 알타이 답사에 가장 큰 비중을 두었다. 알타이는 금(金)이라는 뜻으로 흉노의 한 지역을 다스린 휴거왕의 세력들이 살았던 김씨들이 살았던 곳이다. 휴거왕의 태자 김일제가 혼사 왕을 따라 한 나라에 항복해 한 무제 밑에서 말 감독관으로 살았다. 그 후, 한 무제를 살린 공을 세워 벼슬길에 올라 시중에 오르고 장군이 되었다가 투후(秺侯)에 봉해졌다. 무제가 죽자 곽광(霍光)과 함께 유조(遺詔)를 받들어 소제(昭帝)를 보필했다.
신라 문무왕비에 성한 왕이 신라왕가의 시조라 나오고 그는 김일제를 나타내는 투후의 7세손으로 기록에 나온다. 그래서 신라왕가가 흉노 왕자인 김일제의 자손이라는 학설이 힘을 얻게 된 것이다. 또한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진나라에서 만리장성을 쌓는 노역을 피하기 위하여 이주해 온 사람들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진국이라고 부른다”는 구절이 있다. 당시 신라의 전신인 진국(辰國)의 형성과정이 씌여져 있다. 신라 땅에서 수천 리나 떨어진 장성 지방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과연 그 멀고 먼 길을 걸어와서 경주에 정착할 수 있었을까.
석탈해가 천리왜국 일본에서 가져왔다는 뿔잔은 칭기즈칸의 고향 헨티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몽골족의 고향인 헨티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강은 만주에서 북상하는 송화강과 우수리강을 만나 흑룡강을 이루어 태평양으로 들어간다. 그러니까 흉노였던 석탈해가 온 지역이 일본이 아닌 흑룡강의 하구 다파라국일 수가 있다. 석탈해가 몽골의 흉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각배를 들고 신라 땅에 나타난 것이다.
신라 왕들은 죽어서도 자신들의 고향에 있던 돌무더기 형태의 적석총에 묻혔다. 금으로 장식된 허리띠엔 물고기 쌍어가 들어가 있고, 수 십년 전까지 몽골 무당이 사용하던 기물인 뿔로 만든 각배(角杯)가 경주 왕릉에서 발견되는 것도 신라왕족들이 모두 흉노지역에서 왔다는 사실이다. 우리네 무당과 거의 흡사한 몽골의 무당 옷과 장식물, 초원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우리나라 서낭당의 원조인 오보, 우리 말로는 업(집안의 수호신)으로 불린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한층 가까워져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의 흉노 유적지 발굴이 힘을 보태고 있다. 4년 전 도르닉 나르스의 흉노왕 무덤 발굴과 작년에 울란바토르에서 150km 정도 떨어진 초원에 있는 흉노 주둔군 유적지를 발굴한 것이다.
신라에서도 발견되는 적석총은 몽골초원 가까이에 있는 키르키스탄 파지릭 추장 무덤에서부터 시작되어 몽골 대초원을 거쳐 신라에까지 이른다. 이처럼 몽골 초원 속에는 한국 고대사의 수수께끼를 풀 수도 있는 열쇠들이 초원에 남아있다.
율리아나스타에 도착하다
무덤의 계곡을 빠져 나오자 점심때가 훨씬 지났다. 메마른 강 건너에 마을이 옹기종기 있고 학교 같은 건물도 보였다. 율리아스티나 시 초입인 모양이다. 율리아스티나 시가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몰라 우선 마을에 차를 세워 놓고는 늦은 점심을 해 먹기로 했다. 개울가로 가서 식사준비를 할까하다가 햇볕이 뜨거워 건물 담 밑 그늘에 자리를 잡았다.
마을 초입의 가게 벽에 대원들이 모여 감자 칼국수로 뒤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몽골인들이 낯선 한국인의 모습에 모여 들었고 칼국수를 먹는 모습을 보며 웃었다. 한쪽에서는 나무를 자르며 집을 수리하는데 먼지가 폴폴 났다.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필요해서 가게 담 밑에 짐을 풀었으니 하는 수 없다. 김석규 단장이 가게에 들어가 이것저것 사서 먹는다. 아이들에게 사탕을 한 주먹씩 나눠주자 좋아들한다.
먼저 노인들부터 칼국수를 제공하느라 바빴다. 다음에 우리가 먹을 차례인데 윤기자가 보이질 않는다. 자동차로 가보니 노트북에 찍은 사진을 담느라 바빴다. 점심 먹으라고 말하고는 돌아왔다. 칼국수를 그릇에 담아 전달하는데 뒤늦게 온 윤기자가 의성에서 온 대원에게 가는 칼국수 그릇을 잡아 당겼다. 어떨결에 빼앗긴 대원은 멋쩍게 웃었다. 윤 기자는 다들 먹고 자신만 남은 줄 알고 엉겁결에 칼국수 그릇을 차지하려다고 일어난 일이었다. 이에 안 회장은 화가 나서 윤기자에게 쏘아 부쳤다. 우리는 서로 잘 알고 있으니 나중에 먹으면 되지만 신입회원인데다가 자신이 모셔온 회원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했다. 윤기자도 당황해서는 어쩔 줄 몰라했다. 자신이 늦게 와서 다들 먹고 자신만 남은 줄 알고 서둘러 밥그릇 차지하려다가 그렇게 됬다며 미안해 했다. 서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지만 시간이 좀 걸려서야 풀렸다.
이 부분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파라다이스 구경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먹어야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다. 이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새삼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설산이 보이는 고개
점심을 먹자마자 다른 차를 출발시켰다. 식재료는 우리 차에 싣고 다녔기에 짐 정리를 하고는 늦게 출발했다. 이미 앞차는 보이질 않는다. 가는 길가에 제법 맑은 물이 흐르는 강물이 흘렀다. 차량을 세워 두고 한 가족이 피서를 즐기고 있었다. 낮에 있었던 일로 마음들이 불편해 세수나 하고가자며 물가로 갔다. 이왕 물 만난김에 몸이나 담가보자며 강물로 뛰어 들었다. 오랜 만에 노천탕에 몸을 담갔다. 물이 차가워서 오래 있지는 못했다.
한참을 달려 계곡을 빠져 나가자 정상 고개에 우리 차량들이 세워져 있다.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 몹시 추웠다. 멀리 보이는 설산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지도를 펴 놓고서 오늘은 어디까지 가는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것 또한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지리지형을 모르는 우리로서는 킬로미터만 예상해서 도착하는 곳을 정할 뿐 반드시 지켜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해가 지기 전 갈 수 있는 곳까지 간다는 게 우리의 지론이었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초원은 정말 끝이 보이질 않는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제부터는 고도가 낮아지는 길이어서 조금 달리는데 수월할 것 같았다. 한 두 시간쯤 달리니 율리아스티나 중심가에 도착했다. 작은 도시지만 자동차가 돌아다니고 로터리도 있는 도시였다. 도로 공사를 하느라 먼지가 일었지만 활기가 있었다.
우리는 수퍼에 들려 생수와 술을 샀다. 이곳이 아니면 고기 살만한 도시가 없다는 생각에 일부는 양고기와 소고기를 구입했다. 몽골 기사들은 고기를 못 먹으면 힘을 못쓴다고 한다. 우리야 햇반에 라면이면 그만이지만. 몽골 소고기나 양고기는 우리나라 사람이 먹기엔 너무 질기다. 고기를 다듬어 부위별로 나눠서 팔지 않고 부위에 상관없이 크게 잘라서 팔기 때문에 조리를 해도 먹기가 불편하다. 이것도 몽골 기사들을 위한 만찬이라니 어쩔 수가 없다.
마음은 율리아스티나에서 짐을 풀고 싶었다. 하지만 율리아스티나는 관광지가 아니어서 우리 일행이 잠을 잘만한 곳은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율리아스티나를 벗어나 가는데 까지 북진하다가 어두워지기 전에 텐트를 치기로 목표를 세웠다. 공사 중인 먼지가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려 고개에 올라섰다. 오늘은 겨우 77.8km를 달렸는데 해거름이 몰려왔다. 적석총에 반해 사진을 찍고 암각화의 탁본을 뜬다고 허둥대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지체된 까닭이다.
오후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지만 몽골 서쪽이다 보니 해가 길어서 야영지를 물색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말라버린 개울가에서 야영
고개 마루에 도착해 따라오는 차량을 기다렸다. 우리 차량이 서 있는 고갯마루에는 작은 규모의 적석총 2기가 있었다. 그 아래에는 유목민들 게르 서너 채가 보이고 야크와 염소, 양떼들이 몰려 다녔다.
시냇물이 흐를 것 같아서 그곳에 야영지로 정했다. 고도 2465m였다. 역시나 해거름이 몰려오면서 한바탕 비바람이 거세게 불더니 소낙비를 온 대지에 뿌렸다. 모두 비바람을 맞으며 텐트를 치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비가 그친 뒤 텐트 주위에 말똥과 소똥을 주워 불을 피웠다. 해충의 공격을 피하고 추위를 달래기 위한 조처였다.
가이드가 저리고가 야영지에서의 주의사항을 주었다. 저리고는 우리나라에서 7년 동안 직장을 다녀서 한국말을 잘 한다. 절대로 강가에서는 볼일을 봐서는 안되고 세수도 해서는 안 된다. 몽골인들은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목숨처럼 여기며 신성시한다. 칭기즈칸 시절 물을 함부로 사용했다가는 처형이다.
4년 전 칭기즈칸 고향을 가다가 오른 강을 보고 너무 신이 나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 강물에 대고 대원들 중 누군가 소피를 보았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몽골인들은 매우 불쾌감을 나타냈다. 초원을 흐르는 강물은 짐승과 유목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생명수이다. 그런 곳에다 대고 오줌 누는 것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보고는 차를 세우고는 다가와 가이드에게 따지듯 물었던 것이다. 그러니 마음이 상한 가이드가 노발대발하며 더 이상 진행을 하지 않겠다고해서 잠시 분쟁이 일어났었다.
우리도 할 말은 있었다. 처음부터 강에다가 실례를 하지 말아달라는 금지사항들을 알려주었더라면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전적이 있어서 우리는 말라 버린 강물을 파고는 웅덩이에 물이 고이면 길어다가 초원에서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였다. 마른 개울을 삽으로 파서 웅덩이를 만드는데 인근 유목민이 와서는 살피더니 돌아갔다. 자신들과 짐승이 먹는 유일한 개울이니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랬다고, 우리는 칭기즈칸 법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최소한이라도 피해를 주는 여행은 잘 못된 것이다. 그래서 이번 답사는 환경답사를 최우선으로 하였다. 환경팀장으로 건대부고 김건철선생을 정해놓고는 그의 지시대로 자고 나서는 작은 휴지 조각 하나도 흔적은 남기지 않는 원칙을 세워 끝까지 고수해 나갔다.
새벽에 비바람이 한차례 퍼부었다. 산악지역이어서 고비사막 보다 더 추웠다. 아침에 일어나니 벌써 대원들이 말똥을 피워 놓고는 추위를 달래고 있었다. 새벽에 볼일을 보려고 텐트 문을 열었더니 야크 몇 마리가 다가와 텐트에 머리를 들이대며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자신들의 영역에 낯선 물건들이 나타났으니 영역 싸움을 하려고 다가왔을 것이다.
여행하는 동안 미안하지만 크고 작은 볼일은 알아서 초원에 나가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새벽 일찍 일어나 텐트가 안 보이는 으슥한 곳에 가서 잠시 볼일을 보았다. 기분 좋게 초원을 바라보며 해결하고 일어나 보니, 아뿔싸 그 곳이 적석총이었다. 적석총에 잠든 흉노 장군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오다보니 다른 대원이 볼일을 보고 있었다. “시원하시겠습니다.”하고 인사했더니 “넓어서 볼일 보기 좋구만” 하며 웃는다.
무릉을 향해 북진하다
무릉을 향해 아침 일찍 서둘러 야영지를 떠났다. 일정상 오늘은 새벽에 도착하는 한이 있더라도 무릉까지 가야만 한다. 가는 길에 설산을 보고 그 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하지만 한 나절이 지났는데도 설산은 보이질 않는다. 멀리 초원위에 높은 산이 솟아 있다. 그곳에 가려면 반나절은 걸릴 것 같이 멀어보였다. 기사들이 자기들끼리 몽골말로 의논을 하다가는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 이상기온으로 우리가 보려는 산등성이에 눈이 녹았고 오히려 반대편에 눈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가는 길 고개마루에서 설산을 볼 수 있다고해서 돌아나와 북진을 계속했다.
설산이 보이는 큰고개에 올랐다. 고갯마루마다 오보가 있다. 차량 안전을 위해 시계바늘 방향을 따라 세 번을 돌았다.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이다. 초원 사이로 자전거 길처럼 길게 이어진 초원의 길이 내려다보였다. 설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는 서둘러 떠났다.
그리고 계속되는 초원길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고개마다 오버가 있었고 기사들은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돌을 던지며 기도했다.
높은 산을 넘어와서인지 초원길은 뻥 뚫린 것이 너무 좋았다. 가는 길에 말떼들이 몰려있었다. 뜨거운 대낮에는 햇볕을 피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돌면서 더위를 피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들도 초원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주로 말을 키우는 유목민들이 있었다. 그 곳에서는 마유주가 익어간다.
우리가 탄 차량이 펑크가 나는 바람에 타이어를 교체하느라 멈췄다. 뒤이어 차량이 다가왔다. 철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제법 큰 마을이 있을 것 같았다. 대원들 중 누군가 잠시 볼일을 보러 갔다가 솔개 새끼 한 마리를 들고 왔다.
오늘 저녁은 솔개 요리를 해 먹자고 누가 농담을 했다. 날지 못하는 새끼였지만 솔개 자체가 덩치가 있으므로 제법 컸다.
