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지지 않는 구국혼
--- 석주 이상룡
민족의 운명은 흩날리는 진눈깨비처럼 한 치 앞도 구분키 어려운 나날이었고, 백성은 일제에 나라를 뺏겨 신음하고 있을 때 구국의 일념으로 선구자의 땅 만주로 내달린 사람이 있었다.
백발이 희끗희끗한 53세의 적잖은 나이에 50여명의 식솔을 이끌고 북풍을 거슬러 얼어 붙은 눈물의 강 압록강을 건넜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멀리 경북 안동에서 추수를 마치고 강이 얼기를 기다려 혹한의 모진 바람 맞서며 그렇게 고국을 등지고 있었다. 그 사람은 석주 이상룡이었다. 그는 모진 추위보다 나라 잃는 설움에 북받쳐 분노를 삼키며 울고 또 울었으리라.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겨,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결코 조국에 돌아오지 않겠노라’며 시린 입술 깨물며 의지를 다지고 또 다졌으리라.
민족 해방을 위해 한시도 두 다리 뻗고 자지 않았던 사람, 조국 독립을 위해 결코 돌아오지 않는 화살이 되었던 사람, 뒤따라오는 후세를 위해 그 어떤 슬픔에도 결코 굴하지 않았던 사람, 일생을 조국 독립의 전당에 몸바쳤던 사람, 그가 바로 석주 이상룡이다.
애국의 터전 임청각
안동시 법흥동 태백산에서 발원한 낙동강을 굽어보는 전망좋은 언덕에 자리한 임청각. 이곳은 수많은 역사적 사실을 간직한 채 민족의 운명과 함께 그 부침을 거듭해 온 곳이다. 임청각, 이곳은 만주에서 빛나는 무장투쟁이 있게 한 기반을 닦았으며,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닌 석주 이상룡의 생가이자 보물 제 182호로 지정된 고성이씨 법흥종택이기도 하다.
이곳 임청각은 이땅 독립운동사에 빛날 기라성 같은 인물들과 관련 깊은 곳이다. 한말 경북 의병의 선봉장이자 석주의 외삼촌이었던 권세연을 위시하여, 석주의 아들과 사돈간이었던 의병장 왕산 허위, 애국시인이자 의열단의 투사였던 이육사․이원기․이원조 형제들도 종고모가인 임청각을 드나들며 민족혼을 키웠고, 석주의 처남 백하 김대략과 월송 김형식 부자 그리고 안동에서부터 만주까지 일생을 함께 한 투쟁의 동지 일송 김동삼 그 모두가 임청각을 벗삼아 민족의 내일을 불밝히고 독립의 기치를 드높인 곳이 아니던가.
이런 유서깊은 항일의 터전을 시샘한 때문이었을까? 일제는 1930년 중앙선 철도를 놓으면서 임청각을 철도 선로반원의 합숙소로 쓰고 그것도 모자라 임청각 앞마당으로 철로를 놓으니 이는 임청각이 일제에겐 얼마나 눈에 가시 같은 곳이자 안동인에겐 불타는 항일의 터전이었음을 새삼 말해 주고 있음이다.
“내 고향 안도에 이상룡선생 같은 분과 임청각이 있다는 게 못내 자랑스럽지요. 살다가 괴로운 일이 생기면 이곳을 찾아 그 어른의 높푸른 지조를 되새기며 마음을 다잡곤 합니다. 그 어른이 50이 넘은 나이에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향하던 그 심정을 차마 누가 헤아릴수 있겠어요?”
임청각을 둘러보고 있던 안동 북후면에서 왔다는 강이원(31)씨의 말이다.
독립의 터전을 닦노라 고단했던 한평생
석주 이상룡. 그가 아흔아홉칸짜리 대저택 임청각에서 태어난 것은 나라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1858년이었다. 그는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은 영남의 대유학자 서산 김흥락 문하에서 사숙한다. 이후 이십여 년 동안 수많은 책들을 탐독하여 석학이라 불리웠다. 특히 정치와 법률, 그리고 실용학문에 주력하여 높은 안목과 경륜을 지녔고 천문․지리․수학에 이르기가지 박학하였다. 그러나 물밀 듯이 밀려오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조선왕조의 붕괴라는 세기말의 격황은 서책에만 골몰하던 이상룡을 역사의 격랑으로 몰았다.