이때, 몽골 기사 4명이 솔개를 들고는 철탑 위로 올라갔다. 한 사람이 위로 올려주면 다음 사람에게 솔개를 올려주는 방식으로 철탑을 올랐다. 철탑 위엔 커다란 솔개 둥지가 있어다. 아마도 어린 솔개들이 자리다툼을하다가 약한 놈을 밑으로 떨어뜨린 것 같았다. 솔개 둥지에 어린 새끼를 넣어주자 어미 솔개가 주위를 날아다니며 경계를 했다. 역시 몽골인들은 자연과 함께 살다보니 짐승에 대한 사랑이 사람에 대한 예우보단 큰 것 같다. 거친 자연에서 살다보면 누구나 자연의 존엄성과 경외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 같다.
펑크 난 자동차는 응급처리를 한 후 차량 수리를 위해 선두 차는 마을로 들어갔다. 다른 일행은 계속 가서 호수 근처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차량 수리를 맡기고는 마을을 돌아다니는데 말을 타고 오가는 사람들이 매우 인상적이다.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자 씨익 웃으며 게의치 않고 말을 타고 간다.
마을을 돌아다니다보니 한국식당이 있었다. 이런 오지 마을에 한국음식을 파는 식당이 있다는 것에 놀라 들어갔다. 한국에서 주방일을 배워온 사람이 연 음식점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은 빗나갔다. 한국인 남자와 몽골여자가 결혼해서 이곳에서 밀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가을에 수확을 하고 겨울에는 한국에 돌아가 겨울을 나고 오는데, 이들로 인해 한국음식이 퍼지게 되었고 현지 마을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어서 가게를 열었다는 것이다. 이쪽은 비가 조금 와서 인지 밀 농사가 되는 모양이었다.
김치찌개하고 불고기와 돼지고기를 시켜서는 오랜 만에 한국음식으로 만찬을 즐겼다. 차량을 수리하고 서둘러 달렸다. 먼저 간 일행을 따라 잡으려면 속력을 내야했다. 초원을 달리는데 새들이 유난히 많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갈매기였다. 초원에 갈매기가 살다니! 잘 못 본게 아닌가 싶어 다시 확인했다. 바다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내륙 한복판 초원에 갈매기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믿을 수가 없었다.
역시 이곳 고원지대가 형성된 것은 지각변동으로 해저가 올라와 생긴 고원이라는 사실이 실감났다. 그 당시 바다에 살았던 갈매기들이 여전히 대를 이어 새끼를 낳으며 변화된 몽골 고원에서 자리를 잡아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그래서 몽골 초원의 호수는 대부분 염호이고 그 곳에서 소금을 채취했다. 초원에 넓게 펼쳐진 습지대를 지나면서 망원렌즈를 갖고 있는 신 사장이 카메라 셔터를 계속 눌러댔다. 습지대에 철새들이 둥지를 틀고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습지대를 지나 초원을 달리다보니 두루미가 초원에 떼를 지어 놀았다. 어미 두루미가 새끼 두루미 두 마리를 데리고 훈련을 시키는 광경이 나타났다. 차에서 내려 쫓아가 카메라를 들이댔다. 새끼는 너무 어려서 날지 못하고 종종걸음으로 요리조리 피해 돌아다녔다. 어미는 계속 소리를 내며 새끼를 불러모았다. 어미와 새끼가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고는 더 이상 괴롭히지 말자며 차를 움직였다.
고개에 올라 멀리 보니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우리 일행들이 보였다. 우리는 고개에 차를 세워 놓고는 뒤따라오는 차량에게 먼저 가라고 신호를 보냈다. 선두 차는 지름길로 가서 주 도로에서 만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는 다른 길로 접어 들었다. 그리고 아스팔트 도로에서 기다리며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만날 수가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소일하다가 혹시 먼저 지나쳤을 것 같아서 계속 달렸다. 그리고 강물이 흐르는 사이로 다리가 나타났다. 다리 위에 차를 세워 놓고는 일행을 기다렸다. 저리고는 우리가 지름길로 왔으니 기다리자며 낚시 대를 들고는 강가로 나갔다. 원래 몽골인들은 낚시도 안하고 물고기 고기도 안 잡아먹는데 요즘 들어 물고기를 먹는다고 한다. 저리고는 한국에서 주말에 낚시를 많이 하러 다녔다면서 자동차에 낚시 대를 갖고 다녔다.
2시간 이상을 기다렸지만 만나지 못하고 휴대폰도 연결이 안 된다. 다시 되돌아갈까하다가 휴대폰이 연결되는 시내로 가는 게 더 옳을 것 같았다. 차강올 부근에 이르자 휴대폰이 터졌다. 기다리다가 오지 않아서 돈은 없고 카드뿐이어서 호텔에 들어와 점심을 시켰다는 것이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점심이 나오는 동안 환전을 위해 은행을 찾았다. 차강올은 제법 큰 도시였다. 은행도 여러 곳이 있었다. 이곳은 한국 돈은 환전이 안되고 달러만 환전이 가능했다. 달러를 바꿀 수 있는 은행도 드물어 여러 은행을 거친 후에 겨우 환전했다.
‘호소로’라는 야끼만두 같은 데 직접 주문분만 만들다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양고기가 들어 있는 호소로는 기름이 흘러 뜨겁고 느끼게 자주 먹기엔 어려움이 있다. 우리가 먹어본 것은 호소로여서 그것을 시켰는데 기사들은 칼국수 같은 것을 시켜서는 맛있게 먹었다. 남이 먹는 음식에 군침을 흘려보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결국 비싼 호텔음식으로 점심을 먹고는 서로 헤어지지 말자고 약속하고는 서둘러 길을 떠났다. 오늘 안으로 무릉(머렁)까지 가야만 했다.
앞서고 뒷서고 하다가 그만 또 서로 헤어졌다. 우리가 탄 차량이 길을 잃고는 어느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산악지역이어서인지 게르보다는 나무를 잘라 집을 지어 살고 있었다. 잘못 길을 들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되돌아 나와 갈림길까지 무려 50km이상을 허비했다. 결국 홀로 남겨진 우리는 독자적으로 무릉까지 가야하는 길을 선택했다. 고갯마루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길을 찾았다. 그곳에도 적석총이 있어서 잠시 사진을 찍고는 서둘러 초원길로 향했다.
어느새 어둠이 몰려왔다. 휴대폰이 터지질 않아 앞서간 일행들과는 연결이 되지 않는다.
저녁마저 굶게 생겨 최성미 원장이 선물로 준 사과 말린 것을 계속 먹으며 달렸다. 멀리 초원에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로 들어가자 소규모 광산이 있는 곳이어서인지 마을이 옹기종기 100여 가구 정도가 모여 살고 있는 듯하다. 이 마을이 우리에겐 오아시스나 다름없었다.
다행히 그곳에 길손을 위해서인지 음식점이 있었다. 그곳에 들어가 감자와 양고기를 넣고 만든 음식을 시켰다. 이곳도 주문하는 즉시 바로 음식을 조리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렸다. 답답해서 밖으로 나왔다. 초원에 지는 저녁해거름이 환상적이었다. 밖에서는 아이들이 몰려다니며 놀고 있었다. 우리를 보고는 착한 웃음을 내보이며 주위를 맴 돌았다. 사탕을 꺼내 주니 살갑게 다가왔다. 좋아하는 모습이 해지는 초원과 대비되어 환상적이다. 음식이 기름이 많아 느끼해서 많이 먹지 못하고 처음으로 남겼다. 그리고 음식 주인여자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음료수를 선물로 주었다. 음료수도 팔고 있었는데 한국산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크게 미소 지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대충 저녁을 해결하고는 초원의 어둠을 뚫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어둠을 뚫고 차량을 움직이다보면 큰 문제가 생길 수가 있어 여차하면 무리하지 말고 상황을 보면서 초원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다. 무릉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어둠뿐인 초원을 달리자 자정 무렵 휴대폰이 연결되었다. 무릉에 도착해 호텔에 짐을 풀었다는 것이다. 다행이라는 생각에 조심 운전을하며 무릉에 도착하자 새벽 1시가 되었다.
앞서 도착한 기사들이 밖에 있었다. 호텔에서 들어와 잠을 자라고 하였지만 이들은 차안에서 잠을 자겠다고 했다. 알고보니 호텔에 방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들은 돈을 벌러 왔으니 호텔에서 잠자는 비용을 나중에 주면 좋겠다는 뜻도 전했다. 이래저래 남자들은 고생이 많다. 한 집안의 가장의 책임이라는 것이 몽골이나 한국이나 다를바 없다. 누군들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침대에서 잠자며 피로를 풀고 싶지 않겠는가! 내 한 몸 펀안 한 것 보다는 자식들 눈에 밟혀 주워진 호사마저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장의 무게를 엿볼 수 있었다.
흡스콜을 향하여! 신기루를 만나다
무릉에서 흡스콜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이다. 어제 고생을 많이 했으니 박물관을 구경하고 좀 늦게 떠나기로 했다. 아침을 호텔에서 먹기로하고는 밖에 나가니 기사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빨리 호텔 식당에 들어와 식사를 하라고 하자 좋아하며 들어왔다. 오랜만에 호텔 식사를 해서인지 모두 기분이 최고였다.
멀리서 소용돌이가 일더니 점차 빌딩만한 회오리바람을 만들었다가는 사라지기를 계속한다. 회오리바람이 부는 메마른 초원에는 낙타들이 떼를 지어 다니고 있다.
낙타들이 사는 곳은 풀로 거의 없는 메마른 초원이다. 사진을 찍기 위해 차량을 세우고는 다가가자 눈치를 보면서 조금씩 달아난다. 새끼 낙타 한 마리가 멍하니 나를 쳐다보느라 서 있자 달아나던 어미가 서서는 계속 새끼를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낙타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낙타 앞에 서서는 계속 눈을 마주쳤다. 낙타 눈이 참 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쪽으로 갈수록 야크나 낙타가 눈에 띄게 많다. 평균 고도가 2400m 이상이다보니 고원지대에 적응하는 동물이 산다. 몽골인들에게 낙타는 자신의 가족이다. 낙타는 영물이어서 사람과 함께 오랫동안 살면서 감정을 나누기도하고, 젖과 가죽을 공급해준다. 또한 무거운 짐을 멀리까지 나르는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동물이다.
유목민들과 낙타는 다른 동물들보다 끈끈한 정이 있다. 오랜 동안 새끼를 낳고 젖을 생산한 낙타가 늙어 더 이상 쓸모가 없을 때, 유목민들은 낙타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풍습이 있다. 누군가 발견해도 이 낙타를 해치지 말라는 표시로 목에 부족을 상징하는 푸르거나 붉은 천을 목에 매주고는 고삐를 풀어 준 다음 초원에 방목한다. 그때부터 낙타는 자유롭게 초원을 돌아다니다가 일 년에 한번 정도 다시 집으로 찾아와 물을 먹고 간다고 한다. 이 늙은 낙타가 나타나 물을 마시면 아무도 그 주변을 얼씬 거리지 못하는 위계질서가 낙타들 사이에 있다. 물을 다 마시고 초원으로 돌아갈 때 즈음 주인은 목덜미를 쓰다듬고는 다시 새로운 천으로 목을 감싸주고는 또 방목한다. 낙타와 주인은 이별의식을 이런 식으로 여러 해 반복하다가 더 이상 낙타가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초원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낙타는 새끼를 낳을 때가 되면 혼자 집을 나간다. 그리고 3~4일 동안 초원을 돌아다니며 자궁에 새끼를 매달고는 혼자서 힘겹게 새끼를 낳는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새끼가 아니면 절대로 젖을 물리지 않는 본성이 있다. 이때 말머리 모양으로 된 ‘마두금’을 켜는 악사를 불러다가 음악을 켜고 노래를 한참 동안 부르면 낙타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그때 어미 잃은 새끼를 데려다가 젖을 물리면 그때부터는 자신의 새끼로 인정하고 젖을 먹여 키운다는 것이다. 낙타 마음 깊은 곳에 감춰져 있는 원초적인 마음의 본능을 일깨운 것이다. 낙타 사진을 본 어느 시인은 낙타 코를 만지러 몽골초원에 가고 싶다고도 했다. 자세히 보니 낙타 코가 참 착하게 생겼고 넉넉한 모습이다.
낙타를 뒤로 하고 달리는데 도로가 비가 온 듯 윤기가 난다. 더 멀리 보니 드넓은 호수가 초원에 있는 듯하다. 다가가면 그대로 초원인데 또 앞에 호수가 나타난다. 초원 가운데에 나타난 신기루인 것이다. 이란에서도 이런 신기루를 경험했었다. 고원지대에서 나타나는 자연현상이다.
가는 길에 말라버린 호수는 소금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 갯가에서 자라는 염초들이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신기했다. 몽골 고원이 바다가 올라와 생긴 대지라는 사실이 비로소 실감났다. 몇몇 일행은 맨발로 물빠진 호수에 들어가 갯벌체험을 했다.
바다가 없는 몽골에서는 소금을 초원의 호수에서 채취한다. 몽골 초원에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암염 광산이 존재하기도 한다. 소금은 음식 조리에 사용하기도하고 짐승에게 먹이기도 한다. 호수에서 소금을 채취해 돈벌이하는 사람도 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염분을 섭취하지 않으면 살지 못한다. 그러니까 바다가 없어도 다 살기 마련이다.