1895년 을미사변은 조선유림을 뒤흔들어 놓았고, 그는 서른 여덟의 나이로 의병대장인 외삼촌 권세연을 따라 표류하는 역사의 한복판에 서게 된다. 이후 일제의 한반도 침탈이 본격화되자 일송 김동삼, 동산 류인식 등 안동지역 우국지사들과 의기 투합해 민중계몽운동에 뛰어든다.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해 회장이 되고, 고루한 안동 유림 사회에 천지개벽할 공화주의자의 시국 강연회를 여는 등 교육운동에 매진하다 한일합방으로 해산을 맞는다.
그는 유림 출신이면서도 한말 개화파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루소․몽테스키외․베이컨 등을 탐독해 유교 인습을 비판했다. 그런가 하면 서양문물에만 빠져있는 여는 개화파 지식인들과는 달리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후일 그는 만주에서 교육사업과 항일무장투쟁을 하면서 ‘유림’의 굴레를 벗고 상당한 사상적 변화를 겪게 된다. 이렇듯 이상룡은 영남의 한 이름있는 유학자로 출발하였으나 제국주의 침략과 반봉건적인 변혁의 시대상에 부응하여 유림의 개혁과 청년 교육에 매진하게 된다.
선구자의 땅으로 떠난 사람
1910년 일제가 조국 강토를 유린하게 되자 이상룡은 조국을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 각지를 내왕하며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한다. 그때 서울에서 <신민회>를 이끌던 석오 이동녕․우당 이회영 등이 사람을 보내어 <신민회>가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만드는 전략을 세우고 있음을 알린다.
이들과 뜻을 함께 하기로 한 이상룡은 이듬해 1911년 정월 주위 유림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수많은 가산과 선영을 뒤로 한 채, 모든 기득권을 내던지고 인척 오십여 가구를 인솔하여 돌아올 기약 없는 망명길에 오른다.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와 / 내 살을 에는데
살을 깎이어도 참을 수 있고, / 창자가 끊어져도 슬프지 않다
그러나 이미 내 밭 내 집을 빼앗고 / 또 다시 내 처자를 넘보니
차라리 이 머리를 잘릴지언정 / 무릎 꿇어 종이 될까보냐」
이상룡이 망명길에 오르면서 지은 이 시(詩)처럼 때는 정월이라 추위는 살을 도려내었으니 그때부터 시작되는 풍찬노숙의 길이었다. 구들목에 앉아 손자의 재롱이나 보고 있을 백발이 흩날리는 53세의 나이에, 차마 필설로 말하기 어려운 고난의 길을 헤쳐 나가기 시작한다.
만주로 망명한 이상룡은 일송 김동삼․우당 이회영․석오 이동녕․성재 이시영 등 여러 동지들과 뜻을 규합해 <경학사>를 창건한다. ‘밭 갈고 공부한다’는 이름 그대로 정착사업과 청년교육을 내세운 <경학사>는 만주지역 최초의 항일단체였고 이상룡은 최대 사장으로 추대된다. <경학사> 부설 <신흥강습소>는 나중에 <신흥무관학교>로 이어지는데 여기에서 배출된 이들이 후일 만주 항일무장투쟁 진영의 주역이 되니 그가 한 일들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경학사>는 그 사이 <부민단>을 거쳐 <한족회>라는 이름의 큰 단체로 바꿘다. 또 1920년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출범하면서 <한족회>는 산하 군사조직으로 <서로군정서>를 거느린 채 상해 임시정부와 손을 잡게 된다. 그 후 이상룡은 <서로군정서> 초대 독판(최고 책임자),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 등 중책을 수행하게 된다.