몽골 최고의 휴양지 제주도의 4배 크기 흡스콜
‘어머니의 바다’로 불리는 흡스콜에 도착했다. 몽골인들이 살아생전 한 번쯤 와보고 싶어하는 신성한 곳이다. 몽골 최고의 관광지답게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폐선처럼 녹슨 유람선을 탔다. 잠시 후, 배가 떠나려는 순간 저리고가 와서는 뭐라고 투정을 한다. 우리 대원들 몇 사람이 흡스콜에서 배를 타기 전 화장실이 아닌 노천에 방료하는 바람에 벌금을 15만원이나 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화장실을 갔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줄을 서 있어서 천소영 교수님과 함께 사람들을 피해 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숲으로 들어가 오줌을 누고는 왔었는데, 큰일 날 뻔 했다. 답답한 것이 사람은 많이 몰리는데 화장실이 너무 협소하다는 것이다. 무조건 우리쪽 잘못으로 몰고가기엔 어려운 점이 있었다. 예전에 실크로드 답사 갔을 때, 세계문화유산인 교하고성에서 어린 학생이 보다가 무심코 흙더미에 앉아 있었는데, 답사를 끝내고 나오려는데 어린 학생을 잡고는 벌금을 내라는 것이다. 나는 화가 나서 가이드에게 막 소리를 질렀다. 처음부터 학생들에게 주의를 주든지해야지 관리공무원이란 사람이 학생들이 흙더미에 앉는지 어떤지 살펴보다가 벌금을 물리는 경우가 어디있냐며 따졌다. 이건 문화유산 훼손을 막겠다는 것이 아니라 벌금을 물려 공짜 돈 먹으려고하는 의도가 더 크다며 항변했다. 가이드 잘못이 크니 가이드가 물어내라고 다그쳤다. 결국 우리나라 돈으로 30만원하는 벌금을 7만원으로 깎았다. 그리고 나는 화가 나서 기다렸다가 영수증을 받았다. 지금 사정도 그때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들끼리 규칙만 정해 놓고 의무만 요구하지 혜택은 없는 것 같아 씁쓸하다.
결국 비용에서 처리하기로하고는 무마했다. 유람선이 매케한 연기를 내뿜으며 출발했다. 호수가 넓어서인지 생각보다 파도가 거셌다. 멀리 산 정상에서 안개가 뿌옇게 끼었고 바람이 찼다.
바다처럼 넓은 흡스콜 안에는 멀리 섬들도 보였다. 몽골 초원 곳곳에 있는 오버가 흡스콜 한 가운데에 있는 섬에서 처음 시작된 곳이라고 한다. 그곳에 가려면 보트를 타고 가야하는데 우리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무려 크기가 제주도의 4배 정도 되고 수심 80m까지 보인다는 흡스콜은 정말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였다.
단체관광을 온 몽골인들은 남녀노소가 섞여서 갑판에 나와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워낙 덩치가 좋다보니 여자스모선수들이 나와 몸을 흔드는 것 같다. 초원이라는 섬에 갇혀 지냈던 이들에겐 바다처럼 넓은 호수를 만나니 흥분이 되는 모양이다. 조용히 흡스콜을 경관을 보면서 가면 좋으련만, 나는 이방인이니 어쩔 수가 없다. 초원에 갇혀 있다가 나왔으니 마음껏 놀고 싶은 심정이야 모르겠는가!
유람선에서는 흡스콜에서 잡아 훈제한 물고기를 파는데 술과 함께 먹으니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갑판에서 반바지 차림을 한 젊은 한국인을 만났다. 서양인들과 영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현대모비스 기술설계팀에서 일하는 청년이었다. 우리는 함께 사진도 찍고 대화를 하였다. 여름휴가를 내어 혼자 흡스콜을 왔다는 말에 우리는 젊은이가 대견해보였다. 인근 게스트 하우스에 묶고 내일 울란바토르에 갔다가 모레 출국한다고 했다. 많은 대원들이 반바지차림의 청년이 감기에 걸릴까봐 걱정했다. 짧은 기간이어서 아무 준비 없이 반바지 차림 그대로 배낭만 메고 왔다는 것이다. 바지를 주고 싶었지만 내가 갖고 있던 바지 여분은 김세환 회장님이 입고 계서서 하는 수 없었다. 여름이라고 해서 반바지차림으로 온 젊은 청년이 걱정이 되었다. 함께 동행하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헤어질 때 갖고 있던 감 말린 것부터 사탕, 과자를 여러 사람들이 건네주었다. 후에 청년은 메일로 배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청년과 헤어진 우리는 호수 건너편에 있는 게르촌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가다가 호수 옆 숲속에 인디언 텐트가 보였다. 몽골초원에서 본 둥근 원형텐트가 아니라 인디언들이 사용하는 텐트가 숲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흡스콜이 시베리아 인근이다보니 이쪽 사람들도 전형적인 몽골인들이 아닌 시베리아 계통 인종이었다. 북쪽으로 올수록 오버도 돌탑보다는 나무로 세운 것이 많았다. 2년 전 시베리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중국 최북단 오륜촌족 자치구 마을(러시아 말로는 에벤키족)이 사는 북극 향을 갔을 때도 이런 텐트에서 사람들이 살았다. 에벤키족은 시베리아에 흩어져 사는 민족으로 우리나라 사람들과 가장 가까운 피가 섞였다고 한다. 이들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니 덩치가 크지 않고 얼굴이 마른 것이 몽골인들처럼 생기지 않았다. 이웃집 친구를 만나는 듯 한 우리를 닮은 모습이었다.
이들은 도로변 옆 숲에 텐트를 치고는 약초나 장신구,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순록을 키우며 사진을 찍어주고는 돈을 받았다. 우리나라 돈으로 4천원이었다.
안 회장이 늑대 털로 만든 모자를 하나 샀다. 기념품은 조악해서 별로 살 게 없었다. 전부 중국 물건 같아서 나는 안 샀다. 기사들은 너도나도 약초를 구입하기에 바빴다. 한 겨울 감기 걸릴 때 약초는 매우 소중하게 쓰인다고 한다. 사진도 찍고 작은 기념품도 사며 잠시 시간을 보낸 인디언 텐트에서 만드는 호소로를 두 봉지 사서는 먹고는 잠시 허기를 달랬다. 그리곤 어둡기 전 숙소를 찾아 호수가를 달렸다.
흡스콜 야영지에서의 하루
크기를 알 수 없는 흡스쿨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야영지에 도착했다. 관광지여서 무척 비싼 편이다. 다른 곳을 가 본들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아 정했다. 게르안을 들여다보면서 여기까지 오느라 많이들 지친 탓에 조금씩 짜증 섞인 말들이 오간다. 비싼 값에 비해 게르의 사정은 그저 그렇다. 저녁을 공동으로 해 먹을 수 있는 넓은 게르가 있다는 것이 다른 곳과는 차이가 있었다.
소고기와 양고기를 모두 꺼내 놓고는 고기를 부위별로 잘랐다. 몽골 고기는 부위별로 팔지를 않고 덩어리째 잘라서 팔기 때문에 질겨서 먹기 어렵다. 그래서 윤사장이 칼로 힘줄과 비게를 잘라내며 먹기 좋게 칼로 자르다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나름대로 불을 피우고 먹을 것을 꺼내 오는 등 짐을 정리하느라 고기를 다루던 주방 대원 일을 도와주지 못했다.
결국 주방을 담당했던 대원이 먹는 부분에 대해 짜증이 나는지 나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왜 무조건 기사들 위주로 식단을 준비하고 그들 먼저 먹이려 드느냐. 우리가 몽골 기사들을 위해 답사를 온 게 아니지 않느냐. 우리 위주로 식단을 짜야지 그들이 상전이냐 등등.
결국 이야기를 들은 몽골기사들이 기분이 나쁘다며 화를 내고 결국 약간의 몸싸움이 있었다. 덩치가 커서 뒤에서 팔을 잡아 말렸지만 쉽지 않았다. 가까스로 서로 흥분을 가라 앉혔다. 이제 일정이 3분의 2를 소화했다. 먹는 일들이 불편하니 짜증이 많이 나는 모양이다. 앞으로 갈 길도 그리 쉽지 않은 코스인데 자꾸 이런 일들이 일어나 힘이 든다.
다툼이 있어서 저녁 식사는 그것으로 끝이다. 게르촌 직원은 자꾸 와서는 공동주방 게르 문을 닫아야한다며 빨리 철수하라고 한다. 인원이 많다보니 늘 먹는 게 문제가 된다. 평소처럼 차량 두 대 정도의 인원이 가장 좋은 것 같다.
공동 식당 안 청소를 하고는 남은 소고기, 양고기 덩어리를 모두 꺼냈다. 적어도 3일은 가야하는데 냉동고가 없으므로 상할게 뻔했다. 울란바토르에서 준비해온 고기도 이틀이 지나 모두 초원 땅속에 파묻었다. 율리아나스타에서 고기를 살 때 조금만 사라고 주의를 시켰는데 대원들이 고기를 별로 먹지 않다보니 많이 남게 생겼다. 차라리 육포 같은 것으로 준비를 했어야했다.
게르촌은 한국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고 외국인들도 눈에 띄었다. 역시 어둠이 몰려오면서 세찬 비바람이 몰아쳤고 우리는 젖은 게르 안을 덥히기 위해 장작불을 피웠다. 모두 잠든 밤 밖으로 나오니 북쪽이어서 그런지 별들이 모래알처럼 수도 없이 떠 있다. 게르 옆에서 장작을 피워 놓고 기타를 치며 노래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그런 낭만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어둠에 잠긴 흡스콜에 다가서니 바람이 세차다. 바람에 날리는 말 갈귀처 허연 파도를 일으키며 해안으로 파도만 달려왔다.
파도가 부서지면서 기억의 저편으로 오래전 이야기가 사라졌다가 다시 밀려왔다. 초기 실크로드 답사 당시 딱 한 개 남은 라면 을 불교유적지 답사를 다녀온 어느 교수님이 텐트에 혼자 남아 있다가 대원들을 기다리며 하나 뿐인 라면을 끓여 먹었다. 결국 라면이 없어진 사실을 늦게 발견한 대원들 사이에 큰 다툼이 일어났다. 하나 남은 라면은 공동으로 먹기로 약속을 했던 것이다. 그 약속이 깨지는 바람에 결국 오늘날까지 서로 보지 않고 지낼 정도로 심각했는데, 참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곳이나 이처럼 크게 다가올 줄이야! 사는데 불편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먹고사는 게 풍족하면 라면 하나가 무슨 큰 문제이고, 밥을 누가 먼저 먹던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각박한 세상일 수록 가장 기초생활 문제가 크게 대두된다. 그래서 잘 살아야 한다. 15년 전 나는 아이들 30명을 이끌고 인천에서 천진까지 배로, 북경에서 시안까지 기차로 그리고 폐차 지경의 중고차로 시안에서 우루무치까지 실크로드 답사를 갔었다. 입안에 들어온 모래를 시도 때도 없이 뱉어내며 세계에서 제일 낮은 지역인 분지 투루판까지 갔다. 너무 뜨거워 그곳은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그야말로 달나라와 같은 붉은 모습뿐이었다. 그래도 그 곳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도시가 있어서 좋지는 않았지만 먹고 자는 것은 걱정 없었다. 저녁에는 죽은 포도나무를 가득 트랙터에 싣고 사막에 가서는 불을 피워 놓고 동네의 젊은 청년들과 춤추고 키타 치며 밤늦게까지 즐겼다.
한 낮의 뜨거움에 지쳐 있는 우리는 투루판 민속공연 장 어느 지역에서 호사를 누리는 서양인들을 만났다. 유럽에서부터 캠핑카를 끌고 온 젊은이들은 그늘 막 까지 치고는 식탁을 펼쳐놓고 식사를 준비했다. 막 해가 질 무렵이었는데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옆에서는 기타까지 치며 여유를 부렸다. 생긴 것들도 키, 코, 눈도 크고 참 남녀들이 잘 생겼다. 부러운 눈으로 한참을 지켜보다가는 때에 절은 단복이며 모래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내 자신과 대원들 모습에 쪽 팔려서 그 자리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론 실크로드 답사를 한 번도 가지 않았는데, 당시엔 정말 자동차 보다 당나귀가 더 많은 곳이었는데, 아무튼 중국의 발전 속도로 볼 때 지금은 몰라 볼 정도로 많이 변해 있을 것만 같다. 단지 그곳 식당 칸에서 중국 공안에게 이유 없이 끌려온 위그르족 청년과 마주쳤다. 공안은 권총을 꺼내 젊은이 양손을 탁자에 올려 놓라고 명령을 내리더니 한참을 짓이겼다. 식당칸에 있던 사람들이 눈치를 보며 모두 떠나갔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설마 외국인에게 무슨 짓을 하랴 싶어서!
그 청년은 우리와 함께 투루판에서 내렸는데 양손을 벌벌 떨면서 물건을 들지 못했다. 친구들이 물건을 들어주었다. 그 청년은 기차 출입구 계단에 앉아 있는 공안에게 사정하듯 애처로운 눈초리로 빌고 또 빌었다. 가이드에게 무슨일이냐고 물었다. 열차 안에서 흔히 있는 일이란다. 위구르 청년들 기 못 펴게 그렇게 괜히 트집 잡아서는 범죄인 취급한다고 한다. 공안 눈에 안 띄는게 제일 상책이라고 한다.
빼앗긴 나라에 대한 서글픔을 그곳에서 보았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의 현실을 이곳에서 보는 것 같아 오랜 동안 씁쓸한 기억이 지워지질 않았다.
그때, 자동차가 몇 번이나 고장 나 결국 어두운 사막에서 지나가는 차를 세우려고 고생 많이 했다. 이제는 나이도 있고해서 그런 고생스런 답사는 하지 않겠다며 실크로드 답사에 눈도 돌리지 않았는데, 이번 몽골 답사에서 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교통과 먹고 자는 문제가 힘들다보니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지나고 보면 그때의 고생 또한 그리운 추억으로 머물게 할 것이다. 그것이 오지 여행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며 추억이다.
여행이란 그때그때의 환경과 현지 사정에 따라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목숨을 내걸고 추위와 고독에 몸부림치면서도 히말라야를 오르는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여행의 참 맛은 그 상황을 즐기는 것이다.
어둠에 잠긴 흡스콜 파도소리를 들으며 배회하며 밤이슬이 어께에 내려앉을 때까지 많은 생각을 했다. 또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느 곳에 가든 대접 받으려면 나라도 부강해야하고 개인도 잘 살아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단지 그들보다 다른 위치에 있다고해서 그들을 무시하거나 어렵게하면 더더욱 안 된다는 사실이다.
흡스콜을 떠나며
아침 해가 흡스콜 지평선에서 강렬하게 떠올랐다. 햇살이 밤이슬을 날리며 대지에 번졌다. 아침에 북어국을 끓였다. 어젯밤 좋지 않은 일들로 기사들도 우리 일행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밤새 술을 마셨는지 일어나지를 않았다. 다가가 아침을 먹자고 했더니 생각 없다고 한다. 어젯밤 몽골 기사들과 다툼이 있었던 윤사장이 보이질 않았다. 여기저기 게르를 돌아다니며 찾아보았지만 보이질 않고 휴대폰도 꺼져 있었다. 걱정이 앞섰다. 게르촌 사무실에 가서 알아보니 어젯밤 늦게 택시를 불러 무릉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아마도 무릉 공항에서 러시아제 쌍발기를 타고 울란바토르로 갈 모양이었다. 어찌됐든 안전하길 바라면서 문자메시지를 계속 보냈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먹는 것으로 자존심 상했으니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하지만 윤 사장과 저리고가 울란바토르 인쇄소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나 마찬가지인데, 힘들어서 나한테 투정 부린 것을 저리고가 자신들에게 하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우리가 거지 새끼냐며” 밥상을 차버리며 달려들고 사태가 심각한 것을 감지한 기사들까지 합세한 다툼으로 번졌다.
유적답사회 어르신들은 먼저 식사를 하고 게르로 돌아갔으므로 자세한 내막을 모르고 있었다. 아침에 무슨 문제가 발생한 것이냐며 묻기에 울란바토르 출신 두 사람의 집안 문제라며 넘어갔다.
기사들도 별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안전하게 우리를 책임지고 울란바토르까지 인도해야할 기사들이다. 우리의 생명을 그들에게 맡긴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들과 불편한 관계를 가질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고 조금 이해를 하면 될 일들이다.
그들도 한 집안의 가장이고 돈을 벌기 위해 멀리 떠나왔다. 우리는 우리대로 그들은 그들대로 각자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도 그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도록 말을 조심했어야 했다. 또한 그들도 상황을 참작해 조금 성질을 참았어야 했다. 만약 서로 치고 받고 싸움이 일었다면 감정의 골이 더 깊어져 누가 잘했든지 그날 밤으로 올 스톱이 될 뻔했다. 다행히 서로 말리고 감정을 추슬러서 이나마 다행이었다.
지도를 보니 앞으로 갈 길도 만만치 않은 여정이다. 산을 넘어야하고 강도 건너야 한다. 답사대가 목적한 대로 알타이를 답사했으니 이젠 포장도로가 많은 길로 울란바토르까지 가면 이틀 정도가 걸린다. 하루를 당겨서 빨리 울란바토르에 갔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지금 가려는 코스는 기사들이 잡은 코스이다. 한국에서 온 손님들에게 자신들이 아는 비경으로 코스를 잡아 울란바토르까지 가는 길을 정했으니 계획대로 가는 게 옳은 것 같았다. 여행하다보면 별일이 다 있다. 중간에 기사가 도중에서 하차하고 다른 차편을 구해 일정을 소화한 적도 있었다. 여행하면서 서로 오해를 풀면서 가면 되는 것이다.
머렁까지는 포장도로여서 큰 문제가 없었다. 흡스콜을 빠져 나가기 전, 인디언 천막이 있는 곳 부근에서 두 부부와 여자 아이 둘이 도로변을 걸어 장사하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때, 우리 앞차에서 크락숀을 크게 울리며 지나갔다. 그러자 놀란 나머지 뭐라고 소리를 질렀는지 욕을 한 모양이다. 이에 화가 난 앞차 기사가 차를 세우고는 달려가 멱살을 잡고는 싸우려고 했다. 부인과 아이들이 말리고 또 한 차례 난리가 났다.
어제 저녁 일로 기분이 나빴는지 어찌됐든 ‘돌팍’으로 불리는 머리 큰 기사가 화를 못 참고 씩씩 거렸다. 거친 초원에서 살아가려면 남을 힘으로 억눌러야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로부터 새끼 거느리고 있는 짐승은 건드리는 게 아니라고 했다. 하물며 아내와 아이들이 보고 있는데 아버지의 체면을 깎으면서까지 그렇게 힘으로 제압하려하는 것은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이고 살기 팍팍하기 때문이다.
불과 며칠 전 둥지에서 떨어진 어린 솔개를 협력해서 높은 철탑 위 둥지까지 올라가 새끼를 넣어주던 그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들은 자연에 대한 예의는 있지만 정작 사람에 대한 예의는 없는 것 같아 씁쓸하다. 자연은 자신들에게 이로움을 주기 때문에 예의를 갖추지만 사람은 이들에게 짓누르고 정복 대상인 모양인가 보다. 거친 자연환경에서 살아온 이들에겐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른다.
기사들과 계속되는 신경전의 연속
흡스콜 선착장에 도착하자 기사들이 차를 세워 놓고는 식사를 하러 들어갔다. 우리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멋대로이다. 화가 끓어 대원들이 여기서 기사들을 돌려보내고 항공기를 타고 울란바토르로 돌아가자며 의견이 분분했다. 집행부의 한 사람으로서 난감한 상황에 봉착했다. 자기들 나름대로 아침밥을 못 먹었으니 먹고 가겠다는 것인지 일종의 시위인지 모를 일이다. 우리 일정에 따라야하는 기사들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행동이다. 문제는 통역겸 가이드가 나와서 식사를 하겠다는 말만했어도 원성이 커지진 않았을 것이다. 자기들은 아침밥을 먹는 동안 우리 대원들을 길거리에 세워 놓은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항공기 예약도 안했는데 좌석이 있는지도 모르고 참으로 난감했다. 우리는 한 번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들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울란바토르까지 우리를 안전하게 이끌고 갈 사람들이 아닌가!
관광회사를 통해 이들을 소개 받았다면 회사에 전화해서 당장 기사들을 바꾸거나 진행 못한 것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울란바토르에 있는 지인을 통해 이들을 섭외 받았으므로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를 깨닫게 된 것은 모든 진행을 책임지고 이끌어 나갈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답사회는 기사만 섭외하고 모든 진행을 우리가 알아서 진행했다. 여러 차례 협상 끝에 이번에도 그렇게 하기로 했지만 막상 이곳에 도착하니 첫날부터 차량 추가 문제로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리고 우리가 계획한 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들의 선택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4년 전에도 가이드가 공항에 나오지 않아 한시간 넘게 기다리느라 고생을 했고, 또 칭기즈칸 고향 부근에서 다툼이 있어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었던 일들이 있었다. 몽골인들은 일종의 콤플렉스가 있는 것 같다. 자신들이 과거에 짓밟은 민족에게서 이제는 그들을 따라다니는 안내 견 노릇을 한다는 이상한 자존심을 내세우는 듯 하다. 사실 한국말을 하는 몽골인들은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와 비교적 잘 사는 축에 들어간다. 하지만 이들은 한국에 대해서는 고맙다는 생각보다는 자신들이 한국에서 고생한 것들을 더 생각하는 사람들 같았다.
길도 모르고 이정표도 없는 몽골에서는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는 내 맘대로 사람을 부리기 힘들다는 뜻이다.
윤사장은 제본기 사업을 하는 분인데 울란바토르에 제본 기계 사업 때문에 신 사장을 만나러 왔다가 우리 일행과 합류해 주방을 담당했다가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 신 사장은 서울인쇄조합에서 파견한 사람으로 울란바토르 인쇄소에서 반년 동안 기술을 이전시켜주는 일을 하고 있다. 울란바토르에서 기사며 차량 등 많은 준비를 해 준 가이드 역할을 자처한 사람이다.
이번 교훈은 어설프게 아는 사람으로부터 기사를 소개를 받지 말아야한다는 것이다. 비용은 다 나가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부딪히는 문제로 인해 고민스러운 상황이 발생되면 해결할 방법이 없다. 우리를 돕기 위해 합류한 신 사장에게 강력하게 항의할 수도 없다. 문제는 발생했지만 어느 누구도 책임질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답답했다.
다시 무릉에 도착, 사슴비를 보다
포장된 도로를 달려 무릉에 도착했다. 무릉정도면 박물관이 있을 것 같아서 시청으로 갔다. 그곳에서 영어를 하는 시청직원을 만나 박물관 위치를 찾았다. 무당의 용구, 인쇄물 등 민속적인 유물이 많은 박물관이었다.
다섯 대 중 두 대가 차량 수리를 한다며 시내로 들어갔다. 한 시간 이상을 길거리에서 지체했다. 휴대폰이 터지는 곳이니 무조건 수리차량을 기다리지 말고 움직일 수 있는 차량에 모두 옮겨 타고는 녹도문 비석을 찾아서 떠났다.
안동립 회장이 만든 GPS 기능이 있는 지도가 없었다면 이정표도 없고 안내판도 없으며 가이드도 모르는 곳을 찾아갈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오랜 시간 동안 구굴을 뒤져 길을 미리 입력해 놓은 덕분이었다. 포장도로 옆길로 난 초원길을 달리니 언덕위에 커다란 석비가 있었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석비였다.
사슴 문양이 있었다고는 하나 오랜 세월 자연풍화로 인해 윤곽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 서 있는 녹도문 비석 뒤에는 적석총이 있었다. 무덤 주인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인 것 같았다. 산 아래 호수가에는 텐트를 치고 젊은 남녀가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광활한 고원에 맑은 호수가 있고 단 두 사람만이 호수를 바라보며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장면은 아름다웠다. 밤이 되면 더 운치가 있을 것 같았다.
녹비를 답사한 후, 잠시 모여 회의를 시작했다. 어제 저녁 식사 문제로 몽골 기사들과 다투었던 윤 사장이 무릉 공항에서 울란바토르 가는 쌍발기를 예약한 후 기다리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메시지가 왔다. 혼란스럽게해서 미안하고 남은 일정 잘 소화하고 울란바토르에서 보자고 했다.
신 사장은 윤사장을 혼자 보내기 어려우니 통역 저리고를 공항에 보내 설득을 하던지 아니면 함께 울란바토르에 가도록 하자는 신사장의 의견이었다. 나는 일단 대원들 의견을 들어보자며 긴급회의를 가졌다.
여기서부터 울란바토르까지 길은 어떤지? 길은 아는지 등등. 정 안되면 이정표가 있는 포장도로를 따라 가자고도 했다. 잠시 토론 끝에 몽골 기사들과 말이 통하는 저리고를 보내게되면 3일 동안 가는 길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점을 들어 김건철 선생이 강하게 거부의사를 비쳤다.
히말라야 원정대까지 꾸렸던 경험 많은 김 선생은 통역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저리고도 기사들과 대화를 하느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저리고가 다가와서는 자신이 함께 안 가면 기사들이 여기서 일을 끝내겠다고 한다며 거부의사를 밝힌다. 잘 된 일이었다. 통역 없이 그 먼 길을 갈 수가 없다. 그리고 목표 한 코스로 울란바토르까지 가지 않으면 찜찜한 구석이 남을 것 같았다.
윤 사장에게 메시지를 보내 조심해서 잘 가고 울란바토르에서 보자고 했다.
미끄러운 비탈길을 오르다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산 쪽으로 접어들자 큰 강이 나타났다. 차량들이 길게 줄지어서는 표를 끊고 있었다. 부교를 건너기 위해 돈을 내고 표를 끊는 것이다.
강을 가로질러 어설픈 부교가 떠 있고 차량들이 속속 부교를 건넜다. 우리는 잠시 강가에서 휴식을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저리고는 낚시대를 들고는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기사들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어 주었다.
기사들도 어젯밤 일들이 미안했던지 시진을 찍어주겠다며 내가 다가가자 기분 좋게 웃었다. 또 어깨동무를 하더니 함께 찍자고 했다. 이왕지사 함께 답사하는 일행인데 기분 나쁜 감정으로 울란바토르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서로 이해하고 기사들 기분을 띄워주며 즐거운 답사가 되기를 기원했다.
부교가 있는 강가에서 좀 지체한 탓에 서둘러 길을 나섰다. 이윽고 꽤 높아 보이는 산을 넘어야 하는데, 경사가 심한 비탈길이 나타났다. 비까지 내린 까닭에 길이 미끄럽고 움폭 패여 사륜구동도 힘들어 했다. 힘 좋은 차량 3대는 비탈길을 요리조리 미끄러지며 올라섰다. 나머지 한 대는 사륜구동이 아닌 우리 차가 걱정된다며 기다렸다. 사륜구동이 줄을 우리 차와 연결하고는 앞에서 끌고 우리는 모두 내려 땀을 흘리며 뒤에서 밀었다. 이런 광경을 보고는 뒤 따라 오던 다른 차량들이 포기하고는 내려가는 일도 있었다. 우리는 이 길을 넘지 않으면 갈 수가 없는 상황이어서 거의 한 시 간 가량 밀고 당기며 힘을 쓴 탓에 겨우 정상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고갯마루에는 오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작나무 숲으로 에워싸인 산이었다. 죽은 자작나무에서는 상황버섯이 자라고 있었다.
고개를 내려가자 차량 3대가 마을 입구 초원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려고 했다. 마을에서 잘 수 있는 곳도 없어서 난감했다. 울란바토르로 가는 버스가 앞서 가고 있기에 그 버스를 따라가면 큰 마을이 나타날 것 같아 오늘밤은 야영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을을 벗어나자 가도 가도 초원은 끝이 없다. 해마저 뉘엿뉘엿 서녘으로 지고 있었다. 마을이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으니 계속 가기도 어려웠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야산 밑 평지로 차를 몰아 야영지로 정했다.