이후 이상룡은 일제와의 피어린 전투 속에서, 때로는 지각없는 이들의 분규를 수습해 가면서,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독립운동 단체들을 총괄해나간 만주지역 무장투쟁의 최고책임자로 한 생을 마쳤다. 이는 실로 이상룡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피눈물로 점철된 끝없는 고행길이었다.
58년만에야 고국에 돌아온 유해
망국의 한을 안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만주로 향했던 석주 이상룡. 그는 꿈에도 그리던 조국 해방의 환희를 보지 못한 채 1932년 75세의 일기로 만주 길림성 서란현 소고전자에서 숨을 거둔다. 병세가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고 동생 상동이 달려와 고향으로 모셔 가겠다고 하자 그가 단호히 뿌리쳤다고 한다.
“조국이 해방되기 전에는 데려갈 생각을 마라. 조선이 독립되면 내 유골을 유지에 싸서 조상 발치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유해는 흑룡강성 아성시 취원장의 묘소에 묻히었다. 그러다 1990년 9월 유족과 정부관리에 의해 <신흥강습소> 소장인 그의 동생 이봉희, <정의부> 중앙위원인 조카 이광민 부부,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한 당숙 이승화 등 일가(一家) 유해와 더불어 실로 58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동작동 국립묘지의 임시안치소를 거쳐 생가인 임청각에 머무르다 1990년 10월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독립된 조국의 땅에 묻혔다. 독립된 조국에 묻히길 바랐던 그의 약속이 45년만에야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고단했던 이상룡의 한 생은 그 뿐만이 아니라 그의 전가족이 떨쳐 일어선 항일의 길이었기에 더욱 빛나는 것이다. 이상룡의 종숙인 승화, 두 동생 상동․봉희, 그리고 외아들 준형, 사위, 조카, 손자, 며느리에 이르기까지 그의 일가 모두가 항일전선에서 끝까지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한 실로 엄청난 고난의 길을 걸었다.
<대한협회> 안동지회부터 만주 <서로군정서> 때까지 부친과 함께했던 외아들 준형은 혁명기 공산당 만주성 반석현위원회 책임을 맡기도 했으나 부친 서거 후 귀국한 뒤 1942년 일제의 싱가포르 함락 소식을 듣고 자결한다. 손자 병화는 만주에서 노동운동과 청년운동을 하다가 해방공간에서 남로당 요직을 맡기도 했으나 1952년 전쟁통에 세상을 떠났다.
“그 어른 참 대단한 분이지. 만주에서 독립운동 할 때 군자금이 없어서 사람을 시켜 고향집인 임청각을 팔려고 내놓기까지 했어. 그래서 보다못한 문중에서 군자금을 마련해 주고 그랬어. 임청각, 그건 본시 99칸집이었제. 근데 임진란때 10여칸 소실되고 또 일제가 철도 놓음시로 36칸 철거해 버렸어. 지금이사 50여칸밖에 남아있지 않는 반쪽짜리 집이야.”
이상룡의 후손으로 고성이씨 종친회 회장인 이종기씨의 말처럼 석주 이상룡은 일신의 영달이나 안락 따위는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오로지 조국해방을 위해 시린 바람, 눈보라속을 헤치며 거친 만주 벌판을 내달렸던 사람이다. 지칠줄 모르는 투쟁의지로 한 생을 고스란히 독립의 전당에 헌신했던 사람이다. 빼앗긴 조국 강토와 고향을 그리며 머나먼 이국에서 목놓아 통곡했을 이상룡을 떠올리며 <만주출정가>를 읊조려 본다.
그 멀고 어두운 세월이 흘러 / 산하의 이름없는 들꽃도 잊었노라 / 그 넓은 대지를 날고 또 날던 / 산하의 기러기도 서럽게 울었노라 / 아아아 내조국 산천을 등지고 건너온 압록강 / 북풍을 거슬러 떠나는 길 / 목메어 부르는 불망의 조국 / 이목숨 다바쳐 싸우리라 해방의 해방의 그날까지... //
- 1997년, 글 : 이한용