어둠이 몰려오면서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세찬 바람과 함께 거센 빗줄기를 초원으로 내리쳤다. 비를 맞으며 바람에 날리는 텐트를 붙잡고는 겨우 텐트를 쳤다. 또 힘든 하루를 텐트에서 추위에 떨면서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모두 맥이 빠졌다.
밤이 되자 추위와 함께 바람이 세차게 불어 몹시 추웠다. 이번 답사의 리더인 김석규 단장이 집행부를 불러 놓고는 한마디 했다. 야영을하는 것도 좋고 먹는 것도 부실한 것도 다 이해한다. 하지만 오늘밤은 어디쯤 어느 곳에서 숙박을 한다는 정도는 대원들에게 알려줘야 하지 않느나며 쓴 소리를 했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우리도 처음 와보는 곳이니 어디에 마을이 있는지 도시가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또한 늦게 출발하고 차량끼리 소통이 안 되어서 서로 헤어져 기다리고 찾는 바람에 시간을 너무 낭비해서 제 시간에 마을에 도착하지 못해 결국 야영을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점심만 무릉에서 먹지 않았으면 더 멀리 가서 숙박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흡스콜에 가기 전 무릉에 있는 호텔에 카메라를 놓고 온 것 같아서 찾으러 갔다가 호텔에서 점심을 먹는다며 들어오는 일행을 만났다. 남 회장 왈, 서로 각자 팀원끼리 알아서 점심 먹고 만나기로 했단다. 그래서 우리도 점심을 먹기로 하고는 식당을 찾다가 길가 옆 호텔로 들어갔다. 호텔은 음식이 빨리 나올 것 같아서였다. 간단한 식사를 시켰는데 역시 오래 걸렸다. 역시 이곳도 식사는 그때그때 음식을 조리하기 때문에 시간이 꽤 걸렸다. 식사가 나오는 동안 맥주를 시켰다. 나는 그곳에서 저리고에서 어젯밤 있었던 사태에 대해 잘못된 점을 이야기 해주었다. 윤 사장과는 두 사람이 친한 관계인데 화가 나면 두 사람이 나가서 다투지 그 자리에서 사태를 일으키면 우리는 뭐가 되냐며 말했다. 어제 일은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그리고 절대로 힘이 있다고해서 약한 사람 건들지 말고 가족이 있을 때는 절대로 아버지와 싸우면 안 된다고 말해주었다.
늦게 나온 점심을 먹고 시내를 빠져나가는 외곽에 있는 주유소에 다가가자 차량 3대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려 1시간 넘게 기다린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서울인쇄조합장인 남회장이 제대로 된 음식 좀 먹어보자며 시장 구경을 피하고 호텔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들어온 것이다. 마침 우리를 만나자 일부러 사기치고는 매를 나눠 맞으려고 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는 파안대소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무릉에서 점심을 먹고 떠난 것이 3시가 넘어서였으니 단장으로서 화가 날 법도 했다. 울란바토르에서 이번 행사를 준비하며 신경을 많이 쓴 신 사장이 발끈해서 김석규 단장에게 대들고 말았다. 사막에서 죽을 걸 살려 냈더니만 무슨 소리를 하느냐며 소리를 질렀다. 모두 심신이 지친 상태였다. 오랜 세월 동안 동고동락을 함께 해온 김 단장의 말을 우리 답사대원들은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신 사장은 우리 회원도 아니고 또 자신이 모든 진행을하고 있으므로 여러 가지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던 것이다. 김 단장이 총무인 나하고 안 회장에게 하는 말인데 자신에게 비난하는 것으로 들렸는지 급기야 폭발한 것이다.
나는 김 단장에게 참으라고하고는 텐트 뒤로 함께 갔다. 신 사장은 지금 이 시간부터 더 이상 진행 안하겠다며 소리를 지르고는 자리를 떴다. 신 사장이 여러 가지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 것 같다며 우리가 이해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나와 안회장이 김석규 단장 텐트로 가서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김석규 단장님과는 우리야 피만 섞이지 않았지 형제나 다름없는 끈끈한 유대감으로 뭉쳐 있으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김석규 단장은 거의 모두 일흔 넘은 노인들이 대부분인데 계속 야영을하면 몸이 견디지 못한다면서 지체하지 말고 서둘러 떠나면 잠 잘곳을 찾을 수 있어서 걱정해서 한 소리였다. 사실 내몽골 답사할 때엔 새벽 4시에 일어나 떠나는 적이 한 두 번이 아니고 새벽에 호텔에 도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내몽골은 잠자고 먹을 수 있는 호텔이 있으니 늦게 도착해도 그나마 걱정은 없었다.
아침에 야영지를 떠나기 전 반드시 대원들에게 그날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전달하면 좋겠다고했다. 또 힘든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밖에서는 여러 대원들이 불을 피워 놓고는 밤이 늦도록 서승 원장님의 역사 강의를 듣고 또 들었다.
밤새 비바람이 몰아쳐 몹시 추웠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에 일어났다. 신발을 텐트 안으로 들여 놓고는 겨우 선 잠으로 날이 새기를 버텼다. 여기저기서 춥다는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가려고 지퍼를 내리니 밤새 내린 비와 이슬로 텐트에서 물이 주르륵 흐른다.
초원은 어디가 어디인지 가늠할 수없는 어둠의 바다였다. 불빛 하나 없는 대지의 어둠은 회색빛 먹물을 뿌려 놓은 것처럼 주위를 뒤덮었다. 도시의 불빛에 젖어 오랜 세월을 살아온 나로서는 오랜 만에 만나는 어둠의 세계가 낯설고 답답하다. 불빛이 없으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멍하니 어둠만 바라볼 뿐이다. 모두가 잠든 깊은 적막의 세계, 하지만 초원 어딘가의 게르에서는 사랑이 불타오르고 아기도 태어나고 동물들의 양육강식이 벌어지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 어둠뿐인 초원을 마주하니 갑자기 가슴이 벅차오른다. 어둠에 익숙한 몽골인들에게 초원의 어둠은 생명의 조화이며 지혜의 바다 그 자체였다.
‘내 힘들다’를 거꾸로 하면 ‘다들 힘 내’
아침에 일어나 일회용 북어 국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는 출발을 서둘렀다. 떠나기 전 나는 대원들을 모아 놓고는 구호를 외쳤다.
“내 힘들다”를 거꾸로 하면 “다들 힘 내”라는 뜻이다. 선창으로 내 힘들다를 외쳤고 대원들은 “다들 힘내:라며 사기를 북돋았다.
초원길은 길 없는 길이다. 자동차가 초원을 지나가면 그게 길이 된다. 누군가 앞서 달렸던 길을 따라가면 그게 큰 도시로 가는 주도로이다. 큰 도시라고 해봐야 인구 몇 천에서 1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
1시간 정도 달렸을 때 우리 일행은 언덕과 계곡을 이어 달리는 길로 들어섰다. 초원길 같지 않고 날카로운 돌들이 지상위로 나와서 속력을 낼 수가 없어 기어가듯 했다. 계곡물도 건너야하니 우리가 탄 차가 걱정이 되어 도착해 기다렸다.
어젯밤 초원에서 야영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가봤자 이 험한 길을 야간에 넘기가 쉽지 않고 마을도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궁금했다. 어제 저녁에 보았던 버스가 이 길로 간 것이냐고 물었더니 울란바토르로 가는 주도로라고 말한다. 정말 이해가 안 갔다. 적어도 주도라면 초원길이야 아무곳이나 달려도 길이 생기니까 괜찮지만 언덕과 계곡이 있는 10km 정도의 길을 중장비를 동원해서 잘 닦아 놓아야 되는 게 아닐까! 국민이 무던한 건지 정부가 손 쓸 여력이 없는 것인지 답답했다.
불과 수 십 년 전만해도 말이나 양떼들이 오갔을 그 길은 이제 울란바토르에서 비얀항거르, 알타이, 흡드를 달리는 정기노선 버스가 달린다. 예전엔 보통 3일에서 일주일씩 걸렸지만, 요즘엔 울란바토르에서 카라호름까지 포장도로가 생겨 보통 2틀에서 4일 정도 쉬지 않고 달리면 알타이 산맥을 따라 흡드까지 갈 수가 있다고 한다.
이곳에 도로를 내어 울란바토르에서 유럽까지 직통으로 가는 21세기 신실크로드 ‘카라호름 하이웨이’가 건설될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유럽의 토목기사들이 이곳을 와보고는 코스 중 가장 난코스라며 이곳에 도로를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난감해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자연환경이 열악하다. 여름에 뜨겁고 겨울엔 추운 그 길에 아스팔트가 깔린 하이웨이가 건설된다면 기적이라고들 했다.
이상기온으로 7월에 집중 호우가 내려 다리가 유실되고 개울을 건너던 미니버스가 떠내려가 목숨을 잃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초원에서 흐르는 개울은 언제 어느 때 기상변화로 인해 강으로 변할지 모른다. 우리가 답사하기 전 제일 걱정한 것이 개울이었다. 자칫하면 범람하거나 진흙탕으로 변한 개울을 건너지 못하면 많은 거리를 돌아가거나 아예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4년전 칭기즈칸 고향 갈때도 진흙개울 때문에 고생한 적이 있었다. 실제로 서울에서 안회장과 함께 지도를 보면서 여러 차례 강을 피해 돌아가는 방법을 강구하기도 했었다.
집도 사람도 없는 초원길에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작은 미니버스가 인상적이다. 길도 없는 초원길로 봉고 크기 만 한 미니버스가 비얀홍고르, 알타이, 흡드까지 가는 노선버스라는 사실이 놀랍기만하다. 멀리서 보면 목가적인 풍경이나 타고 있는 사람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바리바리 싼 보따리엔 게르에서 기다리는 가족들을 위한 물건이 있는 것 같아 뭉클하다.
몇 개의 산을 넘고 초원을 달리는 동안 우리 일행은 또 헤어졌다. 우리가 탄 자동차가 사륜구동이 아니어서 길이 좋은 곳에서는 사륜구동보다 훨씬 빠르게 달렸다. 그래서 천천히 가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 안으로 울란바토르에 들어가면 되는 일이어서 각자 알아서 전화가 터지는 울란바토르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적당히 마을이 나타나면 점심을 먹으라며 돈까지 차량별로 전달했다.
한참을 달리자 100여호 남짓되는 마을이 초원에 나타났다. 먼저 도착한 우리 일행들이 식당에 모여 점심식사를 기다리며 밖에 나와 있었다. 한꺼번에 20여명이 모여드니 밥 먹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는 식당을 피해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자동차를 세웠다. 식당은 음료수와 과자를 파는 가게도 겸하고 있었다. 양고기가 섞인 감자볶음을 시켰다. 감자볶음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네 살이나 여섯 살 정도 되는 어린 아이 두 명이 자꾸 다가와 쳐다본다. 나와 안회장이 사탕을 주었더니 받으며 웃음을 머금는다. 경계심을 늦추지 않던 어린 여자아이에게도 한 움큼 사탕을 쥐어주자 입가에 잔뜩 미소를 머금고는 금새 좋아한다. 역시 이곳도 손님이 있어야 그때 조리를 한다. 사진을 찍어주고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서로 친하게 지냈다. 밥을 먹고는 서로 인사를 나누고는 헤어졌다. 차량에 시동을 걸고 막 떠나려는데 여자 아이가 창가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안 회장에게 아이가 손을 흔든다며 소리를 치고는 창문을 열고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아이는 한국이 어느 나라인지 몰랐다. 그냥 낯선 외부인을 태어나서 처음 봤을지도 모른다. 이곳에 관광 올 사람도 사업을 위해 찾아오는 외부인은 없었을 테니까. 인터넷도 안 되고해서 사진을 전해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냥 낯선 사람을 만나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기로 했다. 마지막까지 손을 흔드는 아이의 눈망울이 오랜 동안 뇌리에서 가시질 않았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우편물을 받아볼지 궁금해서 저리고에게 물었다. 대답은 글쎄요다. 아마 큰 도시가 아니면 우편물은 못 받을거라고 대답한다.
우리는 조금 여유 있게 주위경관을 보면서 초원을 만끽하며 달렸다. 다른 기사들 몇 명은 초원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길을 물을 때 ‘타르박’을 샀었다. 저리고는 아쉬움이 크게 남았는지 외딴 게르에 가면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불법이기는 하지만 저리고가 그토록 사고 싶어하니 궁금하기도해서 외딴집을 향해 자동차를 몰았다.
폭이 10미터 남짓한 강가 양지바른 곳에 지은 통나무집을 발견했다. 강물이 바로 옆에 있다보니 터가 좋아 이동하지 않고 사는 것 같았다. 넓은 초원에서 풀을 뜯던 양과 염소 떼들이 강가로 몰려와 물을 마셨다.
집앞에 앉아 있던 청년에게 저리고가 타르박을 살 수 있냐고 묻자 젊은 친구가 씨익 웃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자신들이 총으로 사냥했는데, 이곳은 전기가 없어서 멀리 떨어진 마을 냉동고에 모셔 놨다는 것이다.
한 청년이 타르박을 가져온다며 오토바이를 타고 마을로 떠난 후, 저리고는 낚시대를 들고는 강물을 휘젓고 다녔다. 나와 안 회장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다가 통나무집에 다가서니 안주인이 들어오라고 한다. 난로를 피우고 있어서 안에 들어가니 훈훈했다. 놀랍게도 찬장 안에 그릇들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잘 닦인 그릇들이 찬장 안에 모셔져 있었다. 음식을 조리하는 무쇠 솥 뚜껑도 얼마나 닦았는지 기름기 하나 없이 반질거렸다. 몽골에서 처음 보는 깔끔한 집이었다. 이집 안주인인 부인은 매우 만족스러운 듯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촬영을 하라고 알려준다.
마침 안에는 조금 전 타르박을 흥정할 때 함께 있었던 사내 한명과 조금 어려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열 일곱인가 됐다고 한다. 조금전 타르박을 가지러 떠난 남자의 여동생이라고 한다. 이웃 마을에 사는데 오빠와 함께 놀러왔다고 한다. 그런대 둘이 결혼할 사이라며 애정표현을 서슴치 않는다. 사내가 여자 얼굴에 자꾸 볼을 갖다대니 싫지 않은 표정으로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돌리며 웃는다. 몽골 초원의 젊은 처녀들이 모두 울란바토르로 나가 사는 줄 알았더니 아닌 모양이다. 이곳 바람의 땅 초원에서도 사랑은 무르익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대를 이어 산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두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점심때가 되어 치즈와 함께 우유 섞인 차를 따라 주었다. 주인장은 양고기를 넣어 만든 만두를 기름에 튀긴 호소루를 내놓았다.
1시간 이상 지나자 오토바이에 싣고는 타르박을 가져왔다. 3마리를 가져왔는데 한 마리당 우리나라 돈으로 4만원 정도하는 비싼 큰쥐고기였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괴물쥐로 불리는 ‘뉴트라’처럼 보였다. 저리고는 자신과 형제들이 먹고 한 마리는 아버지께 선물 할 거라며 좋아했다. 몽골 정부는 타르박이 멸종 위기에 처하자 못 잡게 법으로 금지했지만, 보신탕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타르박 고기 좋아하는 몽골인들의 극성을 막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저리고는 트렁크를 열어 짐을 풀고는 그 안에 꼭꼭 숨겨 놓았다. 검문소에서 걸리면 빼앗기냐고 물었더니 경찰에게 1 마리 주면 된다며 신경쓰지 않았다. 첫날 잠깐 먹어 봤는데 별 맛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기름기 많은 쥐고기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일설에 의하면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한 것이 바로 몽골군대 때문이라고 한다. 몽골군이 유럽을 침략할 때 이 타르박에게서 기생하는 세균이 유럽에 전해져 대재앙을 몰고왔다는 속설이 전한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인지 죽은 큰 쥐 ‘뉴트라’처럼 생긴 모습의 타르박을 보니 만지기도 싫었다. 가끔 초원을 달리다보면 양팔을 들고 서 있는 타르박을 볼 수가 있다. 그때는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죽은 타르박을 보니 영 별로였다.
두 시간 정도 초원을 달리니 멀리 자동차가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초원을 벗어나자 포장도로와 만났다. 울란바토르로 향하는 국도였다. 우리 차량은 속력을 내어 울란바토르를 향해 달렸다.
초원에서 지름길을 달려서인지 우리가 먼저 포장도로에 도착했다. 휴대폰이 터져 큰 다리에서 만나기로 하고는 앞서가서 기다렸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들은 칭기즈칸 후손이 사는 집을 들렀다가 산으로 돌아서 오느라 우리 차량보다 일찍 떠났지만 시간이 지체되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아 강가로 내려가 휴식을 취하며 차를 한 잔 마셨다. 저리고는 낚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저리고는 틈만 생기면 낚시를 했다. 원래 몽골인들은 낚시를 하지 않는데, 요즘엔 낚시 동호인들이 점차 늘고 있다고한다. 물고기 요리도 먹는다고 한다.
이윽고 답사대를 실은 차량들이 연이어서 다리를 지나갔다. 우리도 서둘러 짐을 챙겨서는 울란바토르를 향해 달렸다. 포장도로에선 우리 차가 사륜구동보다 속력을 낼 수 있어서 곧 따라 잡아 울란바토르 시내에서 숙소까지는 함께 갈 수 있었다.
몽골 건국의 아버지 스흐바트의 도시
해가 질 무렵 울란바토르에 도착했다. 4년 전 울란바토르의 모습과는 많이 변한 모습이다. 고층 아파트들이 여기저기 서 있고 아파트 공사는 계속되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고급아파트는 15년 전 몽골에와서 식당업으로 큰돈을 번 우리나라 사람이 짓는다고 한다.
울란바토르에 있는 아파트는 우리나라 소도시에 버금갈 만큼 비싼 편이다. 울란바토르는 아파트와 게르, 호텔과 빌딩이 섞인 특색 없는 도시로 변하고 있었다. 여전히 도로는 차량으로 붐비고 도로공사로 인해 먼지와 소음이 진동했다.
수도 울란바토르는 도로가 좁고 자동차가 많아 출퇴근 시간에는 여지없이 정체현상이 나타난다. 현재 몽골인구는 280만명 정도이며 그 중 절반 이상이 수도인 울란바토르에 모여 산다. 나머지는 카라호름, 율리아나, 흡드 등 대도시에 흩어져 산다. 또한 이들 가운데 4~6만명 정도가 우리나라에서 산업근로자로 일을 하고 있다.
몽골은 아이가 태어나면 정부가 땅을 주는데, 울란바토르 부근에 땅을 받으려고 출생신고를 미루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고등학교 까지는 무상교육이며 굶는 사람이 없는 나라가 몽골이다. 척박하지만 넓은 초원에서 짐승을 길르면 최소한 굶지 않고 먹고는 살기 때문이다.
몽골에서도 유목생활을 그만두고 도시로 나와 막노동이나 이런저런 일자리를 찾아 떠도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울란바토르에 건설붐이 일자 너도나도 유목민에서 도시 건설 노동자나 식당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이들 중 여러 가지 사정으로 알콜 중독자나 도시 빈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들은 울란바토르에 집을 얻어 살거나 돈을 주고 땅을 빌려 게르에서 생활하기도 한다. 심지어 가정이 무너진 아이들은 몰려다니며 구걸하거나 땅밑 하수도에서 생활하는 아이들도 많이 있다고 한다. 초원에서 유목생활을하면 먹고사는데 지장 없지만 정든 곳을 떠나 도시로 나온 것을 보면 고생스럽기는 해도 도시가 주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한국식당에서의 만찬
우리 일행은 도심지 한 가운데에 있는 작은 규모의 보야그 호텔에 투숙했다. 4년전 투숙했던 보야그 호텔에서 하나 더 운영하는 곳이라고 한다. 작은 호텔이었지만 시설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4년 전 투숙했던 보야그 호텔은 지금은 투룸 방 하나당 10만 원정도 된다고 하니 물가가 무척 오른 것 같다. 당시엔 4만 5천원 정도였다. 그땐 도르닉 나르스 답사갈 때 이불까지 빌려줄 정도로 인심이 후했었다.
저녁 식사는 한국인 식당으로 정했다. 4년 전 왔을 때 소갈비찜과 김치찌개, 된장찌개를 참 맛있게 먹었었다. 주인은 전주사람으로 식재료를 모두 전주에서 공급해 온다고 자부심이 대단했던 기억이 난다. 음식을 시키고 주인을 찾아 4년 전에 울란바토르에 왔을 때 이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며 인사를 했다. 다시 찾아줘서 고맙다며 기뻐했다. 식당은 여전히 붐볐고 장사가 잘 되는 것 같았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식당에서는 천교수님께서 한국어의 뿌리인 알타이어 계통에 관한 강의를 해주셨다. 많은 대원들이 국어학자인 천교수의 강의를 심도있게 들었다. 대학 은사인 천교수님과 함께 알타이 답사를 다녀올 수 있어서 내 개인적으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교수님께서는 사업은 안하고 시도 때도 없이 어딜 그렇게 쏘다니냐며 혹시 애인이 있는 게 아니냐며 부러움 반 걱정 반을 해주셨다. 때마침 전화가 오셔서 알타이 간다고하자 나이든 사람도 갈 수 있느냐면서 피해가 안 간다면 데려가 달라고해서 이번 답사에 합류하셨다.
오랜 만에 맛있게 한국음식으로 저녁을 먹고는 술도 한잔씩 돌리고는 초원을 빠져 나온 기념과 함께 몽골에서의 마지막 밤을 마무리했다.
아침 9시 10분 경 호텔을 나선 우리는 수흐바트르 광장을 찾아갔다. 4년 전과 변함이 없는데, 다만 칭기즈칸 광장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칭기즈칸 광장 정면 중앙에는 국회의사당 겸 혁명기념박물관이 있다. 입구 정면에는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중앙의 칭기즈칸과 오른쪽에는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 왼쪽에는 원나라를 세운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 동상이 있다.
칭기즈칸은 몽골을 크게 성장시킨 아들과 손자를 거느리고 근엄한 표정으로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광장에는 결혼식을 마친 신혼부부들이 친구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주변에는 울란바토르에서 가장 번화가이며 오페라하우스, 의사당, 국립박물관 등이 즐비하다.
칭기즈칸 광장 중앙에는 말을 타고 손을 들고 있는 몽골 혁명의 아버지 수흐바트르 동상이 서 있다. 청나라 세력을 물리치고 이곳에서 환영인사를 받는 도중 타고 있던 말이 오줌을 갈겼다고한다. 이에 사람들이 길조로 여겨 말뚝을 박아 표시를 해놓았다가 훗날 그 자리에 수흐바트르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청나라 세력을 쫓아내고 1924년 7월 11일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사회주의 혁명을 선포하고 몽골인민정부를 수립한 것을 기념해 1925년부터 이곳을 수흐바트르 광장이라고 불렀다.
스흐바트르는 제2의 칭기즈칸으로 불릴 정도로 몽골 혁명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청나라와 백계러시아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독립군을 조직해 싸웠으며 후에 직접 국방부장관이 되어 황제를 도와 몽골 독립을 위해 애쓴 인물이다. 그는 안타깝게도 30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칭기즈칸 이후 몽골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다.
수흐바트르 광장에서 본 몽골의 뼈아픈 역사와 독립전쟁
북경에 진출해 세계를 다스리던 몽골제국은 점차 세력이 약화되더니 결국 주원장이 건국한 명나라에게 패하고 말았다. 명나라를 피해 그들의 본거지인 초원 깊숙이 달아나 다섯 개의 소왕국으로 겨우 명맥을 이어오던 몽골은 청나라 때 완전히 속국으로 전락했다.
근세에 들어와 청나라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독립을 쟁취하려고하자 청나라는 몽골에 주어졌던 자치권을 몰수하고 성(省)으로 편제를 바꿔 직접 통치하기에 이른다. 이에 소왕국의 왕들은 법왕 젭준 탐바 8세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나선다. 원래 티베트 출신인 법왕은 17세기 전설적인 승려지도자 자나바자르 8세의 환생으로 알려져 5살 때부터 몽골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으며 자랐던 인물이다. 몽골은 여전히 티베트 불교가 성행하고 있으며 청나라에 의해 승려가 왕권을 이어왔다.
몽골 독립의 정신적 지주인 법왕은 1911년 황제로 추대되어 복드칸 정권을 수립하고 그해 12월 독립을 선언한다. 그러나 청나라 위안스카이의 강력한 항의로 1915년 러시아와 청나라, 몽골이 모여서 협정한 ‘카흐타 조약’에서 몽골은 청나라에 귀속된 나라로 결정되어 몽골의 독립의지는 무력화되고 만다. 더구나 1919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 몽골이 다시 독립을 표명하자 청나라의 군벌 중 하나이 서수쟁이 몽골을 무력 침략해 통치를 하는 바람에 고초를 겪는다. 몽골의 혁명가들은 독립의지를 불태우며 러시아에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러시아는 10월 혁명이후 백러시아 잔당과 내전을 치르고 있었고, 4년 전 카흐타 조약을 내세워 몽골이 청나라 영토임을 결정했으므로 몽골 독립을 돕지 못한다.
1920년 러시아에서 적군이 승리하여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이에 러시아 귀족 운게른 백작은 적군을 피해 백러시아 잔당들을 이끌고 몽골을 침략한다. 그리고 몽골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군대를 무찌르고 임시 수도로 삼아 몽골을 통치하기에 이른다. 운게른 남작은 공포통치를 통해 몽골인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약탈을 서슴치 않는다.
이태준의사의 몽골 독립운동과 나담축제
당시 연희의전 2회 졸업생으로 김필순과 함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열혈 청년 이태준의사가 운게른 백작의 작당들에게 체포되어 목숨을 잃는다. 그
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몽골로 들어가 ‘동의약국’을 차려 몽골에서 ‘붓다의사’로 불렸다. 당시 몽골은 국제도시로서 중국, 인도, 티벳, 부탄 등 상인들이 몰려들어와 성병이 만연했다. 특히 손이나 몸을 씻으면 안 된다는 티베트 불교의 영향으로 몽골인들은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며 살았다. 서양의술을 펼치는 이태준의 처방은 효과가 있었고 한국병원으로 불렸던 동의약국은 아침부터 길게 줄을 서야 겨우 처방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소문은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 이태준은 황제의 주치의가 되었다. 당시 황제는 고질적인 눈병과 성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태준의사가 주치의로 임명되어 신임을 얻었다.
이태준은 이역만리 몽골에서 군관학교를 세우려고 했다고 전한다. 당시 위구르, 티베트, 카자흐 등이 독립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기에 이곳에서 조선 독립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몽골 독립군과도 긴밀한 협조를 하였었다. 외국인 신분이어서 백러시아 잔당의 눈을 피할 수 있었기에 독립자금을 전달하는 일도 했다고 한다. 결국 백러시아 잔당은 일본첩자라는 누명을 씌워 그를 처형했다고 한다. 울란바토르에 이태준을 추모하는 기념관이 세워져 있어서 많은 한국인들이 기념관을 찾는다.
몽골을 통치하던 러시아 백군의 잔당 우두머리 운게른 남작은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가볍게 여겨 함부로 대하고 장난삼아 처형을 일삼았다. 이에 격분한 몽골인듣은 더욱 독립의지를 불태우며 러시아 혁명정부만이 자신들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여긴다.
당시 독립군을 이끌고 있던 수흐바트르는 법왕 젭준 탐바 8세의 밀서를 들고는 러시아 혁명정부를 찾는다. 당시 러시아 혁명정부는 잔당인 백러시아 세력들을 곳곳에서 제거하느라 온 힘을 쏟고 있던 중이었다. 코앞에 백러시아 잔당이 몽골을 침략해 다스리고 있으니 눈에 가시였다. 그곳에서 언제 불씨가 다시 살아나 러시아로 쳐들어올지 염려스러웠다.
러시아 혁명정부는 몽골의 독립을 원하는 세력이 공산주의에 우호적임을 알고는 붉은 군대를 몽골에 파병하였다. 이에 힘을 얻은 수흐바트르가 이끄는 독립군은 1921년 운게른 남작이 이끄는 백계러시아 잔당들을 몽골에서 영원히 쫒아내었다. 1921년 7월 11일 몽골은 독립을 쟁취하였고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7월11일부터 3일 동안 몽골 최대의 축제인 ‘나담 축제’가 울란바토르에서 열린다.
또 다시 물 건너간 몽골 독립과 공산주의 혁명
몽골 독립군은 백군 러시아 잔당은 쫓아내어 독립을 쟁취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몽골 곳곳에 중화민국 군벌이 여전히 주둔하고 있었다. 이에 소련과 중국은 다시 협상을 시작했으며 ‘몽골은 중국의 분리될 수 없는 한 부분이다.’라는 조약이 체결됨으로서 다시 몽골은 중국민국에 1924년 5월에 귀속되고 만다.
하지만 입헌군주제로 몽골을 다스리던 법왕 젭준 탐바가 사망하자 1924년 11월 몽골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사회주의 국가가 된 것이다. 몽골은 소련과 중국의 협상에 의해 중국에 귀속된 상태였지만 여전히 중국이 아닌 소련의 통제를 받는 기이한 형태를 가진다. 이때 헌법을 제정하고 수도를 울란바토르(붉은 영웅)으로 바꾸는데 이는 몽골 독립을 위해 애쓴 수흐바트르를 기념하기 위한 이름이다.
몽골은 1928년 소련의 코민테른을 따르면서 부유층의 재산을 몰수하더니 결국 하층민, 승려를 비롯한 온 백성의 재산을 모두 국고화 시키면서 백성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소련의 도움으로 청나라를 몰아내고 중국을 견제할 수 있었던 몽골에 처음 소련 군대가 주둔한다. 소련은 1937년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몽골 침략을 저지한다며 소련군을 몽골에 주둔시키며 내정간섭을 이어간다. 이때 약 2년에 걸쳐 몽골 독립을 위해 싸운 영웅들을 색출해 부르조아라는 누명을 씌워 처형하며 몽골을 소련 방식대로 다스렸다. 성인 남자 30%에 해당하던 승려들에게 온갖 누명을 씌어 처형하거나 유배를 보내고 해산시켰다. 전체성인 남자 15%인 3만 명이 이 기간 동안 처형당했는데 대부분 승려였다.
과거 청나라는 몽골인들의 용맹한 기질을 꺾고 나약함을 기르기 위해 티베트 불교를 널리 전파시켰고, 장자를 뺀 나머지 자녀들은 반드시 일정기간 승려가 되는 법을 만들어 철저히 따르도록하며 몽골을 다스렸다. 근세기에 이르러서는 종교를 아편으로 여기는 공산주의 원조 소련에 의해 또 다시 몽골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승려들을 처형함으로써 종교 말살정책과 더불어 몽골인의 독립정신을 꺾으려는 철저한 계획에 따른 행동이었다. 울란바토르에서는 매일 승려들이 처형되었고 이런 장면을 몽골국민들이 나와서 보게끔 강제 동원됨으로써 감히 공산주의에 대항하지 못하도록 탄압정치를 시작한 것이다.
1939년 만주서쪽 만주접경지역인 ‘할힌골’에서 일본군과 소련군이 우발적인 충돌로 인해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때 몽골군이 참여했다. 무려 5만 명의 사상자가 난 할힌골 전투에서 승리한 몽골군은 이때부터 소련군에 편제되어 세계 2차 대전에 참여한다. 1945년 일본의 패망직전 소련의 참여와 더불어 만주를 공략하는 태풍작전에 몽골군이 참여하게 된다. 순식간에 만주를 점령한 몽골군은 그 여세를 몰아 소련군과 함께 한반도 개성까지 진격하였다. 이에 우리에게는 뼈아픈 삼팔선이 그어지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945년 2차 대전 종전을 눈앞에 둔 연합국들은 이익을 보장 받기 위해 ‘얄타회담’을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나라의 문제는 논의조차 되지 않았고 7월 포즈탐 회담에서 남북한 식민통치가 결정되었다.
얄타회담에서 몽골은 소련의 입김으로 현재의 독립상태를 유지한다는 확인 받았다. 당시 중국의 장개석은 국·공 내전으로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몽골 총선을 조건으로 독립을 수용하였던 것이다. 이에 몽골은 1945년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독립을 의결하였고 이듬해 소련과 중국은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아무튼 1907년부터 시작된 몽골의 독립운동은 1945년 완전 독립하면서 38년간의 긴 독립투쟁의 역사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몽골 또한 강대국 논리에 따라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내몽골과 외몽골로 분할되는 사실상 분단국가로 남게 되었다.
근세기 최고의 실수 몽골의 분리 정책
세계에서 가장 넓은 지역을 복속시켰던 원나라는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에 멸망해 북경을 떠나 자신들이 본거지인 초원으로 옮겨갔다. 명나라가 초원 깊숙이 자리한 외몽골까지 쳐들어오지 못했으므로 여러 개로 사분오열되어 소왕국 체제로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17세기 초 만주고원에서 나라를 세운 만주족(여진족)이 명나라를 정복하기 전인 1623년 오늘날 내몽골을 먼저 점령한다. 내몽골을 먼저 점령한 것은 지리적으로 만주는 내몽골과 이어져 있으며 외몽골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고비사막으로 분리되어 자연스럽게 몽골과 국경을 이루는 완충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내몽골은 명나라 수도 북경과 가까워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켜 중원정복의 교두보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만주족은 8년 후인 1644년 명나라마저 멸망시키고 청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1696년 오늘날 외몽골마저 완전히 청나라에 복속 시켰다.
그때부터 청나라는 내몽골과 외몽골을 분리해서 내몽골은 직접 청나라가 다스렸고, 외몽골은 승려를 황제로 임명해 황제가 몽골을 다스리는 정책을 펼쳤다. 내몽골에는 한족들을 대거 이주시켜 살게 했으며, 외몽골 초원에서 내몽골로 이주하는 것을 철저하게 막는 통치방식을 펼쳤다. 이때부터 외몽골과 내몽골로 분리되었던 것이 결국 2차 대전 이후 중국은 청나라가 직접 다스렸던 내몽골 통치주권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을 것이고, 러시아가 이를 인정해 결국은 내몽골과 외몽골은 나뉘게 되었으며 오늘날 몽골과 중국의 국경선이 되고 말았다.
몽골과 중국은 각자 영토가 둘로 나눠진 것에 대해 억울한 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중국은 청나라가 완전히 몽골을 통치했는데도 불구하고 당시 국내 사정에 의해 러시아와의 협상을 통해 외몽골 독립을 인정해 준 것에 대해 크게 땅을 치고 후회한다. 근대 역사에서 중국이 행한 가장 큰 실수라며 언젠가는 영토회복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동북공정을 마무리해야하는 중국으로서는 칭기즈칸과 원나라마저 자신들의 역사로 둔갑시키고 있는 와중에 가시 같은 존재인 외몽골 지역의 몽골 독립을 인정해 준 것이 못내 못마땅한 것이다.
게다가 외몽골지역은 철광석, 금, 은, 석유, 회토류 등 어마어마한 지하자원이 묻혀있다. 청나라 말기 어수선한 틈을 타 몽골이 독립하는 바람에 어마어마한 지하자원마저 빼앗긴 꼴이 되었으니 그 어찌 분통하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편, 내몽골은 청나라를 멸하고 한족 중심의 나라를 세우려는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한족 물 타기 정책으로 현재는 80%의 절대다수가 한족으로 채워져 있다. 원주민인 몽골족은 17%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오랜 시절을 중국역사로 살아온 그들의 의식도 상당히 중국식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남북 몽골인들 간에는 언어가 동일하며 그들 간에는 상당한 동족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종주의 극우파가 존재하며 어떤 계기가 생기면 중국정부와 분란을 만들 소지가 있다. 내몽골 답사를 다니다보면 초원의 유목민의 경우 중국어를 모르는 사람들도 상당하다는 것이 이를 입증해준다.
이와 반해 몽골로서는 청나라 말기의 혼란과 더불어 중국이 국공 내전이 한창일 때 내몽골을 영토로 편입시키지 못한 기회를 잃어버린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피눈물을 흘린다. 이제는 분단국가로 전락해 버린 현실을 바라보며 이 또한 땅을 치며 통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중국 근대사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것 몽골 독립인정
13억 인구를 가진 중국은 아직 영토가 비좁다고 생각한다.
중국은 청나라 때부터 줄곧 통치해온 몽골 독립을 쉽게 인정해 준 것에 대해 가장 후회스러운 근대 역사의 실수라고 말한다. 이를 만회하기라도 하듯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자마자 1950년 한국전쟁에 참여하더니 그해 10월에는 티베트를 무력으로 침공하여 영토 확장에 열을 올렸다.
중국은 몽골을 놓고 러시아와의 협상에서 주도권을 빼앗긴 사례를 분하게 여겼다. 따라서 이번 티베트 침공은 치밀한 작전에 의해 이루어졌다. 중국은 티베트를 침공한 후, 1954년 인도와의 협상을 통해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라는 것을 인정받았다. 양육강식에 의해 주변 국가들의 이해타산에 따라 한 나라의 운명이 자국민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이처럼 갈라지는 것이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완성하기 위해 지금 주변국들과 역사적 마찰을 일으키면서까지도 관철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만큼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영토가 좁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긴 국경선으로 인해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분쟁이 일어날 소지가 많다. 중국은 아이혼 조약을 비롯해 최근까지 끊임없이 러시아와 국경 문제를 놓고 계속 협상하고 있다. 사실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여한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는 만주지역을 확고히하겟다는 목적의 하나였다고 볼 수도 있다. 신의주까지 점령한 미군이 만주를 공격할 것 같은 판단에 따라 만주를 지키기 위한 조선전쟁참여였다고 말한다.
또한 소련은 미국이 요구한 3·8선 긋는 것에 쉽게 합의해 주었는데 미국조차 놀랐다고 한다. 소련은 무엇보다 만주와 북중국 영토에 대한 이해타산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선 문제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앞으로 연해주 문제가 중국과 러시아의 가장 큰 영토 분쟁으로 남아 있다.
북한은 조중군사협력에 의해 어느 때든지 중국 군대가 북한에 주둔할 수 있도록 군사협정이 체결되어 있다. 이것이 한반도 통일에 큰 장애가 될 것이 분명하다.
변함없는 간등사 불상
8척 크기의 간등사 좌불을 보기 위해 갔다. 4년 전에도 갔다가 밖에서 큰 불상만 보고 왔었다. 스님이 출입구 까지 따라와 안에 들어가 불상 봤으니 입장료를 달라고 했다. 건성으로만 봤다 끝까지 안 봤다는 등 재미있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실랑이를 벌였다. 입장료가 얼마 안되어서 그러면 정식으로 주고는 밖에서만 보았으니 다시 보겠다고 해서 다시 간등사 불상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 관리인이 그대로 있는 것 같아 재미있었다.
이번에도 사진을 찍으면 돈을 내야 했다. 우리나라 돈으로 5천 원 정도였다. 사진이 별로 필요치 않아서 사진작가인 윤기자만 촬영했다. 우리 대원들은 불상을 앞뒤로 돌다가 관리인이 사진 찍는 사람에게 돈을 받는 틈을 타 휴대폰 셔터를 눌렀다. 그러자 언제 보았는지 관리인이 돈을 내라며 다가왔다. 정식으로 카메라로 찍은 것도 아니고 휴대폰으로 촬영한 것이니 돈을 내기는 좀 그렇다고 했다. 잘 나오지도 않았을 것 같으니 차라리 사진을 지우겠다며 휴대폰 화면을 돌려 삭제를 했다. 관리인도 웃고 나도 웃으며 이번에도 사진 때문에 간등사에 와서 한바탕 기분 좋게 웃었다.
사진: 간등사
12시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식집에서 갈비탕과 김치찌개로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갈비탕은 정말 일품이었다.
원래 몽골인들은 고기를 덩어리로 잘라 조리를 하기 때문에 질기고 맛이 없다. 우리나라 사람이 부위별로 잘라내 끓인 갈비탕은 고기가 신선해서인지 정말 맛있었다. 또 한 가지 세계에서 몽골 소고기가 최고 품질을 자랑한다. 생로병사에 나온 것을 살펴보면 인간에게 치명적인 오메가 6라는 것이 있는데, 옥수수 사료를 먹고 자란 소에서 나온다고 한다. 미국, 호주, 유럽 어느 지역이나 사료를 먹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존재하는 오메가 6가 오직 몽골인들에게서만 나오지 않는다고한다. 그 이유는 몽골은 옥수수 사료를 먹이지 않고 거칠은 초원에서 자라는 풀만 그것도 뿌리채 먹기 때문에 몽골 소고기가 가장 좋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알고 전라남도에서는 오랜 전에 몽골에서 소를 양육하려고 시도를 한 적이 있다. 당시 100마리 정도 키워주는데 우리나라 돈으로 한 달에 10만 원 정도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어려운 요인이 있어서 결국은 추진하다가 중단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소고기를 수입해 오면 어떨까 생각도 해본다. 소고기 수입하는 친구에게 물었더니 고개를 흔든다. 소고기 수입은 구제역이나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하는 나라에 한해서만 고기 수입이 허락된다는 것이다. 몽골, 중국, 러시아 모두 이런 문제에는 신경 쓰지 않는 나라여서 절대로 통과도 못하고 더더욱 수입도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육포였다. 마트에 가보니 몇 가지 육포가 나와 판매되고 있는데, 글쎄다 한국인들이 육포를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다. 와인 샾에 갔더니 최고급 한우 육포라며 파는 것이 있는데 시장 형성이 어떨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다만 식품의학과 교수에 의하면 우리나라처럼 소고기를 끓여먹고 구워먹는 것은 영양가가 30% 밖에 섭취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고기를 잘라 육포로 만들어 먹거나 샤브샤브를 해 먹는 게 제일 좋다고 한다.
두 번째로는 케시미어 제품을 만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재료가 풍부하고 좋은 몽골 케시미어는 세계에서도 알아준다. 하지만 아직 브랜드가 없어서 제값을 못 받고 있을 뿐이다.
점심을 먹고 가벼운 선물을 사기 위해 케시미어 전문 매장을 찾았다. 몽골에 유통되는 제품들은 거의 중국산이다. 유목생활은 하다 보니 생산시설이 거의 없어서 모든 생필품은 중국과 외국에서 수입한다. 4년 전에 고무제품 샌달 하나가 한국 돈으로 4천원이었으니 물가가 우리나라와 비슷할 정도로 비싼 편이다.
역시 몽골에서 가장 살만한 물건은 염소털이나 낙타 털, 야크 털로 만든 캐시미어 제품이다. 도로변에는 양털이나 짐승 가죽을 내 놓고는 가죽과 털을 팔러오는 유목민들을 불러들인다.
울란바토르에 있는 케시미어 매장은 질도 좋은 편이고 값도 싸서 몽골 여행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낙타털로 만든 조끼와 염소털 스카프를 샀다. 그리고 몽골 마지막 황제가 살았다는 궁으로 갔다. 케시미어 매장 옆에 있는 절이었는데 그게 궁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그저 작은 이름 없는 사찰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마지막 황제가 살던 궁궐이라고 한다.
당시 몽골 황제는 승려 신분이었으므로 사찰 형태의 궁궐이었다, 왕이 거처하며 집무를 보았던 이층 양옥에는 당시 사용하던 침대를 비롯한 물건과 동물을 전시해 놓은 미니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마지막 몽골 황제의 궁궐을 뒤로 하고는 칭기즈칸 공항으로 이동했다. 3시 40분 여객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 도착했다. 이제 아름다운 대한민국으로 가는 구나 생각하니 한편으로 아쉬움이 전해졌다.
특히, 4년 전 가이드를 해주었던 철멍을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이 모두 컸다. 4년 만에 답사회에서 몽골에 간다는 소식을 현지에 있는 신 사장이 어렵사리 울란바토르에서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다행히 전화번호는 그대로여서 통화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골에 있어서 울란바토르에 갈 수 없다며 미안함과 아쉬움을 전했다고 한다. 10박 11일 동안 몽골의 외진 곳을 다녀본 우리는 이해할 수가 있었다. 우리가 다녀왔던 몽골 초원의 어느 게르에 ‘철멍’이 살고 있으니 쉽게 도시에 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울란바토르에 도착하면 전화를 한다고 신사장이 그렇게 전했다는데 마지막 저녁 일정이 바쁘고 신사장이 전화번호를 갖고 있고 정신이 없어서 그만 전화조차 못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서울 행 여객기를 타고서야 성냥갑처럼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울란바토르 시내가 내려다보이자 그제서야 철멍에게 전화 하지 못한 아쉬움과 미안함이 겹쳤다. 어쩌면 전화 한 통 안하고 몽골을 떠난 사람들에게 서운했을 것 같다.
칭키즈칸의 나라를 떠나며!
여객기가 고도를 높여 울란바토르를 벗어나자 곧바로 끝이 보이지 않는 대초원이 나타났다. 넓은 초원에는 우리가 다녔을 길들이 마른 건천처럼 초원에 이리저리 나 있다. 마치 메마른 황토고원에 오토바이가 달려간 듯한 자욱이 선명하다.
짐승을 모는 목동이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이 내려다보인다. 자동차 보다 말이 더 유용하게 쓰이는 나라임이 실감난다. 인구도 별로 없고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이런 메마른 초원에서 칭기즈칸은 어떤 리더십으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을까!
나는 잠시 기내에서 칭기즈칸 인물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세계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을 탄생시킨 칭기즈칸의 나라 몽골. 몽골은 작지만 빠르고 힘이 좋은 말과 말린 말고기 육포, 칼 한 자루를 들고는 세계를 제패했다. 초원에서 태어나고 자란 칭기즈칸 군대는 간편한 식사와 이동이 간편한 게르 생활을 하면서 세계 정복을 빠르게 진척시켰다.
또한 칭기즈칸 군대가 세계를 쉽게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유럽과 중앙아시아 이란까지 초원으로 이루어진 '초원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초원길을 따라 수많은 대상들이 낙타에 짐을 싣고는 동서양을 오갔던 길을 따라 칭기즈칸 군대가 세계정복의 야심을 키운 것이다.
처음부터 칭기즈칸이 세계 정복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다. 동-서 문명을 하나로 융합한 징기즈칸의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호흠 즉 '하라하라(태양)'로 통했다
목축을 위해 이동하면서 살아야 하는 북방 초원세력은 서로가 필요한 것들을 교류를 해야 먹고 살 수가 있었다. 그래서 초원문화의 특징은 동-서양문화가 융합되어 있다. 칭기즈칸은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국가 호라즘(이란)과 교역하기를 원해 사신을 보내 교역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호라즘왕은 사신들이 호라즘을 염탐하러 온 첩자라고 죄를 뒤집어 씌어 그들이 갖고 있던 재물을 모두 빼앗고 죽여 버렸다. 소식을 들은 칭기즈칸은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함께 도전으로 받아 들여 전쟁은 시작되었다.
칭기즈칸은 하루에 500km를 달리는 몽골기마군단을 이끌고 호라즘정벌에 나섰다. 그때, 항복하고 몽골에 협력하는 세력은 살려주고 저항하는 세력은 처참하게 살육했다. 칭기즈칸이 전쟁을 도발했던 것이 아니라 호라즘이 도발을 했기 때문에 응징을 가한 것이다. 지금도 이란의 도시 곳곳에는 칭기즈칸 군대가 침공할 때 무기를 사용한 흔적들이 성문에 남아 있다. 호라호즘 정벌하려면 중앙아시아를 거쳐가야 한다. 우즈베스키탄의 사마르칸트 키르키스탄을 지나면서 칭기즈칸은 주변국가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낸다.
몽골군은 세계 정복길에 나서면서 끈질기게 저항하면 처절하게 파괴하는 잔인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순순히 항복하면 그들의 문화와 전통, 종교를 그대로 인정하였다. 그래서 40만도 안 되는 병력으로 출발했고 70년 만에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면서 그들 군대를 몽골군에 편입시켜 세계정복의 야망을 달성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100년 동안 세계를 다스렸다.
결국 유럽과 아시아가 교류하는 시대를 연 것이다. 자신들만의 독점력은 결국 벽을 만들고 분열을 부추기고 전쟁을 부추기게 되는 것이다. 칭기즈칸은 이러한 벽을 과감히 부수어 버린 것이다.
그는 친족 관계보다는 개인의 충성도와 능력에 따라 책임을 나눠주며 세력을 키웠다. 정복한 나라의 인재와 앞선 무기, 전술, 문화, 기술을 철저히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삼았다.
하지만 현재의 몽골은 칭기즈칸의 리더십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몽골제국과 로마제국이 오래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관용의 정책이다. 타종교와 타민족의 문화를 인정해주는데서 부터 출발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지배당한 나라에서는 독립전쟁 보다는 몽골과 로마라는 거대한 제국에 편승해 함께 큰 나라를 세우는 다민족 다 국가 형태를 띠었던 것이다.
칭기즈칸을 내세워 자존심만 내세울게 아니라 과거를 발판삼아 현재와 미래를 준비하는 현명한 몽골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오늘날 세계는 정복전쟁을 통해 식민지와 노예제도를 만들지 않았기에 오랫동안 번성했던 로마제국과 몽골제국의 리더십에 대해 21세기의 새로운 리더십으로 연구하고 있기도 하다.
엄청난 지하자원의 보고
여객기에 내려다보이는 대초원에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상당한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석탄, 철, 석유와 같은 지하자원은 유목 생활하는 몽골인들에게 불필요한 자원이었으므로 그동안 관심을 갖지 못했다. 또한 생산기반시설이 없고 도로가 건설되지 못해 개발이 늦춰지고 있다. 중국의 내몽골처럼 몽골 고비사막에는 어마어마한 석유매장량이 존재한다고 한다. 최근에는 중국 국경지역에 정유시설을 세워 몽골에서 사용하고 남은 석유는 중국에 수출한다고 한다. 이제 석유 수출국 대열에 들어선 것이다. 머지않아 몽골은 지하자원 부국으로 부상할 것이 틀림없다. 이때를 대비해 우리나라가 몽골과 우호관계를 정립해 좋은 동반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몽골인들은 오랜 유목 생활을 통해 그들만의 독특한 풍습이 전해 내려온다, 내 아이 남의 아이를 가리지 않고 키워준다. 주로 집안의 결정권은 여자가 하는데, 요즘 들어 이혼율이 높다. 딸이 도회지에 나가서 아이를 낳아 고향으로 돌아와도 아버지가 누구인지 묻지 않는 풍습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초원에 이동식 게르를 하나 더 마련하면 딸 아이 가족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에 가족이 늘어나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칭기즈칸을 낳은 어머니가 임신한 상태로 고향에 오다가 다른 부족 자무카에게 납치를 당했다. 곧이어 칭기즈칸을 낳았는데 에수게이는 “이 아이도 내 아이다”라고 선언하고는 잘 키워 몽골제국을 세우는 큰 인물이 되었다. 이러한 아이에 대한 전통은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 내 아이 남의 아이를 가리지 않고 잘 키운다.
모든 생필품을 거의 중국에 의존하지만 자신들의 영토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감정이 좋지 않다. 중국은 몽골인들에게 무비자 혜택을 주지만 몽골은 여전히 중국인들에게는 비자를 제시하고 있다. 여전히 몽골은 중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 러시아 또한 60여 년 동안 자신들을 지배하며 거만하다는 이유로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이런 점에 비해 한국은 몽골 반점을 함께 지니고 있는 한 핏줄이고, 문화와 풍습이 비슷한 점이 많아서 좋아하는 편이다. 더구나 한때 7만에서 10만 정도가 한국에 나와 근로자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딜 가나 한국을 알고 한국인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지금은 몽골이 개발의 붐이 일어나 몽골로 많이 들어가는 바람에 4만 명 정도가 한국에서 근로자로 일을하고 있다고 한다.
4년전 월드컵을 울란바토르 서울공원에서 맞이했다. 서울공원에는 텐트형 주점이 생겼고 우리나라의 경기가 펼쳐졌다. 저녁을 그곳에서 먹기로하고는 가보니 사람들이 맥주잔을 앞에 놓고는 열렬히 한국을 응원하고 있었다. 어느 나라가 승리할 것인지 쪽지에 표시해 내면 승리한 쪽을 맞추면 돈을 지불해주는 내기도 재미있었다. 한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몽골인들이 월드컵 응원가를 부르며 환영해주었다. 그만큼 한국과 몽골은 인연이 깊다고 여긴다. 또한 북한과는 우리나라보다 더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한다.
몽골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엔 전쟁고아 300명 정도를 받아 주었다. 병이 들어 일찍 세상을 뜬 단 한명의 북한 어린이만 빼고 모두 몽골에서 교육을 받고 성장하여 북한으로 돌아갔다. 해마다 이들이 몽골에 찾아와 행사를 벌이며 우의를 다지고 있다고 한다. 특히 전해오는 몽골의 음악을 현대적 음악으로 집대성한 인물이 당시 전쟁고아였던 사람으로서 김일성 종합대학 음악교수를 역임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 교수가 몽골에 찾아와 몽골 음악을 현대적으로 정리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몽골 음악이 약간 북한 음악의 성격이 짙다고해서 한바탕 웃었다.
남북한이 모두 몽골과 깊은 인연이 있으므로 이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몽골과 함께 윈윈전략으로 세계로 나아가는 동반자 역할을 준비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징기스칸의 명언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 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 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 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질 않았다.
배운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 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 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나는 징기스칸이 되었다.
사진:고구려 고분을 닮은 적석총의 유구는 말머리나 다리뼈가 주로 나온다.
사진:초원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아르항가이 지역에 있는 석관묘. 이미 부장품은 도굴되었다.
사진 설명
소금을 채취하는 호수
호수에 물이 말라버리면 소금을 채취한다. 몰고 고원이 바다였음을 입증하는 호수이다.
어워(오보)
우리나라 서낭당과 같은 성격으로 돌무더기를 따라 왼쪽으로 세 번을 돌며 기도한다. 어워는 오보라고도 부르는데 일종의 이정표 역할을해서 길손들이 어워를 보고 방향을 잡아 길을 나선다.
야크와 낙타
서부 알타이로 갈수록 말이나 양, 염소보다 낙타와 야크가 많다. 평균고도가 1600미터 정도여서 고산지대에서만 사는 낙타나 야크를 키운다.
고비사막
고비에서 모랫바람이 불면 중국에서 장사꾼이 온다는 속담이 있다. 아시아에서 제일 큰 모래사막이며 황토고원으로 이루어진 사막이다. 고비사막은 중국쪽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뉘어져 있다. 몽골인들은 중국에서 부르는 내몽골을 외몽골로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